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흔적을 가지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갈 6:17-18)

오래 전 있었던 어느 선교사 자녀의 고백입니다.
“나의 아버지와 엘리오트 등 다섯 명의 선교사들은 석기 시대를 살고 있는 아우카 족에게 접근했습니다. 맨 처음 정글로부터 나온 아우카 족의 한 남자와 두 여자에게 우정의 표시로 아우카산 레몬에이드와 햄버거를 주었습니다. 그때, 다른 아우카인들이 분노하며 강가로 나와 창을 들고 아버지를 비롯한 선교사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 당시에 나는 다섯 살이었고,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심으로 쓸쓸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는 믿음에 회의를 가졌으나, 성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고, 아버지의 순교가 의미하는 바를 깨달아 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0년이 흐른 뒤, 아버지가 묻힌 팜 비치 강가를 찾았습니다. 그때 아버지를 비롯한 선교사들을 죽인 아우카 족 사람 중에서 두 명을 만났습니다. 선교사들이 죽은 후에 라헬 아주머니와 엘리오트 선교사의 부인이 그 부족에게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생명을 드리겠다고 헌신했습니다. 나의 누나는 아버지를 죽인 그 아우카인들이 이제 크리스천 지도자가 되었으니 그들에게 내가 세례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중요한 사건에 응하는 것이 주님께 순종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죽은 그 강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나의 옛 사람이 다 죽어 버림을 뜻하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아버지를 죽인 아우카인들의 손을 통해…. 강물에서 올라왔을 때, 나는 아우카인에 대한 사랑으로 함께 울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선교사 자녀에게는 아버지의 죽음은, 그리고 아우카인들에 의한 세례는 하나의 증표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를 선교지에서 잃고 혼자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던 그에게는 상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상처라고 하지 않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증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아이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아우카인들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말 그대로 아버지의 죽음은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 돌아온 사람들은 과거의 상처가 오히려 하나님의 증표가 됩니다. 하나님의 표증이 됩니다. 세상 사람은 그 상처를 그대로 안고 살아가지만 하나님께 돌아온 하나님의 자녀는 그 상처들이 오히려 믿음의 원동력이 됩니다.

저희 어머님이 저를 어렸을 때 무당에게 팔아먹었습니다. 순진하신 우리 어머님이 아마 어떤 분의 말을 곧이듣고 자식 잘 되게 하려고 팔아먹은 것입니다. 제가 무당에게 가서 우상 밑에서 지냈어요. 우상이 앞에 놓여있고 향을 피우고 옆에는 북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집이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자꾸만 병이 나고 아팠습니다. 그리고 제 팔이 양쪽 모두 이렇게 구부러져 있잖아요. 다쳐서 그럽니다. 얼마나 팔이 많아 빠졌던지 너무 많이 빠져서 이렇게 구부러진 거예요. 그래서 우리 어머님이 나를 다시 무당에게서 빼내왔습니다. 자식 잘 되라고 맡겼더니 팔만 빠지고 집안 일이 되는 일이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어려서 팔이 이렇게 다쳐서 짧은 팔 옷을 잘 안 입습니다. 아이들이 팔 병신이라고 얼마나 놀렸는지 모릅니다. 우리 아버님은 또 다리를 저셨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병신 집안이라고 사람들이 놀린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단순히 가난한 것이 아니라 우리 집은 마치 이웃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느낌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님과 우리 집과 제일 친하게 지내며 산 집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뒷집에 맹인아저씨가 사셨는데 침을 놓으시면서 사셨습니다. 그분이 우리 집의 이웃이며 친구였습니다. 제 구부러진 팔만 보면 그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지울 수가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제 팔이 증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흔적(stivgma:스티그마)은 “표시, 일하다 얻은 상처, 흔적”을 말합니다. 본문과 같은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여기 하나만 나옵니다. 그러나 비슷한 단어들은 많이 나옵니다. ‘표징, 표시’를 말하는 세메이온과 세마이노 ‘의미하다. 나타내다’와 쉿메온 ‘신호, 표준’도 모두 비슷한 말입니다. 이 단어들이 헬라어인데 구약용어에서는 이렇게 다양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단어들이(약 5분의 4) 구약적 용어(히브리어) “t/a:오트”에서 나왔습니다. 단순하게는 “표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의 헬라어 스티그마는 “찌르다, 찌른 자국”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양이나 소들의 주인이 자기 소유의 표시로 인두로 넓적다리에 표시를 찍었습니다. 이것이 낙인입니다.
낙인은 짐승에게만 찍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찍었습니다. 예를 들면 죄수들, 전쟁 포로들, 노예들입니다. 군대에서는 탈영자들에게도 찍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포악한 황제 갈리굴라(Caligula)는 선량한 시민에게 낙인을 찍고 감옥에 가두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낙인이 찍힌 사람들은 수치스러운 자들로 간주되었고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낙인을 지우고자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였으나 대부분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도 반항적인 첩들이나 자식들에게 노예의 낙인을 찍었습니다. 유대인들도 포로로 잡혀갔을 때는 이 낙인이 찍혔습니다. 사람들이 찍은 낙인은 모두 사람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의 소유로서 표시하고 종으로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였습니다.

창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t/a:오트)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표시는 문신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 표시는 살인자라는 의미에서 준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다는 것을 알리는 표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고자 하는 표시였습니다. 출애굽 때의 유월절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하나님의 넘어간다(유월)하신다는 약속의 표시였던 것입니다(출 12:13).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인의 표시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쟈넨(Saanen), 힌 염소로 불리는 동물이 어린이 대공원에 있습니다. 이 동물이 하도 탈출을 잘해서 인근 주민들이 자주 놀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린이 대공원에서 손을 들었습니다. 동물원 울타리 밖으로 나가 살 수 있는 자유를 최초로 부여한 것입니다. 그리고 ‘빠삐용’ 이름표와 딸랑이 ‘종’을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인근 주민에게 알리고 텔레비전에도 나왔습니다. ‘빠삐용’ 표시와 ‘종’은 쟈넨을 살리기 위한 표시로 붙여준 것입니다.

출애굽기 21:6에 보면 자유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종이 스스로 표시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그 표시로 귀를 뚫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제사장에게도 일종의 표시인 기호와 표지를 주셨습니다(출 13:9). 그리나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하는 문신을 금지하셨습니다. “죽은 자 때문에 너희의 살에 문신을 하지 말며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28) 유대인 남자면 다 행하는 할례도 일종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흔적은 이런 율법적인 할례나 표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받았던 흔적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고후 11:23-27보면 “23 …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 합니다.

저에게 팔이 구부러진 것 만 아니라 손목 등에 작은 상처하나가 나 있습니다. 이것은 C국 선교여행 때 받은 상처입니다. 그런데 이 흔적을 보면 그 때 일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흔적이 없는 사람은 기억이 없습니다. 흔적이 없는 사람은 증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어야 예수를 증거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께서 표적 보여주시기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마 12:38-39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들의 눈요기를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사탄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예수께 표적만 보여달라고 하면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됩니다. 왜 예수께 표적은 원했습니까? 예수를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이미 이전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을 뿐 아니라 나병환자(마 8:2),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을 위한 요청에 의하여 말씀으로만(마 8:8) 고치신 적이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왔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믿지 못할 사람은 어떤 표적을 또 보여주어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설교제목을 혼동하면 안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예수님께 또 해보라는 식의 표적을 구하는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기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게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흔적입니다. 시 86:17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약 시대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 이제 하나님께 더 이상의 표적을 원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표적 보여주실 것을 원하기보다는 내가 그리스도의 표적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다 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 위에 더 이상 보여주실 것이 없습니다. 다 이루신 것입니다. 다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적과 표적은 주님께서 보여주실 차례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 보여드려야 할 차례입니다.

미국에서 활동적인 목회를 하시는 노스포인트 미니스트리(North Point Ministry) 설립자인 앤디 스탠리(Andy Stanley)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의 아버님도 목사이십니다. 어느 날 오후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면 의례 생기는 긴 침묵을 깨고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버지 사역을 하려면 반드시 소명을 받아야 하나요? 아니면 자원해서 해도 되나요?”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글쎄다. 내 생각에는 자원하는 것도 좋겠구나.” 하셨습니다. 그리고 앤디도 “나도 자원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은 매주일 15,000명 이상의 성도들에게 설교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성령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아직 내가 은혜를 받은 것 같지 않고 성령을 받은 것 같지 않다면 내가 모르고 있거나 느끼지 못할 따름입니다.

창 46:2 “밤에 하나님이 이상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삼상 3:3-4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성경이 무슨 책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찾고 계신다는 증거의 책입니다. 이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야곱을 부르셨던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억지로 흔적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로 표시했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께 응답하여 살아갈 때 주님을 믿고 따를 때 흔적을 같게됩니다. 때로는 아픔이 있습니다.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광의 상처입니다. 은혜의 흔적입니다.
피아니스트 중에 김지미라는 분이 있습니다. 하루에 8시간, 10간씩 연습하니까 어떤 때는 집어던지고 싶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연주회가 끝났을 때 한 분이 오셔서 “좋은 문화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때 자신이 하는 일이 문화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진정 그 문화라는 것을 즐기지 못했다는 겁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하나님을 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경험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입니다. 여러분 기뻐하세요. 즐겁게 행복하게 사세요. 이제 우리의 흔적은 주님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잘 지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들게 하듯 잘 보낸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맞게 한다.”(레오나르도 다 빈치)고 했습니다. 이제 세상에서 받은 아픈 상처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흔적만을 남기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어찌 할꼬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 2:36-39)

스위스는 명품 시계를 잘 만드는 나라로 유명합니다. 그만큼 그에 따른 일화도 많습니다. 옛날에는 시계가 귀하고 시계에 태엽을 감아 주어야 했습니다. 이런 시절에 어떤 사람이 화장실에 가서 시계를 풀어놓고 나왔답니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서 그 시계를 잊어버린 화장실을 찾아갔는데 그곳에 시계가 있더랍니다. 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것은 그 시계가 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인이 올 때까지 태엽을 주고 나가고 다른 사람도 와서 태엽을 감아주고 나갔던 것입니다.
시계가 가고 있었던 것은, 시계를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자기 욕심으로 가져가지 않은 결과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꺼이 자기를 지킨 결과입니다. 욕심을 가지지 않은 결과입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 현대인들은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도 않고 호랑이를 잡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아무리 방법이 좋고 수단이 좋아도 과학도 아니고 경영도 아닙니다. 요행입니다. 요행을 기다리는 것은 성경 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두려면 반드시 심어야 합니다, 심어야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많이 거두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간단합니다. 많이 심으세요.

어느 여 목사님이 ‘축복, 기적, 치유전도집회’ 라는 제목으로 모 신문에 광고를 낸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고민하고 계십니까? 와 보라!! 여기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의 현장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곳에선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스로 아래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비만, 체형관리, 영적문제, 불치의 질병, 모든 뼈 문제, 신경계통, 사시교정, 내적치유, 얼굴모양, 가계 저주의 치유, 말씀, 방언, 통변, 예언, 투시, 악성 아토피질환, 영 분별, 근이양증, 각종 암병, 기타 질병 등... 가정 문제, 직장 문제, 사업문제]”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우리 모두가 가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과, 외과, 소아과, 성형외과, 안과, 정신과 등이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이중에 한 두 가지만 한다면 모르겠는데 너무 많아요? 다 한다니까 믿을 수가 없어요. 요즘 음식점도요 한 두 가지만 맛깔스럽게 해야지 너무 여러 가지 메뉴를 만들어 팔면 전문적이지 못해서 안 갑니다. 우리 또한 이 광고 내용처럼, 다는 아닐지라도 부분적으로도 그러한 마음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했습니다. 많이 심는 것은 욕심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짜 욕심은 심지 않는데서 거두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 위조품과 상표가 없는 상품, 거짓 처방전을 가려내는 비결은 ‘진짜를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속는 이유는 영적인 안목을 키우지 못해서입니다. 이러한 영적 감각을 ‘보는 눈, 듣는 귀’(신 29:4)라고 말합니다.

본문 36절에 베드로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스라엘 온 집’ 은 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온 집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야할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은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뜻을 전해야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 속썩이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남편이 못을 박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선교사를 핍박합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가슴에 못 박는 것은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예수 믿는 다고 말하는, 교회 다닌다고 하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범죄 피해자의 80%가 아는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당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문의 제목이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이렇게 나왔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잘 아는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저는 구두에 광을 잘 안냅니다 만은 오히려 너무 번쩍이면 창피해서 다시 문질러 광을 좀 죽입니다. 광을 내기 좋아하는 분들이 만든 말이겠지만 ‘삐까번쩍’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에 ‘피카피카’란 말이 있는데 번쩍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도 ‘모찌떡’과 같은 말이라고 보면 됩니다. 삐까는 일본어고 번쩍인다는 말은 한국말입니다. 광택 내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외제 구두약을 수입하려던 한 회사가 구두닦이를 통해서 시장조사를 했습니다. 놀랍게도 광내는데는 국산 구두약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그런데 국산 구두약은 광을 내기 위해서만 만들어졌고 외제 구두약은 광보다는 가죽을 보호하는데 신경을 쓴 약이라는 것입니다. 이 회사는 광택내기만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의 선호에 밀려 결국 수입을 포기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삐까번쩍 내 인생에 광내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 때 유대인들은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문 36절 “…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몰라보았습니다. 주님을 외모로만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광내는데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했고, 버렸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끌어 안아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쓸모 없다고 버린 돌을 하나님은 모퉁이 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못 자국을 보시며 뼈저린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그 때 하늘은 어두워지고 땅을 흔들렸습니다. 하나님이 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파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설교를 14절부터 36절까지를 읽어보십시오. 거기에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가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부활의 주님”이 나옵니다. 너희는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은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죽음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는 요한 일서 2:16절에도 마찬가지이고, 로마서 5-6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진술되고 있습니다.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6-17)
하나님 안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영원히 살도록, 영원한 생명으로 이미 창조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가슴을 쳤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인정했습니다. 마음에 찔렸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찔려야 합니다. 찔려야 회개합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찔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회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내가 우리 부모님을 속상하게 했습니다. 가슴아프게 했습니다. 내가 남편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내에게 못을 박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됩니까?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질문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기도하여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쌍둥이를 가진 것입니다. 리브가는 배속의 두 아이들 때문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배가 아팠던 모양입니다. 이것을 이삭이 알았습니다. 창 25:22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아이들 둘이 리브가 뱃속에서 싸우는데 남편인 이삭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삭이 이 일로 하나님을 찾아가 물은 것입니다.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해야 모를 때 첫째 기도하세요. 그리고 둘째 본문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그랬습니다. 사도들에게 물은 것입니다. 지금 이런 찔림이 누구로 인하여 생겼습니까? 베드로의 설교 때문입니다. 당연히 사도들과 베드로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실컷 설교했는데 듣기는 여기서 듣고 상담은 어디 다른데 가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답답한 노릇입니다. 작은 교회가 좋다는 게 뭡니까? 언제든지 목사 만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활용하세요? 이 좋은 장점을 이용하세요. 큰 교회 다니면 쉽지 않잖아요?
“어찌할꼬”(Tiv:티)인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본문 38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랬습니다. 그런데 ‘Tiv:티’

“어떻게 하면” 되느냐, 예수님이 알려주신 말씀들입니다. 본문과 직접 관계가 없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이렇게 하면 된다는 뜻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내용들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믿음이 좋아집니다.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 말씀에도 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Tiv:티’가 있는 마태복음 서두에 몇 가지만 살펴보았습니다. 신약성경 전제에서 445개의 이 단어가 나옵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이 예수님의 명령들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첫 번째가 회개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진정한 회개,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이 세례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입니다.
본문을 잘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세례만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사함은 딸려 오는 것입니다. 성령은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몇 일 전에 TV 시트콤에서 본 것인데요 빵집을 하는데 이벤트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짜에 맞추어 빵을 많이 주문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종업원이 골탕을 먹이려고 날짜를 다르게 알려주었습니다. 행사당일이 되었는데 빵이 오지 않는 거예요. 빵집 어머니인가요 이런 말을 합니다. “빵집에 빵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냐?” 빵집에 빵이 없으면 빵집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혹 내가 용서 못하면 주님을 기억하세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용서해야 합니다. “너희가 너희 죄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까이 보세요.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눅 11:37-38)

지난 주 설교제목이 “멀리 보세요.” 였는데요 오늘 설교제목이 “가까이 보세요.”입니다. 목사님! 이런 제목을 사용하시려면 “멀리 보세요.” 설교제목을 잊어버릴 때쯤 되어서 하셔야지 바로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난주에 ‘평행선의 공리’를 배우셨잖아요. 가까이 보면 만나지 못하는 것이 멀리 보면 만난다고요. “멀리 보세요.”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두 이론은 만납니다.
멀리 보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멀리 보아야 합니다. 또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저 멀리 천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멀리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가까이 보아야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까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두 개의 제목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어울리는 것입니다. 신학에는 두 개의 큰 축이 있습니다. 하나는 조직신학이고 하나는 실천신학입니다. 마치 하늘과 땅과 같은 것입니다. 멀리 보는 것은 조직신학(신론, 하늘)에 해당하는 것이고요, 가까이 보는 것은 실천신학(땅)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먼저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보다 기독교가 성장을 못했습니다. 사실 일본인의 습성으로 보아서 우리나라보다 복음이 더 빨리 전파되었을 것 같은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남의 문화에 쉽게 적응하느냐 하면, 일본 역사 최초의 외국인 집정관이 된 맥아더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이후 일본에 들어갔습니다. 멕아더 일행이 들어갈 때 일본인들의 반발을 상당히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예상 밖의 환대를 받으며 들어갔습니다. 오히려 미국인들이 어리둥절했습니다. 마치 버드나무 같은 습성입니다. 쉽게 적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소나무형이라면 일본은 버드나무형입니다. 우리는 “남산 위에 저 소나무”를 쳐다보며 살았습니다. 소나무에는 황새가 앉지만 버드나무에는 촉새나 종달새가 앉습니다. 중국 연변 용정에 가면 일송정이 있습니다. 그 산에는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겨울에도 낙엽이지지 않고 푸르게 굳굳하게 서 있는 소나무를 바라보며 나라를 구할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군이 그걸 알고 그 소나무를 죽이기 위해 구덩이를 파소 소금물을 뿌려 넣었습니다. 멕아더는 일본 천황에게 “덴노는 인간”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들어간 복음은 자라지를 못했습니다. 일본의 복음이 자라지 못한 이유를 신학자들은 일본의 신학이 인본주의에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무조건 믿었습니다. 거기에는 뭐 깊은 연구 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나라를 살려주셔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부흥이 일어나게 된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연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의 뿌리, 그곳에는 하나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고, 뿌리가 있고 그 다음에 다른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보고, 하늘을 보고 오늘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까이 보아야 합니다. 땅을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을 보지 못하면 땅도 보지 못합니다. 멀리보지 못하는 사람은 가까이도 보지 못합니다.

사실 가까이 가면 복음은 다 된 것입니다. 복음이 전달되지 못하는 이유는 가까이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분들은 쉽게 사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번 믿음을 주고 사귀어두면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신뢰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중국사람 한국사람 일본사람이 돼지우리에 같이 들어갔답니다. 누가 제일 빨리 뛰어 나올까? 하는 내기를 했답니다. 제일먼저 깨끗하기로 소문난 일본 사람이 더러워서 못 있겠다고 5분을 견디지 못하고 뛰어 나왔답니다. 그 다음에 한국사람이 참다못해 10분을 견디지 못하고 나왔답니다. 그 다음에 돼지가 뛰어 나왔답니다. 중국사람하고 더러워서 같이 못 있겠다고 나왔답니다. 어찌 보면 중국사람 비하하는 것 같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만큼 중국사람은 끈기와 인내가 있다는 이야기이도 됩니다.
언어문화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도 우리와 같이 밥을 먹고사는 민족인데 식당 메뉴에 ‘라이스’ 라고 적는 나라입니다. 여행사마다 기본 모음 다섯 개를 가지고 트래블(travel:여행)이라는 영어를 도라베루라고 적을 수밖에 없으면서도 여행사마다 이 수상한 외국어를 걸어놓고 국제화를 위치고 있는 것이 일본입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 국기나 위아래, 좌우가 있는데 일장기는 아무렇게나 걸어도 됩니다.
그런데 중국에 가면 정 반대입니다. 에스컬레이터가 ‘전기사다리’로 바꿉니다. 전 세계가 텔레비전(TV)라고 하는데 자기네만 ‘전기로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고유명사도 바꿉니다. 코카콜라가 ‘가구가락’, 펩시콜라가 ‘백사가락’이 됩니다.
우리는 중간에서 중간쯤은 선택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때 ‘나성 올림픽’이라고 했습니다. 일본은 앞에 두 자를 따서 자기 멋대로 “로스올림픽”이라고 했지만 우리나라는 LA올림픽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은 외래어에 장악 당한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한자를 천년이 넘게 써 왔지만 한자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인 ‘족발’입니다. 족이 이미 발이라는 말인데 우리는 발을 반드시 넣어 사용합니다. 일본말이 이 나라를 휩쓸 때도 ‘모치’라는 말이 떡이지만 우리는 ‘모치 떡’이라고 썼습니다. 깡통이라는 말은 영어의 켄(can)에서 나온 말인데 켄(깡)이라는 말에 우리말 통을 붙여서 깡통이라고 했습니다. 가끔 야구 중계를 들어보면 ‘파울 라인 선상’으로 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외래서가 들어와도 함께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자기 것 없이 다 바꿉니다. 중국은 가기 것으로 바꿉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를 다 가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의 소금은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합니다. 소금 섭취 량을 약간 늘리면 건강에는 좀 해로울 수 있지만 음식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금 섭취 량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늘리면 건강에 미치는 폐해가 맛있는 음식으로부터 얻는 이익을 넘어서게 됩니다. 우리는 마치 소금과 같은 나라 사람입니다. 고르게 합니다. 그러나 이 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금은 맛입니다. 그 맛을 잃으면 안됩니다. 그 맛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성령님이십니다. 우리의 것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성품을 버리지 못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이 모습 이대로 우리민족을, 나를 사랑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십시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까이 보아야 합니다. 제일 가까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결혼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뽑았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가까이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뽑은 것입니다. 그리고 3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사셨습니다. 말 그대로 동고동락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3년이 넘는 생활을 하시고 나서 “너는 발 냄새가 너무 나서 나의 제자가 되기 어렵겠다.” 고 하신 적이 있습니까? “야! 정말 살아보니까 너는 정말 아니다.” 하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서로 마음에 다 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명심하세요. 영적인 문제들을 우선 순위에 둠으로써 다른 문제들을 이해하고 용납해 가야합니다.

마 15:2에서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늘 제자들 편에 있었습니다. 레위기의 이야기로 볼 때 손을 씻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20)고 하셨습니다.
본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눅 11:38)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상히 여겼지만 저는 이 말씀에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자들이 손 씻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도 손을 씻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 행동은 아주 의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지난번 손 씻지 않고 떡을 먹었다가 바리세인들로부터 꾸중을 들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때의 일을 기억하면서 손을 씻지 않으신 것입니다. 마 15:1 “그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그랬습니다. ‘그때에’ 는 앞에 마 14:34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병자들이 수없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잘 아시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덴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5장으로 넘어가서 ‘그때에’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손을 씻지 못하고 음식을 먹을 때는 상황이 손 씻을 여건이 안 되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도 유대인입니다. 음식 먹기 전에 손 씻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때부터 지켜온 것입니다. 아무리 베드로와 그 제자들이 무식하다고는 하나 이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관습이든 장로들의 유전이든 잘못된 문화는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사정이 손 씻을 만큼 여의치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다릅니다.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눅 11:37) 그랬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청해서 예수님이 그 접대에 응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집은 아마도 유대인의 전통적인 집으로 지난번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았던 상황과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유대인의 전통가옥으로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물 항아리가 준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손을 씻는 것이 그들의 습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38절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라고 했습니다. 이상한 겁니다. 다 손을 씻는데 예수님이 손을 안 씻은 것입니다. 왜? 이런 행동을 하셨을 까요? 오늘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눅 11:39-42절의 바리새인들에게 교훈하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신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뿐이 아닙니다. 진짜 예수님이 이러한 행동을 왜 하셨을까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어디 주석에도 나와 있지 않는 며느리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난번 제자들이 바빠서(핑계일지 모르지만) 손을 씻지 못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왜요? 제자들과 함께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더러운데 나만 깨끗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은 무식한데 나만 옳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무식하니까 예수님도 보조를 맞추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더러우니까 예수님도 더러워지신 것입니다. 왜요? 제자들과 함께 하시려고요. 결혼했는데 계속 자기만 깨끗한척하고 마누라 쥐잡듯 잡는 사람 문제 있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총명하고 사랑 받을 만한 제자들만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더럽고 추하고 당신의 말씀을 잘 이해 못하거나 심지어는 비난한 제자들도 사랑하셨습니다(한 여인의 비싼 향유 사건, 마26:6-13, 막 14:3-9).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제자에게 네 양을 치라고 했습니다(요 21:15-19).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지만 그에게 다가가 그 상처를 만져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을 격려했습니다. 위로했습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신 사건이 있는데 그 동기가 본인이나 죽은 가족의 애통하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눅 7:13에는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요 11:33 나사로의 죽음으로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8).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본 유대인들은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요 11:36)라고 말했습니다.

인도를 다 주어도 섹스피어와 바꾸지 않겠다고 영국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타이완 사람들은 미국을 다 주어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 있습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중국에서 쫓겨나올 때 작고 귀한 보물들을 가지고 나왔는데요, 이런 것이 타이완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저도 가서 본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갚진 것으로 여기는 것이 주먹만한 크기의 차돌로 깍은 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 속에 7개의 공이 들어있습니다. 그 차돌로 깍은 공 7개가 그 곳에서 모두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아주 정교하게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습니다. 그곳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신비함에 발을 못 띤 경험이 있습니다. 이것을 미국 사람들이 현재의 컴퓨터와 기술을 이용해서 이런 공을 만들 수 있나 실험했는데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7단계에 걸쳐 들어가며 깍아야 하는데 나중에는 거의 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도무지 깍을 수가 없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중국 사람들이 대를 물려가며 깍아 놓은 것입니다.
언 듯 볼 때 사람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해 냅니다. 누군가 거친돌을 다듬기 시작했겠지요. 그리고 깍다가 죽고 그 자식에게 물려주고 그 자식은 또 깍았겠지요. 아마 중간에서 하다 말았으면 그런 작품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7개의 공 속을 깍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포기하지 않는 장인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보면 우리 주님의 사랑을 봅니다. 사랑의 흔적을 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안 바꾸십니다. 나를 천하보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보세요. 예수님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으로 사랑할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처럼 사랑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멀리보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2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3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6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신 32:1-6)

처음 수학에서 사람들은 “평행한 두 직선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영원히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유심히 살펴보면, 평행이란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수없이 많습니다. 하늘과 땅이 영원히 만나지 않고, 두 기차의 레일이, 평행한 길가의 가로수가 영원히 만나지 않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멀리 바라보면 기찻길의 레일이, 가로수의 양쪽이 저 먼 곳에서 한 점에서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착각일까, 아니면 실제로 만나는 것일까 사람들은 궁금해하였습니다.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도전한 사람이 은 B.C. 300년경의 유클리드(Euclid:330?∼275?B.C.)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평행선의 정리를 증명하지 못하고 공리로 인정함으로써 학문적으로 발생하였습니다. 그 후에 수많은 학자들이 이 ‘평행선의 공리’를 증명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였으나 유한하고, 평면·공간적인 인간의 눈으로는 착각과 환상으로만 보이는 평행선의 신비를 증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평행선의 신비 근처에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보다 작거나 큰 새로운 공간이 있다.’는 상대성 이론에 의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평면 공간이 아닌 곡면 즉 타원적인 구면 공간임을 찾아내었습니다. 길가의 가로수가 먼 곳에서 만나는 것은 착각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것만 보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이, 멀리 보면 만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만 보면 우리의 모습만 보면 하나님을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멀리 보세요. 멀리 보면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모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지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엄중한 말씀을 받기 위해 모세에게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신 31:14) 고 하십니다. 왜? 여호수아를 함께 부릅니까? 그가 바로 모세 다음에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세대를 위하여 준비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먼 훗날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모세의 세대가 아닙니다. 여호수아의 세대만도 아닙니다. 그 다음, 그 다음, 영원하신 세대를 보고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기업’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9). 이 기업이라는 말은 그 영원하신 후손이 이어받을 몫을 말합니다. 그것이 기업입니다. 우리의 기업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원히 전달해 주어야할 기업이 있어야합니다. 어떤 부모들은 돈을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래도 제일 확실한 것이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니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자하고 기러기아빠까지 되어 가지고 공부시키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교육을 시킬 때 제일 중요한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개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일관된 틀에 가두면 안됩니다. 그리고 마치 그 틀에 들어가지 못하면 저능아나 바보 취급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작품이고 존귀한 자입니다.

인류의 3대 사과를 아시나요?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3개의 사과를 꼽은 것입니다. 바로 뱀의 꼬임에 빠져 아담과 하와가 먹었다는 원죄의 사과가 최초의 사과이고, 빌헬름 텔이 아들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활을 쏘았다는 이야기 속 정의의 사과가 두 번째입니다. 마지막은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던 과학의 사과(뉴턴의 사과)입니다. 이 이야기들에 나오는 사과는 모두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과를 꼽은 것입니다. 뉴턴은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지구가 물체를 끌어당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을 바탕으로(중력), 이런 끌어당기는 힘은 모든 물체 사이에 존재하며 우주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다고 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뉴턴은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 천문학자입니다. 이 사람은 청교도혁명이 일어난 해이며 갈릴레오가 죽은 해인 1642년 1월 4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철저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외삼촌하고 함께 자랐는데 외삼촌 중에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독실한 성공회 성도인 뉴턴은 어느 제자가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자, “하나님에 대해서 불경하게 말하지 말게.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네.”하면서 무신론을 주장하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뉴턴이 워낙 과학적 재능이 뛰어나니까 영국의회에 들어가 국가를 위해서 일하라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추천하여 국회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성격이 조용해서 국회의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1년 간의 국회의원생활을 하면서 유일하게 한 말이라고는 수위에게 “문 좀 닫아주시오.”였다고 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그 후손들을 위해서 모세에게 마지막 일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신 31:19) 바로 이 노래가 오늘 본문 신명기 32:1-43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마지막으로 시키신 것이 노래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노래를 불러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노래에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한번 흥얼거리기 시작하면 잊혀지지 않고 평생을 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세대에게 또 그 노래를 이어줍니다. 제가 서은이에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알려준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원숭이 똥구멍은 빨게”입니다. 제가 언제, 누구에게서 이 노래를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노래를 알고 있었고 서은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목사가 되어 가지고 서은이에게 “원숭이 똥구멍은 빨게”만 알려주면 되겠습니까?
그래도 “원숭이 똥구멍”에도 뜻이 있습니다. 어디 알려주는 데가 없어 제가 이 노랫말을 가지고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이 노래는 일제 시대에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 나오는 ‘원숭이 똥구멍’은 아이들이 일본 순사나 사람들을 놀리려고 비하한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자연산 원숭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에는 원숭이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원숭이 똥구멍으로 시작해서 백두산으로 끝이 납니다. 결국 일본인이 이 나라를 먹은 것 같지만 이 나라의 강산은 우리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 앞에서 비유적으로 부른 노래입니다. 그리고 우리끼리는 숫자에 맞춰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1하면 일본 놈이, 2하면 이등박문이가, 3하면 삼천리강산먹으려고 …”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민요는 당연 ‘아리랑’입니다. 아리랑은 정선아리랑, 강원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 변종이 수백 개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본조(本調) 아리랑은 ‘신 아리랑’으로 알려진 ‘경기 아리랑’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본조라고만 하지 원조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아리랑이 불려졌는데 이 아리랑을 ‘상암아리랑’으로 부릅니다. 그래서 어떤 외국인은 대한민국의 애국가가 ‘아리랑’ 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모든 아리랑 노래 첫 부분에 ‘아리랑’이 나옵니다. ‘아리랑’은 고개의 이름이자 고개를 넘어갈 때의 고단함, 아기를 낳을 때의 산고(産苦)의 표현이고 한(恨)의 표출이라고 합니다. ‘아리랑’은 ‘아라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최초의 아리랑으로 알려진 정선아리랑이 본래 ‘아라리’라는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입니다. ‘아라리’는 ‘누가 내 마음을 알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 아리랑에서 아리랑고개는 조선시대 서울과 경상도를 오갈 때의 주요 길목이었던 문경새재를 뜻한다고도 합니다. 전국적으로 여러 아리랑 고개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과 함께 한을 달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한을 아리랑이라는 노래로만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절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노래의 후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신 32:39)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일 멀리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일 멀리 보는 것은 우리의 기업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앙교회가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업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본문 6절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우리 다음세대에게 전해줄 것은 ‘원숭이 똥구멍’ 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를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아버지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서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보고 만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아버지가 영의 아버지를 만나는데 방해가 되면 안됩니다. 7절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본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할 일은 영의 하나님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이것이 육신의 아버지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영의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가 다할 수 없는 것을 해 주십니다. 10절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고 하십니다. 황무지 같은, 광야 같은 세상에서 만나 주십니다. 호위하십니다. 보호해 주십니다. 자기 눈동자 같이 지켜주십니다. 눈동자에 먼지하나 들어가 보세요. 얼마나 따갑고 거추장스럽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철저하게 지켜주십니까. 그 하나님이 네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만드셨고 세워 주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동행한 기간은 광야 생활이었습니다. 그곳은 모래바람이 붑니다. 쉽게 흩날리는 모래는 쉽게 쌓였다가 쉽게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바위산은 모래 산과는 달리 없어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제자리에 우뚝 서 있습니다. 사막의 온갖 위험으로부터 나그네들을 보호해 줍니다. 피난처가 되어줍니다. 그래서 본문 4절 “그는 반석이시니”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에 쭈르(반석)인데 70인역(LXX)에는 반석을 모두 데오스(하나님)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반석(쭈르)을 하나님으로 동일하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석이십니다. 모든 위협으로부터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본문 4절의 원문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나오는 단어가 쭈르(rWXh:반석)이고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타밈(!ymiT;)입니다. 타밈은 “진실, 흠이 없다,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타맘(!m’T)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타맘은 “완성하다, 마치다”입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행위의 타밈, 마침표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완성시키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최종적인 심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말 안장에 짐을 싫고 길 떠날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창 22:4)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멀리 있는 길 떠날 곳을 또는 산을 바라보았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멀리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순종하지 못합니다. 멀리 보지 못하면 순종하지 못합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말씀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은 모두 멀리 보는 사람들입니다. 눈앞에 이익만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요. 눈앞에서 보면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멀리 보면 만납니다.

본문 6절 “…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완전하게 세워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타밈이 되셨습니다. 온전합니다. 마침표입니다. 우리에게 더 이상은 없습니다. 그 마침표는 십자가입니다. 우리에게 마치 아리랑고개를 넘어서 오신 것처럼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를 넘어서 오셨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멀리바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분의 눈물어린 사랑을 만납니다. 부활이시며, 영원하신 주, 성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눈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마 6:22-23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이 살아온 세월을 기억 속에서 끌어내는 경우 미화시키는 것이 예사입니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고, 그 현장마다 지신은 용맹스러운 투사였거나 갈채에 싸인 주인공이었다는 식이 그것입니다. 그 반대로 술회한다고 하더라도 그 의도는 결국 마찬가지 목표에 조준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애가 짭잘한 한 편의 드라마나 소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역대의 인물사나 심지어는 종교적인 인물들도 예외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스승이나 자신에 대해서 미화시키게 되어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자기가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의 렌즈가 있습니다. 색깔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내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렌즈를 통해서만 세상의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내 민족적, 지역적, 학문적 계파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아자기천호(知我者其天乎) “나를 알아줄 사람은 하늘밖에 없다.” 공자가 제자들 앞에서 독백을 했습니다. 나를 알아줄 사람이 없구나 지공이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까?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허물하지 않으며 아래로부터 배워 위로 통하니 나를 아는 사람은 다만 하늘뿐이다.” 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을 스타로 만들고 당신은 무대 뒤를 청소하라. 그것이 정말 천직으로 받아들여지면 당신은 진짜 교사가 된 것이다.” 아이들을 스타로 만들고 무대 뒤를 청소할 때 전혀 쓸쓸함을 느끼지 않아야 진정한 교사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 소견에”를 직역하면 “그 자신의 눈으로” 옳은 대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 12:15)고 했습니다. 렘 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보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눈은 어디에 있습니까? 미국의 백악관이나 청와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은 당신의 자녀들이 모여있는 교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당신의 아들이 죽은 그 십자가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 가운데 제일 섬뜩한 말이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여 저주하고 싶은 사람에게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볼거야, 얼마나 잘사나?” 그럽니다. 그러나 사실 얼마안가 잊어버리지요. 잊어 버리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사람은 잊어버립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보십니다. 하나님은 잊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욥은 자기 자식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혹시 자기가 모르는 죄를 지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매일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욥 1:5).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내 종 욥을 보았느냐고 자랑하십니다. 그를 주의해서 보았느냐고 말합니다. 그처럼 온전하고 죄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고 하셨습니다(욥 1:7-9).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이 세상을 보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잠 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본문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함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와 주시기 위해서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창 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도울 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욥을 찾아 내셨습니다. 노아를 찾아 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 내셨습니다. 야곱과 이삭과 요셉을 찾았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찾아내시는 존귀한 자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 72:14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 그랬습니다. 제가 다시 번역해 보았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폭력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왕의 눈에는 그들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가 소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우리를 찾으신 아버지 하나님은 집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잡아 잔치를 베풀어주십니다.

역사적으로 축구 황제라고 불리워지는 ‘펠레’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무려 1300골 가까운 득점을 올린 명실공히 축구왕이었습니다. 『펠레, 나의 인생과 아름다운 경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원작명은 그냥 『펠레』입니다. 이 책에 의하면 그는 열다섯 살에 프로 축구팀에 스카웃 되어서 축구와 함께 한평생을 삽니다. 양말로 둥글게 말아서 만든 공을 맨발로 차야 했던 가난한 시절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런 어린 시절을 겪고 축구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치료할 수 없는 근시였습니다. 눈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 나쁜 눈을 가지고 축구선수가 어찌 통산 1,300골을 득점할 수 있는 축구 왕이 될 수 있었을까?” 라고 하는 질문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근시 때문에 지장 받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내게는 말초적 감각, 즉 감각적 시력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감에 넘칠 때 공이 크게 보여졌다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골프 치는 사람들, 어느 날은 성적이 좋고 어느 날은 나쁘고 그럽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골프가 잘 되는 날은 골프공이 크게 보이고 안 되는 날은 작게 보인답니다. 활을 쏘는 사람들도 과녁이 크게 보이는 날이 있고 과녁이 작게 보이는 날이 있어요. 그것은 내 심리적 상태에서 오는 것입니다. 근시라고 하는 핸디캡을 그는 말 그대로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정신적 시각, 정신력이 말해주는 감각적 시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을 때가 있습니다.

카메라 렌즈에 보면 넓게 보이는 광각렌즈라고 말합니다. 제일 다 보이게 만든 렌즈는 초광각렌즈로 180도까지 보입니다. 광각렌즈에 얼굴을 갖다대면 볼록이가 되어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당신의 자녀를 향하실 때는 크게 보이실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크게 보여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할 때, 제자들이 배를 먼저 타고 게네사렛 호수를 건너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건너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풍랑 때문에 시달리는 것을 아시고 물위로 걸어서 예수님께 가까이 옵니다. 저들이 풍랑 속에서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멀리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유령이다” 그럽니다. 전 그 말이 너무너무 마음에 아파요. 사랑하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다니요. 물 위로 걸어온 사람을 본 일이 없으니까, 너무 너무 두려우니까, 지금 죽을 지경이니까, 또 혼비백산하고 있으니까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부른 거예요. 자기들의 두려움에 빠지니까 그렇게 밖에는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운 사람, 질투에 눈이 어두운 사람, 잘못된 경험에 집착된 사람, 바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특별히 걱정과 근심에 메여있는 사람들, 바르게 보지를 못합니다. 밝은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곧은 것을 곧게 보지 못합니다. 환하게 열린 길을 전혀 볼 수가 없는 그런 기막힌 처절한 형편에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성하면’ 이라고 말합니다. ‘눈이 성하다.’ 아플로스 라고 하는 말은 싱글 홀드(Single hold)를 말합니다. 잘 조정된, 초점이 맞추어진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시력일 뿐만 아니라 순수해서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초점이 흐려지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어보신 분들은 한번쯤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냥 오토매틱, 자동으로 찍는 걸 가지고 가서 열심히 찍습니다. 그런데 자동 카메라는 모든 것을 표준에 놓고 찍는 겁니다, 달리 표현하면 적당히 찍는 겁니다. 초점도 가운데에다가 하나 맞추게 되어있습니다. 초점이 하나예요. 한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딱 맞추면은 그것은 틀림없이 깨끗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을 세워놓고 가운데다 찍으면 초점이 가운데로 지나가 버려서 사람은 흐리게 나오고 풍경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카메라를 제대로 쓰는 사람은 자동카메라를 안 씁니다. 자 이제 보세요. 초점이 맞아야 되는 거예요. 초점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카메라도 소용없고 아무런 경치도 담을 수가 없어요. 초점이 중요한 겁니다.

자 이제 우리의 이 초점을 어디에 맞추어야 하겠습니까?
본문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를 향하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르호보암의 손자이며 유다 3대왕인 아사 왕에게 한 말씀입니다. 아사 왕은 처음에는 우상타파하고(대하 14:1-4), 여호와를 찾았습니다(대하 14:7). 그래서 구스의 100만 대군이 쳐들어 왔을 때도 여호와께 부르짖고 무찌릅니다(대하 14:11). 그러나 왕이 된지 36년이 지나 북왕국 이스라엘 왕(3대왕)이 쳐들어왔습니다. 그 때 아사 왕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의 곳간을 털어서 벤하닷에게 주었습니다(대하 16:1-6). 이 일에 대해서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하고 하나니가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 이 말로 하나니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사는 이 일 후에 죽었습니다. 아사 왕은 초기에는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고 열심히 우상타파하고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자존심 세우다 죽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전심으로 “!lev;:솰렘”는 ‘일관된, 신실한’이라는 말입니다. 꾸준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님들의 장점이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제 우리가 이전감사찬양예배로 드렸는데 우리가 립서비스나 인사를 잘 못하여 혹 상처가 되신 분은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은 꾸준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바람이부나’ 한결 같으십니다. 이런 분들은 원래 사람 쉽게 못 사귑니다. 그러나 한번 사귀면 평생을 갑니다. 그래도 인사는 좀 잘 합시다.
선지자 하나니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아사 왕은 죽고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여전히 아사 왕에게 했던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눈’(@yI[‘:아인)은 시력 적인 눈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샘’을 말하기도 합니다. ‘샘’은 근본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눈’(@yI[‘:아인)은 근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눈을 보면 속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눈에서 표시가 되는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눈이 맑잖아요. 갓난아이들은 사물을 일정 시간 똑바로 쳐다보기 때문에 그 때 아기하고 눈 마주치면 상당히 찔립니다. 맑은 눈이 나를 한참 응시하면 마음에 찔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 마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어두워진 눈을 말합니다. 나쁜 눈. 그것은 편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균형을 잃고 한쪽만 보는 것이에요.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를 못해요. 새는 보는데,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은 못 봐요. 무지개 색깔은 몇 개인지 아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르지 못합니다.
넓은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의 솜씨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다를 보고 하늘을 보면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역사는 보는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보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편시가 마음과 눈을, 세상을 다 어둡게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눈이 좋으면 온 몸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편시를 없애고 눈이 성하려면, 초점을 잘 맞추어서 보려면 성경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아야 합니다. 제일 좋은 렌즈는 사물을 왜곡시키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는 표준렌즈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50mm가 있습니다. 예전 필름 카메라 시대에 표준이었습니다. 디지털로는 35mm쯤 됩니다. 그래서 사진에 관한 명언 중에 에는 50mm로 못 찍으면 다 못 찍는다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소비는 미덕이지만 낭비는 악덕입니다.’ 소비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낭비는 다릅니다. 불필요한 것을 소모하는 것입니다. 사용하지 않아도 될 물질과 시간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이 잘못되면 소비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낭비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됩니다.
인간은 무슨 일이든 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안 하면 사탄의 일을 합니다. 사탄의 일은 낭비입니다. 아무것에도 도움이 안됩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 시기하는 것, 질투하는 것 모두가 낭비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소비하세요. 사랑에 소비하세요. 전도하고 선교하는데 소비하세요. 여호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산 증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22-24)

몇 일 전에 제가 치과를 다녀왔습니다. 저는 자존심에 상처받은 기억이 별로 없는데요 죄송합니다만 치과에 가서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아픈 이가 닫도록 입을 잘 다물어 보라는 거예요. 그런데 너무 치아가 아프니까 나도 모르게 그 치아가 닫지 않도록 입을 다무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아픈 이가 닫도록 여러 번 입을 다물어 보라는 거예요. 나는 잘 따라 한다고 했는데 의사 마음에는 잘 안 들었나봐요. 그 의사는 저에게 말하기를 “지금 옆에 환자 치료하다가 왔는데 마음이 급해서 그러는 데요 시키는 대로 잘 따라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또 했는데 잘 안 되었나봐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누워있는 저에게 “눈 떠보세요. 자꾸만 제가 시키는 대로 잘 안 따라 하시면 안됩니다.” 저도 마음에 자존심이 상하고 의사는 자기가 시키는 대로 안 한다고 저에게 아주 비하하는 말투로 그것도 제대로 못하냐는 식의 질책을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한 두 번은 자존심에 상처 입은 경험이 있을 겁니다. 저는 치과에 갔다가 그런 경험을 지난번에도 했습니다. 그래서 치아가 아프면 두 번 아픕니다. 치아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또 어떤 치과를 가야하나 고민에 빠집니다.
치아에 대해서 최 집사님하고 대화할 때 그러시는 거예요. 치과 의사 선생님들은 자기 자녀들에게는 보통 사람이 생각할 때 극성스러울 정도로 이빨을 닦게 하고 자기들도 특별한 칫솔을 사용해가며 관리한다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분들은 아는 거예요. 치아가 아프면 얼마나 고생하고 치아 때문에 받게될 고통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거예요. 준혁(4살 남)이가 지난번 밥통에서 나는 김에 손을 대서 약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번 케이크 사면 주는 아이스에 물을 부면 나오는 하얀 김을 보더니 “뜨거워, 뜨거워” 그러는 겁니다. 왜 그럽니까 경험을 한 것입니다. 준혁이는 그게 뜨거운 김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경험을 한 사람은 알기 때문에 산 증인이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예수님이 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아시는 것입니다.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아시는 것입니다. 절대로 갈 곳이 못된다는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저는 아픈 것 정말 못 참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지옥이 어떤 곳인데 그곳에 갑니까? 절대로 못 갑니다. 가면 안돼요. 여러분 절대로 가지 마세요. 그곳을 아시는 주님께서 증거하시잖아요. 오직(ma’llon:말론) “더욱” 이라고 합니다.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다만 입니다. 다만(ajlla;:알라)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그곳에 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천국과 지옥의 산 증인이십니다.
본문 행 2: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증명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이 못박아 죽였지만 하나님이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전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변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난 이후에는 두려움도 사라졌습니다. 사도행전 4: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을, 지옥에 가지 않으려거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성경은 심각한 책입니다.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설이 아닙니다. 단순한 도덕이나 윤리서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우리의 영혼과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생활 하는데 기쁘고 즐겁게 해야 합니다. 교양도 닦을 수 있으면 닦아야지요. 그런데 절대 잊지 마세요. 나의 육신의 안일함이나 즐거움 때문에만 절대 교회를 다니시면 안됩니다. 교회는이요 나의 영혼을 위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핀란드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해서 스스로 이런 농담을 한답니다. 가령 독일 사람, 프랑스 사람, 미국 사람, 핀란드 사람에게 코끼리에 관한 책을 써 보라고 하면 어떤 책이 나올까? 빈틈없는 성격을 가진 독일 사람은 『코끼리에 대해 알려진 모든 것』이라는 책의 제목으로 주석이 빵빵하게 달린 학술서를 쓸 것이고, 철학과 존재론적 고민에 자주 빠지는 프랑스 사람은『코끼리의 인생과 철학』이라는 책을, 사업적인 감각이 뛰어난 미국 사람은 『꼬끼리로 돈 버는 법』이라는 책을 그리고 핀란드 사람들은『코끼리는 핀란드 사람을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책을 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은 어떤 책을 쓸 것 같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코끼리를 잡아먹는 방법』또는 『코끼리의 맛있는 부위』등의 책을 쓰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 이야기는 자신들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나의 인생 철학이 개입되어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어떤 인생철학을 발견하는 책도 아니고 그런 것에 이용하는 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얼마나 지금 우리의 영혼이 중요하고 다급한 문제인가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영혼보다 더 급한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조금 섭섭하게 들리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 8:22) 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영혼을 구하러 가는 일이 급하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지옥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상 최고의 실물설교는 무디 목사가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교회근처에 나가서 살아있는 거미를 잡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들 앞에서 그 거미줄을 잡고는 거미에게 성냥불을 붙여서 가져다 댄 것입니다. 거미는 그 뜨거운 불을 피해서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이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보는 것 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더 지옥 불은 뜨겁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삽니다. 그 날 그 설교를 들은 아이들은 지옥에 대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간접적인 경험을 한 것입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류가 소유한 기록 가운데 4복음서보다 성스럽고 진실 된 피 묻은 기록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의 거의 절반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일주일간의 기록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사도행전은 증인들의 책입니다. 사도들은 부활의 증인들이었습니다(행 4:1). 증인들은 죽음을 불사합니다. 더 이상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는데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증인’, ‘증거’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마르투리아’입니다. 그런데 순교자를 영어로 뭐라고 하느냐 Martyr(마르첼)라고 합니다. 증거라는 말을 그대로 옮겨서 영어로 발음하게 될 때 순교자가 됩니다. 영어로 증인을 순교자로 옮긴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은 순교자였던 것입니다. 죽어도 부정하지 않은 겁니다. 증인이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인류 증언사 가운데 일찍이 예수님의 부활 증인들보다 진실 되고 다수의 순교자를 낸 사건은 없습니다. 만일 어떤 공모 사기 사건이라면 무슨 대가를 바라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바란 것이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하는 것이오니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순교했습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제일 진실해 진다고 합니다. 내세가 없고, 영혼이 없다면, 아무 유익도 없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짓 순교를 해야 했던 심리적, 도덕적 동기가 도저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이요. 그리고 주님은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답게 공식적으로는 베드로가 제일 처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이전에 제판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과 빌라도 총독은 자꾸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사실이 진실이냐고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마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마태복음 26: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그러면서 마태복음 27:40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럽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대제사장의 질문에 예수님은 마 26:64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65절에 보면 대제사장이 옷을 찢고 격분합니다. 그러면서 더 무슨 증인이 필요하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마 27:43)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마 27:11) 라고 직접적으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이 총독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자기 자리에만 관심이 많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가 만일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고 믿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하지는 않았겠지요. 대제사장도, 빌라도 총독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을 믿기는커녕 그 이유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던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 27:54) 고 고백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지만 이 말을 진실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6: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요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믿음뿐이 없다는 것예요.
왜 믿음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어야 그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증거 하신 모든 말씀이 진실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면 예수께서 하신 그 모든 것이 거짓이 됩니다. 예수님이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행 3:15) 그래서 순교할 수 있는 겁니다.
레위기 5:1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라고 합니다.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합니다(잠 14:25).

사도행전을 마친 후 초대교회 시대 로마 황제 세베루스(Septimus Severus)의 치하인 202-3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두 여성이 기독교인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페르페투아(Vibia Perpetua)라는 20살이 약간 넘은 귀족 여성과 그녀를 돕는 여성 펠리키타스(Felicitas)가 함께 투옥되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결혼하여 아직 젖을 떼지 못한 아이의 엄마였습니다.
아직 경찰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 귀족 아버지가 찾아와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집안을 택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버리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페르페투아는 아버지에게 꽃병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꽃병”이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아버지에게 “꽃병을 꽃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기독교인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처형 날, 미친 소를 풀어 싸우게 하였고 소가 그녀의 옆구리를 들이박아 많은 피를 흘렸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페르페투아는 다른 여인들을 돌보아 주려고 하였고 다시 표범을 풀어 물게 하였습니다. 표범의 공격에도 살아남게 되어 결국 군인들의 칼에 생명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갈비뼈를 심하게 다쳐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어진 그녀는 손을 떨고 있는 검투사에게 목을 내밀어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것이 산 증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본문 행 2: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하신 말씀이 페르페투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 순교한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부활의 사다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행 17:2-3)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이 부활절에 우리의 잠자던 믿음이, 신앙이 깨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은 에스겔이 본 환상과 같이 해골 골짜기와 같아서 육신은 살았으나 그 영은 죽은 자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영은 다 죽은 영입니다. 우리의 영이 다시 살기 위해서는 영혼의 햇빛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부활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영이 살아나시기를 바랍니다.

한 나라의 경제를 두고 부활을 말하자면 대한민국을 손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1960년대 아프리카의 나라들 보다 더 가난했던 그런 나라였습니다. 현재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아이티(카리브해) 같은 나라였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질병에 장애자에 가정의 궁핍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도 먹기 살기 힘드니까 겨울이 지나고 보리 추수가 있기 전까지 ‘보리 고개’ 라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이 기간을 무사히 넘겨야 살아나는 것입니다. 봄나물이 나와야 그거라도 뜯어먹고 사는데 그 전에는 먹을 것이 바닥이 난 것입니다. 배춧잎 말렸다 먹는 것 씨레기라고 하나요? 좀 오래도록 버티기 위해서 먹고살 수 있는 방법을 만든 것입니다. 쑥이나 길거리 질갱이도요 다 뜯어다 먹었습니다. 한마디로 먹어보고 죽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먹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먹습니다. 아마 한국 사람에게 하와에게 왔던 뱀이 와서 꼬였다면 한국 사람은 그 말을 들어볼 필요도 없이 먼저 잡아먹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축구에서 골도 먹고, 심지어는 욕도 먹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1960년대 처음 수출한 품목이 뭐냐하면은이요 가발입니다. 가진 것이 없잖아요. 그래서 머리 길러서 다 잘라서 같다가 파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남자에 의해서 경제의 밑바탕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여자입니다. 어머니들이었습니다. 그 머리카락이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다 자른 거예요. 처음에는 숙식만 제공해 주면 무조건 서울로 올라와 공장에 다녔습니다. 한 집에서 누군가는 희생을 하여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여러분! 많이 배웠다고 뽐내기 전에 나 때문에 배우지 못한 언니, 누나, 오빠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공부 못하여 사회에서 멸시받고 공순이, 공돌이라고 부르던 분들이 있었기에 한국의 경제가,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 품목은 섬유와 의류였습니다. 어두컴컴한 지하공장 같은 곳에서 12시간 이상을 일해야 했습니다. 공장을 운영하는 일부 기업주들은 근무 시간에 용변 보러 가는 것이 횟수가 많아지면 이윤을 축낼 수 있다고 하여 노동자들에게 국을 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은 이제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나라가 아닙니다. 의류나 수출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동전화, 평면TV, 자동차를 수출하는 하이테크 강국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아이티 같은 나라가 스위스 같은 나라가 된 것입니다.
이런 경제성장에 대해서 대부분의 서양 경제학자들은 시장경제원칙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흔히 말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완전히 다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하던 기간에 한국의 국가 원동력을 만들었는데요 그 대표적인 기업이 포항제철(포스코)입니다. 한국전력, 한국통신(KT)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가 만든 기업입니다. 한국이 IMF을 경험한 것도 외환시장의 개입을 적절히 하지 못해 일어난 사건으로 봅니다. 사실 한국은 전혀 자유주의 시장체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비단 이것이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선진국은 보호무역장벽을 두텁게 사용하며 성장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신흥경제국가 들에게 신자유주의 무역을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1841년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영국이 자신들의 높은 관세와 광범위한 보조금을 통해 경제적인 패권을 장악해 놓고는 정작 다른 나라들에게는 자유 무역을 권장하고 있다고 질타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영국이 세계 최고의 경제적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 타고 올라 사다리를 치워 버렸다” 고 질타했습니다. 정상에 올라간 사람이 다른 사람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자기가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치워버린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세계의 경제 논리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사다리를 놓아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 가는 사다리입니다. 우리를 위한 사다리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세계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십자군형태의 복음전달 때문입니다. 무력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점령한 것입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웃 국가와 좋은 관계에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한 것입니다. 아르메니아는 정교회 국가입니다. 아제르바이잔을 쳐들어가서 사람들을 죽이고 심지어는 배를 갈라 십자가로 표시하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십자가를 민족의 원수로 알고 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국가를 위한 다는 명목으로 전쟁한 것 회개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이 전 세계에 비슷한 방법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치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진실로 그 나라를 위하지 못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식민지화하면서 남자들을 교육시키지 않았습니다. 똑똑해져야 대모나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무식하게 만들었습니다. 교육이 없으면 사람이 안 만들어집니다. 그래도 우리나라가 잘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부모는 찢어지게 가난해도 공부를 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카톨릭 식민지화되었던 나라들이 아직까지도 회복이 안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비무장입니다. 힘으로 승리할 것 같으면 열두 영이나 더 되는 하나님의 힘을 빌어 자기를 십자가에 죽이려는 사람들을 모조리 불태워 죽이셨을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비무장입니다.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복음이 아니라 사다리를 놓아주는 복음입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말입니다. 筍子(순자)에 云 良農(운 양농)은 不爲水旱不耕(불위수한불경)하고 良賈(양고)는 不爲折閱不市(불위절열불시)하며 士君子(사군자)는 不爲貧窮怠乎道(불위빈궁태호도)니라
순자가 말하기를 “훌륭한 농부는 가뭄이 들었다 하여 농사를 그만두지 않으며, 훌륭한 상인은 손해를 본다 하여 장사를 그만두지 않으며, 사군자(士君子)는 가난하다 하여 도(道)에 게으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복음 전달하는 것을 우리의 성공의 틀, 기준 위에서 하면 안됩니다. 사람의 실패와 성공의 여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명령대로만 하면 됩니다. 명령대로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입니다. 바울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고 말합니다(딤후 4:2).
주님의 음성을 들어 볼까요? 마태복음 24장 45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라고 물으십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비무장의 복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를 준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나만을 위한 복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나라만을 위한 복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잘못되면 복음이 전혀 아닌 것을 복음이라고 설교합니다. 또 그것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떠나서는, 성령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성경을 떠난 그 무엇도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행 17:2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그랬습니다. “규례대로”는 에이오도스는 완료 부사로서 이미 익숙해진 행동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미 지나온 살라미(13:5), 비시디아 안디옥(13:14), 이고니온(14:1) 등에서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바울을 자꾸만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신약성경 13세 권을 남겨 제일 많은 분량의 책을 쓴 것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성경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럽에 제2차 전도여행 때 들어가서 데살로니가에 3주 이상 머물면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이 회당에 모이는 시간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그 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성경을 떠나서는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의 초점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유럽지역에 최초로 전해진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터어키에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려했습니다. “나는 여행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하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무조건 믿으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3절 “뜻을 풀어” 라고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강해 설교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뜻을 풀었습니까?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입니다. 초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메시지의 중심은 병 낳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질 축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복음을 믿고 따르려면 우리 시대에 앞서 간 믿음의 선배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영국의 마지막 청교도 후예이며 복음 설교자였던 로이드 존스 목사는 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초대교회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위대한 신앙 인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는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에 대해서 철저하게 연구해 보라고 런던 신학교에서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드에게서 하나의 커다란 계시와도 같은 것을 받았다고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지독한 근시라서 강대 상에 설 때에 설교할 내용을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다 쓴 사람입니다. 한 손에 촛불을 들고 설교문을 읽어내려 갔다고 합니다, 그 설교를 듣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권능을 견디지 못해 나동그라지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왜 그런 능력이 일어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대로 전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예수께 돌아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사다리를 놓으신 분입니다. 이 사다리를 우리가 치워버리면 안됩니다. 복음이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형제와 이웃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느 8:10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미국의 노부부가 성지순례차 고향 땅 이스라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남편은 장의사를 찾아 시신 처리와 장례 절차를 물어보았습니다. 장의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묻힐 경우 축복도 받고 비용도 150달러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시신을 방부처리해 미국으로 공수하는 방식인데, 절차도 번거롭고 비용도 5,000달러나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인은 망설이다 결심했습니다. 비싸더라도 미국으로 시신을 옮겨 묘지에 묻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땅에 묻히면 그 옛날 어느 분처럼 자기 아내가 부활할지도 모르는데, 그게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새중앙교회 대신교단의 선교훈련에 강의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선교훈련 받는 분들 중에는 목회를 은퇴하고 선교지로 가기 위해서 훈련받는 목사님도 계셨습니다. 제 강의 중에 어떻게 해야 선교편지를 잘 쓸 수 있을까? 또 어떤 편지가 좋은 선교편지 일까 생각했습니다. 서로 논의하던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선교지에서 한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이 결여된 상태에서 후방의 교회들에게서 후원만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면 좋은 편지를 쓸 수 없다는데 공감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만 부흥시켜 보려고 전도하려고 한다면 아마 우리는 쓴맛만 보아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한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가지십시오. 나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서 한 영혼을 사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놓아주신 십자가의 사다리를 치우는 자가 아니라 세우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고전 2:4-5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십자가에 못 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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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지난 두 주일에도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는 너무나도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도 부족합니다. 또 솔직히 다 설명드릴 수 도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를 알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하고 십자가를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때 바울에게 있어서도 그 십자가가 거침이 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주께서 무능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은 정말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구주께서는 위대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군사력이 있으면서 행차할 때마다 화려함과 어느 왕 못지 않게 큰 의식이 뒤따라야 하는 왕 중의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예수님 당시에 모든 제자들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들레헴 작은 마을의 알 수 없는 어느 집의 말 밥통에서 나셨고, 당시 비천한 직업으로 취급받던 목수로서 일했고, 바리새인으로도 아무 훈련도 받은 적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야라니, 또한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그가 할 최종적인 일이라니, 그야 말로 우스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로마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 나타났던 어느 날, 그 기세 등등한 무리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행 26:9) 라고 했습니다. 그가 멸시하고 이해하지 못한 것이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그가 지금은 자기의 모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의 대 사도로서 바울의 인격과 신앙은 최고조에 달해있습니다.
그러나 바울도 처음부터 십자가를 이렇게 자랑하고 알았던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이스라엘 사람이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요, 팔일 만에 할례 받았다는 사실을 자랑하곤 하였습니다(빌 3:5-6). 그 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율법에 능한 사람이요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등의 자랑을 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총 결론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누구나 십자가를 바르고 깊게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신앙이 좋다는 것은 기도하여 목이 많이 쉰 것이나,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았다든가?, 위대한 간증거리가 있어서만이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십자가가 얼마나 내 중심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떠난 축복은 없습니다.
그토록 십자가를 바울이 자랑한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것은 사형에 처하여 더 이상 그것이 살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가 세상을 제거시켰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문제는 세상에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풀면 하늘 나라에서도 풀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결시키는 일이 십자가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 점을 달리 표현해 보겠습니다.
한 타입의 사람들은 세상에 속해 있으며 세상을 자랑합니다. 예수님의 제작들도 당시에 로마가 지어주는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예수님께 그 성전의 돌기둥들이 어떠하냐고 자랑했습니다. 또 다른 한 타입의 사람들은 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있지만 이제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난번 남북한이 월드컵 예선전이 있었습니다(2009.4.1). 북한에서 온 탈북자들에게 어느 팀을 응원할 것이냐 물어보았습니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남한 팀을 응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한 민족적 감정이 베어있어 “체육에는 국경이 없는 것 같이…” 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취하는 것은 어느 민족인가? 피부 색깔이 어떤가? 부자인가 아닌가? 어디서 배웠는가? 등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는가 세상에 속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피부색이 검으면 어쩐지 우리와 다른 사람 같아서 가까이 가거나 호감을 가지는 것에 두려워하는 어떤 편견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이지요. 선교를 하면서도 차별 아닌 차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완전히 무너트린 계기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신이 찾은 아이들”(GOD GREW TIRED OF US)이라는 책을 읽은 후부터였습니다.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더 보고 싶은데, 더 책장을 넘기기 싫었습니다. 이해가 안가시죠? 이 책의 내용은 실화입니다. 우리가 수단에 대해서 그동안 알고 있는 상식은 오랜 내전이 있는 나라 정도입니다.
13살의 당카족 소년(존 불 다우)이 자신이 살고 있던 수단의 둑 빠유엘(Duk Payuell) 마을에 젤라바(북쪽 수단에 사는 이슬람인) 들이 한밤중(1987년 수단 내전)에 쳐들어오면서, 그 밤중에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탈출하여 1,600km가 넘는 길을 걷는 동안 수 없는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이야기입니다. 19년 간이나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하루 하루의 삶이 하나님께 받은 선물이라고 여기면서 모든 역경을 꿋꿋하게 이겨나가는 모습을 그린 책입니다. 바로 다음 책장에서 이 소년이 당하게될 고난을 생각하게 되면서 책장을 넘기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났지만 뒤따라온 젤라바들에 의해 물 속에 숨어있어야 했던 일, 그들에게 발각되어 죽도록 얻어 맡은 일 등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책 중간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머리 위에 태양은 계속해서 우릴 구워대고 있었다. 소년들은 오줌이라도 마시려고 손에 컵을 들고 이 사람 저 사람 옮겨 다니며 오줌을 눠 달라고 애걸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계속 걷고 있었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바로 그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들은 우여곡절 속에 에티오피아에 있는 난민캠프를 찾아옵니다. 구호단체 활동가들은 1만 7,000명의 걸어다니는 해골이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1988년 중반 에티오피아 남서부 지역에 설립된 난민 캠프에 26만 5,000명의 난민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소년들의 여정은 에티오피아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에티오피아 군이 이곳을 급습한 것입니다. 악어가 우글거리는 강과 물 속에 쳐 넣으려는 에티오피아 군 사이에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수영을 못하는 아이들은 물 속에 수장되었고 일부는 악어의 먹이 감이 되었고 일부가 가까스로 살아 남아 강 건너로 가게됩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또 사막을 헤매며 어디론가 가야합니다. 현재 이렇게 떠도는 아이들이 선교사님의 보고에 의하면 아직도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아이들을 가리켜 바깥세상 사람들은 잃어버린 아이들(The lost boys) 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가? 얼마나 더 멀리가야 하는가?” 라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존 불 다우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도 우리가 싫어 졌거나, 우리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도 잊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를 찾아냈다!”

저는 이 책을 보고 흑인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한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존 불 다우는 흑인이면서 키가 2미터 넘는 장신입니다. 보통 미국 사람들도 존 불 다우 보다 작습니다. 저는 키가 큰 이 흑인을 통해서 민족이나 국가보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친구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미국 난민 정책에 의해서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가 교회의 성도들의 도움을 받으며 공부를 하고 자기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살던 수단의 당카족 마을에 학교를 짓고 병원을 지으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기존의 우리의 모든 가치관을 다 바꿔놓습니다. 하나님은 도덕주의자, 윤리적인 사람, 시 적인 사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십자가는 국가도 민족도 아닙니다. 전도하다보면 어떤 분은 기독교를 서양종교라고 안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민족종교를 믿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민족이나 국가가 십자가보다 먼저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민족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보다 먼저가 아닙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 바울도 한때는 유대인임을, 베냐민 지파임을 자랑했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우리 인간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나를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세상의 육 적인 사람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에게 제일 골치 아픈 문제 거리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가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 변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내가 도를 닦고, 내가 무엇을 자꾸만 하려고 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는 선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지구 모퉁이에 있는데 선교사는 자기가 있는 곳이 중심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인간에게 있어서 이것이 딜레마입니다. 이것이 제일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인간은 본질상 자기를 의뢰하며 자기 신뢰 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기 속에 성공케 하는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기의 운명을 내어 던지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자기의 운명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딜레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지만 인간처럼 성장이 더딘 동물도 없습니다. 거북이나 뱀은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부모의 도움 없이 독립적인 생활을 시작합니다. 제가 송아지 낳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엄마소가 새끼소를 낳는데 그만 다 나오지 못하고 먼저 머리만 나왔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보니까 소가 머리가 둘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눈을 뜨더라구요. 그리고 네 발이 다 나오자마자 땅에 뚝 떨어지면서 물기를 엄마소가 핥아 주니까 네 발로 바로 일어서더라구요.
세상의 모든 심리학은 “너 자신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렇게 할 만반의 채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없다고 말합니다(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합니다. 그런 죄인인 우리가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있겠습니까? 내 중심대로 살아서 성공 할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9)
그러면 우리는 버려진 자 입니까? 그 또한 아닙니다. 수단의 한 소년(존 불 다우)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인간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었습니다. 내 자신을 버리면 십자가가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십자가는 부활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에게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라고 말합니다.

‘경청’이라는 책에 보면 ‘청(聽)’ 자라는 글자를 풀이한 것이 나옵니다. ‘청’ 자의 부수는 왼쪽에는 ‘귀 이(耳)’ 자와 밑에 ‘임금 왕(王)’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 쪽에는 ‘열 십(十)’ 자 밑에 ‘눈 목(目)’ 자를 눕혀 놓은 글씨가 나오고 그 아래는 ‘한 일(一)’ 자와 ‘마음 심(心)’ 자가 있습니다. 여기서 나름대로 풀이한 것은, 듣는 다는 것은 왕 같은 귀를 가지고 들어야 하고, 다시 말하면 집중해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열 개의 눈이라는 것은 마치 보는 것 같이 열 개의 눈을 가지고 들어야 함을 말합니다. 듣는 다는 것은 눈을 가진다는 의미도 됩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임금님과 같은 귀를 가지고, 열 개의 눈을 가지고 십자가를 똑바로 보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시 61:2 “내 마음이 약해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라고 합니다. 땅 끝이 어디입니까? 더 이상 갈곳이 없는 곳입니다. 피할 곳도 없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바로 땅 끝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십자가를 만납니다. 아직도 피할 곳이 많이 남아있는 사람은 십자가로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의 학문 때문에, 자기의 재물 때문에, 자기의 배경 때문에 숨을 곳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땅 끝에 선 내가 될 때 십자가를 붙들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이 박히신 십자가에 함께 박으시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위대한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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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베토벤의 소나타 형식의 알레그로 1장은 종달새가 지저귀듯 상쾌한 바이올린 선율로 시작됩니다. 이어 계곡에서 물이 흐르듯 피아노가 바이올린과 어울리면서 희망에 찬 봄을 그려냅니다. ‘바이올린 소나타 5번’은 베토벤이 청각장애가 심했던 시기에 만든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정조나 불안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예상을 반발하듯 바이올린은 긴장감이 느껴지는 경쾌한 울림과 감미롭고 깊은 소리로 청중의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피아노가 앞으로 나가면서 바이올린이 뒤따르는 2악장은 느린 템포로 이어지며 청중을 포근함에 빠져들게 합니다. 마치 물소리와 종달새가 노래하듯 선율이 상승했다가 하강하며 역동적으로 미끄러져 나가며 소리 하나 하나를 서두르지 않고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마지막 4장은 베토벤 특유의 열정적 멜로디가 힘차게 울립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위대한 찬양하는 위대한 노래입니다.

한국이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숙적’ 일본과 처절한 ‘야구전쟁’ 끝에 아쉬운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지만 전 세계 야구팬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긴 ‘위대한 도전’ 이었습니다.
전국 야구 고교팀이 55개에 불과한 한국은 고교팀 수가 4천100개가 넘는 일본과 5번이나 붙어 모두 대등한 경기를 펼쳤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사령탑의 중책을 맡았던 김인식 한화 감독은 ‘위대한 도전’ 이라는 말로 우리에게 더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진짜 위대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위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우리에게 있는 그 모든 것을 통 털어 한가지만 말하라면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여러분도 동의하십니까?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 이 위대한 주제로 다시 넘어왔습니다.

본문을 볼 때, 사도 바울이 말할 때 한 문맥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11절에 ” 내 손으로…”,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이라고 합니다. 사도는 자신과 다른 어떤 사람들, 곧 바울이 떠난 후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며 말하며 설교했던 거짓된 유대교 선생들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하여 준다고 가르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길이 단순한 성도들을 매우 혼란한 지경에 빠뜨렸습니다. 13절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사도는 말합니다. 내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의지해야할 권위가 어떤 것인가를 명백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두 가지 권위 밖에 없습니다. 성경이냐 아니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다른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밖에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펼칠 수 있는 다른 것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떠난 모든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을 떠나서는 얼마든지 많은 가능성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심” 그것만이 진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말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만이 우리의 신앙을 측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중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설령 그것이 양분된다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거치는 것이 되든지, 아니면 우리의 제일 위대한 것이 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전도자이자 설교자입니다. 그는 “나를 구원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라고 말합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강의(講義)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설교를 했습니다. 기독교의 임무는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설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정치문제나 사회 문제에 대해서 조심해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는 고백 속에는 당시의 복잡한 나라 사이에서 정치문제 속에서 이 재능 있는 대 학자인 바울의 고백은 그의 모든 철학과 심오한 이해력, 헬라의 철학과 시들, 그밖에 다른 수많은 문제에 대해서 미련한 자가 되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치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당을 만든 것도 없습니다. 하나의 학파를 만들어 계승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자원 봉사자도 아니며 박애 주의자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니까 일부 사람들은 바울을 비판했습니다. “그 사람은 언제나 십자가만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유치하다. 그는 자기 말을 듣는 청중의 생각은 조금도 안 한다.” 하며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사도는 그러나 그렇게 한 것이 모두 의도적인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자신도 지혜에 대해서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고전 2:6) 라고 합니다. 이것이 감추어진 지혜입니다. 그것은 신비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현실적으로 유대나 헬라나 로마인 모두 당시 상황이 매우 복잡합니다. 정치적으로 국가의 운명과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생각은 다릅니다. 아무리 현실 정치의 문제가 복잡하고 중요하다고 해도 우리의 구원 문제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거듭나야 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십자가는 꺼리는 것이 됩니다.

십자가를 유대인들이 꺼리는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 생각과 예수 그리스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왕으로 군사로 왕 노릇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도 한 때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라고 주장하던 자가 힘없이 무능하게 십자가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깊은 상처와 마음속에 분함을 느꼈습니다. 대단히 속은 것입니다. 구세주, 구원자가 죽다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분이 말하고 실천한 것은 그동안 유대인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 사상을 다 무너뜨렸습니다. 헬라인들도 똑 같았습니다. 그들은 대단한 철학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무너지고 아무 쓸모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는 세상을 다 지배하고 있는데 로마 황제 이외에 주가 따로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무너뜨렸습니다. 기존의 생각을 사상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가 사람을 하나로 만드는 방법을 아시겠습니까? 십자가에 앞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의 철학이 자신의 사상이 모두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사상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합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이해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여러분! 철학을 좋아할지 몰라도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선한 사람, 가장 철학적인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비 크리스천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믿지 않겠다, 내가 이해하기 까지는 그 어떤 것에도 나를 맡기지 않겠다.” 사람은 스스로 모든 진리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은 자신이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언제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 믿겠습니까? 아마 100살을 살면서 평생을 공부하고 연구해도 답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찰스 웨슬리는 그의 찬송시에서 “신비요, 죽을 수 없는 자가 죽다니.” 그랬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 속에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것이며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믿음이 왜 필요합니까? 이해하고 믿는 것은 믿을 수도 없지만 믿음이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님을 다 이해하고 따라갑니까? 믿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는 예수님 못 믿습니다.

왜 사람이 타락했습니까? ‘교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너 자신이 제일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너 말고는 믿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당시 제일 모욕적인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입니다. 이 말씀을 그들이 싫어했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구원받는 쪽에 있다는 것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타락하여 구원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잃어버린 자”가 암시하는 것을 싫어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장은 여기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결국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우리 인생들은 모두가 실패자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 때처럼 똑같이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 타락했고 죄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만, 또한 100%센트 아무 흠이 없고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완전히 타락한 창녀와 술주정뱅이와 사마리아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 주셔야지요?” 그런데 이 논리는 도덕적이냐? 비도덕이냐?, 윤리적이냐 비윤리적이냐? 또는 사람의 규범을 얼마나 잘 지켰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마저 다 파괴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에 가서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나 저녁에 온 사람이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과 의, 도덕적인 모든 규범이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양 빛이 강하게 비추면 작은 등불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차이를 완전히 없애버렸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을 격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1-23)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바로 그들을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차별이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기존의 유대인의 율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었던 율법, 철학을 다 버리지 않으면 십자가의 위대함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미워합니다. 지금도 선을 행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배웠다는 사람들, 도를 닦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쫓지 아니합니다. 십자가는 다 같다고 말합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십자가만을 말해야 합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좋게 여기던 것, 사실 그것들이 다 똥 같았다고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보니까 더럽다는 거예요. 십자가는 철저하게 우리의 것으로는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능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영광의 왕이 죽으신 그 위대한 십자가 앞에서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내게 있는 가장 크고 좋은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모든 교만 헛된 줄 알고 버리게 하소서.

영화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지하철역은 ‘개봉역’ 이랍니다. 제일 싼 것을 좋아하는 아줌마는 ‘일원역’ 입니다. 학교 가기 싫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은 ‘방학역’이며, 마라톤 선수가 가장 좋아하는 역은 ‘월계역’ 이랍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역 이름이 제일 좋을까요? ‘보라매역’ 입니다.
내가 위대한 십자가를 곰곰이 생각할 때 나는 거기서 무엇을 봅니까? 이 세상 이전에도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광경을 봅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그 위대한 십자가를 봅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책에 보면 저자이기도 한 포리스터 카터(Forrest Carter)인 주인공 체로키 인디언 소년이 나옵니다. 이 소년이 할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할아버지가 늙어 더 이상 돌보기 어렵게 되자 이 아이를 고아원에 맡깁니다. 그런데 고아원에는 가끔 양자를 삼으려고 아이를 데리러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아이는 자기가 다리가 불편하고 얼굴에 주근깨가 많아 늘 자기는 아닐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 또 양 부모님들이 오니까 아침에 운동장에 깨끗하게 하고 모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이 아이도 얼굴을 깨끗이 닦고 머리를 빗고 나갑니다. 그리고 한 줄로 쭉 서 있는데 다리를 절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고 똑바로 서 있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역시 그 날도 이 아이는 선택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체로키 인디언 보다 더 못한 죄인인 바울의 고백대로 벌래보다 못한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를 자녀 삼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님을 반드시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다 해결됩니다. 아버지 되시는 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실 것을 믿습니다.
 

기독교의 핵심 십자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갈 6:11-15)

여러분은 9.11 테러가 일어날 당시 어떤 일을 하고 계셨는지 기억하십니까? 그 사건의 충격이 너무 커서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자기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해 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수대교가 무너진 참사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린 사건이 있습니다. 광염교회 조현삼 목사님(감자탕교회 이야기)은 삼풍 백화점이 무너질 당시 버스를 타고 가다가 그 소식을 듣고 그 즉시에 내려서 백화점을 향해 뛰어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명 구출에 대한 귀중한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다리가 끊긴 바로 앞에서 앞차가 강물에 빠지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은 브레이크를 잡아 겨우 차가 멈춰 섰을 때 한참을 하늘만 쳐다보고 눈물이 나왔다는 분의 이야기를 라디오를 통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불행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충격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 죽음은 싸움으로 찢겨지고 상처투성이인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하고 더욱 필요한 죽음이었습니다. 그 죽음을 우리의 눈으로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그 날 그 때의 현장이 너무나도 생생하기에 바로 전에 있었던 죽음과 같이 다가옵니다. 바로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났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그 때의 그 군중소리, 십자가에 못박는 소리,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 죽음이 나와 상관이 있습니다. 아무리 전쟁의 소식이 들려와도 자기와 상관없는 사건은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생생한 그 현장의 소리를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십자가 사건이 나와 상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산을 옮길 수 있고, 산을 평지로 만들 수 있는, 믿음을 제게 주소서
…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내 마음 넓게 해주신, 그것으로 불꽃이 일어 가득 차게 하소서. 내 있는 힘 다 기울여 당신의 열심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당신의 문으로 인도하겠나이다. 목자 되신 주님이 위하여 죽으신 양들을 위해 -웨슬리(C Wesley)

여러분은 이 시가 말하는 식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시가 말하는 주님을 찬양하면서 나의 시간을 사용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까?
자, 이 질문에 답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바울이 쓴 오늘 본문말씀을 봅니다.
본문을 시작할 때 바울은 갈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고 합니다. 우리는 글자의 크기가 모두 같게 만들어서 성경을 봅니다만 바울이 오늘 본문을 기록할 때는 큰 글자로 썼다고 말합니다. 여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큰 글씨로 쓴 오늘 본문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는 본문의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서를 끝마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의 전도(선교)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거짓교사가 가만히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좋지만 확실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되고 율법 아래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문제를 대처하기 위해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도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가만히 들어와 이상한 소리를 하면 여러분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전도를 해 보셨어야 알지? 제가 예전에 서소문 공원에서 전도하는데 제 앞에 여호와의 증인들, 안식교인들도 전도하며 다니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나누어준 전도지를 다시 회수하면서 이거 잘못된 겁니다. 하고 다시 다 걷고 다녔습니다. 바울이 애써 전도해 놓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흔들리게 생긴 겁니다.

바울의 첫 번째 요점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고 엄숙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그저 히히낭락하며 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엄청나게 진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앞 절에 보면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고 합니다. 사람은 심고 거두는 도덕적 이치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일로 하나님 앞에서 평가를 받습니다. 그 심판대를 피해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느냐, 영혼을 위하여 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위하여 성령을 위하여 심어야 되는데, 어떻게 살아야 성령을 위하여 심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심어오던 중인데 거짓 교사들 때문에 그 문제가 뒤죽박죽 되어버렸습니다. 초대교회에만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일어납니다. 요즘은 너무 태평시대에 살아서 그런지 온통 설교가 웃기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웃기지 못하는 목사는 인기도 없습니다. 한번이라도 더 웃겨보려고 목사도 매우 노력합니다. 이런 현상을 나쁘다고만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복음을 가려내지 못하고 히히낭락할 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웃고 즐기는 동안 사탄은 슬며시 고개를 들고 우리에게 틈탑니다. 우리의 진정한 웃음은 죽음 앞에서 미소짓게 하며, 하나님의 심판대에 이를 때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 시켜 주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광 중에 있는 영생과 영원한 복락을 보증할 것을 위하여 이 세상에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대 사도인 바울이 그 해답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자랑하는 일은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자랑해야 할 그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는 그가 자랑하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특권을 얻었습니다. 어떤 분이 그러더라구요. 목사가 설교를 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벤치에 앉아있는 운동선수와 같은 것이라구요. 그만큼 설교하는 것은 목사에게 특권이자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특권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증거 할 유일한 메시지는 바로 바울과 같습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이상한 것 기대하지 마세요? 저는 연예인도 아니고 마술사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증거 해야 할 사명만이 있는 목사입니다. 그 대답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며 기독교의 메시지요, 핵심이자 중심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십자가를 보여주고 싶었고 전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확실히 말해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봐야 합니다. 기독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초대 교회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사도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께 받은 메시지를 전하노라’ 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메시지가 십자가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시대에도 십자가의 이야기는 유쾌한 이야기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기 얻으려고 전하는 것 아닙니다. 십자가가 인기가 있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는 인기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전하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방 나라인 헬라인에게 인기가 있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본문 12절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거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전하면 언제나 그것이 사람들에게 거침이 되었습니다. 1세기에 살던 사람들은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로마인도 모두 싫어했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의 핵심이 왜 십자가입니까? 예수님도 산상에서 가르치신 적이 있고 제자들과 3년이 넘는 세월을 가르치시며 다녔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누가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 맹자, 석가 이 세상 성인이 다 와도 안됩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가르침으로 사람이 만들어 질 것 같으면 그렇게 일찍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장수를 누리시면서 죽으실 때까지 가르쳐야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서두르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 마지막 승천이 있을 때까지도 제자들은 십자가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적인 말씀으로만 제자들이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보세요? 십자가 죽음 없이도 교훈으로만 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어집니다. 바울이 “산상 설교 외에는 자랑할 것이 결코 없나니…”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윤리적 교훈 이외는 자랑하지 않겠노라”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이며 제자들은 핍박을 받아가면서 십자가를 전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십자가를 전하지 않고 윤리적인 이야기나 전하고 유머나 하면서 다녔다면 제자들이 순교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좀더 하기를 원합니다. 아마도 저와 생각을 달리 하실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혹 주님과 관계없는 바울의 주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안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지요. 가이샤랴 빌립보 지망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사건 바로 전에 일어난 일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자, 베드로가 선뜻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 일을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시고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3-18)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 기억하고 다음을 읽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6:21-23입니다.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가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후 우리 주님은 즉각적으로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베드로만 실수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 모두가 그랬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말하지 않으면, 십자가를 전하지 않으면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최후의 만찬이 열렸습니다. 거창하게 말해서 만찬이지 그저 빵 몇 개와 쉽게 구할 수 있는 포도주 한 두 병이 전부였을 겁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것인지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 사건 후에 성찬식을 하지만 최초의 성찬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지시기 전에 직접 집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거기서 떡을 먹고 있을 때 떡을 취하여 떼어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그리고 잔에 포도주를 따르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9-20) 쉽게 말하면 “이 빵은 찢겨질 내 몸이요, 너희를 위해서 흘릴 내 피라” 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주님의 증거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 기도하시고 내려오신 후 예루살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시고 나아가시는 모습을 봅니다. 통계적으로 말하자면 4개의 복음서가 이적과 예수님의 교훈은 교차적으로 증거하지고 있지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모든 복음서가 기록하고 7주일 동안의 사건을 집중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뿐만이 아닙니다. 2장에서도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는 오직 십자가를 알리고 전도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십자가를 전한 까닭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오랜 계획에 의해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생각하지 않고 잊으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이상화(理想化) 시키려 한다든가 철학적으로 말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또 그것을 아름답고 기이한 것으로 만들려고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나는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 사랑스런 십자가를 전하시다가 주님 앞에 서시는 날 진짜 웃으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