가난하여도 성실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잠 19:1)

2001년 말 아랍의 부호하나가 유럽의 화랑들을 쌩쌩 돌아다니며 걸작들을 낚아채 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최고의 금액을 지불하면서 말입니다. 그 부호가 경매장에 나타나면 다른 수집가들은 아예 값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에게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한계가 없었습니다. 한 수집가는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이 수수께끼의 부호는 누구일까 ” 나중에 밝혀졌는데 그는 ‘사우드 빈 모하메드 알타니나’ 라는 카타르 왕족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 좀 있다고 카타르를 갈 때 기죽지 않으려고 비즈니스클래스를 탔습니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 비즈니스클래스에 탄 사람은 자기 혼자였습니다. 혼자 생각하기를 카타르 사람이라면 비즈니스 클래스를 탈 수 있을 것 같은데… 카타르 사람들은 어디 있는 걸까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카타르 사람들은 비행기 맨 안쪽 퍼스트클래스에 앉아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비즈니스클래스는 안탑니다. 카타르 사람들은 일을 안 합니다. 비행기 승무원, 택시 운전수,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인도나 외국사람들입니다. 심지어는 자신들을 재판해 주는 판사도 외국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카타르 사람들은 불만이 많습니다. 정부는 국민을 더 행복하게 해 줘야한다고 돈을 줍니다. 하지만 카타르는 문학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술 작품을 사들일 수 있지만 정작 자신들의 문화는 없습니다. 돈으로 문화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아이티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세계제일의 부자 나라라는 카타르는 지원 안 했습니다. 이슬람 국가들은 지원 안 했습니다. 중국을 비롯한 공산국가도 지원 안 했습니다.

미국이 아이티를 지원하기 위하여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지원계획을 설명하는데 미국의 클린턴과 부시 전 대통령이 양옆에 서서 발표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 이것이 미국의 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클린턴과 오바마는 민주당이지만 부시는 공화당입니다. 누구보다도 부시는 공화당 색이 짙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거국적인 차원에서 마땅히 힘을 합할 때는 힘을 실어 줄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개인의 이익과 당의 이익을 뛰어넘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은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이 행복해 보이는 꼴을 참고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가난하다고 다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났습니다. 입술이 패역한자가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불평을 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욕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용서와 관용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정치학자 론 잉글하트는 “민주주의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수립할 확률이 훨씬 더 높다.”라고 했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편을 들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시 10:14)
“18 그는 왕에게라도 무용지물이라 하시며 지도자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19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아니하시며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의 낯을 세워주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라”(욥 34:18-19)
하나님은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시 35:10)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신 15:7-8)
여러분! 제 생각에는 아마 지금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죽을 고생을 하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람들에게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까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가난해도 손을 펴서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24:12-14에 보면 가난한 자의 전당물을 가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명령은 이방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자는 보호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 곧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추수 때에 다 모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신 24:19-21, 레 19:9-10). 또 밭의 곡식을 벨 때 밭 모퉁이까지 베지 말고 객을 위하여 남겨두어야 합니다(레 23:22).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장에 가보면 저녁이 되면 가게문을 닫을 때 팔다 남은 것을 잘 포장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가져가라고 쌓아둡니다. 끝까지 다 팔지 않습니다. 에누리해서 팔지 않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좀 더 쓰고 남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유 앙겔리온)을 제일먼저 전하려고 오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부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뭐가 있겠습니까 주식이 올랐다는 것이요. 부동산 값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요. 이런 것이 기쁜 소식일지 모릅니다.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더 관심이 많고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때로는 돈 한푼 없어(마 17:27)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셔야 했고 또 마지막에 묻히실 무덤조차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자에게 내리신 말씀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명령들을 지켰고 부족함이 없다고 한 젊은 관원에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라” 는 명령을 주셨습니다(마 19:21). 삭개오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써 예수님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눅 19:8-9)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가난한 자들과 동고동락했습니다(행 2:44-45, 4:32-35).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갈 2:10)고 했습니다. 늘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였고 힘써왔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약 2:2-3) 악하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가난해 대한 성구는 245개가 나오는데요 제 마음에 제일 와 닫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바로 잠언 21:13절입니다. 함께 봅니다.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子曰 獲罪於天(자왈 획죄어천)이면 無所禱也(무소도야)니라. “하늘에 죄(罪)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가난이라는 단어의 종류가 5개정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신약에서 가난이라는 말을 사용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아노’라는 단어에서 번역한 ‘프토코스’인데 이사야 61:1에서 말한 “억눌린 가난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국가나 군주가 억압하여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만든 것을 말합니다.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의 하나인 아이티, 몰도바, 아프가니스탄, 북한 등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는 바로 이러한 환경으로 가난하게 된 자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심령이 가난하기보다는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심령이 가한 자들입니다. 사회의 불합리한 제도로 희생되는 사람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세상의 어떤 제도와 법으로 인하여서 졸부도 생기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100분의 1이라도 희생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편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사람들의 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이유 없이 자기가 게을러서 악하기 때문에 오는 가난이 있다고 말합니다. “의인은 포식하여도 악인의 배는 주리느니라”(잠 13:25), 또 너무 많이 잠을 자서 가난이 오게된다고 합니다. 잠언 6:9-11 “9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10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11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고 합니다. 또한 너무 성급한 계획으로(잠 21:5), 쾌락을 사랑하여(잠언 21:17) 또는 탐욕과 도박으로(잠 28:22) 가난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만일 이런 이유로 가난하게 된 자라면 “심령이 가난한 자” 가 아닙니다. 무조건 가난하다고 하나님이 그 사람 편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러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 34:9)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부자가 되면 교만해질 확률이 높고, 남을 나보다 낮게 여기는 마음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렇다고 너무 가난하여서 도둑질을 하게 되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우리에게 표준 답안 같은 것을 제시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8-9)
미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사회의 낙오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위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갑자기 화려한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스위스 사람들은 갑자기 돈을 많이 번 사람을 말하면서 마치 무슨 끔찍한 병에 걸린 사람처럼 말합니다. 스위스는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 행복한 나라 중에 항상 상위에 있는 나라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제일 존경하는 직업은 시인이나 작가입니다. 아이슬란드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책 없이 사느니, 헐벗고 굶주리는 편이 낫다.” 행복의 척도가 돈에만 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사야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고 했습니다. 이사야가 이 말씀을 전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처지는 비참했습니다. 그들은 70년 동안의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바벨론에서부터 만리 길을 걸어 귀환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더구나 2세들에게는, 비록 그것이 예루살렘을 향한 귀환 길이라 할지라도, 사막과 광야를 끝없이 걸어야 하는 고통이었기에 자연히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러분! 옛날에 이렇게 광야 길을 간다는 것은 자기가 살던 곳의 집과 일터를 다 버리고 떠난 것입니다. 그저 가져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짐 보따리 한 두 개와 가축 몇 마리뿐입니다. 오늘날처럼 온라인으로 은행에 저금해 놓고, 카드가지고 떠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이들의 길은 고달프고 힘들고 가난한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불평하고 원망하느냐 너희가 힘들고 지친 줄 내가 잘 안다. 그러나 어치피 그 머나먼 길을 너희들의 힘만으로는 걸어갈 수 없는 것 아니냐, 힘든 가운데에서도 오직 여호와를 바라고 기다리면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새 힘을 주실 것이다”(사 40:27이하 참조). 하셨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고 출애굽 때의 사건을 두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출애굽 때와 비슷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머나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 만에 돌아오게 되는 이스라엘에게 말합니다. 이 광야는 시나이 반도의 광야가 아니라 아랍의 광야입니다. 그러나 광야 길은 같습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이 말씀은 광야에서 지친 이스라엘 사람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제 여호와를 앙망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만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광야의 길은 힘들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갑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축복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헤롯 궁전과 사탄의 제의를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의는 백부장이나 타는 그런 전차가 아니라 당나귀를 타는 것이었습니다. 왕궁에서 탄생하신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집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구약의 안식일과 안식년은 사람과 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7년마다 땅을 묵혀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해야”(출 23:11, 레 25:2-7)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7년 후에 종들을 풀려나고(출 21:2-6), 빚은 면제되었습니다(신 15:1-18).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의 말씀을 메시야 되시는 예수님과 우리에게 주십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하신 일 중의 하나가 위로해 주시는 겁니다. 우리도 위로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요 위로는 역시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국이 선교하기 좋은 것은 우리는 가난한 시절을 살았거든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안쓰럽습니다.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가난이 가난으로 마무리된다면 그 얼마나 불행합니까 가난하지만 예수님 만나서 그 누구보다 행복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거룩한 목표를 세우는 겁니다. 세상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무슨 돈 좀 벌어보겠다고 증권소식이나 부동산 가격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매달려 있는 겁니다. 예수께 매달리세요. 새벽기도에 전진하세요. 전도의 목표를 세워보세요. 하나님께 드릴 헌금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하세요.

요한이 우리에게 하는 마지막 말씀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