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주님의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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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40.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 / 본문 : 요한복음 20:19-23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할 때, 의사는 자기의 온 정성과 마음과 실력을 다해서 환자를 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골치 아프고 손을 떼고 싶거나 돕고 싶지 않은 환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치료하는 의사보다 더 많이 아는 척하는, 잔소리 많은 환자라고 합니다. “내 병은 내가 압니다”라고 말하는 환자지요. 진찰 결과라든가, 처방이라든가, 약이라든가, 의사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습니다. 다 의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다 압니다. 이런 환자는 ‘차라리 당신이 의사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대하기 싫다고 합니다.
두 번째 환자는 미안한 말씀 입니다마는 학교 교사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어린아이를 가르쳐 만사를 따져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그러면 이렇게 된다, 또는 공식에 의해서 모든 것을 따지는 그런 체질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이렇게 저렇게 치료를 하면, 이것 먹으면 낫느냐, 이렇게 하면 꼭 낫느냐, 왜 그러느냐,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합니다. 치료라는 것이 1+1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살고 죽고가 어디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따지니까 의사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대답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 참 골치 아픈 환자입니다.
세 번째 환자는 조급한 마음을 가진 환자입니다. 예를 들어 약을 투여하고 나서 적어도 몇 일이 지나서야 효과가 납니다. 그런데 약을 한 봉지 먹고는 왜 안낫느냐, 아침에 치료받고는 저녁에 왜 안낫느냐, 그리고 왜 이렇게 아프냐고 한답니다. 그래서 보따리 싸가지고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 만나면 아주 골치 아프고 ‘빨리 다른 데로 가라’하고 싶답니다.
우리의 교육도,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인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할 줄을 모르고, 믿음이 없고, 만사를 조급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구제불능입니다. 의사가 이런 사람을 만나면 아주 골치 아파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이런 사람 만나면 골치 아파하실 것 같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증거를 대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다른 방법으로 설명한다해도 믿음 없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20세기 영적거장으로 알려진 영국의 C.S. 루이스 목사에게 예수님이 정말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느냐고 교회마다 돌아다니며 목사님께 질문하며 다니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루이스 목사는 퉁명스럽게 “성경을 보세요.”라는 말만 했습니다. 오늘 주앙교회에 오신 여러분!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마시고 믿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은 그 자체가 신비입니다. 사실 내가 믿든지 안 믿든지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부활할 것을 예수님께 직접 들은 제자들인데도 십자가 사건 이후 한곳에 모여서 문을 굳게 닫고 떨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을 후회하는 제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잡히면 나도 십자가에 달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사람이 두려움이 들면 생각이 마비되고 도피심이 생겨 방문을 닫고 숨게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아무리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도 힘을 쓰지 못하고 무력해 집니다.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은 오직 예수님만이 한 것입니다.

불교에는 부활이 없습니다. 석가모니는 버섯나물을 먹고 복통이 나서 병들어 죽었습니다. 어느 날 80세의 석가모니가 숲 속에 있는 춘다라는 대장장이 집에 갔는데 그가 준 버섯나물을 먹고 식중독을 일으켜 죽었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두 그루 나무 사이에서 죽으면서 말했습니다. “가죽끈이 끊어지고 수레바퀴가 무너지는 도다. 모든 인생들이 가는 길을 나도 이제 마침내 가는구나.”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유교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어느 날 제자인 계로가 공자에게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대답했습니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이 말을 듣고 계로는 다시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살아 생전의 일도 아직 잘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 그리고 공자는 죽었습니다. 당연히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철학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철학에 대해 정의를 내리길 “철학은 죽는 연습이다”라고 말하며 죽음의 문제에 통달한 것처럼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웃집에서 닭 한 마리 꾼 것 갚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이슬람교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에 가면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멧의 무덤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묘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평강을 주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부활의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강을 얻기 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어디를 가나 참 평강과 안식이 없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와 관계를 끊는다고 마음에 평강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세상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인간에게 제일 두려운 것은 역시 죽음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2:15절은 말씀하십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만이 두려움 문제를 해결 받고 참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믿는 자에게 이사하는 날에 불과한 것입니다. 죽음은 지상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복된 순간이 되며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사실입니까? 그런데 오늘날 이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파스칼은 “인생은 우주의 영광이 되든지 우주의 쓰레기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사람은 우주의 영광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죄송한 말씀이지만 쓰레기가 되어 쓰레기 소각장과 같은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은 변했습니다. 더 이상 두려워 떠는 제자들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제자들에게 이제 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 믿음과 신앙은 단순히 나 자신의 평안을 얻은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21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의 다른 성인들과 다른 것은 보내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이 세상에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배워서, 또는 깨달아서, 아니면 도를 닦아서 흔히 세상이 말하는 성인이 되신 분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 이셨습니다. 메시야 이셨던 것입니다(요 3:34, 5:36, 6:57, 8:42, 17:3).
예수님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어 세상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아 세상에 나아가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번도 이스라엘을 떠난 적이 없는 연약한 제자들이 어떻게 온 세상에 나가 선교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의 이 모습은 인간을 처음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생령을 불어넣으신 장면과 같습니다(창 1:27-28).
성령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마음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대적이 심한 세상에서도 능력 있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문자 적으로만 받아들이는 학자들은 없습니다. 죄 사할 권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막 2:6, 10). 그러나 우리가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인도하지 않으면 그 죄는 그대로 있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죄 사함을 얻게 하기 때문에 죄를 사해주는 역할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입니다. 이 죄 사함을 받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만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 부활의 육체를 다시 입고 살 수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초, 중, 고등학생들에게 모스크바에 있는 무신론 박물관을 견학시켰습니다. 한 안내인이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 종교의 해악을 증명하도록 고안된 전시품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 인간이 동물로 진화했나를 설명하는 그림들, 끔찍한 종교 재판 장면 등을 구경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안내인이 오래된 십자가를 보여주었습니다. “학생들, 옛날엔 사람들이 무식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어요. 사람들은 그가 사람들을 죄에서 구해주려고 하늘로부터 왔다고 생각했어요.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그가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믿었어요. 우리 조상들은 아주 무식했던 거죠.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함 받고 예수가 부활했던 것처럼 자기들도 후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해서 영원히 아름다운 삶을 누리게 되리라고 가르쳤답니다.”
열두 살 된 소녀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동무, 제가 잘못한 일들 때문에 늘 마음이 늘 괴로웠어요. 우리 어머니는 저 때문에 우시곤 했구요. 전 아버지를 속이고, 학교에선 부정 행위를 했어요. 전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다 벗어날 수 있을까 적정하고 있었어요. 전 죽는 게 무서워요. 전 장례식을 볼 때마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관속에 눕게 되고 모든 게 다 끝장 날거야’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그러나 전 살고 싶어요.” 소녀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저는 우리 조상들의 어리석은 믿음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똑똑해서 죄에 짓눌려 살고, 천국을 놓치는 것 보단 어리석더라도 죄를 용서받고 부활하는 게 더 좋아요. 전, 선생님 동무가 제게 가르쳐주신 것에 대해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가질께요.”(-하나님 구두는 누가 닦아 주나요? / 리차드 범브람트)라고 말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이 땅에서 완전한 승리를 했다고 믿어지십니까? 그 승리가 믿는 우리의 것이라는 것도 믿어지십니까?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정말 승리자처럼 생활합니까? 아니면 아직도 노예처럼 생활합니까?
주님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세요.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지게를 져 보았습니다. 가녀린 어깨에 지게를 지고, 고사리 같은 손에 지겟작대기를 들고 콩나물 같은 두 다리를 발발 떨면서 산길과 논둑을 걸어 다녔습니다. 힘들고 더워서 나무그늘 밑에 지게를 내려놓고 시원한 바람을 쐬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시원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수고와 짐은 지게의 짐과 달라서 쉽게 내려놓을 수도 없고 누가 대신 져줄 수도 없습니다. 모두 자신의 짐이 힘겨워 남의 짐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그 어떤 성인군자도 다른 인생의 짐을 해결해주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평안과 부활의 승리는 거져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를 대신해서 져 주신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그 순간 우리도 죽음에서 승리했습니다. 정복자처럼 행동하십시오. 승리자처럼 행동하십시오. 제발 패배자처럼 죽을 인상쓰지 말고, 승리자처럼 당당하게 생활하십시오. 누군가 여러분에게 돈으로, 지식으로, 건강으로, 자식의 성공으로, 무엇으로 도전해오더라도 웃고 넘기십시오. 우리는 그런 것과 싸울 시기는 지났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스파링 상대도 안됩니다.
올림픽 금메달 딴 사람은 동네 경기에는 참여하지 않습니다. 작은 경기에서 1등 2등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습다는 얘기죠. 우리는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예수님의 군사들입니다. 이 땅에서 돈 몇 푼 더 벌고 덜 벌고 그런 것에 얽매일 것 없습니다. 공부 좀 잘하고 못하는 것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물 좀 잘났고 못났고 그런 것에서 신경 접으세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의 명령 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를 받고 떠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에 우리가 기웃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나의 일이요, 나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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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39. 십자가의 사랑) / 본문 : 마가복음 15:22-37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자가에 못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 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없음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33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미국 프로풋볼 슈퍼스타 한국계 미국인 하인스 워드의 방한으로 “혼혈인”에 대해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나라가 작아서 인지, 아니면 언론의 힘 덕분인지, 그도 아니면 민족성 때문인지 늘 우리 나라는 온 민족이 관심을 가지는 화두가 있습니다. 아마 또 그런 것을 만들어 내야 사는 재미를 느끼는 민족성이 있나 봅니다. 하인스 워드는 어머니와 조용한 한국의 정취를 느끼고 싶은가 본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니니까 곤란한가 봅니다. 우리는 너무 성공신화주의입니다. 하인스 워드로 인해 혼혈인에 대한 편견과 법적 제도를 개선해 보려는 것은 좋으나 하인스 워드가 없었으면 언제까지 사람 차별할 겁니까? 혼혈인 만 문제입니까? 아파트 담장 하나 놓고도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윌리엄 보더스는 ‘Handyman of the Lord(주님의 종)’이라는 책에서 가난 때문에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간 한 흑인 남자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남부에 있는 한 저택에 벨을 눌렀습니다. 그는 “뒷문 쪽으로 와 보라”는 말을 듣고 먹을 것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저택의 주인 남자가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선 식사 기도부터 하시오. 자 나를 따라 말해 보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굶주린 흑인이 따라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 집주인이 말합니다. “틀렸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러나 흑인은 완강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 지친 나머지 주인이 물었습니다. ”어째서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데 당신은 계속해서 ‘당신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게요?“ 흑인 남자가 대답하기를 ”내가 만일 ‘우리 아버지’라고 말한다면 당신과 나는 형제가 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빵 한 조각을 주겠다고 형제를 뒷문으로 오라고 하는 사람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와 동일한 분일 리가 없으니까요.“ 우리는 한 하나님, 한 분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가능해 진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그것을 대하는 심적 거리의 원근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십자가란 객관적인 이해에 의해서 보다도 체험적인 경험에 의해서 체득될 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멀리서 볼 때 십자가란 결코 흠모할 만한 것도 사랑할 만한 것도 못됩니다. 오히려 흉하고 부끄럽고 멸시와 조롱의 대상밖에 되지를 못합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사형하는 형틀이기에 아무도 그것을 정면으로 쳐다보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도 그런 흉측스런 죽음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찌그러진 초막집도 오래 살면 정이 들어 그곳을 떠날 때는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지만 그 훌륭한 양옥집도 형무소만은 두 번 쳐다보기 싫다는 것이 형무소생활을 마치고 나오는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형무소 안의 사형장이나 형틀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도 현대의 사형은 그다지 잔인하지는 않습니다. 전기 의자나, 총살이나 교수형이라 할지라도 형장까지 끌려 갈 동안에만 심적 고통이 크지 막상 죽을 때의 육체적 고통은 순간적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산 사람을 못 박아서 세워놓고 몇 시간 동안 또는 며칠을 고통 가운데서 죽어가게 하는 참으로 잔인하고 참혹하기 짝이 없는 형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이런 흉악한 십자가를 좋아하고 정면으로 바라보려 하겠습니까?
십자가형은 도저히 살려 둘 수 없는 흉악범이나 반역자들만을 처형하는 극형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달리는 사람은 세상에 그 얼굴을 내놓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사람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그의 가문을 더럽히는 사람이요 그의 자녀들까지도 감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부끄러운 대상이었습니다. 만일 자기 아버지나 또는 가까운 친척이 그 형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가장 큰 수치요 모욕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형을 받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멀리서 그 사형수를 보고 멸시하면서 욕설을 퍼붙는 것이 상례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몹쓸 인간의 하나이기에 그렇게 모욕당하는 것이 마땅하며 멸시 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지나가는 자들이 예수를 모욕해서 말하기를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했으며 제사장과 서기관들도 희롱하기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강도들도 예수를 향해 비웃어 말하기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면서 모욕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가까이 갈수록 영상이 달라집니다. 예수라고 하는 특정한 분이 거기에서 처형된 후 십자가는 새로운 의미를 띠고 우리 앞에 다가서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싹 그 밑에 가서 쳐다보면 그 십자가는 그렇게 보기 흉하고 부끄럽고 멸시와 조롱의 십자가가 아니라 대속의 십자가요, 사죄의 십자가요, 사랑과 화해의 십자가입니다.
못 박힌 손과 발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로마 병사가 창으로 찌른 옆구리에서는 물과 피가 쏟아질 때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부르짖는 예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의 극형은 자기의 죄 값을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에 누구를 원망하거나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지금 이처럼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절규하는 이 분은 누구이기에 하나님이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 분이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극형을 받기에 합당한 살인강도, 반역죄, 이적행위 등의 그 무서운 죄들을 언제 어디서 그가 지었단 말인가요? 그러한 죄를 지었다면 어찌 하나님을 향하여 그와 같은 당돌한 호소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와 같은 의문은 필연적으로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는 어떤 분인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는 천상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고 그는 가난하고 짓눌리고 병든 마을 사람들을 돌보신 분, 그에게는 아무런 죄도 아무런 잘못도 없으신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분이 살려 둘 수 없는 무서운 죄인이 되어 십자가의 극형을 받아야 했습니까?” 다시 질문은 계속됩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외쳤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자로 간주되어졌습니다. 그의 형벌은 그의 죄 값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아무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특수한 저주와 고통을 예수께 내리신 것입니다(갈 3:13). 그래서 그는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 호소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바 되어 그 고통스런 극형을 받아야만 했고 그 고통과 저주를 받아야 했습니까? 그것은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나 자신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죄 없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우리의 양심은 꿈틀거립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죄인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양심은 나를 향해 외칩니다. 멀리서 바라보며 그 십자가가 흉하고 부끄럽고 멸시할 만하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너무도 자신을 의로운 사람으로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자신에 대하여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의 십자가 밑에 바싹 다가서서 쳐다보는 십자가 위의 예수는 내 죄의 심판을 대신 받고 저주와 고통을 그가 담당하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 때 신실하고 예민한 양심은 부르짖습니다. “주여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는 무죄하신 예수가 내 대신 극형을 당하시고 심판을 받은 줄 알면서도 모른 체 하고 슬그머니 그 밑에서 빠져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매여 달려 죄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 우리는 냉담했던 내 심령이 갈기갈기 찢기며 주와 함께 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히 “제가 죽어야 할 죄인입니다”라고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이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용서의 은총을 경험한 바울은 로마서 8장 1절 이하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범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의 대속적 죽음으로 하나님의 진노는 풀리고 무서운 죄가 용서를 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얼굴을 쳐들어 하나님의 자비하신 얼굴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나와 하나님 사이에 막혔던 단절의 벽이 무너지고 우리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런 신분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두려움과 고통은 사라지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 새로운 삶의 환희와 용기가 내 마음속에 타오릅니다. 입술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격의 찬송이 끝일 줄을 모르고 눈에서는 미워하고 저주하던 원수들마저 나의 사랑하는 형제로 보여지는 화해의 즐거운 눈물이 흐르게 되며 나의 손과 발은 가난하고 억울하며 고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수고의 봉사를 아끼지 않으려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구속된 성도들을 자기 도취의 자리에 남겨 두시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폐쇄적, 자기 목적적 이용물이 아닙니다. 이제 주님은 명령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고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이 명령에 누구도 항거할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사죄의 은총만 입고 도망해 갈 천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상 위에서 사죄를 받고 죽은 강도도 그 동료에게 예수를 증거하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십자가를 몸소 지고 나서야 합니다. 십자가는 이 때 가장 가까이 우리 몸에 밀착됩니다. 나와 십자가와의 거리는 완전히 없어집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란 결코 안일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전에 멀리서 바라보며 모독하던 그 멸시를 나 자신이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이제 두렵지를 않습니다. 조그만 고통에 못 견디어 십자가를 벗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큰 감격이 나의 전체를 사로잡습니다. 이 때 십자가는 헌신과 승리와 영광의 십자가로 변합니다. 이미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예수를 쳐다보고 믿음으로 그 십자가를 붙들며 예수와 함께 죄를 못박아 버린 후 과거의 자기에서 죽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 안에 사심으로 사는 것입니다(갈 2:20). 따라서 사죄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로마서 14장 7절 이하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오직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게 하려는 그것입니다.” 이제 나는 간 곳이 없고 구속한 주만 보입니다. 우리를 어떤 박해나 어떤 시련도 넘어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해서 무려 250년간이나 끊임없이 박해의 바람은 불었으나 십자가는 넘어지지 않았으며 도리어 십자가가 로마제국을 완전히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나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총구를 들이대고 칼날을 번쩍이었으나 십자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패망의 웅덩이를 판 것은 저들 자신이었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십자가를 향한 바람은 불어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말은 “십자가는 영원히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그 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이기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삶이나 천사나 주관자들이나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십자가의 수욕과 고통은 곧 승리를 통하여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그 모든 싸움이 그치고 하나님 나라에의 부름을 입는 날 우리는 주 예수와 함께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지고 매맞음과 옥에 갇힘과 굶주림과 헐벗음의 고난을 당했으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고 있으나 속 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시적인 가벼운 환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큰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오기 때문입니다”(고후 4:16-17)
아! 이 얼마나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사람의 영광스런 소망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중에 아직도 멀리서 십자가를 바라보고만 서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제 대속의 십자가 밑으로 바싹 다가가서 사죄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몸소 지고서 이 세상 삶 속으로 뛰어들어 보십시오. 분명히 승리와 영광은 내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을 쓴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28세 때에 국가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영하 50도나 되는 추운 겨울날, 그는 사형 받기 위하여 기둥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형집행 시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시계를 쳐다보니 사형집행까지는 정확히 5분이 남았습니다. 이 천금같은 5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그는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5분이라는 시간 가운데 2분은 자신을 찾아준 귀중한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데에 쓰고, 2분은 자신이 살아온 28년 동안의 생을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쓰고, 마지막 남은 1분은 이 아름다운 세상, 이 대자연을 휘둘러보는 데에 쓰기로 합니다. 계획한대로 2분 동안 친구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3분이 남았습니다. 이제 그는 지나온 생을 회고하려고 합니다. 그때 갑자기 그는 ‘나는 3분 후에 어디로 갈 것인가’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순간적으로 돌이켜보는 28년의 생이 모두 후회스럽고 뉘우쳐지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혼미해지고 아찔해집니다. 설상가상으로 형리가 총에 탄환을 장착하는 소리가 철커덕하고 들려옵니다. 불현듯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오면서 온몸이 가눌 수 없게 떨립니다. 바로 그 순간, 난데없이 떠들썩한 소리가 나더니 한 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면서 형장으로 달려 들어왔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총살형 대신 시베리아 유형을 보내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렸던 것입니다. 그는 시베리아로 가 유형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는 늘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졌던 5분간을 생각함으로 시간을 금쪽 같이 아끼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경험으로 훌륭한 작품도 많이 남길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빼째르부르그에 갔을 때에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무덤을 찾아보고 그 앞에서 시간의 소중함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8.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 본문 : 사도행전 1:4-5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1924년 제8회 올림픽이 파리에서 열렸습니다. 이 올림픽에 참가한 영국의 100m 유망주 에릭리들 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에릭이 뛰면 금메달을 딸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뛰는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경기 일정이 잡힌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바로 주일날입니다. 에릭은 정말 하나님을 잘 믿는 청년이었습니다. 경기에 나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 때 영국 국민들은 흥분했습니다. 영국을 배반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이 지나가고 주위에서 400m에 뛰어보지 안겠냐고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400m 경기가 열리는 날은 주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번 뛰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100m 선두답게 처음부터 100m달리는 것처럼 뛰었습니다. 사람들은 저 선수가 100m 달리기로 착각하고 뛰는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러다 얼마 못 가서 쓰러지지”라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도로 끝까지 뛰어 400m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딴 것입니다. 기자들이 “100m 선수가 400m에서 금메달을 딴다는 것은 힘든 일인데 어떻게 뛰었냐?”고 했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200m는 내 힘으로 뛰고, 200m 하나님의 힘으로 뛰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어느 정도로 생각하십니까? 내 인생에 몇 퍼센트의 비중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지금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소동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소동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시작되었습니다(마21:10).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던 그 함성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것입니다. 계속해서 헤롯과 대제사장을 비롯한 바리세인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쫓고있습니다. 이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이미 칼은 뽑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이들은 성난 사자처럼 예수님께 관계된 것이라면 모조리 수사하고 관련된 사람은 처벌할 것입니다. 온 성이 예수님 처형으로 시끌었다가 지금은 적막이 감돌고 있는 시점입니다.
제자들의 고향은 갈릴리입니다. 십자가 처형 이후에 이들은 고향 갈릴리로 갔습니다. 예수님도 이 갈릴리에서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하셨고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마 28:10, 16, 막 16:7).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시몬 베드로와 여러 제자들이 함께 나옵니다. 베드로는 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면서 갈릴리 바다로 갑니다. 이것은 이제 예수님 따라다녔던 꿈같은 과거는 잊어버리고 갈릴리에서 고기나 잡으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밤새도록 고기를 잡는데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 이 때의 심정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왜 무슨 일을 해도 손에 안 잡힌다는 말 있지 않습니까? 지금 제자들이 그런 마음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말을 따라서 고기를 잡았는데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라고 밝혔습니다. 베드로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헤엄을 쳐서 예수님께 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들하고 먹을 고기를 굽고 계셨습니다. 밤새도록 갈릴리 바다에서 지친 제자들을 위해서 아침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는 행동입니다. 안전하기는 갈릴리가 예루살렘보다는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루살렘에 다시 모였겠습니까?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이 꼭 예루살렘에서 내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제자들의 고향인, 예수님의 주 무대였던 갈릴리가 더 나은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은 이곳에만 나온 것이 아닙니다. 누가는 이미 누가복음 24:47-49절에 기록했습니다.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에서 기다려야 하고, 이곳에서 성령을 주시는 것이 확실합니다.

왜! 예루살렘인가?

예루살렘(@Ierosoluvma)의 ‘살렘’은 평화라는 말이며 ‘예루’는 기초를 말합니다. ‘살렘의 기초’, ‘평화의 기초’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북쪽에 모리아 산이 있는데 이곳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던 곳입니다(창 22:2). 바로 이 자리를 다윗이 성전 터로 지정하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기고 제사를 드렸습니다(삼하 6:12, 대하 3:1, 시 132:13). 그리고 노래하기를 “여호와의 지파들이 …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는도다”(시 122:4),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시 46:5) 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따르지 못할 때는 강한 책망을 받은 장소 또한 예루살렘입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단 불(아리엘)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1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의 진 친 성읍이여 연부년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2 내가 필경 너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네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사 29:1-2)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을 보며 슬퍼하셨습니다. 때로는 제사에 드릴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성전 세를 내기 위해서 환전을 해주는 사람들을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성전을 지키고 기도해야할 사명이 있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강도의 굴혈을 만들어 놓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성전건물을 가리키며 자랑하던 제자에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 24:2)고 하셨습니다.
이사야는 노래하기를 “1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 2 너는 티끌을 떨어버릴지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보좌에 앉을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사 52:1-3)고 했습니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바벨론 포로로 있기 때문에 조속한 귀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노래는 계속될 수록(사 52:13절-53장) 예루살렘의 칭의의 대한 것으로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상징적으로 예견하고 있습니다(사 54:5).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 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사 54:3)고 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복음이 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소에서 성령을 받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외적인 성전은 인정하지 않으셨지만 예루살렘에서 새 성전을 세우신 것입니다.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19-22)
예루살렘의 사정은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하신 장소를 버리고 떠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마 장소적으로 좋은 곳을 찾아 떠나다보면 계속해서 이동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던 바로 그 장소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역사 했던 법궤를 모신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죄인들이 다시 더럽혀 놓은 이 장소를 하나님은 다시 청결케 해 주십니다. 거룩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바로 이 장소에서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중국과 북한 소식에 밝은 한 분을 알고 있는데 이분이 전해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경직 목사님께서 초청해서 방문했는데 목사님께서는 꼭 한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하시면서 입을 여셨다고 합니다. “6․25때 북한에 두고 온 자매가 있는데 그 자매를 찾아주게. 이 자매는 모든 성도들이 새벽에 모여서 피난하기로 했는데 나오지 않았어! 자매는 다리를 절어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는데 피난대열에 끼면 자기 때문에 늦어질 것을 염려한 것 같아”라고 말하시면서 꼭 찾아 소식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20세 정도 이었으니까 지금 살아 계신다고 해도 70세가 넘으신 할머님이 되어 계신 분입니다. 그래도 간곡한 목사님의 부탁이니 찾아 나서기로 하셨다고 합니다.
부탁을 받은 분은 중국에서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습니다.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믿을만한 분이 연결되었습니다. 이분은 북한으로 들어가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이리 저리 알아본 끝에 당시 평양에서 교회를 잘 다녔다는 집사를 소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을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듣기로 하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북한인지라 밤에 길을 나서기로 했습니다. 안내하는 사람을 따라 그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2시경이었다고 합니다. 밤에 도착한 일행은 그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갑자기 낯선 손님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비처럼 찾아와 놀란 이분은 좀처럼 남한에서 부탁을 받고 왔다는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부탁을 자세히 소개하고 난 후 한참 만에야 이 집사님은 입을 열었습니다. 자신은 당시에 신의주 제1교회를 다녔고, 한경직 목사님이 시무 하시던 교회는 신의주 제2교회로 자신은 그 교회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감추어 두었던 교회의 일지와 주보 등을 장롱 깊은 곳에서 꺼내어 보여주었습니다. 만일 이것이 알려지는 날에는 죽음을 면치 못했던 것입니다.
한 가닥 희망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교인들이 6․25 이후에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시의 교인들은 대부분 처형을 당하고 일부의 교인들은 감옥과 탄광으로 보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집사님은 남한 교회가 우리를 위해 가만히 있지 않고 통일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있는 일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이분들은 부탁을 받아 온 것뿐이라고 하자 다음에 올 때는 반드시 그것을 알아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서울 강북이 복잡해져서 많은 교회들이 강남으로 자리를 옮길 때였습니다. 당회에서 주차문제와 복잡한 환경으로 강남으로 이전해야 되지 않느냐는 교회이전 문제가 나왔습니다. 이 때 한경직 목사님은 다른 것은 다 당회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랐지만 교회 이전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고 못 박으셨습니다.
영락교회 본당 입구에 김응락 장로님의 순교비가 서 있습니다. 1․4후퇴 때 교회를 비우고 또 피난을 가야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회의를 하고 목사님은 북한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또 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교인들을 설득하고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김 장로님은 이제는 다시 안 떠난다고 하시면서 고집을 부렸습니다. 이제 죽어도 이곳에서 죽겠다고 하시면서 교회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남아 지키시다가 공산당의 총에 맞아 교회에서 순교하셨다. 그 순교비를 보면서 한경직 목사님은 평생을 설교하러 들어가신 것입니다. 교만해 질 수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영락교회 부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인천구역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한 권사님이 서울 중구까지 매주 나오시는 것이 불편해 보여 조심스럽게 말하기를 “이제 가까운 교회에 다니셔도 됩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그 때부터 기분이 언짢으셨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다닌 교회, 평양부터 따라온 교회, 교회가 좀 멀다고, 나이가 들었다고 본 교회를 떠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성령을 기다리는 장소입니다. 또한 마지막 재림할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모인 장소입니다. 처음에 주님은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지금은 성령과 함께 교회를 입고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런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교회를 어머니로 섬겨야 한다.”
교회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성령을 예루살렘에서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압니다. 우리 주앙교회가 예루살렘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에서 성령 받고 복음을 전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믿음 더욱 굳세라 http://blog.naver.com/rotisa/80022623245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 받은 자여라
주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믿노라
언제나 주님만을 찬양하며 따라가리니
시험을 당할때도 함께 계심을 믿노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주님의 뜻 하신일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주님의 뜻 안에서 내가 있음을 믿노라
사랑의 말씀들이 나를 더욱 새롭게 하니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주의 뜻 이루어질 때까지 믿음 더욱 굳세라
 

선교하는 교회(2)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7. 선교하는 교회(2)) / 본문 : 사도행전 1:6-8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명령이 성경에 481가지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 “나를 따라오너라”(마 4:19),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2),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 7:13), “내 어린양을 먹이라(요 21:12) 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명령은 사람에게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단아 물러가라”(마 4:10, 마 16:23, 막 9:25),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마 5:8)고 사단을 향해서 명령하셨습니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더 이상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할 수도 옆에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물러가라고 하면 물러가야 하고 나오라면 나와야 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도 명령하셨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눅 8:54), “나사로야 나오라”(요 11:43)고 하신 것 모두가 그대로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연에게도 명령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에게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막 11:14) 그리고 이 무화과나무는 말라죽었습니다.
바다에게도 명령하셨습니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마 8:26-27)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명령어 중에 마지막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구관데 예수님의 이러한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누구보다도 실천해야 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영국의 작가이며 기독교 변증에 강했던 루이스(C.S. Lewis)는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제일 없애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지옥의 개념이다.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해도 거짓이 아니라면 나는 어떠한 대가라도 치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것이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변경시킬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있기에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보았는데 양쪽 다리가 거의 없는 장애인이 나왔습니다. 그 분은 길가에서 액세서리를 판매하는데 꼭 강아지를 함께 데리고 다니는 겁니다. 한번은 잠시 장애인 주인이 혼자 일을 보러 갔는데 그 강아지는 그 쪽을 한참을 바라보며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주인이 나타나자 꼬리를 치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 장애인은 그 강아지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연을 묻자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기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부모 밑에서 자랐는데 그분들은 자기를 이용했다고 했습니다. 13살까지 다락방에서 다른 일도 못하고 혼자 지냈답니다. 그리고 지금 성인이 되어서 그 집에서 나왔는데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주는 것이 지금 함께 다니고 있는 강아지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버림받았지만 강아지는 자신을 따라 어디든지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면 이 강아지 보다 못한 사람들입니다.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마지막 명령을 성실히 따르는 주님의 일꾼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사람들이 묻는 것하고 예수님의 대답이 다르기 때문에 ‘동문서답’에 해당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을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땅문하답’입니다. 사람들은 땅의 것을 질문하고 예수님은 하늘의 일, 하나님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땅의 일이 아닙니다. 하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땅의 생각을 신학적인 용어로 ‘인본주의’라고 하고 하나님의 생각, 하늘의 생각을 ‘신본주의’라고 말합니다.

인본주의 자들이 만들어 낸 철학적인 나라가 공산주의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 사람들의 생각대로 잘살기 위한 나라를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중국이 공산주의가 되면서 그 때 선교하던 존 메도우(John Meadow)선교사에게 공산군 장교하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네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100년 이상 일했으면서도 중국을 교화하지 못했소. 당신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한 수백만의 사람들에 대해 가슴아파하고 있소. 그러나 우리 공산주의자들이 중국에 들어 온 지 10년도 안 되지만 공산주의를 모르거나, 스탈린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선교사들이 100년 동안에 하지 못한 일을 우리는 10년만에 했으며 중국을 우리의 사상으로 물들여 놓았소.”
이 말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숨기고 있습니다. 거짓의 영이 있습니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은행이 1950년대에 있었던 모택동의 경제개발계획인 ‘대약진운동’기간에 중국인 2천 7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캄보디아를 점령했을 때는 300만 명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처음에 명분은 다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위한 것도 못됩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잘 살 수 없습니다.

피지(Fiji)섬이 처음에 무역의 길이 열렸을 때, 무신론자이며 인본주의자인 무역상이 그 섬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는 피지 섬의 추장과 대화를 하던 중에 그 집에 십자가와 성경이 있는 것을 보고 그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선교사의 허튼 소리를 받아들이다니 참 부끄러운 일이군요.”
그 때 추장이 대답했습니다. “저기 큰 하얀 돌 보이십니까? 그 돌은 몇 년 전만 해도 사람의 머리를 쳐서 골을 꺼낼 때 사용하던 것입니다. 또 저기 큰 화덕 보입니까? 저것은 우리가 제사를 드릴 때 사람의 몸을 굽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당신 말대로 선교사의 허튼 소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당신의 머리는 깨지고 몸은 화덕 위에 구워져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인본주의 위험을 극복해야 합니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지만 공산당은 만들지 못합니다. 헌법이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볼 때 미국은 인본주의에 물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또 다른 곳에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입니다. 이것 또한 인본주의를 만들어 냅니다. 미국이나 우리 나라는 공산주의 때문에 인본주의가 성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경제 블록을 만들면서 작은 나라와 작은 생산 시설, 농업은 모조리 망해가고 있습니다. 이 결과 세계는 빈부격차가 갈수록 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상류층 20%사람들이 거의 모든 물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나머지 극빈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1.6%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빈부의 차이는 50배입니다. 지금도 한해에 굶어죽는 사람이 2천만 명이 넘습니다. 여러분! 이 숫자가 실감이 안 나시나본데 1.5초만에 한 명이 굶어죽는 것입니다. 이 숫자도 세계보건기구가 밝힌 열병, 합병증 등으로 죽은 것은 빠진 수치입니다.
한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이 누구의 것이지요? 그러면 여러분의 지갑은 누구의 것입니까? 또 여러분의 집은 누구의 것입니까?” 아르헨티나 오르티스 목사님이 성도님들에게 집문서를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모든 성도가 집문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어떻게 할까 회의를 했습니다. 다시 돌려주면서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사용권만 있습니다.”하고 돌려주었습니다.

경제의 양극화 현상은 선교에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속담에는 “배고픈 사람에게는 귀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선진국 사람들은 너무 배불러서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유럽 교회가 시들기 시작한 것은 GNP 2만 불이 넘기 시작하면서부터 랍니다.
세계는 중산층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중산층이 없는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 나라의 경우만 보면 압니다. 물가상승률이 대폭의 증가세를 보인 지난 1998년, 우리 나라 범죄율 역시 큰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자살율 역시 같은 양상을 보였습니다. 특히, 우리 나라의 자살율은 외환위기 직후 30%까지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범죄율의 증가폭이 다시 꾸준히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 2003년 3.4%, 2004년에는 3.9% 증가했고 작년 통계가 아직 집계되지 않았지만 전문가들은 그 증가폭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측합니다. 자살율 역시 지난 2002년 이후 매년 10%이상 늘어 외환위기 직후 8,569건이었던 건수가 지난 2004년, 11,523건까지 늘었습니다.

한마디로 인본주의는 그것이 공산주의든 물질만능주의든 하나님 앞에서 실패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한국선교사가 13,000여명 해외에 파송되어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선교사들이 서양 선교사들에 비해 일을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한국선교사들은 서양 선교사들에 비해 지원되는 선교비가 적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선교사들은 늘 기도합니다. 경제적인 선교비 모금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절약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러시아에 처음 같을 때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고르바쵸프 구 소련 대통령하고 우리 나라 김영삼 대통령이 제주도 신라호텔에서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신라호텔 전경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러시아 사람들이 그 장면을 보고 우리 선교사들도 한국에 그런 별장 하나쯤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러시아 사람들은 ‘다차’(별장)라는 것이 있습니다. 겨울에는 모스크바 같은 시내에서 공장 다니며 지내다가 봄과 여름이 오면 ‘다차’에 갑니다. 공산당이 시외에다가 가정마다 오두막 같은 집과 농토를 나누어 준 것입니다. 여기서 농사짓고 살다가 다시 겨울이 되면 시내 아파트로 들어가서 사는 것입니다. 지금도 선교사님들 중에는 다차를 따라다니며 선교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 당시 선교사들은 그저 우리를 잘 사는 사람으로 보아주니 선교하기 싶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IMF가 왔습니다. 그리고 한 선교사님이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고 카드를 주니까 카드를 받더니 그 카드를 구겨버리더랍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망한 나라 카드는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 선교사님은 그 때까지는 자신이 선교하는 줄 알았는데 대한민국이 선교하는 구나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사님들은 다시 기도하게 되었지요. 저는 그 때 인도에 선교 여행 중에 있었습니다. 인도 뱅갈로르에 있는데 선교사님들하고 교육하려고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날 IMF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현지 신문은 아시아의 한 마리용이 떨어졌다고 하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쓴 것입니다. 여자 선교사님들은 울기도 했습니다.

이런 한국 선교사님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복음을 전달시키고 있습니다. 한국선교사님들은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가운데서 일하기 때문에 늘 하나님께 먼저 매달리는 심정이 있습니다.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해외에는 공관원들과 기업들에 나온 주재상사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선진국에는 유학생들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사실은 선교사님들이 제일 가난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물질로 선교하지 않으려는 생각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 가운데 있지만 이 세상과 분리되도록 불러낸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의식을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거룩함과 영성의 결여, 잃은 자에 대한 관심의 약화는 비극적인 상황입니다. 교회는 영적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가르침과 사회활동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토저(Tozer)라는 분은 죽기 전에 이런 예언자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비참하게도 기독교는 신약성경이 요구하는 것의 수준 이하에 머물러 있다. 우리 생활에서 세속화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오늘날 교회의 분위기는 영적이라기 보다는 사회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부터 멀어질 때 이 세상의 방법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는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가 구세군을 창설할 때 품었던 비전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는 잃어버린 영혼을 주께 돌아오게 하는 일에 대해서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품었던 생각은 그의 구호에서 나타납니다. “영혼을 위해서라면 극한 상황까지라도 가자.”고 했습니다. 생명을 바쳐서라도 영혼 구원을 하자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의 ‘증인’은 mavrtu”(말튀스) ‘순교자’를 말합니다. 최후의 증인이란 순교의 정신이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의 끝까지는 보이는 땅만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원어의 e[scato”(에스카토스)는 ‘최후의, 마지막까지’의 뜻도 있습니다. 보이는 끝까지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서, 할 수만 있다면…”인 것입니다.

우리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보고 가야합니다. 지금은 깨어 정신을 차릴 때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 나타난 것 같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오직 기도할 것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우리의 이익만 쫓다가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놓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들이 성전 미문 에서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전했습니다. 우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엇이든 가지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 주앙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한가지 운동을 펼치기를 원합니다. 12시 정오가 되면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5분 동안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 낮에 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무슬림들은 하루 5번 정한 시간에 기도합니다. 우리가 한번이라도 정해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먼저 기도할 제목은 4월 16일이 부활주일입니다. 이 주일을 총동원 전도주일로 정합니다. 정오가 되면 한 영혼을 마음에 품고 전도 대상자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4월 16일은 한 명이라도 초청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찬양하십니다.
 

선교하는 교회(1)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6. 선교하는 교회(1)) / 본문 : 사도행전 1:6-8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말에 ‘동문서답’(東問西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쪽을 묻는데 서쪽을 대답한다는 뜻입니다. “묻는 말에 대하여 아주 딴판인 엉뚱한 대답”을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들리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엉뚱한 대답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마지막 순간입니다. 환송식이라고 할까요? 오늘 본문은 이 땅에서 예수님께 사람들이 질문한 마지막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도 이 땅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이 마지막 질문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승천은 아주 갑자기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인 사람들의 질문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입니다. 모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유대인입니다. 이들은 아직도 구약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을 예수께 질문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도 하셨고 다시 모여서 계획을 잘 짜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 이후 예수님께서 승천하신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때가 지금이냐는 것입니다. 지금 해방이 이루어지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7-8절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으십니다. 이 땅의 이스라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지 않습니다. 답답합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에 대한 기한은 하나님께 권한이 있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짤막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는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 사람들과 같을 수 있습니다. 자기 나라의 회복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은 유대 민족적으로 소원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 지금 이 땅의 나라들 가운데 같은 민족이 분단되어 있는 민족이 없습니다. 예멘이 있었는데 1990년 통일되었습니다. 이제 이 지구에 유일하게 한 민족이 분단된 나라는 남북한입니다. 하나님 남북한이 언제 통일되겠습니까?”라고 주님께 질문하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 땅의 자신의 나라였습니다. 그래도 나라를 말하는 사람은 큰 사람이지요.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신의 축복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어떻게 축복을 받아야 “이제 되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의 목사(K.P. Yohannan)가 미국교회를 방문하고 ‘멍에를 메고 잠든 나라’라는 제목으로 쓴말입니다.

나는 미국 교회를 보며 재벌 기업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카펫트와 멋진 의자들과 에어콘과 휘황찬란한 내부장식을 보며 놀랐다. 많은 교회가 그리스도와는 거의 상관이 없거나 아예 관계없는 활동에 쓰는 체육관이나 친교실을 갖고 있었다.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특별 찬양 같은 것들이, 때로는 설교마저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기보다는 즐기기 위한 것 같았다.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다건너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는 고사하고 자기 도시의 빈민의 문제도 외면하고 있었다. 그 모든 풍족함 중에서도 그곳에는 말할 수 없이 가난에 찌든 몇백만의 빈민이 살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외로 이사했으며, 빈민들은 시내에 거주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이라고 생각되는 활동에는 즐겨 참여하지만 복음에 대한 책임은 회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는 5,000개 가량의 기독교 서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는 7,010 민족 중 모국어로 된 성경을 갖지 못한 종족이 5,100민족이 됩니다. 또한 오늘날 인쇄되고 있는 성경의 85%가 영어를 읽을 수 있는 9%의 사람들을 위해 영자로 인쇄되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평균 한 가정에 4권의 성경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이 지구상의 80%의 사람들은 성경을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백만 명이 넘는 전임사역자가 있는 축복 받은 나라입니다. 성도 230명당 1명의 전임사역자가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약 7만 명의 전임사역자가 있습니다. 전체 국민 642명당 한 명의 전임 사역자 이며 성도 수로는 176명당 한 명이 전임 사역자입니다. 이것은 미국을 능가하는 수치입니다. 여러분 축복 받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는 27억의 사람이 단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선교지에는 50만 명당 한 사람의 전임사역자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선교지로 가야하는 이유입니다.

선교는 누가 할 수 있습니까?

본문 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합니다. 성령과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물질로 노력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단체에서 훈련받는 것은 세상 적인 조건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 안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받아야 됩니다. 성령 받으면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 하면 힘듭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지칩니다. 시험이 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 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보면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선교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 받으면 하나님의 지혜가, 순결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frovnimoi:프흐로니몬)라는 말의 어근의 뜻은 고삐를 매다, 자갈을 먹이다 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25장의 슬기로운 처녀 비유에서 나옵니다. 열 처녀 중에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이 처녀들은 깨어 있었던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막 13:37)고 하셨습니다. 깨어있는 사람이, 깨어있는 교회가 선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8),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선교의 부정적 요소

폭발적인 세계인구의 증가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전세계 인구를 선교학자들은 1억 6천만 명으로 봅니다. 이 인구의 수가 배로 늘어나는데 1,200년이 걸렸습니다. 또 배로 늘어나는데 550년이 걸렸습니다. 또 배가되는데 140년 걸렸습니다. 또 배가되는데 70년, 또 배가되는데 39년이 걸렸습니다.
60억이 넘는 세계인구의 33%가 기독교인입니다. 그런데 이중에 개신교는 14.74%, 천주교 14.87%, 러시아정교회 3.35%를 합친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천주교 국가였던 필리핀, 브라질도 우리가 선교하러 갑니다. 이들의 신앙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천주교는 일단 그 나라에 들어가면 정착하기 위해서 지나친 현지 상황화(토착화)를 서둘러 그 지역의 문화와 혼합이 되었습니다. 심한 경우는 원주민들이 섬기는 우상이 마리아로 바뀌었을 뿐 예전에 우상을 따르던 습관대로 다 합니다. 기독교의 예수정신은 없습니다. 성경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전 세계인구의 이슬람인이 20%가 넘습니다. 이들은 예수가 아니라 마호멧을 따릅니다. 이슬람을 믿는 분들은 자녀를 많이 납니다. 현재 증가율대로 25년이 지나면 이슬람이 세계 최대의 종교가 됩니다.
문제는 단순한 숫자적 증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말하기 싫지만 기독교의 서구인들은 대부분은 껍데기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명목상 그리스도 인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일생에 교회를 세 번 가는데 태어나서 한번 가고, 결혼식 때 가고, 그리고 죽어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슬람 믿으시는 분들의 신앙심이 우리보다 더 열심인 것 같습니다. 하루에 여섯 번 예정된 시간에 기도하는데 담요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도할 때 어디를 가나 깔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은 홍콩에서 비행기 갈아타기 위해서 기다리는데 이슬람 믿으시는 분인지 공항 귀퉁이로 가시더니 담요 같은 것을 깔고 자신들의 성지 메카가 있는 방향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비행기 안에서도 뒤에 가서 기도하는 분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식사 기도한번 하는 것도 눈치보며 할 때가 있습니다. 한국에 와있는 이슬람 분들이 아무 고기나 먹지 않으니까 미리 예식을 치룬 고기를 배달하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심이 이슬람을 믿으시는 분들보다 철저하지 못하다는 것은 우리가 선교하는 정신에서 이미 밀리고 있는 것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 본문 : 누가복음 5:17-26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우리부부는 대화의 소재가 많지 않습니다. 부부의 문제를 없애려면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이 대화를 해 보았어야지요. 대화하라니까 대놓고 화내는 것이 대화인줄 안답니다.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자기 주장하는 것이 많습니다. 저희는 요즘 서은이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그런데 주일날은 꼭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설교를 하고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여러분이 은혜를 받았는지를 물어봅니다. 저희 집사람도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한 음식 맛있게 먹었냐는 것입니다. 열심히 밥상 차린 사람의 심정이나 제 심정이 같을 것입니다. 열심히 먹어주는 식구가 있기에 열심히 만드는 것입니다.

요리를 맛있게 한다고 소문난 오리 농장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요리사는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요리해서 손님들을 대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농장 음식점에 큰 잔치가 있었습니다. 음식점 주인은 오리요리가 맛있는 이유에 대해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오리를 기를 때 특별히 신경 써서 사육해서 고기가 맛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주방장은 주인의 말에 서운해 했습니다. “오리도 좋지만 주방장이 신경써서 요리를 했기 때문에 맛있습니다“라고 한마디만 해 주면 좋은데 안 하는 겁니다. 하루는 주방장이 오리 다리를 하나만 내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인이 뭐라고 하는지 두고보자.“ 손님들 앞에서 한참 오리고기 자랑을 늘어놓던 주인은 오리 다리가 하나밖에 없다고 하자 당황해 했습니다. 그리고 손님들이 돌아간 후 주방장을 불렀습니다. 왜 오리다리가 하나냐고 했더니 주방장은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원래 오리다리가 하나잖아요?“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화가 ”나서 나를 바보로 아는 거야?“ 하고 오리농장으로 갔습니다. 마침 오리들이 한발을 들고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주방장은 오리를 가리키면서 ”보세요. 오리다리가 하나잖아요?“ 주인은 화가 나서 손뼉을 쳐서 오리들을 깨웠습니다. 그리고는 ”저걸 똑똑히 보아라“ 그러자 주방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주인님이 손뼉을 치니까 오리들이 숨겨두었던 다리 하나를 내놓잖아요! 저에게도 요리를 잘한다고 손뼉을 쳐주신다면 저도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일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지붕을 뚫고 내린 중풍병자를 고치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이렇게 무리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주님 앞에 나가서 칭찬을 듣지 못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공관복음 기자 모두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말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마가가 가버나움 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는데 몇 명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4명이라고 말해줍니다. 그것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중풍병자를 지붕을 뚫고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붕이 분명히 ‘기와를 벗기고’내렸습니다. 팔레스타인 집들은 옥상이 평평하게 만들고 그 주변에 기와를 덮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 번 설교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팔레스타인의 집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당시 지붕을 쉽게 뜯어낼 수 있는 집이라고 말한 것 또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의외로 쉽게 넘어갑니다. 누가 같지가 않습니다. 누가는 의사이면서 역사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과 검증된 사건이 아니면 잘 다루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루는 사건은 아주 정밀하게 기록합니다. 누구보다도 성경을 자세히 기록한 사람입니다(눅 1:3). 그런데 본문은 마가보다도 더 정확한 내용을 전달해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복음서 본문을 다룰 때 비교적 상세히 소개된 본문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다른 복음서로 정하지 않고 누가복음을 본문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사건을 보는 관점입니다. 핵심을 놓치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 핵심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입니다.

협력자들
오늘 본문에는 아주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협력입니다. 예수님 앞에 병자들이 나온 다른 사건들은 자신이 걸어나왔습니다. 아무리 중한 병자라도 심지어는 소경이나 문둥병자 조차도 직접 예수님 앞에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병자는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인 이 환자는 자신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이 병자를 들고 예수님께 가야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실천했습니다.
중풍병자는 이로 보아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랍비도, 제사장도, 바리세파 사람도, 서기관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친구들은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오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친구가 있습니까? 평소에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면 이런 친구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이 사람은 친구들로부터 사랑 받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요 11:11)고 말했습니다. 눅 12: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온 사람들은 바로 이런 친구들이었습니다.

실천하는 믿음
친구들이 저를(중풍병환자) 침상에 누인 체 데리고 왔을 때는 갈릴리 여러 마을과 더 아랫마을 유대와 예루살렘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소문이 지난번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로 전국에 퍼졌습니다. 이렇게 멀리서 온 사람들은 신분도 높은 분들입니다. 감히 저희 같은 사람들은 옆에서 평생에 한두 번 함께 지내면 영광이랄까 그런 신분 높은 양반들이 온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입니다. 이분들은 저희 같은 사람하고는 다릅니다. 율법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경건한 사람들로 율법준수를 엄격하게 지키는 양반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예수님 주위에 가득 했습니다.

예수님 주의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있어 제가 정상인 몸이라도 혼자의 몸으로도 비집고 들어가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친구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지간한 친구라면 그냥 돌아가자고 했을 것입니다. 정말 저에게는 생명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친구들입니다. 제 친구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갈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남의 집을 뚫는다는 것은 요즘말로하면 기물 파손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남의 물건을 함부로 파손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모르지 않았을 제 친구들은 저를 위해서 그런 부담을 감수해 가면서 기왓장을 뜯어내고 구멍을 뚫어서 저를 예수님께 내려놓은 것입니다. 제가 지붕에서 내려질 때 온통 사람들의 시선은 내게로 쏠렸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은 예수님께 나아간 사람들은 그가 누구라도 꾸중을 듣지 않고 병고침은 물론이요 칭찬 받은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무리한 방법을 시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시라면 나무라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특징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들은 행동 외에 아무 말도 예수님께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저희 믿음을 보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믿음”입니다. 중풍병자는 물론이며 이 친구를 함께 달아 내린 친구들입니다. 이들이 “저희”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행동에 감격해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 갈릴리 땅에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자신만을 아는, 입으로만 토론하는 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저만 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하고는 분명 다른 사람들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이들을 향한 예수님 첫 번째 말씀은 병이 아니라 사람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20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말과는 달랐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전 예수님이 제자들하고 마지막 만찬을 할 때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죄 사함”입니다(마 1:21). 이 말씀을 예수님께 직접들은 사람은 본문의 중풍병자와 누가복음 7:48의 시몬의 집에 들어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던 여자입니다. 두 사람만이 예수님께 직접 죄가 사해졌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은 오늘 처음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반발하는 종교지도자들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선포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병고침을 받고자 나왔다가 생각지도 않은 큰 축복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21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러한 의논이 일어난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심지어 이들이 사용한 “참람”(blasfhmiva”:블라스페미아)은 ‘신성모독’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모독을 말하는 것입니다(계 13:6).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실 때는 세 가지 경우였습니다. ① 죄를 사하실 때(막 2:7) ② 메시야 이심을 주장하실 때(막 14:64) ③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실 때(요 10:30)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심리를 알고 즉시 반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질문은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면 ‘가언적 양도논법’으로 반대자들을 꼼짝없이 만들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확실한 반박을 못하시면 매우 곤란해지십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들고 나온 것은 적당한 불쾌감이 아니라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신성모독’ 죄는 당장 끌어내어 돌로 쳐죽여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와 같은 일을 행할만한 고위층 지도자들이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23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입니다. 표면상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이 더 쉽습니다.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면 병이 나아야 되고 즉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당장 증명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이 생각할 때는 더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죄를 사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유일하게 예수님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눈에 보이는 병도 고쳤습니다.
인자선언
이 때 예수님이 처음 사용한 말이 있습니다. 24절 “인자가 땅에서…”입니다. 예수께서 제일 많이 사용하신 자기표현입니다. ‘인자’(ajnqrwvpou:안드로포스)는 복음서에 90여 회 나옵니다. 그 중에서 누가복음에만 26회 나옵니다. 이 단어는 스데반이 한번 사용한 것 위에는 모두가 예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지금 제일 처음으로 ‘인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니도데모의의 대화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오실 메시야를 소개할 때 ‘인자’가 장차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단 7:13). 사람의 아들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이 말은 반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단 중에 자칭 예수가 있습니다. 모두가 가짜이지요. 이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우깁니다.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스스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하십니다. 그가 원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자연도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즉시 병이 나았습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24절)고 하셨습니다. 침상에 누워있던 사람이 침상을 들쳐 매고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영생의 약속과 육체의 질병도 깨끗하게 해결 받았습니다.

누가는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이야기 해 줍니다.
26절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현현하시는 역사 앞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이 표현한 말은 “기이한 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기이하다”는 ‘예상을 넘는다’는 뜻으로 “오늘날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일을 보았다”입니다. 사람의 이해력으로는 이 사건을 설명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교회를 떠나기 싫어 늘 교회에서 지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찾아다녔습니다. 평일에 예배드리는 교회는 부흥회 하는 교회입니다. 그 때 부흥 강사목사님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교회 2층은 관중석이고 1층은 은 자리요 교회 앞자리는 금 자리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다보면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흥하는 교회일수록 앞자리부터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거나 정체된 교회들은 앞자리가 잘 채워지지 않습니다. 음악회나 운동장에 가도 앞자리가 더 좋은 자리입니다. 조금이라도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으로 다음주부터는 조금 앞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단순히 이 사건의 관중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관중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기 힘듭니다.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저 놀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시기를 바랍니다. 중풍병자를 들고 나갔던 친구들처럼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중풍병자만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병은 중풍병자만 고침을 받았지만 구원의 역사는 모두에게 일어났습니다. 병은 걸릴 수도 나을 수도 있지만 구원은 다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께서 사해 주셔야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나온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 역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믿음대로 예수님은 받아주셨습니다. 고쳐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사람, 의인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 부르짖는 사람, 찾아오는 사람은 모두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는 중풍병자의 친구처럼 내가 친구를 고쳐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데리고 주님께 갈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아파서 병만 고치러 나갔지만 주님은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주앙교회 성도여러분에게도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성령이 오시면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4. 성령이 오시면) / 본문 : 요한복음 16:13-15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네덜란드의 화가 고흐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화가가 되기 전에 탄광에서 광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광원들을 적극적으로 전도했으나 점점 자신이 그들에게 휩쓸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동자가 포장지로 옷을 만들어 입고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등에는 포장지에 쓰인 글이 그대로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깨지기 쉬운 물건이니 취급에 각별히 유의하시오” 고흐는 그때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깨지기 쉬운 존재인가! 그는 그날부터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고 왕성한 전도활동을 펼쳤습니다.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강해지려는 자는 약해지고 나약함과 죄악을 낱낱이 고백하는 자는 강해집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보다 약하지만 정직한 자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저는 올 겨울에 기침으로 한참 고생을 했습니다. 설교를 해야하는 목사로서는 괴로운 일입니다. 날씨가 조금만 춥거나 미세한 먼지나 심지어는 냄새에도 기침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침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얼마나 육체가 연약한 것인가와 이렇게 민감한 목처럼 나는 하나님께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본문 말씀은 요 16:1 “내가 이것을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하나님께 가고 고난이 찾아오는데 그 때 제자들이 실족지 않게 하시려고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힘든 시간이 올 것인데 제자들에게 12절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고 하시면서 이 말씀만을 특별히 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본문 13절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오시면’은 o{tan(호탄)은 ‘언제든지, 양쪽까지’의 뜻이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는 때는 언제든지 입니다. 일정한 때에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우리를 도우십니다. 성령이 나타나셔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경우에만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진리가운데’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모든’(pa’”:파스)이라는 단어를 쉽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모든
제가 목사가 될 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 때 제일 문제가 된 것 중의 하나가 마 28:20절의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의 ‘모든’이라는 말에 걸렸습니다. 네가 잘하는 것만 가르치라든지, 한가지만 잘 배워서 그것을 가르치라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모든 것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한가지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제 자신을 바라보면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예수님이나 가능한 것이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기도했습니다. “주님 어떻게 이 부족한 종이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때 주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이 “네 말이 맞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럼 저는 안 되는 것입니까?” “아니다. 네가 하려고 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대단한 착각을 한 것이지요. 내가 목사가 되니까 내가 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 때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하도 창피해서 하늘을 못 쳐다봅니다. 내가 해 보려고 한 것이 우습지 않습니까? ‘모든’이라는 말은 구약식으로 표현하면 ‘전능’이 됩니다. 어떻게 사람이 전능할 수 있습니까? 전능하신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하셨습니다. “다”(pa’”)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이 모든 것을 친히 가르치십니다. 목사가 모든 것을 가르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성령이 임하면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5-7)

진리
‘모든 진리 가운데로’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의 역할이 진리가운데 인도하는 것입니다. 역할로 보면 성령은 진리가운데 인도하는 것이 되지만 속성으로 보면 성령 자신이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철학이 다릅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모두가 진리는 하나라고 인정할 것입니다. 한 성령 안에서 나왔으니 그 진리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나지 않은 사람들의 진리는 다 다릅니다. 물론 어떤 부분은 성령의 일 부분과 생각이 일치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분들이 성령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일 부분의 생각만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뿐입니다. 이 부분을 확대하여 해석하면 다 똑같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때로는 천주교와 불교가 일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만 따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바로 이 진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 같은 부분이 있다고 해서 그 진리가 다 같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성령은 어디서 나왔느냐가 중요합니다.
“13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성령은 하나님께서 나온 것입니다. 성령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진리’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령’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 오지 않은 사람에게서 난 진리라고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요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성령을 알게되고, 보게되고, 받게되는 것입니다.

인도
“인도하시리니” 성령의 역할이 인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되지 성령을 받아야 되는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성령은 주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주님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믿는데 인도함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우리가 왜 열심히 기도해야 됩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능력 있게 행하기 위해서도 성령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받을 뿐만 아니라 충만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방법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맹장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담당의사는 건망증이 매우 심한 사람이어서 수술을 하다 그만 메스를 환자의 뱃속에 넣고 봉합을 해 버렸습니다. 나중에 실수를 깨달은 의사가 다시 뱃속을 열었는데, 이번에는 가위를 넣고 봉합을 했습니다. 할 수 없이 또 뱃속을 열고 있는데 수술 예정시간이 지나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났습니다. 수술 과정을 알게 된 그 환자는 어이가 없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차라리 지퍼를 다쇼, 지퍼를!’

성령을 받는 방법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 계명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바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해서 보내 주시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주는 분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내가 사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빼앗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그것이 성령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받아야지요. 선물하나 못 받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제일 큰 선물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을 주시는 것입니다.

프린스턴대학의 전신인 뉴저지대학에 총장으로 있던 워터폰박사가 어느 날 교회에 갔더니 한 장로님이 “박사님, 감사합시다.” 그러더랍니다. “박사님, 제가 지금 한 2마일 밖에 있는 저 마을에 살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까지 올 때에는 마차를 타고 옵니다. 오늘 아침에 교회에 나오다가 언덕으로 내려오는데 말이 그만 무슨 소리에 놀라서 냅다 뛰는 바람에 마차 바퀴가 빠지고 몇 바퀴 뒹굴었습니다. 아이쿠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툭툭 털고 일어나 보니 아무 데도 상한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박사가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 언덕을 수천 번이나 오르락내리락 했는데도 오늘까지 무사했으니 내가 더 감사하지요.”

우리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할 일 뿐입니다. 불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중국 용정에 갔을 때 한족 학생들과도 친하게 지내려고 하지 못하는 운동을 한다고 빙 둘러서서 배구를 하는데 제 쪽으로 멀리 날아온 공이 교회 운동장 밖으로 나가 길거리로 굴러가는 것입니다. 그 공이 마차와 차가 혼합해 다녀 위험하겠다 싶어 욕심을 내어 그 공을 잡으려고 가다가 엎어져 한국에서 6개월 동안 치료받고 해 넣은 치아 3개와 새 치아 한 개가 부러졌습니다. 위 치아가 거의 다 빠진 것입니다. 얼굴과 팔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때 지금까지 선교지 다니면서 큰 사고 없이 다닌 것에 대해서 감사했습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어느 모임에서 연설이 조금 길어지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듣던 낸시 부인이 쪽지에다가 짧게 하라고 쪽지에 써서 비서를 시켜 단상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바람에 날려 쪽지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신문 기자가 주워서 보니까 KISS라고 쓰여있습니다. 그래서 그 기자는 레이건 대통령부부는 저렇게 나이가 많은데도 참 로맨틱한 부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KISS라는 단어는 ‘Keep it short, stupid’이란 약자였습니다.
말을 길게 한다고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수 년 전에 전신마비로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제대로 못하지만 시를 써서 큰 은혜를 끼치는 송명희 자매가 간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대신 간증을 하고 나중에 본인이 두 마디를 했습니다. 한 마디는 ‘여러분! 예수의 고난의 흔적이 있습니까?’ 다른 한 마디는 ‘여러분! 바울의 선교적 고통이 있습니까?’ 젖 먹은 힘을 다해 두 마디를 겨우 했는데 그 날 참석했던 성도들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때 저는 사람을 감동시키고 은혜를 끼치는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 말씀 속에 역사 하시는 성령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선물만큼 큰 선물은 없습니다.
시편은 ‘인도’가 35번 이상 나와 성경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곳입니다. 다른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위주로 되어있지만 시편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시편 기자들이 말한 것처럼 인도함이 되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시는 시 23편입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제가 잘 사용하는 방법으로 다시 읽습니다. 일인칭 단어인 ‘나 또는 내가’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읽는 것입니다.

1 여호와는 영제의 목자시니 영제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영제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영제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영제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영제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영제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영제의 원수의 목전에서 영제에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영제의 머리에 바르셨으니 영제의
잔이 넘치나이다
6 영제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영제를 따르리니 영제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아멘-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산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3.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산다) / 본문 : 누가복음 7:36-50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 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 가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배가 난파했습니다. 이 배에는 두 청년과 여자하나가 간신히 헤엄쳐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도착한 곳이 무인도였습니다. 인간이 있으면 언제나 역사가 쓰여지게 마련입니다. 이 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어느 나라 사람이냐에 따라서 삼각관계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만약 스페인 사람이라면 그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투우와 같은 열정적이며 비극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두 청년은 여자 하나를 놓고 바로 결투를 시작할 겁니다.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여인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또 달라집니다. 열정적인 이탈리아 여인들은 그렇게 수동적인 사랑은 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이 싸우기 전에 야음을 타서 방해자를 해치우고 자기가 좋아하는 청년과 사랑을 맺을 것입니다.
미국인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을 겁니다. 미국인들은 어디를 가나 돈벌 궁리에 비즈니스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어 평온할 것입니다. 또 영국인이었더라도 삼각관계의 드라마는 없습니다. 영국인들은 예의를 찾는 신사들이라서 자진해서 자기 소개를 하는 법이 없습니다. 낯선 사람끼리 모여 소개해 줄 사람이 없으면 몇 십 년을 가도 서로 말하지도 않고 아는 체도 하지 않습니다. 무인도에서도 그랬을 겁니다.
프랑스 인이라도 유혈극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이해심이 많고 눈치가 빨라서 두 사람이 한 여인을 놓고 적당히 서로 편리하게 지낼 것입니다.
문제는 한국인의 경우라면 복잡해집니다. 여자 하나를 놓고 싸운다는 것은 대장부의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남아 있는 두 사람의 행복을 빌며 한 사람이 먼저 바다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그러자 곧 여인도 그 뒤를 따라 투신 자살합니다. 혼자 남은 남자 역시 이렇게는 못살겠다며 몸을 던집니다. 이제 무인도는 옛날처럼 무인도로 막을 내립니다.

이 이야기는 민족성에 따라서 사랑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민족이 걸어온 길, 역사나 환경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민족성과 관계가 있는 사랑이야기가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서 차이가 있는 그런 사랑이야기도 아닙니다. 한 여인의 영혼이 몸부림치는 사랑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의 사건은 이 사건 말고 십자가 죽음 직전에 한번 더 있었습니다. 그 때의 장소는 베다니에 사는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일어났습니다(마 26:6-13, 막 14:3-9, 요 12:1-8). 예수님을 집에 초대한 사람의 이름은 같습니다. 둘 다 시몬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초대한 사람은 “한 바리새인이”라고 나옵니다. 당시에 바리새인이 제일 많기도 했지만, 예수님을 적대시하던 바리새인이 식사에 초대한다는 것이 이례적이어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전에 베다니 문둥병자 집에서 나타났던 반대세력은 제자들(가롯유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본문에는 바로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 잔치의 주인이었고 여인은 불청객이었습니다.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이 동네 가버나움 사람들에게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경건한 사람인가를 뽑으라면 모두가 시몬을 뽑을 것입니다. 시몬은 신학생이자 성직자입니다. 또한 그가 속한 바리세파는 오늘날로 말하면 제일 잘 나가는 큰 교단의 소속인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이 사람이 더 경건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만 빼고는 말입니다.
두 사람을 잘 아시는 예수님은 이 여자를 더 경건한 사람으로 선택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이유를 설명하시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딴 곳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창녀가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온 거야?” 이날 만찬은 초대받은 상류층 사람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누가 이 쓰레기 같은 여자를 들여보냈단 말인가? 시몬은 이 잔치가 끝나면 하인들을 불러 분명히 나무랄 것입니다. 감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이런 여자가 들어오도록 놔두었냐고 할 것입니다.
‘저 꼬락서니 좀 봐. 예수의 발 밑에 조아리고는 발에다 입을 맞추다니!’ 이러한 행동은 이 지역에서는 왕에게나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이러한 행위만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시몬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정말 메시야라면 이런 창녀 같은 여자와는 상대조차 하지 말아야 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은 시몬과 대화를 나누기 원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선생님 말씀하십시오.” 시몬이 대답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고리대금업자에게 빚을 진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2,500만원(500데나리온), 한 사람은 250만원(50데나리온)의 빚을 졌다. 둘 다 빚을 값을 갚을 돈이 없어 둘 사람에게 모두 빚을 면제해 주었다. 시몬아! 네 생각에는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제 생각에는 더 많이 면제를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네 말이 맞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보시며 시몬에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보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는 구나,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닦아주었다.” 유대인들은 손님이 오면 발 씻을 물을 늘 준비합니다.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을 초청하고 당연한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이 깨뜨린 향수로 방안 가득 찼습니다. 이 향기를 아무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받았던 훈련의 영향일까요? 학력의 높고 낮음일까요? 재산의 많고 적음일까요? 가문의 차이일까요? 미래에 대한 보장일까요? 무엇으로 설명해도 시몬은 여인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그러나 시몬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이 여인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여인에게 더 없는 보물입니다. 그 보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 여인이 언제부터 알게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산상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를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문둥병자에게 손 내미시는 것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용서하시는 주님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이 여인은 목마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으로 먹이 말랐고, 후회로 목이 말랐고, 육제적 사랑이 아닌 진정한 사랑에 목이 말랐습니다. 이 여인은 영혼에 갈 급합니다.
예수님께서 은혜의 잔을 내밀자 혀끝으로 맛을 보거나 입술만 살짝 적시거나 홀짝거리면서 먹은 것이 아닙니다. 이 잔에 입을 대고 벌컥 벌컥 들이마신 것입니다. 마치 사막을 여행하던 사람이 오아시스를 만나서 물을 들이키듯 먹은 것입니다. 이 여인의 영혼은 시편기자가 노래한 것과 같았습니다. “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이 여인은 자신의 영혼 깊이 흘러내리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반면 예수님을 초대한 시몬은 자신이 목마른 사람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시몬과 같은 은혜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분석하기 바빴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놓고 토론하고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시몬은 용서받지 못할 자가 아니라 용서를 구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여인이 은혜를 마시는 동안 시몬은 분했습니다. 여인이 나누어주기에 충분한 사랑을 공급받고 있을 때 시몬은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사랑을 짜내려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충만히 공급받은 사람만이 남을 사랑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충분하지 못합니다. 남을 사랑할 만큼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주님께 받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 사랑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오셨습니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9-10)
더 많은 사랑을 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더 많은 사랑을 공급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서 이 사랑을 기대한 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산산이 깨어진 인간이 회복될 수 없습니다. 시기와 질투, 복수심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저는 마이너스 통장을 두 세 개 가지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보면 마이너스된 통장은 아래에 뚝 떨어져 있습니다. 이곳에 돈이 채워지지 않으면 쓸 돈이 없습니다. 남에게 나누어주기는커녕 내 자신이 쓸 돈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하는 사람들이 먼저 채워져야 합니다. 저는 선교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사람입니다. 우리교회도 선교하는 교회로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채워지지 않고 나누어주려고만 하면 부도가 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근원 되시는 주님께 채워야합니다.

영화에서 종종 보는 마약 거래 장면은 거의 예외 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마약과 돈의 교환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돕니다. 돈 가방이 비어 있거나 위조지폐로 가득 차 있지나 않은지, 혹은 밀가루가 섞인 마약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가 번뜩입니다. 그러다가 빈 가방이나 쓰레기를 가지고 나온 눈치가 보이면 양측의 총구는 불을 뿜으며 피를 튀깁니다. 손해 보는 교환을 하지 않으려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환은 다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 가져오는 것은 모두 ‘쓰레기’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모두 천국의 복으로 교환하여 주십니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언짢아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즐거워하십니다. 우리의 고통, 절망, 미움, 원망, 분노의 쓰레기를 평안, 행복, 희망, 사랑으로 바꿔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나도 기쁘고 하나님도 기쁘신 ‘즐거운 교환의 장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 사랑을 공급받을 수 있을까요? 누구나 인정하는 성경에 사랑 장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정입니다. 그 중에서도 4절부터 7절은 핵심입니다. 한번 다같이 읽어볼까요.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지난주 말씀에서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 중에 3번째로 “하나님이 나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본문의 ‘사랑’ 대신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영제는 오래 참고 영제는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영제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그만하지요.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거짓말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래 참지도 못했고, 온유하지도 못했고, 자랑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의 근원 되십니다. ‘사랑’ 대신 ‘예수님’을 넣어 읽겠습니다.
“4 예수님은 오래 참고 예수님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여인은 주님께 향유를 부은 행동은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해서 교회에 오신 것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본문 “48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 50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여인은 영원토록 오늘의 일을 기억할 것이며 전할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사는 것입니다.

77 복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2. 77 복음) / 본문 : 마태복음 7:7-11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저는 어려서 밥을 먹다 밥알을 흘리거나 걷다가 잘 넘어져 어머니로부터 늘 ‘칠칠맞다’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7하면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7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마 18:21) 베드로의 생각에는 유대인이 용서하는 횟수는 많이 해야 3번이니까 배로 계산해서 6번이고 여기에 한번 더 인심을 써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고 생각해낸 숫자가 7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8:22).
그러나 오늘 본문의 77 복음은 그런 뜻에서 부여한 숫자가 아닙니다. 벌써 눈치 빠른 분은 아셨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입니다. 여러분들이 꼭 기억하시라고 ‘77 복음’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처음에는 ‘희망의 문이 있다’라고 정했었습니다. 7의 숫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숫자요, 7곱 촛대요, 신약의 7곱 집사와 계시록의 7곱 교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구약에 보면 성전에서 사용할 기구에 일곱 번 뿌림으로 거룩하게 만들었습니다(레 8:11). 고침을 받은 문둥 병자도 제사장이 일곱 번 뿌림으로 깨끗해졌다는 것을 선언했습니다. 7의 숫자의 의미는 하나님의 수이며, 교회의 수이며, 정결케 됨의 수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태복음 7장 7절은 물론 그런 의미로 부여된 수는 아닙니다만 분명한 것은 제가 처음에 정했던 본문의 제목처럼 ‘희망의 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테는 그가 쓴 신곡 지옥 편에서 지옥문 입구에 “이 곳에 들어가는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라는 말이 쓰여져 있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의 소망이 없는 곳, 영원한 저주와 형벌과 심판이 있는 곳,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있는 곳, 그러나 죽을 수도 없는 곳, 그곳이 지옥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 주앙교회 성도여러분에게는 본문의 말씀이 우리를 살려내는 진정한 ‘77 복음’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에게 평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누구도 이 죽음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음의 문 앞에서는 인간 세상에서 주어졌던 것들이 모두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니 죽음보다 인간에 더 평등하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본문을 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의 평등은 우리 인생의 끝에서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다릅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복음이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아직 우리가 호흡하고 있을 때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구하라는 것입니다. 찾으라는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히려 우리에게 사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꼭 기도하라고요. 사실 우리가 예수님께 간청을 해야하는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주실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의 직업이 우상을 만드는 일이었답니다. 한번은 그 아버지가 집을 비운사이 하나님을 잘 믿는 아브라함이 망치를 가지고 다 부셔버리고 한 우상의 손에 그 망치를 드려 놓았답니다.
얼마 후 돌아온 아버지는 난리가 났습니다. 정성을 다해 만들어 놓은, 이제 돈 이 될 상품들이 다 부셔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반쯤 죽일 양으로 씩씩대며 물었습니다.
“누가 이런 짓을 했니?”
아브라함은 망치를 들고 있는 모형 우상을 가리키며, “저놈이 갑자기 망치를 들더니 다 부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저건 인형에 불과할 뿐이야.”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러면 아버지는 왜 아무 힘도 없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런 장난감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팔며 거기에 소원을 빌며 절하라고 하십니까?”라고 반문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계 7:2)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이 사실은 아주 간단한 것 같지만 아주 중요합니다. 왜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솔직히 잘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능력이 많은 부모님이 살아 계신다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어려움이 있으면 부모님께 간구 할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을 저주하는 친구를 향해서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5-26)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전능자로 믿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 147:5절 “우리 주는 광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출 6:3, 창 28:3, 35:11, 43:14, 48:3, 49:24, 25).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시 50:1)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더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욥기서를 보면 ‘전능’이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30회 이상) 나옵니다. 고난 중에 전능자를 제일 많이 찾게된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전능자로 믿는다면 기도할 것입니다. 그분을 의지할 것입니다. 욥이 고백한 한 절을 봅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욥 42:2)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날 성자 프란체스코에게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했다. “선생님, 선생님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선생님을 만나기만 하면 사람들이 변하는데 그 놀라운 사역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대답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느 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 보셨습니다. 그리고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땅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지하며 가장 미련한 한 사람을 보기 시작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을 통해서 내 강함과 지혜로움과 능력을 나타내리라’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이유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때때로 인간의 선택 기준과 다릅니다. 세상 적인 조건이 전혀 구비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감당할 때 사람들은 그 사람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을 목격하고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을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2:28-29)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위의 두 가지 경우를 다 인정한다해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버지가 아무리 돈이 많으면 무엇합니까? 나와 상관이 없는 것이지요. 정말 하나님은 우리 주님은 그러실 까요?
여러분! 이 부분에서 희망을 가지셔도 좋습니다. 우리의 이런 염려를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하신 예수님은 떨쳐 버리시기 위해서 얼마나 우리를 향해 간청하시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행동하신 것을 보면 아실 수 있잖아요. 예수님이 거절한 사람은 돈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병든 사람도 아닙니다. 돌에 맞아 죽을 짓을 한 창녀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거절한 사람은 병들지 않았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교만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행위로서 안식일만 지키면 될 것처럼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율법을 다 지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우리구주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안됩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사람,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 예수님을 부르는 사람은 모두 응답하십니다.
구약의 한 인물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목자요, 음악가요, 전쟁의 용사요, 왕이었습니다.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시편 23: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을 통해서 왜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셨는지 마태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예수님의 족보를 시작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 23:2절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당대 제일의 왕이, 용사중의 용사가 그러면서도 찬양하고 악기를 다루며 부드러움을 겸비한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다윗이 줄기차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이 왕이기 때문에, 전쟁의 용사이기 때문에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부르짖는 다윗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구해 봅시다. 찾아봅시다. 두드려 봅시다. 이제 행동하면 됩니다. 구하면 됩니다. 찾으면 됩니다. 두드리면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못할 일이 아닙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에 대한 약속도 해 주셨습니다.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목사님 제게 걱정 없는 곳을 가르쳐 주십시오. 저도 그런 곳에 가서 살고 싶습니다.”어떤 청년이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대답은 “바로 이 넘어 공동묘지입니다.”문제가 없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뿐이라는 것입니다. 갈등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고민이 많은 남자가 정신과를 방문했습니다.
환자 : “선생님, 저는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는데요. 제가 꼭 소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의사 : “언제부터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나요?”
환자 : “송아지 때부터요.”

염려는 믿음이 아닙니다. 염려가 찾아오는 많은 이유 가운데 성도들에게 주된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전능자라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대학의 심리학 팀이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을 조사하여 보니, 사람들의 염려거리 중 40%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공연한 염려를 그 만큼 많이 하는 것입니다. 염려거리 중의 30%는 이미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염려한다고 되는 일들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쓸데없는 염려거리들입니다. 그리고 10%는 병에 관한 염려거리입니다. 그 중엔 실제는 걸리지 않을 병에 관한 것도 많았습니다. 진짜로 염려할만한 것은 8%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8%중에서도 정말로 머리를 싸매고 염려할만한 것은 별로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염려해야 소용도 없는 일들에 대해 염려들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쓸데없는 염려들을 가지고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제 우리의 염려 주께 맡기고 다윗처럼 주님의 인도함을 믿으시기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원하고 원하였노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31. 원하고 원하였노라) / 본문 : 누가복음 22:14-15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오늘은 설교의 서론을 없애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설교할 때 서론 하다 30분이 넘게 지난적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오늘 설교가 30분 일찍 끝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부가 신혼 때 밥하다 가끔 잘 태우기도 합니다. 때로는 설익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맛있다면서 날 쌀도 씹을 태세입니다. 그러나 살다가 지루해지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습니다. 밥이 되니, 무르니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은 언제나 신혼 같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밥상을 잘 차려놓은 어머님의 마음은 식구들이 맛있게 먹어주는 것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잘 다스리고 잘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4-27)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저와 여러분을 일시키려고, 부려먹으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복 주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고 하십니다. 그 복은 영원한 나라를 상속자로 물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는데, 사실은 이런 자에게 주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5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일에 분명해야 합니다. 양다리 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간쯤 있다가 유리해 지는 쪽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책임지는 쪽을 택해야 합니다. 그 길이 비록 험하고 어려워도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에드워드는 양철 캐비닛을 만들면서 열등 의식과 반항심, 원망 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겨우 이런 공장에서 망치나 두들기며 일하다니….”
추운 겨울날, 런던 거리를 배회하던 에드워드는 어느 작은 교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거듭남에 대해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던 에드워드의 마음에는 ‘그렇다, 나는 거듭나야 한다’는 강한 소원이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성령이 그에게 임했고,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일 후, 에드워드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 망치는 이제 노래하며 춤을 춘다. 그리고 내 눈동자에는 생기가 돌고 내 마음속에는 생수가 솟는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행복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소망되신 주님께 감사의 시를 지어 드렸습니다. 그 시가 바로 찬송가 539장입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예수님 때 사람들이 원한 것

서커스단의 구경나온 사람들은 처음에 공중에서 한바퀴 도는 것이 신기합니다. 그러나 매일 그것을 보노라면 별로 신기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두 번 돌아보라고 하고 두 번 돌면 세 번 요구합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도 계속해서 기적(표적)만 보여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마 12:38) 이 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첫 기적사건인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요2:1-12)을 비롯해 고기잡이 기적(눅5:4-9), 귀신을 쫓아내심(막1:23-28, 눅4:33-37), 베드로 장모와 병자들을 고치심(마8:14-17, 막1:29-34, 눅4:38-41), 문둥병자를 고치심(마8:1-4, 막1:40-45, 눅5:12-16), 중풍병자를 고치심(마9:2-8, 막2:2-12, 눅5:18-26),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를 고치심(요5:2-16), 손 마른 자를 고치심(마12:9-13, 막3:1-5, 눅6:6-10), 백부장 하인의 병고침(마8:5-13, 눅7:2-10), 나인성 과부 아들 살리심(눅7:11-17), 폭풍을 잔잔케 하심(마8:24-27, 막4:37-41, 눅8:23-25), 귀신을 쫓아내심(마8:28-34, 막5:1-20, 눅8:26-39), 혈루증 여인을 고치심(마9:20-22),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마9:18-26, 막5:22-24, 눅8:41-56), 소경 둘을 고치심(마9:27-34)”등이 있었습니다. 고기잡이 기적을 비롯해 폭풍을 잠잠케 하신 기적은 자연이 순종한 기적이며 불치병을 고침은 물론 죽은 자를 살리신 2번의 기적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흠을 잡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예수님께는 이런 요구를 하고 있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막 12:38-39, 눅 20:46)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의 어머니들까지 나섰습니다. 치마 바람이 만만치 않습니다.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0-21, 막 10:35-36)라고 구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그것을 이루어주시면 하나님께 목숨이라도 내어놓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 이루어지며 또 그 다음 것을 달라고 할 것입니다. 자꾸만 더 좋은 것을 내어놓으라는 식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만족함이 없습니다. 자기의 욕심에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

고침 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한 것이 고쳐지기를 원하십니다. 병 고침 받기를 원하십니다.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2-3, 막 1:40-41, 눅 5:12-13) 우리가 깨끗하게 고침 받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마 20:33, 눅 18:41)

불이 붙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이 말씀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와 같은 의미로 전달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불이 붙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거지가 화실 근처의 길거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한 화가가 그의 창문을 통해 패배감에 젖어 절망의 계곡에 떨어진 그 거지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중요한 변화를 주면서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 변화란, 초점이 없이 허공 중에 박힌 그 거지의 눈을 생기 있고 활기에 넘치는 의욕에 찬 사람의 번쩍이는 눈으로 바꾸어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화가는 또한 맥이 풀린 그 거지의 힘없는 얼굴을 강철같은 굳은 의지의 결단성이 강한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그 화가는 거지를 불러 자기가 그린 그 그림을 보게 하였습니다. 거지는 그 그림 속의 모델이 바로 자신이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게 누구입니까?”
그 거지가 물었을 때 화가는 조용히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여 그를 가리켰습니다.
그 거지는 다시 초상화를 보면서도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의심했습니다.
“저 그림의 사람이 바로 저란 말인가요? 저 그림의 사람이 도대체 저일 수가 있을까요?”
거지는 머뭇거리면서 힘없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화가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내가 당신을 보고 그린 그림이 저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거지는 그 순간 그의 어깨를 똑바로 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본 내가 바로 저 그림 속의 사람이라면, 나는 앞으로 저 그림의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주님이 보신 영광을 우리도 보기를 원하십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요 17:24)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아버지의 원대로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마 26:42, 눅 22:45)

우리가 원해야 하는 것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우리의 기도가 주님 앞에 상달되기를 원해야 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9:13에서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원하고 원했다는 것은 갈망했다는 것입니다. 간절히 원했다는 것입니다. 왜 이토록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보내시기를 원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은 몰랐지만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단순한 의식행위 같지만 이 행위를 통해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 십자가의 피는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위해 흘리는 피였던 것입니다. 동시에 내 피가 십자가에서 흘려지는 것이었습니다. 내 살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원해야 하는 것은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5)는 말씀과 “…오늘 네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 26:29)한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의 소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입니다. 이 두 형제는 갈릴리 어부출신인데 예수님께 선택받고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라온 제자들입니다. 이 두 형제의 마지막을 잘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이 이들의 죽음까지는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안드레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파하다 에뎃사에 도착했습니다. 이 나라에는 에지스라는 총독이 있었는데 자기들의 섬기는 우상을 대적하는 설교를 한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고소하는 자들에게 “내가 죽을 것을 두려워했다면 그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안드레를 죽이기 위해서 그를 더욱 천천히 죽게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을 박은 것이 아니라 밧줄로 묶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이틀동안 사람들에게 설교하다가 11월 30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베드로는 헤롯 아그립바가 야고보를 죽인 후 그것이 유대인들을 기쁘게 했다는 사실을 알자 그 다음에 베드로를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베드로는 체포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나님(천사)의 도움으로 석방이 되었는데 이 일로 잔뜩 화가 난 헤롯은 베드로가 갇혀 있던 감옥의 간수들을 모두 사형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로마로 갔는데 그곳에서 황제의 측근인 시몬 마구스을 개종시킵니다. 이 사실에 더욱 격분한 황제는 베드로와 바울을 모두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간수장 두 사람과 47명의 다른 사람들을 개종시켰습니다. 9개월간 감옥에 있다가 베드로는 사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많은 매질을 당하면서도 그는 스스로 십자가에 주님과 같이 똑바로 박힐 수 없다고 하여 자신을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요청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복음을 위하여 순교한 순교자들이 많습니다. 이것을 기록한 것을 순교사라고 합니다. 이 순교사의 금자탑이라 할만큼 두드러진 인물은 서머나교회의 감독 폴리캅입니다. 그는 2세기 초 중엽 서머나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던 감독인데, 그의 장엄한 순교는 모든 사람 중에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86세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봉사했습니다.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였기에 믿는 사람들은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를 존경했습니다. 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폴리캅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형 집행인은 그에게 말했습니다. “감독이여, 나는 당신이 이렇게 나이 많은 노인의 몸으로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을 원치 않소. 그러니 거짓으로라도 제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한마디만 해주시오. 그러면 당신을 놓아 줄 테니 다른 지방에 가서 예수를 믿든지 전도를 하든지 마음대로 하시오.” 그때에 폴리캅은 대답했습니다. “86년 동안 나는 그분을 섬겨왔습니다. 그분은 내게 아무런 잘못도 없고 거짓말을 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분,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한마디의 거짓말도 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와 교회를 위하여 두 시간 동안 큰 소리로 기도한 뒤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합니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약한 것을 고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복음 전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불같이 타오르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