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앙망하고 주의 팔에 의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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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5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6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 51:4-6) 

사람의 첫 번째 죄, 두 번째 죄, 세 번째 죄 모두가 하나님을 떠난 죄입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고 하시고 하와를 주셨습니다. 하와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아담(남편)을 돕는 것입니다. 물론 아담도 하와를 도와야 합니다. 서로 돕고 살도록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지어진 목적이 그것입니다. 하와는 아담을 도와 줘야 하는데 사탄의 꾀임에 빠져 그만 아담이 아니라 사탄을 도와 주었습니다. 하와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것입니다. 그것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도 주었고 이 부부는 하나님께 범죄 하였습니다. 남자 분들 잘 들으세요. 사탄이 제일 간교하고요, 그 사탄은 여자를 통해서 들어옵니다. 여자 말 너무 잘 들으면 안됩니다. 그냥 설거지하는 것 정도는 들어주세요. 남자가 가정을 리더하지 못하면 문제입니다. 가정을 지키세요. 그러기 위해서는 내 목소리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정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에게 하나님의 첫 번째 음성이 들립니다. “아담을 부르시며 …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여기 잘 보세요. 죄를 지은 사람을 부르시는데 하나님은 하와를 먼저 찾지 않습니다. 아담을 찾으십니다. 책임이 아담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주가 아담이라는 사실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아벨은 양을 치었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아벨은 양으로, 가인은 자기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시기 질투하여 결국 살인하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두 번째 음성이 가인에게 내려집니다. “6…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됨이냐 7 내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 4:6-7) 하십니다. 그리고 땅에 사람이 많아졌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보기에 좋은 여자를 선택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인류 역사를 새롭게 하시려고 물로 이 땅에 홍수를 내리십니다.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을 뽑습니다. 노아였습니다. 성경은 노아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의인이라고 하나님이 말한 사람은 ‘욥’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그를 의로 여기시고”(창 15:6)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완전하다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하시고 이스라엘 레위지파 사람들에게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 18:13)고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소개한 사람은 ‘므두셀라’(창 5:22), ‘에녹’(창 5:24) 두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노아만큼 성경에서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로부터 이 세상을 제 창조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아와 그의 가족을 제외하고 모두 죽였습니다. 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삽니다. 지금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살려두실 자와 없애버리실 자를 선택하고 계십니다. 더 늦기 전에 하나님의 선택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은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담에게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창 1:22, 2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
예수님은 첫 설교에서 우리에게 8가지 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마 5:1-12).

여러분!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고 복을 주지 않은 일이 있나 찾아보세요. 책망하고 버릴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고쳐 쓰시기 위함입니다. 회개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은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죽어야 할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시지도,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그냥 내버려둡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은 복 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4절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은 얼마나 먼 길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얼마나 힘드냐 하는 것도 문제가 안됩니다. 얼마나 멀어도, 힘들어도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다 좋은데 한가지 너무 물질에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를 성공시키려면 반드시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그것이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무너진 지 오래되었는지 모릅니다.
본문에 4절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고 하셨습니다. “세우리라”는 원문은 ['yGIr]a(아르기아)인데 어근인 [g’r;(라가)에는 여려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가르다, 절단하다, 던지다, 열다, 해결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종합하면 “내가 해결할 것이다” 또는 “내가 열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해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셨습니다.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잠 3:17) 고 했으며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히 10:20) 라고 했습니다. 이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캄보디아 조성규 선교사님이 말씀하신 것인데 캄보디아 어느 지방의 촌인데 한 지역을 개발시키고 우물을 파주고하는 외국 분들이 계시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거의 현지인 처럼 생활하면서 돈이 모이면 우물하나 파주고 하면서 몇 년째 일을 하는 분이 계시답니다. 그런데 조 선교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 일을 하는 분을 보고 놀랐다는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교 나와서 거기서 몇 년째 그러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놀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고요. 하버드를 나왔기 때문에 오히려 가능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버드대학교는 1638년 여름에 초라한 통나무집에서 단 한 사람의 교사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하버드라는 이름은 마치 삭개오처럼 자기의 책과 재산의 절반을 대학에 기증한 청교도교회 목사 존 하버드의 이름을 따라 붙인 것입니다. 19세기 초 신학대학·법과대학·의과대학으로 개설된 학교입니다. 하버드 대학교는 청교도 목사에 의해 신학교로 출발한 학교입니다. 그래서 이 학교는 전통이 있습니다. 학교의 철학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 가지는 따로 따로 배우기보다는 다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신학’입니다. 하나님을 배우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다른 것 다 하고 하나님 잊어버리면 끝납니다. 본문에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법학’입니다. ‘법’이 무너지면 무법천지가 됩니다. 미국 서부에서 얼마나 총질을 해댔습니까 심심하면 사람이 죽는 겁니다. 도적질에 살인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 법은 십계명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무슨 돈 벌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법이 아닙니다. 본문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법이 나가는 것입니다. 시작이 하나님이라야 합니다. 기준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파라오가 만든 법이 아니고 공산당이 만든 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법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살리는 ‘의학’입니다. 고통과 아픔에서 구하는 의학입니다. 이 세 가지 학문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할 때 이 세 가지를 권해보세요. 장자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된다고 가르치세요. 신학을 하라고 하세요. 그 다음에 법학을 하라고 하세요. 그 다음에 의학을 하라고 하세요.

오바마 대통령도 하버드에서 법을 공부했습니다.
오바마는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였으며, 민간기업에서 잠시 근무 후 철강산업의 쇠퇴로 슬럼화 된 시카고에서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시민운동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낙후된 주거환경, 범죄와 실업의 증가 등 지역의 문제 해결에 노력하여 주목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법을 모르니 도와줄 한계를 느끼고 하버드 법대를 들어가서 공부했습니다. 하버드학교에서는 꼭 면접을 봅니다. 학생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그 때 제일 중요하게 판단하는 것은 이 학생이 하버드를 졸업하고 인류와 미국을 위해서 무슨 선한 일을 할 사람인가를 판단합니다. 오바마는 “시카고 빈민들을 법을 알아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입학을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하버드는 이런 사람 제일 좋아합니다.

몇 년 전에 한국인 2세 아이가 미국 SAT(미국 대입학력고사)시험을 수석으로 합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지원한 학교가 하버드였습니다. 그런데 떨어졌습니다. 부모들은 이해할 수 없어서 하버드 총장에게 질의서를 보냈습니다. 우리 아이가 떨어진 것을 납득이 가게 설명해 달라고 당당하게 보냈습니다. 부모님들의 생각은 SAT에 수석을 차지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얼마 후에 답장이 왔습니다. “이 아이가 우리 학교를 나와서 인류와 미국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이 학생이 지금까지 봉사한 경력이나 또 그런 봉사를 하겠다는 사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좀 점수는 부족해도 사회를 위한 봉사를 하겠다는 신념이 분명하면 하버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학교를 2학년 다니다 중퇴하고 마이크로소프트 회사를 세운 빌게이츠도 얼마나 사회를 위해 기부하고 삽니까. 정신이 있는 겁니다. 함께 사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 쏙 빼놓고 자본주의만 배우면 안됩니다. 협력하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일은 힘들다고 포기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해야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본문 5절 “내 공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이 이미 하나님에게서 나갔습니다. 정치인들이 한쪽에서 할 일을 다 했으면 다른 쪽에서 응답할 차례를 두고 “공은 넘어갔다” 고 합니다. 구원의 문제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일만 남았습니다.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본문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고 하십니다. 이사야가 말한 ‘섬들’은 이방나라들을 말합니다(사 11:11, 40:15, 42:4, 10, 12, 49:1).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사 42:4) 고 하십니다. 모든 민족이 섬이지만 특별히 우리 민족도 섬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다른 것은 반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반도의 지리적인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휴전선이 가로막혀 북쪽으로 못 갑니다. 1998년 6월 16일 고 정주영 회장은 소 500마리를 몰고 북한으로 갔습니다. 실제로는 501마리였습니다. 1마리는 북한에서 내려올 때 끌고 온 소 값으로 501마리를 몰고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못 갑니다. 소 500마리 끌고 갈 수 없습니다.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섬나라와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섬나라와 같은 이 대한민국이 하나님을 앙망하고 주의 팔을 의지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이 민족을 위해 새벽마다 부르짖는 소리를, 추운 겨울 산 속 토굴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칼과 총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공산당에게 손들지 않은 믿음을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이 민족이 하나님을 앙망하여 살았습니다. 일어났습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는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지켜 가야할 차례입니다. 받돈은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본문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 이 구원이 폐하여지지 않았습니다. 감사할 것이 많지만 이것이 제일 감사한 일입니다.
여러분! 만일 구원이 폐하여 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겁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땅을 살펴보세요. 세상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연기처럼, 하루살이처럼 사라지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영원히 있고, 폐하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이 복음이 내게 도착했습니다. 빛이 비추었습니다. 이제는 살았습니다.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토록 주님의 팔을 의지하여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믿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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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 6:11- 15)

얼마 전 미국 경제가 좋을 때 미국에 이민 가면 그림 같은 집들을 집 값 10%만 내면 산다고 했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은 시간문제로 보였습니다. 이것이 착각입니다.
진실은 10%입니다. 집 값을 내고 20-30년 매월 할부금 내느라 투 잡에 심지어는 스리잡에 주 7일 근무를 해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는 말 그대로 잠만 잡니다. 집(건물)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는 꼴이 된 겁니다. 여관도 아니고 오죽하면 이런 말이 있겠습니까. 멕시칸 가정부 호강시켜주러 미국 이민 왔다고 한탄합니다. 하루종일 돈 벌어다 하루종일 집 청소하는 가정부 다 같다줍니다. 그래도 가정부는 집에서 살아보지만 돈벌어오는 그 집 주인들은 집에서 살 시간이 없습니다. 그 뿐 인줄 아십니까 할부금을 조금이라도 못 내면 바로 은행 넘어가 다시 월세아파트로 돌아갑니다. 지금 이렇게 된 분이 많습니다.

이 집을 내 집으로 만들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지키고 믿음을 가지게 하려면 진실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착각하는 것은 믿음은 아무 노력도 힘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10%만 내면 당장 내 집이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많습니다. 돈은 좀 못 벌어도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식구들에게 믿음이 생깁니다. 아버지가 열심히 살면 자식교육은 저절로 됩니다. 진실한 믿음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은 부지런한 것입니다.
본문 11절에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12절 “게으르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있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지런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이 부지런합니다.
하나님이 창세기 12장 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고 했을 때 바로 4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지체할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도하시며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삭을 바치러 가는데도 지체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창 22:3) 라고 했습니다. 아들을 제물로 드려야하는 이 절박한 상황에서도 아브라함은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바치라고 했으니까 믿고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뭐가 급해서, 뭐 좋은 일이라고 새벽에 일어나 갑니까.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출 24:4) 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소유자들은 모두가 열심입니다.

믿음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본문 12절 “오래 참음으로” 15절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바울은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5)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하는데 그것을 못 기다립니까 예수님도 말세 때에는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4:13)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참고 기다릴 때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전 1:8)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주님이 도와 주십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고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장 18-29절에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두아디라교회에 보낸 말씀이 나옵니다. 이 교회는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 2:9) 고 했습니다. 열매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처음에 비해서 많은 결실을 맺은 교회입니다. 성장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유명한 이단자 이세벨을 용납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습니다. 우리가 제사음식도 기도하고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그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18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그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성경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입니다. 이 말씀이 최종적인 말씀입니다. 제사 음식 먹으면 안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안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말하는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것”은 아폴로 신전, 제우스 신전 같은 곳에서 일하고 그 대가로 먹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기가 힘들다보면 우상의 제물에도 욕심이 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폴로신전에가서 일해주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이 두아디라교회에는 이것 이외에는 더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계 2:24)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계 2:26)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힘이 들어도 주님이 싫어하시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힘이 들어도 청소년에게 술, 담배 팔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노아는 600년을 그리고 에녹은 300년을 아브라함은 175년을 이삭은 180년을 야곱은 147년을 요셉은 110년을 모세는 120년을 여호수아도 110년을 모두 믿음을 지켰습니다. 치우치지 않았던 분들입니다. 롯이라는 분은 가다가 물질에 치우치기도 했습니다. 그런 분들은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믿음은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 12절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3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13절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믿음이라는 말에 항상 따라다니는 것은 “약속”입니다. 약속을 못 믿는다면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히 6:14) 하나님의 이 약속을 아브라함이 믿지 못했다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를 버리고 못 떠나는 것입니다. 정들었던 고향보다, 친척과 아버지가 있어 안정되고 평안한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믿고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이 예수님이 오시기전에 기록된 말씀을 ‘구약’이라고 하고 예수님 이후의 말씀을 ‘신약’이라고 합니다. 둘 다 하나님의 변함 없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믿는 다는 것은 그 약속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든 고행을 떠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네 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라고 번역된 원문은 “levgwn, Ei mh;n(레고 에 멘)”입니다. 말(레고), 그 다음에 나오는 ‘에’는 분명하게는 참으로의 강세형 부사입니다. 그리고 ‘반드시(멘)’ ‘확증 적으로’라는 뜻의 강세형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라는 번역의 단어는 ‘에 멘’ 인데 두 단어모두 강세형으로 나옵니다. 우리말 ‘반드시’ 보다 훨씬 더 강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고 하셨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는데 죄가 없으시며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더 어떻게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합니다. 거짓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약속을 하고 지킬 수 없는 의지도 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약한 인간이 약속하는 것을 금지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킬 수 없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이 거짓말시키지 사람이 거짓말 시키냐”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지키기에는 많은 변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이 우주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나의 사정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분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육신의 부모는 육체를 낳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나의 영혼까지 낳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낳으셨기에 나를 아십니다. 그 하나님이 이제 나를 믿으라 하십니다. 우리가 육체가운데 거하였을 때에는 이 음성을 들을 수 없었지만 이제 우리가 영으로 하나님께 이 음성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믿고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은 내 인생을 바치는 것입니다. 151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찬양하십시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몸바쳐 주의 일 힘쓰시기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가난하여도 성실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잠 19:1)

2001년 말 아랍의 부호하나가 유럽의 화랑들을 쌩쌩 돌아다니며 걸작들을 낚아채 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최고의 금액을 지불하면서 말입니다. 그 부호가 경매장에 나타나면 다른 수집가들은 아예 값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에게는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한계가 없었습니다. 한 수집가는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이 수수께끼의 부호는 누구일까 ” 나중에 밝혀졌는데 그는 ‘사우드 빈 모하메드 알타니나’ 라는 카타르 왕족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 좀 있다고 카타르를 갈 때 기죽지 않으려고 비즈니스클래스를 탔습니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 비즈니스클래스에 탄 사람은 자기 혼자였습니다. 혼자 생각하기를 카타르 사람이라면 비즈니스 클래스를 탈 수 있을 것 같은데… 카타르 사람들은 어디 있는 걸까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카타르 사람들은 비행기 맨 안쪽 퍼스트클래스에 앉아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비즈니스클래스는 안탑니다. 카타르 사람들은 일을 안 합니다. 비행기 승무원, 택시 운전수,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인도나 외국사람들입니다. 심지어는 자신들을 재판해 주는 판사도 외국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카타르 사람들은 불만이 많습니다. 정부는 국민을 더 행복하게 해 줘야한다고 돈을 줍니다. 하지만 카타르는 문학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술 작품을 사들일 수 있지만 정작 자신들의 문화는 없습니다. 돈으로 문화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아이티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세계제일의 부자 나라라는 카타르는 지원 안 했습니다. 이슬람 국가들은 지원 안 했습니다. 중국을 비롯한 공산국가도 지원 안 했습니다.

미국이 아이티를 지원하기 위하여 백악관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지원계획을 설명하는데 미국의 클린턴과 부시 전 대통령이 양옆에 서서 발표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 이것이 미국의 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클린턴과 오바마는 민주당이지만 부시는 공화당입니다. 누구보다도 부시는 공화당 색이 짙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거국적인 차원에서 마땅히 힘을 합할 때는 힘을 실어 줄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개인의 이익과 당의 이익을 뛰어넘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은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이 행복해 보이는 꼴을 참고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가난하다고 다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났습니다. 입술이 패역한자가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불평을 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욕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용서와 관용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정치학자 론 잉글하트는 “민주주의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수립할 확률이 훨씬 더 높다.”라고 했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편을 들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시 10:14)
“18 그는 왕에게라도 무용지물이라 하시며 지도자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19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아니하시며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의 낯을 세워주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라”(욥 34:18-19)
하나님은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시 35:10)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신 15:7-8)
여러분! 제 생각에는 아마 지금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죽을 고생을 하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람들에게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까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가난해도 손을 펴서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24:12-14에 보면 가난한 자의 전당물을 가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명령은 이방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자는 보호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 곧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추수 때에 다 모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신 24:19-21, 레 19:9-10). 또 밭의 곡식을 벨 때 밭 모퉁이까지 베지 말고 객을 위하여 남겨두어야 합니다(레 23:22).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장에 가보면 저녁이 되면 가게문을 닫을 때 팔다 남은 것을 잘 포장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가져가라고 쌓아둡니다. 끝까지 다 팔지 않습니다. 에누리해서 팔지 않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좀 더 쓰고 남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라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유 앙겔리온)을 제일먼저 전하려고 오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부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뭐가 있겠습니까 주식이 올랐다는 것이요. 부동산 값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요. 이런 것이 기쁜 소식일지 모릅니다.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더 관심이 많고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때로는 돈 한푼 없어(마 17:27)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셔야 했고 또 마지막에 묻히실 무덤조차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자에게 내리신 말씀은, 자신이 어려서부터 명령들을 지켰고 부족함이 없다고 한 젊은 관원에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라” 는 명령을 주셨습니다(마 19:21). 삭개오는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써 예수님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눅 19:8-9)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가난한 자들과 동고동락했습니다(행 2:44-45, 4:32-35).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갈 2:10)고 했습니다. 늘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였고 힘써왔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약 2:2-3) 악하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가난해 대한 성구는 245개가 나오는데요 제 마음에 제일 와 닫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바로 잠언 21:13절입니다. 함께 봅니다.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子曰 獲罪於天(자왈 획죄어천)이면 無所禱也(무소도야)니라. “하늘에 죄(罪)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가난이라는 단어의 종류가 5개정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신약에서 가난이라는 말을 사용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아노’라는 단어에서 번역한 ‘프토코스’인데 이사야 61:1에서 말한 “억눌린 가난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국가나 군주가 억압하여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만든 것을 말합니다.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의 하나인 아이티, 몰도바, 아프가니스탄, 북한 등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는 바로 이러한 환경으로 가난하게 된 자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심령이 가난하기보다는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심령이 가한 자들입니다. 사회의 불합리한 제도로 희생되는 사람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세상의 어떤 제도와 법으로 인하여서 졸부도 생기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100분의 1이라도 희생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편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사람들의 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이유 없이 자기가 게을러서 악하기 때문에 오는 가난이 있다고 말합니다. “의인은 포식하여도 악인의 배는 주리느니라”(잠 13:25), 또 너무 많이 잠을 자서 가난이 오게된다고 합니다. 잠언 6:9-11 “9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10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11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고 합니다. 또한 너무 성급한 계획으로(잠 21:5), 쾌락을 사랑하여(잠언 21:17) 또는 탐욕과 도박으로(잠 28:22) 가난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만일 이런 이유로 가난하게 된 자라면 “심령이 가난한 자” 가 아닙니다. 무조건 가난하다고 하나님이 그 사람 편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러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시 34:9)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부자가 되면 교만해질 확률이 높고, 남을 나보다 낮게 여기는 마음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렇다고 너무 가난하여서 도둑질을 하게 되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우리에게 표준 답안 같은 것을 제시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8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언 30:8-9)
미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사회의 낙오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위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갑자기 화려한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스위스 사람들은 갑자기 돈을 많이 번 사람을 말하면서 마치 무슨 끔찍한 병에 걸린 사람처럼 말합니다. 스위스는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 행복한 나라 중에 항상 상위에 있는 나라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제일 존경하는 직업은 시인이나 작가입니다. 아이슬란드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책 없이 사느니, 헐벗고 굶주리는 편이 낫다.” 행복의 척도가 돈에만 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사야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고 했습니다. 이사야가 이 말씀을 전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의 처지는 비참했습니다. 그들은 70년 동안의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바벨론에서부터 만리 길을 걸어 귀환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더구나 2세들에게는, 비록 그것이 예루살렘을 향한 귀환 길이라 할지라도, 사막과 광야를 끝없이 걸어야 하는 고통이었기에 자연히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러분! 옛날에 이렇게 광야 길을 간다는 것은 자기가 살던 곳의 집과 일터를 다 버리고 떠난 것입니다. 그저 가져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짐 보따리 한 두 개와 가축 몇 마리뿐입니다. 오늘날처럼 온라인으로 은행에 저금해 놓고, 카드가지고 떠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이들의 길은 고달프고 힘들고 가난한 것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불평하고 원망하느냐 너희가 힘들고 지친 줄 내가 잘 안다. 그러나 어치피 그 머나먼 길을 너희들의 힘만으로는 걸어갈 수 없는 것 아니냐, 힘든 가운데에서도 오직 여호와를 바라고 기다리면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새 힘을 주실 것이다”(사 40:27이하 참조). 하셨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고 출애굽 때의 사건을 두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출애굽 때와 비슷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머나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 만에 돌아오게 되는 이스라엘에게 말합니다. 이 광야는 시나이 반도의 광야가 아니라 아랍의 광야입니다. 그러나 광야 길은 같습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이 말씀은 광야에서 지친 이스라엘 사람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제 여호와를 앙망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만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광야의 길은 힘들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갑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축복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헤롯 궁전과 사탄의 제의를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의는 백부장이나 타는 그런 전차가 아니라 당나귀를 타는 것이었습니다. 왕궁에서 탄생하신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집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구약의 안식일과 안식년은 사람과 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7년마다 땅을 묵혀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해야”(출 23:11, 레 25:2-7)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7년 후에 종들을 풀려나고(출 21:2-6), 빚은 면제되었습니다(신 15:1-18).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의 말씀을 메시야 되시는 예수님과 우리에게 주십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하신 일 중의 하나가 위로해 주시는 겁니다. 우리도 위로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요 위로는 역시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국이 선교하기 좋은 것은 우리는 가난한 시절을 살았거든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안쓰럽습니다.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늘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가난이 가난으로 마무리된다면 그 얼마나 불행합니까 가난하지만 예수님 만나서 그 누구보다 행복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거룩한 목표를 세우는 겁니다. 세상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무슨 돈 좀 벌어보겠다고 증권소식이나 부동산 가격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매달려 있는 겁니다. 예수께 매달리세요. 새벽기도에 전진하세요. 전도의 목표를 세워보세요. 하나님께 드릴 헌금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하세요.

요한이 우리에게 하는 마지막 말씀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새벽을 깨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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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 1:35)

인간의 잠재적 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놀랍습니다. 아직도 우리 속에는 9/10의 능력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내가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너무 게으르기 때문에, 너무 기회주의 적이기 때문에, 너무 이기적이기 때문에 평생 동안 손 한번 써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두뇌는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을 몽땅 외우고, 40개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전문 분야를 놀랍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의 두뇌는 한계가 없습니다. 사람의 이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무한한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눅 17:21)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자꾸만 나의 능력이 부족하고 안 된다는 사고방식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지내는 것입니다. 금광이 눈앞에 있어도 캐내야 쓸모가 있습니다. 단련을 시켜야 합니다. 내 안에 있으면 뭐합니까 깨어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엄청난 능력이 잠을 자고 있는 겁니다. 오늘 내 속에서 잠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깨우시기를 바랍니다.

잠자는 능력과 영혼만 깨우면 되지 왜 새벽을 깨우라고 하시나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육체를 벗어나서 살 수 없습니다. 육체와 영혼을 이 땅에서는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둘은 늘 함께 갑니다. 공산주의가 잘못 생각한 것 중의 하나가 육체를 우습게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몸을 함부로 다루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대로 방치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우리가 영적, 영적 하지만 영이 무엇입니까 영을 어떻게 깨웁니까 바울이 말하기를 몸을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드리지 않으면서 마음만 드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을 깨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이 깨어나야 합니다.

현대그룹을 만든 정주영 회장과 이명박 대통령은 새벽에 일찍 활동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일하고 싶어서 밤에 일어나, 왜 이렇게 동이 늦게 트나 늘 말하곤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명박 대통령은 1978년부터 소망교회 출석했지만 현대건설 사정과 회장을 거치면서 해외 출장이 많아 새벽기도와 교회 봉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장로 투표에서 떨어졌습니다. 소망교회 장로 되는 것이 국회의원 되는 것 보다 힘들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1992년 14대 국회의원이 된 후 3년 4개월 동안 매주 주일날 새벽부터 주차 봉사를 하면서 1995년에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신 권사님입니다. 가난했지만 새벽에 일찍 일어나 새벽기도하고 열심히 사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열심과 믿음과 성실함으로 대통령의 자리까지 간 것입니다.

소망교회를 1977년에 개척한 곽선희 목사님의 철학은 ‘새벽기도 일상화’ 였습니다. 성도의 생활에 새벽기도가 체질화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곽선희 목사님은 은퇴하는 그 날 까지, 목사가 되고 43년 간 새벽기도를 개근한 것이 제일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등상보다 개근상이 더 좋은 것입니다. 곽선희 목사님 설교가 우등한 것이라면 새벽기도는 개근한 것입니다. 이렇게 새벽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내려올 때 어머니가 “너를 위해 날마다 새벽기도 하겠다. 너도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님도 머슴목회론과 새벽기도로 부흥한 교회입니다. 명성교회 새벽기도는 새벽 5시부터 9시까지 5번이나 열립니다. 일년에 두 차례는 일주일씩 두 번 합니다. 김삼환 목사님은 “새벽기도는 제 생명줄입니다.”고 말합니다. 김삼환 목사님이 이렇게 새벽기도를 열심히 드리는 것도 할머니와 어머님의 새벽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님은 85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새벽기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님은 손을 잡고 춘하추동 가리지 않고 새벽기도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16살 때 담임목사님께 탁상시계하나를 받았는데 새벽기도를 알리라는 종치라고 준 선물이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18세가 되기까지 그 교회 종을 쳤고 이후 20년 동안 새벽종을 치며 자랐습니다. 얼마나 그 종을 사랑했는지요, 현재 그 종을 떼어다가 명성교회 강단 위에 나무로 만든 종 탑을 세워놓았습니다. 소년 시절에 쳤던 종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1971년 청계천에서 활빈교회를 개척한 두레교회 김진홍목사는 1982년에 펴낸 “새벽을 깨우리로다” 에세이집은 100쇄를 넘게 찍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서적도 흔하지 않은 일입니다. 새벽을 깨우니까 새마을 운동도 되는 것입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하면서 일어나야 합니다.
왕성교회 길자연 목사님은 아버님이 새벽기도에 덮어쓰고 기도하시던 동물로 만든 가죽털옷을 물려주셨습니다. 그거 덮어쓰고 새벽기도 하라 구요. 기도해야 삽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새벽기도는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생이 제일 많이 모이는 교회중의 하나가 삼일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담임하는 전병욱 목사가 가장 강조하는 예배가 바로 새벽예배 기도입니다. 4대 독자로 기독교집안에서 자랐습니다.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목회를 하다가 공산당이 쏜 총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외가는 평북 순천에서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월남한 12명의 가족입니다. 모두 목사와 장로가 된 집안입니다. 장로님이셨던 전 목사님의 아버님은 어린 아들을 새벽기도에 데리고 다니고, 성경을 안 읽으면 밥도 안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자란 전병욱 목사님은 노골적으로 새벽기도를 강조합니다. “어떻게 새벽기도에 안 나올 수가 있나 새벽기도에 안 나오고도 잘 될 수 있을 것 같은가 “라고 말합니다. 새벽에 부지런하면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삼일교회는 입시 생과 고시 생이 많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새벽기도하고 공부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교회의 청년 중에서 한 해에 30명이 넘게 사법고시에 합격한 적도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아침 7시에 수업을 시작해서 낮 12시면 마칩니다. 우리나라도 밤 문화를 새벽문화로 바꾸어야 합니다.

사랑의교회도 옥한흠 목사님이 오정현 목사님께 목회를 맡길 때 등록교인 3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8만 명이 넘었습니다. 오정현 목사가 부임하자마자 한 것이 40일 특별새벽기도입니다. 6,000명이 새벽 2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새로 부임했지만 47일 동안 매일 3시간씩 성도들을 보니까 3년을 목회 한 것과 같이 가까워졌습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지각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교회가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전에 “평신도를 깨운다”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을 다시 보강해서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를 썼습니다. 좌우지간 뭘 자꾸 깨워야 합니다. 새벽도 깨우고, 평신도도 깨우고 집사도 깨우고 목사도 깨워야 합니다.
오정현 목사가 대학교 다닐 때 종로구에 있는 내수동 교회에 다녔는데 대학생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박희천 목사님이 신학생도 아닌 그를 대학부 지도 전도사로 임명했습니다. 신학교 다니는 학생보다 새벽기도 열심히 나오는 학생이 더 났다는 말입니다. 1979년 30명에 불과했던 대학생들이 1년 만에 100명이 되었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1982년 5월에는 3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미 새벽기도의 재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 교회 다니기 시작해서 새벽기도를 다녔습니다. 시골에서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중학생이 새벽기도에 나오니까 목사님과 권사님들이 저를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김삼환 목사님은 종치라고 자명종 시계를 받았다고 하시는데 저는 시계가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종치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소리가 날 때가 4:30분입니다. 아마 김삼환 목사님이 치신 종일지 모릅니다. 그 소리 듣고 일어나 교회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들으려면 자면서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래야 그 소리를 듣습니다. 요즘은 일어나기가 너무 좋습니다. 핸드폰이 알려주니까요. 어느 날은 추운 겨울 새벽에 교회에 갑니다. 눈이 온 날도 있습니다. 장로님이 저보다 먼저 오셔서 눈을 쓸어놓으셨습니다. 저는 눈온 날 꼭 눈을 한번 교회 나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장로님보다 먼저 눈을 치워보고 싶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초저녁부터 눈이 오는 겁니다. 그래서 잘 되었구나 생각하고 새벽에 나올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 초저녁부터 눈을 쓸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오면 또 쓸고 또 쓰는 겁니다. 새벽까지요. 그것이 왜 그렇게 기쁘고 즐거웠는지요. 그래서 아마 하나님이 저를 불러 주셨나 봅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은 당시 장대현(장대재 라고도 함)교회였습니다. 부흥운동은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제 이 부흥운동을 만든 힘은 1906년 4월 15일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목사가 새벽기도회를 시작한 것에부터 시작합니다. 비가 많이 오면 땅이 젖어서 기반이 약해진다고 합니다. 마치 이와 같이 이미 새벽기도를 통해서 부흥의 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서양선교사가 새벽기도를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새벽기도회입니다.

성경의 역사가 모두 새벽이 일어났습니다.
출애굽 때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출 14:24) 멸망시켰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 “제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날 뿐이었더라”(수 6:15). 여리고성이 무너져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돈 것도 새벽입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눅 24:1).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 때에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행 5:19-21) 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도 새벽에 모여서 기도하고 가르쳤습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계 22:16)고 했습니다.

새벽기도를 드릴 때 힘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왜 새벽별이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왜 새벽기도를 하셨겠습니까 새벽에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힘을 주시는 시간입니다. 새벽은 하루가 시작되는 첫 시간입니다. 세상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생각나면 하나님 앞에 아무 때나 오는 것보다는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리는 사람을 하나님은 좋아하십니다.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힘을 새벽에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5)

“새벽을 깨우세요.”
이왕 예수 믿는 것 뒷걸음치지 마세요. 자꾸만 앞으로 나오세요. 부딪치세요. 교회 가까운 곳으로 이사오세요. 믿음을 중심으로, 예수를 중심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지 않을 수 없도록, 하나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왕대 밭에 왕대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다른 것 물려줄 생각하지 말고 새벽기도를 물려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요나단의 사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삼상 20:17)

마음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벗 하나 있었으면 / 도종환>

성경에 이런 벗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정치의 세계에는 마음이란 없고 오로지 머리만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과 다윗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머리가 아닌 마음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은 다윗을 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을 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천년동안 성경역사에서 눈길과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사람이 요나단입니다. 이 땅에 남긴 것이라곤 ‘절름발이 아들’ 뿐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우리에게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소 실천한 사람입니다. 오늘 ‘요나단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빠지시기를 바랍니다.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우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중국 제(齊)나라에서, 포숙은 자본을 대고 관중은 경영을 담당하기로 하고 동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관중이 이익금을 혼자 독차지하였습니다. 포숙은 관중의 집안이 가난한 탓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하였습니다. 또 함께 전쟁에 나가서는 관중이 3번이나 도망을 하였는데도 포숙은 그를 비겁한 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에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그를 대변하였습니다. 포숙은 관중을 끝까지 믿어 그를 믿어 주었고, 관중도 훗날 포숙을 가리켜 “나를 낳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아는 것은 오직 포숙뿐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동양에서는 우정을 이야기할 때 보통 관중과 포숙의 우정을 대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 우정하면 다윗과 요나단을 이야기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은 성도와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사랑을 예표합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있는 사랑을 알면 그리스도와 성도사이에 있어야 될 사랑이 무엇인가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여호와께서 주셨다”는 뜻입니다. 요나단은 그의 이름답게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이 누구입니까 사울 왕의 장자입니다. 왕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울 왕 다음에 왕이 될 제1순위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 왕자라는 자리를 탐하지 않았습니다. 왕자의 자리보다 소중한 것은 사랑하는 친구 다윗이었습니다. 왕자의 자리도 그 사랑을 빼앗을 수는 없었습니다.

요나단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장남이었고 천명의 군사를 거느린 군대장관이었습니다. 그의 주둔지역은 기브아였습니다. 기브아는 당시에 제일 전투가 치열했던 블레셋과 마주 대한 진지입니다.
한번은 병기 든 소년과 함께 적진에 들어갔습니다. 블레셋군의 주둔지역에서 20명을 도륙했습니다. 한 나라의 왕자가 제일 위험한 전투를 한 것입니다. 그는 전방에 있었습니다. 그는 블레셋군의 혼전으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때에 남긴 유명한 말이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12절에도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고” 나아갔습니다. 사랑하는 관계는 무엇이 있습니까 바울이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관계에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라를 사랑했습니다.
요나단은 탈선한 아버지 때문에 전쟁에 나갔습니다. 길보아산에서 아버지 사울과 함께 전사합니다. 요나단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버지에 대해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버지 사울이 폐역한 왕이었지만 그는 반역을 꿈꾸지 않습니다. 아들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자기의 역할을 다한 사람입니다.

셋째, 친구를 사랑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본문에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라고 했습니다. 삼상 20:4절에서는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삼상 18:1) 여기 잘 보세요. 다윗이 먼저 요나단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요나단이 먼저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또 삼상 18:3에서 “3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4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다윗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요나단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요나단은 왕자입니다. 다윗은 목동에 불과합니다. 요나단이 입고 있던 군복을 다윗에게 입혀준다는 것은 왕자의 복장을 다윗에 준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왕권도 요나단은 다윗에 준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주인은 종에게 비밀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종이 아닌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요 12:15) 예수님은 주인이나 스승의 관계를 뛰어넘어 속마음을 주고받는 친구의 관계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무엇이든 하신 분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나 할만한 그런 사랑을 요나단은 다윗을 위하여 한 것입니다. 친구 다윗을 마치 자기의 분신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요나단의 이런 사랑이 있었기에 다윗도 사울을 두 번씩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한 사람의 사랑은 또 다른 사람에게 이동됩니다. 사랑의 바이러스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그토록 사랑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첫째, 권력을 뛰어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다윗은 사울을 이어 새로운 왕이 되어야 할 촉망받는 차세대 지도자입니다. 사무엘에게 이미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시기하고 죽이려는 현재의 왕 사울의 장자입니다. 요나단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은 자기 아버지의 권력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아니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해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이 욕심이 있다면 지금 왕권을 가지고 다윗과 한판 붙어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다윗을 끝까지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그는 힘센 아버지보다는 아무런 힘도 없는 다윗의 편을 들었습니다. 사울인 아버지가 볼 때는 한심한 놈으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자신을 완전히 비운 사람입니다.

둘째, 혈연을 뛰어넘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끈끈한 혈연 관계를 뛰어넘었습니다. 물론 다윗은 사울의 사위입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매형과 매제의 관계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다윗을 사위로 삼은 것은 순전히 정략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비록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다윗을 사위로 삼기는 했지만, 사울이 다윗을 사위로 삼은 것은, 이 사실을 올무로 삼아 블레셋 사람이 다윗을 쳐서 죽이도록 하려는 사울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삼상 18:20-21). 요나단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은 자신과 피 한 방울이 섞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끝까지 아버지 편에 설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친구 사이를 이용해서 아버지를 이롭게 하고 자기가 왕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의 사랑은 혈연관계를 뛰어넘었습니다. 적어도 요나단의 입장에서 보면, 물이 피보다 진했습니다.

셋째, 연륜을 뛰어넘었습니다.
요나단이 죽었을 때에 다윗이 요나단을 형이라고 불렀습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삼하 1:26)
다윗은 요나단을 형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다윗이 좀 어렸던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설령 한 살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서열을 매우 중시했던 옛날 유대인에게는 한 살의 나이 차이도 결코 적은 차이가 아닙니다. 아마도 한 살 이상의 차이는 났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다윗을 동생이라고 우습게 생각하여 대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 가지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다 여기에 있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때 비로소 사랑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어떻게 그런 위대한 사랑을 할 수 있었을까요 “요나단”(여호와께서 주심)의 이름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칼과 전쟁을 통해서라도 빼앗는 것입니다. 피를 흘리게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게 합니다. 의와 평화를 위하여 자기를 헌신할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2:13) 라고 하셨습니다.

미국의 정신적인 스승 중의 한 사람이었던 에머슨은 “친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완전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요나단은 자기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내가 다 가지려고 하는 사람만 사는 세상에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하세요. 사랑을 하면 행복해 집니다. 사랑을 하면 세상에 모든 일에 기쁨이 넘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소망이 있습니다. 사랑을 기다리기보다는 사랑을 찾아 나서보세요. 요나단처럼 먼저 다윗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예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먼저 사랑함같이 복음을 먼저 받은 우리가 먼저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남자들끼리는 잘 안 안습니다. 그렇다고 여자는 자주 껴안는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선교지에 가면 가끔 껴안습니다. 공항에 도착해서 반갑게 껴안습니다. 저는 이 재미 때문에 선교지에 자꾸만 가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도 한번 껴안아 보길 원합니다. 축도 하기 전에 시간을 드릴 테니까 남자 분들끼리, 여자 분들끼리 한번 껴안아 보세요. 잘 보고 껴안으세요. 바뀌면 안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안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아이티는 지난 2010년 1월 12일 수도 포르토프랭스를 중심으로 지진이 덮쳐 온 나라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번 지진으로 아이티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300만 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이티는 아프리카의 빈민국보다 더 못사는 나라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여 ‘진흙쿠키’를 만들어 먹는 나라입니다. 아이티는 18세기 프랑스 식민지였는데 이 때 백인들이 50만 명이 넘는 흑인들을 노예로 아프리카에서 들여와 설탕, 커피 등을 생산하게 하고 막대한 부를 가져갔습니다. 노예들은 1791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나폴레옹 군대까지 동원되었지만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아이티는 1804년에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그래서 아이티 혁명은 흑인이 독립을 쟁취한 최초의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프랑스로부터 독립은 했지만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1838년에는 프랑스에 공식적인 승인을 받기 위해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는데 돈이 없으니까 이 돈을 다시 프랑스로부터 빌리는 것으로 해서 1862년이 되어서야 승인을 얻었습니다. 이로 인해 19세기에 아이티 중앙은행은 프랑스 자본으로 세워졌습니다. 1880년부터는 사실상 미국 자본이 아이티를 장악했습니다. 미국은 자본만이 아니라 1915년부터 34년까지 무력으로 아이티를 장악했습니다. 이 때부터 아이티는 미국의 식민지 나라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1995년 5월에 사할린에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는 무너졌고 2,500명이 매장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변란 속에도 건재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레닌 동상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는 대충 지었지만 레닌 동상은 잘 만들어 세우고 관리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식이 되면 안됩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쓴 마지막 편지입니다. 바울은 순교의 시간이 임박해 오는 것을 깨닫고 에베소에서 어렵게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를 위로하고 힘과 용기를 주고자 이 편지를 기록했습니다. 디모데는 나이가 어린 목회자이며 몸이 쇠약하며 의기소침한 상태였습니다(딤전 5:23). 바울이 디모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3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를 생각하면서 간절히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죽음이 임박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안위보다는 하나님의 교회를 목회하는 디모데를 생각합니다. 그가 그리고 모든 두려움과 연약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일꾼으로 거듭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바울을 통해서 디모데에게 전한 말씀은 예수께서 오늘 우리를 바라보시며 하시는 말씀이라고 확신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육체적으로 병이 들었다 할지라도, 성격이 소심한 디모데와 같다 할 지라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바라십니다.

오늘 말씀은 두 가지 마음으로 대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능력과 사랑과 절제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주었겠습니까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겁쟁이가 됩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늘 하나님의 일을 망칩니다. 불신앙을 가져다 줍니다.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압니다. 농약을 치지 않고는 농사짓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요. 그래서 농사짓는 분들은 농약을 치지 않았다는 말을 잘 안 믿습니다. 그만큼 유기농 농사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기업이 있습니다. 해충의 천적인 곤충을 찾아내어 그것을 보급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해충이라면 능력과 사랑과 절제는 두려운 마음을 잡아먹는 천적인 곤충입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불신앙이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출애굽 때 가나안 정탐꾼들의 불신앙입니다. 자기들은 정탐한 것을 보고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아낙자손들의 거대함에 기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신 1:28)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두려워 하는 마음은 사람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하는데 사람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보면 낙심하게 됩니다. 모세는 다시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신명기 1:29)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야합니다. 두려우면 어떻게 길을 떠납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가야합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타조는 100kg이 넘는 무거운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개가 있지만 모양만 있을 뿐 그것으로 날수는 없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딱딱한 갑옷도 없습니다. 뿔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뒷발질을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타조가 야생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요
타조는 사람의 시력보다 최소 25배나 뛰어난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머리 뒤쪽으로는 발달된 귀가 달려 있습니다. 눈으로 보든지 귀로 듣든지 사방 어느 쪽에서 적이 다가오든지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속 80km이상 달릴 수 있는 다리가 있습니다. 어떤 동물도 타조처럼 오랫동안 빨리 달릴 수 없습니다. 타조의 쓸모 없는 날개와 무거운 몸만 생각한다면 타조에게 삶은 저주 자체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동물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발과 발달된 시력이 있어 타조에게 새로운 힘과 삶에 용기를 줍니다. 타조처럼 자기 장점을 발견하면 살맛이 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능력 있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세 가지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다윗은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라고 했습니다. 절제하는 마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절제를 생각할 때 인내를 생각합니다. 꾹 참는 마음을 생각합니다. 화가 났을 때 참는 것, 물론 이것도 절제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절제란 타조처럼 사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장점을 보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절제가 안되면 자기 자신의 비참함만 기억합니다. 만사에 있어서 남의 탓만 합니다. 돈을 버는 사람은 전쟁통에도 돈을 법니다.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는 공장 직공의 아들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양털 장사의 아들이었고 링컨은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던 멜기세덱이 나옵니다. 히 7:3에 보면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출신성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비가 누구인지 어머니가 누구인지 어디서 자랐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전쟁에서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베풀었습니다. 2절에 보면 그의 이름의 뜻을 설명했습니다.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라고 했습니다. 멜기세덱은 자신의 신분을 극복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보통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길을 가는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바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드려진 물질은 하나님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의의 왕이여 평강의 왕입니다. 절제가 되니까 의의 왕이 되는 것이고 평강의 왕이 되는 것입니다. 절제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두려움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무서움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고 했습니다.
이 뜻이 무엇입니까 능력이 무엇입니까 말로만 하는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고 우리에게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하셨다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느헤미야 5장에 보면 성벽건축을 하는 중에 유대민족이 난리가 났습니다. 이유는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의 땅을 차지하고 종으로 파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가 이 문제를 진정시킵니다. 먼저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8절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느헤미야는 형제들을 포로에서 구해왔습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하여 그는 일생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이제 와서 동족을 파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했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느헤미야의 행함이 없다면 말하지 못합니다. 똑같이 자기 이익을 도모했다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합니까 혹 말을 해도 그들은 듣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 때 페르시아 총독으로 13년을 있었지만 마땅히 받아야할 녹을 받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희생할 때 비로소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감옥에 두 번째 갇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비록 처형당하지만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능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진정한 능력은 병을 고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 가신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디모데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아는 것하고 사랑을 하는 것하고는 다른 문제입니다. 사랑을 하지 않았다면 사랑에 대해서 박사논문을 써도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사람들은 잘못된 사랑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원인에 대해서 창세기 6장에 나옵니다. 창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고 합니다. 여기에 두 가지 잘못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탈한 사랑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아내를 구했습니다. 세상 아내를 구하면 세상 말만 듣습니다. 솔로몬이 그래서 망했습니다. 열왕기상 11장에 보면 본처 외에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헷 여자들을 후궁으로 끌어 들였습니다.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후비 700에 빈장 300이었습니다. 이 여자들이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 예루살렘 궁전에 여기 저기 우상단지를 놓고 섬겼습니다. 이것이 북왕국과 남왕국으로 갈라지는 이유였습니다.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왕상 11:11)고 하셨습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교육은 환경이 중요합니다. 술, 담배를 잘하는 친구를 만나면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웁니다. 못 먹던 술도 자꾸 마시게 됩니다. 불평하는 사람을 만나면 같이 불평만 늘어놓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자살 사이트에 가면 자살충동을 느낍니다. 그러나 평안을 주시는 주님을 만나면 평안을 얻게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

사람이 동물하고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동물처럼 육체적인 사랑만 하지 않습니다. 이성적인 사랑, 영적인 사랑, 희생적인 사랑을 할 때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만이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것입니다. 동물들이 하늘을 쳐다보는 것을 보셨습니까 사람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존재입니다. 저는 택민이를 보기 이전에는 무슨 일이든 의미를 모르고 하면 헛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 가운데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의미를 알고 하면 더 좋습니다. 그런데 의미를 몰라도 헛것이 아닙니다. 택민이가 먹을 것보고 기도할 때 일단 두 손을 모르고 고개를 숙이고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유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택민이가 기도의 의미를 알까요 그러면 우리는 압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도하는 택민이의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신 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물을 맡기셨습니다. 디모데에게 에베소교회를 맡기셨습니다.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 세계를 맡기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정을 맡기셨습니다. 우리 주앙교회를 맡기셨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나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1997년 12월 7일에 인도 뭄바이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한 10시쯤 되었나요, 뭄바이 뒷골목을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오토바이 하나가 넘어져 있었습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배달하는 아이가 넘어졌습니다. 오토바이에서 넘어져 자신의 다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는데 나뒹구는 그릇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자기 몸의 상태보다 깨진 그릇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 일로 주인에게 눈 밖에 나면 식당에서 쫓겨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릇을 부둥켜안고 이지 저리 뛰는 그 아이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인도는 사람이 넘쳐나기 때문에 사람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도사회는 엄격한 카스트사회로 카스트는 ‘출생’을 뜻하는 ‘자티’말로 혼인집단을 말하며 이런 집단은 3,000개가 넘습니다. 단순히 신분은 정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집단으로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즉 한 집단에 속한 사람이 다른 직업이나 다른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카스트는 모든 계층과 직업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신이 카스트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기원전 1000년경(다윗과 솔로몬의 시대,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길 때가 B.C 1003년)에 만들어진 힌두경전《리그베다》에 보면 인간의 계급이 정해진 것이 나옵니다. 태초에 우주의 본질을 상징하는 거대한 신 푸루샤가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창조했는데 푸루샤의 입은 사제인 브라만이 되었고 팔은 군인계층 크샤트리아가 되었고, 허벅지는 상인 계급 바이샤가, 두 발에서는 노예인 수드라로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계급으로 색깔이라는 의미의 바르나 제도 곧 사성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에 들지 못하는 ‘아웃카스트’가 수드라보다 못한 불가촉천민입니다.
이것을 석가모니(B.C 563년-483년)가 없애려고 시도했습니다. 석가모니(싯다르타 고타마(성씨))라 칭할 때, 석가( 迦)는 북 인도에 살고 있던 샤키아(Sakya)라 불리는 한 부족의 총칭이며, 모니(牟尼)는 성자를 의미하는 무니(muni)의 음사입니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 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입니다. 석 가족의 왕국인 카필라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왕궁 밖에서 늙고 병들고 죽는 인간의 생애가 고통으로 이뤄져 있으며 이것을 벗어나는 것을 추구하여 왕위와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힌두교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840만 번 환생해야 윤회의 사슬에서 해방된다고 합니다. 사실상 거의 불가능 한 경지이고 결국 힌두교는 윤회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이것을 부정하고 바로 열반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성제라는 것을 신분의 계급이 아닌 도를 닦으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불교는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인도에서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B.C 4세기부터 A.D 6세기까지 중국과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하지만 7세기 경에 인도에서는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0세기 경에 이슬람이 출현하여 불교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그 바람에 카스트 제도 역시 존속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불교는 힌두교의 윤회사상을 부정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분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하나 석가모니는 왕자로 최상위 계급에 속했고 힌두교의 그런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힌두교의 악습을 버리려고 시도했으나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부처가 된 그의 우상 앞에서 절하고 빈다고 해서 그 뜻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이슬람의 창건자 모하메드는 A.D. 571년 경 메카(Mecca)에서 시들어 가는 명문가의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묘하게 성경을 왜곡하여 꾸란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슬람이 인도에게는 치명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인도의 불교도 입장에서는 카스트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슬람이 방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8세기 이슬람계의 옴미아드 왕조가 인도에 침입했고, 10세기 가즈니 조는 핀자브를 장악하고 갠지스 유역을 침략하여 힌두 문화를 파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즈니 조를 이은 고르조가 12세기 갠지스 유역을 점령하자, 지도자 아이바크가 독립하여 인도 최초의 이슬람 국가인 노예 왕조를 세웠습니다. 이 왕조는 델리를 중심으로 북 인도를 지배하였으나 몽골의 침입으로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영국이 동인도 회사를 앞세우고 인도에 들어갔습니다. 결국 인도는 이슬람에 의해서 기독교를 왜곡되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나중에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통한 기독교 전래 또한 서양의 지배 하에 시도되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습니다.

이후에 간디가 카스제도에 도전했지만 그 역시 뜻을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인도는 1950년 1월 26일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불가촉천민의 폐지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상대의 이름만으로 그들의 카스트를 금방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도 베이커 성은 조상들이 빵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맥아더와 맥도날드는 스코틀랜드계입니다. 아일랜드 사람의 상당수 성은 오(O)로 시작합니다. 오브라이언(O’Brian)이니 오닐(O’Neil), 오라일리(O’Reilly)라는 성들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인 스칼렛 오하라(O’hara)도 아일랜드 성입니다. 아일랜드의 위스키(Whiskey)성도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문지기 집안이 아닌가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그래픽 방식의 OS만들어 놓고 윈도우(창문)를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출생지입니다. 이런 인도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슬람국가나 북한, 중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요 우리나라에도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은 돈이 신분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입니다. 그 모든 것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5일 동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해 놓으시고 6일째 되는 날에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우리는 천하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누구를 닮아야 됩니까 하나님입니다.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면 사탄이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와야 됩니다. 그런데 죄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신 분이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 12:45) 고 하셨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눅 10: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은 인격적이며 지적인 존재로서 자유의지를 가진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도덕적 진실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근본적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거북이는 해변 육지에서 알을 낳지만 새끼들은 알에서 부화하자마자 바다로 기어가야 산다는 것을 압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바다가 있는 방향을 정확히 압니다. 그리고 그리로 가야 산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야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과 도덕적 진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돌을 던지면 어리석은 개는 그 돌을 쫓아가지만 호랑이는 그 돌을 던진 사람을 쫓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만드셨습니다. 자연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쫓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본문 28절을 통해서 세 가지로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의 백성이 땅에 충만해야 합니다.

둘째, “땅을 정복하라” 하나님의 백성이 땅을 차지해야 합니다.
‘정복하라’는 것은 ‘차지하라’는 말입니다. 또한 ‘관장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탄이 차지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차지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연을 파괴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이 자연을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셨습니다. 농사를 지어서 만들어낸 음식보다 자연 그대로가 더 좋은 것입니다. 자연에서 자란 삼이 산삼이고 자연에 사람이 파종한 것이 장뇌삼이고 사람이 재배한 것이 인삼입니다. 아시겠지만 산삼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텔레비전을 24시간 들여다보는 것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24초 동안 바라보는 것이 더 유익한 것입니다. 자연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고 했습니다.

셋째,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조자의 손을 떠날 때는 모든 것이 좋았다. 그러나 인간의 손에 들어와서 모든 것이 나빠졌다.”(Rousseau)고 했습니다. 모든 생물을 잘 다스리라는 것이지 다 잡아 먹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주신 자연도 잘 가꾸어야 합니다. 호주 시드니에 간 적이 있습니다. 도심 한 가운데 몇 백년 돼 보이는 고목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로를 보니까 꾸불꾸불 한 거예요. 나무를 피해서 길을 내다보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울시내에서 고목 나무를 볼 수 없습니다. 길 내고 도시 건축하느라 다 비어버린 것입니다. -호주 YWAM 건물 건축의 예-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또한 자연을 귀하게 여깁니다. 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남을 귀하게 여깁니다.

여러분! 성경만큼 사람의 가치를, 나의 가치를 고귀하게 주장하는 사상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다름 아닌 아버지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알려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라고요.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실 분은 바로 아버지 외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다른 피조물들에게 자신의 형상(image)을 반영시키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 아버지와 교재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자녀로서 맞이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과 참 사람의 형상(image)을 보게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노예로 만드시기 위하여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주시지 않고 우리에게 일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전도할 수 있도록 우리의 입술에 할 말을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을 주십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십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0-26)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려가는 수가 많습니다. 또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뒤가 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뒤가 무엇이며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사회의 출세의 길이 앞이라면 가정이 뒤 일 것입니다. 뒤를 챙기지 못하면 결국은 망합니다. 앞만 보고 가면 안됩니다. 뒤를 보아야 합니다. 새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내 안에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지 못하면 인생의 성공은 없습니다. 지금 잘 되는데요. 그런 분이 계시면 잠시 성공하는 것 같이 보일 뿐입니다. 착각하면 안됩니다. 예수 믿고 교회 다녀야 잘 삽니다. 우리는 그렇게 설교합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저는 100%맡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이론에 걸림돌이 되는 나라가 있습니다. 일본입니다. 일본은 아시아 최고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몇 개 분야에서 세계최고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일본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세계 1-2위를 달립니다. 왜 일본이 그렇게 잘 사는지 힌트를 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교토 상인의 33계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1. 진짜 상인은 지나간 일이나 앞으로 일어날 일이나 늘 거기서 일어날 일을 생각한다.
2. 한 사람의 고객이 곧 1만 명의 고객이라고 생각하라.
6. 마음이 성실하면 신도 나를 지켜준다.
16. 한번 만족시킨 고객은 최고의 세일즈맨이 된다.
26. 돈이 없으면 지혜를 보여라, 지혜가 없으면 땀을 보여라.
27. 가장 무서운 것은 술에 취하는 것, 그리고 이자에 안주하는 것이다.
33. 사이 좋게 지내는 것처럼 귀한 것도 없다.

일본사람은 성실합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기본이 된 것입니다. 예수만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는 믿어도 기본적인 자세가 안 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나는 정직하지 않으면서, 성실하지 않으면서 헛된 망상만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대범증’ 부터 고쳐야 합니다. 작은 것을 무시하면 결국 망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첫째, 욕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라가(라카)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골빈 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련 한 놈(모레)’ 골빈 놈보다 미련한 놈이라고 한 것이 더 문제입니다. 골빈 놈이라고 한 것은 공회에 잡혀가지만 미련한 놈이라고 한 것은 지옥 불에 들어갑니다.
‘곰’은 자기가 겨울잠을 자기에 충분히 살이찌었는지를 높은데 올라가서 떨어져 봅니다. 그래서 엉덩이가 안 아프면 충분히 살이찌었다고 생각하고 굴에 들어가 겨울잠을 잡니다. 이런 곰을 보고 ‘미련한 놈’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곰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기 기준이 강합니다. 한국 어머니들, 아이들 공부시키는 것은 좋지만 자기 기준에 맞추려고 공부시키는 것은 아이들을 잡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 다 못마땅한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하면 잘할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감사가 있을리 만무합니다. 만사가 불만입니다. 불평합니다. 우리는 불평과 불만보다는 감사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둘째, 형제와 화목해야 합니다.
본문 24절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형제와 화목하지 못하고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도 받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형제와 화목하는 일입니다.

셋째, 다 갚아야 합니다.
본문 26절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물질만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닙니다. ‘진실로’(아멘)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에 대해서 최소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엄중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바르게 살아야 됩니까

우리나라에도 일본사람 못지 않은 정직한 기업인이 있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대출 받았던 한 기업인이 1·4후퇴 때 은행에 찾아가 돈을 갚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창구 직원은 이 난리 통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갚을 필요가 없다며 피난이나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이 기업인은 굳이 돈을 갚고 난 후에야 피난을 떠났습니다.
나중에 이 기업인이 제주도에서 군부대에 생선을 납품하는 원양어업에 뛰어들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돈도 담보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업자금 융자를 신청하기 위해 은행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은행장이 1·4후퇴 때 빌린 돈을 갚고 피난을 간 이 기업인을 알아보고 무담보로 2억 원을 융자해주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외투를 한 벌 샀는데 집에 와서 보니까 그 안에 보석이 하나 들어있습니다. “야, 횡재했구나!” 좋아했지요. 그런데 하룻밤을 자고, 이틀 밤을 자는데 불안합니다. 내가 이것을 가져도 되나 마음이 괴로운 겁니다. 그러다가 랍비를 찾아가 물어봅니다. “외투를 샀는데 보석이 그 안에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랍비는 “당신이 외투를 샀지 보석을 산 것이 아니니까 반드시 돌려주어야 하지요.” 그러면서 “돌려주러 갈 때 반드시 아들을 데리고 가시오. 그러면 당신은 보석보다 더 큰 보석을 얻게 될 텐데 그 보석의 이름은 바로 정직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링컨은 가난하게 살았지만 정직하게 성장했습니다. 그의 모든 성장기의 생활은 교회생활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구약을 거의 암기했는데 특히 시편은 완전히 암기하였다고 합니다. 시편이 무엇을 가르칩니까 정직입니다. 결국 정직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나 정직하기로 결심하라. 당신의 판단에 도저히 정직한 변호사가 될 수 없거든 변호사가 되지 말고 정직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하라. 악한이 되기로 미리 찬동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직업을 갖지 말고 다른 직업을 택하라.”- 김동길의《링컨의 일생》중에서 -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한 절규에 가까운 기도를 합니다. 그 기도가 시편 51편에 나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했습니다. 한 푼이라도 다 갚으려는 다윗의 기도입니다. 사람과의 문제는 사람과 풀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이 문제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한 것이 곳 하나님께 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옥에 갇혔을 때, 사마리아에서 강도 만났을 때 우리는 못 본척하고 가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잘못한 것인지도 모르고 죄에 너무 둔감해져 있는 것을 풀어야 합니다. 감기 걸려서 기침이 나면 목에서 얼마나 민감하게 작용합니까 우리는 죄에 대해서 이와 같이 민감해야 합니다.
다윗은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 7:10)고 했습니다.

1950년대만 해도 맥도널드 없는 미국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맥도널드는 소비자 만족지수에서 8년 동안 최하위권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이없게도 해피밀 메뉴와 함께 어린이들에게 주던 장난감 때문이었습니다. 장난감이 부족해서 수량을 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소비자는 주겠다고 하고 다 주지 못하게 되자 신뢰가 사라진 것입니다. 아마 처음에는 기발한 아이디어였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엄청난 홍보효과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때문에 어쩌면 사소한 일 때문에 회사 전체가 어렵게 된 것입니다. 사소한 것 같아 보이는 일이 성공과 실패를 좌우합니다. 치밀해야 합니다. 어디서 새는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큰 것이 아니라 사소하게 보이는 문제점을 발견해야 합니다.

정직한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내 사업이 번창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UAE(아랍에미리트)에서 원자력발전소 수주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가 숫자적으로 부흥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내가 새롭게 되기를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 원해야 합니까 범죄한 눈을 빼는 심정으로, 실족케하는 팔은 짤라 버리는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철저해야 합니다. 대충 천국 가는 것 안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큰 교회 건축하는 것이요 아닙니다. 우리 주앙교회 모든 성도들이 천국 가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 11:7)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잠 16:17)

2010년 정직한 한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2009 송구영신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우리의 신앙이 꼭 대나무와 같습니다.
대나무는 4년 동안 죽순하나 밖에 안나옵니다. 그런데요 5년이 되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그 한해에 25m가 쑥 자랍니다. 그 죽순 밑에 섬유질, 뿌리가 넓게 펴져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대나무와 같이 쑥 자랄 때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인생의 깊이를 알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쉽게만 되는 것은 또 쉽게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진짜 가치가 있는 것은 인내를 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쉽게만 벌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길 가다가 손 끔 한 번보고, 사주팔자보고 이름석자 바꾸어서 인생이 달라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너무 쉽게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우리는 아담 이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의 항로에서 이탈했습니다.
우리만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인내하고 계십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른 항로를 잡기 위하여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오늘도 인내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비행기도 우리가 아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정상궤도에서 이탈한다고 합니다. 때로는 천둥과 비바람이 몰아치는 속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저는 비행기 타고 바로 옆에서 벼락이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일 그게 비행기에 맞았다면 바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베트남 비행기 타고 김포공항에 내릴 때였습니다. 얼마나 안개가 짖게 깔렸던지 착륙하려다 다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엔진도 소리가 꺼진 것 같았습니다. 숨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착륙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까지 하늘에 떠 있을 수 없습니다. 착륙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시간이 우리에게도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인내하는 것은 목적지에 착륙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 입니다.

오늘 아침에 사무실에 나왔는데 전화가 계속오는 겁니다. 지금 중앙아시아 00나라에서 정보부 요원이 한국에 들어와 선교사 색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KCM에 있는 그 국가에 대한 자료를 다 삭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선교사들에게 큰 피해가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용들을 하나 하나 확인해 나갔습니다. 무조건 다 지우기는 그렇잖아요. 자료, 정보요 하루아침에 다 삭제해야 될 일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가 뭘 아는 것 같지만 한 살 더 먹어봐야 별로 더 아는 것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안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뭘 가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우스운 것입니다. 별것 아닙니다. 인간이 잘 살겠다고 과학을 발전시켰지만 지구는 오염되었습니다.

미국 천문학자들이 물이 존재하는 행성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지구 2.7배 크기의 물이 있는 행성이 태양계 밖에 존재한답니다. 태양계와 불과 40광년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 발견된 행성은 지구의 1∼10배인 ‘슈퍼 지구’ 사이즈입니다. 그런데 너무 뜨거워서 생명체가 살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과학자들조차도 우주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래서 태양계 밖 40광년도 ‘불과’ 얼마 안 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굉장히 먼 거리입니다. 빛은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 수 있고 이 거리는 달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태양까지는 약 8분 거리입니다. 그러면 40광년이라는 것이 얼마나 먼 거리인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55:8-9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한가지는 알 수 있어요. 때가 차면 비행기가 착륙하는 것처럼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가 만들어지기 전에 계셨습니다.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시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와 시간도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정하시고 운행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하실 못할 일이나 못하실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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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3:18-21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인생이 사막과 같아도 하나님을 믿으면 길이 생깁니다. 사막이 변하여 강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믿지 못합니다.
본문을 잘 보세요. 그 일을 누가 합니까?
19절 보세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내가”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2010년을 하나님께 맡겨드리기 위한 안수기도를 해 드리기를 원합니다. 자주 하는 것이 아니구요 딱 1년에 한번 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돈만이 축복인줄 알고 있어요. 돈에게 지배당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돈을 지배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더 주십니다. 돈은 중요한 것이지 첫 번째 축복은 아닙니다. 돈 많으신 분은 교회 안에 보다 교회 밖에 더 많습니다. 돈 버는 것은 상대적인 은사이지 절대적인 축복은 아닙니다. 돈 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별히 2010년 한해동안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는 믿음과 축복을 얻으려면 ‘내가’ 아니라 ‘내가’ 라고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게서, 우리가정에서, 주앙교회에 새 일을 행하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8절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예전에 세워둔 비전과 소망을 다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것, 믿음으로 살지 않았던 과거를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생각이 무엇입니까? 내 생각입니다. 내 방법입니다.
새해에는 새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지난 일들을 생각하고 있으면, 새해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안수 기도해야 되는데요 아무 생각도 없는 분들에게 기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내 마음에 원하는 것이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기억해 봅시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합시다. 그러면 내 마음에 원하는 것 또한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교회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기도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새해에는 예배도 기도도 성경 읽기도 좀더 열심히 해야지 다짐해 보세요. 그리고 기회가 되면 언제나 전도하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속에 정하세요. 꼭 기도하세요. 원하세요. 하나님 2010년에는 꼭 전도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도 받으시면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먹어야 삽니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2009년도 한해도 몇 일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또 한 살을 더 먹습니다. 우리는 나이도 먹습니다. 사실 살 나이가 한 살 줄어들었으니까 빼야 되는데 우리는 더합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었으면 나이 값을 해야 합니다.

초등학교선생님이 “사과 세 개가 있는데 하나를 먹으면 몇 개가 남느냐?” 고 문제를 내었습니다. 한 아이가 “세 개입니다.” 그러는 겁니다. “하나를 먹었는데 어떻게 세 개가 남느냐?” 고 선생님이 물으니까 학생이 “우리 엄마가 그러시는데요, 먹는 게 남는 거래요.” 그랬다는 겁니다.
사자성어에는 식이위천(食餌僞天) “백성들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회사를 뜻하는 ‘Company’라는 영어단어는 ‘함께’라는 뜻을 가진 ‘com’과 라틴어의 빵을 의미하는 ‘pany’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베트남에 갔더니 길가에 ‘껌(com)’이라고 써있는 가게들이 있었습니다. 인터넷 PC방인가 생각하고 들어가 보니 식당이었습니다. 쌀, 밥을 껌이라고 부릅니다. 회사는 빵을 함께 먹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나)을 먹기 위해서 모인 곳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베푸신 첫 이적은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요 2:1-10). 어머니 마리아가 난처한 표정으로 예수를 바라보며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의논했을 때 예수님은 “아직 내 때가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혼인잔치의 기쁨을 망칠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첫 기적을 베푸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만들어 내십니다(요 6:9-13). 그리고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주님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음식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더 소중한 것은 목숨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먹는 문제도 목숨을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다. 영입니다. 살리는 것입니다. 생명입니다. 목숨입니다. 이제 영적 양식을 받아먹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의 양식을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께 오셔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예수께 오셔야 해결됩니다. 와야 해결이 됩니다.
우리속담에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는데 중국에는 “산을 옮기는 사람은 작은 돌멩이부터 옮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그 일이 크던지, 작던지 일단 시작을 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께 오셔서 예수께 먹을 때만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원문의 “!Elqev::아르코마이”는 ‘나타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께 나타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같은 단어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다 풍랑 속에서 빠져 들어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바다 가운데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 무서워 유령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베드로가 “만일 주님이시라면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18)라고 할 때 29절에 “오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 1:46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와 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생명수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나옵니다.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생명수는 값이 없습니다. 누구나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값이 없다는 것은 계산할 수 없다는 뜻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돈주고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값없이(어근 dwreavn:도레안)’은 ‘값없이’이도 되지만 다른 말로는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했습니다. 선물은 내가 돈주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수를 먹을 수 있는 다른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본문에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듣는 자입니다.
듣는 “ajkouvwn:아쿠온”입니다. 같은 단어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 7:26)에 사용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귀로는 아마 많은 사람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순종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즉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망한다고 외치라는 겁니다. 요나는 가기 싫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하시기 때문에 재앙을 내리신다고 하시고 그들이 회개하면 내리지 아니 하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생각에는 원수의 나라가 망하기를 바랄 뿐 회개하고 구원 얻는 것을 원치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뜻을 앞세웠습니다. 이쯤 되면 요나가 하나님께 기도 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는 기도할 필요도 없이 다시스로 도망을 치고 있었습니다. 지중해에서 풍랑을 만난 그는 형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잘 될 것은 없습니다. 결국 그는 남에게 큰 손해를 입히고 자신은 바다에 던짐을 받는가 하면 큰 물고기에 삼킨바가 되었습니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고 끝장을 맞게 됩니다. 자기의 힘으로 살길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 살길은 하나님의 도우심뿐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기도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문제가 풀리기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요나는 죽을 고생만 하고 원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 때는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예루살렘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나중에 로마로 가고 싶어하던 바울에게 죄인의 몸으로 갈 기회가 왔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배에 탔습니다. 바울이 탔던 배는 요나가 만난 풍랑보다 더 심한 유라굴라 광풍을 만납니다. 바울이 그 배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276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멜리데 섬의 사람들은 이 일로 주님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도망가지 마세요. 요나처럼 돌아올 뿐입니다. 제자리예요. 만일 영영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면 그것은 더 불행한 것이지요. 예수께 오지 않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둘째,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목마른 자입니다.
목마른 어근 “딥사(diyavw)”는 “목마르다, 갈망하다, 갈급해 하다”는 뜻입니다. 제일 맛있는 것은 비싼 음식이 아닙니다. 갈급 할 때 먹는 물 한 컵입니다.
2002년 월드컵의 영웅이었던 히딩크 감독은 16강, 8강에 올라가서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라고 했습니다.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눅 8:44, 마 9:20)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마 9:21)
마가는 이 여인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 5:26)라고 말합니다.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해 볼 만큼 해 보았습니다. 예수가 그 여인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옷을 스쳤겠지만 그것은 다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예수의 옷을 만진 이 여인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셋째, “원하는 자”입니다.
원하는 “델론(qevlwn)”은 “선택하다, 기울어지다, 사랑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예수께 기울어져 예수를 사랑하기로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하이레오마이(aiJrevomai)” 자력으로 취하다, 택하다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자기 자신이 간절히 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윗이 아리우나 타작 마당에 딱 서 보니까 자기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 한 감동으로 충만하고, 그리고 주님을 예배하고 싶고, 찬양하고 싶고, 그런 감동으로 꽉 찼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제물을 드리고 싶다. 그런데 제물이 없었어요. 그걸 알아차린 아리우나가 왕이시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제물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소와 양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제물로 제공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때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양하면서 그러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삼하 24:24절에 보면. 따라서 하세요.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값 없이는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 하리라 이런 응답을 했어요. 다시 말하면 나는 공짜로 주는 그것으로 바치지 않겠다. 제물에는 내 정성이 있어야 되고, 내 땀흘림이 있어야 되고, 내 희생이 있어야 한다. 내가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겠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신앙입니다. 다윗의 희생 정신입니다. 여러분! 원하세요.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세요. 전도하시기를 원하세요.

기도에 대한 응답은 우리가 생각할 때 느린 것인지 하나님은 모든 기도에 적절하게 주실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에스더의 기도는 3일 만에 응답되었지만, 벧엘에서의 야곱의 기도는 20년 만에 응답되었습니다. 19세기의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는 친구 5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1년 반만에 응답을 받았고 2번째 친구는 6년 반만에 세 번째 친구는 19년 만에, 그리고 네 번째 친구는 24년 만에 구원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친구는 결실하지 못하고 죠지 뮬러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친구는 죠지 뮬러가 죽은 장례식장에 들어와 조지 뮬러의 마지막 유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위해서 40년 동안 끝임 없이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자는 하게 되어 있습니다. 먹게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