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양치기가 어미를 잃고 길에서 울고 있는 늑대 새끼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양치기는 어린 늑대가 가엾어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불쌍한 녀석, 내가 잘 돌봐줄게…” 양치기는 늑대 새끼를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이 녀석을 잘 기르면 나를 주인으로 알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양들을 흉악한 늑대들로부터 잘 지켜주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양치기의 보살핌으로 늑대 새끼는 무럭무럭 자라 어엿한 어른 늑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외출했던 양치기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보살펴준 그 늑대가 양치기네 양들을 다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이 우화는 17세기 프랑스의 시인 겸 작가 라 퐁텐이 쓴 ‘늑대와 새끼양’입니다.) 늑대는 늑대라는 것입니다. 근본이 달라질 수 없다는 겁니다.

<라이온 킹>도 비슷합니다. 왕의 동생 스카가 하이에나들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며 왕을 살해하고, 그 죄를 어린 왕자 심바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죄를 뒤집어쓰고 사막에서 죽을 뻔한 심바는 자신을 구해준 티몬, 품바와 함께 살며, 자신의 과거와 고향을 잊으려 ‘하쿠나 마타타’를 노래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른 사자로 성장한 심바는 옛친구 날라를 만납니다. 심바는 날라에게 사랑을 느끼고 날라는 고향의 사정을 설명합니다. 고향 땅이 스카와 하이에나의 폭정으로 파괴되고, 황무지로 변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심바는 겁쟁이로 변해 돌아가기를 거절합니다. 그때 라피키라는 원숭이가 나타나 심바를 이끕니다. 너는 여기서 우리와 있을 원숭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는 왕의 아들 사자라는 겁니다. 사막으로 돌아가 하이에나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사자라는 것입니다. 결국 심바는 자신이 왕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가 하이에나를 물리치고 사막의 왕이 됩니다.

이 우화가 가르쳐주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늑대는 늑대라는 것입니다. 심바는 사자요, 왕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정체성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겁니다.
성도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이 다 변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요단강에서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은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아들은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입니다. 이 때에도 제자들은 엄청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더 놀랄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만 말씀 앞에(마 5:1-12) 산상수훈이 나옵니다. 흔히 팔복이라고 말합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 – 천국
2. 애통하는 자 – 위로
3. 온유한 자 – 땅을 기업으로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배부를 것
5. 긍휼히 여기는 자 – 긍휼히 여김을 받음
6. 마음이 청결한 자 – 하나님을 볼 것
7. 화평케 하는 자 –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음
8.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 – 천국이 그들의 것

이 여덟 가지 복중에 여러분은 어떤 것이 제일 마음에 듭니까?
저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에이레네(샬롬) 화평을 만드는 자입니다. 사탄은 분란을 일으킵니다.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화평케 만듭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지 예수님이 오셔서 증언해 주셨습니다. 날라와 라피카가 나타나 심바에게 너는 사자다(라이온 킹) 가르쳐 준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이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6:4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8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마 6:15 “너희 아버지께서도”
마 6:18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기 잘 보세요. 예수님께서 ‘내(나의) 아버지’라고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 아버지, 네 아버지, 우리 아버지”라고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확실히 하나님의 자녀가 맡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요?

사도들의 증거와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그와 함께 3년 반 동안이나 활동했던 제자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도가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가롯유다는 자기 욕심으로 예수를 팔고, 자기 죄로 죽은 것이지 예수님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4복음서가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당대의 최고 율법학자가 믿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라고 말합니다.
‘감동’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데오프뉴스토스(qeovpneusto”)입니다. 이 말은 데오(하나님)과 숨(호흡)이 하나로 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숨결”이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생기가 호흡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
이슬람이 유대교, 기독교를 카피했지만 카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은 카피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처럼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를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처럼 예루살렘 향하여 기도 창문을 낸 것 같이 이슬람 사원을 짓고 메카를 향하여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카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기적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보여주신 기적입니다. 이슬람은 기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적의 연속입니다. 기적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기적 그것을 못 믿겠다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께서 기적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 2:9)고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죄 사함까지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먼저 이 중풍병자를 고쳐야 합니다.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당시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이 중풍병자를 걷게 할 수 없었습니다.

어니스트 르낭(예수의 생애:The Life of Jesus)은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전설로 간주합니다. 나사로는 죽지 않았고 살아난 것은 억측이라고 합니다. 중동 지역에 떠돌아다니는 하나의 전승으로 봅니다. 그러면서 나사로 가족이 경솔하게 행동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고 나사로를 무덤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나오게 했다는 겁니다.
그는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신 적도 없다고 합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도와 주었는데 사람들이 나아졌다는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이적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물 위를 걸으신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쌓인 백합화 무더기 위로 걸어가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요? 많은 양식을 인근 동굴에 숨겨놓았다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시켜서 몰라 꺼내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믿는 것 보다 르낭의 말의 믿기 위해서는 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손 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과 같습니다. 증거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책처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그냥 글이 아닙니다. 보통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눅 16:17)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보다 귀합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7)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생겨납니다.

감히 하나님의 이 엄중한 말씀을 누가 변경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사도는 말합니다.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9)

이사야는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 1:2)라고 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시 19:7)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 119:81)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시 119:151) “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시 119:172)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생명을 말씀을 바랍니다, “너의 나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20) 편지를 보내고, 책을 써 놓고 그 사람이 죽었다면 그 약속은 더 이상 지켜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쓰게 하신 분은 살아 계십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