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본문 : 마태복음 16:13-17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어려운 신학을 꼬집는 일화로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난해한 신학자인 폴 틸리(Paul Tillich)가 주님이 이 땅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 날에 예수님를 만났다면, 그리고 예수께서 가이샤랴 빌립에서 베드로에게 물었던 중요한 질문을 폴 틸리에게 묻는다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폴 틸리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존재의 존재론적 근거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의 목적론적 근거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뭐야!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려운 말이나 신학이 마치 수준 있는 신학이나 설교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질문에 베드로는 짧게 그리고 핵심 있는 내용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이 주앙교회 성도 여러분의 고백도 되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인생의 의미나 삶의 목적을 찾고 싶어하는 깊은 갈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직업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 ‘되느냐’ 보다 무엇을 ‘하느냐’에 가치를 둡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쉬지 않고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무엇을 소유했는가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짓습니다. 이들은 새 차, 새 집 또는 새 옷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경제적인 문제에 연연하고 마음을 졸입니다. 항상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뿐인 진리는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존재는 그저 광활한 우주를 떠다니는 잡동사니에 불과합니다. 예수를 바로 아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우리의 가치관 목적의식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여론
예수님께서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회적 평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예수는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얻은 지식으로 예수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는 나의 지식으로 또는 사람의 지식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소위 “4대 성인”중의 하나라고만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TV나 신문에 불교행사에 카톨릭 신부나 개신교 목사가 참석해서 예불하는 행위를 보여주며 “종교계가 마음을 합하고 있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이런 영향하에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종교다원주의 사상에 물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이것을 반대하는 개신교 목사는 이 시대를 거스리며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하는 목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의 마음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성인중의 한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2000년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복음주의 자들이 209개국으로부터 1만 7천여 명이 모여 자신들의 복음주의적 입장을 재 천명하는 “암스테르담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이 선언문의 내용들 속에는 ‘우리는 타종교인들에게도 예절 있는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복음 전도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타 종교인에 대해서 배타적 태도로 접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 동네로 통행하시고 유대인으로서는 만날 수 없는 여자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대화하셨습니다. 타 종교인과 대화 할 수는 있으나, 우리는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복음의 유일성(uniqueness)의 진리를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세상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의 대답을 잘 보십시오.
14절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나 여전히 예수를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모두 사람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 또는 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몰라본 사람들
“가로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16:14)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각각 느끼는 데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따라 다녔습니다. 창세기부터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수많은 제사장과 왕들을 통해서 그렇게 누누히 약속하시고 약속하셨던 분이 실제로 오셔서 그 증거들을 또한 그렇게 많이 보여주셨건만 양을 잡으면서도, 성경을 읽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것의 실체 되신 그 분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이들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포로로, 노예로, 식민지로 고통을 당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예수를 몰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비슷하게 봤지만 그들은 전혀 틀리게 보고 있는 것이고, 그 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희미하게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 –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채찍질하시며 정화시키시는 모습과, 부정과 부패를 일삼으면서 형식과 제도에 빠졌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독사의 새끼들아”하며 책망하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약대털옷을 입고 광야에서 외치면서 헤롯 같은 권력자의 비리를 꾸짖으면서 시대와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세례요한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는 그러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를 개혁하려고 오신 게 아닙니다. 비슷하게 생각을 했지만 전혀 예수님을 잘못 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썩어빠진 제도와 권력을 향해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드셨던 민중의 지도자로 여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한 일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오신 분은 아닙니다. 아무리 제도를 바꾼다 해도 하나님을 떠나 죄와 저주와 사단에게 빠져 있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로 사회를, 세상을 개혁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 – 5병2어로 오천명을 먹이고, 물위를 걸으시고, 소경을 고치시고 하는 엄청난 신비한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리고,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구약시대 최고의 신비한 능력을 소유했던 엘리야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러 오신 엘리야로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시기 위해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신비한 능력을 보이시기도 하셨지만 그 능력자체를 보이시기 위함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을 신비한 능력을 체험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수련회를 하면 무엇인가 불을 받아야 하고, 방언을 하지 못하면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계속 무언가 신비한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일생을 보냅니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쓰러지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비한 어떤 체험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정말 잘못 본 것입니다.

예레미야 – 민족과 국가의 아픔과 고난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눈물의 선지 예레미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셨던 예수님을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예레미야로 여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창녀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 가난한 자들과 함께 식사하셨으며 불쌍한 고아인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 유하시기를 기뻐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박애주의를 실천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본 받으라고 오신 게 아니십니다. 예수를 믿어서 하는 가장 고귀한 일이 마더 테레사와 같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돕는 자선사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체 자선만이, 박애주의만이 최고의 선인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 가난을 조장하고 빈곤을 가져다주는 근본적인 존재한테 이용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박애주의를 보여주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레미야로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단히 착각을 한 것입니다.

선지자중의 하나 – 산상보훈을 비롯해서 성경을 풀어서 권세 있게 말씀을 전해 주실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훌륭하게 전달 해주는 훌륭한 선지자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훌륭한 가르침과 삶의 지표를 제시하시는 인생의 선생님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이요 선지자적인 요소가 있으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단히 착각한 것이고 잘 못 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단순히 우리가 따라야 되고 실천해야될 삶의 규범을 제시하시고 가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행위자체와 말씀자체를 지키고 실천하는 게 기독교라면 기독교도 이슬람교나 불교나 똑같은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들도 마호멧을 석가모니를 존경하고 그 들이 제시한 삶의 규범과 원리와 실천강요를 따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호멧처럼, 석가처럼 우리에게 규범을 던져주시고 하늘나라에 가신 분이 아니십니다. 종교를 창설하시고 교리를 실천하고 율법과 규범을 실천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선생으로만, 선지자중의 하나로만 여기기 시작할 때 기독교는 종교에 빠지고 제도에 빠지고 교리에 묶이게 되고, 생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형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율법에 빠지고 윤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천할 무언가를 가르치고 떠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생명으로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관심은 이 질문으로 대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한 제자들에게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못된 버릇하나가 있습니다. 눈치입니다. 아마 전 세계에서 눈치하면 한국사람일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눈치가 너무 빨라 속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내 심중의 마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고 하셨습니다. 나의 고백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베드로의 고백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디서 배워서 알게된 것이 아니며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친히 역사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개혁가도 박애주의자도, 신비운동가도 아니신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수 천년동안 하나님의 가슴속에 감취었던 비밀이 터지는 순간이요. 수 천년 동안 그의 조상과 선진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요. 모든 고통받고 저주가운데 있던 인류가 기다리던 소리였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이 단어 하나에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화가 다 들어있습니다(골 2:3). 그리스도안에 하늘과 땅이 통일됩니다(엡 1:10). ‘그리스도’이 단어 하나에 창 1장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계시록 마지막에 나타나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모든 권세가 다 포함된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이 이름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 후에 세상은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이 발견하고 미친 듯이 전세계로 들고 뛸 수밖에 없었던 그 이름 ‘그리스도’입니다. 원형경기장에 죽어가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칼과 창 앞에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도 찬송하게 만들었던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그리스도
우리는 눈치가 빠르니까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카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도 받았고 “이제 따라만하면 되지”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람마다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각기 다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의사로 믿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인정이 많으신 은행장쯤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입학 시험장에서 인심이 후한 체점관이나 심판관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세상의 출세와 성공의 수호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범 답안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가 필요할 때만 찾아가는 병원이나 은행으로 생각하고 내 사업의 방패막이로 생각하면서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는 때로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결국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을 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필요할 때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예수와 함께 한 몸이 되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워싱턴이 대통령이 된 후의 일입니다. 한번은 각료들과 고향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각료들은 인사를 드릴 때에 너무 송구스러웠습니다. 대통령의 어머니로 하여금 구차한 일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각료들은 대통령에게 건의하였습니다. “각하,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 나라의 어머니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일하게 하고 어머니는 쉬시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통령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그런 의견을 건넸습니다. 그때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대통령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께서 일하라 하셨으므로 나에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 나는 일할 것이오.”

여러분! 손을 가슴에 얹어봅시다.
진심으로 예수가 나의 주님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들을 차례입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행위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행위를 쉽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 봉사하는 것, 헌금하는 것, 전도하는 것, 선교하는 것은 모두가 행위입니다. 이것이 다 아무 것도 아니란 말씀입니까?
요한계시록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6.25를 기억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0. 6.25를 기억하라) / 본문 : 마가복음 8:15-18

“15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16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오늘은 6월 25일입니다. 56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새벽3시 바로 오늘 주일날 새벽에 야음을 틈타 3.8선을 넘어 이북의 공산당이 소련제 탱크 500여대와 항공기 200대 보병 20만 명으로 전면 남침을 하였습니다. 남쪽에서는 전혀 전쟁을 막을 만한 무기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무참히 당했습니다. 소총으로 탱크를 막아야 했습니다. 방법이 없었습니다. 수류탄을 몸에 묶고 돌진하는 탱크를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56년 전 이 민족이 겪어야 했던 놀람과 쓰라린 아픔을 생각하면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안됩니다. 이런 민족적 아픔을 생각지도 않고 오늘날 소위 대학 교수라는 어떤 분이 누가 침략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막심하였습니다.
대략 300만명이 살상되었고 그 중에 전투원의 전사가 21만명, 외국군 전사자가 22만명, 인민재판 등으로 인하여 학살당한 양민은 13만명, 치납 8만5천명, 행방불명 30만명, 남편 잃은 미망인이 29만명, 고아 4만명, 교역자(목사)가 535명이 학살되고, 교회가 2,122개소가 파괴되었습니다. 여러분! 교회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아십니까? 주님의 피와 살과 같은 교회입니다.
실로 피와 죽음으로 점철된 전쟁이었습니다. 6.25 56돌을 맞아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오늘 성경 본문 말씀과 함께 우리 민족의 수난을 더듬어 생각해 보는 가운데 이와 같은 민족적 수난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6.25 전쟁 당시 충남에서 강경 침례교회를 담임하셨던 이종덕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조용하던 강경 지방에 어느 날 공산당이 들이닥치자 마을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모두들 공산주의자가 된 듯이 행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던 사람들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목사님은 후배인 김장배 목사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부탁하며 두껍고 큰 종이를 가져왔습니다. “목사님, 이 두꺼운 종이로 무엇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내 명함을 만들려고 하네.” “명함이요? 생전 명함 한 장 안 지니시다가 갑자기 명함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종덕 목사님은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후배 목사에게 큰 종이를 명함 크기로 자르도록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그 명함종이에 ‘강경 침례교회 목사 이종덕’이라고 쓰도록 했습니다. 후배 김장배 목사는 시키는 대로 쓰면서 다시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이 명함을 어디에 쓰시려고 하십니까?”
“이 명함을 가지고 다니면서 경찰이고 공산당원이고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나눠주려고 하네.”
“아이고 목사님, 다른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봉변이라도 당하시면 어떡하려구요.” “아니 이 사람이! 자네도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운가? 내가 복음을 전하는 목사라는 사실을 숨겨야 할 이유가 어디 있나?” 목사님은 그 명함을 뿌리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 공산당의 총탄에 맞고 순교하셨습니다.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6.25 전쟁이 발발한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삼상 17:47). 이 민족의 죄악을 심판하고 경고하시기 위해서 6.25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첫째로, 이 민족은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습니다. 평양은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할만큼 교회가 부흥했던 도시였습니다. 1907년 1월 16일 한국 교회 최초의 성령강림이 있었던 곳이 평양장대현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일제 시대 때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를 하고, 성도들에게 이를 권장하기까지 했습니다. 교회의 종을 떼어서 일본의 전쟁무기를 만드는 데 헌납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주의 종들을 파면했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 집어넣어서 온갖 고문을 당하여 죽게 했습니다.
둘째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의 죄도 모자라서 해방을 전후로 치열한 교권 싸움과 교회 분열이 한국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5만 1천여 교회, 10만 주의 종, 1,000만 신자를 가지게 되었다고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천년 동안 정교회 국가였던 러시아에서 제일 먼저 공산주의가 일어났고, 종교개혁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 히틀러가 나타났습니다. 교황청이 있는 이태리에서 독재자 뭇솔리니가 나타났으며,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평양에서 공산주의가 일어나서 남한을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개인, 교회, 국가 모두에게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다시 전쟁의 징계를 받지 않도록 이 나라의 빛과 소금이 되며, 민족의 파숫군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바 되려니와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겔 33:6-7)라고 경고하십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므로,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야 합니다(엡 6:12). 그럴 때 이 민족이 변화되고, 이 땅에서 전쟁이 사라지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하나됨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본문 15절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예수께서는 비록 당신이 목숨을 내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그 시점이 되어서는 스스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사역하시는 동안에는 당신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들로부터 경계했습니다. 경계로 번역된 원문은 diastevllomai(디아스텔로마이)로 “따로 떼어놓다”입니다. 악한 것은 우리가 잠시 방심하는 사이에 들어옵니다. 사단은 그것을 노립니다. 전방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군인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깨어있지 못하면 어느새 적군이 내 목을 베어갈지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수님 때의 경계의 대상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헤롯당은 예수님 탄생 때부터 예수님을 죽이려고 무고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인 집안입니다. 바리새인은 어떻게든 예수님의 흠을 잡아죽이려고 하는 무리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 믿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에도 바리새인과 헤롯당원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공산주의가 그렇습니다. 미국은 모든 정치의 자유는 허락하되 공산당은 헌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공산주의가 하나님을 대항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공산주의는 정교회를 핍박하고 가두었습니다. 지금도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지 못하게 방해를 합니다. 중국의 공산당은 더 핍박이 심합니다. 베트남의 공산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산국가가 하나님을 자유롭게 믿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나라가 한나라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이며 인간 최악의 정치집단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철이 없어도 공산주의를 옹호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곳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사람의 생명을 쉽게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목적으로 위해서 사람의 생명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사람의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공산주의 사상이 들어오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과 같은 것입니다.

6.25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안타까운 심정의 표현을 이렇게 하셨습니다. 본문 18절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왜 기억을 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많은 절기를 지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절기의 목적은 모두가 하나입니다. “또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 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민 10:10)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때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이스라엘민족에게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바로 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을 광야생활 가운데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6.25노래에도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이라고 노래합니다. 망각의 동물인 인간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운 역사나 불행했던 과거는 빨리 잊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과거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40년 광야 생활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6.25를 통해서 역사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베트남이나 중국처럼 공산화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화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북한이 침공했을 때, 유엔 파병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소련 대표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로 오던 중 이유 없이 차의 시동이 꺼지는 바람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여 유엔군의 한국파병이 결정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를 사랑하시고 이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 것입니다.
6.25는 자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회초리입니다. 성경에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6․25를 맞이할 때마다 자녀들에게 지난 잘못을 이야기해 주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가르쳐야 합니다.

다시 6.25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6.25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입니다. 이 지구상에 오직 우리민족만 분단된 채로 남아있습니다. 통일을 빨리 앞당기고 이 민족이 하나되는 길을 오늘 본문 17절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떡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일어서는 것은, 6.25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이 나라에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6.25전쟁 이후 육체적, 영적으로 굶주림에 허덕이던 이 민족이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능력과 기독교 신앙 때문입니다.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하는 긍정적인 신앙과,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적극적인 신앙이 심겨졌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눈에 아무 증거 안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풍성한 축복을 받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벧전 1:21).

이제 조금 살만해 졌다고 하나님을 버리면 망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배가 불러서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같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말씀처럼 사단은 다툼으로, 전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에 힘을 쏟습니다. 성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예수님은 성령님은 우리에게 화평을 주러 오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이 화평을 이룹니다.

최근 미국 기독교 언론보도에 의하면 정기적으로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성인의 비율은 선진국 중에서 미국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시간 대학이 최근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매주 드려지는 예배나 종교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미국인의 비율은 전체성인 미국인 인구의 44%인 것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이는 전 인구의 38%인 캐나다와, 27%인 영국 그리고 21%인 프랑스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며, 이밖에 독일은 14%, 러시아는 25%인 것을 각각 조사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는 민족이 축복을 받습니다. 미국은 세계제일의 선진국이지만 동시에 여전히 제일 많은 사람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미국이 세계제일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내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10)
 

진정한 축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49. 진정한 축제) / 본문 : 누가복음 5:27-32

“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지난 6월 13일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우리 나라와 토고경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군포시 산본에 사는데 저녁에 사람들이 어디론가 몰려가는 것입니다. 3단지 뒤에 운동장이 있는데 그곳에 대형스크린을 설치해서 함께 응원하는가 봅니다. 한번 가봤더니 사람들은 붉은 악마의 티를 입고 또 요즘은 머리에 불 들어오는 뿔 하나씩 달고 응원 열기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붉은 악마라는 이름도 문제가 되지만 사람들이 너무나 공허하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전 세계인이 열광하는 것이니 우리도 뒤질세라 함께 응원하며 애국심을 키워 나가는 것이라면 뭐라 할 것은 없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한 축제을 벌여야 하는 것은 축구경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중풍병자 집에서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린 병자를 고치신 후의 일입니다. 중풍병자가 얼마나 사람이 많았는지 지붕을 뚫고 그의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내렸습니다. 본문 27절 “그 후에 나가사”는 바로 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그 집에서 나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 집에서 나가시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님 주위에 가득했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말씀과 축복을 받기 위해서 따라 다니는 사람, 자기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무리를 뚫고 들어오려는 사람들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흠과 티를 잡으려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대제사장의 명령을 받고 예수님을 늘 감시하며 책잡으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이런 무리를 뒤로하고 잡시 밖으로 나간 예수님께 보인 것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설명을 해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만 하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이 한마디가 레위의 인생을 결정지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의 마음을 훑고 지나갔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의 이 음성이 들리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 이 지역은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도급제도가 시행 중에 있었습니다. 이 지역의 세금은 로마가 세입을 배당한 ‘헤롯 안디바’에게 바쳐졌습니다. 레위가 걷은 세금은 인두세(人頭稅)라기 보다는 통행세나 일종의 관세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는 헬라와 로마까지 넓게 퍼져있었습니다. 저도 가끔 외국에 가는데 어느 나라를 가든지 입국심사대와 세관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짐이 많으면 늘 세관 통과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런 세관은 상인들에게는 늘 문제입니다. 이 당시에는 무슨 정확한 법적 근거에 의해서 세금을 받았기보다는 세관의 마음대로 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로마가 걷어 가는 세금이야말로 착취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반민족주의자요, 부정직한 집단으로 심한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탈무드(Talmud)는 세리를 강도들로 규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인 이 레위인을 부름으로 자신에게 쏟아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책잡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은 반대 세력의 눈치를 살피시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인으로 취급당하는 이 레위를 향해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레위
예수님의 부름에 28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음성을 듣는 순간 이제 더 이상 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를 감쌌습니다.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기회는 일생 일대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입니다. 더 지체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부자를 한번 더 부르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청년은 자신의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마 19:22).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누가 제일 부자였을 것 같습니까? 당시의 세리가 누렸을 사회적, 직업적 위치를 생각하면 레위만한 제자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레위의 조용한 이 선택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물론 자기의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어부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다가도 유사시에는 다시 아무 어려움 없이 본업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하신 것을 알면서도 제자들은 방황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먼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요 21:3) 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와 행동을 함께 한 제자들은 6-7명인데 분명히 여기서 마태는 빠졌을 것입니다. 그는 고기 잡는 일을 해 본적이 없고, 고기 잡을 생각도 없었을 것입니다.
레위가 세리직을 버렸다는 것은 완전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한번 세리직을 버린 사람은 다시 고용될 수 없습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최후의 결단입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비유을 하시면서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 13:46)고 하셨습니다. 레위는 이 진주를 산 것입니다.

예수를 위한 잔치(축제)
29절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같은 본문이 레위(마태) 자신이 쓴 마태복음 9:10절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라고 나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상당히 축소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잔치가 “큰 잔치”였다고 말합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지만 레위는 냉혹한 체념의 심정이 아니라 깃발을 휘날리며 자신의 생의 전환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버린 세관직업, 그리고 그곳에서 얻게되는 수입 등에 미련이 없었습니다. 레위의 잔치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주신 예수님이 이 축제의 주인공이십니다.
둘째,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을 열었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 선언을 한 것입니다. 결혼식 올리는 것이 불편하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잔치를 하고 사는 것하고 그냥 사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비록 이것이 형식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마태는 이제 전혀 예전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처럼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마태 역시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각오를 다진 것입니다.
셋째,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이 자리에는 예수님의 흠을 잡으려는 세리들도 물론 있었습니다만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있었습니다. 이 사람들 중에는 마태가 초청한 자신의 동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켜주신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 레위의 집에 간 이 행동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사건인지 베드로의 경우를 보면 압니다. 어느 날 베드로에게 환상이 보였습니다. 큰 보자기에 쌓인 것이 베드로 앞으로 내려왔습니다. 열어보았더니 그 안에는 짐승, 기는 곤충, 공중의 새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베드로야 잡아 먹으라”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먹을 수는 없나이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 일이 있은 후 베드로는 이방 군인이었던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 그 집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사도행전 10장).
베드로가 이런 사고방식을 가졌던 것을 보면 당시에 죄인의 집에 가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레위가 마련한 이 초청에 기꺼이 응하셨습니다. 오늘도 죄인임을 고백하며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 속에 주님은 오십니다.

병든 자들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남이야 누구와 밥을 먹든 무슨 상관입니까? 사실 예수님이 자신들과 상관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면 그만 아닙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자신들의 주로 받아들인다면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왜 비방해야 되는지요.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의 행동이라기 보다는 사단은 이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질문은 예수께 하지 않고 제자들을 비방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할 때 레위 같은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완전한 수용을 의미했습니다. 질문을 받은 것은 제자들이었으나 대답은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대답하셨습니다. 3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오심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롬 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신 것처럼 이 땅의 의인이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병든 사람들입니다. 죄지은 육체가 병들어 죽게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 또한 병들었습니다. 이것을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오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거스틴은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고 단지 두 가지 죄인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또 하나는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입니다. 둘 다 죄인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소설 “주홍 글씨”가 생각납니다. 여기 나오는 여인은 죄인의 표시로 가슴과 등에다가 빨간 글씨[A]자를 붙이고 다닙니다. [나는 죄인이오]라는 표시입니다. 이 여인은 오히려 마음이 편하고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죄를 짓게 한 남자는 법복을 입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 남자의 고민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되어서의 일입니다. 길을 지나는데 앞쪽에서 나병 환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복음도 전하면서 기도해주고 싶은데 왠지 더러운 생각에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아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주앙교회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48. 주앙교회는) / 본문 : 마 17:1-8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작곡은 프랑스인이 하고, 연주는 독일인이 하고, 노래는 이탈리아인이 부르고, 감상은 영국인이 하고, 표는 유태인이 팔고, 돈은 미국인이 지불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국민성을 음악에 비유하여 풍자한 말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독창력에 있어서는 탁월합니다. 모든 유행을 프랑스가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인의 국민성엔 실천력이 있어서 매사에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탈리아인들은 열성적으로 카루소식으로 노래를 부를 때, 신사의 나라 영국 사람들은 감상을 합니다. 이 때 유태인들은 상술에 뛰어나기 때문에 돈벌이를 하고, 부자나라 미국 사람들은 대체로 바가지를 쓴다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사람은 어느 부류에 해당할까요? 우리 속담에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말이 있는걸 보면 공짜 초대권은 한국사람이 가지고 들어올 겁니다. 그런데 이런 한국사람이, 공짜만 좋아하고 원조를 받던 나라가 변했습니다. 예수 믿고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현재 전세계에 제일 많아 나가있는 사람은 중국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일 많은 국가로 나가있는 나라 사람은 대한민국입니다. 중국 사람은 돈이 되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은 선교할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습니다. 중국사람 세 사람 모이면 중국집이 생기고 한국사람 세 사람 모이면 교회가 세워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떠나지 않는 민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주앙교회도 이제 심기 시작했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의 터 위에 세우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터 위에 새롭게 세워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앙교회는 주님만을 바라보는 교회입니다. 주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에서도 빛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형되신 예수님을 세 제자가 보았습니다. 나무나 황홀한 광경을 목격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기서 그냥 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께서 원하시면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4절)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주께서 원하시면”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답을 하셔야 하는데 응답은 하늘에서 내려졌습니다. 성자 예수께서 하실 말씀을 대신해서 아버지 성부이신 하나님이 대답해 주셨습니다. 5절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희 말을 들으라”는 것은 모세, 엘리야 또 다른 사람이 있을 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중심이 예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원문에는 kai; ijdou;(카이 이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있던 제자들은 떨었습니다.

9일(금) 오후 200여명의 승객을 싣고 제주도를 떠나 김포에 착륙할 예정이던 아시아나 항공기 OZ 8942편이 비행 도중 낙뢰에 맞아 조종석 앞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기체 일부분이 심하게 파손되는 ‘아찔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 비행기는 에어버스 321기종으로 경기 안양시 인근 1천피트(약 300m) 상공에서 낙뢰와 우박을 맞았습니다. 이 충격으로 조종석 앞부분(노즈 레이덤)이 떨어져 나가고 엔진 커버 부분에 구멍이 났으며 조종실 앞 창유리가 심하게 깨졌습니다.
조종사는 즉각 김포공항 관제탑에 비상 착륙을 요청했고 랜딩기어(항공기 바퀴) 이상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재 이륙을 시도하며 김포공항 상공을 1회 선회하고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승객들은 숨을 죽이고 떨었을 것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돌아오다가 김포공항에 착륙하던 비행기가 활주로를 잘못 찾았나 봅니다. 그래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때 잘못하면 그대로 땅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답니다. 그런데 무사히 하늘로 올라가고 다시 재 착륙을 시도해 무사히 내려앉았습니다. 그 때 승객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기도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하늘에서 나는 우뢰와 같은 하나님의 소리에 떨고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6절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7절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나서 눈을 떴습니다. 8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눈을 뜨는 순간 그 앞에는 예수님이 계셨고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인다는 것은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늘 보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여러 사람이 보였을 때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구약의 인물들과 함께 같은 선상에서 보고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아들로 보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것이 주앙교회입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따라가기 위해서 주앙교회는 4가지의 표어 “① 말씀으로 은혜가 가득한 교회 ② 기도로 성령이 충만한 교회 ③ 선교로 기쁨이 넘치는 교회 ④ 봉사로 사랑을 나누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것이 주앙교회가 추구하는 목표요 목적입니다.

말씀으로 은혜가 가득한 교회
한눈이 실명해서 가짜 눈을 시술 받아 다닌 영철이가 있었습니다. 요즘 가짜는 진짜와 거의 구분이 안될 정도로 보인답니다. 그리고 영철이는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인이 영철이 한 눈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왜 결혼하기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고 따졌습니다. 싸움이 커져서 사네 안 사네 하고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영철이가 당신이 결혼하기 전에 내 한눈이 가짜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부인은 그런 적이 없다고 우깁니다. 영철이는 그 증거가 있다고 하면서 예전에 보냈던 연애편지를 꺼냈습니다. 편지에 여러 이야기가 써 있었지만 영철이가 읽은 대목은 이것입니다. “한눈에 반했어요” 그러니 당신이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큰일납니다.
교인들 중에는 “후딱신자”가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성경한번 안 보다가 책상이나 구석에 방치되어 먼지가 쌓여있는 성경을 꺼내어 입으로 “후…!”불고 손바닥으로 “딱!”쳐서 먼지를 털어 버리고 오는 분들을 “후딱신자”신자라고 합니다. 또한 교인은 창세기와 마태복음 부분만 새까만데 나머지 성경은 깨끗한 분들입니다. “작심삼일형”입니다. “후딱신자”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지만 결심하고 계속하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대개 마태복음 1장을 읽어나가다가 신경질이 납니다. 계속해서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라는 구절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이 “쓸데없이 많이 나았구먼” 그럽니다. 그러나 조금만 인내하면서 더 읽어보면 “이것이 예수님의 족보이구나” 그리고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그리고 여인도 들어갔구나 하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이 족보에 들어갈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서양인이나 동양인이나 백은, 흑인, 황색인 할 것 없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누구나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당신이 계신 곳으로 인도하는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로 성령이 충만한 교회
성경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기도한 사람들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오게 되었으며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버리고 기도하는 사람은 선택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창 20:17) 모세는 출애굽 할 때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기도하니”(출 8:30) 그리고 타락한 백성을 위해서 불뱀을 매달아 놓고 민수기 21:7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신명기 4: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가까이 하십니다. 한나의 기도로 사무엘이 태어납니다. 사무엘상 2:1절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기도로 나은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됩니다. 늘 하나님과 대화하듯 기도한 다윗은 새벽을 좋아했습니다. 시 5편 3절에서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례미야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렘 29:12)라고 들려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기도를 안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버려 두고 바깥으로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려고 합니다. 그 삶의 길은 기도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8절에 보면 어린양이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는데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귀중하게 보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들도 여기에 있기를 바랍니다.

주앙교회 표어 중에 “① 말씀으로 은혜가 가득한 교회 ② 기도로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면 나머지 “③ 선교로 기쁨이 넘치는 교회 ④ 봉사로 사랑을 나누는 교회”는 저절로 됩니다. 말씀과 기도가 충만하면 그 다음에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선교하고 봉사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제대로 심겨지고 기도하게 되면 변화됩니다.
‘2006세계선교대회’가 열리는데 선교사님과 선교전략가들만이 모여서 하는 대회가 “선교전략회의(NCOWE IV)”에 다녀왔습니다. 여기서 어떤 분이 진짜 미전도 종족은 “한국에 있는 목회자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현재 한국교회가 선교에 15%밖에 참여하지 않는데서 나온 조크입니다. 왜 선교하지 안습니까? 성경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 그것은 선교였습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 그것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증거 그것은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우리에게 참 빛이 없으며 길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시 73편에 보면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된다” 그랬습니다. 음녀가 이리저리 헤매면서 돈 한푼 얻기 위하여 그저 웃으며 옷을 갈아입고 많은 사람의 품안에 안기우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축복입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귀한 길은 한길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이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아멘.

내 마음의 눈에 예수님만 보인다면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왜 교회에 모입니까? 어떤 분은 “집에서 예수 잘 믿으면 되지 왜 교회에 가느냐”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은 자신이 예수 믿고 천국은 가고 싶으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명령은 실천하지 않으려는 분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인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며 선교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목사로 세워주신 목회자와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버려진 고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오늘날에는 목사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주님께 안전하게 인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주앙교회 성도여러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46.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본문 : 마가복음 9:14-29

“21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 기도하시고 변화된 모습이 보였을 때, 산 아래에서는 제자들이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남아있는 제자들 앞에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려고 제자들은 그 동안 사용했던 여러 방법을 사용해 가며 고쳐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똑 같았습니다.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는 똑똑한 서기관들이 질문 공세를 퍼붓습니다. 난감해 하고 있을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려고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남아있던 백성들이 한 행동이 출애굽기 32장 나옵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아론이 주동자가 되어서 자신들을 위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듭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백성의 이와 같은 행동을 보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십계명을 던져 깨뜨렸습니다. 모세의 인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한 행동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래도 구약의 이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병은 고치지 못했지만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려고 하는 사람은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포기한 사람입니다. 지금 공부를 못하지만 공부를 하려고 하는 학생은 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개입하시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처음부터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고 있으면 주님이 도와줄 기회가 생기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되십시오.
본문 19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22절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그랬습니다.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은 모든 것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열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하늘 문을 열면 그곳에 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면 다 되는 것입니다. 그 열쇠가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고백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것을 알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고 너는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재자들의 믿음이 없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후에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 16:14) 여기서는 믿음이 없는 것과 완악한 것이 함께 나타납니다. 바꾸어 말하면 완악한 자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온유한 마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온유함은 믿음을 얻는 좋은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의심합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예수님을 확인했습니다(요 20:27). 믿음이 없다는 것, 마음이 완악한 증거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 안에 거하십시오.
영어에 인과 아웃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인은 모든 게임에서 사는 것이고 아웃은 죽은 것입니다. 원문에 영어에서 말하는 인과 같은 단어가 있습니다. 엔(ejn)이라는 전치사 단어입니다. 이 뜻은 “…안에.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나오는 모든 곳은 좋은 성구가 있습니다. 믿음과 연결된 단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몇 개의 성구만 찾아보겠습니다.
롬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딤전 1: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모든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엔(ejn), 안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만 생명이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만 소망도 사랑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간곡히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22절), 이 아버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소리를 지르며 “…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믿음을 달라고 간구 할 생각은 안하고 시험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아버지의 태도는 적극적이었습니다. “소리질러”(kravxa”:크라크사스)는 마치 반항의 고함처럼 크고도 계속적으로 소리를 지른 것을 말합니다. 후기의 사본 중에는 ‘눈물로’라는 말이 첨가된 것이 있습니다. 이 아버지는 간절했습니다. 아마 이 아이의 문제로 가정이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이 아버지의 소원이라면 아들이 이 귀신들림에서 벗어나는 것일 겁니다.
이 때 적극적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까? 아니면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입니까? 믿음을 간구한 것도 귀신들인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이 아버지가 제일 이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자식을 위해서 제일 간절한 사람입니다. 부모님 되시는 분들은 특히 명심해야 합니다. 나의 자녀를 위해서 부르짖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아버지와 같이 주님께 간구하세요.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기도 외에는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려다 땀만 흘린 제자들은 조용할 때 예수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28절)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준 일이 있습니다. 지금 이 아이가 처음이 아닙니다. 막 3:14-15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 여행으로 파송하시면서 이미 병 고칠 수 있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잘 되던 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당황한 것입니다. 은사는 지속적으로 기도함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은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도 지킬 수 없습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는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고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부흥한 비결에 대해서 말할 때 새벽기도와 무릎꿇고 기도한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기도가 식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할 일 중에 제일 귀한 것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리석은 사람, 약한 사람, 멸시받는 사람 등, ‘부정적 자질의 사람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모세가 부름을 받았을 때는 80세의 늙은 목자였습니다. 다윗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양치는 어린 소년이었고, 요셉은 노예였으며, 다니엘은 포로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중요한 인물들을 부르실 때는 부정적인 측면까지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앙교회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그리고 결코 못할 일도 없습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성장시켜주는 기도입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갑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에 화재의 불길로부터 구조되었던 경험을 회상하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급격히 세속화되어 가는 영국 교회에 ‘개혁’이라는 소명을 위해 주께서 자기를 살리신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산본지역 뿐만이 아니라 선교지의 한 나라들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다. 가슴이 불타오르는 믿음과 열정적인 기도가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요일 5:4절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무디(D.L. Moody)는 “믿음은 최대의 것을 얻게 하며, 사랑은 최대의 역사를 이루게 하고, 겸손은 가장 많은 것을 보존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웁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공산주의는 사람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서로 감시하고 고자질합니다. 이런 사회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마세요. 믿음을 가지세요.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 살 수 있습니다. 결코 우리의 시간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간은 가치가 있습니다. 보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상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나 자신 뿐만이 아니라 교회가 가정이 세워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다시 기도할 것은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겸손히 주님께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47. 예수님을 따라) / 본문 : 마태복음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 4:19, 막 1:17)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따라가면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도 안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도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합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CIS선교사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러시아 노보시비리스크로 떠났습니다. 비행기가 직항이 없기 때문에 다른 도시를 경유해서 가야합니다.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하루를 먼저 블라디보스톡으로가서 기다렸다가 가야하는데 비행기 표를 구할 때 비행기 회사에서 다 알아서 먹여주고 호텔 잡아 준다는 겁니다. 미심쩍어서 두 번이나 확인했는데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만 믿고 가는데 느낌이 이상한 것을 인천 공항에서 집 붙이고 그 쪽 공항사정을 알 수 없어 질문을 했습니다. 짐을 찾을 때, 그리고 어떻게 갈아타는지 등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래서 비행기 타고 승무원에게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비행기를 탔습니다. 걱정을 하고 비행기를 타고 있는데 어떤 분이 다가오시더니 “컴퓨터 선교회 이영제 목사님이시죠”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는 노보시비리스크 김선종 선교사입니다.” 하시는 겁니다. 순간 모든 걱정이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거기서 선교활동 하시다 들어오셨다 다시 가시는 이분만 따라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오신 예수님만 따라가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1)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막 8:34, 눅 9:23)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어떻게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자기 자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 1:30절에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롬 4:2절에서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같은 본문이 누가복음에는 “…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날마다”가 더 있습니다. 십자가는 지고 싶을 때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관계없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했습니다.

3) 다른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요 8:15) 영적인 분별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육체를 따라” 즉 외모로 판단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넘어트리려고 자기 제자들을 보냈습니다.“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마 22:16)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것을 바리새인도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만 외모로서 사람을 판단하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려고 들면 끊임없이 싸움이 일어납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하도 싸우니까 이런 말이 다 있습니다. 술집에서 사람들이 술 먹다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싸우고 있는데 주인이 하는 말이 “여기가 교회인줄 알아!”그랬다는 겁니다. 저는 치아가 좋지 않아 지난번 기둥을 세우고 해 넣을 때 이런 생각이 나는 겁니다.

4)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요 10:4)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만일 예수님의 음성으로 알고 갔는데 만일 그것이 사람의 음성이었다면 모든 것이 잘못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9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찌어다”
이번에 갔던 선교대회 장소는 노보시비리스크인데 그 시에서 한 1시간 정도 들어가면 ‘시비락’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서 선교대회를 했습니다. 말이 러시아를 갔다 왔지 그곳에 갇혀서 진짜 러시아를 다녀왔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아주 외딴 곳으로 주변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숲 속에는 벼룩 같은 벌래(시크락?)가 있는데 사람 몸에 붙으면 거머리처럼 살을 파고 들어간답니다. 실제로 이 벌레에 물린 선교사님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멋있다는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도 한번 못 걸어 다녔습니다.

제가 선교대회에 참석하면 네 가지 정도의 유익이 있습니다.
① 선교사님들을 만나 교재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고생하면서 갔다해도 저는 별 것 아니었습니다. 모스크바, 빼째르부르그에서 만났던 분 그리고 이 노보시비리스크에 제가 두 번째 가는데 10년만에 만난 분, 그리고 기태 형제 먼저 신앙 생활하던 교회에서 보낸 선교사님이 이번 대회 총무를 맡아 일하고 있었고 이분도 우리 사무실을 다녀간 분입니다. 그리고 저희 집사람이 전돌이 성경여행을 주었는데 지금 얼마나 아이들이 열심히 보는지 고맙다고 전달해 달라는 분, 몽골에서, 우즈벡에서, 하바롭스크에서 오신 분들하고 교재를 나누고 이분들을 저를 그곳에 꼭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교재가 있었습니다.
② 영적 충전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인도만 하지 예배 드리는 자로 있기가 쉽지 않은데 예배를 드리며 함께 충전하며 지낸다는 것입니다.
③ 세계를 볼 수 있는 시야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④ 또 하나는 유명 강사님들을 한자리에서 만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 대회가 보통 대회입니까? 아무나 안 부릅니다. 고신의대 양리학 교수님이셨다가 한 달 전에 은퇴하신 강 교수님이 계십니다. 장로님이신 데 같은 방을 사용하면서 정말 많은 교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과 대화 나눌 때 저를 “이 어르신이”그렇게 부르시는 겁니다. 장로님의 고백가운데 “지금도 이런 목사님이 계시네” 저에게 그러시는 겁니다. 제가 다른 이야기 안 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대로 예수님만 보고 따라가려고 설교도, 성경도 그렇게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령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이유는 길 잃어버리지 않고 예수님께 오라고 인도하시는 영을 보내주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고 하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사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CIS선교사 대회에 오신 분 중에 미국 국제제자훈련원 사역을 하는 김홍장 장로님이 계십니다. 여기서 하는 사역이 ‘릭 워렌’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을 가지고 성경공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이 책이 인기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처럼 목적이 분명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책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것을 가지고 교육하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유행 따라가 가는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혹 남들은 무슨 …훈련을 하는데 우리 주앙교회는 아무 것도 안 한다고 우리의 신앙이, 우리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따라가세요.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요 우리의 목표입니다.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베드로와 같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선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질그릇일지라도 그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사람을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우리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러시아 동남쪽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과 가까운 곳에 ‘날칙’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에 처음으로 선교사로 간 사람은 고려인이었습니다. 이 고려인 전도사는 한국선교사님이 훈련시켜서 보냈는데 파송한 선교사님에게 6개월만에 연락이 왔습니다. 고려인 선교사님에게 한 달에 2백불 정도를 지원해 드리는데 이 돈을 노리고 이 선교사님을 죽였습니다. 선교사님이 4일이 넘어서 도착해서 보니까 시체가 그냥 천으로 덮여져있는데, 확인하기 위해서 천을 열었을 때는 시체에 구데기가 득실거렸습니다. 그런데 이 고려인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흐르는 ‘날칙’에 실버 선교사님 한 분이 1년 전부터 사역하고 계십니다. 이분은 4박 5일을 걸려서 기차를 타고 선교대회에 도착하셨습니다. 여성 선교사님 한 분은 100만 명이 있는 도시에서 혼자 사역하고 계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저에게 계속 선교사님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나갈 수 없지만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우리도 죽음을 무릎 쓰고 선교하는 선교사님들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보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45. 네 보물) / 본문 : 마태복음 6:19-21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세계선교지도를 그리는데 국가분류에 어려움을 격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타이완입니다. 타이완은 1911년 10월 10일 중국 본토에서는 역사적인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이 날은 쑨원이 이끄는 국민당이 부패한 청나라를 타도하고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 날입니다. 타이완에서는 이 날을 국경일로 정하고 있으며 혹은 쌍십절이라 하여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경축행사를 벌입니다. 1949년 10월 1일에 이르러서는 뻬이징에서 중국공산당에 의한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자 장개석 총통이 이끄는 국민정부는 대만해협을 건너와 중화민국의 임시 수도를 타이뻬이에 수립, 장차 중국대륙과의 통일을 실현시키는 것을 국가 제1의 과업으로 정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중국 본토의 정치인들은 반대로 늘 기회만 있으면 타이완을 중국으로 편입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타이완의 통화는 뉴 타이완 달러(NT$)입니다. 환율은 현재 타이완 1NT$당 한화로 약 40원 정도입니다. 그리고 타이완은 세계에서 외화보유국이 제일 많은 나라중의 하나입니다. 작은 나라 타이완이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언제 중국 본토에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한 심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늘 비상시를 대비해서 US 달러로 저축해 놓거나 바꿀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지금 사용하는 뉴 타이완 달러는 버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 돈은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에 상황이 변화되어도 필요한 돈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 남북전쟁 말기에 실제로 이런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원래 북부가 고향인 사람이 일 때문에 남부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북부가 이겨가고 있습니다. 만일 남부의 통화만 가지고 있다면 북부가 통일할 때는 남부의 통화가 필요 없어집니다. 그래서 눈치 빠른 사람은 북부의 통화로 바꿀 수 있는 금이나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물질만 가지고 있다가 주님이 임하시면 이 세상의 것은 아무 쓸모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필요한 것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아주 귀한 보물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옛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은행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이기 때문에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땅은 하늘과 반대되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영원한 미래가 없는 순간적이며 변화무쌍한 이 세상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합니다. “쌓아 두지 말라”(Mh; qhsaurivzete:메 데사우리제테)는 현재형입니다. 시제를 넣어 번역한다면 ‘쌓아 두기를 그만 두라’입니다. 이는 그릇된 행위를 단호히 끊어버릴 때가 왔음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하던 행위들을 끊어 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다니고 예전에 하던 행위는 행위대로 합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이삿짐 나르는 날짜를 골라서 갑니다. 결혼할 때 사주봅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예전의 행위대로 계속 쌓아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 “쌓아 두지 말라”는 것은 이 땅에, 현세적으로 보이는 것에 집착하여 최선의 가치와 행복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물질 관을 정리해 봅니다.
① 이 땅에 쌓인 제물과 보화가 최상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② 탐욕이 가득하면 지상의 재물에 애착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모으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③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때는 물질이 우리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습니다.
④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재물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을 풍족히 소유해야만 만족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은 것으로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노벨상은 스위스의 알프레드 노벨이란 과학자가 제정한 상입니다. 노벨은 다이나마이트를 만들어 벼락부자가 된 사람으로 모두가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에 ‘알프레드 노벨 죽다. 인류를 멸망시킬 살상무기를 개발하여 재벌이 된 사람 죽다’라는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깜짝 놀라 신문사에 항의해보니 자기 형님의 죽음이 오보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노벨은 그 오보기사 때문에 삶의 중대한 전기가 왔습니다. 형님의 부고를 잘못 기록한 기사지만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아 훗날 내가 죽고 나면 세상은 나를 이렇게 평가하겠구나’라고 회의가 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다 기탁하고 세계와 역사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한 사람에게 이 상을 주라고 제정했습니다.

이 땅은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서는 좀 먹습니다. 좀(sh;”:세스)은 옷이나 음식을 해치는 일종의 세균을 말하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처지를 가리켜 “나는 썩은 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먹은 의복 같으니이다”(욥 13:28)고 말했습니다.
동록(rust)은 (brw’si”:브로시스) 금속의 부식(corrosion)을 말합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주께서 죄악을 견책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 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각 사람은 허사 뿐이니이다{셀라}”(시 39:11)라고 했으며 이사야는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사 50:9, 51:8)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떠난 부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 5:1-2)고 했습니다.
모두가 이 땅에 쌓아둔 재물이 소리 없이 사라질 것을 말한 것입니다. 물질이 스스로 부패하든지 아니면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집들은 흙벽돌을 쌓아 만들었기 때문에 도적들은 벽을 뚫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외부로부터도 결코 안전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을 원문으로 보다가 번역성경에 나오지 않은 한가지 더 강조되는 단어를 발견했습니다. 호푸(o{pou)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어디든지, 어느 장소든지, 어느 곳에서든지”입니다. 이 단어가 본문에 19, 20절에 두 번씩 21절에 한번 모두 5번이나 나옵니다. 이 땅에 안전한 곳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 숨겨둘 만한 곳은 어디에든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점을 강조했습니다. 이 땅에 피할 곳은 없습니다. 이 땅의 어디에든지 숨길 곳은 없습니다.

하늘에 쌓아 두라
‘땅’과 달리 하늘은 안전합니다. 안전성뿐만이 아니라 영원, 지속성과 거룩성도 있습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하는 것은 쓰레기가 아닙니다. 보물입니다. 보물을 쌓아두어야 되지 여러분 만일 쓸데없는 것들을 쌓아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심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목사와 그리고 유대 랍비가 한자리에서 교회 치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야기 도중에 헌금에 대해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들은 하나같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목사가 말했습니다. “저는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 위에 서서 하늘로 헌금 전부를 던집니다. 그리고 원 밖으로 떨어진 돈은 교회 사업에 쓰고 안으로 떨어진 돈은 제 생활비로 씁니다.”그랬습니다. 천주교 신부가 두 번째로 입을 열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방법을 씁니다만 조금 다릅니다. 저는 한 줄을 그어놓고 헌금을 위로 던져 왼쪽으로 떨어진 것은 하나님 사업에 오른쪽에 떨어진 것은 제가 사용합니다.“ 역시 이 방법이 제일 합당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랍비가 말합니다. ”저도 당신들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약간 다른 방법을 씁니다. 저는 그냥 서서 돈을 위로 던집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거두신 것은 하나님 몫이 되고, 땅에 떨어진 것은 제 몫이 됩니다.“
물질을 뜻 깊게 사용하기 위해서 때로는 저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아놓은 물질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을 뽑으라면 저는 자식에게 물질만을 남겨주는 분을 뽑겠습니다. 이것은 자식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보물이란 여러분이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21절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내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것, 보물은 나의 인격의 중심이 됩니다. 또한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의 지, 정, 의를 지배합니다. 그러므로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마음이 빼앗겨 순식간에 그 사람의 행동과 방향과 가치관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Calvin)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명예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자는 분명 야망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고, 돈을 최고로 여기는 자는 돈의 노예가 되며, 쾌락을 제일 좋아하는 자는 필연코 방탕에 빠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1-2절에서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로 정립하여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둘째는 인간과의 관계이고 셋째는 물질과의 관계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열심히 일하라. 열심히 돈을 모으라. 그리고 열심히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바치라”고 말했습니다. 돈은 벌기도 어렵지만 바로 선용하기란 더 어려운 것입니다. 돈은 바로 사용할 때 빛이 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19절에 보면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말씀했습니다.
왜! 하늘에 우리의 보물을 쌓아둡니까? 그래야 그곳에 우리의 소망이 있게 됩니다. 이 세상의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그 물질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더 소망할 수 있도록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보물을 맡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른 다 됐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44. 어른 다 됐네) / 본문 : 마태복음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부족함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이 행복에서 멀어지는 이유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고립되기 때문입니다(이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은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할 뿐 양보할 줄 모릅니다. 대부분 각 가정에서 이렇게 성장한 아이들이 처음에 유치원을 갑니다. 유치원에 가면 미끄럼틀에서 놀고 싶은데 형들이 먼저 타고 놀고 있습니다. 순서를 기다렸다가 타야하는데 자기가 먼저 타겠다고 우깁니다. 똑똑한 아이들은 뒤를 돌아보고 엄마가 없으면 자기가 힘이 없는 것을 알고 포기합니다. 이것은 마음속에서 스스로 양보한 것하고는 다릅니다. 힘만 있으면 언제든지 자기가 빼앗아 타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나타나면 엄마의 힘을 믿고 계속 땡깡을 쓰는 것이지요.
이것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아이들에게 먼저 선수를 치는 것입니다. 작은 약속을 하고 그것을 지킨 아이에게 “어른 다 됐네.”라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전철을 탈 때도 미리 약속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앉지 말고 서 있자.”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갈 때도 “가게의 물건에 손대면 안 돼.” 대부분의 아이들은 엄마하고 외출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가지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아이에게 말하면 안됩니다. 한가지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게 하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어른 다 됐네.”

예수님이 바로 이렇게 제자들을 교육시키셨습니다.
본문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이 때는 아직 예수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기 전입니다. 이제 막 부름을 받아 온 제자들에게 갑자기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교육적 효과를 얻어내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늘 예수님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셨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월요일에 행주산성을 다녀왔습니다. 일산에 살 때 1년 동안을 그 옆으로만 지나다녔지 한번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들려보았습니다. 그런데 소풍 온 학생들인지, 학습을 나왔는지 초등학교 3, 4학년으로 보이는 학생들과 남자 선생님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옆을 지나가다가 선생님이 화가 나셔서 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한 남자 학생에게 “야! 너 죽을래”하는 것입니다. 지나가던 제가 다 무안했습니다. 말 잘 안 듣는 아이들 통솔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저도 조금은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이 자꾸만 학생들을 그런 식으로 대하면 학생이 받은 그 상처는 어디 가서 누구에게서 치유 받겠습니까? 집에 가서도 창피해서 선생님에게 그런 말 들었다는 것을 말하지 못합니다.
“너희들 청소 그렇게 밖에 못하겠어!” 하는 것 보다 “너희들 어른 다 됐네. 청소 잘 할 줄 믿을 깨” 미리 선수를 치는 것입니다.

칭찬 한 마디가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학창시절 결코 천재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담임 선생님은 “이 학생은 무슨 공부를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습니다.”라고 적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적힌 성적표를 받아든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낙담해하는 아들을 오히려 달래며 “아들아, 너는 다른 아이와 다르단다. 네가 다른 아이와 같다면 너는 결코 천재가 될 수 없어”라고 칭찬하며 격려했습니다. 이러한 칭찬과 격려로 아쉬타인은 변한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수만 톤의 가시는 벌 한 마리 불러모으지 못하지만 한 방울의 꿀은 수많은 벌떼를 불러모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칭찬은 바로 이 꿀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칭찬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처음 만난 나다나엘에게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나다나엘이 즉시 주님을 향해서 세 개의 호칭을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밝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즉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17 절)라고 화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2명의 이방인을 칭찬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자신의 부하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예수님께 이 백부장의 말을 듣기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군대는 백부장이 군졸들을 대할 때는 병들면 한마디로 의가사 제대시키면 그만입니다. 자신의 병사 하나를 위해서 그렇게 신경 써야 할만큼 한가한 군대가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보고 기이히 여겼다고 한 것은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과 이적을 보고 기이히 여길 수는 있으나 예수님이 사람을 보고 기이히 여긴 것은 없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로마 군대의 백부장에게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고 칭찬하셨습니다.

또 한 사람은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지방으로 가셨을 때 수로보니게 마을에 사는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나와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산다고”말함으로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8)

찰스 필모어는 “칭찬과 감사의 말은 에너지를 확대시키고 해방시킨다. 칭찬은 약한 육체에 건강을 주고 두려운 마음에 평온과 신뢰를 주며 상처난 신경에 휴식과 힘을 준다. 또한 우리는 칭찬을 받으면 기뻐한다. 식물도 사랑을 베풀면 잘 자라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핸리 고더드 박사는 ‘앨고 그래프’라는 피로 측정기를 사용하여 몹시 피곤해 하는 학생들에게 칭찬의 말을 해 주면 그들의 육체적 에너지가 급상승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관심과 기대를 갖고 칭찬해 주면 그 대상자는 용기와 자신감을 갖게 되어 분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칭찬은 자신감을 줍니다.

“어른 다 됐네.”라는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자신감이 들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계속 어린아이처럼 땡깡만 부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서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어린이들에게 학습의 동기를 부여합니다. 학습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동기 부여입니다. 동기만 부여되면 이미 이룬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학습에 동기 부여가 없으면 학습 효과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동기 부여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인가 배우고 싶은 욕망을 느끼도록 합니다. 예수님은 적어도 네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배우는 자에게 집중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시작하실 때 ‘진실로’(마 5:18, 26, 6:2, 5 등), ‘들을 지어다’(마 11:15, 13:9, 43, 막 4:9, 23, 눅 8:18, 14:35), ‘들으라’(마 13:18, 15:10, 21:33, 막 4:3, 7:14, 눅 9:44, 18:6) 그리고 ‘보라’(마 10:16, 11:10, 12:41, 42, 49, 막 3:34, 10:33, 14“41, 눅 7:25, 27, 34, 10:3, 19; 11:31, 32, 44, 13:7, 30, 32, 35, 18:31, 21:29, 22:10, 31, 요 4:35, 5:14, 16:32)고 하시면서 시선을 집중시키셨습니다.

둘째로 소망을 주셨습니다.
산상 수훈을 시작하실 때,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그리고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마 5:3-5)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이것이 복이 있다는 것을 몰랐었습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던 사람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의 가치관에서 밀려나 있던 즉 엄격한 규율에 의해서 지켜지는 신앙적 행위들은 가치가 있어 보이던 시절에 보이지 않던 마음을 읽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복된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셋째로 먼저 손을 내미셨습니다.
한마디로 화가 나서 꽁하고 있는 사람은 손을 내밀지 못합니다. 우리 속담에 “방귀뀐 놈이 성낸다”고 사람은 하나님께 죄를 짓고 멀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먼저 손을 내미십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나에게 물을 좀 달라”(요 4:7)고 하시면서 먼저 청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각자 개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야(눅 10:41), 삭개오야(눅 19:5), 베드로(눅 22:31, 요 1:42)의 이름을 직접 부르셨습니다. 나다나엘의 경우도 그랬지만 삭개오의 경우도 한번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신적 능력으로 이들을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름을 불러주셨다는 사실에 다 감동한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교황이 성탄절 메시지 발표할 때 보면 각 나라의 말로 한마디씩 합니다. 그 때 자신들의 말로 한마디하는 것에 사람들은 감격해 하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을 부른 것에 비하겠습니까. 마지막 날에 내 이름을 불러주실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는 말씀과 이이어서 “너희는 나의 친구라…”(요 15:14-15)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를 오랫동안만 다닌다고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고 했습니다.
어느 욕심이 많은 왕과 덕망이 있는 학자의 대화입니다.
왕 :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고 훌륭하게 사는 길이오?
학자 : 욕심 부리지 않고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왕 : (피식 웃으며) 아니 그거야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니오?
학자 : (미소를 지으며) 폐하!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여든 살 된 노인도 실천하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랍니다.

어느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집사님은 매일 하는 자녀의 세상 과외수업 시간은 2시간이 짧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예배시간 1간 30분이 길다고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겠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어른 다 됐네.”와 같이 믿음을 줍니다. 확신을 줍니다. 자부심을 줍니다. 우리 우리가 행동할 때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도우십니다. 이제 더 이상 연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의 빛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정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43. 하나님이 주신 가정) / 본문 : 눅 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1997년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장관을 열 네 명을 임명했는데 일곱 명이 거절했습니다. 그리스토퍼 국무장관도 안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가정 때문이라는 겁니다. 나는 가정으로 돌아가서 가정에서 자녀들과 함께 지내고 싶다라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안 불러줘서 못 갑니다. 아마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할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만은 않습니다. 가정은 장관이상으로 높이는 사회일수록 그 사회가 건강한 사회, 복 받는 사회입니다. 가정은 어떤 빌딩보다도 더 높은 집이 가정의 집이고, 어떤 산보다도 산 위에 있는 집이 가정의 집인 것입니다. 이 땅에 가정보다 귀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모든 생명에게 주신 선물은 가정이라고 하는 집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모두가 가정 중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가정의 종교입니다. 가정을 버리고 떠나 혼자 도를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또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도 가정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함으로 방주를 만드는 것도 한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을 낳아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도 그 시대의 한 족장의 이야기입니다. 이삭이 리브가와 함께 쌍둥이를 낳아서 살아가는 이야기, 야곱의 열 두 형제와 함께 복을 받는 족장들의 이야기, 모두가 가정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로 넘어가면서 모세 가정이야기가 나옵니다. 룻기서에는 남자들이 다 죽고 없어 한 가정이 멸망을 당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비록 이방 여인이지만 룻을 통해 시어머니(나오미)를 잘 모시고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을 통해서 다윗 가문을 일으킵니다. 사무엘상으로 가면서 한나(남편 엘가나)가 낳은 아이 사무엘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은 전부 가정 이야기인 샘입니다.

천국은 가정이고, 가정은 작은 천국입니다. 천국에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아들이 있는 것처럼, 가정에도 부모와 자녀가 있습니다. 천국에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 신부인 성도들이 있는 것처럼, 가정에도 신랑과 신부가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사랑하는 부부가 사는 가정은 보이는 낙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최초의 축복의 장소요, 인간의 진정한 안식처인 것입니다.
교회는 또한 가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마가의 집이었고, 에베소 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이었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의 집이었고,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는 가이오의 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모든 청소년의 문제도 가정에 문제가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열 명 중 여섯 명의 아이들은 술 먹는 집 아이들에게서 청소년이 탈선한다라는 겁니다. 술 먹는 부모의 자녀들은 탈선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다섯 명 가운데 세 명은 부부가 가정불화를 일으킬 때 자녀들의 성격이 잔인해지고, 난폭해지고, 잘못된다고 발표하고 있습니다. 네 명 가운데 세 명은 부모의 허락을 받아 아무데나 가는 아이들이 결국 잘못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벽돌쌓기를 하면서 노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하도 열심히 쌓고 집중해서 놀고있기에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너 뭐 만들고 있는 거니”하니까 아이가 대답하기를 “쉿 조용히… 교회를 만들고 있어요!”그러는 겁니다. 아버지는 기특해 하면서 “그 동안 교회 가서 떠들고 장난만 노는 아이인줄 알았는데 교회를 만들고 있다니”라고 생각하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조용히 하라는 거지?” 그 때 아이가 대답하기를 “다 자고있잖아요. 깨우면 안돼요.”라고 하더랍니다. 이 아버지는 교회 가서 졸은 것이 아니라 아주 주무신 모양입니다.

교육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삶이 교육입니다. 아이들은 본대로 따라합니다. 우리가 성경책 보면서 넘기니까 서은이가 책보면서 넘기잖아요. 교회 와서 아이가 저렇게 잘 적응할 수 없습니다. 원래 어린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은이를 보면 참 기특합니다. 아마 서은이도 갑자기 교회에 나왔다면 못 견딜 것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 나오고 태어나서 바로 교회에 오게되니까 적응을 한 것이지요. 성경보고 찬송하고, 기도하면서 자란 아이는 세상아이들과 다른 겁니다. 부모님들! 조금 귀찮아도 자녀와 함께 교회 나오시기 바랍니다.

17세기 프랑스의 화가 밀레의 두 그림을 보시겠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두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니다. 가정은 열심히 땀 흘리고 부지런히 일해야 가정이 축복을 받고 건강한 가정이 되는 겁니다. 열심히 일하는 곳에 가정의 위로와 은혜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가정은 땀흘려 거둔 것을 가지고 먹고사는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은 돈으로 꾸미는 것은 아닙니다. 땀으로 꾸며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겁니다. 이런 모습을 자녀들이 보고자라야 합니다.
우리는 “축복”하면, 나의 노력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축복”이란 아무공로 없이 받은 은혜인 “구원”과는 달리, 뿌린 대로 거두고, 심
은대로 열매 맺으며, 내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땀 흘려
서 모은 재산을 속아서 한 순간에 날리거나 또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고 있습니까? 이렇게 노동의 신성함을 거부하고, 수고하고 땀 흘리기를 싫어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사람입니다(살후 3:10하). 하나님조차도 6일 동안 일하시고, 수고하셨기에 창조의 기쁨을 맛보셨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밀레 그린 두 번째 보면 밀레 그림에 두 부부가 같이 마주서 있는 모양이 아름답고 행복한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 같이 보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마주 보면서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랑이 그림 속에 있습니다. 또한 이 그림은 서로 겸손히 고개 숙인 모습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기도하는 모습니다. 기도로서 한 마음이 될 때 진정한 하나님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D.W. 게랄드(Gerald)는 “행복이란 우리 자신의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지, 남의 집 정원에서 뽑는 것이 아니다”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어디에서 뽑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온 가족이 한 마음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을 아름다운 정원으로 가꾸고 싶지 않으십니까?
꽃이 만발하고 향기 가득한 정원으로 가꾸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이와 같이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 수 있을까요?
신명기 6:2절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요.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여호와를 경외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무서운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부모를 우습게 생각하는 자식은 문제가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를 우습게 생각하는 자녀 하나님도 우습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자녀 부모에게 순종합니다. 부모가 나중에 자녀들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느냐! 그것은 한마디로 부모하기 나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로 키우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해서는 예배하며 기도하고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돈주고 학원은 보내도 가정에서 예배하며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등한히 하는 가정이 많습니다. 학원에서 사람 만드는 것 아닙니다. 지식은 조금 나아질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 때로는 우리도 장관직도 사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가정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윌리암 하킹은 ‘가정이 없는 곳에 국가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역사가들은 나라가 망하기 전에 가정이 망한다고 합니다. 가정이 건강한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정 다 팽개치고 나라일 한다고 다 나가면 가정이 망하고,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1809년 가난한 구둣방 가정에 둘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주위에서는 이 아이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의 미래를 내다보고 저녁 식사를 마친 후면 꼭 아이를 무릎에 앉혀 놓고 성경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아이가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는 풍토병에 걸려 숨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는 숨지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아이야, 너는 부자나 위인이 되기보다는 성경을 힘써 읽는 사람이 되라” 그리고 어머니는 성경 책 한 권을 남기고 이었습니다. 이후 이 아이는 자라서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미국에서 30년 전에 가정생활 강의로 이름난 제임스 해치 교수가 행복을 위해서 세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입을 열라(open mouth)는 것입니다. 부부간이나 부모와 자녀간에 대화가 없으면 서로 마음을 닫는 결과가 온다는 것입니다. 연애시절처럼 말을 많이 할수록 행복의 수치는 올라간다고 지적했습니다. ‘대화’하라는 것입니다. ‘대’놓고 ‘화’내는 것이 대화가 아닙니다.
둘째는 귀를 열라(open ear)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려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귀를 닫아버리면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는 결과가 온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함께 계획을 세우라(make schedule)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함께 하라는 의미입니다.

존 웨슬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세 가지 질문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첫째, 너에게 준 시간을 어떻게 관리했느냐?
둘째, 너에게 준 재산을 어떻게 관리했느냐?
셋째, 너에게 맡긴 자녀를 어떻게 양육했느냐?
유대인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곳에 직접 계실 수 없어서 어머니를 보냈습니다. 어머니가 계신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어머니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어머니의 손이 가는 곳에 하나님의 손이 가는 것이며, 어머니가 일하는 곳에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오던 여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우리가 진정 울어야 할 것은 내 영혼을 위해서입니다. 내 가정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세워지는 가정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가정을 하나님께서 주신 천국으로 알고 열심히 가꾸고 만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키산맥 해발 3.000m 높이에 수목 한계선인 지대가 있습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 끓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있어야 합니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이지만 생존을 위해 무서운 인내를 발휘합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共鳴)이 잘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 끓는 나무”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사람은 아무런 고난 없이 좋은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 온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찾아오는 매서운 바람 때문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가장 아름다운 선율을 내는 사람이 됩니다.
 

아멘과 영생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41. 아멘과 영생) / 본문 : 요한복음 5:24-2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한번 부자청년과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고 떠났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마 19:16-22). 또한 “힘든 요구를 해서 미안하다. 너를 놀라게 하여 떠나게 할 생각은 없었단다. 관계 회복을 위해 저녁이나 같이 먹자. 너는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니? 네가 소유한 모든 것을 팔 생각이 없다면, 좋다! 얼마만큼 포기할 수 있겠니?”라고도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은 토론이나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부한 것이 잘못입니까? 성경에는 부해지려는 욕심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부를 소유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그의 삶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우상, 즉 그의 소유물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네가 영생을 소유하고 싶거든, 영생이란 새로운 주인을 모시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영생은 소유물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인격은 하나님 자신의 인격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본질상, 온전한 주인으로 행하실 수 없는 자리에는 거하지 않으신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질은 이미 부자 청년에게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그의 가치관과 모든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주인, 신이었습니다. 참 신이신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사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현재의 신이 되어버린 소유물을 내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시게 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세상과 내세의 영원한 운명이 바뀌어지고 엄청난 변화와 축복을 받게될 것입니다. 그까짓 물질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을 차츰 아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Amh;n ajmh;n levgw uJmi’n o{ti)의 ‘진실로’로 번역된 아멘 입니다. ‘아멘’은 아무나 한 것이 아닙니다. 아멘은 오직 예수님만이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언어로 말한다면 아멘은 예수님의 도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 ‘아멘’이라는 단어가 두절에 걸쳐 4번이나 나옵니다. 성경에서 오늘 본문을 빼고는 이렇게 된 곳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제일 많은 도장을 찍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아 우리는 본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아멘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단순히 많이 나올 뿐만 아니라 문장 앞에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아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실 때 뒤에다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두가 앞에 붙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림을 다 그리고 도장을 찍습니다. 글을 다 쓰고 난 후에 사인을 하지요. 그러나 주님은 다르십니다. 말씀을 하시기 전에 아멘을 먼저 하셨습니다. 아멘을 먼저 사용한 이 말씀의 권위는 다시 수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수정할 수 없도록 미리 도장을 찍어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대할 때는 이와 같이 해야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가 잃어보고 마음에 들면 아멘하고 마음에 안 들면 노멘하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서약함과 같이 미리 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제가 받은 편지 중의 ‘아멘 동무’라는 제목으로 북한에서 보내온 것이 있었습니다. 북한을 방문한 외국기독교인들이 부활절 일요일에 사전 협의 없이 교회를 방문했다가 문이 닫혀있어 예배를 드리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이분은 교회 위장을 위해 동원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외국인의 교회 방문을 앞두고 동원된 사람들에게 교육시키기를, 무엇을 물어보면 교인은 ‘아멘’을 잘 하니 ‘아멘’이라고 대답하라고 교육시켰습니다. 방문한 외국인들은 물어보기를 “칠골교회 는 교단이 어딥니까?” 물었더니 “아멘 이요” 그래서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그럼 성도님의 직분은 무엇입니까?” “아멘 이요”라고 대답하여 외국인들은 가짜 교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동원된 사람들도 들통이 났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그 때부터 이 사람은 ‘아멘 동무’라고 자기들끼리 놀려주곤 했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얼마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은 어느 탄광에 갔다는 소리만 들렸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아멘의 뜻을 전혀 모르고 사용하는 것은 위장된 성도와 같이 위장된 도장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짜가 아닌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멘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멘을 잘해야 합니다. 아무 말에나 아멘을 하는 것은 주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아멘은 오직 주님의 말씀에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과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또는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에만 아멘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 중요한 아멘을 연이어 하십니까?
24절 “…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절 “…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 바로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청년은 무슨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얻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은 사람들의 인위적 노력이나 행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믿음에 대한 보상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믿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lovgon mou ajkouvwn kai; pisteuvwn)이라고 하셨습니다. ‘듣고’와 ‘믿고’를 한 어휘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원문에는 ‘듣고’와 ‘믿는’이라는 단어 사이에 카이(kai)이 만 들어있습니다. ‘카이’는 “그러므로, 마찬가지로”라는 접속사입니다. 본문의 뜻은 “믿음으로 듣는다”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원문에 영생을 얻고의 ‘얻다’(e[cw:에코)의 동사가 현재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미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할 때 영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한 것도 아니요, 그 동안 선하게 살아온 것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됩니다. 이 말씀을 하시려고 “아멘 아멘”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메시야 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내 말을 듣고”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함께 믿어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영생을 얻는데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제도나 형식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보내주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만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영생이 주어집니다. 이 말씀이 변경하지 못하도록 주님은 “아멘 아멘”으로 시작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영생입니다.
바울도 솔직히 이 부분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 3:10-11 말하기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 땅에서 축복만 받고 생명의 부활을 얻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헛것입니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옮겼느니라’로 번역된 (metabevbhken:메타바이노)는 장소를 옮기는 것뿐만 아니라 상태의 전환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원문의 시제가 현재 완료형입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를 믿는 순간에 우리의 상태는 변환된 것입니다. 사망의 자리에서 영생의 자리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미 마쳐진 것을 말합니다.
본문의
25절은 24절의 추가 설명입니다.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죽은 자들”은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체적 죽음입니다. 죄의 결과로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내려지는 형벌입니다(창 3:19, 히 9:27). 두 번째로는 영적 죽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교재가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엡 2:1). 세 번째로 영원한 죽음, 요한은 이 죽음을 계시록에서 둘째 사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계 2:11, 20:6). 영원한 지옥형벌을 의미합니다(마 25:46, 막 9:43-48). 본문의 “때가 오나니”로 보아 두 번째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생명은 지금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죽어 있으면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나야 합니다. 지금 살아있어야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아담이 930세를 살고 죽었다(5:5)고 했고, 에노스는 912세에 게난은 905세에 죽었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950세에 죽었고(9:29),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었고(25:7-8), 야곱은 147세에 애굽에서 죽었습니다.(49:33) 모세는 120세에 모압평지에 있는 느보산에서 죽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경우 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었는가를 개인별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전혀 다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가 바울이 언제 죽었는가 마태, 마가, 누가가 언제 죽었는가 요한이 언제, 어디서 죽었는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신약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부활과 영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고(요 11:25-26)말씀하셨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형제와 자매과 있었는데, 결혼을 하지 못한 형제와 자매는 선을 보게 된 형제와 자매는 워낙에 말수가 적어서 애인이 없었던 두 사람은 멀뚱멀뚱 앉아서 커피를 시켰습니다.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제 이름은 [철] 입니다.”
“철이요…”
“네. 성은 ‘전’이구요. 전철이 제 이름입니다.”
남자는 사뭇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가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뒤집어지는 게 아닙니까. 남자는 민망한 듯 물었습니다.
“아니, 뭐가 그리 우스우시죠?”
그러자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사실, 전 ‘이호선’ 이거든요~” 이 남녀는 이름 때문에 짝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아멘과 영생’은 짝을 이룹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아멘으로 화답할 때 영생은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 하면 영생이 있습니다.

남북전쟁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한 노인이 백악관 앞에서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군대에서 도주해 탈주병으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의 구명을 위해 링컨 대통령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보초병들은 백악관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 소년이 노인에게 다가왔다. “할아버지 나를 따라 오세요.” 소년은 곧장 백악관으로 달려갔습니다. 노인은 소년을 따라 허겁지겁 백악관으로 들어섰습니다. 노인을 붙잡는 보초병에게 소년이 말했습니다. “이 분은 우리 할아버지예요” 보초병들은 더 이상 노인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노인은 링컨 대통령을 만나 딱한 사정을 하소연했고 아들은 사형을 면했습니다. 길을 안내한 이 소년은 링컨 대통령의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만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 영생의 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백악관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노인처럼 자신의 혼자 힘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그 때가서 아는 척 하려고 하면 주님은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천국 문에 도달했을 때 주님이 뛰어나오시면서 나를 반기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아마 주님은 너무 기뻐서 신발도 신지 않으신 체로 뛰어나오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주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아버지와 그를 믿는 우리들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