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안에서 하나 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1-6)

어느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하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항공기 안에서 댁의 보청기를 주었습니다. 그러니 고객 서비스 카운터에 와서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보청기의 주인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그 주인은 보청기가 없으니 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구가 없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도구입니다. 귀를 열게 하시는 영입니다. 듣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듣고 싶어도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듣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하면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어둠에 빛으로 나온 것입니다. 가뭄에서 단비의 축복으로 온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축복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고 치료받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은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지은 죄도 우리 스스로 회개를 못합니다. 끊임없이 핑계 대고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셔서 눈물이 앞을 가리고 통회하면서 죄에서 탈출하도록 우리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때에 따라 우리에게 봉사의 길도 열어주십니다. 이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차이는 보통 때는 잘 모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과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다릅니다. 낙심할만한 어려움이 닥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려움이 닥쳐도 절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더욱 사모합니다. 성령이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5:5) 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하는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어떤 장애나 한계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문제이든지 간에 나름대로 모두 장애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약 조건들이 우리가 예수를 찾게 만듭니다. 너무 모든 것이 잘 되는 것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잘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에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은 모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병자들이었습니다.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 한사람 왔다가 그냥 갔습니다. 다 자기 잘난 맛에 삽니다. 그러나 부족한 사람은 다릅니다. “주여 도와주소서!, 나를 도우소서, 우리가정을 도와주소서!, 우리교회를 도와 주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너무 풍족한 가운데서는 발전하지 못합니다. 인류역사를 보세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때에 신기술개발이 많이 되었습니다. 전쟁을 해야하니까 그 때 비행기, 잠수함이 다 만들어졌습니다. 아무 어려움이 없는 가운데서는 발전하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많이 부르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 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헨델 작곡, 로웰 메이슨 편곡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헨델의 노래에서 힌트를 얻은 로웰 메이슨이라는 미국 사람이 작곡한 것이 뫘다고 합니다. 메이슨은 헨델의 노래를 엄청나게 들었습니다. 헨델의 음계는 오르내림만 사용해서 노래를 만드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단순한 음계지만 박자를 달리해서 탁월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내림음계 ‘도시라 솔파 미레도’ 는 단순한 음계입니다. 그런데 박자를 달리해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가 되었습니다. 제약조건에서도 이와 같이 훌륭한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지원을 다해주면 절대로 탁월한 창의력은 나오지 않습니다. 제약 조건 속에서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러한 제약조건들을 극복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부족한 것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채우려고만 하지 않고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너무 움켜지는 것이 아니라 손을 펴려고 합니다.

오늘본문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는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혔습니다. 자유의 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서신은 놀랍게도 당시의 에베소교회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바울도 제약이 많았습니다. 자신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몸으로 채운다는 각오로 고난도 기뻐했습니다. 자기에 닥친 상황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분들은 거의 모두가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된 것을 다 남의 탓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 이렇게 못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탓해서 남는 것 하나 없습니다. 내게 유익을 주지 않습니다. 사람을 보지 마세요. 주님을 보세요. 다시 일어서세요.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세요.

바울이 여기서 간곡히 전하는 것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되기가 참 힘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이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나눕니다. 싸우게 합니다.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하나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조직이나 제도를 가지고 하나가 아닙니다. 교파를 가지고 하나가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를 한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형제, 자매입니다. 영적인 형제입니다. 육신이 형제는 부모로부터 피를 나누어 받았습니다. 영의 형제는 예수님의 피를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즉 예수님의 피로 한 형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 속에 계신 성령은 한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식을 하는데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라는 겁니다. 하나되는 예식입니다. 결혼식은 부부가 하나되는 예식이지만 성찬식은 예수와 우리가 하나되는 예식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십니다. 성령이 들어오십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성령님 때문에 우리 모든 성도는 하나입니다. 형제, 자매입니다.

성령으로 하나가 됩니다.
교회가 하나라고 할 때 성령으로 하나가 됩니다. 성령께서 모든 성도들 안에 계십니다. 각 사람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인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지금 우리 성도에게도 계십니다. 또한 과거의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게도 임했습니다. 오순절 이후에 주를 믿는 모든 사람들 안에 성령께서 거하십니다. 우리 속에 사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왜 이토록 중요합니까? 그리고 왜 하나되라고 하신 것을 강조합니까? 성령의 역사는 하나되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이고 사탄은 싸우고 찢어지게 하여 나누어져서 멸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지키라고 하십니다.
성령으로 하나된 교회를 지키라고 당부하십니다.
오순절 이후 이제 교회는 성령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를 믿는 모든 무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입니다. 이제는 교회를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나된 교회를 지켜가라고 합니다.

한 가정을 지켜나가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제목이 ‘아버지’ 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중년의 공무원이 암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친구 의사의 진단을 받고 몇 개월 남지 않은 생을 정리하는 내용의 줄거리입니다. 아버지는 가족들의 살아갈 걱정으로 자기가 죽고 나면 아내가 빵집을 하면 되겠다 싶어 빵 가게를 구합니다. 자식들의 남은 대학 공부를 걱정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삶입니다.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것도 가족들 때문이지요. 내가 쓰러지면 고통 당할 가족들 때문에 단단히 준비하지요. 이 소설에서는 남자들의 무거운 짐과 어려움을 잘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죽는 자신도 두렵지만 더 난감한 것이 가족들이지요. 가족들을 위해 묵묵히 참고 견디며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게 하는 소설입니다. 가장으로서 남자들이 짊어지는 무거운 짐과 애환을 그린 소설입니다. 아버지가 가정을 이끌어 나가고 지켜나가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아내가 가족들을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육신의 부모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가정의 파탄을 막기 위해 참고 견디고 헌신합니까? 왜 입니까? 힘든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가정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갖는 마음도 동일합니다. 성도가 갖게되는 마음입니다. 성도는 교회가 잘되길 바랍니다.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성도는 교회를 지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성도라 해서 왜 이 땅에서 고통이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몸이라 해도 역경과 시련이 있습니다. 크고 작건 간에, 많고 적건 간에 성도에게도 시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교회를 지킬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교회를 지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보호아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언제나 그렇게 하셨듯이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령께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를 지켜나가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먼저 본문 1절 하반절에 보십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라고 하셨습니다. ‘합당하게’(앜시오)는 문자적으로는 ‘다른 들보 하나를 더 세워’입니다. 세상의 기준만 가지고 안됩니다. 다른 뭔가가 우리에게는 더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생각하고 판단하면 우리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 더 세울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준이 아닙니다. 주님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리고 분문 2절에 4가지로 우리가 더 세워야 할 것들을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모든 겸손”으로 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제일 높은 곳에서 제일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둘째, “온유”로 해야합니다. ‘이해심 깊음’ 또는 ‘정중함’ 그리스도인의 성품입니다(고후 10:1).
셋째, “오래 참음”으로 해야합니다. 죄인을 대하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넷째,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 해야합니다. 자기희생 적인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되는 일에 있어서 하나되지 못하는 사람은 늘 핑계를 뎁니다. 우리는 핑계하기 이전에 내가 위의 다섯 가지를 잘 지키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우리도 이런 능력 있는 주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악하고 어려운 세상을 살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유약하고 병들며, 나약해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는 실로 강한 것입니다.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능력은 세상 적인 육체의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실 때 주어지는 능력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탓만 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장애와 한계, 부족함을 극복하고 주를 위한 감사로, 찬양으로 축복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