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관심은 선교

사도행전 1:6-8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말에 ‘동문서답’(東問西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쪽을 묻는데 서쪽을 대답한다는 뜻입니다. “묻는 말에 대하여 아주 딴판인 엉뚱한 대답”을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들리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엉뚱한 대답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마지막 순간입니다. 환송식이라고나 할까요? 오늘 본문은 이 땅에서 예수님께 사람들이 질문한 마지막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이 땅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이 마지막 질문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승천은 아주 갑자기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인 사람들의 질문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입니다. 모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유대인입니다. 이들은 아직도 구약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을 예수께 질문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도 하셨고 다시 모여서 계획을 잘 짜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 이후 예수님께서 승천하신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때가 지금이냐는 것입니다. 지금 해방이 이루어지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7-8절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으십니다. 이 땅의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지 않습니다. 답답합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에 대한 기한은 하나님께 권한이 있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짤막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는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 사람들과 같을 수 있습니다. 자기 나라의 회복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은 유대 민족적으로 소원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 지금 이 땅의 나라들 가운데 같은 민족이 분단되어 있는 민족이 없습니다. 예멘이 있었는데 1990년 통일되었습니다. 이제 이 지구에 유일하게 한 민족이 분단된 나라는 남북한입니다. 하나님 남북한이 언제 통일되겠습니까?”라고 주님께 질문하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 땅의 자신의 나라였습니다. 그래도 나라를 말하는 사람은 큰 사람이지요.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신의 축복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어떻게 축복을 받아야 “이제 되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의 목사(K.P. Yohannan)가 미국교회를 방문하고 ‘멍에를 메고 잠든 나라’라는 제목으로 쓴말입니다.

나는 미국 교회를 보며 재벌 기업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카펫트와 멋진 의자들과 에어콘과 휘황찬란한 내부장식을 보며 놀랐다. 많은 교회가 그리스도와는 거의 상관이 없거나 아예 관계없는 활동에 쓰는 체육관이나 친교실을 갖고 있었다.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특별 찬양 같은 것들이, 때로는 설교마저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기보다는 즐기기 위한 것 같았다.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다건너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는 고사하고 자기 도시의 빈민의 문제도 외면하고 있었다. 그 모든 풍족함 중에서도 그곳에는 말할 수 없이 가난에 찌든 몇 백만의 빈민이 살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외로 이사했으며, 빈민들은 시내에 거주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이라고 생각되는 활동에는 즐겨 참여하지만 복음에 대한 책임은 회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는 5,000개 가량의 기독교 서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는 7,010 민족 중 모국어로 된 성경을 갖지 못한 종족이 5,100민족이 됩니다. 또한 오늘날 인쇄되고 있는 성경의 85%가 영어를 읽을 수 있는 9%의 사람들을 위해 영자로 인쇄되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평균 한 가정에 4권의 성경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이 지구상의 80%의 사람들은 성경을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백만 명이 넘는 전임사역자가 있는 축복 받은 나라입니다. 성도 230명당 1명의 전임사역자가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약 7만 명의 전임사역자가 있습니다. 전체 국민 642명당 한 명의 전임 사역자 이며 성도 수로는 176명당 한 명이 전임 사역자입니다. 이것은 미국을 능가하는 수치입니다. 여러분 축복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는 27억의 사람이 단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선교지에는 50만 명당 한 사람의 전임사역자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선교지로 가야하는 이유입니다.

선교는 누가 할 수 있습니까?

본문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성령과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물질로 노력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단체에서 훈련받는 것은 세상 적인 조건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안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받아야 됩니다. 성령 받으면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 하면 힘듭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지칩니다. 시험이 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 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보면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선교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 받으면 하나님의 지혜가, 순결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frovnimoi:프흐로니몬)라는 말의 어근의 뜻은 고삐를 매다, 자갈을 먹이다 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25장의 슬기로운 처녀 비유에서 나옵니다. 열 처녀 중에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이 처녀들은 깨어 있었던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막 13:37)고 하셨습니다. 깨어있는 사람이, 깨어있는 교회가 선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8),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선교의 부정적 요소

폭발적인 세계인구의 증가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전세계 인구를 선교학자들은 1억 6천만 명으로 봅니다. 이 인구의 수가 배로 늘어나는데 1,200년이 걸렸습니다. 또 배로 늘어나는데 550년이 걸렸습니다. 또 배가되는데 140년 걸렸습니다. 또 배가되는데 70년, 또 배가되는데 39년이 걸렸습니다.
60억이 넘는 세계인구의 33%가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이중에 개신교는 14.74%, 천주교 14.87%, 러시아정교회 3.35%를 합친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천주교 국가였던 필리핀, 브라질도 우리가 선교하러 갑니다. 이들의 신앙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천주교는 일단 그 나라에 들어가면 정착하기 위해서 지나친 현지 상황화(토착화)를 서둘러 그 지역의 문화와 혼합이 되었습니다. 심한 경우는 원주민들이 섬기는 우상이 마리아로 바뀌었을 뿐 예전에 우상을 따르던 습관대로 다 합니다. 기독교의 예수 정신은 없습니다. 성경도 잘 알지 못합니다. 또한 전 세계인구의 이슬람인이 20%가 넘습니다. 이들은 예수가 아니라 마호멧을 따릅니다. 이슬람을 믿는 분들은 자녀를 많이 납니다. 현재 증가율대로 25년이 지나면 이슬람이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됩니다.
문제는 단순한 숫자적 증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말하기 싫지만 기독교의 서구인들은 대부분은 껍데기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명목상 그리스도 인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일생에 교회를 세 번 가는데 태어나서 한번 가고, 결혼식 때 가고, 그리고 죽어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슬람 믿으시는 분들의 신앙심이 우리보다 더 열심인 것 같습니다. 하루에 여섯 번 예정된 시간에 기도하는데 담요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도할 때 어디를 가나 깔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은 홍콩에서 비행기 갈아타기 위해서 기다리는데 이슬람 믿으시는 분인지 공항 귀퉁이로 가시더니 담요 같은 것을 깔고 자신들의 성지 메카가 있는 방향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비행기 안에서도 뒤에 가서 기도하는 분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식사 기도한번 하는 것도 눈치보며 할 때가 있습니다. 한국에 와있는 이슬람 분들이 아무 고기나 먹지 않으니까 미리 예식을 치룬 고기를 배달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심이 이슬람을 믿으시는 분들보다 철저하지 못하다는 것은 우리가 선교하는 정신에서 이미 밀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선교

1945년 전에는 국가들은 민족에 대해서 배타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차 대전을 겪으면서 각 나라들은 민족주의 의식이 강하게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전쟁 끝에 생각한 것이 민족 중심의 종교였습니다. 전 세계 286개의 나라가운데 90개 나라만 선교사 비자를 주지 않았는데 지금은 120개 나라가 선교사 비자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비자로 들어가 스파이처럼 몰래 활동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중국, 베트남입니다.
중국은 1945년 모택동이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말을 하고 1951년 공산혁명 이후 모든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회 지도자들을 감금하고, 교회를 폐쇄했습니다. 이 때 기독교인이 150만 명 남아있었습니다. 그 이후 1966-67년의 문화혁명이 한번 더 일어나 더 강력한 정책을 펴서 30-40년 후 공식적으로 70-80만 명의 기독교인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중국의 크기는 남북한 합한 면적의 44배, 남한의 96배 큰 나라입니다. 인구는 10억6천413만5천명(1987년)으로 보나 현재 약 12억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21.8%차지합니다.
이런 중국이 개혁 개방정책이후 서방의 압력으로 제한적이지만(삼자교회) 교회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약 40년이 지난 후에 교회 문을 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다. 다 없어졌어야 되는 성도들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현재 공식적으로 1억 명이 넘는 기독교인이 나온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쫓겨날 때보다 100배가 많아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설명이 안됩니다.
성경공부, 주일예배, 기도회 같은 공식적인 모임을 단 한번도 가지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1950년대 선교사를 다 추방하고 교회를 문 닫을 때 다 죽었는지 알았습니다. 공산당이 막으면 복음이 끝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100배나 많게 증가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열면 열립니다. 성령님이 하시면 됩니다. 중동도 북한도 하나님이 여시면 열립니다.

우리는 북한이 열리면 또 한번 놀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다 죽고 성도가 없는 줄 알았는데 무수히 나오는 성도를 보며 우리는 놀랄 것입니다. 김일성이 김정일이 기독교를 다 죽인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 엄청난 변화가 북한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혀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북한이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의 성도들은 예배처가 특별히 없습니다. 강가에 배를 띄어놓고 배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주일이 되면 나물 캐러 들판으로 나가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들판을 거닐며 조용히 그리고 은밀히 찬양을 부릅니다. 찬양을 부르며 줄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수백 곡의 찬송가 가사를 다 암송한 성도님도 있습니다. 어떤 성도님은 김일성 생일날 받은 수첩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일종의 위장용입니다. 북한의 성도는 교회 건물은 없어도, 예배의 순서는 없어도 성령님과 함께 생명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할머님은 중국 쪽에 교회가 세워져 빨간 십자가 불빛이 반짝거린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을 걸어서 압록강 근처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밤 시간을 이용해 압록강 건너에 있는 교회로 향했습니다. 처음에 교회 목사님은 탈북자인줄 알고 무엇을 얻으러 온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님은 목사님 앞에 작은 보따리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내가 50년 동안 모은 십일조입네다.”라고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십일조를 드릴 교회가 없어 50년 동안 모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십일조를 교회를 찾아와 드린 것입니다. 그 할머님은 다시 북한으로 가셨습니다. 북한에는 성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이 역사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유럽의 교회처럼 큰 교회만 만들어 놓고 예수를 외면하는 그런 교회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하나님의 선교의 명령을 따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8.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본문 : 마 21:1-11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출생지 : 베들레헴, 성장한 곳 : 나사렛, 나이 : 33세, 혈통 : 유다 지파이며 아버지는 요셉 그러나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함, 학력 : 없음, 직업 : 목수의 아들로 자랐으나 목수 일은 하지 않고 제자들을 모아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떠돌아다니고 있음 결론은 무직, 주요활동사항 :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그가 감당치 못할 분임을 소개함, 산과 들, 회당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있음, 많은 불치병을 고쳤음, 오병이, 칠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킴, 그의 제자들에 따르면 바다를 걸으신 적이 있고, 하늘에서 광채와 소리가 들린 적도 있다고 함.
대략 이런 내용으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의회에 보고되었을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대중을 선동하고 신성을 모독하는 등 위험인물이기 때문에 좀더 면밀히 관찰하고 그와 직접 대화를 시도하여 그의 진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고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율법에 관한 한 당시 능가할 사람이 없는 서기관과 율법사를 예수께 은밀하게 접근시킵니다. 이런 활동을 3년이 넘게 하고 다녔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이들과 수많은 질문과 답변을 했습니다. 중요한 답변과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약 40번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이제 이들의 결론은 문제를 만들어서라도 책을 잡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피해 다니시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가난한 자와 함께 하고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을 귀찮아 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계속하여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이기보다는 계속하여 오병이어와 같이 기적을 일으켜 주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아담 때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죄의 문제이며 영혼의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모든 것이 한계가 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보냄을 받으신 것은 궁극적으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3번에 걸쳐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을 이루실 때가 지금이라는 것을 결정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십니다. 이 때는 유대인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또한 이러한 대열에 포함되어 계셨던 것입니다. 오시는 중에 두 소경을 고쳐주셨습니다(마20:29-34). 이곳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24km입니다. 당시 성인 남자가 하루동안 걸어갈 수 있는 길이었으나 예수님은 해발 900m의 군사 도로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약 3km 정도 떨어진 베다니에 도착하십니다. 여기서 하룻밤을 지내신 후에 다음날 즉 일요일에 다시 감람산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벳바게에 도착하셨습니다. 감람산은 해발 약 800m에(수리산 489m) 위치한 네 개의 봉우리로 되어있는 산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하고 있는 언덕보다 약 90m정도, 시온 억덕 보다는 약 30m 정도가 높아서 동쪽으로는 요단 계곡과 사해의 웅장한 모습 그리고 남쪽으로는 유다 광야와 서쪽으로는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여기 서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바라보시며 성전을 바라보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오래 전에 스가랴를 통하여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슥 14:4) 하신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이곳 감람산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위하여 준비하십니다. 먼저 제자 두 사람을 시켜서 마을로 내려가면 그곳에 매여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만일 누가 물어보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그러면 즉시 보내 줄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추측을 합니다. “두 제자들 중의 하나가 나귀 임자였을 것이다. 아니면 예수님과 나귀 주인 사이에 이미 그렇게 하자고 동의하고 짰을 것이다. 아니면 예수님을 잘 아는 이를테면 병을 고쳐주어서 거절할 수 없는 사람 중에 하나일 것이다.” 등의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네 가지를 분명하게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랐을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것을 알고 계시고 예언자적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여기서 예루살렘까지는 3km가 채 안됩니다. 이 길을 걸어서 가지 않으시고 나귀를 타시고 가시는 것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하신 말씀을 본문 4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셋째는 지금까지 메시야이심을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세상에 공개하심으로 3차에 걸쳐 제자들에게 예언하셨던(마 16:13-20) “예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져 죽임을 당한 후에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인류 구속의 역사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한때는 예수님이 원활한 사역을 위해서 당신이 메시야 구세주임을 함구하도록 제자들에게 지시했었습니다(마 16:20, 17:1-9). 그러나 이제 당신이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모퉁이의 머릿돌’(42-44)임을 드러내셨습니다.
넷째는 본문 5절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마가와 누가는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 기자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이 될 사람은 튼튼한 군마를 타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은 세상을 통치하는 그런 왕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귀는 군마에 비해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동물이어서 왕이 될 사람이 아니라 동네 언른 들도 잘 안타고 다니는 동물입니다. 아이들이나 타고 놀기에 딱 좋은 동물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대의 건장한 33세의 남자가 타기에는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예수님의 겸손과 순수함을 잘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무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군왕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을 계속 따라다니며 주시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예루살렘에 오게 됨으로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기서 끝장을 내자,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작정을 하고 들어오셨기 때문에 한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이제 더 물러설 곳도 물러설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다음날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십니다(12-17). 성전 정화를 시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로 생명력 없는 형식적인 신앙을 공박하셨습니다(18-22).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역공을 하신 후(23-27) 두 개의 비유(28-32, 33-46)로써 책망을 가하셨습니다. 이로써 이들은 이제 예수를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로 여기게 되고 본 장 이후에 예수를 살해할 음모를 노골적이고도 급속도로 진행합니다.

그러나 이들과 반대로 천군만마대신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는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10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온 성이 소동하여’ 너무 점잖은 번역 같습니다. 한마디로 예루살렘성이 뒤집어 졌다는 것입니다. 대단합니다. 예루살렘성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있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 외친 한마디는 ‘호산나’ 이었습니다.
‘호산나 : 구원하소서. 구원해 주세요.’ 라는 소리를 들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뜨거운 피가 올라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토록 구원자를 부르짖고 환호하는 어린아이들과 사람들의 소리는, 그 어떤 군악대의 요란한 나팔소리보다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공의로서 당신의 나라를 다스리시되 무력이나 권모술수로서 하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낮추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영원하신 평강의 왕이셨던 것입니다(사 9:6).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이미 예수님을 만났거나 알고 있던 사람도 있을 것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유월절에는 유대인 성인 남자들이라면 누구든지 가야하는 명절입니다. 전국에서 모여든 모든 사람에게 예수가 나타난 것입니다. 누군가 “이는 누구뇨?” 하였고 모여든 무리 스스로가 대답을 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나사렛은 당시에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던 지역이었습니다(요 7:41, 52). 예루살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지역인 갈릴리 사람들에게조차 멸시를 당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를 조롱하려고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요 19:19)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했습니다. 철없던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가 밭에서 일하시다가 도시락을 가져가지 않았다고 몸빼 바지를 입고 학교에 나타나셨을 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싶었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고나니 그 어머니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스런 어머니였습니다. 나사렛은 이제 자랑스러운 곳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성전 돌을 다듬는 석공들이 하루는 돌을 다듬는데 모든 고른 크기의 돌들 중에 크기와 모양이 다른 돌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돌을 본 공사장 감독은 “이건 잘못된 쓸모 없는 돌이군. 왜 이런 돌을 보냈지? 이 쓸모 없는 돌을 언덕 아래로 굴려 버려라.”하고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감독의 명령에 따라 이 돌은 기드론 골짜기 아래로 버려졌습니다. 그 후 7년이 지나서 이제 기둥을 세워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감독은 사람을 보내 석공에게 “이제 기둥을 세워야 하는데 주춧돌이 필요하니 보내주게” 하였습니다. 석공은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난 벌써 오래 전에 주춧돌을 보냈다네.” 가만히 생각해 보니 7년 전에 기드론 골짜기로 필요 없다고 굴려 버린 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프랑스의 샤르니가 나폴레옹 황제에게 밉게 보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의 친구들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잊혀져갔습니다. 처음에는 자주 오던 가족들의 면회도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는 벽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소망을 잃어버리는 순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바닥에 있던 돌 틈에서 푸른 싹 하나가 돋아났습니다. 샤르니는 간수가 매일 주는 물을 조금씩 남겨서 잎사귀에 부어주었습니다. 마침내 꽃봉오리가 생기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그는 먼저 썼던 글을 지우고 다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
감옥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조세핀 왕비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이는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가 없다.”고 하면서 황제에게 재고를 건의했고, 샤르니는 석방되었습니다. 예수가 우리를 돌보십니다.

나사렛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자랑이요 기쁨입니다. 이제 그분이 부끄러운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이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물 위에 계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3. 만물 위에 계신 예수님) / 본문 :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오늘날 천문학자들은 각 은하마다 1,000억 개가 넘는 무수한 별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太陽系) 은하수(銀河水) 성운(星雲)중에서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이렇게 크고 기묘한 우주와 무수한 별들이 신비롭게도 질서정연하게 조화를 유지하며 운행된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수소(水素) 가스와 헬륨 가스(He gas)를 발생시키는 “빅뱅(Big Bang)”으로 폭발하여 오늘날 현재의 우주로 진화했다는 가정은 마치 보석가게가 폭발하여 정확한 시간을 맞춰 주는 고급 시계를 만들어 냈다는 우스운 신화와 같은 것입니다.
생명이 우연히 생겨났고 발전했다는 것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천문학자, 물리학자의 90%이상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과학이 발전하게 되면 될 수록 천지와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재 과학자인 뉴턴과 아인슈타인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인체의 신비, 자연의 신비, 우주의 신비를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거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과학자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10가지 이유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1. 지구의 돌아가는 속도의 정상화입니다. 즉 지구는 시간당 1,600km로 돌고 있습니다. 이 지구가 만약에 한 시간당
160km로 돈다면 사람들은 낮에는 타 죽고 밤에는 얼어죽을 것입니다.
2. 지구와 태양이 떨어진 거리가 신비스럽게도 아주 알밪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지구가 23.5도(度)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4계절이 나타납니다. 만약에 지구가 수평이라면 하루에 두 번 물에 잠기게
되어 대양(大洋) 증발(蒸發) 수증기(水蒸氣)로 남북은 어름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4. 지구와 달이 80,000km의 알맞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는 하루에 두 번씩 물에 잠기는 일이 없습니다.
5. 지구의 두께가 3m만 더 두꺼웠다면 산소(酸素)가 없어 모든 동식물은 살 수 없습니다.
6. 대기권의 두께가 지금보다 얇았더라면 지구는 별똥들에 의해서 날마다 불바다가 된다고 합니다.
7. 연어의 경로입니다. 연어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바다에서 태어나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강물로 올라갑니다.
8. 장어의 행로입니다. 장어가 바닷가에서 알을 낳고 죽으면 새끼들은 다시 호수나 강으로 돌아옵니다.
9. 호주의 선인장이 빠른 속도로 번식되는 것을 억제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선인장만 갉아먹고 사는 곤충이 있기 때문입니다.
10. 사람은 폐를 가지고 있으며 곤충은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이 성장을 억제시킵니다. 만약 곤충이 폐를
가지고 있었다면 사람만큼 성장할텐데 다행스럽게 곤충은 더 성장할 수 없는 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자연의 사실은, 어떤 영적 사실의 상징이다.”(R.W. Emerson)라고 했습니다.
아마 과학자들을 모아놓고 이런 신비스런 아직까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말하라고 한다면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이런 설교 계속하면 남자들은 계속 재미있어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자 분들은 따분해 하십니다. 벌써 졸려고 하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뇌수술을 받으러 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술에 성공해서 생존할 확률이라고 해야 고작 10퍼센트. 황량한 마음을 가눌 길 없이 차에 오르며,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차가 서서히 움직여 대문을 나섰을 때였습니다. 그때 거리 양쪽 모든 집의 현관문이 일제히 열리고 동네사람들이 나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이웃사람들이 그의 수술 성공과 건강을 기원하며 모두 함께 격려해주자고 약속한 일이었습니다. 절망했던 환자는 ‘나는 사랑 받고 있어.’ 하는 생각에 가슴 가득 새로운 희망과 용기가 솟아올랐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이런 두 가지 상황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주적으로 준비하신 축복이요 하나는 나 자신을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18)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이분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기를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라고 하시며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9)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창조와 신비

첫 번째 창조가 우주적 창조였다면 두 번째 창조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사 65:18)
사람이 아무리 돈을 벌어도 만일 그것을 함께 누릴 사람이 없다면 그 가진 것이 무의미 한 것입니다. 선물은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선물을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 돌을 맞이한 준혁이와 하민이에게 선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본문 “위로부터”(a[nwqen:아노덴)는 위로부터란 뜻도 있지만 동시에 “처음부터, 새로, 다시”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의 자손(유대인)을 지켜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명백히 기록할지니라”(신 27:8) 왜 그렇게 하나님이 율법을 강조하시고 기록하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지켜야 살고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6) 이렇게 언약하시고 이 백성이 축복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신 28:2)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으며 그들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은 떠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에게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삼상 16:14)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한때 다윗을 통해서 나라가 반석 위에 서는 듯 했으나 그의 아들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분열국가가 됩니다. 하나님은 남 유다(B.C 931~586:19대 왕조:345년)와 북 이스라엘(B.C 931~721:20대 왕조:210년)로 나누시고 혹시나 하시는 마음에서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대를 떠난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하’에는 이스라엘의 제일 악한 왕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나옵니다. 아하시야는 제위기간이 2년을 지냅니다. 그런데 자기 집 난간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신하들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파리의 신)에게 자기 병을 나을 것인지를 물어보라고 보냅니다. 도중에 엘리야가 나타나 “너는 누운 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왕하 1:3하반절)고 하십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다니시면서 목사에게 물어보지 않고 점보는 집에 가서 물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하나님께 오세요.
이사야 30: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 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많은 재산과 축복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묻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비는 모습니다. 하나님은 오라고 하시는데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바알세붑에게, 이집트에게 빌붙어서 살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상 더 이상 치졸하게 돈을 바라고 세상의 권위를 세우려고 하나님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결코 하나님은 치욕스럽게 만들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로 포로 70년을 지내게 되고 이후에 하나님은 여러 예언자를 보내시고 구약시대를 마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침묵이 이어집니다. 구약의 마지막성경 말라기가 기록되고 세례요한이 나타나기까지 약 400년이 흐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하신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하신 말씀처럼 “위로부터”(a[nwqen:아노덴)는 다시, 새롭게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

본문 위로부터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 “오시는”(ejrcovmeno”:에르코멘스)는 어근 “e[rcomai:에르코마이”입니다. 이 단어는 나타나다 이전에 “동반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데 절대 혼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인 하나님의 영과 같이 오시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30)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요 10:38) 예수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셨다는 사실은 이 땅의 사람과 다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죄인의 모습이 아닌, 능력이 없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시는 분을 말합니다.

만물 위에 계심

본문에서는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 위에 계시나니” 두 번 만물 위에 계심을 강조합니다. 누가복음 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 3:35)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고전 15:27, 계 1:18)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운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주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선물의 내용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성폭행 당한 여성에게 성폭행을 우발하는 행동을 했다고 하여 태형 90대가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90대가 200대가 되고 징역 6개월이 늘어났습니다. 이유는 언론을 통해 공론화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담당했던 변호사는 면허를 박탈당하고 법정 출석을 금지시켰습니다. 이것이 이슬람의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만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여자와 노인과 약자의 편입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불볕더위가 한창인 어느 여름날, 주인과 하인이 길을 가다가 상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상자를 열어 보니 금이 가득한 것이 아닌가! 뜻밖의 횡재를 한 주인은 신이 나서 하인에게 당장 그 상자를 가져다 자기 집의 창고에 넣어 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상자를 짊어지고 가야 할 하인에게 뜨거운 여름날에 상자의 무게는 어떻겠습니까? 정말 죽을 맛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반대의 상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상자를 발견한 주인이 하인에게 ‘자네의 집으로 가져가 살림에 보태 쓰게’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하인에게 그 상자는 무겁겠습니까? 실제 무게는 여전하겠지만, 하인의 어깨에 눌리는 무게 감은 가벼운 새털 같을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지는가? 신나고 가볍게 느껴지는가?’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 금 상자를 짊어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에 따라 행하는 모든 행동이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고 확신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지고 신앙생활이 달라지며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하는 말은 부모 자신을 위해서만 결코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당신을 위해서만 우리보고 존재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명령들은 곧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경계선에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9. 경계선에서) / 본문 : 눅 22: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오늘은 본문 읽어놓고 다른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이런 제목설교 잘 안 하는데 오늘은 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말씀 내내 오늘 본문이 그 어디에도 따라다닌다는 것을!
오늘 설교의 제목 ‘경계선에서(On the boundary)’는 폴 틸리히(Paul Tillich:1886-1965)의 자서전의 제목과 일치합니다. 폴 틸리히는 20세기 개신교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나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교수자리까지 얻었지만 1차 세계대전에 군목으로 참전하여 사병들이 죽어 가는 참호 속에서 니체의 책들을 읽으면서 전통적 유럽 기독교 문명의 붕괴를 몸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게 됩니다.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은 그는 히틀러에 의해서 자국인 독일에서 추방됩니다. 여행금지국가로 정해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해야 하는 에스라, 에스더 부부가 아쉬움을 진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나라에서 자신이 추방당하는 틸리히는 어떻겠습니까?
제가 95년도에 인도를 갔을 때 우리나라에서 6.25가 끝나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유엔군 포로중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일제시대 때 일제에 의해 일본군이 됩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가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후에 중국 군에 잡혀서 중국 군이 되어 6.25때 북한을 지원하러 내려오는 병사들 틈에 끼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북한군에 잡혀서 북한군인이 됩니다. 그리고 또다시 유엔군에 포로가 됩니다. 그리고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고향은 남쪽이지만 남한도 북한도 그렇다고 중국을 일본을 택할 수도 없는 이 사람은 제 3국인 인도를 택하여 그곳에서 살고있었습니다. 이 민족의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폴 틸리히도 이러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자서전 ‘경계선에서’ 그는 두 기질 사이에서 자신을 보여줍니다. 도시와 시골 사이에서, 사회계급들 사이에서,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타율과 자율 사이에서, 신학과 철학 사이에서, 교회와 사회 사이에서, 종교와 문화 사이에서, 루터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관념론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고국과 타국 사이에서 그는 갈등하며 자신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종교의 실현(Religiose Verwirklichung)”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경계선은 앎을 얻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다.”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친구를 삼는 데 자격기준이 없습니다. 나이 성별 피부색 사람인지 동물인지 식물인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 조차도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구분하는 것은 어른들의 기준일 뿐입니다. 작은 나무토막으로 우주선을 꿈꾸고 조그만 인형들을 친구로 사귀어 멋진 우정을 나누는 어린 아이들의 세계가 부럽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과 예수

유대교 율법에 따르면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흠 없는’ 양이나 염소 등을 바쳐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양이나 염소가 없는 사람들은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로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일반 농민의 집에서 사육한 짐승이나 집 주변 혹은 산에서 잡은 비둘기는 ‘흠 없는’ 제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제사용 짐승을 전문적으로 키우는 업체들이 있었고, 이 업체들은 성전 관료들인 제사장의 공인 하에 한정된 일부 가문에 의해 독점되었습니다. 이 독점업체들은 성전귀족에게 많은 뇌물을 바칠 수 있는 가진 가문 중에서 선별되었습니다. 가난한 탓에 죄 사함의 제사를 드릴 수 없었던 대중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부족한 자, 심지어는 민족적 불행을 초래한, 저주받아 마땅한 자로 여겨졌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런 종교적 체제로 인해 사회의 모순에 저항할 수도 없는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때 이들을 죄의식에서 해방시켜 준 것이 요한의 세례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에게 보다 유리한 죄 사함의 매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중들은 결국 요한을 좋아하게 되었고,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습니다. 예수도 갈릴리에서 요한에 대한 소문을 들고 세례자 요한을 찾기 위해 요단강가로 갔습니다. 예수님도 그곳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활동했던 베레아 지방은 아바태아라는 유목족속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입니다. 때문에 베레아 지방에는 많은 군사요새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과 함께 반정부적 선동을 하고 있었던 요한의 행동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추종자의 일부는 요한과 함께 붙잡혔고 또 다른 일부 사람들은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보다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이런 정황 속에서 예수는 다시 갈릴리로 돌아와 요한의 세례운동에 참여했던 옛 동지들을 포함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의 명성은 널리 퍼졌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 주변에 몰려들었습니다.

요한은 대중을 불러냈으나 예수는 대중에게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대중을 모든 정치적, 사회적 압박에서 해방하시기 위해 병고침과 말씀선포로 영적 활동을 펼쳤나갔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정치적, 사회적 압박에서 대중들을 해방케 하시고자 적극적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경계선에 계셨습니다. 당시 정치적인 로마와 유대와 헬라의 경계에 계셨습니다. 또한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계셨으며, 율법과 복음의 경계선에 서게 되셨습니다. 제자들로부터는 세상 권력의 자리(왕)와 섬김의 자리사이에 계셨습니다.
컴퓨터의 내부적인 회로는 2진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0과 1사이에서만 선택이 가능하고 중간은 없습니다. 흑과 백 사이에 어떤 것이든 선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틸리히는 이 선택을 미루다가 추방을 당한 것이고, 세례요한은 이 덫에 걸려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선택에서 빠져 나오셨습니다. 몇 번에 걸쳐서 이러한 선택을 강요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그 덫에 걸리지 않으셨습니다. 그 중의 한가지 사건이 세금문제였습니다. 막 12: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설교자에게도 이러한 경계선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을 강조하였고 요한은 사랑을 강조했으며 베드로는 소망을 특히 강조하여 설교했습니다. 믿음을 강조한 바울의 경우에는 데살로니가서에서는 예수의 재림을, 로마서에서는 믿음을, 고린도서에서는 사랑을 말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일제시대 때의 설교는 일본 침략자에 의해 고통 당하는 백성을 위로하고 삶의 의미를 북돋아 주는 설교가 많았습니다. 당시에 가장 많이 불렀던 찬송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는 찬송이었습니다.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내 어이 여기 살리까
빛나고 높은 저 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전도의 내용도 예수천당이면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 때와 같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국가는 독립하고 세계무역의 10대국에 들어있습니다. 그만큼 국가의 위상과 위치가 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했고 올림픽과 월드컵도 치러냈습니다. IT분야는 세계3위에 올랐고 통신 속도는 세계1위입니다. 눈부신 발전으로 세계가 놀랐습니다. 이런 국력을 바탕으로 우리가 선교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으로 안티 크리스찬뿐만 아니라 기독교 내에서도 분당샘물교회와 박은조 목사님을 비방하는 일이 난무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제가 알기로는 그 어떤 목사님보다도 본받을 만한 분입니다. 어떤 분은 교인이 3,000명이라니까 목사가 얼마나 많은 돈을 받겠냐고 합니다. 박 목사님은 서울 영동교회에서 오래 동안 목회 한 분입니다. 이 교회는 손봉호 장로님이 계신 곳이기도 합니다. 강남에 있는 교회가 철 대문입니다. 이 대문을 보고 사람들은 서대문 교도소냐고 그럽니다. 그만큼 절약하는 교회입니다. 그곳에 계시다 분당샘물교회를 개척했는데 분당샘물교회는 성도가 3,000명 정도 된답니다. 다른 교회 같으면 벌써 교회를 건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가를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담임목사를 비롯한 전 교역자 사례비를 100만원으로 정하고 가족 1인당 19만원만 추가하여 받고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한 가정을 파송하고 있는 우리교회 역시 남의 일로 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국가 권유로 철수 준비를 하고 있지만 현지의 같은 팀 내에서 건축한 병원은 경기도 만한 크기의 땅에 이 병원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다 버리고 와야합니다. 단순히 병원을 그동안 애써 세운 건물을 두고 온다는 것만 마음이 아픈 것이 아니라 그곳에 여전히 남아있게 되는 그 땅의 백성입니다. 누가 치료해 줍니까? 누가 아픈 곳을 감싸줍니까?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아닙니다만 현실적으로 너무나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탈레반이 두 여성을 풀어주면서 한 여성이 양보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탈레반은 그 여성은 정말 위대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분은 아프간에 간 것이 ‘선교냐 봉사냐’ 하면서 따집니다. 여러분! 봉사면 어떻고 선교면 어떻습니까? 또 여행이면 어떻습니까?

박은조 목사님은 지난 8일(수) 무겁게 가라앉은 교단에 올라섰습니다. 이날 제시한 성경구절은 열왕기 39장. 동료들을 모두 잃은 ‘엘리야’가 로뎀나무 밑에서 하나님에게 “자기의 생명을 거둬달라”고 애원하며 기도하는 대목입니다. 박은조 목사님은 말하기를 “이제 3주가 지나 4주 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웅적 죽음을 위해 아프간 땅을 밟은 게 아니었습니다. 현지 사역자를 뒷바라지하고 격려하기 위해 간 사람들인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저희를 용서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아프간 피랍사태로 또 하나의 경계선에 섰습니다. 폴 틸리히가 말했던 것처럼 경계선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교회를 돌아보고 선교를 점검해야합니다. 이번 일로 아프간이 아주 문이 닫히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또한 우리가 더욱 열심히 기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1889년 10월에는 호주 장로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Austualia) 소속의 선교사 데이비스(J.Henry Davis)가 조선에 입국하게됩니다. 그를 파송한 호주 장로회는 당시 교세가 3만 5천명 밖에 안 되는 작은 교파였습니다. 1885년과 1887년에 한국을 두 차례 방문한 바 있는 중국 주재 영국국교회 선교사인 월프(J.R.Wolf)부주교가 한국 선교의 꿈이 영국국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호주에 있는 친구들에게 한국을 위하여 선교사를 보내 달라는 호소문을 보냅니다. 이것을 받은 매카트니(H.B.Maca-rtuey) 목사가 빅토리아 선교신문에 이 내용을 싫고, 이 글을 데이비스가 읽고 한국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당시 호주 장로교회에서는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조차 갖지 않고 있었습니다. 교단에서 파송하지 않자 청년들의 모임인 성서연구 연합 친우회(The Presbyterian Fellowship Union for Bible Study)에서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데이비스 목사의 본 교회인 멜보른 투락(Too-rack) 교회와 협력하여 초대 선교사로 데이비스 목사를 선정하여 한국에 파송 하게 됩니다.

서울에 도착한 데이비스는 부산 지역을 선교하기 위해서 1890년 2월 28일 구한국 정부로부터 전라, 경상 지방 여행허가를 받아 서울-부산 간 장거리 여행을 도보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당시에도 부자 선교사는 말을 타고 다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과천을 지나 수원(3월 15일), 천안(3월 18일), 공주(3월 20일), 경천(3월 21일) 등을 지나며 복음을 전하며 갔습니다. 공주를 지나 논산(3월 22일)을 지나 만경강을 건너 전주(3월 24일), 오수(3월 25일)를 지나 남원(3월 27일)과 하동(3월 29일)사이의 지리산 기슭 산악 지역을 통과했습니다. 전주를 향해 걸어 갈 때에는 많은 비로 인하여 길이 물에 잠겨 장화를 벗고 걸어야 했습니다. 지리산 지역에서는 호랑이 울음소리도 전해 들었습니다. 1890년 3월 27일 드디어 서울에서 부산을 향하여 670리를 걸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힘든 여행 중에도 그는 매일 5-6시간 씩 공부하면서 사람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조금씩 말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마지막 부산 행로는 진주(3월 31일) 부근을 경유한 것으로 추정되나 그 후의 경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약 20일간의 무리한 도보 여행을 하는 가운데 추운 날씨와 불편한 잠자리, 맞지 않는 음식으로 허약해진 체질에 폐렴과 천연두에 감염되어 마지막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게일(Gale, J. S.)의 도움으로 4월 4일 비 오는 금요일 부산으로 이동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일본인 병원(北村)에 입원하여 하룻밤을 병상에서 지내다가 치료도 제대로 받기 전에 1890년 4월 5일 순직하였습니다. 임종을 지켜본 게일은 “그는 병원에서 죽어가면서 내게 뭔가를 말하려 했다. 오후 1시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메리(Mary)에게 편지했습니다.
호주장로교회도 경계선에 섰습니다. 교단이 파송한 것은 아니었지만 호주 장로교회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기도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데이비스의 헌신적인 활동과 순직은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를 가능하게 만든 값진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호주 장로교회는 후속 사업으로 멕케이(Mackay)선교사 등이 내한합니다. 또한 호주에서는 여전도회연합회(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가 만들어져 선교를 헌신적으로 돕도록 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한 남자가 남과 북의 경계선상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군, 북군 모두를 지지했습니다. 그래서 아래에는 남부 연합군의 회색 바지를 입고 위에는 북군의 푸른색 윗도리를 입고 다녔습니다. 얼마 후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남군과 북군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전쟁 소식을 듣고 모두들 피했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는 남군의 회색 바지와 북군의 푸른 윗도리만 입고 있으면 어딜 가든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남군 바지와 북군 윗도리를 입고 자기 밭에서 일을 했습니다. 드디어 근처에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북군과 남군이 대치하고 곧 총 소리가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북군의 병사들은 회색만 보이면 무조건 총을 쏘았습니다. 남군은 푸른색만 보이면 무조건 총을 쏘았습니다. 그 남자는 온몸에 총을 맞고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젖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구별된 존재입니다. 성도는 세상과 하나님의 사에서의 입장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는 경계선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선지자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1. 선지자이신 예수님) / 본문 : 마 13:57, 막6:4, 눅 4:24, 요4:44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영어에 “코벤트리로 보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코벤트리로 보낸다.”라고 하면 ‘한 집단에서 제외시킨다, 교제를 끊는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코벤트리는 영국 잉글랜드 중앙부 워릭셔에 있는 도시인데 그 곳 사람들은 군인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군인과 시민 사이에 교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파견되는 군인은 일체의 교제가 단절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7세기 청교도 혁명 때, 왕당파 포로가 코벤트리에서 연금 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이후로 사이가 더 나빠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코벤트리로 보내시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선지자라고 번역된 원문의 헬라어 단어는 profhvth”(프롭헤테스, prophetes)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미리 말하는 자, 영감으로 말하는 자”로 “선지자, 선견자, 예언자”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쉬운성경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모두 예언자로 번역했습니다. 영어성경(KJV, NIV, ASV)은 모두 prophet(퍼페츠)로 번역했습니다. 영문의 prophet는 헬라어의 문자를 영문으로 옮겨서 그대로 읽은 것입니다. 원문에서 profhvth”단어는 두 개의 단어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앞의 ‘pro’와 ‘fhvth”‘가 합성된 것입니다. ‘pro’는 전치사로 “앞에, 전에”의 뜻이 있는 단어입니다. 영어의 pro는 전치사로는 “… 찬성하여”와 명사로는 “숙련가, 전문가”를 뜻하는 말입니다. 뒤의 ‘fhvth”‘는 ‘fhmiv’(훼미)에서 왔는데 그 뜻은 “이야기하다, 증언하다, 알게 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자 적으로 선지자 또는 예언자는 앞서서 말하는 사람, 미리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라는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성경이나 기타 현대 성경들(영어 등)은 구약이 39권의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배열은 율법서, 역사서, 시서, 예언서 순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유대인들은 그것을 다르게 구분합니다. 오늘날까지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는 율법(토라), 예언서(네비임), 성문서(聖文書, 케투빔)의 세 가지로만 분류합니다. 유대인들은 첫 번째 성경(토라)를 율법이라고 부르며 사실상 다른 성경들과 차별을 두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만큼 모세 오경은 먼저 성경으로 인정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언서는 그 이후에 형성된 책인데 부분적으로는 문서로 또는 구전으로 내려오던 것을 전기예언서, 후기예언서 부분으로 엮게된 것입니다. 이 성경들은 예언자들의 말이 구두로 또는 문서로써 오랫동안 전달되는 중 그 자체가 지닌 권위와 감화력은 그것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과 감화를 받게 했으며, 회개와 위로와 격려를 받게 했던 것입니다.
특히 자기 나라를 잃어버리고 고국산천을 멀리 떠나 먼 이방나라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을 때 경건한 유대인들의 마음에는 예언자들의 말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수많은 경고와 예언을 등한히 하고 무시하던 민족이 이제 망국의 운명과 포로 생활의 쓰라린 고통을 직접 당하게 될 때 예언자들을 통해서 들려오던 그 하나님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기억되며 동시에 예언자들의 예고와 경고가 그 얼마나 진실성을 가졌었는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께 회개의 제사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장소가 없다.” 그리고 이 때에 와서 비로소 예언자들의 말을 기억하며 그들의 글을 읽고 보존하여 마음으로 새로운 다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전기예언서와 후기예언서에 있는 글들을 읽으며 새 희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법도 안에만 있으면 반드시 영광의 날이 오고야 말리라는 확신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언자(선지자)란 이스라엘의 제일 어려운 시기를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에게 예언자, 예언서란 희망의 메시지요,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의 운명을 놓고 예언한다든가 사업에 대한 예언을 한다든가 꿈꾼 것을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언이란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일전에 어떤 점쟁이가 낸 광고에서 ‘집사, 장로, 목사도 환영’이라는 카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광고를 보면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이 점을 보러 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점쟁이들이 대통령이 당선될 때마다 자기가 예언해서 맞혔다는 등 소문내기를 좋아합니까. 또 자기가 가르쳐줘서 로또복권에 당첨됐다고 자랑하는 점쟁이도 얼마나 많습니까. 요즘은 점쟁이들이 사주카페라는 것을 만들어 커피도 마셔가며 친근한 언어로 예언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예언들은 모두 거짓된 것입니다. 맞아도 거짓이요, 틀려도 거짓입니다. 점쟁이들은 모두 거짓 예언자입니다. 참된 예언자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오직 그 분의 참된 예언의 말씀을 듣고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참된 예언자입니다.

예언자의 말을 존중히 여기기 시작한 다른 이유가 또 있는데 유대인들은 주전 5세기 중엽에 예언자 말라기에 이르러 예언의 소리가 끊어졌고 다시는 그것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하여 필요하시면 하나님이 언제든지 예언자를 보내주신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다른 예언자가 아니라 말라기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다시 엘라야를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13:3절에는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고 하여 이제는 누구든지 스스로 예언자라고 하면 죽음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편 74:9에서도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로서 예언자가 끊어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더 이상 예언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전 예언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어 세례요한은 이사야 40:3의 예언대로 예수님 앞에 유대 광야에 나타났습니다. 요한은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말4:5)한 바로 그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을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 11:14)고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선을 그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 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도 수군덕 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마 16:14-16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예언자)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선지자적 역할은 다른 것입니다. 구약 개념의 예언자 시대는 유대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끝난 것이고 예수님은 새로운 선지자로 오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구약의 선지자와 글들을 무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읽으셨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눅 4:17) 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 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 성경으로서 당신을 증거 하셨습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사도들 역시 구약을 인용하고 가르쳤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행 13:15)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예언자) 보다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갈 때 예수께서 질문하셨을 때 들은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하는 말씀을 들었지만 실상은 그만한 존경을 못 받으신 것입니다. 본문에 말씀하신 것처럼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고 하심으로써 섭섭함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았던 이 백성이 이번에는 하나님의 아들마저 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형장으로 가시던 중 너무나 힘드셨던 탓에 어느 구둣방 문전에 주저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아하수에로스라고 하는 그 구둣방 주인은 몰인정하고 무자비하게도 그리스도를 내쫓아 버렸습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는 내침을 당하시면서 구둣방 주인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좋다. 나는 곧 간다. 그러나 너는 내가 돌아오기까지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주님은 떠나셨습니다. 그 뒤 아하수에로스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나라도 집도 없이 힘겨운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유럽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는 “방황하는 유대인(Wandering Jew)”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오늘날 대다수 유대인들이 조국에서 쫓겨 나와 세계를 전전하는 것을 해명하는 이야기인 듯 싶습니다.

여기는 디즈니랜드입니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아이들이 벌떼처럼 몰려갑니다. 신데렐라가 등장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신데렐라의 옷자락이라도 만져 보려고 그 주변에 둘러섰습니다. 그러나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몸이 심하게 뒤틀리는 장애를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형의 손을 잡고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눈빛으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신데렐라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치는 아이들 틈에 끼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감히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한 걸음, 한 걸음을 사뿐히 내딛으며 신데렐라가 소년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고는 어리둥절해 있는 소년의 얼굴에 살며시 입을 맞췄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어떤 분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디즈니랜드의 신데렐라 공주가 아닌, 평강의 왕을 기억해 보십시오. 장애 소년이 아닌 당신과 내 이야기입니다. 두 경우 다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두 경우 다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신데렐라는 단지 키스만 했을 뿐입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뒤에 남겨진 소년의 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신데렐라였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뒤틀린 소년의 몸뚱이는 예수님이 가지시고, 자신의 아름다움은 장애 소년에게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짧은 감동보다 위대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 The Gift/ 맥스 루케이도 (두란노, 2002)

저는 본문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면서 “예수님 정말로 이 말씀이 사실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꼭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고향인 갈릴리의 나사렛 지방에서만 영접을 받지 못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예루살렘에서도 배척 당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또한 오늘날 많은 국가와 종족, 지역에서 배척 당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본문 말씀은 그만큼 예수님이 느끼시는 섭섭함이 크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이제 내 곁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더 이상 밀어내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을 밀어내었던 이스라엘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밀어내시면 더 이상 기회와 희망은 없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은 하나님의 마지막 카드입니다. 이제 때가 다 되어갑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성경도 요한 계시록의 끝 부분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그 때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을 존경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주로 영원히 따라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요즘 존경하는 사람이 한명 생겼습니다. A(아로노). C(클레멘즈). 게벨라인(1861-1945)이라는 분입니다. 1861년 독일에서 태어나 12세에 그리스도인이 되어 18세에 성직에 헌신하기로 결정한 사람입니다. 그가 결심한 날이 10월 31일로 바로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기념일입니다. 그가 미국에 도착한 후 불과 몇 달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서전 ‘반세기’에서 “나는 신약성경을 읽고 있었다. 그때 갑자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탐구와 그를 위한 봉사에 나의 일생을 바쳐야 한다는 강렬한 충동이 나에게로 밀려왔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연구에 몰두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는 독일 교회에서 시무했으며, 히브리인에 대한 강한 사명을 받고 당시 뉴욕으로 흘러 들어온 수 천명의 유대인을 위한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Hope 선교회”를 설립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의 희망’이라는 잡지를 1894년부터 1945년 그가 죽을 때까지 51년 동안 그 잡지를 편집했습니다. 1889년 종파 문제로 독일 감리교 연회와의 관계를 끊고 미국, 캐나다, 유럽 등에서 순회 설교를 했습니다. 게벨라인의 첫 저서는 “스가랴서의 연구”인데 여기에 순회 설교 때 흥미 있는 이야기가 담겨있었습니다. 그는 랍비들에게 자신의 연구한 책을 보냈습니다. 랍비들은 그의 책을 휴지통해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랍비의 비서였던 한 젊은 청년이 그것을 꺼내 읽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집회에 참석한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11장에 관하여 “유대인의 문제”는 하나의 고전이 되었으며, “주석 성경”은 1912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0년후에 완성했습니다(이 책은 본래 9권으로 발간되었으나 무디 로이제우크에 의해 4권으로 합본되었다. 한글로는 ‘엑스포지터스.성경신약주석(전6권)’으로 옮긴이:강병도 800쪽, 기독지혜사에서 1982년 발행했는데 요즘은 구하기가 어렵네요).

사람들은 종종 게벨라인에게 그토록 수많은 순회 설교를 하고 잡지를 편집함과 동시에 많은 저서를 집필한 비결을 묻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의 대답은 항상 같았습니다. “나는 그저 시간을 낭비한 일이 없을 뿐입니다.” 또한 왜 골프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골프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보다 더 좋은 방법으로 시간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대단히 열정적인 학생이었으며 학자였을 뿐 아니라 헌신적인 설교자였다.

이영제 목사 정리(참고: 개혁신학과 설교연구, 국제신학연구소, 1987. 9. 25)

오직 말. 예. 선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7. 오직 말. 예. 선) / 본문 :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주앙교회 표어를 아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주앙교회 표어를 다시 간략하게 정했습니다. 이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여러분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오직 말씀, 오직 예수, 오직 선교
최상석 집사님에게 암기하는 방법을 배우세요. 주은이 구구단 외우게 하려고 연상단어를 다 만드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88해야 육사(64)가고 77하면 사고(49)친다.
교회가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져야 성장합니다.

불란서가 낳은 실존주의 작가 싸르트르(J.P. Sartre)는 말하기를 “인생이란 계획의 연속이다”라고 했습니다. 노오만 빈센트 필(N.V. Peale)박사는 “사람은 평생목표, 연도별목표, 주별목표, 일별목표를 세워야하고 자기가 40년 후에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겠는가를 명확히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필립스 브룩스(P.Brooks)목사는 “능력에 맞는 일을 구하지 말고 일에 맞는 능력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전래동화 가운데 지금까지도 자손 대대로 이야기를 전한다고 하는 유명한 우화가 있습니다. 한 주장이 늙어서 자기의 추장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세 아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 눈앞에 큰 나무가 있고 그 나무 가지에 독수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추장은 맏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맏아들이 대답했습니다. “하늘이 보이고 나무가 보입니다.” 추장은 실망하여 둘째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둘째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나무가 보이고 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독수리가 보입니다.” 추장은 역시 실망한 빛으로 막내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막내아들이 대답했습니다. “독수리가 보이는데 두 날개가 있고 그 날개들이 마주치는 곳에 독수리의 가슴이 보입니다.” 추장은 기쁨으로 외쳤다. “그 곳을 쏴라.” 막내아들의 화살은 독수리의 가슴을 명중시켰습니다. 물론 추장은 막내아들에게 추장의 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자기의 목표하는 바를 확실하게 내다보는 인간이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교훈하는 인디언의 전래동화입니다. 그들이 들로 나온 목적은 사냥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하늘을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막연하게 독수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습니다. 목적은 사냥이므로 독수리를 쏘아야 할 것이며, 큰 독수리는 다른 곳에 맞추어도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날의 목적으로 볼 때 꼭 보아야 할 한 군데는 온 우주안에 독수리의 가슴 한군데 밖에 없는 것이다.

1. 오직 말씀

돈 몇 푼 벌기 위해서 사장님의 말씀은 잘 따라 지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여러분! 목사인 저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헛것으로 들었을 때 인간에게 무서운 재앙이 닥쳤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창세기 3장 3절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에’를 우습게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창세기 8장 15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브라함도 창세기 12정 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 ”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야 삽니다.

선지자, 예언자, 목사, 선교사 말씀 전달자에게는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사년에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렘 36:1) 눈물의 선지자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사역이 시작됩니다. 에스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겔 15:1)라고 합니다. 말씀이 임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갇혀있지 않습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마리아가 처녀인 자신의 몸에서 구주가 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 천사가 가르쳐 줍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

2. 오직 예수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국민일보 겨자씨에 나왔던 임종수 목사님의 글입니다.] 서울 봉천동의 고갯길에서 큰 글씨로 엉성하게 인쇄되고 맞춤법이 엉망인 전도지 1장을 주웠습니다. “예수를 미드면 맘이 평안함을 어더요 / 수고롭고 괴롬많아 짐무겁게 진자여 빨리 내게 나아오라 / 평안함을 주리라 / 하신대로 나는 믿고 평안함을 어더 / 전도합니다 / 미드면돼요 / 미드세요.”

이 전도지를 나누고 다녔을 사람은 사실 자신의 무식함을 자랑하는 셈이 되었겠지만 이 사람은 그것이 문제되지 않을 만큼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넘쳐흘렀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로 말미암아 소유한 평안은 혼자서 가지기에는 너무 벅찬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전도지를 준비한 것 같습니다. 그 전도지는 교회의 이름이 적힌 그런 전도지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전도자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로만 가득한 그런 전도지였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3. 오직 선교

성령(선교의 영)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교회 성장과 선교에 있어서 성령에 대한 이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합니. 그 이유는 성령 자신이 바로 선교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26에 주께서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 사역에 있어서 성령 자신이 바로 증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과연 성령은 예수의 승천 이후로 교회를 선교사역에로 이끌어 동참토록 하여왔습니다. 선교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몇 가지로 말씀드립니다.

첫째, 성령은 선교의 주도자(The Initiator)가 되십니다.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을 보면 선교의 주도자는 사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주도를 따라 순종한 것 뿐 이었습니다. 교회는 전적으로 성령에 인도하심에 의하여 그 사역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결정적인 일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행동에 옮겼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하루에 3천명씩이나 회개하게 된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였습니다(행 2:1-41). 빌립 집사와 베드로가 이방인이었던 에디오피아 내시와 백부장 고넬료에게 전도를 하고 세례를 준 것도 성령의 지시와 역사 하심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행 8:26-40, 11:44-48). 최초의 선교사인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사로 파송된 것 역시 성령의 명을 따라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행 13:1-3).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는 바울의 길을 막으시고 유럽대륙으로 그 길을 인도하신 분 역시 성령이었습니다(행 16:1-10). 성령은 이처럼 복음의 확장에 있어서 주도권을 가지고 그의 사자들을 인도하였습니다.

둘째, 성령은 선교를 위한 전략가(The Strategist) 이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제자들은 자신들의 선교전략을 가지고 선교에 임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 집사에게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는 일일이 지시하셨습니다(행 8:26,29,30). 고넬료를 전도한 베드로의 사역도 성령의 지시에 의해 수행된 것이다. 성령은 우선 이방인에 대한 베드로의 편견을 바꾸시었고, 후에 말씀하시기를,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 10:19-20).
그랜트 맥클렁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령은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우두머리 전략가(the Chief Strategist) 이시다. 인간의 계획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할 때에만 그 실효성이 있다. 성령은 각 시대와 장소를 위한 전략을 가지고 계신다. 이러한 전략을 분별하고 실행하는 것이 곧 교회의 책임이다.
이런 점에서 최고의 전략가이신 성령을 늘 선교사역의 동반자로 모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셋째로, 성령은 선교의 동기 부여자가(The Motivator) 되십니다. 성령은 선교를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본질적인 능력을 허락하시는 격려자 혹은 동기부여자가 되십니다. 성령은 세계 복음화를 위한 그리스도 교회의 힘의 원천이십니다. 성령께서 임하신 오순절은 성령의 역사 아래 선교가 시작된 날이었으며, 성령을 받고 그 능력을 체험한 사도들과 성도들이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로교회인 우리들이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상 우리는 모두 모두 성령의 역사로부터 시작된 오순절교회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일궈내신 오순절 교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말.예.선 계시록의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계 22:7)

이 말씀을 지키다 고난 받는 최근 박해 소식 몇 가지만 모아보았습니다.
- 파키스탄의 드미트리 세스타코프 목사(38세)는 종교적 증오심을 유발하고, 불법종교단체를 운영하며 종교적 극단주의를 조장하는 문서 배포 혐의 등으로 2007년 1월 4년 간의 노동수용소 형을 선고 받고 이에 불복하여 항소를 진행 중입니다.
- 카라칼파크스탄 지역에서 베델교회를 이끌고 있는 사라바트 세리크바예프 목사(32)도 지난 2007년 4월, 극단적 종교단체 조직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카라칼파크스탄은 정교회와 이슬람 이외의 어떤 종교단체도 등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 우즈베키스탄의 독립언론인인 우미다 니야조바의 경우 불법월경, 불법 밀수품 소지, 사회불안 야기 등의 혐의로 7년 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 지난 4월 말, 에티오피아 동부의 지지가시에서 기독교인들이 모여 집회를 갖고 있던 천막에 이슬람 신자들이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두 명의 기독교인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지난 4월 24일에 아볼레시 인근의 중국이 개발한 유전 지대에서 반군에 의해 살해된 기독교인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반군의 공격에 의해 65명의 에티오피아인들과 9명의 중국인이 살해 당했고, 중국인 기술자 9명이 납치되었습니다.
- 인도네시아 말랑에 거주하는 41명의 기독교인들은 지금 이슬람을 모독한 혐의로 재판을 앞두고 있다.
- 두 명의 목사를 포함한 네 명의 미국인 기독교 지도자들과 약 30 명의 중국인 지하교회 지도자들이 지난 4월 19일, 씬장성의 아케수시에서 모임을 갖던 중 현장에서 체포되어 모두 구속되었다.
- 수단 내전의 주요 접전지역의 하나인 누바 마운틴 지역에서 기독교 복음사역자들이 살해 당했습니다. 사역자 일행은 지난 4월 27일, 트럭을 타고 누바마운틴 지역을 이동하던 중 인근 무장세력들로부터 집중 사격을 받아 사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

오픈도어에서 발표한 10위까지의 박해 국가는 “1위. 북한, 2. 사우디아라비아, 3. 이란, 4. 소말리아, 5. 몰디브, 6. 예멘, 7. 부탄, 8. 베트남, 9. 라오스, 10. 아프가니스탄”입니다. 북한은 줄 곧 1위를 지켜오던 사우디아라비아를 따돌리고 5년 연속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우리의 동포입니다.

말씀으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주임도 말씀이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지켜 행할 뿐만 아니라 가르쳐 지키게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말씀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말씀이십니다. 우리에게 오직 말씀이란 오직 예수와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오직 우리의 미션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증거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은 미션을 말하지만 우리는 오직 예수 복음전파가 유일한 미션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미션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가 나의 미션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솥 밥을 먹는 사람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3. 한 솥 밥을 먹는 사람들) / 본문 : 요 21:15-17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가진 왕자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왕자들이 자기가 가진 값진 보물을 가지고 공주를 찾아갑니다. 길을 가다가 세 왕자가 우연히 만났습니다. 서로 자기가 가진 보물을 자랑합니다. 이 때 천리안을 가진 왕자의 거울을 통해서 보니까 공주가 아파 죽어 가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본 왕자들은 천리마을 가진 왕자의 말을 타고 번개처럼 공주에게 달려갑니다. 그리고 천년 묵은 불사의 약초를 가진 왕자가 공주에게 주어 공주를 살려냅니다. 문제는 이 세 왕자 덕에 살아난 공주가 누구와 결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보시대를 살아가는 네티즌들은 천리안을 가진 왕자 편을 들것입니다. 그리고 자동차의 시대를 맞이한 포드나 현대가 사람들은 천리마을 가진 왕자 편을 들것입니다. 그러나 농경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농자천하지대본’의 사상으로 불사약을 먹인 왕자와 결혼해야 된다고 할지 모릅니다.

미국에는 3십만 개 이상의 교회가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약 5만개의 교회가 존재합니다. 교회도 가지각색의 모습과 철학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에게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가지각색의 대답을 듣게됩니다.
● 어떤 교인들은 예배의 형식에 초점을 맞추어 “조용하고 평온하고 엄숙한,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경이로움을 일깨워 주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와 밴드를 동원해 기쁘고 즐겁게 드리는 교회를 구분합니다. 이런 분들은 잘못하면 교회를 휴양지나 컨트리클럽 또는 이성교제의 전당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어떤 교인들은 교회의 목적을 가지고 교회를 구분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목적은 부패한 세상과 싸워 승리해하는 공동체로 인식하는 교인도 있습니다. 또한 사회 봉사나 선한 행실에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교인은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요새나 원형경기장과 같은 교회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 어떤 교인은 세상문화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 속에 들어가 그들의 문화를 교회문화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교인은 교회를 은행이나 패스트푸드점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어떤 교인들은 교회는 보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통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반대로 최신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현대형으로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교인은 대형쇼핑몰과 같이 필요한 것을 교인들에게 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교토에 가면 “천불상사(千佛傷寺)라는 절이 있답니다. 이곳에는 가부좌를 한 천 개의 불상이 정렬되어 있는데 천 개의 불상 모두가 모습이 다르답니다. 그래서 자신하고 비슷하게 생긴 불상을 골라 예불을 드린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하고 비슷하게 보이는 것을 선택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농경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세 왕자 중에 불사의 약초를 먹인 왕자와 결혼하는 것을 정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단순히 농경시대에 살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생각은 천리안과 천리마는 단순히 사용만 했기 때문에 여전히 왕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사약을 먹인 왕자는 이미 공주가 먹었기 때문에 그 왕자만 보물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여러분들은 앞의 경우처럼 복잡해 질 것 같습니다. 아마 최서은이에게 물어보면 그 답이 쉽게 나올 것 같습니다. 찝짜가(십자가)가 있어야 교회라고 말할 것입니다. 서은이는 십자가만 보면 찝짜가 찝짜가 하고 부른답니다. 너무나 십자가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주신 것입니다.

“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

우리는 예수의 살과 피를 먹어야 삽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먹는 것을 너무 밝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말 음식을 보면 못 먹는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배고프고 어려운 시절을 살아서 그런가 봅니다. 이 지구성에는 약 3,000개 이상의 언어가 존재한답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새해가 되면 떡국을 먹어야 나이가 한 살 더 먹는 민족은 없습니다. 그래서 철이 없는 사람들에게 “나이만 먹지말고…”그럽니다. 한국인이 먹는 것은 음식과 시간만 먹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인은 마음도 먹습니다. 그래서 욕도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챔피언도 먹습니다. 축구 경기에서 전 세계사람이 한 점 잃었다(로스트)고 하는데 우리만 한 골 먹었다고 합니다. 심리적인 면에서는 겁먹고, 애먹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지만 아니 어떻게 애를 먹습니까?

육체를 입고있는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러니 제일 기본적인 욕구가 먹는 것입니다. 컴퓨터시대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상업주의에도 먹는 욕구를 표방하면 사업이 성공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과는 거리가 먼 개인용 컴퓨터 매킨토시의 브랜드와 고로가 사과모양의 애플입니다. 누가 한 입 깨 물은 로고는 사과의 미각을 통해서 인간 욕구를 강조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드웨어만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있습니다. 실리콘벨리의 썬 마이크로시스템사가 개발한 프로그래밍언어가 커피 브랜드의 이름을 딴 “자바(Java)”입니다. 로고도 커피 향이 나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식욕을 통한 이미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식욕이 탐욕이 되어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의 금식기도 후에 사단은 이 식욕으로 첫 번째 시험을 합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먹는 것으로 죄가 들어왔으니 먹는 것으로 해결을 해야합니다. 문선명의 통일교는 이것을 유치하게 해석을 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을 성적 타락으로 비유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죄의 피가 들어왔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자신을 통해서 성교를 하면 죄가 사해진다고 합니다. 이것이 피가름이라는 통일교 교리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한 솥의 밥을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공동체를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생각합니다. “옛날에 손님이 오면 가족이 먹는 한솥밥에 차려낸다는 법은 없었습니다. 가문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친계(親系) 8촌, 외계(外系) 4촌, 처계(妻系) 2촌 밖의 손님은 딴 솥으로 밥을 지어냈습니다. 밥상은 물론이요 반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한 숱 가락이 한 찌개나 국을 퍼먹는 것은 위생에도 안 좋습니다. “한 솥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직계 가족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이를 생각하면 단순히 선생과 제자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야말로 한 솥의 밥을 먹은 사이입니다. 3년 6개월이라는 시간동안 한 솥 밥을 먹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 15:32)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킨 오병이어의 사건이나 칠병이어의 사건 역시 한 솥의 밥을 먹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축사하신 한 광주리에서 나온 떡과 고기를 먹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시작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고기 잡으러 나간 디베랴 바닷가에 오셨습니다(요 21:1). 밤새도록 고기를 못 잡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6)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은 순종하여 163마리의 고기를 잡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준비하신 모닥불에 고기와 떡을 굽고 제자들과 디베랴 바닷가에서 아침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의 어린양을 먹이는 일에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면 어린양을 먹일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마음이 사랑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한계가 있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세 번 모두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마다 주어진 말씀은 “양을 먹이라”입니다. 두 번째 “내 양을 치라”고 했는데 이것도 역시 같은 뜻으로 보면 됩니다. 양을 치는 것은 기본이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푸른 초장으로 잘 인도하는 것이 양을 잘 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와 제자들이 먹었던 것과 같은 한 솥의 밥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골라낸 사람, 가르치라)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알려주는 본문 가운데 하나가 에베소서 3:1-13말씀입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수천 년 동안 간직해온 신성한 비밀을 밝혀줍니다. 바울은 이 비밀을 “신비”라고 불렀습니다. 이 비밀을 수천 년 동안 하나님만 알고 계셨고 족장들도, 제사장들도, 선지자들도 심지어는 천사들도 알지 못했던 비밀입니다. 이제 이 비밀이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이 비밀이란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밀”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미스테리온(musthrivw/)이란 말입니다. 이 비밀이란 허락된 사람 외에는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미스테리온은 오랫동안 숨겨 왔지만 하나님께서 마침내 원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결정하신 비밀입니다. 바울은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셨다”(엡 3:3)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자신이 깨달아 안 것처럼 우리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엡 3:4-5).

그러면 이 신비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엡 3:6)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지체가 되어” 교회를 구성하게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신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된다”(갈 3:28)는 하나님의 새 언약입니다.

우리나라가 한 솥 밥을 먹은 것은 농사신인 선농제사 때 희생당한 신성한 신체인 소의 어느 한 부분도 버리지 않고 한 솥에 끓인 국물에 밥을 말아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문무백관 백성, 거지에 이르기까지 한솥밥을 나누어 먹었던 말하자면 공식 음식인 선농탕 곧 설렁탕입니다. 그래서 큰 것을 말할 때 ‘선농단 국솥 만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한 솥 밥을 먹는 사람들”(설렁탕) 그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십자가로 하나된 ‘설렁탕’교회 이것이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이 비밀(미스테리온)을 전하는 것이 인간보다는 천사가 더 합당해 보이지 않습니까? 만일 미가엘이나 가브리엘 천사가 구름가운데 갑자기 나타나서 천둥 같은 목소리로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선포한다면 모든 사람이 귀를 기울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는 것을 천사들에게 부탁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엡 3:7)고 했습니다. 사실 천사들은 복음의 비밀조차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천사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피조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복음을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고 했습니다. 이 복음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와 설렁탕(한 솥 밥을 먹는 사람들)을 먹는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이 복음의 진리를 베드로와 바울처럼 힘써 전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삶에 관한 비유(1) 등불을 비추어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4. 비유(14) – 삶에 관한 비유(1) 등불을 비추어라) / 본문 : 눅 8:16-18, 11:33-36

“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11: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미국에서 오래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기차로 여행을 떠나고 역마차들이 많이 이용되던 때입니다. 이 때에 시골 열차 건널목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온 가족이 탄 마차가 달려오는 기차에 치여, 마차에 타고있던 일가족이 몰살하고 말았습니다. 사건 심문이 일어나고, 그 건널목을 지키면서 기차가 다가올 때 지키는 건널목지기가 소환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사건이 발생한 날 밤에 마땅히 그랬어 하듯이 그 자리에 지키고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기차는 그 시간에 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까?” “예”
“당신은 등불을 들고 기차를 맞으러 나갔습니까?” “예”
“그리고 기차가 온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등불을 좌우로 흔들었습니까?” “예, 흔들었습니다.”
이 부분이 핵심이었으나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한 사고로 결론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후 여러 해가 지나 건널목지기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소리를 내면서 “오. 저 불쌍한 사람들” 그러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친구가 그때의 사고 때문에 그러는 것임을 알고 “자네는 아무 잘못도 없었네, 어쩔 수 없었던 일이네!”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세밀하게 조사가 다 이루어지지 않았나. 자네의 혐의는 완전히 벗겨졌네.”라고 했습니다. 건널목지기가 이 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한 가지 묻지 않은 것이 있었다네.” 등불은 켜 있지 않았고, 이 때문에 마차를 탄 가족이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빛의 목적은 비추이기 위함입니다.
오늘 두 비유는 말씀이 전개되는 방식이 것이 거의 같습니다. 하나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 나오고 다른 하나는 대적자들을 책망하실 때 나옵니다.
첫 번째 비유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8: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두 번째 비유는 11: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빛이 있기는 한데 숨겨졌다는 그 빛은 의미가 없습니다. 빛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등대 만드는 일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 손에 상처가 하나 있는데 등대에 올라가 납땜하다가 딘 흔적입니다. 추운 겨울에 등대 불빛이 꺼져서 빛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리하러 갔습니다. 대개 불이 꺼질 때는 전기가 안 들어오기 때문에 꺼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기 납땜을 해야 하는데 막막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닥불을 피우고 인두를 불 속에 넣었다가 빨같케 달아오르면 이것을 가지고 식기 전에 빨리 등대로 올라가 납땜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바람을 불고 인두는 쉽게 식는데 납이 제 손에 떨어져 보글보글 끓고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잠시 참아야지요. 그 때 생긴 흔적입니다. 등대는 잘 보이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등대의 목적이 비추기 위함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빛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요 1:9-10).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의 우주의 상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의 깊음위에”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원래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생겼습니다(창 1:2).

이 세상은 빛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첫 번째 말씀은 “빛이 있으라”였습니다. 이 빛이 생겼을 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원상태는 물러가고 아름답고 보기에 좋은 질서의 세계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빛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만물의 모태는 바로 빛인 것입니다. 이 생명의 빛을 보시고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 빛이 하나님에게 첫 번째의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죄악으로 세상은 영적인 어두움이 빠집니다. 혼란한 세상이 된 것입니다. 아담과 화와는 서로에게 미루기만 합니다. 책임을 지려는 태도가 보이지 않습니다. 빛을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빛 가운데 아름다움이 있고 생명이 충만하고 기쁨으로 가득 찼던 에덴 동산에 다시 창조이전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엄습해 왔습니다.

이런 영적인 혼란한 세상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요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빛의 역할은 밝혀줍니다. 따뜻하게 합니다. 자라나게 합니다. 생명을 줍니다. 그리고 인도합니다.
빛의 속성이 있습니다. 빛은 직선으로 비추입니다. 빛은 비추게 되면 반사됩니다. 빛은 아름다움(색깔)습니다. 빛은 정직합니다. 빛은 불변합니다. 빛은 시공을 초월합니다.

이런 빛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게되니 어두움이 들어 나는 것입니다.
눅 8: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빛은 어두움을 들쳐 냅니다. 그대로 감추게 하지 않습니다.

등불은 눈입니다.
눅 11: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지금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눈이 여러분의 등불입니다. 눈이 돈만 바라보면 돈 있는 곳으로 인도합니다. 눈이 산을 바라보면 산으로 갑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주앙” 주님만 바라보는 교회입니다. 우리의 등불은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자신이 빛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빛이 없으면 아무에게도 빛을 줄 수 없습니다.
눅 11: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빛을 숨기는 것은 죄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살릴 수 있으면서 죽게 만들면 그것은 죄인 것입니다. 빛이 있는데 빛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죄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빛은 아닙니다. 우리는 마치 달처럼 해의 빛을 받아 반사시키는 것입니다. 태양은 주님이시고 우리는 달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봄으로 빛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는 빛을 잃게됩니다.

이 빛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 주앙교회가 아프가니스탄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정신호 집사님, 박정옥 자매님이 가게됩니다.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은 이란과 파키스탄, 중국, 구 소련의 중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의 십자로”로 알려져 있는 나라입니다. 건조한 산악지대로 비옥한 계곡이 많습니다. 1992년 공산주의 정부가 무너진 후로, 무자히딘(mujahidin) 게릴라와 과도기 정부의 불화로 내란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지하드(jihad)라는 이슬람 성전으로 시작했으나, 권력과 종족 분쟁, 종교적 패권다툼으로 잔인하게 변질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나라 중 하나이며 복음전하는 것을 핍박하는 박해국가 1위 나라입니다. 교회 건물은 하나도 없는 반면 이슬람 사원은 48,000개가 있는 나라입니다. 북한은 선전용 교회라도 가지고 있는데 아프간은 그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다 미국인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커지고 있어 서양 선교사들이 활동하기가 매우 어려워 졌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은 아프간의 하자르족과 유사한 용모를 지니고 있어서 아프간인들에게 친근감을 준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앙교회에 기회를 주셨습니다.

911테러가 일어날 때까지의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은 학교도 갈 수 없었습니다. 여성이 혼자 집밖에 나가면 가족에게 매 맞아 죽습니다. 이때 여성을 죽인 가족은 명예살인으로 인정되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습니다. 여성은 숨쉬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자유도 누릴 수 없는 나라입니다. 911이후 많이 변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많은 어려움 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빠른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프간 여성의 현실은 아직도 갈길이 멉니다. 아프간 여성 가운데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5%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내전이 아직 수습되지 않은데다 경제마저 붕괴되어 있어 실업률, 특히 여성실업률이 지나치게 높으며 전쟁 미망인들은 아직도 여성의 사회활동을 타부시 하는 분위기 때문에 대부분 구걸로 연명하고 있답니다.

이곳에 우리 박정옥 자매님이 가게됩니다.
여러분! 기도해 주십시오.
스펄전은 “기도하지 않고 성공했으면 성공한 그것 때문에 망한다”고 했습니다.
죠지뮬러는 “기도란 그리스도의 능력을 붙잡는 손이다”고 했습니다.

기도로서 우리의 빛이신 예수님의 빛을 받아 우리 또한 이 빛을 비추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본문 : 마태복음 16:13-17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어려운 신학을 꼬집는 일화로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난해한 신학자인 폴 틸리(Paul Tillich)가 주님이 이 땅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 날에 예수님를 만났다면, 그리고 예수께서 가이샤랴 빌립에서 베드로에게 물었던 중요한 질문을 폴 틸리에게 묻는다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폴 틸리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존재의 존재론적 근거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의 목적론적 근거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뭐야!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려운 말이나 신학이 마치 수준 있는 신학이나 설교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질문에 베드로는 짧게 그리고 핵심 있는 내용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이 주앙교회 성도 여러분의 고백도 되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인생의 의미나 삶의 목적을 찾고 싶어하는 깊은 갈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직업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 ‘되느냐’ 보다 무엇을 ‘하느냐’에 가치를 둡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쉬지 않고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무엇을 소유했는가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짓습니다. 이들은 새 차, 새 집 또는 새 옷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경제적인 문제에 연연하고 마음을 졸입니다. 항상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뿐인 진리는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존재는 그저 광활한 우주를 떠다니는 잡동사니에 불과합니다. 예수를 바로 아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우리의 가치관 목적의식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여론
예수님께서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회적 평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예수는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얻은 지식으로 예수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는 나의 지식으로 또는 사람의 지식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소위 “4대 성인”중의 하나라고만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TV나 신문에 불교행사에 카톨릭 신부나 개신교 목사가 참석해서 예불하는 행위를 보여주며 “종교계가 마음을 합하고 있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이런 영향하에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종교다원주의 사상에 물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이것을 반대하는 개신교 목사는 이 시대를 거스리며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하는 목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의 마음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성인중의 한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2000년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복음주의 자들이 209개국으로부터 1만 7천여 명이 모여 자신들의 복음주의적 입장을 재 천명하는 “암스테르담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이 선언문의 내용들 속에는 ‘우리는 타종교인들에게도 예절 있는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복음 전도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타 종교인에 대해서 배타적 태도로 접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 동네로 통행하시고 유대인으로서는 만날 수 없는 여자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대화하셨습니다. 타 종교인과 대화 할 수는 있으나, 우리는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복음의 유일성(uniqueness)의 진리를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세상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의 대답을 잘 보십시오.
14절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나 여전히 예수를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모두 사람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 또는 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몰라본 사람들
“가로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16:14)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각각 느끼는 데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따라 다녔습니다. 창세기부터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수많은 제사장과 왕들을 통해서 그렇게 누누히 약속하시고 약속하셨던 분이 실제로 오셔서 그 증거들을 또한 그렇게 많이 보여주셨건만 양을 잡으면서도, 성경을 읽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것의 실체 되신 그 분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이들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포로로, 노예로, 식민지로 고통을 당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예수를 몰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비슷하게 봤지만 그들은 전혀 틀리게 보고 있는 것이고, 그 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희미하게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 –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채찍질하시며 정화시키시는 모습과, 부정과 부패를 일삼으면서 형식과 제도에 빠졌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독사의 새끼들아”하며 책망하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약대털옷을 입고 광야에서 외치면서 헤롯 같은 권력자의 비리를 꾸짖으면서 시대와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세례요한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는 그러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를 개혁하려고 오신 게 아닙니다. 비슷하게 생각을 했지만 전혀 예수님을 잘못 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썩어빠진 제도와 권력을 향해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드셨던 민중의 지도자로 여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한 일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오신 분은 아닙니다. 아무리 제도를 바꾼다 해도 하나님을 떠나 죄와 저주와 사단에게 빠져 있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로 사회를, 세상을 개혁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 – 5병2어로 오천명을 먹이고, 물위를 걸으시고, 소경을 고치시고 하는 엄청난 신비한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리고,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구약시대 최고의 신비한 능력을 소유했던 엘리야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러 오신 엘리야로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시기 위해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신비한 능력을 보이시기도 하셨지만 그 능력자체를 보이시기 위함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을 신비한 능력을 체험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수련회를 하면 무엇인가 불을 받아야 하고, 방언을 하지 못하면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계속 무언가 신비한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일생을 보냅니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쓰러지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비한 어떤 체험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정말 잘못 본 것입니다.

예레미야 – 민족과 국가의 아픔과 고난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눈물의 선지 예레미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셨던 예수님을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예레미야로 여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창녀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 가난한 자들과 함께 식사하셨으며 불쌍한 고아인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 유하시기를 기뻐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박애주의를 실천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본 받으라고 오신 게 아니십니다. 예수를 믿어서 하는 가장 고귀한 일이 마더 테레사와 같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돕는 자선사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체 자선만이, 박애주의만이 최고의 선인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 가난을 조장하고 빈곤을 가져다주는 근본적인 존재한테 이용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박애주의를 보여주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레미야로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단히 착각을 한 것입니다.

선지자중의 하나 – 산상보훈을 비롯해서 성경을 풀어서 권세 있게 말씀을 전해 주실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훌륭하게 전달 해주는 훌륭한 선지자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훌륭한 가르침과 삶의 지표를 제시하시는 인생의 선생님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이요 선지자적인 요소가 있으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단히 착각한 것이고 잘 못 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단순히 우리가 따라야 되고 실천해야될 삶의 규범을 제시하시고 가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행위자체와 말씀자체를 지키고 실천하는 게 기독교라면 기독교도 이슬람교나 불교나 똑같은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들도 마호멧을 석가모니를 존경하고 그 들이 제시한 삶의 규범과 원리와 실천강요를 따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호멧처럼, 석가처럼 우리에게 규범을 던져주시고 하늘나라에 가신 분이 아니십니다. 종교를 창설하시고 교리를 실천하고 율법과 규범을 실천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선생으로만, 선지자중의 하나로만 여기기 시작할 때 기독교는 종교에 빠지고 제도에 빠지고 교리에 묶이게 되고, 생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형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율법에 빠지고 윤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천할 무언가를 가르치고 떠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생명으로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관심은 이 질문으로 대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한 제자들에게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못된 버릇하나가 있습니다. 눈치입니다. 아마 전 세계에서 눈치하면 한국사람일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눈치가 너무 빨라 속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내 심중의 마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고 하셨습니다. 나의 고백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베드로의 고백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디서 배워서 알게된 것이 아니며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친히 역사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개혁가도 박애주의자도, 신비운동가도 아니신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수 천년동안 하나님의 가슴속에 감취었던 비밀이 터지는 순간이요. 수 천년 동안 그의 조상과 선진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요. 모든 고통받고 저주가운데 있던 인류가 기다리던 소리였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이 단어 하나에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화가 다 들어있습니다(골 2:3). 그리스도안에 하늘과 땅이 통일됩니다(엡 1:10). ‘그리스도’이 단어 하나에 창 1장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계시록 마지막에 나타나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모든 권세가 다 포함된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이 이름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 후에 세상은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이 발견하고 미친 듯이 전세계로 들고 뛸 수밖에 없었던 그 이름 ‘그리스도’입니다. 원형경기장에 죽어가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칼과 창 앞에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도 찬송하게 만들었던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그리스도
우리는 눈치가 빠르니까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카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도 받았고 “이제 따라만하면 되지”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람마다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각기 다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의사로 믿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인정이 많으신 은행장쯤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입학 시험장에서 인심이 후한 체점관이나 심판관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세상의 출세와 성공의 수호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범 답안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가 필요할 때만 찾아가는 병원이나 은행으로 생각하고 내 사업의 방패막이로 생각하면서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는 때로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결국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을 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필요할 때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예수와 함께 한 몸이 되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워싱턴이 대통령이 된 후의 일입니다. 한번은 각료들과 고향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각료들은 인사를 드릴 때에 너무 송구스러웠습니다. 대통령의 어머니로 하여금 구차한 일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각료들은 대통령에게 건의하였습니다. “각하,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 나라의 어머니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일하게 하고 어머니는 쉬시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통령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그런 의견을 건넸습니다. 그때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대통령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께서 일하라 하셨으므로 나에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 나는 일할 것이오.”

여러분! 손을 가슴에 얹어봅시다.
진심으로 예수가 나의 주님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들을 차례입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행위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행위를 쉽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 봉사하는 것, 헌금하는 것, 전도하는 것, 선교하는 것은 모두가 행위입니다. 이것이 다 아무 것도 아니란 말씀입니까?
요한계시록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예수님을 따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47. 예수님을 따라) / 본문 : 마태복음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9, 막 1:17)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따라가면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도 안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도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합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CIS선교사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러시아 노보시비리스크로 떠났습니다. 비행기가 직항이 없기 때문에 다른 도시를 경유해서 가야합니다.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하루를 먼저 블라디보스톡으로가서 기다렸다가 가야하는데 비행기 표를 구할 때 비행기 회사에서 다 알아서 먹여주고 호텔 잡아 준다는 겁니다. 미심쩍어서 두 번이나 확인했는데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만 믿고 가는데 느낌이 이상한 것을 인천 공항에서 집 붙이고 그 쪽 공항사정을 알 수 없어 질문을 했습니다. 짐을 찾을 때, 그리고 어떻게 갈아타는지 등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래서 비행기 타고 승무원에게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비행기를 탔습니다. 걱정을 하고 비행기를 타고 있는데 어떤 분이 다가오시더니 “컴퓨터 선교회 이영제 목사님이시죠”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는 노보시비리스크 김선종 선교사입니다.” 하시는 겁니다. 순간 모든 걱정이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거기서 선교활동 하시다 들어오셨다 다시 가시는 이분만 따라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오신 예수님만 따라가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1)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막 8:34, 눅 9:23)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어떻게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자기 자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 1:30절에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롬 4:2절에서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같은 본문이 누가복음에는 “…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날마다”가 더 있습니다. 십자가는 지고 싶을 때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관계없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했습니다.

3) 다른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요 8:15) 영적인 분별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육체를 따라” 즉 외모로 판단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넘어트리려고 자기 제자들을 보냈습니다.“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마 22:16)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것을 바리새인도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만 외모로서 사람을 판단하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려고 들면 끊임없이 싸움이 일어납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하도 싸우니까 이런 말이 다 있습니다. 술집에서 사람들이 술 먹다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싸우고 있는데 주인이 하는 말이 “여기가 교회인줄 알아!”그랬다는 겁니다. 저는 치아가 좋지 않아 지난번 기둥을 세우고 해 넣을 때 이런 생각이 나는 겁니다.

4)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요 10:4)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만일 예수님의 음성으로 알고 갔는데 만일 그것이 사람의 음성이었다면 모든 것이 잘못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9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찌어다”
이번에 갔던 선교대회 장소는 노보시비리스크인데 그 시에서 한 1시간 정도 들어가면 ‘시비락’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서 선교대회를 했습니다. 말이 러시아를 갔다 왔지 그곳에 갇혀서 진짜 러시아를 다녀왔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아주 외딴 곳으로 주변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숲 속에는 벼룩 같은 벌래(시크락?)가 있는데 사람 몸에 붙으면 거머리처럼 살을 파고 들어간답니다. 실제로 이 벌레에 물린 선교사님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멋있다는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도 한번 못 걸어 다녔습니다.

제가 선교대회에 참석하면 네 가지 정도의 유익이 있습니다.
① 선교사님들을 만나 교재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고생하면서 갔다해도 저는 별 것 아니었습니다. 모스크바, 빼째르부르그에서 만났던 분 그리고 이 노보시비리스크에 제가 두 번째 가는데 10년만에 만난 분, 그리고 기태 형제 먼저 신앙 생활하던 교회에서 보낸 선교사님이 이번 대회 총무를 맡아 일하고 있었고 이분도 우리 사무실을 다녀간 분입니다. 그리고 저희 집사람이 전돌이 성경여행을 주었는데 지금 얼마나 아이들이 열심히 보는지 고맙다고 전달해 달라는 분, 몽골에서, 우즈벡에서, 하바롭스크에서 오신 분들하고 교재를 나누고 이분들을 저를 그곳에 꼭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교재가 있었습니다.
② 영적 충전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인도만 하지 예배 드리는 자로 있기가 쉽지 않은데 예배를 드리며 함께 충전하며 지낸다는 것입니다.
③ 세계를 볼 수 있는 시야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④ 또 하나는 유명 강사님들을 한자리에서 만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 대회가 보통 대회입니까? 아무나 안 부릅니다. 고신의대 양리학 교수님이셨다가 한 달 전에 은퇴하신 강 교수님이 계십니다. 장로님이신 데 같은 방을 사용하면서 정말 많은 교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과 대화 나눌 때 저를 “이 어르신이”그렇게 부르시는 겁니다. 장로님의 고백가운데 “지금도 이런 목사님이 계시네” 저에게 그러시는 겁니다. 제가 다른 이야기 안 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대로 예수님만 보고 따라가려고 설교도, 성경도 그렇게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령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이유는 길 잃어버리지 않고 예수님께 오라고 인도하시는 영을 보내주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고 하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사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CIS선교사 대회에 오신 분 중에 미국 국제제자훈련원 사역을 하는 김홍장 장로님이 계십니다. 여기서 하는 사역이 ‘릭 워렌’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을 가지고 성경공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이 책이 인기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처럼 목적이 분명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책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것을 가지고 교육하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유행 따라가 가는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혹 남들은 무슨 …훈련을 하는데 우리 주앙교회는 아무 것도 안 한다고 우리의 신앙이, 우리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라가세요.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요 우리의 목표입니다.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베드로와 같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선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질그릇일지라도 그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사람을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우리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러시아 동남쪽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과 가까운 곳에 ‘날칙’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에 처음으로 선교사로 간 사람은 고려인이었습니다. 이 고려인 전도사는 한국선교사님이 훈련시켜서 보냈는데 파송한 선교사님에게 6개월만에 연락이 왔습니다. 고려인 선교사님에게 한 달에 2백불 정도를 지원해 드리는데 이 돈을 노리고 이 선교사님을 죽였습니다. 선교사님이 4일이 넘어서 도착해서 보니까 시체가 그냥 천으로 덮여져있는데, 확인하기 위해서 천을 열었을 때는 시체에 구데기가 득실거렸습니다. 그런데 이 고려인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흐르는 ‘날칙’에 실버 선교사님 한 분이 1년 전부터 사역하고 계십니다. 이분은 4박 5일을 걸려서 기차를 타고 선교대회에 도착하셨습니다. 여성 선교사님 한 분은 100만 명이 있는 도시에서 혼자 사역하고 계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저에게 계속 선교사님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나갈 수 없지만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우리도 죽음을 무릎 쓰고 선교하는 선교사님들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