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흔적을 가지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갈 6:17-18)
오래 전 있었던 어느 선교사 자녀의 고백입니다.
“나의 아버지와 엘리오트 등 다섯 명의 선교사들은 석기 시대를 살고 있는 아우카 족에게 접근했습니다. 맨 처음 정글로부터 나온 아우카 족의 한 남자와 두 여자에게 우정의 표시로 아우카산 레몬에이드와 햄버거를 주었습니다. 그때, 다른 아우카인들이 분노하며 강가로 나와 창을 들고 아버지를 비롯한 선교사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 당시에 나는 다섯 살이었고,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심으로 쓸쓸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는 믿음에 회의를 가졌으나, 성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고, 아버지의 순교가 의미하는 바를 깨달아 갔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0년이 흐른 뒤, 아버지가 묻힌 팜 비치 강가를 찾았습니다. 그때 아버지를 비롯한 선교사들을 죽인 아우카 족 사람 중에서 두 명을 만났습니다. 선교사들이 죽은 후에 라헬 아주머니와 엘리오트 선교사의 부인이 그 부족에게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생명을 드리겠다고 헌신했습니다. 나의 누나는 아버지를 죽인 그 아우카인들이 이제 크리스천 지도자가 되었으니 그들에게 내가 세례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중요한 사건에 응하는 것이 주님께 순종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죽은 그 강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나의 옛 사람이 다 죽어 버림을 뜻하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아버지를 죽인 아우카인들의 손을 통해…. 강물에서 올라왔을 때, 나는 아우카인에 대한 사랑으로 함께 울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선교사 자녀에게는 아버지의 죽음은, 그리고 아우카인들에 의한 세례는 하나의 증표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를 선교지에서 잃고 혼자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던 그에게는 상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상처라고 하지 않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증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아이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아우카인들에게 세례를 받지 않았다면 말 그대로 아버지의 죽음은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 돌아온 사람들은 과거의 상처가 오히려 하나님의 증표가 됩니다. 하나님의 표증이 됩니다. 세상 사람은 그 상처를 그대로 안고 살아가지만 하나님께 돌아온 하나님의 자녀는 그 상처들이 오히려 믿음의 원동력이 됩니다.
저희 어머님이 저를 어렸을 때 무당에게 팔아먹었습니다. 순진하신 우리 어머님이 아마 어떤 분의 말을 곧이듣고 자식 잘 되게 하려고 팔아먹은 것입니다. 제가 무당에게 가서 우상 밑에서 지냈어요. 우상이 앞에 놓여있고 향을 피우고 옆에는 북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집이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자꾸만 병이 나고 아팠습니다. 그리고 제 팔이 양쪽 모두 이렇게 구부러져 있잖아요. 다쳐서 그럽니다. 얼마나 팔이 많아 빠졌던지 너무 많이 빠져서 이렇게 구부러진 거예요. 그래서 우리 어머님이 나를 다시 무당에게서 빼내왔습니다. 자식 잘 되라고 맡겼더니 팔만 빠지고 집안 일이 되는 일이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어려서 팔이 이렇게 다쳐서 짧은 팔 옷을 잘 안 입습니다. 아이들이 팔 병신이라고 얼마나 놀렸는지 모릅니다. 우리 아버님은 또 다리를 저셨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병신 집안이라고 사람들이 놀린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단순히 가난한 것이 아니라 우리 집은 마치 이웃과 사회로부터 소외된 느낌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님과 우리 집과 제일 친하게 지내며 산 집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뒷집에 맹인아저씨가 사셨는데 침을 놓으시면서 사셨습니다. 그분이 우리 집의 이웃이며 친구였습니다. 제 구부러진 팔만 보면 그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지울 수가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제 팔이 증거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흔적(stivgma:스티그마)은 “표시, 일하다 얻은 상처, 흔적”을 말합니다. 본문과 같은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여기 하나만 나옵니다. 그러나 비슷한 단어들은 많이 나옵니다. ‘표징, 표시’를 말하는 세메이온과 세마이노 ‘의미하다. 나타내다’와 쉿메온 ‘신호, 표준’도 모두 비슷한 말입니다. 이 단어들이 헬라어인데 구약용어에서는 이렇게 다양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단어들이(약 5분의 4) 구약적 용어(히브리어) “t/a:오트”에서 나왔습니다. 단순하게는 “표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의 헬라어 스티그마는 “찌르다, 찌른 자국”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양이나 소들의 주인이 자기 소유의 표시로 인두로 넓적다리에 표시를 찍었습니다. 이것이 낙인입니다.
낙인은 짐승에게만 찍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찍었습니다. 예를 들면 죄수들, 전쟁 포로들, 노예들입니다. 군대에서는 탈영자들에게도 찍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포악한 황제 갈리굴라(Caligula)는 선량한 시민에게 낙인을 찍고 감옥에 가두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낙인이 찍힌 사람들은 수치스러운 자들로 간주되었고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낙인을 지우고자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였으나 대부분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도 반항적인 첩들이나 자식들에게 노예의 낙인을 찍었습니다. 유대인들도 포로로 잡혀갔을 때는 이 낙인이 찍혔습니다. 사람들이 찍은 낙인은 모두 사람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의 소유로서 표시하고 종으로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였습니다.
창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t/a:오트)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표시는 문신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 표시는 살인자라는 의미에서 준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다는 것을 알리는 표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시고자 하는 표시였습니다. 출애굽 때의 유월절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하나님의 넘어간다(유월)하신다는 약속의 표시였던 것입니다(출 12:13).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인의 표시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쟈넨(Saanen), 힌 염소로 불리는 동물이 어린이 대공원에 있습니다. 이 동물이 하도 탈출을 잘해서 인근 주민들이 자주 놀라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린이 대공원에서 손을 들었습니다. 동물원 울타리 밖으로 나가 살 수 있는 자유를 최초로 부여한 것입니다. 그리고 ‘빠삐용’ 이름표와 딸랑이 ‘종’을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인근 주민에게 알리고 텔레비전에도 나왔습니다. ‘빠삐용’ 표시와 ‘종’은 쟈넨을 살리기 위한 표시로 붙여준 것입니다.
출애굽기 21:6에 보면 자유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종이 스스로 표시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그 표시로 귀를 뚫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제사장에게도 일종의 표시인 기호와 표지를 주셨습니다(출 13:9). 그리나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하는 문신을 금지하셨습니다. “죽은 자 때문에 너희의 살에 문신을 하지 말며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28) 유대인 남자면 다 행하는 할례도 일종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흔적은 이런 율법적인 할례나 표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받았던 흔적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고후 11:23-27보면 “23 …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 합니다.
저에게 팔이 구부러진 것 만 아니라 손목 등에 작은 상처하나가 나 있습니다. 이것은 C국 선교여행 때 받은 상처입니다. 그런데 이 흔적을 보면 그 때 일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흔적이 없는 사람은 기억이 없습니다. 흔적이 없는 사람은 증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어야 예수를 증거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께서 표적 보여주시기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마 12:38-39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들의 눈요기를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사탄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예수께 표적만 보여달라고 하면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됩니다. 왜 예수께 표적은 원했습니까? 예수를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이미 이전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을 뿐 아니라 나병환자(마 8:2),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을 위한 요청에 의하여 말씀으로만(마 8:8) 고치신 적이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왔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믿지 못할 사람은 어떤 표적을 또 보여주어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 설교제목을 혼동하면 안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예수님께 또 해보라는 식의 표적을 구하는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기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게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흔적입니다. 시 86:17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약 시대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 이제 하나님께 더 이상의 표적을 원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표적 보여주실 것을 원하기보다는 내가 그리스도의 표적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다 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이 위에 더 이상 보여주실 것이 없습니다. 다 이루신 것입니다. 다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적과 표적은 주님께서 보여주실 차례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 보여드려야 할 차례입니다.
미국에서 활동적인 목회를 하시는 노스포인트 미니스트리(North Point Ministry) 설립자인 앤디 스탠리(Andy Stanley)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의 아버님도 목사이십니다. 어느 날 오후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면 의례 생기는 긴 침묵을 깨고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버지 사역을 하려면 반드시 소명을 받아야 하나요? 아니면 자원해서 해도 되나요?”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글쎄다. 내 생각에는 자원하는 것도 좋겠구나.” 하셨습니다. 그리고 앤디도 “나도 자원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은 매주일 15,000명 이상의 성도들에게 설교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성령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아직 내가 은혜를 받은 것 같지 않고 성령을 받은 것 같지 않다면 내가 모르고 있거나 느끼지 못할 따름입니다.
창 46:2 “밤에 하나님이 이상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시고 불러 가라사대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삼상 3:3-4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성경이 무슨 책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찾고 계신다는 증거의 책입니다. 이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야곱을 부르셨던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억지로 흔적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할례로 표시했다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께 응답하여 살아갈 때 주님을 믿고 따를 때 흔적을 같게됩니다. 때로는 아픔이 있습니다.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광의 상처입니다. 은혜의 흔적입니다.
피아니스트 중에 김지미라는 분이 있습니다. 하루에 8시간, 10간씩 연습하니까 어떤 때는 집어던지고 싶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연주회가 끝났을 때 한 분이 오셔서 “좋은 문화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때 자신이 하는 일이 문화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진정 그 문화라는 것을 즐기지 못했다는 겁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하나님을 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경험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입니다. 여러분 기뻐하세요. 즐겁게 행복하게 사세요. 이제 우리의 흔적은 주님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잘 지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들게 하듯 잘 보낸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맞게 한다.”(레오나르도 다 빈치)고 했습니다. 이제 세상에서 받은 아픈 상처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흔적만을 남기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