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교통하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지난 월요일에 대전에 있는 목원대학교에 다녀왔습니다. 길은 알지만 먼 길이라 네비게이션을 켜고 갔습니다. 자주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연결이 잘 안 되는 겁니다. 충청도까지 갔는데도 연결이 안되고, 어쩌다 연결이 되면 충청도 말로 GPS연결됐드래유! 길 찾아 볼까유! 그러고는 또 잠잠합니다. 같다가 돌아오는 길까지 GPS가 하는 일이란 계속 GPS연결됐드래유! 길 찾아 볼까유! 하다가 말았습니다. 그런데 GPS연결 안 되고 자동차가 서있는 그림이 더 가관입니다. 글쎄 네비게이션 지도 위의 제 차 모양이 도로 위를 달려야 하는데 멈춰있으니까 길을 딱 막고 있더라고요. 국도에서도 고속도로에서도 길 가운데 턱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하고 연결이 안되고 자꾸만 끊기면 내 길도 못 찾고 남의 길까지 턱 막고 있게 됩니다. 모든 원리가 교통의 원리입니다. 의사 교통이 안되면 멀어집니다. 단절됩니다. 부부간에도 대화를 해야 가까워집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지속적으로 교통하지 않으면 멀어집니다. 경제도 움직여야 합니다. 교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돈은 돌라고 돈이라고 하잖아요. 피도 돌아야 합니다. 순환이 되어야 합니다. 바닷물도 움직여야 합니다. 파도가 쳐야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교통이 안되면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하는 겁니다. 늘 하나님과 대화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경영학의 대가, 드러커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사 경영에 실패하는 원인의 60%는 사원과 사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교통)이 잘 안 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부부 상담자인 퀴베인이라는 분도 이렇게 말했다.
“이혼하는 원인의 50%는 부부 사이의 교통이 원활하지 않은 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범죄 심리학자의 주장도 이와 같습니다.
“범죄자의 90%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나 교제 등 교분관계가 드물고 원만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런 전문가들의 통계로 볼 때에 커뮤니케이션이 인간 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절대적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멀리하는 생활, 교회에 자주 나오지 않는 생활은 하나님과 교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정해진 예배참석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찬송하는 것은 쓸데없는 의식적인 일의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을 원활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잠 3:32) 라고 했습니다. 패역한 자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고 정직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마음의 시선(視線)을 향하고 있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진정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까?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이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죄와 죄인과 섞일 수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어둠이 빛과 공존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미움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보고 어두워 지라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다. 우리가 빛이 되어야 합니다. 어둠은 사탄이 주는 겁니다. 미움도 사탄이 주는 겁니다. 우리가 빛이 되고 거룩하게 되는 길을 찾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1977년에 만든 <미지와의 조우 The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는 그보다 두 해 전에 나온 <조스 Jaws>와 함께 스필버그를 세계적인 감독 대열에 올려놓은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외계인과 만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다양한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고 무엇인가에 이끌려 사막의 한 장소로 모여드는데 이미 그곳에서는 과학자들이 모여 외계인과 교통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사람이 외계인과 교통하기 위해 애쓰는 장면입니다. 소통수단은 가락이 있는 다섯 개의 소리입니다. 과학자들은 똑같은 소리로 계속 신호를 보내는데 마침내 외계인도 같은 소리로 응답하고 결국 우주선의 문이 열리고 외계인이 데려갔던 사람들이 걸어 나오는 장면은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사람과 외계인 사이에 제한적으로나마 소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들끼리의 소통도 참 어렵습니다. 언어가 다르면 도무지 통하지 않습니다. 또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어는 알아들어도 생각이 다르면 통하지 않습니다. 교통하려면 결국 두 가지 같아야 합니다. 사용하는 언어와 생각입니다. 언어가 같아도 생각이 다르면 통하지 않습니다.
부부사이가 좋아지려면 대화하라고 했더니 ‘대 놓고 화를 내는 것’이 대화인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화가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교통은 얼마나 어려울까 싶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알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사람을 아는 것이 구요.

하나님은 우리를 힘으로 복종시키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여러분 종교는 어떤 대상과 철학을 만들어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복종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그런 식으로 굴복시킬 것 같으면 너무 쉽습니다. 당장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빌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방법으로 딱 한번만 보여주면 아마 다 가서 빌 걸이요? 태양을 한동안 비춰주지 않는다든가. 행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도록 한다든가 강력한 허리케인을 만들어 바다와 육지를 뒤집어엎으신다 든 가 그 방법이야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사람의 모든 죄를 대속 하시기 위해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뭐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방법으로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려운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시고 대화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원래 대화를 하려면 한쪽에 참아야 합니다. 아무도 참지 않으면 대화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참아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크고 무서운 분입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도록 만드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둘째 아들이 자기 유산을 미리 달라고 아버지를 졸랐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유산을 물려주었더니, 그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다 까먹고 죽도록 고생을 합니다. 돼지가 먹는 열매도 제대로 못 먹는, 그야말로 돼지보다 더 못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의 머슴으로 살아도 이보다 더 잘 살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좋아서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살진 송아지 잡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아들이 그 고생을 안 해도 되는데, 괜히 고생을 했습니다. 집만 안 나갔어도 그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요. 아니 집을 나갔더라도 돈이 떨어진 후에 바로 돌아왔어도 그 고생 안 해도 되는데! 원인이 무엇입니까? 역시 교통의 문제였습니다. 그는 평소의 아버지의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하여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돌아왔을 때, 맏이에게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재산을 다 창기와 떨어 먹고 돌아온 놈에게, 죽도록 때리고 두 대 더 때리고 내 쫓아도 시원찮을 놈을 살진 송아지 잡고 잔치를 베푸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서 “나 집에 안 들어간다. 나는 이때까지 아버지 밑에서 열심히 일했는데 친구들과 먹으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안 잡아줘 놓고, 저런 녀석에게 송아지를 잡아줘! 나 집에 못 들어간다.”
맏아들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아버지와 그렇게 함께 살았으면서도 아버지와 교통이 안 됩니다. 함께 산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통이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아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고, 그저 열심히만 일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일 하는 것 중요합니다. 다른 일하면서 사는 것보다야 백 번 낫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혹 큰아들처럼 일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신앙 생활합니다. 예배도, 기도도, 봉사도, 맡겨진 사역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지쳤습니다. 쉬고 싶습니다.” 하며 한숨 푹푹 쉬며, 죽을상으로 갑니다.
교통입니다. 아버지와 통해야 합니다. 마음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와 교통이 이루어져야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엌에서 일하는 마르다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일은 좀 천천히 해도 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의 교통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을 잡고 창세기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읽어 나가다 보니까, 딸 둘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동침을 하여 아이를 낳지 않나,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속여 다른 사람에게 주지를 않나, 아들한테 시켜서 힌 밀가루를 칠해 손을 내밀어 큰아들이라고 속이는 어머니가 없나 정말 요지경입니다. 결국 그 사람은 성경을 집어던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지저분한 종교는 믿지 않겠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전혀 의사교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요지경속에 인간들, 도저히 구제 받을 수 없는 인간들, 그렇게 약하고 고민이 많고, 실존에 문제에 부딪혀 몸부림치는 인간들, 바로 그 속에 오셔서, 그들의 죄를 대속 하시고, 용서하여 구원하시는 위대한 사랑의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보면 전혀 거룩하지 않은 책입니다. 하나님 이야기만 나오면 거룩할 겁니다. 그런데 죄인인 인간의 탈을 벗기고 꾸밈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옵니다.

성경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르치는 책입니다. 자녀교육이 무엇입니까? 교통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과 교통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옛날에 있던 교회에서 장로님 아들이 고3학년이 되니까 교회에 안나오는 겁니다. 제가 전도사 때인데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이 우리 아들이 일류대학 가려고 준비한다고 주일날도 교회에 안 나와도 좋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저를 비교하는 듯 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하고는 부류가 다르다는 거지요. 저는 정말 기겁했습니다. 아니 주일은 쉬어야 하는데? 주일까지 공부하고 교회 나오지 말라고 하다니요?

제가 컴퓨터선교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교통의 문제입니다. 어른들이 컴퓨터를 모르니 아이들과 교통이 되질 않습니다. 그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교통하려면 막힌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방해합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데 막힌담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 아닙니까? 이것을 허물면 됩니다.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3-14)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교통하려면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뜨거운 기도의 준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루 이틀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곳에 모여서 적어도 열흘 동안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부족하여 열흘 동안 기도한 후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말씀에 순종하여야 주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함께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행1:14절에 보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 성도들은 헌신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드려 기도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라고 해서 바쁜 일이 없었겠습니까? 바쁜 일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시간을 드렸습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