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기도하라(1)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7-18)

지난 2009년 8월 25일(화) 오후 5시 우리나라 첫 우주발사체 ‘나로호(KSLV- I)’가 발사되었습니다. 굉음과 함께 하얀 연기를 지상으로 내뿜으며 발사대를 떠나 수직으로 상승하면서 우주 상공을 향해 솟구치는 모습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대기권 밖으로 나가는데 불과 2-3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순간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대단해 보였습니다. 한 나라의 과학수준의 총체적인 평가가 위성발사에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과학기술이 총 집합된 기술이라는 겁니다. 비록 실패를 했지만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병을 부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강절(康節) 소 선생(郡先生)이 말하기를 “입을 상쾌하게 하는 물건은 질병을 일으키는 것이 많고, 마음에 상쾌한 일은 지나고 나면 반드시 재앙이 있게 된다.”는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패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만한 자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기도는 늘 겸손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 눈에 기도의 능력이 로켓 발사 장면처럼 보이지 않지만 성령의 힘은 대단한 것입니다. 로켓 발사와 비교할 수 없이 대단한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과학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숫한 문제들을 해결해 줍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나로호가 지상으로 떨어진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우리는 혹시나 나로호가 우주공간 어디에서 신호를 보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은 잊어버린 위성이 신호를 보내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그저 우주의 미아가 되어버린 위성처럼 하나님께도 아무 의미 없는 티끌 같은 존재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신호를 보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보호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궤도를 이탈한 위성과 교신을 못하는 이유는 위성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주 공간에서 오는 전파를 정확히 수신하려면 위성의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위성에서 전파를 보낸다고 해도 지상에서 그 위성이 어디 있는지를 몰라 교신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작은 신음소리에도 응답하여 주십니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받고 난 후에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눅 4:14) 18절에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라고 합니다. 제자들만 성령이 임하시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성령과 함께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하나님 아버지께 의지하셨습니다.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그 복잡한 제사의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제사 왜 지냅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제사는 실패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만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 합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왔는데 그 때 사람들이 금송아지에게 경배하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이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부터 구속하신 그 목적을 버리시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앞에 더렵혀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출 32:11-13).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께 그 백성을 용서해 주시기를 애원합니다(출 32:32).

용서는 우리 기도의 첫 번째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께 뭘 달라고 요구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미 회개했기 때문에 다시 용서를 빌지 않는 모습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용서에 대한 기도를 죽을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만이 왜 자꾸만 생겨나는지 아십니까? 내가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론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래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바로 다음에 또 강조되는 것이 있습니다.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다른 사람에 대한용서 없이, 나 또한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음을 확실히 하셨습니다.

기도는 약속을 신뢰(믿음)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약속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하여 부름 받았던 제사장이요 선지자였던 사무엘은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을 기억했습니다(삼상 12:22).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시거나 일관성이 없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목적을 알았고 자기 뜻을 그 하나님의 목적에 굴복시켰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그는 백성들에게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삼상 12:23) 외쳤습니다.

유럽에 두 명의 위대한 장군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나폴레옹입니다. 이 나라는 믿는 나라입니다. 온 나라가 하나님을 믿지만 나폴레옹은 기도를 잘 안 했습니다. 자기가 워낙 능력이 있으니깐. 그래서 아래 참모가 말했습니다. “전쟁에 나가면서 목사님을 모셔다가 꼭 기도하고 가십시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필요 없어.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는 것이 아니야.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 전쟁과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모든 계획과 지휘를 자기가 합니다. 그는 결국 전쟁도 지고 나라는 다 파멸되며, 자기를 따르던 수많은 참모들을 다 죽이고 자기도 남대서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헬레나로 귀향을 갔습니다.
그러나 또 한 명의 위대한 유럽의 장군이 있습니다. 그는 넬슨제독입니다. 영국 해군제독입니다. 영국은 해군의 나라지 않습니까? 이 장군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이 장군의 요절은 시편 127편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헛되도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먼저 기도합니다. 특별히 전쟁이 일어나서 전쟁에 나갈 때에는 갑판 위에서 군목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항상 기도하므로 이분은 나라를 건져내었습니다.

우리는 잠시 이 세상에 살면서 서러워도, 괴로워도 주님 크신 은총으로 무거운 짐 벗고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기도가 그 간구가 이 죄악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
서러움에 가득찬 내 마음의 이 괴로움
구원하옵소서 주여 크신 은총으로

이 무거운 짐을 벗겨 주옵소서 험한 이 세상에서
나 엎드려 주님 앞에 간구하나이다
나 엎드려 주님 앞에 간절히 바라나이다

보소서 나의 생명 순간 마다 사라져감을
마지막 촛불 같이 양지의 눈같이
주의 품 속에 나의 영혼을 다시 불러 소생시켜주소서

오 주여 구원하옵소서 이 세상 죄악에서
오 주여 구원하옵소서 이 세상 고난에서
구원하소서 나의 주여 도우소서 나의 주여

성경의 역사는 기도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도 기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 민족이 이방인과 다른 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다른 것은 부활의 능력이요 사망에서 우리를 부활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그에게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무리 바쁘셔도 기도하셨습니다. 바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말씀을 하실 때는 기도로 시작하셨고 기도로 마치셨습니다(눅 3:21, 22, 24:49:51). 예수님은 기도를 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을 피하셨습니다. 한적한 곳을 택하셨습니다. 그곳은 광야였습니다(눅 5:16). 열 두 제자를 임명하시기 전에는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 6:12)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죄가 없으시지만 기도하셨습니다. 그럼 주님의 기도제목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분에게 능력이 부족하여 능력을 달라는 것이었을 까요? 지혜가 부족하셔서 지혜를 달라는 것이었을 까요? 무엇을 기도하셨든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기도는 나의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기 위하여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결론은 본문에서 봅니다. 기도가 능력이요 기도가 하나님의 일의 시작이라면 우리는 당장 기도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 18절에서 “모든 기도와”라고 말합니다. 이는 모든 형태의 기도를 말합니다. 기도는 다 좋은 것입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 산기도, 금식기도 다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금식기도 언급을 하실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금식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라는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성전재건을 하면서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합니다(에스라 8:21, 23). 이것을 하나님은 응낙하셨다고 했습니다. 성전재건하기도 힘들고 포로에서 돌아와 지쳐있을 것인데 금식을 명합니다. 죽기살기로 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기도입니다. 그래야 이스라엘이 삽니다.

우리도 9월 14일-18일(5일) 동안 특별새벽기도를 시작합니다. 아이가 자면 자는 대로 데리고 오세요. 집이 멀면 교회 근처에 와서 주무세요. 여러분! 구약시대에는 전쟁을 했습니다. 지면 죽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죽습니다. 우리 교회가 죽습니다. 선교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기간도 아닙니다. 단 5일입니다. 이번 기간에 열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여러분! 기도가 성령의 도움을 받으며 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성령 받는 것이지만 동일하게 성령의 인도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지 않는 분들도 기도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성령과 함께 하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입니다.
마지막으로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해야 합니다. 구하는 것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것이 힘듭니다.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역사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잠시 이 땅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사도들이 모였을 때 “…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약속하신 것은 성령입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이 다락방에 올라가 “…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14)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날 다시 모였습니다. 기도 중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홀연히 성령이 임했습니다. 마치 불의 혀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였습니다. 방언이 터졌습니다(행 2:1-4). 약속의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무식한 줄로만 알았던 베드로가 설교합니다.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음이라”(24), 다윗의 시편도 인용하면서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 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26) 하고 외칩니다. “진짜 베드로 맞아?” 할 만큼 놀라운 설교를 합니다. 성령의 감동 없이는 하지 못할 설교를 합니다.
이제 기도의 능력을 안 것입니다. 기도로 성령 받음을 안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재하며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42)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곱 집사를 택하면서 사도들은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 6:4)고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합니까? 기도의 능력을 안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교회당 건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습니다. 교회 건물 짓고 하다가 시간 빼앗기는 것 원치 않습니다. 집사님들이 좀 해 주세요.

바울이 마게도냐 지역의 빌립보(최초의 유럽전도)에 이르렀을 때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행 16:13) 기도할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여기서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를 만나게 되고 그는 유럽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고 그의 집이 유럽 최초의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곳 빌립보에서 복음전하다 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을 곧바로 기도했습니다. 무엇을 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기도는 역사를 동반합니다.
 

 

예수를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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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요 18:3-9)

시 108: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라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작정하셨습니다. 자신이 잡혀가시기로, 자기의 생명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예수께 나오셨습니까?

미국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님이 어느 주일 아침 주일학교 아이 하나를 붙잡고 물었습니다.
“얘 토미야! 넌 여리고성이 어떻게 무너졌다고 생각하니” 목사님은 어떻게 배웠을까하는 것이 궁금해서 물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는 갑자기 긴장을 하더니 “목사님 전 절대로 아녜요, 전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일이 없어요 전 그 곁에 가본 일도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도대체 선생이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 선생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수잔나 선생, 내가 조금 전에 토미에게 여리고성이 왜 무너졌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여리고성 곁에 가본 일도 없다며 자기는 결코 무너뜨리지 않았다고 잡아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이 말을 듣던 수잔나 선생은 “목사님 그 애 말이 맞을 거예요, 그 애는 절대로 성을 무너뜨릴 애가 아니 예요, 그 애는 착하고 얌전하거든요?”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 날 예배 후 당회가 모인 자리에서 그 얘길 꺼냈습니다.
“장로님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여리고성이 왜 무너졌느냐니까 토미는 성 곁에는 가지도 않았다고 잡아떼고, 수잔나 선생은 그 애는 절대로 성을 무너뜨릴 만큼 힘도 없고, 얌전하다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재정담당 장로가 “목사님 이미 저질러진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가 무너뜨렸건 교회가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재정으로 수리하도록 하십시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무지해지면 안됩니다. 우리가 왜 예수께 나와야 하는지 바로 알아야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다녔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12명이었고 칭찬 받았던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두들 자기들의 생각과 욕심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을 크게 네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육신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중풍병자, 혈루증을 앓는 여인, 회당장 야이로,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 수로보니게 여인 등 복음서에 기록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들을 친히 만지시거나 안수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체험적인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 가운데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모신 사도가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바디메오와 같이,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귀신에 들렸다가 놓임을 받은 청년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며 허락해 주실 것을 간청한 이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들을 가정으로, 생활의 현장으로 돌려보내시면서 너희가 받은 은혜를 사람들에게 보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교훈을 듣게 됩니다. 육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그 문제가 해결되면 대부분이 예수님을 떠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영과 육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이를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병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와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을 주셔서 세상으로 보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만을 목적으로 예수님 앞에 나오면 우리는 신앙이 성숙해지는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기적만을 바라는 패역한 세대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더욱 성숙한 사도, 능력 있는 사도로 세우기 위하여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는 사도 바울의 기도를 세 번이나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문제 해결만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와야 됩니다.

둘째, 자신의 의를 확인 받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율법사, 부자 청년 등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던진 질문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또는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등입니다. 지극히 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은 자기 의를 나타내고, 그것을 자랑하며, 그것을 인정받고자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올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입장과 다르면 떠나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떠나간 그들은 더욱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이를 이루기 위하여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이 계시는 한 자기가 가진 의가 거짓된 것임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항상 불안했던 것입니다. 이는 그의 인생을 매우 불행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 나올 때는 자기 의를 들고 이를 확인 받기 위해서, 또는 자기가 이룬 공적이나 행위를 인정받기 위하여 나오면 안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 주님, 이 죄인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하며 나올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그에게 믿음의 능력이 주어지는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의를 들고 나온 사람들에게는 말씀을 듣는 귀가 막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에게는 믿음이 생기지 않고,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을 이긴 것 같으나 언제나 불안하게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을 사는 목적이 없습니다.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올라와 자신의 죄를 들고 가슴만 치고 내려간 세리처럼, 자신의 의가 아니라 내 모습 그대로 죄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와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예루살렘 성벽에서 자신의 의를 보이기 위해서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주님은 이런 보이고자 하는 행동을 질타 하셨습니다. 내 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는 자가 아니라 겸손히 무릎꿇기 위해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군인들과 대제사장이 보낸 하속들이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고,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바로 너희가 찾는 나사렛 예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첫 번째 본문 6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고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모습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이전에도 예수님을 잡으려 하거나 죽이려 하는 자들이 있었고, 그런 위기에 처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요 8:59, 10:39). 그러나 오늘은 피하려고도 않으시고 오히려 스스로 확인시켜 주시면서 자신을 밝히십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전에 신변에 위협이 다가올 때 피하신 이유를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했음으로”라고 말씀하시고, 오늘은 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저들에게 밝히신 것은 주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룟 유다의 안내에 따라 예수님을 찾아온 군인들과 하속들이, 왜 나사렛 예수를 찾았습니까? 예수님을 잡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손에는 칼과 창이 들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오되 죽이기 위해서 온 사람들은 이렇게 그 손에 무기를 들고 옵니다. 그 무기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때리고 찌르고 흩어지게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일제시대 때 교회에 가는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넷째,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나온 사람들입니다.

유대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영생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진지하게 영생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거듭남의 비밀과 믿음으로 말미암은 영생의 복에 관한 말씀을 예수님에게 듣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그의 행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 19:39절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고 그의 행적에 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르던 사도들까지 모두 두려워서 도망한 그 자리에 아리마데 요셉은 값비싼 세마포를 들고, 니고데모는 몰략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근)쯤 가지고 나타난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사도가 되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찾아 왔을 때 왜? 세레요한에게 찾아갔었냐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 11:8)고 하시면서 “선지자를 보러 온 것이면, 오기를 잘했다. 지금 너희 앞에는 선지자보다 더욱 크신 분이 서 있기 때문이다(마 11:7-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부드러운 옷은 권력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사는 즐거움이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비유적인 말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세상 즐거움을 버릴 때 하나님 말씀이 들어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의 능력이 주어지고,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말씀을 들을 때 영생에 관한 소망이 생겨나며,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새들의 나라가 온통 술렁였습니다. 며칠 뒤 새들의 왕을 정하기 위해 모이라는 왕의 명령이 내렸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가슴이 두근거리며 제 털을 우아하고 멋있게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치장도 안하고 멀리서 구경만 하는 새가 있었습니다. 까마귀였습니다. 아무리 물로 닦아도 소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들이 닦고 간 그곳에 깃털이 빠져있는 것을 보고 아름다운 것만 모았습니다. 집에 돌아온 까마귀는 좋은 생각이 났는지 그것을 풀칠하여 하나씩 붙여나갔습니다. 각양 각색의 털을 붙인 까마귀는 찬란했습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습니다. 모두들 다듬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휘황찬란한 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모두들 이렇게 아름다운 새가 있다니… 감탄을 하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순간 시선이 정체불명의 새에게 쏠렸습니다. 까마귀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까~악!”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새들은 모두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어! 이건 까마귀 소린데?, 어! 그러고 보니 까마귀가 안보이네”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러자 까마귀 몸에 붙어있던 깃털 하나가 떨어져 날아가 버렸습니다. “어! 저건 네 깃인데…”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가만히 보던 새들은 순간 달려들어 자기 깃을 다 뽑아갔습니다. 당황한 까마귀는 “까악 까악”하며 숲 속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이솝우화)
우리가 까마귀처럼 꾸미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왜 예수님을 왜 찾아 왔는가? 육신의 문제만을 위해서 찾아왔는가? 내 의를 확인 받기 위하여 찾아왔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오셨는가?
우리는 확실히 “아닙니다.”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없는 세상 의미가 없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백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5-17)

적진에 들어가 임무를 완수해야하는 검은 베레모의 특수요원들은 훈련을 늘 실제와 같게 합니다. 일년에 절반이 실제상황처럼 훈련합니다. 한번은 기자가 물었습니다.
“비 오는 날 작전 나가면 비에 젖어 힘들지 않느냐?” 요원이 대답하기를
“비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젖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인생은 고난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고난이 있다는 것을, 이왕 고생스러운 것이라면 선을 행하면서 고생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일어나 다시 달리고, 선을 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이 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5절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라고 말합니다. 이거 하나만 분명히 하면 됩니다. 나는 누구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사람인가? 자기의 주가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명령을 내려보는 겁니다. 그 명령에 따르는지 보면 압니다. “주”를 길게 부르면 “주”에서 “주님”, “주인님”이 됩니다. 목사들이나 사명을 주님께 받은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미 6: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종노릇 해보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종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모릅니다. 구약시대 때나 예수님 시대에는 거의 한번 종이 되면 평생을 종으로 살아야 됩니다. 종에서 해방 받을 길이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가끔 탈출을 시도하는 종이 있는데 잡히면 죽거나 더 심한 고통스러운 일이 맡겨질 뿐입니다. 유럽에서는 해상이 발전하여 배 밑에 들어가 쇠고랑을 매단 채 평생을 노를 저어야 하는 노예들이 많았습니다.

찬송가 305장을 쓴 존 뉴톤(John Newton, 1725~1807)은 바로 이런 노예를 팔고 사던 사람이었습니다. 뉴톤이 여섯 살 때 그의 어머니가 죽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뱃사람이었고 뉴톤의 어머니가 죽자 그 다음해에 곧바로 재혼을 하였습니다. 이 일 이후 뉴톤의 행실은 삐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끔찍한 욕설꾼이 되어 보통의 저주와 맹세의 말들로 만족하지 않고 매일 새로운 욕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노예선의 선장이 되어 노예를 사고 팔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습니다. 그가 노예무역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폭풍우를 만납니다. 배는 파선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주여 나를 살려 주소서.”라고 다급하게 말합니다. 그는 임박한 죽음 앞에 성경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의 영혼의 종말에 대해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완전한 죄의 깨달음이 없이, 절망과 조바심이 뒤섞인 침울한 시간을 보냅니다. 뉴턴은 자기가 지은 죄가 하도 커서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자신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치 못하는 뉴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배가 파도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손길로 믿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까마귀 울음소리 같았지만, 주님은 멸시치 않고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배가 파선 된지 4주만에, 뉴톤과 선원들은 모두 구조되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 그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영접해 주심으로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종이 누구인지 잘 아는 사람입니다. 종의 운명은 오직 주인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제일 바보 같은 짓이 사단의 하수인으로 죄에게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오직 나를 사주신 선하신 우리 주님께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5절 하반에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하십니다. 준비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군포시 산본은 ‘피겨 요정 김연아’의 고향입니다. 바로 옆에는 ‘수영선수 박태환’의 고향 안양입니다. 우리 집사람 학교 동창이 박태환의 어머니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김연아, 박태환 같이 될래요?” 하는 아이들을 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고된 연습은 생각지 않고 그들의 영광만 생각합니다.
김연아는 한 해 300일 가량을 훈련합니다. 빙판에서 하루 300여 회 점프훈련을 합니다. 1년이면 약 9,000회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점프하는 셈입니다. 점프 성공률은 80% 정도이니까 1년에 점프하다가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는 횟수가 1,800번 정도입니다. 차디찬 얼음바닥에서 엉덩방아를 수도 없이 찧으며 다시 일어나야 하는 어린 소녀를 기억해 보세요. 회전하려 애쓰는 척추, 착지를 위해 회전력을 잡아 줘야하는 골반의 상충작용으로 피겨 선수는 온몸에 골병이 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녀의 우아한 자태는 모진 훈련 끝에 피어난 아름다운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입니다.
“넘어지지 않고 달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 넘어졌다 일어나 다시 달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디즈레일리
성공은 공짜가 아닙니다. 천재도 소용없습니다. 항상 준비하는 자의 것입니다. 준비하는 자에게 본문은 두 가지를 당부합니다.
“온유와 두려움으로”(ajlla; meta; prau?thto” kai; fovbou,) 하라고 합니다.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원문에는 두 단어가 더 있습니다. “ajlla; meta”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물론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대답에 대해서입니다. 저는 언어적 대답만이 아니라 좀더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삶으로 대답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헬라어의 온유(prau?thto”:프라위테토스)는 태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품을 뜻합니다(딤후 2;24, 25). 두려움(fovbou:포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는 두려움을 가지고 해야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아무렇게나 말하면 안됩니다.

스코틀랜드 설교가 매더슨은 자신의 전도집회에서 회심한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읽을까요? 그들은 여러분을 읽습니다. 그 사람들은 여러분이 정말로 자기가 말한 대로 사는지, 안 사는지를 알기 위하여 여러분의 생활과 행동방식을 아주 샅샅이 읽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 점을 명심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생활이 여러분이 하는 말과 어긋나는 것을 그들이 발견하면, 마귀가 이일을 트집잡아 그리스도에게서 떼어내려 할 것입니다.”

본문 16절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선한 양심이 있어야 선이 나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4-35) 여기에 보면 쌓입니다. 선도 쌓이고 악도 쌓입니다. 잘 우는 사람은 선한 사람입니다. 대체적으로 공감하시지요? 잘 웃는 사람은 선한 사람입니다. 대개는 그렇습니다. 사람이 악해지면 이요 감정이 사라져 갑니다. 주님은 악한 세대를 가리켜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7)고 하셨습니다. 유머는 이요 마음을 열어야 만들 수 있고 보인다고 합니다.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근 사람은 웃을 줄도 모릅니다. 마음을 열면 유머가 보이고 행복해 집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머니랑 결혼하겠다고 버팁니다. 아버지가 뜯어말립니다.
“그건 안 돼, 할머니는 나의 어머니란다.” 그러자 아들이 말하기를 “그럼 아버지는 왜 우리 엄마랑 결혼했어?”
구약의 히브리어는 선한 것과 좋은 것과 기쁜 것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바로 ‘토브’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좋은 것이 선한 것입니다. 선한 것이 기쁜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이라는 것은 겨울에 입었다가 여름이면 벗어 던지는 외투가 아니다.
만약 그것이 편하면 택하고 불편하면 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면 한국은 벌써 한국인으로부터 오래전에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 고 했습니다.
이 땅에 몸담고 사는 내 나라가 그렇듯이 하나님의 나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렘 7:23)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새벽 한 시, 두 시에 나무를 짊어지고 오십리 떨어진 시장에 가면 아침때가 됩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팔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이 됩니다. 그 일을 늘 반복했는데 어느 날 장에서 나무를 팔다가 예수 믿으라는 어느 선교사의 말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이분은 한쪽 눈이 없고 배운 것도 없습니다. 남의 집 머슴입니다. 천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로는 상놈중의 상놈입니다. 아주 가난하고 불쌍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집안에 다이너마이트가 떨어진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분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온 마을이 복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마을은 온 마을이 오늘날까지 예수를 믿습니다. 한쪽 눈이 없었던 나무꾼의 아들은 장관이 되고 방송국의 국장이 되고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자랑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마을에서 목사만 18명이 나았습니다.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복음의 기적은 머물지 않습니다. 복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복음은 소망을 만들어 냅니다. 살립니다. 고칩니다. 능력이 일어납니다.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주가 아니면 다른 것이 주가 됩니다. 여러분! 그깟 돈을 주로 삼으시렵니까? 아니면 아파트가? 아니면 세상 출세가? 다 별것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님으로 섬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믿을 수 있는 책인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일 1:1-4)

한 때 유행했던 사오정 시리즈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오정이 회사 면접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먼저 앞에 사람이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면접관이 물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축구선수는 누굽니까?” “과거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요즘은 박지성입니다.” “당신은 UFO가 존재한다고 믿습니까?”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또 면접관이 묻습니다. “산업혁명이 언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까?” “예. 19세기 초반부터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대답을 잘 했기 때문에 면접관도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보냈습니다. 그가 나오자마자 사오정이 들어갔습니다. 자신을 가지고 질문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면접관의 질문이 달랐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전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요즘은 박지성입니다.” 면접관이 기가 막혀서, “당신 바보 아니야!”했더니 “과학적으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면접관이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당신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소?” 물었더니, “19세기 초반부터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더랍니다. 세상에서 바보중의 바보는, 문제도 모르고 답만 외우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기준에 넣어버리는 겁니다. 요즘 우리가 이런 교육을 하지 않나 생각해야 합니다. 요즘 심지어는 예의 범절 까지도 회사에서 가르쳐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고 CEO들은 혀를 찹니다.

예수를 찾아 나섰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처음에 발견하고 싶었던 모습의 예수를 발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샬럿 엘런은 <인간 그리스도>에서 말하기를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 예수를, 이신론자들은 이신론자 예수를, 낭만주의자들은 낭만주의자 예수를,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주의자 예수를, 해방신학자들은 계급투쟁의 선봉에 선 예수를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요즘 기업들은 흔히 마케팅 도구로 사용해 오던 설문조사기법(FGI:Focused Group Interview) 등을 폐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다 정해진 것에 마치 소비자의 의견을 듣는 척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급스런 플로랄 향의 샴푸가 새로 나오는데, 아카시아 향이 좋을까요? 라일락 향이 좋을까요?. 이미 다 써놓은 소설을 가지고 주인공에게 어떤 옷을 입힐까요?” 의견의 수렴도 아니고 자기들이 다 만들어 놓은 것이, 자기들의 생각이 타당하다는 증거를 만들어 내는 장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질문도 모르는 사오정처럼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믿는 진짜 성경, 진짜 예수를 알아야 합니다. 덮어놓고 믿으면 안됩니다. 믿음은 우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성경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권위가 흔들리고 성경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면 그 안에 기록된 것도 모두 의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를 그렇게 혼란에 빠뜨리게 만드는 경우는 소설과 같은 형식으로 쓰여진 책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은 2003년, 덴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입니다.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교회사와 예수에 대해서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든 겁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고 복음 전도에 열정이 넘치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거치는 통상적인 통로를 무시한 채 자신들의 연구결과나 또는 믿음과 영적이라는 등의 이유로 밀어붙이기 식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이것은 거짓 이론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도울 뿐입니다. 또 그것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마치 무슨 숨겨야할 비밀이 많은 것처럼 보여 오히려 믿음이 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제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은 4복음서 외에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가 없냐는 겁니다. 심지어는 예수와 무관한 이론도 그것이 성경이라고 우기거나 그 권위에 못지 않다고 주장하고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80년대 초에 신학교 다녔는데요 한번은 전철 타고 부천역에 내렸습니다. 역전앞에 예수님의 그림도 아닌데 이상한 것을 붙여놓고 전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호기심이 생겨서 가서 설명을 들었습니다. ‘말일성도예수그리스도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설명하는 것은 요셉 스미스가 부활한 모로나이로부터 1827년 9월 22일 받았다는 <몰몬경>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몰몬경은 구세계에서 미대륙으로 이주하였던 세 무리의 백성에 관한 종교적 기록이다.
그들의 종교적 및 세속적 역사를 금속판에 기록하였는데, 그것들을 서기 421년경에 숨겼고 1823년 부활한 모로나이는 조셉 스미스를 방문하였으며 그에게 전달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참 당황스럽고 황당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의 유사성이나 특히 성경이 금판에 기록되어 1800년대에 그것도 예수님 외에 부활한 사람이 전달했다는 아메리카 대륙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요셉 스미스는 히브리어와 애굽어를 못하는데 몰몬경은 히브리어와 애굽어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번역의 일부를 우림과 둠밈을 사용해서 했다고 합니다. 그 우림과 둠밈은 또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황당한 이야기를 쫓아 믿는 사람이 미국의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 약 500만 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있는 4개의 복음서 외에 도마복음, 비밀마가복음, 베드로복음, 마리아복음 등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성경의 복음서는 오직 예수를 증거 하는 데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 이외에 그 어떤 인물도 변호되거나 신성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리아 복음에는 베드로와 안드레를 “오만하고 무지한 남자들”로 묘사하고 막달라 마리아가 ‘참된 사도적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제자들처럼 동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복음에는 ‘말하는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도마복음에는 예수를 성경이 말하는 구원자가 아니라 제자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비밀 교훈들을 전해주는 지혜의 인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속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통해 온다는 초대교회 이단인 영지주의 주장과 일치하는 부분입니다. 도마복음 114장에는 이런 이상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자신을 남자로 만드는 모든 여자는 천국에 들어가리라.”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거짓 문서들은 전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일 부분들만 뽑아다 사람들에게 소개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것이 얼마나 엉뚱하고 근거 없는 이야기들인지를 알게됩니다.

학문적으로 역사가들이 고대의 문서들의 신뢰성 여부를 결정할 때 사용하는 기준은 대략 4가지 정도입니다.
첫째는 기록시기입니다. 세종대왕시대의 문서라면 세종대왕을 알던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기록된 것이 맞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사역하신 시기인 30년 정도 후에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시작했으니까 A.D. 60년에 기록할 때 살아있는 증인들이 그것을 교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거짓으로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A.D. 150년에 기록된 문서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A.D. 60년이면 예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생존합니다. 일제 시대의 문서가 위안부의 내용이 그분들이 살아 계실 때 기록되어야 더 신뢰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3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제자 요한은 예수께 직접 듣고 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도마복음은 기록연대가 2세기 후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직접 기록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 당시의 만연한 영지주의자들의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두 번째는 지리적 연관성입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신 지 30년 후 지중해에서 발견된 문서는 2세기의 스페인이나 프랑스 미국에서 발견된 문서보다 휠씬 신뢰가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복음은 1880년대에 이집트 아크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9세기에 죽은 기독교 수도사의 한 관속에서 코텍스로 발견되었습니다. 발견 시기나 지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세 번째 기준은 해당 문서의 문화적 정확성입니다. 당시 정치상황이나 사건에 대한 언급을 살펴보면 실제보다 앞선 시대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허위 문서들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2-3세기의 저술가들은 그 당시 유대인이 아니면 정확한 세부 내용을 모르는 매장 풍속, 시신 정결 문제 등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네 번째는 동기입니다. 저자에게 다른 생각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의심스러운 문제들을 확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지는 않은가? 등입니다. 몰몬경의 경우 3증인과 8증인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자주 쓰는 표현입니다만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보다 자신이 인자(人子)라고 소개한 적이 휠씬 더 많습니다. 또한 마태는 자신이 쓰는 복음서에 자신을 우상화하기는커녕 12제자의 이름을 소개하면서 유독 자신의 이름 앞에만 ‘세리 마태’라고 소개합니다.

성경이라고 말하는 문서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베이전트 베스트셀러 <지저스 페이퍼>가 있습니다. 베이전트는 아람어로 된 파피루스 두 개를 발견했고 두 문서 모두 예수의 십자가 처형 당시의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습니다. 그 문서의 저자는 자신을 “이스라엘 자손의 메시야”라고 부르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할 의도가 전혀 없으며 하나님의 영의 화신일 뿐이라고 산헤드린공의회에 해명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발견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쓰신 최초의 문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발견한 상황에 대해서 들어보면 1961년 이스라엘에서 누군가를 만났는데 고대 유물수집가였다고 합니다. 그는 금고에서 아람어로 된 두 개의 문서를 보여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자신은 아람어를 모릅니다. 그러니 그 문서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두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과 나흐만 아비가드가 파피루스를 확인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참 그런데 그 두 사람은 모두 죽었습니다. 발견당시 사진을 찍어놓은 것 한 장도 없습니다. 원본은 내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한가지 사실은 예루살렘 땅에 묻힌 파피루스는 2000년 동안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음모 술책이 있었고 그 사이에 원본이 사라지거나 불태워졌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당골 손님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로마 교황청입니다. 아마 그곳이 비밀스럽기는 하나 봅니다. 베이전트는 교황 요한 23세가 이 문서를 다른 문서들처럼 없애 버리려고 했지만 오히려 고고학자들이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베이전트의 이런 빈정거림은 늘 초대교회나 기독교가 불리한 자료들을 불태워 없앴다는 등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유다복음도 325년 니케아공의회에서 교회가 불태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유다복음의 진위성은 그 제목에서부터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신약성경의 4복음서는 모두 “마태 복음, 마가 복음, 누가 복음, 요한 복음”이라고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유다 복음에는 “유다가 전하는 복음(Gospel According to Judas)”이라고 되어있습니다. 복음서 기자가 자신이 아니라 유다에 대한 복음서라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건 이것은 유다가 죽고 한참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의 복음서들 외에 다른 복음서라고 주장하는 문사들이나 기타 문서들은 역사성이라는 시험대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도마복음은 2세기의 신비주의와 영지주의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고, 말하는 십자가와 거인 예수가 등장하는 베드로 복음은 신뢰성에서 낙제했습니다. 마리아복음과 유다복음은 그 기록시기가 너무 늦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복음서를 복사, 짜깁기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비밀마가복음과 지저스페이퍼는 위조품이었습니다.

위에서 말한 역사가들의 네 가지 기준이외에 다중증언(multiple attestation)이 또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서로 증언이 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일관성의 문제도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기록시기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4복음서의 대항복음서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바울 서신 대부분은 4복음서보다 기록이 앞섭니다. 대항복음서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로 1세기에 모아서 불태워졌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려면 기독교인이 정치, 군사 모든 면에서 장악하고 있어도 될까 말까하는 일입니다. 그 당시의 기독교인은 카타콤과 같은 동굴로 피신해 다녀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복음서가 왜곡되었다는 이야기로 아이들의 전화놀이를 비유하곤 하는데 성경은 구두 전승이 아니라 문자 전승되었습니다. 그 정교함은 성경 사본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것들이 너무 똑같다는데 놀라고 있습니다. 도대체 다른 곳이 없는 사본들을 쳐다보는 일은 지겹다고 할 정도입니다. 신약성경의 헬라어 사본만 5,700종이나 됩니다. 라틴어로 1만종이상의 사본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콥트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 그루지아어 등 다른 언어들 사본도 있습니다. 이것을 다 합치면 1만개 이상으로 봅니다. 다 합치면 25,000-30,000종의 필사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본들을 다 파기하면 어떻게 될까요?
고대 교부들이 신약성경 말씀을 자주 인용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다시 재구성하면 성경을 만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교부들의 저작은 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이어집니다.
로마가 대단한 나라답게 역사 또한 정리하려고 무진 애를 섰습니다. 그래서 요세푸스 같은 사람도 유대인인데 로마가 결국 로마인으로 만들어 역사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예를 들어 리비우스는 로마 역사에 대해서 142권을 썼지만 그 가운데 35권만 남아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증거들을 믿지 못한다면 아마도 고대 문서에서 믿을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한 두 개의 책이나 문서만 발견되어도 그것을 의심 없이 믿기 싶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성경의 사본들은 다 무시하고 한두 권의 다른 책만 인정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인터넷에 떠도는 예수님에 대한 이상한 주장들도 모두 역사적 자 대를 들이대야 합니다. 그것들의 진실성 여부를 따지고 검증을 해야합니다.
인터넷에는 휴지통이 없습니다. 아무거나 다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개인 컴퓨터 안에는 휴지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휴지통은 필요 없는 파일을 그곳에 버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소입니다. 휴지통에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고 두면 컴퓨터 속도가 느려집니다. 어느 순간 불필요한 것들 때문에 컴퓨터가 먹통이 되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가 좋으면 뭐합니까? 쓸데없는 것만 모아 놓는다면 쓰레기 더미에 불과할 것입니다. 세상 것 버리시고 하나님의 것 보관하시기를 바랍니다.
착각은 자유입니다. 선택도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에 따른 책임은 내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문자라는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오직 믿을 수 있는 것은 성경뿐입니다. 본문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저는 사도 요한의 이 말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은 이상한 소리 안 합니다. 후세에 다른 사람들이 제자들의 이름으로 해야 권위가 서기 때문에 제자들의 이름을 팔아먹으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교묘히 넣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철저하게 그것들을 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입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가 잘 선택한 결과입니다. 성경은 역사적으로도 사실일 뿐만 아니라 성경만큼 수많은 사본으로 정확하게 그 내용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이야기는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증언합니다.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어느 분의 이야기입니다. 여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뜨신 뒤 어머니는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당신 혼자 힘으로 키우셨습니다. 그 고생이 오죽했으랴. 그러나 그런 형편에서도 어머니는 늘 우리에게 ‘정직해라’, ‘책을 읽어라’, ‘남에게 폐 끼치지 말아라’ 하는 세 가지 당부를 하셨습니다. 나는 공부하다가 ‘기하학’에 대한 책을 사야된다고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더니 읍내에 다녀오신 어머님은 내 방으로 슬그머니 책을 넣어주셨습니다. 나는 밤이 되어 어머니 곁으로 갔는데, 수건을 쓰고 주무시는 어머니가 이상하여 수건을 살짝 벗겨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머리가 짧아져 있었습니다. 머릴 짤라 책을 사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냥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약속의 책이라고도 말하지만 다른 표현으로는 증언, 증거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살며시 펼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나를 사랑하신 증거로 십자가를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8-15)

교회 오다보면 어머님들이 아이들의 세 발 자전거를 손에 잡고 가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그 세 발 자전거에는 아이들이 페달을 밟을 수 있도록 되어있고 어머니가 뒤에서 손을 잡을 수 있도록 길게 손잡이가 있습니다. 한 3살쯤 되는 아이들이 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열심히 페달을 밟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운전도 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뒤에서 어머님들이 밀어주고 방향을 잡고 나아갑니다.
우리가 마치 세 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인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나름대로는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뒤에서 하나님이 다 인도하시고 밀어주셔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 발 자전거 타고 가는 어린아이들 보니까요 모두가 제 딴에는 열심히 페달을 밟더라구요.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페달 밟지 않고 발 띠고 가는 아이는 제가 보지 못했습니다. 열심히 밟는 거예요. 나름대로 운전도 합니다. 그리고 어머님이 밀어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짝사랑 하셨어요. 이제 내가 응답할 때가 되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어떻게 믿음 생활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어떻게 자녀를 기르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생활 해야 됩니다. 교육해야 합니다. 세상 교육에만 맡겨두지 마세요. 사람이 버립니다. 제가 러시아 중국, 아시아 다른 나라들도 다녀보았는데 어떤 선교사님들이 아이들 교육하는데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우니까 국제학교(사립학교)를 못 보내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나라 국립학교에 보냅니다. 한번은 러시아 선교사님 아들이 학교에 다녀오더니 레닌이 왜 나쁜 사람이냐고 따집니다. 공산당 교육을 받은 겁니다. 교육이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돈 많이 들어가는 학교만 보낸다고 잘 가르친다고 단정하지 마세요. 제일 좋은 교육은 부모님의 교육입니다. 가정교육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세요. 학원 보내서는 몇 시간씩 교육하게 하고, 학교에서 하루종일 교육하도록 맡겨두면서 왜 집에서는 아무 교육하지 않습니까? 학원 한시간 줄이고 집에서 한시간 성경 교육하세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없이는 자신도 없고 자녀도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한번 따라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나도 없고, 가정도 없고 자녀도 없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믿습니까?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는 오늘날 우리처럼 신약성경이 있고 예수님의 구속사업이 완결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은 겁니다. 만일 아브라함에게 오늘 날 우리에게 들려진 독생자의 십자가의 은혜가 있었다면 그가 어떻게 했을까요? 어떤 순종을 했겠습니까? 우리는 세례요한의 고백을 봅니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했을 것입니다.
이 때는 심지어는 야곱을 택하여 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붙여주기도 전입니다. 당연히 출애굽시대의 기적을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면 무엇이든지 안하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면 무엇이든지 할 태세입니다. 오직 하나님에 죽고 하나님에 사는 것입니다. 그에게 다른 삶은 없어요. 온전한 순종뿐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시작하는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적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시작을 누구로 하느냐 아브라함으로 시작하는 겁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과 그 조카가 가나안땅에 들어와 함께 복을 받았습니다. 잘 살았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조카 롯이 축복을 받은 것은 모두가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 옆에만 있어도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아 주면 그에게도 함께 복을 줍니다. 그런데 롯은 이 복이 어떻게 해서 왔는지를 모릅니다. 그냥 사는 잘 살게되었다고 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자기가 열심히 페달을 밟아서 자전거가 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물질이 많아지니까 아브라함과 조카인 롯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절대 아는 사람과도 동업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조카하고 하면 안됩니다. 망하면 서로 책임 전가하여 사이가 안 좋아집니다. 잘되면 더 큰 분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해서 믿음으로 하려면 꼭 독립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가정불화가 일어나고 싸우면서 살 수 없으니까 이 넓은 땅에서, 우리가 가진 이 땅에서 네가 갖고 싶은 땅을 선택하여 가지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롯은 어디를 선택했습니까? 소돔 성을 선택했습니다.

소돔성은 비옥합니다. 소돔성은 넓습니다. 아주 평야입니다. 좋은 땅입니다. 도시입니다. 여리고가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도시이니까 바로 그 옆이니까 얼마나 잘 살겠어요? 그래서 이 롯은 소돔 성으로 향했어요. 롯은 오늘날로 말하면 부동산의 귀재입니다. 아주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요 머리가 팍팍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벌고 어디에서 무슨 손해가 일어나고 이해관계 너무너무 잘 아는 박사입니다. 그래서 소돔 성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소돔성에 한 면만 보았지 다른 면을 보지 않았습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죄가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한쪽으로는 풍요로웠지 만, 온갖 범죄가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사람은 많았지만은 하나님이 떠난 것을 몰랐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은 많았지만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사람이 한 세상을 다 살고 보면 부자로 산 것도 권력을 가지고 산 것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가 떠난 후에 무엇을 남기고 갔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한 부자가 떠난 후에 재산을 관리하는 변호사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는 도대체 얼마를 남기고 갔습니까?” 변호사는 짤막하게 “다 남기고 가셨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청교도들은 재산을 남기고 가는 것을 가장 큰 어리석음으로 간주했습니다. 바보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경건한 영향력을 남기고 가는 것을 인생의 가장 가치 있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경제적인 것은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예루살렘 건물도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이면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마저 주님께 자랑합니다. “예수님 저 큰돌들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으로 말하자면 이집트가 대단하지요. 그 웅장한 피라밋들을 보세요. 그러나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겁니까? 무엇을 위한 겁니까? 죽은 자들의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이 땅에서 33년이란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우리에게 십자가를 남겨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제일 부끄럽게 여기던 그 십자가가 제일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왜요? 그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베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헌신예배에 초청 받아 다녀오시고 오히려 자신이 그 교회에서 많은 은혜를 받고 오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사회적으로도 영향력 있는 성도들이 많은 교회로도 유명합니다. 저는 그 교회를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으로부터 식사하면서 그 교회 장로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장로님은 사회적으로도 덕망 있는 분으로 큰 회사를 운영하시면서 학교에 강의도 나가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매주 토요일 교회에 오셔서 담임목사님과 젊은 교역자들의 구두를 모아 깨끗이 닦아주신 답니다. 그리고 사무실 화장실까지 깨끗하게 청소하고 가신답니다. 그래서 모든 분들이 그 장로님을 존경하고 교회가 잘 성장해 가고 있답니다. 아들 같은 교역자들의 구두를 닦아주시면서 기도하실 그 장로님만 생각해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겸손한 장로님이 계시니 교회가 민족과 열방을 위해 쓰임 받고 부흥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겸손에는 놀라운 감동과 능력이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선택권을 롯에게 넘겼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바보 같은 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물질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롯과의 평안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결정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여기까지 인도하여 축복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다면 그곳이 곳 축복의 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14절에는 말씀합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하나님께서는 사방을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한쪽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방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좁은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처럼 작은 분이 아닙니다. 사방이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널려 있습니다. 동서남북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그래서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레는 “세계가 나의 교구이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온 세계를 하나님이 주신 비전으로 보았습니다.
몽골인의 평균 시력은 4.0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무엇을 알아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인사는 “안녕하십니까?”가 아니라 “당신이 온 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합니다. 멀리서 말이 달려오며 먼지를 일으킵니다. 우리 눈으로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먼지 구름만 보고 그들은 “삼촌이 돼지 두 마리 잡아온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육의 눈이 밝은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이보다 더 영적이어야 합니다. 영의 눈이 밝아 하나님의 비전을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10절에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그랬습니다. 롯도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좋은 것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하고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사람이 선택한 것은 물질이 풍요로운 소돔이었습니다. 사람이 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곳이었습니다(13절).
노아의 홍수 이전에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악할 뿐입니다. 롯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달랐습니다.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봅니다. 사람의 눈에는 버려진 곳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달랐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 앞에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미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는 것은 다 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은 뭐든 잘 됩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축복을 받습니다. 아브람의 절대적 순종을 확인하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99세가 되어서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창 17:1)고 하시면서 언약을 맺고 이제 큰아버지(아브람)라고 하지 않고 앞으로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아브라함)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창 17:4-5).

러시아가 미국에 알래스카를 사라고 제안하였습니다. 미국은 러시아에 200만 달러를 주고 알래스카를 샀습니다. 그 때 의회에서 의원들 대부분이 반대하였습니다. 당시 미국의 재무장관이었던 윌리엄 시워드는 의원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여러분, 나는 눈 덮인 알래스카를 보고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 안에 감추어 있는 무한한 보고를 바라보고 사자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그 땅을 사자는 것입니다.” 지금은 알래스카가 미국의 모든 주 가운데 가장 부유한 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볼 줄 아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미국 상원 담당 목사를 지낸 리처드 하버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한번은 먼 곳에 갔다가 저녁 무렵에 비행기를 타고 자신의 집이 있는 워싱턴 시로 돌아오던 길이었다고 합니다. 비행기가 워싱턴 시 상공을 선회하며 착륙을 준비하고 있을 때, 그는 문득 자신의 교회를 볼 수 있나 싶어 창 밖을 내다봤습니다. 교회 건물이 그리 크지 않아서인지 아무리 찾아봐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백악관, 국방성, 조지 워싱턴 대학, 아동 병원 같은 큰 건물들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물들을 보면서 그의 마음에 갑자기 성도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떠올랐습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성도, 국방성에서 일하는 성도, 아동 병원에서 간호사로 있는 성도, 대학 교직원으로 있는 성도를 생각하면서 그는 무릎을 쳤습니다. “그렇다. 내 교회는 이 도시 전체다. 좁은 예배당 안이 아니라 사랑하는 성도들이 일하는 삶의 현장 전체가 내 교회다. 내가 할 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훈련하고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건물에 갇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넓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동서남북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60년 말부터 여의도로 갔습니다(1973년 8월 19일 최초예배드림).
그 당시 여의도는 단지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활주로로 이용되는 땅이었습니다. 그 당시 여의도는 황폐한 섬으로서,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조차도 없었습니다. 교통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고 여의도에 건물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강하게 추진하였습니다.

금란교회는 망우리 공동묘지아래 있는 교회입니다. 모두가 그곳은 교회의 터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김홍도 목사님은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부흥시켰습니다.

김삼환 목사님은 상가교회 목회에 여러 번 실패하고 고향인 강원도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강원도에 갈 것 같으면 이제 마지막으로 서울 명일동에 그 당시 버스종점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안내양들에게 전도하고 교회를 하자고 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벧엘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창 12:8, 13:4)
마므레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창 13:18)

여러분! 전쟁을 사람이 하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허락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 심판이 사람이 아무리 막으려 해도 죄가 있는 곳에는 심판이 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쟁이 사람이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줄 아십니까? 우리나라가 지금 하나님 앞에 깨어있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교사에 보면 “제36회 총회는 경남노회 총대문제로 개회벽두부터 소란이 일다가 급기야는 경찰이 동원되어 진압이 되고 총회는 유회가 되었다. 그리고 2개월 후 6. 25전쟁이 터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교회도 정치인들도 우리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술집에서 거나하게 취한 중년 신사가 웨이터에게 말합니다. “여기 술 깨는 좋은 거 좀 가지고 와봐.” 웨이터는 “네 알겠습니다. 여기 계산서 있습니다”하고 계산서를 가지고 왔더랍니다.

한 때 유행했던 사오정 시리즈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오정이 회사 면접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먼저 앞에 사람이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면접관이 물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축구선수는 누굽니까?” “과거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요즘은 박지성입니다.” “당신은 UFO가 존재한다고 믿습니까?”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또 면접관이 묻습니다. “산업혁명이 언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까?” “예. 19세기 초반부터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대답을 잘 했기 때문에 면접관도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보냈습니다. 그가 나오자마자 사오정이 들어갔습니다. 자신을 가지고 질문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면접관의 질문이 달랐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전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요즘은 박지성입니다.” 면접관이 기가 막혀서, “당신 바보 아니야!”했더니 “과학적으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면접관이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당신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소?” 물었더니, “19세기 초반부터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더랍니다. 세상에서 바보중의 바보는, 문제도 모르고 답만 외우는 사람입니다.
곤충연구가로 유명한 파브르가 날벌레를 연구하다가 그들의 미련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날벌레들은 앞에 무엇이 있으면 죽자사자 따라다닌다고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기운이 빠지고 굶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다는 겁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얼마든지 먹을 것이 있는데도 그걸 보지 못하고, 열심히 엉뚱한 것만 따라 다니다가 굶어 죽어 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2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6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7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8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9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10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 (시 146:1-10)

피아니스트 중에 서혜경 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암으로 투병하면서 연주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생명이 먼저지 피아노를 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피아니스트에게는 피아노를 칠 수 없다면 더 이상 살아도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수술을 하고 나면 오른팔을 못쓸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그 때를 대비해서 왼손 만으로라도 연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라벨’의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치면서 눈물 흘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수술대에 누워서 내가 녹음한 CD 음악을 들으며 마취에 들어갔다. 마취가 깨는 순간 제일 먼저 오른쪽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피아노를 치고 싶어서 수술 사흘만에 피 주머니를 찬 채 퇴원을 강행했다. 옷도 갈아입기 전에 <호프만의 뱃노래>를 쳐보았다. 오른쪽 손가락이 움직일 때 그 감사와 환희는 기쁨의 눈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치지 못하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면 죽어 있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내가 오늘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오늘 우리의 예배가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감격의 예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이 세상이 눈물의 골짜기라면, 예수님은 거기에 뜬 무지개이시다.”.

오늘 본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마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절대 잊어서는 안될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단어는 바로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 할렐루야, 아멘”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다른 것 다 잊어버려도 이 단어만 알고 믿고 있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다른 것 다 알고 이 단어를 모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어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앞의 두 단어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말한다면 다음 두 단어 “할렐루야, 아멘”은 그분들께 드리는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요,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시는 ‘할렐 시편’(146-150편)의 첫 번째 것입니다. ‘할렐 시편’들은 유대인 회당에서 매일 아침 예배 때마다 낭송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모두 10절인데요 ‘여호와’라는 단어가 10번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4번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속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찬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찬양의 대상이 세상 사람이 되는 것은 모두가 그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노래가 영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대상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를 영원히 도울 수 없습니다. 결국은 그도 죽고 나도 죽습니다. 인간의 모든 생각은 소멸됩니다. 어떤 철학을 가지고 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짐 존스 목사는 흑인, 마약중독자, 노숙자 등 도시 빈민 계층 구호 활동으로 좋은 평판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설교도 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존교회를 부정하고 새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남미 가이아나에 있는 존스타운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급기야 자신을 메시야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신도들을 폭행하고 성 문제 등 온갖 문제들이 가까스로 탈출한 사람들에 의해서 폭로되었습니다. 미국 의회는 급기야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1978년 미국 하원의원 리오 라이언(Ryan)과 NBC방송 기자 등 5명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곧 바로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이어 존스 목사는 청산가리를 탄 주스를 마시도록 신도들에게 명령하여, 이른바 ‘영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했습니다. 그 때(1978.11.18) 죽은 사람이 912명입니다. 이 중 어린아이만 276명이나 되었습니다.
인간을 의지하지 마세요. 그것은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를 잘해도, 구제사업을 잘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일 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대개 세상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세상에 무엇 하러 왔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기계론적인 인생관과 목적론적인 인생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계론에 의하면 사람이란 부정모혈(父精母血)로 출생해서 처음에 기고, 앉고, 걷고, 소년기가 되고, 청년기가 되고, 장년기가 되고, 노년기가 되고 그러다가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저 시간이 지나는 대로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목적론에 의하면 사람이란 누구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면 무슨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식이위대(食而僞大)’란 말이 있는 것처럼 우선 먹는 일이 큰일입니다. 그러나 그 먹는 것조차 성경은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33)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첫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활입니다.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되시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우리는 주님의 제자요, 주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피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이 몸을 드려 주님을 찬양 해야합니다.

본문 5절에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자기의 소망으로” 두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 의지해야 실망과 낙담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6-9절까지 그 이유가 설명됩니다. 왜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의지해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만물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본문 6절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창조주 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찬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찬양의 대상은 주 하나님 뿐입니다. 기독교는 찬양의 종교입니다. 교회는 찬양을 부르러 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우리에게 찬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둘째,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하나님만이 믿을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절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라고 하셨습니다. 군대에서 아무리 무서웠던 고참도 제대할 때가 다 되면 무서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그만두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레임덕(lame duck)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성경을 구약(Old Testament), 신약(New Testament)라고 부르는 이유도 약속의 책이라는 뜻입니다.

셋째, 왜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는지 7-9절까지 9가지로 하나하나 설명해 주십니다.
7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8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비굴한’(!ypiWpK]:케푸핌, 꿇은 자)은 염려와 고통으로 인해 마음이 눌리고 구부러진 사람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9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여호와 하나님을 왜 찬양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여러분! 귀신 불러들이는 세계의 모든 무속신앙들을 보면 모두 다 노래를 불러서 끌어들입니다. 모두 다 뭔가 주술 외우고 이렇게 춤출 때 귀신이 옵니다. 나쁜 것도 그렇게 옵니다. 하나님은 언제 임하시느냐 하면 찬양할 때 임하십니다.

독일 출신의 위대한 작곡가 헨델은 초기에 왕을 위한 곡만을 썼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 듣는 수상곡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가 최고의 음악가로 불리우게 된 것은 세상 왕을 노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에게 최고의 영감을 준 곡은 이 세상을 초월한 가장 위대한 왕, 메시야 였습니다. 불후의 명곡 메시야 중 할렐루야는 그에게 있어 영감의 극치였습니다. 그는 할렐루야를 작곡했던 당시의 감격스러운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임금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임금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그랬다는거 아닙니까? 제가 여러분 마음 문 열라고 한 것이고요 그가 말하기를 “내 앞에 펼쳐져 있는 하늘나라와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본 듯한 감격 속에서 이 곡이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찬양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본문을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1절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찬양은 기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으로 해야 합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젓 먹던 힘있잖아요. 아이가 젓 먹을 힘이 없으면 예전 같으면 죽습니다. 그 힘은 마지막 힘이 있는 한입니다.
찬송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으로 하는 것입니다. 시편 147:1절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선함이여 찬송하는 일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인 것입니다.

둘째, 2절 “나의 생전에, 평생에 여호와를 찬송하겠다”고 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있는 한 찬양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존재가 계속되는 한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입으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지정의(知情意)를 포함하여 전인으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고 각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찬양은 전인적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삼상 16:7).
우리가 사는 곳에는 어디나 찬송이 있어야 합니다. 왜요? 사람이 창조된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성도가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히브리서 13:15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3절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두 번째 까지는 시인 자신의 고백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는 백성을 위해 함께 찬양해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혼자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억지 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복음은 자율적이며 정당하고 정확하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 8대왕 요아스가 성전을 보수하기 위해 일종의 세금(헌금)을 거두어들입니다. 처음에는 레위 사람들에게 성읍을 직접 다니면서 거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잘 거두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역대하 24:8 “한 궤를 만들어 여호와의 전 문 밖에 두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차고 넘쳤습니다. 자율적으로 해야 합니다. 강제적으로 헌금하고 찬양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시편 145 2-3에도 “2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3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 시인은 찬양에 자신이 있습니다. 단순히 노래를 잘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쁨으로 찬양하며 크게 찬양합니다. 숨어서 하지 않습니다. 만인이 보는데서 합니다. 여호와를 자랑합니다.
시편 148:1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찬양할지어다”,
시편 149:1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크게 찬양하고, 높은 데서 찬양합니까? 만인이 들으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숨길 것이 없습니다. 등대는 높은 곳에 세워야 합니다. 모두가 잘 보여야 합니다. 함께 찬양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시키시는데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변론이라도 하자고 하십니다.
시편 71:14-15에 “1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15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자기혼자 좋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기쁨을 전하고 있습니다. 기쁨이 있는 사람, 찬양하는 사람은 반드시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소경의 눈을 여시듯이 우리의 심령의 눈을 밝게 해주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노라”(롬 1:1-7)

이탈리아의 격언에 “천 개의 거짓으로 한 개의 진실을 만들 수 없다.” 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것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또 많아 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가 많아진들 가라지 일 뿐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것으로 아무리 심어도, 갈고 닦아도 사람의 것일 뿐입니다. 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떤 일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이라는 기준이 그저 돈 많이 벌고 명성을 얻으면 그것을 성공이라고 합니다. 또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갖은 방법과 노력을 다합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 적인 관점에 벗어나야 합니다. 달라져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점, 시각이 예수그리스도의 눈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크리스찬입니다. 내 눈이 아닙니다. 내 생각이 아닙니다. 교회에 와서도, 주님 앞에서도 여전히 내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나의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일수 없습니다. 자! 오늘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열어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고백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만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아담이 범죄 한 이후에 하나님은 곧바로 “아담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고 부르시면서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여러분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지금까지도 하나님은 아담을 찾으실 때와 동일한 마음으로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직접 오셨습니까?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우리를 찾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우리를 찾고 계신 것이고,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를 찾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고 하셨습니다. 이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두 가지의 부르심에 대해서 나옵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부르심이요, 다른 하나는 특별한 부르심입니다.

첫 번째, 일반적 부르심이란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서 불러 주시는 부름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고 하셨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습니다. 구원를 주시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고 나아온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라는 말은 구별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입니다. 부름을 받은 자들의 무리입니다. 교회는 부름을 받은 자가 모여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본문 7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구원의 초청을 받은 모든 사람입니다. 사실상 두 번째 부름을 받은 사람들 역시 여기에 들어갑니다. 첫 번째 부름 없이 두 번째 부름이 없습니다.

두 번째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일을 시키시려고 특별하게 부르시는 부름을 말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라는 부름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단순히 구원만을 위한 부르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세상과는 완전히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요 천국시민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도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사 43:1)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명자입니다. 바울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직접 주신 것입니다. 교회에서 준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두 번째 부르심을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를 부르시는가?
하나님은 아무나 부르시지 않습니다. 준비된 사람을 쓰시는 분입니다. 준비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겸손한 사람입니다.
스스로 된 줄로 생각하는 자만심이 가득한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바로의 왕궁에서 40년 간 교육받아 문무를 겸비한 모세를 그대로 쓰시지 않았습니다. 나이 40에 애굽의 문화를 통달하여 말과 지식이 능숙했지만 그는 교만했습니다. 권력이나 지식이 있어도 교만한 자를 주님은 쓰시지 않습니다.
교만한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애굽 사람만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곤욕스런 40년을 이방의 객으로 외롭게 지냅니다. 애굽의 바로 궁에서 살아온 날만큼 미디안 광야에서 살아갑니다. 이 기간은 혹독한 훈련의 기간이었습니다. 애굽에서 편안하게 지내며 먹던 그런 호화스런 생활이 아닙니다. 모세가 달라지려면 그 기간만큼이나 필요했습니다. 모세는 어느새 80이 되었습니다. 나이 80에 기력도 쇠진하였고 미디안 광야의 목자의 생활에 이젠 인간적인 자신감을 몽땅 사라졌습니다. 몸도 늙고 기력도 쇠진하니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겸손하니 부르신 것입니다.
기스의 아들 사울도 온유 겸손할 때 주님이 그를 높이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교만할 때 그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겸손한 사람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릎을 꿇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합니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보다는 오직 주님만 의지합니다. 겸손함으로 주님께 귀히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한 상태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순종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안됩니다. 못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만 하면 정말 안되고 못합니다. 네 힘과 지혜와 지식과 학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주님이 할 말까지 가르쳐 주십니다. 입에 넣어 주십니다. 죄는 사해 주시며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십니다. ‘베드로’의 이름은 원래 ‘시몬’인데 아람어로 ‘게바’(바위)라고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 유대식으로 시몬은 좋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겸손해서 바위처럼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민이 사용하는 아람어의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고산 윤선도(1587.6.21)은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아닐 손 바위뿐인가 하노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받고 있었습니다. 비록 유대인에게는 배신자 같았지만 그 자리는 아무나 오를 수 있는 자리는 아닙니다. 공무원입니다. 예수님은 그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마태도 ‘레위’(막 2:14, 눅 5:27)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레위는 ‘연합’인데 마태는 세상과 연합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는 ‘마태’가 되어 살았습니다. 마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마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와 세속에 살면서 이기주의적인 생각에 빠져있던 레위를 불러 마태로 만드셨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죽은 자는 스스로 다시 새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살릴 수가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어떤 활동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예수님의 부름을 받기 이전에는 시몬과 레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사람이었습니다. 죽어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름이 바뀝니다. 인생이 바뀝니다. 순종함으로 제자가 됩니다.

셋째, 분명한 사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택정함을 입었다는 말은 사명의식이 분명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부르심을 받았는지도 모르는 자들은 기드온의 삼백용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날 노나라의 왕 애공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듣자하니 건망증이 심한 사람은 이사를 한 뒤에 자기 아내조차 잊는다던데, 정말 그런 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공자가 “그정도면 건망증이 심한 것은 아니지요. 정말 건망증이 심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립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는 분명한 사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불렀는지 내가 왜 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부르심과 택하심”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나를 부르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다른 말로 한다면 “사명감을 새롭게 하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나를 왜 불렀는지, 왜 선택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부르십니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보면 “내가 너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손에게 복을 주시겠다 하셨습니다. 네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고 하셨습니다(창 12장).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은 그 이름은 생명 책에 기록이 되고 새벽 별같이 빛나게 되는 줄 믿습니다.

구약에 선지자중에 아모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특별한 훈련을 받았다거나 가문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아마샤에게 한 말에서 잘 나타납니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암 7:14)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는 말은 그는 선지자가 될 수 있는 집안이 아니며 선지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아모스는 평신도 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는 뽕나무를 재배하고 양을 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암 7:14) 그래서 아모스는 신학적이거나 다듬어진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자기 식으로 예언하며 꾸짖습니다. 사마리아의 궁에 가서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암 4:1)고 말합니다. ‘암소’는 고집센 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드고아를 출발하면서 주변 나라들(다메섹, 두로, 에돔, 암몬, 모압)을 책망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 까지는 공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 이방인에 대해서 멸망할 것을 예언할 때 이스라엘인들은 유유히 즐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유다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더 심하게 예언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잘 살던 사람이 망하면 더 비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던 이스라엘이 망하면 더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도 더 혹독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평신도 선지자 였지만 자기방식으로 훌륭히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그야 내 발이 이곳으로 나왔지요” 하신다면 그것은 마치 “전등이 어떻게 켜졌습니까?” 하는 질문에 “스위치 올리니까 불이 들어 왔지요”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발전소나 변전소의 존재는 아예 생각하지 않은 대답입니다.
아프리카 사람이 미국의 어느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습니다. 수도꼭지를 트니까 물이 콸콸 나옵니다. 너무도 신기하고 귀해서 그 수도꼭지를 뜯어 가지고 아프리카 자기 집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틀어도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 험악한 세상에 살면서 이만큼이라도 좀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셨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끊임없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또 다른 대답이 있습니까? 다른 대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천 개의 거짓으로 한 개의 진실을 만들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것으로 안됩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통해서만 우리를 성도로,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까지 자랄지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3-16)

버스 정류장에 버스가 한 대 서있었습니다. 시간이 좀 흘렀는데도 기사는 여전히 손님을 기다리느라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성질 급한 한 남자가 소리쳤습니다.
“기사님, 이 똥차 언제 출발해요?” 버스 기사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네 손님, 똥이 다 차면 출발합니다.”
우리 속담에 “내가 똥 눈 우물물을 내가 다시 먹는다”고 했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했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어봅니다. 마치 고기가 “물이 어디 있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나 가까이에 있어서 모르는 겁니다. 내가 지금 호흡하는 것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지금 이곳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그분이 하실 일을 대신 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복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는 별로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살던 방법이 아니라, 내 뜻대로 살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노라고 그 방향을 변경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입으로만 회개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입으로 한 회개를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입으로만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기독교 교육의 최종적인 목적은 예수의 제자를 양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하면 다른 제자를 만들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면서 기독교 교육의 핵심은 성경교육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기 위하여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목숨을 마쳤던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성경을 보기 위하여 노력했기 때문에 당연히 기독교 교육은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었고 주일학교 운동이 전 세계에 보급되면서 그 목적은 어린이를 위한 성경 학습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한가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바지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흘러내리는 것은 자연적으로 흘러내리지만 흘러내린 바지를 끌어올리는 것은 반드시 손이 가야합니다. 잡아 당겨야 합니다. 가만히 있는 바지가 흘러내리기는 하지만 절대로 저절로 혼자 올라오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흘러 내려갔던 바지를 올리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멀어져 간 것을 다시 찾아 끌어 올려야 합니다. 인간에게 죄 성이 있어서 마치 바지가 저절로 흘러 내려가듯이 내려가기는 하지만, 저절로 올라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른 기독교교육을 통해서만 흘러 내려갔던 우리의 마음과 뜻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중국 병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적은 물에 큰 고기 없고, 마음 적은 사람 큰 성공 없다” 큰 고기를 잡으려면 큰 물가로 가야합니다. 크게 키우려면 큰물로 보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큰 교육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제일 크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마 12:41 “…요나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절 “…솔로몬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가 제일 크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크신 예수를 작게 만들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이 큰 것인지, 오늘날 우리 교육은 제대로 가고 있는지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바른 방향을 잡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근대에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제일 고민하여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1952년 미국교회협의회 안에 기독교교육부 특별위원회에서 5년 동안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58년 다음과 같은 기독교 교육목적을 발표하였습니다.
“기독교 교육의 지상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찾으시는 사랑을 깨달을 수 있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성장하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살고, 기독교적 공동체와의 생동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여러 방법으로 이 사랑에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독교교육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다음과 같은 것들에 힘써야 할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각 발달 단계에서, 신적 창조물인 자신의 높은 잠재력을 깨닫고, 자신들을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여 그리스도인들로서 성숙을 향해 성장해 가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에서 책임적인 역할을 취하여,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한 대상으로 보면서 저들의 가족, 교회, 그리고 다른 개인과 단체들과 더불어 기독교적 관계를 설정하고 유지하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계를 하나님의 창조로 보는 보다 나은 이해와 각성을 얻도록 하여 그 가치들을 보존하고 하나님과 인류에게 봉사하기 위해 활용하는 책임을 수락하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성서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증진시켜서,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할 수 있도록 하며, 역사적 기독교의 유산들 속에 있는 다른 요소들을 인식하고 효과적으로 이를 활용하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의 국내외 선교에 성실히 참여함을 통하여 기독교적 친교 속에서 책임적인 역할들을 발견하고 수행 할 수 있게 할 것.

여기에 보면 각 항목의 끝나는 말에 모두 “도와 줄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기독교교육의 핵심입니다. 기독교 교육은 도와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나만 잘되려고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라고 말합니다. 자기만 도와 달라는 기도, 자기만을 위한 축복 언제까지 이런 교육적 틀에 갇혀 있어야 합니까? 어른이 되면 어린이를, 노약자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고 했습니다. 도와 주라고 만든 거예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들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한참 걷다가 피곤함을 느낀 할머니가 “영감, 나 좀 업어줄 수 없어?”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업어주기 싫었지만 나중에 들을 잔소리가 겁이 나 할머니를 업어주었습니다. 업혀 가던 할머니는 조금 미안했던지 “나, 무겁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럼, 무겁지!”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습니다.
할머니가 “왜?”하고 되묻자 할아버지는 “머리는 돌덩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으니까 그렇지”라고 대답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할아버지가 다리를 다쳤습니다.
“할멈, 다리가 아파. 나 좀 업어 주라.” 할머니가 갈 때의 일도 있고 해서 할아버지를 업어주었습니다. 이에 미안한 할아버지가 “나, 무겁지?”하면 자기를 따라할 것 같아서
“나, 가볍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럼 가볍지!”라며 “머리는 비었지, 입은 싸지, 허파엔 바람만 잔뜩 들었으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도우며 사세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미국의 한 여론조사기구(Life Way Research)에서 “미국 교회 외형 확장을 통한 부흥 실패”라는 결론을 내 놓았습니다. 한 교회가 대형화되는 과정에서 주변의 많은 중소규모의 교회들이 위축이 된다면 전체적인 성장은 실패한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교회생활을 잘 하도록 도와 주어야 하는데 빼앗아 온 것입니다. 교회는 자신의 교회 성장에만 관심을 갖지만 선교회는 여러 교회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단체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를 하기 이전에 먼저 선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앙교회 또한 늘 개인과 교회, 선교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생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만 살면 된다는 식의 교회는 안됩니다. 우리 집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축복은 안 됩니다. 혼자서 선교 다 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 용어 중에는 모달리티와 소달리티가 있습니다. 모달리티가 교회라면 소달리티는 선교회입니다. 전방과 후방, 보수와 진보가 역할을 분담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교회는 성장과 축복이라는 단어에 파묻혀 협력을 잊어버렸습니다. 성장과 축복은 협력 가운데서 이루어져 가야 합니다. 본문 16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북 유럽에 간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유가 있었습니다. 러시아 빼째르부르크에서 육로로 핀란드로 넘어갔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얼굴이 굳어 있었고 사진 찍기가 겁납니다. 그리고 사진 찍히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핀란드, 스웨덴 사람은 다른 거예요. 사진 찍으라고 웃어주고 여유가 있었습니다. 어느 호텔에 갔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앞으로 뛰어나왔습니다. 아니 튀어나왔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 모릅니다. 유럽 사람들은 절대 필요 없이 빨리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린아이, 여자들이 먼저 나가고 차근차근 남자들이 나옵니다. 나도 모르게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나온 나는 뭐 급한 일이 있어서 뛰어 나온 게 아니잖아요. 뛰어나와 로비에서 두리번거리기 미안해서 그 사람들의 시아에서 사라지기 위해 어디론가 계속 뛰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저 자신을 기억합니다.

본문 14절 하반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속도를 뜻하는 speed는 본래 성공과 부를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남보다 빨리 뛰어야 산다는 서양 철학입니다. 우리말에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이 있는 것을 보면 속도의 중요성을 몰랐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인의 심성이 원래 빨리빨리는 아닙니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비가와도 그 비를 맞을 지언정 경고망동하고 촐삭 맞게 뛰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지배자인 일본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조급하게 걸어 다니는데 오히려 한국인들은 대로 한 복판을 유유히 걸어다니고 있어 과연 누가 식민지인인지 모르겠다”는 술회도 있습니다. 빨리빨 리 문화가 오늘날 한국을 이끌고 있다고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빠른 것을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은 인터넷 속도, 컴퓨터 속도, 핸드폰을 6개월만 바꾸는 나라라고 미국 교과서에 기록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 심리학자에 따르면 속도를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물리적 속도, 사회적 속도, 개인적 속도입니다. 개인적인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고만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조상들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급할수록 돌라가라”, “아는 길도 물어가라”,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귀에 실을 넣어야 바느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얼마나 급해졌는지는 애국가를 들을 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 대개는 “길이 보전하세”의 끝 소절이 끝나기 전에 다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애국가가 길이 보전되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국가마다 성격이 얼마나 급한지를 측정하는 방법이 하나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신호가 바뀌었는데 앞차가 움직이지 않을 때 뒤에 있는 차가 얼마의 시간을 기다려 주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동경의 경우 4.5초 기다려 준답니다. 서울의 경우 1초 기다려 줄까요? 어떤 사람은 신호등이 지금 막 바뀌었는데 크락션을 누르더라구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려고 하는 이유는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지 않으려고 것입니다. “요동치”로 번역된 ‘클뤼도니조메노’는 조타 장치가 없는 배처럼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자꾸만 흔들립니까? 반석(바위)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장하지 못해서 그래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그래요. 성경은 교회를 여자로 말합니다. 돕는 배필입니다. 그리스도가 지금 이곳에 계신다면 도울 일, 하실 일, 그것을 우리가 하는 것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복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제발 복권을 사라!’ 복권을 사는 것 까지는 우리가 해야 하나님이 당첨되게 해 주실 수 있는 겁니다. 혹시 다 복권을 사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행동을 해야 됩니다. 하다 못해 사과나무 밑에 가서 입이라도 벌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떨어지는 것이라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입을 여세요. 움직이세요. 일을 하세요. 하나님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지혜를 배우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9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잠 1:1-9)

어떤 젊은이가 기세 등등한 표정으로 한 회사의 출입문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젊은이는 이제 막 실전에 배치된 자동차 세일즈맨이었습니다. 젊은이는 으리으리한 회사 건물의 압도적인 위세에 주눅 들지 않으려고, 세로 뽑아 입은 양복 바짓단의 빳빳한 주름을 다시 한번 매만집니다. 그러고는 눈앞에 두꺼운 유리문을 있는 힘을 다해 밀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돌파할 수 있다! 내 앞을 가로막지 마라!’ 하는 기세였습니다.
하지만 육중한 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젊은이는 다시 한번 힘차게 문을 밀어댔습니다. 세 번, 네 번… , 문은 여전히 열릴 기미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의 사전에 포기란 없었습니다. 마침내 너무 오랫동안 문에 부딪힌 탓에 젊은이는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습니다. 말쑥했던 복장과 말끔히 빗어 넘겼던 머리칼은 어느 새 구겨지고 엉클어졌습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역시 모든 문은 미는 자에게 열리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결국 젊은이는 어깨가 축 늘어져 돌아갔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들어가려고 애쓰던 출입문에는 이렇게 씌어있었습니다. ‘당기시오!’

“위급한 때일수록 힘보다는 지혜가 필요하다.”(생 텍쥐페리)고 했습니다.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석기시대에 살면 아마 힘이 더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정보화 시대라고 합니다. 지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점점 남자보다는 여자가 사회생활 더 잘합니다.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꾸준히 계속적으로 열심히 해야된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지혜롭게 해야된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계속 찾고, 계속해서 두드리는 것은, 사람이 반복하는 가운데 지혜를 얻게 됩니다. 계속해서 반복하지 않으면 지혜도 나오지 않습니다. 찾는 자가 찾게 되어 있는 것은 찾는 사람은 찾았던 한 장소에서 계속 찾지 않습니다. 찾아보지 않았던 다른 장소에서 찾아볼 것입니다. 찾는 방법 또한 발전되는 것입니다.

돈 많은 부잣집 자식이 있었습니다. 놀고 먹는데 익숙해져서 일을 안 하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 자식생각만 하면 걱정입니다. 아버지는 고심 끝에 죽기 전에 자식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과수원 땅 어느 곳에 금궤를 묻어두었다. 자식이 말합니다. 어느 곳인데요… 아버지는 말씀을 안 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 게으른 자식은 금궤를 얻으려고 과수원 밭을 파보기 시작합니다. 여기를 파도 안 나오고 저기를 파도 안 나옵니다. 결국 밭을 다 팠습니다. 그랬더니 그 해 금궤는 찾지 못했지만 과수원에 밭을 잘 매서 풍년이 들었다는 이솝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하니까 됩니다. 열심히 있다는 것은 동시에 지혜가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지혜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한 자는 지혜를 얻을 것이며 게으른 자는 미련하게 되는 것이 이치입니다. 현 사회를 가리켜 정보화 사회라고 말합니다. 예전에는 천재를 원하던 사회였다면 정보화 사회는 천재가 아니라 ‘전문가’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전문가’란 자기 분야에서 10,000시간 이상을 보낸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 길을 잃었을 땐 일단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되는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나사는 왼쪽으로 돌려야 풀어지는데 오른쪽으로 계속 돌리면 일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잠시 쉬면서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전체에서 ‘지혜’라는 단어는 약 340개정도 나옵니다. 이 중에서 잠언서에만 41개(호크마)가 나옵니다. 그만큼 잠언서는 ‘지혜의 책’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책의 이름을 히브리 원전의 첫 구절을 따서 ‘솔로몬의 잠언’(히, 미쉘레 셀로모)라고 불렀습니다. 짧게는 그냥 ‘미쉘레’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말 ‘잠언’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나왔습니다. ‘미쉘레’는 ‘마솰’의 복수형으로 ‘속담들, 격언들’을 의미합니다. 미 ‘마솰’이라는 단어는 ‘…같다, 유사하다, 묘사하다’ 등을 나타내는 어근에서 유래된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 인생의 경험을 압축하여 간결하게 표현한 경구나 속담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이나 교훈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잠언서의 대부분은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리며 지혜를 구하였던 솔로몬이 쓴 것이 대부분입니다. 열왕기상 4:32절에 의하면 솔로몬은 잠언 3,000개와 노래 1,005편을 남겼습니다. 모든 사람 중에서 솔로몬만큼 하나님께 지혜를 얻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솔로몬에게서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 하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하셨습니다. 양은 분명 비무장입니다. 그런 이 양에게 지혜마저 없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지혜로워야 삽니다. 지혜로워야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이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뱀에게서조차 배울 것이 있다면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하 9:22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의 모든 왕들보다 큰지라 23 천하의 열왕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의 얼굴을 보기 원하여” 라고 합니다. 솔로몬 왕 때는 천하의 모든 왕들이 솔로몬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그에게 지혜를 배우기 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배우기 원해야 합니다. 배워야 당겨야 할 문을 계속 밀어대지 않습니다.

교육학자들은 동물들은 본능이 거의 좌우하지만 사람의 경우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정보를 섭취하지 못할 경우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거나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 예로
“1920년 12월 인도에서 신그라는 사람이 가축을 잡아먹던 호랑이를 사냥하러 갔다가 동굴 속에서 늑대 새끼 무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늑대 새끼 가운데 끼여있던 여자 아이 둘을 발견하고 그 아이들을 자신이 운영하던 고아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7, 8살로 보인 여자아이들은 원숭이 소리 같은 것을 내며 네발로 기어다녔고 마치 늑대 새끼인양 신그씨 등을 물려고 했습니다. 그 후 아말라와 카말라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아이들은 인간과 같이 생활하기 위한 훈련을 받았으나 급격한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아말라라는 소녀는 곧 사망하였고 카말라는 그 후 두발로 걷는 연습을 하며 인간의 옷을 입는 등 꽤 적응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1929년 17살 정도의 나이에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몇 일 전 러시아에서도 늑대소년이 발견되었습니다. 아파트에 방치된 아이를 고양이와 개가 기른 것입니다. 동물 소리를 내며 네발로 다니는 것입니다. 사람도 역시 교육받지 못하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교육만 받으면 돈만 아는 사람이 될지 모릅니다.

본문 2절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지혜(hm;k]j;:호크마)는 ‘!k’j;:하캄’은 ‘판단력, 굳셈’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원어상 호크마(지혜)는 삶 전반에 걸쳐 적용되는 기능적, 도덕적, 종교적 지혜를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시편에서 제일 많이 하나님을 묘사한 단어 중에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니, 요새시니”(시 18:2, 31:3, 94:22)라는 말이 나옵니다. 굳센 반석입니다. 큰 바위 이십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지혜란 다름 아닌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명이 히브리어로 시몬인 베드로에게 아람어로 게바라고 이름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게바를 헬라어로 번역해서 베드로입니다. 즉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의 어부 출신인 이 베드로(바위)가 이름과 같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지혜로운 것은 진리인 예수님의 말씀 위에 서서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시몬의 뜻은 ‘응답’ 입니다. 당시 이러한 이름을 사용하는 많은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이 이름의 뜻과 또 부르기에 나쁘지 않았던 이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 이름도 유대식이 아닌 아람어로 게바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식 히브리어로 된 시몬이 있는데 굳이 아람어식 게바라고 이름을 변경했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을 까요?
이들은 아마도 유대주의에 빠져있는 대표적인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제일 뛰어난 사람 두 사람을 뽑았습니다. 그 사람은 베드로와 바울 이라고 해야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특징을 보면 모두 열심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중에 베드로와 제일 문제가 될 소지가 있던 제자가 있습니다. 바로 ‘마태’입니다.
마태와 베드로는 서로 협력하기 어려운 집단에 속했던 사람입니다. 마태는 세리로서 로마제국에 팔렸던 사람이고 베드로는 로마를 증오한 사람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열렬한 애국자였으나 마태는 매국노였습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여건에서 만났기 대문에 분명히 마태는 시몬이 속해 있는 셀롯인들의 암살대상자 명단 위쪽에 자리잡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렇게 다른 환경의 두 사람 사이의 깊은 바다에 다리를 놓으셨다. 개인적인 증오심은 예수님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에 의하여 극복되었습니다. 이들이 조그마한 단체 속에서 화평하게 살 수 있다면 복음은 사람들 사이의 모든 불화를 치유할 능력을 가진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마태의 화해는 복음의 화해능력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께서는 사람과 화해하시고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환경을 극복하고 화목케 하셨습니다. 가끔 보면 우리 교회들도 무슨 정당이나 단체에 소속되어서 누구를 좋아하고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 민족에게 원하시는 것은 분열과 대립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마태는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혜로 그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본문 4절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yIat;p]l:페타임)는 ‘열려진, 공개된’이란 뜻의 ‘파타흐’에서 유래된 말로서 마음을 지킬 수 없는 상태로 무방비로 열려있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호크마)’가 지키는 것이라면 ‘어리석은 자(페타임)’은 반대로 지키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영적이든 육적이든 미혹 당하여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성경에 보면 우상을 가리켜 ‘미련한 것’, ‘가증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가증한 것’이라는 표현은 어리석은 자를 꾀어 내었다는 우상에 대한 표현이고, ‘미련한 것’이라는 표현은 그 우상에 넘어간 ‘어리석은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슬기:오르마’ 재빠르게 피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3)고 합니다.

직장세계에서 오래 전부터 농담 삼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종의 회사 괴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회사에나 네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똑부족’, ‘똑게족’, ‘멍부족’, ‘멍게족’입니다. 무슨 포장마차 안주 이름 같지만 아닙니다. ‘똑부족’은 똑똑하지만 일도 부지런히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똑게족’은 예상 하셨겠지만 똑똑하지만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러면 ‘멍게족’은 멍청하고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일 문제가 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멍부족’입니다. 멍청한데 부지런 한 겁니다. 그래서 매일 일을 만듭니다. 자기 딴엔 열심히 일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문제를 일으킵니다. 어리석은 자는 바로 이런 ‘멍부족’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똑부족’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신)은 지혜롭습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신 34:9)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은 지혜가 충만하십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눅 2:40) 하나님은 지혜이십니다. 예수님은 지혜이십니다. 성령님도 지혜이십니다. 미련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행 6:3) 초대교회 일곱 집사를 선택할 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았습니다. 성령과 지혜는 늘 함께 다니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행 6:10) 라고 말합니다.

본문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합니다. ‘경외(ta’r]yI:이르아)’는 ‘두려움, 무서움’을 말합니다. 단순한 공포심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무서워해야 합니다.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설교도 내가 좋은 대로 하게됩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으면 내 마음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근본(tyviar:레쉬트)’은 ‘첫째, 시간, 장소’ 등을 의미합니다. ‘근원’이라고 번역해도 됩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지식이 있다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바보는 방황하고 현명한 사람은 여행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을 여행하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분에게는 본문 9절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라고 하십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23-31)

자동차에서 제일 중요한 기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동차는 물론 가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엔진이 제일 중요할 것 같지만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브레이크입니다. 멈출 때 멈춰야 합니다. 멈추지 못하면 사고가 일어납니다. 처음 자전거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었을 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멈추는 브레이크 장치였습니다. 멈출 수 있다면 다 완성된 것입니다.
완벽함이란 덜하거나 더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가 완벽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가 완벽한 것입니다. 자 옆 사람 보세요. 완벽하지요.
조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디서 멈추느냐 하는 것입니다. 깍아 내지만 멈출 것을 생각하고 깍아야 합니다. 멈출 생각하지 않고 깍다 보면 다 깍아 버립니다. 그러면 망치는 거예요. 조각에서는 더 이상 깍아낼 것이 없을 때, 그리고 소조에서는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을 때 완벽함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완벽이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자연스러움입니다. 투박한 돌이 조각가를 만나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어지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성령을 만남으로 만들어지며 완벽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이나 성장보다 더 마음에 두어할 단어가 있습니다. ‘성숙’입니다. 성공했고 성장했지만 ‘성숙’하지 못하면 인간은 더 허무하고 더 보잘것없어집니다. 성공했냐. 성장했냐가 아니라 무엇이 성공했고 무엇이 성장했냐는 것입니다. 콩 심은 데는 콩 납니다. 우리 속담에 “개꼬리 삼 년 묻어 놓았다가 꺼내보니 개 꼬리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근본이 바뀌지 않고는 안됩니다. 아무리 성장해도 성공해도 무엇을 가지고 했냐는 겁니다.
“알맹이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겉을 꾸며도 그 속이 언젠가 드러난다.”(노자)고 했습니다. ‘원단론’이 있습니다. 원단이 상해있는데 아무리 재봉틀로 박아도 찢어진다는 겁니다. 원단이 바뀌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영화에서 본 한 대사가 생각납니다. “못 하나가 없어서 말의 편자를 달 수 없지. 편자가 없어서 말을 잃었고, 말이 없어서 연락할 수 없었지. 연락할 수 없어서 전쟁에 졌고.” 비록 그것이 작을지라도 무엇을 가지고 시작했느냐하는 것입니다. 못 하나가 없어서 전쟁에서 실패한 자와 같이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실패자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세요. 이제부터 심는 것은 다릅니다. 예전에는 나를 위해 심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을 위해 심습니다. 교만했던 내가 겸손해 집니다. 나를 위해 살던 내가 주님을 위해 삽니다. 나를 위해 심는 것은 이 땅에서 다 받을 것이고, 주님을 위하여 심는 것은 영원한 저 세상에서도 유효합니다. 하늘 곳간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 1:18),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성령으로 시작된 분입니다.
우리도 성령으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성령도 나의 육신의 정욕을 위해서 사용했다면 지금 바꾸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욕심을 채우라고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심어야 합니다. 근본이 바뀌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세례요한은 증거 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 성령으로 오신 분이 성령을 주십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입니다. 세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세례만 받고 성령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세례가 상징적인 것을 의한다면 성령세례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원단이 바뀌는 것입니다. 새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성령의 반대는 악령입니다. 사탄의 영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자기가 악령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선을 가장하여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처음에는 좋은 것을 주는 것처럼 위장합니다. 마치 노름판에서 처음에 잃어주는 노름꾼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판을 키워 가지고 다 쓸어 가지고 갑니다. 결국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라는 말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성령이 없습니다. 성령을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성령으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바로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 3:34),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성령이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하냐 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못 갑니다.

성령으로 시작하려면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는지 말씀을 통해서 봅니다.
첫째, 모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성령이 예수님 승천이후에 제일 처음 임한 것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모여서 고스톱 쳤겠습니까? 기도했을 것입니다. 모여야 합니다. 마음을 합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후에도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라고 합니다.
어떤 학생이 자기 친구하고 1시간을 통화하고 난 후에 “벌써 1시간 지났어?” 그럽니다. 그리고 또 만나서 이야기하자 그럽니다. 1시간 통화하고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 사랑하는 사이는 다릅니다. 또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냥 기쁩니다. 자꾸만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기쁩니다. 주님과 만나는 시간이, 기도하는 시간이 기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모이기를 폐하면서 기독교는 힘을 잃어 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마음을 합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마음을 같이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4: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한마음으로 해야합니다. 모여서 싸우려면 안 모이는 것이 좋습니다. 선교대회 때도 모처럼 모이니까 회의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혹 서로 다투게 되는 것을 봅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하도 싸우니까 예배를 먼저 드리던 것을 나중에 드립니다. 나중에 회의하다가 다 시험에 들어서 가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회의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회의하는 것에 회의가 듭니다. 솔직히 회의 많이 하고 잘해서 교회성장 했다는 말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어느 날 조조는 외지에서 보내온 우유를 맛본 뒤 그 항아리 뚜껑에 ‘합(合)’ 자를 써서 부하에게 돌렸습니다. 부하들은 항아리를 두고 어리둥절했습니다. 그 때 조조의 뜻을 알아챈 한 부하가 있었습니다. 사람(人) 마다 한(一) 모금(口) 씩 마시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을 합하는 것은 자기가 혼자 다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을 합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령하면 그저 뜨거움만 생각하게 되는데 그리고 마치 밀어붙이는 것만이 능사인 것처럼 성령을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절에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중에 적어도 3개 이상(오래 참음, 온유, 절제)이 조용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말만 많은 사람들 때문에 좋아지는 것입니다. 참아야 합니다. 그 참을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마치 브레이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화를 돋굽니다. 사탄은 예수님께도 그랬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까지 가서 예수님께 놀립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지금이라도 뛰어내려 보라”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겼습니다. 참았습니다. 온유하신 것입니다. 절제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도록 만듭니다. 결국은 파멸로 이끕니다. 성령이 없으면 브레이크가 없어요. 안전장치가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안전장치입니다.

셋째, 말씀 전하기 위하여 받아야 합니다, 본문 29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제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처음으로 받고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 자리는 예수를 핍박하던 자리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 위하여 재판하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 그 때에는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모른 채 하였고, 베드로는 그 자리에 한 여종의 고발로 그 자리를 피하여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도망가지 않습니다. 피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고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합니다. 이 때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들을 잡아 가둡니다(행 4:1-3). 그리고 다음날 이들을 따르던 사람들은 남자들만 5,000명이 되는데 이들도 이제 도망가지 않습니다.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행 4:5),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6) 예수님께 하였던 똑 같은 질문을 합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냐는 겁니다. 아마도 예수를 죽이도록 재판한 이들이 무슨 재판인들 못하겠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합니다. 행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고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갇히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당히 예수를 전합니다. 산헤드린공의회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의 답변에 마땅한 혐의점이나 문제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옳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요한과 베드로가 예루살렘 옥에서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마음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정주영씨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인천에서 막일을 하며 밤을 노동자 숙소에서 지내는데 빈대가 얼마나 많은지 달려들어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빈대를 피해서 밥상을 올려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자는데 밥상 다리를 타고 빈대가 올라오더랍니다. 그래서 빈대에게 질소냐 하면서 물통을 밭쳐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자는데 이번에는 빈대가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서 다이빙을 하더랍니다. 그 후로 그는 일평생에 동안 빈대 철학으로 살았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은 빈대도 자기에게 닥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데 하물며 영장인 사람이 좌절하고 낙심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29절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1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오늘날 성령을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역사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병이 나은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들어가야 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병이 나았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우리에게 부어 주십니다. 여러분! 예수 전할 마음만 가져보세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마음만 가져보세요. 반드시 세상 끝날 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