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제자 요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7. 사랑하는 제자 요한) / 요 21:20-23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덴마크의 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왕자가 말을 타고 시골로 사냥을 가면서 빈민촌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 시골길에서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습니다. 천사같이 아름답고 깨끗한 여인이었습니다. 왕궁에 돌아와서도 그는 그 여인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끝없이 생각나고, 그리웠습니다.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여인에게 내 사랑의 진실을 믿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첫째 고민이었습니다. 둘째는 신분의 격차가 엄청납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합니다. 신분의 격차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알릴 수 있을까? 배우고 못 배우고, 가난하고 부하고가 문제 안됩니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의 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겠는데….. 그리고 세 째로, 잘되고 못되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문제가 있든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네 째로, 어떻게 하면 그녀도 내가 저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내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고, 저도 나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그는 이것을 고민했습니다. 물론 연구도 했습니다. 주변의 의견도 구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그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왕궁에서 입던 화려한 옷을 벗어버리고 그녀가 사는 시골 마을로 가서 조그마한 방을 하나 세 얻고 목수가 됩니다.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풍습을 배우고,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깊이 사귀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순박한 생활 속에 엄청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동네 사람들과 부지런히 사귀었습니다. 마침내는 그 여인하고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듯 모든 넋을 버리고 당신을 찾아왔다,라고. 비로소 이 여인은 왕자의 엄청난 사랑을 알고, 믿고, 깨닫고 받아들여 왕궁으로 들어가 왕후가 되었습니다.

1. 요한의 이름
레오날도 다빈치(Leonardd da Vinci)는 그림 [최후의 만찬]에서 소녀처럼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흰 손을 겹치고 있는 요한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십대의 말기에 주 예수를 만났을 때에는 비록 사도들 가운데서 나이가 가장 어리며 나약한 사람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를 “보아너게”(우뢰의 아들)이라고 별명을 붙여주셨습니다(막 3:17). 이 형제들은 베드로 못지 않은 과격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다빈치가 그린 그림에서 나타난 것처럼 예수님은 요한을 완전히 변화 시키셨습니다. 오늘 우리 또한 요한과 같이 변화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요한의 초기 생활
형제인 야고보와 함께 요한은 가버나움에서 베드로, 안드레와 고기를 잡으며 살았습니다. 요한의 아버지는 세베대였습니다(마 10:2). 고기잡이는 근육을 발달시키는 힘든 노동입니다. 거센 파도를 헤치면서 노를 저어야하고 그물을 힘들게 털어 내야 합니다. 때문에 손바닥에는 못이 박힙니다. 뙤약볕 아래서 그물을 수선하는 일은 구리 빛 얼굴로 만듭니다.
안드레와 함께 요한은 세례 요한에 의해서 예수님께 인도되었습니다. 예수님과 몇 말씀을 나눈 요한은 그가 구세주임을 확신하였습니다. 요한은 육십년이 지난 뒤에도 처음으로 예수님과 대화한 감격적인 시간인 시간을 회상했습니다. 이 순간부터 예수님은 요한의 생애에 빛이 되셨습니다. 요한은 “예수의 가장 사랑 받는 사람”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처음 만난 후 요한은 고기잡이하러 돌아왔으나 나중에는 예수님과 동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고기잡이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베드로, 안드레와 함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하여 큰마음을 먹고 아버지와 배와 고기와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3. 요한의 성품
1)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믿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불사를 것을 요구한 요한
눅 9:53-55절(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 들이지 아니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데 유대인과 오랜 반목사이에 있는 사마라인들이 그 길을 막고 나섰습니다. 사마리아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 유대인은 그보다 더 사마리아인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 또한 유대인인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가는 길을 막은 것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구원주이신 예수님의 길을 막는 사마리아인에 대해서 분개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누구를 멸하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심판주가 아닌 구원주로 오신 것입니다. 바로 이 말을 할 때 앞장선 사람이 야고보와 요한 형제였습니다.

2) 예수님의 좌 우편에 앉아 권세를 누리기 원한 야고보와 요한
막 10:35-38절(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 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좌 우편에 앉기를 주님께 부탁한 제자 역시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3)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에게 그 일을 중단하도록 요구한 요한
어느 마을로 복음을 전하러 가던 중에 요한은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동요하는가 보려고 요한은 앞으로 다가갔다. 귀신들린 한 소년이 땅 위를 뒹굴면서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받은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미처 손도 쓰기 전에 낮선 사람이 귀신을 쫓아낸 것입니다. 그 소년은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뒤틀다가 조용해지더니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선한 일도 내가 하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와서 이렇게 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요한은 “내가 해야 되는데 알지도 모르는 사람이, 예수님 제자도 아니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다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사람에게 “감히 어떻게 당신이 주님의 이름을 쓸 수 있단 말이오? 도대체 당신은 무슨 권능이 있길래 이런 일을 하오?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권세도 받지 못한 사람이요. 나는 주님의 가까운 사람 중에 한 사람이요. 이전에 나는 당신을 본 일이 없오. 결코 주님의 이름을 쓰지 마시오”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말할 수도 없으며 예수의 이름으로는 일도 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요한은 몰아쳤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여쭈었습니다(막 9:38). 예수께서는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한자니라”(눅 9:50)고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위의 세 가지 사항만 보아도 요한은 우리가 아는 데로 결코 성격이 온순하다든가 남을 포용할 만한 인물이 못됩니다. 자신만 알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쫓아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요한의 변화
어느 정원사가 정원의 흙을 보고 “너는 어떻게 그처럼 좋은 향기를 풍기느냐?”고 물었더니 진흙은 “사람들이나를 장미꽃 옆에 두었기 때문이랍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항상 주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성급하고 이기적인 청년 요한은 성인이 되어 온유한 성격으로 변했습니다. 요한의 잘못된 야망은 없어졌습니다. 편협한 외곬수적 성격도 사라졌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격렬한 성격의 청년에서 남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랑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요한이 복음서뿐만 아니라 서신과 계시록도 썼다고 봅니다. 약 일 세기 전에 일부 학들이 “요한서신을 쓴 사람이 과연 사도 요한이냐”하는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들은 복음서의 요한과 서신의 요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요한을 야망으로 가득 차 있고 화를 잘 내며 도량이 좁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비하여 요한서신의 기록자인 요한은 사랑의 정수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주 예수에 의하여 우뢰의 아들에서 사랑의 사도로 변한 것입니다.

요한이 이렇게 변하는 데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의 인격 속에는 타고난 성격이 항상 깃들어 있기 때문에 폭발적인 잠재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함께 해주시는 권능과 근엄한 용모는 여러 갈래로 찢어진 요한의 옳지 못한 정력을 온유한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5. 요한이 보여준 사랑
우뢰와 같은 요한의 성격이 온유하게 변한 것은 십자가와 초대교회에의 성심과 용감성도 설명해 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가 어느 사도보다도 먼저 예수님에게로 다시 돌아온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멀리 떨어져서 뒤따르고 있을 때 요한은 용감하게 대제사장의 집 뜰로 들어갔습니다(요 18:15-16).
예수님이 심문을 받던 그곳에서 요한은 베드로도 뜰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종을 해쳤기 때문에 겁에 질려 베드로가 숯불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을 때 요한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재판장에게로 곧장 들어갔습니다.
모든 사도 가운데서 오직 요한 만이 십자가 옆에 서서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적들이 악의에 찬 독설을 내뿜을 때에도 요한은 도망치지 않고 적들의 한가운데 당당하게 서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들은 제자도 유일하게 요한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바라보시면서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고 하시고 요한에게 그 어머니를 가리키며 “보라, 네 어머니라”하셨습니다(요 19:26-27).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마리아를 모셔온 후 요한은 다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으려고 서둘러 되돌아갔습니다. 오직 요한 만이 “내가 목이 마르다” 또 “다 이루었다”는 최후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고개를 떨구시고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시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 피와 물이 나온 것과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사한 사실을 말한 것도 요한 뿐입니다(요 19:38-42). 요한은 용감했으며 최후까지 예수님께 헌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살인마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어린양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요3:16) 유명한 말씀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요한은 책임감으로서의 사랑뿐만 아니라 사도직의 징표로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가”(요 13:34-35)하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상기시켜 주었다. 요한은 그의 저술에서 오십 번 이상이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사랑 받는 요한은 예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믿었으며 밤을 새워 고리를 잡은 후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본 제자였습니다(요 20:8, 21:7).

요한의 사랑은 무조건 온유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직설적이며 강한 성품으로, 거짓을 행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서슴치 않고 경고했습니다(요일 1:6, 2:4).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당부했습니다.(요2 10). 또 디오레베는 교만하여 사악한 말을 하는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세상에 공개했습니다(요삼 9:10). 요한의 우뢰 같은 성격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그의 강경한 어조도 사랑과 겸손으로 변화되어 나타납니다.

은혜 속에 살고 성장하는 것에 관하여 요한의 생애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요한은 불같은 성급한 성격을 서서히 가라앉히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권세에 순종했습니다. 여든 살이 되어서라도 사랑하며 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리스도의 권세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요한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성도들에게 그의 삶을 통해서 어떤 문제와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를 보면, 한 마디로 말한다면 “사랑의 훈련”입니다.
요한 처럼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3:1절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라고 말한 것처럼 주님의 가슴에 깊이 기대고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면서 그 주님의 호흡을 느낄 때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난 부부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남편에 대한 아내의 불만은 커져갔고 가정의 화평이 깨지자 부부는 고민 끝에 각자 종이상자를 하나씩 준비하여 서로에게 불만이 생길 때마다 불만 내용을 글로 써서 그곳에 집어넣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한달 후 상자를 서로 바꾸어 보기로 했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발을 씻기는 선생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6. 발을 씻기는 선생) / 요 13:12-17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중세 어느 수도원에 수도원장이 수도사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원장은 어느 수도사에게 오늘은 당신이 설교하라 갑자기 시켰습니다. 무척 당황한 수도사가 강당에 올라갔는데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청중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무슨 설교할지 아십니까?” 아무도 알리 없었죠, 청중들이 모릅니다. 그랬더니 수도사가 “나도 모릅니다”하고 내려왔어요.
수도원장이 화가 나서 다음날 또 갑자기 시켰습니다. 그러자 이 수도사가 올라가서 전날과 똑같이 묻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어떤 설교할지 아십니까?” 어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청중들이 오늘은 “예. 압니다” 그러자 수도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알면 됐습니다. 다 아는데 무엇 하러 설교합니까?”
수도원장이 노발대발하면서 다음날 또 시켰습니다. 수도사가 올라가서 똑같이 묻습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무슨 설교할지 아십니까?” 어제 그제 속았기 때문에 청중 절반은 예, 절반은 아니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수도사가 말하길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내려왔습니다. 크게 혼날 줄 알았는데 수도원장이 우리 수도원에서 했던 설교 중에 가장 뛰어난 설교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의 표어가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깨닫는 자가 희생하고 섬기면 모르는 자가 배우게 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섬겼으니 너희가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자, 먼저 깨닫는 자가 섬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조건적인 선생 허락
예수님은 마태복음 23:8-12절에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선생(랍비)들은 대접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자신에게 몸을 굽혀 인사하는 것을 즐기고, 잔치 집에 가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이 선생님을 대접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선생 자신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
예수님은 당시 선생(랍비)들 하고는 달랐습니다.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병자를 고쳐주고 이적을 행하니까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예수님을 선생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모함하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마 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마 22: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중에 어느 계명이 …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마 19:16) 어떤 사람이(율법을 잘지킨 유대인)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마 22:16) 자기 제자들(바리새인)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요 3:2) 그가(니고데모-로마관원)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막 10:51)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막 9: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이렇게 부르는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본문 13-14절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주요, 선생이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발을 씻기신 것을 전제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선생이 되려고 한다면 남의 발을 먼저 씻겨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지 주인이 어떻게 종의 발을 씻어줍니까? 지금 식으로 한번 이해해 봅시다. 운전기사가 있다고 합시다. 운전기사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어야지 주인이 나가서 운전기사 문을 열어준다면 이해가 되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절대로 대접받고자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단이나 사이비라고 말하는 자칭 교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 싶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이비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예수님처럼 남의 발을 씻기는 사람인지 아닌지 보면 압니다. 예수님은 선생하고 싶으신 것이 아닙니다. 대접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틴은 25불을 자기고 고향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왔습니다. 그는 작은 대학에 입학했지만 등록금은커녕 당장 먹고 지낼 돈도 없었습니다. 누가 버린 헌 자동차를 집으로 삽고 일자리를 구했는데 그는 점심을 싸갈 수도 없었습니다. 일꾼들은 나무 밑에 모여 식사를 하는데 마틴은 배고픔을 달래며 혼자 그늘 아래 누워있었습니다. 그 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감독의 목소리가 들여왔습니다.
“젠장 이놈의 마누라, 나를 코끼리로 아나봐, 혼자서 이걸 다 어떻게 먹으라고. 이봐 누가 샌드위치와 케익 한 조각 먹어주지 않겠나?”
마틴은 기꺼이 그의 하소연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후 감독은 계속해서 마누라 음식을 허비하는 불평을 늘어놓았으며 마틴은 오히려 그로 인해 배고픔을 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틴은 보름이 지나 금료를 받고 감사의 말을 전하려고 사무실에 들렸는데 사무실에 감독은 없고 여 사무원만 있는 겁니다. “감독님 들어오시면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감독님 부인에게 센드위치 잘 만드신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러자 그 사무원 놀라며 대답했습니다.
“감독님은 시내에 잇는 조그만 모텔에서 혼자 살고 있어요. 부인은 5년 전에 돌아가셨답니다.”

발을 씻어주세요.
1) 발은 제일 더러운 부분입니다.
깨끗한 것은 만지고도 싶고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발은 신체 중에서 제일 더러운 부분입니다. 냄새가 나는 곳입니다. 더러운 곳입니다.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예수님은 남의 더러운 곳을 씻어주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말은 잘해서가 아니라 잘못한 것을 사해주는 것입니다.

2) 발은 신체의 제일 끝입니다.
심장은 하루에 10만 번의 움직임으로 피를 전신의 구석구석에 보내는 작용을 하고, 심장에서 가장 먼 발은 그 움직임으로 온 혈액을 다시 심장으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해야하는데, 요즘은 문명의 발달도 교통수단도 많이 발전을 하면서 발의 움직임을 덜하게 되면서, 발의 피로를 느끼고, 발이 차가워지며, 다리의 부종이 비만이 되고, 혈행의 장애로 관절에 문제가 많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끝까지,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3) 발은 돌아다닙니다.
발은 가만히 있으면 병 생깁니다. 가능한 한 자주 움직여 주면서 피를 다시 돌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절도 운동을 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님이 오면 종을 시켜서 발을 씻어 주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직접 손님에게 발을 씻어준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선생은 본을 보여야 합니다.
본문 15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가장 훌륭한 제자 훈련은 백만 마디의 말로써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이 직접 삶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지난 수요일 케냐에서 오신 선교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한국 선교사님들은 너무 도시에 있으면서 부족에게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도 안돼 지만, 부족에게 가는 분이 드물다는 겁니다. 그런데 서양 선교사님들은 시간만 있으면 부족마을에 간답니다. 신학교를 도시에서 하지만 학생들 집에 방문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환경에서 왔는지 방문해서 그 가정에 복음을 전할뿐만 아니라 학생의 생활을 이해하므로 잘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지난번에 종엽이네 집에 방문했지 않습니까.
발로 뛰고 돌아다니다 보면 일이 됩니다. 지난 화요일(2005.5.10) 전세계 생물학계가 흥분하는 놀랄 만 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북미대륙과 유럽일부 지역에만 있다고 알려진 허파 없는 미주 도룡뇽(lungless salamamander)-한국명(이끼 도롱뇽)이 한국에서 서식하고 있는 것이 지난 5일 영국의 과학 전문지인 ‘네이처(Nature)’ 논문을 통해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이 도롱뇽은 꼭 도마뱀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아마 저도 어려서 시골에서 본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똑같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알려졌는지 아십니까?
지난 2003년 4월 대전 장태산 야산에서 기독교계 대전국제학교의 미국인 과학교사 스티븐카슨(Stephen J.Karson)씨가 학생들에게 돌을 뒤집어 어떤 생물이 살고 있나를 관찰하도록 했다가 우연히 발견된 것입니다. 카슨교수는 이 도롱뇽을 UC 버클리 대학의 생물학자인 데이비드 W. 웨이크박사에게 전했습니다. 웨이크 박사는 허파로 호흡하는 아시아 도롱뇽과는 달리 혀, 발목, 두개골을 가졌고 특히 허파 없이 피부 호흡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생물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번 발견은 놀랄만한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생물지리를 변경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끼 도롱뇽은 한국 내에 최소한 16군데 정도 있는 것으로 보이나 정확하게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한국 사람이 아닌 미국인 교수에 의해서였습니다. 지금쯤이면 한국도 이러한 생태계조사는 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 교수는 발견을 못하고 왜 미국 교수가 발견을 했습니까? 우리는 앉아서 가르치고 미국 사람들은 발로 뛰면서 현장 교육을 하는데 익숙해서 그렇습니다. 알아서 교과서 잘 만들어 놨겠지? 이것만 잘 가르치면 되지? 하는 안일한 생각입니다. 이렇게 교육을 받다보니 발로 뛰려고 하지 않습니다. 현장을 확인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들이 생깁니다.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실천하는 것을 귀찮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제 운동도 해야하지만 몸으로 해야 합니다. 저도 다음달에 러시아와 동유럽 선교지를 방문하는데 제 자신이 보고, 배우려는 목적이 많습니다.

선교지에 가면 한국에서 자란 우리하고 미국에서 자란 한국인 2세가 다르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성장한 분들은 자기 것을 오픈하고 사역한답니다. 그런데 한국 분들은 감춘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짜 진돗개는 사람이 와도 짓지 않는 답니다. 개가 짓는 이유는 자기가 겁나니까 짓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돗개는 사람이 와도 짓지 않는 것은 자기가 무섭지 않은 겁니다. 왜냐하면 주인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도적질하러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똥개는 주인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도 짓습니다. 그러다 주인에게 한 대 맞지요. 수준이 비슷하면 싸웁니다.
자기가 자신이 없으면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 있는 사람은 보여주려고 합니다. 여러분! 초등학교 다니면서 선생님이 물어보지요. 그 때 내가 아는 문제면 나 시켜달라고 ‘저요. 저요’하지요. 그런데 모르면 꼬리 내리고 고개 숙이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자신 있게 그러나 겸손하게 행동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보다 더 겸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본문 16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본문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크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다시 보냄을 받는 제자들은 예수님보다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육체적 질서로 보면 절대로 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부모님께 효도하면 복이 있는 것입니다. 경우 없고 건방진 자식들은 부모님이 나이 드시고 힘없다고 우습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집의 자식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많이 배우시지는 못했지만, 아는 것이 부족하지만 부모님은 부모님이십니다. 아멘.
인천에 가면 인천에서 두 번째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인천제이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1948년에서 시작한 교회인데 김덕수 전도사님이 개척해서 1951년 이승길 목사님이 부임하고, 1957년 이삼성목사님(77년 총회장)이 부임하고, 그리고 지금 이건영목사님이 시무하고 계십니다. 이 교회의 자랑은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교육자 전원이 은혜롭게 은퇴하고 후임목사가 원로 목사님을 잘 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 후임자 문제로 고심하고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는 현재 이건영 목사님에게 부탁해서 목사님이 정해주시면 90%는 따르겠다고 말하는 교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이 교회의 목사님들이 섬기는 자세로서 먼저 성도가 아니라 원로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을 잘 보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뒤집어 업고 다시 시작하고 잘 해보겠다는 의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먼저 해 놓으신 분들에 대한 감사와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려도, 빨리 납득이 안 되는 일이 있어도 함께 기도하며 서로 섬기는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2개의 대야가 나옵니다. 하나는 빌라도의 손을 씻었던 대야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었던 대야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도록 하고서 책임지지 않겠다는 회피의 대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야는 사람을 섬기고 더러움을 씻는 대야였습니다. 섬김의 대야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아 섬김의 선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5. 서로 사랑하라) / 요 15:9-12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친자식들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부모들의 모임이 최근 결성돼 유사한 처지에 놓인 40여명의 부모들이 회원으로 가입, 매주 월요일 정신과 치료를 병행해 서로의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자녀들의 학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정신과 상담 도중 자녀들로부터 매맞는 부모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 8개월 전(95년3월30일 기준) 이 모임을 결성한 여성 정신심리분석학자 살비아 베인스텐은 “이 모임은 무엇보다 이 같은 불행의 근본적인 책임이 가해자인 자녀가 아닌 부모 자신의 무분별한 애정에 있음을 인정토록 하면서 해결점을 찾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들 부모의 대부분은 자녀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무조건 충족시켜 주는 그릇된 교육관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그런 가정의 자녀들은 어른들에 대한 존경심이나 부모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제 능력이 크게 부족해 친부모를 구타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고 분석합니다(1995.3.30일자 동아일보 해외토픽).

이 땅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잘못 인식된 것이 하나있습니다. 유교사상이 지배하던 시절에 기독교가 단순히 조상신에게 절하지 않고 부모제사를 지내지 않으니까 조상도 부모도 모르는 불효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교와 같이 하지 않는다고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교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 이상으로 성경은 엄격한 교훈을 주십니다.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중에 5개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고, 5개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계명입니다. 이 대인관계 계명 중에 첫 번째 계명이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얼마나 엄격한 교훈이 있는지 아십니까? 유교도 이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1) 출 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2) 출 21:17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라”
(3) 잠 23:22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
(4) 잠 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는 엄한 교훈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계명을 지키셨다고 하시며 우리에게 교훈을 주십니다.

1. 사랑은 서로 해야 합니다.
본문 9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서로”라는 관계를 우리는 남과는 잘 비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일 중요한 관계에 있어서는 “서로”라는 말을 적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서로”는 제일 가까운 사이에서부터 적용해 나가는 것입니다. 파도가 일어날 때 가까운 원안에서부터 퍼져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는 서로였습니다. 하나님만 일방적으로 아들을 사랑하시고 그것으로 마친 것이 아닙니다.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지켰고 그 사랑 안에 거했습니다. 육신을 입은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부모님을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마음 자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명기 6:5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호와를 경외(fear)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사랑(love)하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것하고 사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만약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이라면 율법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짐이 되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면 율법을 위한 희생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자기 희생이 의무적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기쁨으로 드리는 자발적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이유가 단순한 자기 축복에 있었다면 그것 또한 오래가지 못합니다. 만일 우리 한국교회가 축복신앙의 논리에만 매달려 있다면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식이 부모님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받고자 외식 적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하고 같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신 31:20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조건적으로, 부모님을 조건으로 섬기는 사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단 국물이 다 떨어지면 더 이상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2. 계명은 지켜야 합니다.
본문 10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 계명”도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가운데 많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 중에 우선해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계명”입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는 땅을 사고 팔 때와 같은 “매매 증서”에 사용되었습니다. 출 24:12 십계명에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 계명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19:7-8, 24:3-8)라고 응답하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이 언약 속에는 “이스라엘 자손대대로 여호와 말씀을 전수시키겠다”는 맹세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신 28:1-68, 32:7).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먼저 계명을 잊지 않도록 해야했습니다. 알아야 지킬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옷단 끝에 술을 만들어 명령들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마나 손목에 매며, 하나님의 말씀을 문설주에 써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신 6:6-9). 그리고 율법 책에 기록해서 후손에게 전해주었습니다(신 30:10).
아울러 하나님이 내려주신 율법은 사람이 일 점 일획이라도 변경할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신 12:32). 하나님의 계명이 얼마나 소중하고 반드시 지켜야될 중차대한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부모님들은 단순하게 이다음에 효도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먼저 진정으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켜야될 것을 우리는 얼마나 가르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늦게 받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자녀들이 다 성장했다면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자녀들에게 효도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난 자식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께 대적한다면 그 자식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계명은 조금이라도 범하는 것은 죄가 되는 것이며 반드시 속죄제를 지내야 했습니다(레 4장).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업신여기면 죽게됩니다(민 15:31). 솔로몬은 그의 생에 말년에 계명을 범했습니다(왕하 11:31-39). 이로 인해서 왕국이 분열되었고 므낫세와 같은 악한 왕들이 나왔고 결국 다윗 왕가는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메시야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느 1:8).

3. 사랑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본문 1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제일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빼고는 인간을 정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사랑이 없다면 인간 또한 동물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인간을 감동시키며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을 우리는 냉혈인간이라고 부릅니다. 피도 눈물도 감정도 없는 사람을 일컬어 부르는 것입니다. 사랑은 눈물도 피도 뿌립니다.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하루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들의 가정에서 먼저 사랑이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가정에 사랑이 없는데, 부모자식간에 사랑이 없는데 다른 어디에서 사랑이 자라난다는 말입니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저도 이제 부모님이 안 계십니다. 잘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랑과 감사를 왜 못하는지 아십니까?
시 104:24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많다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부부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만 하는 일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나보다 하나님이 나보다 아내가, 남편이, 그리고 부모님들이 하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랑하게 됩니다.

저희 어머님은 17년 동안 귀 암 이라는 병으로 고생하셨습니다. 평생을 시골에서 사셨기 때문에, 도시 아파트에서는 답답해서 못사시겠다고 하시면서 동네사람들과 홀로 사셨습니다. 저는 가끔 한번씩 찾아가 뵙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사시다 거동이 불편하셔서 저희 집으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오시던 첫날 제가 발을 씻겨 드렸더니 “내 아들 효자네”그러시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 어머님 발을 씻겨드렸습니다. 단 한번인데 어머님은 “내 아들 효자네”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님은 저를 위해서 수 없이 발을 씻겨 주었을 것입니다. 어디 발뿐이겠습니까?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하리요,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양주동) 노래의 가사처럼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 것입니다. 저희가 자랄 때의 어머님들은 지금 어머님들과 그 고생은 비교가 안될 것입니다. 그 때는 세탁기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입니다. 차가운 얼음을 깨뜨리며 겨울에 냇가에 가셔서 빨래를 하셨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정말 허리한번 필시간 없이 하루종일 노동에 시달리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식들 먹여 살릴 걱정을 하시면서 당신은 고기 뼈만 발라 드시면서 자식들 좋은 것 하나 더 먹게 하려고 희생을 아끼지 않은 분들입니다.
우리어머님이 사시던 뒷집에 현욱이네라고 있습니다. 현욱엄마는 치매로 15년을 넘게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현욱 엄마만 시어머니를 잘 모시는 것이 아니라 손자, 손녀들까지 모든 집안 식구들이 잘 모셨습니다. 저희 어머님이 현욱엄마 같은 사람이 없다고 면사무소에 몇 번을 들려서 상 주어야 된다고 추천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어머님 돌아 가셨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면에서 조사가 왔더라는 겁니다. 이 집안 식구들이 얼마나 효도하는지 알아보려고요. 그런데 조사 나온 분이 치매환자인 시어머니 머리에 비녀가 꼿혀있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물어보지도 않더랍니다. 15년이 넘도록 치매환자를 돌보면서 시어머니 머리 감겨서 깨끗하게 비녀를 꽃아 드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귀찮으니까 대부분 머리를 홀딱 밀어 논답니다. 그래서 현욱엄마 말로는 면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주는 제일 좋은 상을 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상 받으려 고는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님에게 정말 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서 부모님 섬기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뿐만이 아니라 바로 부모님의 심정을 깨닫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린이의 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4. 어린이의 나라) / 막 10:13-16

“13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여러분! ‘어린이 날’이 좋을까요? ‘어린이 나라’가 좋을까요?
어린이날은 하루이지만 어린이의 나라는 매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린이 같은 사람들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는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많은 장난감도 없었습니다. 몇 안 되는 장난감들이기에 소중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는 깡통, 고무줄, 돌맹이, 그리고 막대기가 전부였습니다. 고무공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정말 귀한 것입니다. 이런 것만 있다고 불만을 느끼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으면 몸으로 때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타기입니다. 그래도 친구들과 날이 어두워지도록 놀았으니 불만이 있을리 없습니다. 빈곤했던 시대이지만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오늘날의 어린이들은 불쌍합니다. 어린이날은 있는지 모르지만 어린이 나라가 아닙니다. 어른들 중심의 나라입니다. 이것을 고쳐야 합니다.

1. 어린이를 자유롭게 하라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오는데 막으면 안됩니다. 이들이 비록 어린이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은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어린이들을 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어린이들에게 사용된 원문 ‘파이디아’는 6-14세 정도의 어린이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이 용어는 야이로의 12살 된 딸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평행본문인 눅 18:15에서는 갓난아기를 말하는 ‘브레페’가 사용되었습니다. 누가는 더 어린아이들로 본 것입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갓난아기에서부터 10여세가 된 좀 큰 아이들이 함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 생각에는 유대의 랍비들에게 비추어 보면 결코 잘못된 행동은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이 지금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제자들의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이 당시의 일반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상당히 화를 내셨습니다. 14절 “분히 여겨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각과는 달리 제자들이 반대되는 행동을 임의로 하고 있기 때문에 화를 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용납하고”는 아이들을 괴롭히지 말고 하고 싶은 데로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정도는 아시겠지요. 지금 아이들을 자유롭게 하라는 것은 그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행동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일학교 강습회 때 가끔 강사로 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강조하는 것은 아이들을 자유롭게 교육시키라는 것입니다. 자유는 결코 방종이 아닙니다. 부모의 권위에 도전하는 아이들은 혼을 내야합니다. 하지만 만사에 아이들을 쥐잡듯 잡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스스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일시적으로 순종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아이들도 자유 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무한한 창의성과 긍정적인 생각들이 나옵니다. 지나치게 어른들의 스케줄에 맞추어 어린이들의 입장과는 관계가 없는 학교가고, 학원(영어학원, 태권도학원 등)가고 바쁘게만 지내는 것은 어린이들의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정말 부모님이 생각할 때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것 외에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에게 자유를 주세요? 그것이 그 어떤 교육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만져주셔야 합니다.
오늘본문의 시작은 엄마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왜? 예수님 앞에 데리고 나왔습니까?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정의 문제, 우리 아이의 문제, 질병의 문제, 모든 문제가 예수님이 만져주시면 해결됩니다. 우리교회도 예수님이 만져주셔야 합니다.
저는 그런 것 잘 안 하는데 오늘은 한번 해야겠습니다. 어떤 교단이나 목사님은 예배 때마다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아픈 곳이 있으시면, 또 원하는 것이 있으시면 그곳에 손을 얹으세요. 그리고 하나님이 치료해 주실 것을 믿으세요. 비록 내 손을 얹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 육체의 질병 주님이 만져주세요. 주님 만져주시면 깨끗이 치료될 줄 믿습니다. 아멘”
마태복음 9:20-22에 보면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의 생각에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쫓아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만지는 순간 예수님의 능력이 그 여인에게 갔습니다.
“20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님의 첫 이적사건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혼인집에서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옵니다. 이 일이 왜 가능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그 집에 계시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가정에 역사가 일어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교회는 세 곳에 계셔야 합니다. 따라합니다. 첫째, 내 마음속에 둘째, 우리 가정에 셋째, 성도가 함께 모인 곳 교회에 이것이 교회의 삼위일체입니다. 어떤 분은 보이는 교회에는 잘 나옵니다. 그런데 가정에 교회가 없습니다. 그러면 가정이 바로 인도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모신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사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만져주십니다.
어떤 분은 가정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니까 수도원쯤으로 분위기가 바뀌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가끔 특별한 분이 있기는 하더라구요. 너무 영적이라 제가 아는 한 분은 신혼여행을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어떤 수도원에서 수도원생들이 많이 죽어갔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수도원에 들어가 탐정해 보았더니 그 수도원 원장이 너무 경건주의를 강조하는 분이어서 하루 종일 도무지 웃지 못하게 금지하는 것입니다. 웃으면 벌을 받을 만큼 엄격하게 훈련을 했습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수도생들이 오히려 병이 생기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너무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기가 어렵습니다. 숨이 막힙니다. 질식됩니다. 인간미가 넘치고 때로는 실수를 하지만 그것이 용납되는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으며 감싸주는 가정이 오히려 건강한 가정입니다.

3.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라
본문 15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결단코”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충 하는 척 해 가지고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결단코”는 다른 말로 하면 “절대로”입니다. “받들지”에 해당하는 원문은 “환영하다, 영접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환영해야 합니다. 영접해야 합니다. 누구처럼 해야 합니까? 어린아이와 같이 해야 됩니다. 어린이의 장점은

1) 단순합니다.
어른들의 세계는 좀 복잡합니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계산적입니다. 사람을 사귀고 봉사를 하며 어떤 모임에 참석을 할 때도 항상 이것 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손해가 되지 않을 것인가 계산을 합니다. 심지어는 결혼을 하고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이것이 얼마나 나에게 유익이 될 것인가 수지계산을 맞추어 보고 결정을 하고 결단을 합니다. 그만큼 어른의 세계는 이해 타산적입니다. 그러나 어린이의 세계는 다릅니다. 자기가 좋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외식과 형식이요 위선입니다. 제 이야기라 좀 그렇습니다만, 베트남에 선교사로서 제일 처음으로 들어간 김영관 선교사님 부부가 계십니다. 이분이 저만 보면 저를 좋아하는 이유를 말씀합니다. 저는 단순하다는 겁니다. 제가 생각해봐도 저는 참 단순한 사람입니다. 복잡하면 계산을 못합니다.

2) 어린이는 모든 것이 신비스럽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바라보는 어린이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참 신기하고 신비롭습니다. 그래서 부모나 어른들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계속 질문을 던집니다. 왜 코는 하나인 데 눈은 두 개이고 손가락이 다섯 개냐 등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부모는 쓸데없는 것을 묻는다고 야단을 치면 안됩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지 모릅니다. 더 이상 궁금한 것이 없습니다. 사실 다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포기한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신비롭게 세상을 바라보세요. 봄이 되면 죽은 것 같았던 나무들이 파랗게 새 싹이 나고 푸르러 지잖아요. 제가 여기 있는 화분 죽이고, 밖을 내다보면서 하나님은 하나도 안 죽이시는데 우리는 여기 있는 나무 두 그루를 죽였습니다. 자연은 사람이 손을 안대면 다 잘 산답니다. 그런데 사람이 손을 데면 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신비스러운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가슴이 뛰는 것은 남녀의 사랑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 신비하고 가슴이 뛰는 것입니다.

3) 정직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 거짓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원래는 거짓말을 모릅니다. 가끔 어린이들이 너무 솔직히 말해서 어른들이 당황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 캐나다에 있는 목사님이 아들하고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그만 방구를 ‘뿅’하고 낀 것입니다. 그 때 옆에 있던 권사님이 목사님 아들 엉덩이를 치면서 “이놈 방구 소리도 크네”그랬는데 목사님 아들은 말을 이제막 하는 수준인데 “나 아녜요! 나 아녜요!”하는 겁니다. 제일 잘 실수하는 것이 전화에다 대고 “엄마가 없다고 그러 라고 그래요” 아이들은 정직합니다. 어른들이 거짓말을 가르쳐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리더스 다이제스트지가 몇 년전 이런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지갑에 50불씩 넣고 주소를 써넣은 다음 1000개의 지갑을 세계 여러 도시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그 나라 사람들이 정직하게 그 지갑을 돌려주는가? 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100% 돌려주었습니다. 싱가폴은 90%, 한국사람은 70%를 돌려주었습니다. 꽤 괜찮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참 감사할 일입니다.
미국은 68%, 독일이 48%, 러시아는 43%, 필리핀이 40%, 이태리는 35%, 중국은 30%, 멕시코는 21%가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태리나 중국이나 멕시코 가서는 지갑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뒤에 숨어 있다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잘 살펴보았다. 또한 돌려주는 사람들은 만나 인터뷰도 했습니다. 어떤 스위스의 한 어머니는 그 지갑을 아이가 주어서 어머니에게 주자 그 지갑 속에 돈 50불 짜리를 얼른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습니다. 한국의 아버지는 아이에게 그 돈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돌려주라고 말하면서 신앙인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모든 크리스천 가정이 이렇게 되면 한국사회가 달라지고 변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가끔 한국서민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만원 짜리 내고 그냥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아줌마가 뛰어나오면서 거스름돈 받아가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외국인들은 가끔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한국 기업들이나 정치를 보면 거짓이 판을 치고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인 것 같은데 의외로 한국사회는 특히 서민사회가 더 정직한 사회라는 것입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4) 어린이는 미래지향적입니다.
어린이는 과거가 없습니다. 어린이에게는 미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의 삶은 언제나 미래지향적입니다. 노년은 과거에 살고, 장년은 현재에 살며, 어린이는 미래에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이는 항상 꿈꾸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도 같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항상 앞만 향해 나가도록 강조합니다. 캄캄한 밤에도 항상 새벽을 바라보는 소망의 믿음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이루어 진 것처럼 현실화해서 살아가고,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처럼 앞당겨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즉 소망 중에 바라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4. 어린이에게 축복하시는 예수님
저에게 여기서(주앙교회에서 지금) 한 사람에게만 축복하라면 누구에게 하겠습니까? 헌금 제일 많이 하신 분? 아닙니다. 최서은(7개월 된 아기)이에게 할 것입니다. 불만 없으시죠? 왜 그렇습니까? 제일 어리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세상을 제일 많이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축복을 해 주면 제일 해주고 싶은 어린이들 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닙니다. 앞으로 많은 날을 살아가야 할 어린이들입니다.
본문 16절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이 장면은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과 평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축복하시니라”는 평범한 축복하고는 다릅니다. 원문에 ‘kateulovgei:카튜로게이’는 ‘뜨겁게 축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 앞에 ‘kajta;:카타’라는 단어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 단어는 집중적인 힘을 나타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축복은 어린이에만 아니라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 율법적으로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천국이 바로 그들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태리 나폴리의 어느 공장에서 잡일을 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난하여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는 음악에 소질이 있어서 훌륭한 음악가가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에게 ‘너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성공하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이 소년은 너무 낙심이 되어 알아 눕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그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격려했습니다. ’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수 있다. 매년 네 음악실력이 향상되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좀더 훌륭한 선생님을 찾아보자’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음악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수년이 지나간 어느 날, 그는 수많은 관중이 모임 무대 위에서 감격에 넘치는 노래를 부리게 되었고 수천의 관중들이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 관중 한 구석에 앉아있던 어머니는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러분! 이 소년이 누군지 아십니까가? 20세기 초대 오페라의 황금시대를 연 테너 엔리코 카루소였습니다.

한 신부가 미사를 집례하면서 포도주를 엎지른 아이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빨리 꺼져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유고의 독재가 ’티토‘가 되었다. 그러나 한 신부는 포도주를 엎지른 아이에게 ’너는 커서 신부가 되겠구나‘ 하고 격려했습니다. 그가 자라서 유명한 TV설교자 ’풀톤 쉰‘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말 한마디 축복도 한 어린이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처럼 어린이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어린이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그 축복이 오늘 우리에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3. 나를 따라오려거든) / 눅 14:25-33

“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를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 사면장 마저 거부해버렸다
미국 서부개척 당시 텍사스 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무법천지인 그 때에는 총을 난사하는 등 많은 살인이 저질러져서,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는 법이 제정,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소에 덕망 있고, 선량하고, 이웃으로부터 존경받는 아주 온순한 한 청년이 술집에서 실수로 살인을 했습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제 집행날짜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온 동리 사람들은 그의 사람됨됨이를 익히 아는지라,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 해서 구명 운동에 나섰습니다. 모두가 서명을 하고 탄원한 끝에, 드디어 특별사면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지사는 사면장을 들고 감방에 있는 청년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청년은 이미 그 전의 온순한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못되고 포악해졌는지, 주지사를 향해서 폭언을 하고 거칠고 난폭한 행복을 했습니다. 뉘우치는 생각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주지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게다가 청년은 사면장 마저 거부해버렸습니다. 자기를 구하려는 동리사람들의 은혜를 저버린 채, 그는 사형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끝까지 가보아야 합니다. 끝이 좋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예수님을 따르는 허다한 무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현세적 축복을 갈망하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지금까지 행하신 기적들을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러한 기적을 또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사이에는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위에 등극하실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현세적 축복을 갈구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 무리들과 같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의 본문을 선택하면서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즐겁고 행복한 것인데, ‘복음’이라는 것은 기쁜 것인데 제 설교가 지나치게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는 무거운 설교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잘 기억합시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결코 무거운 멍에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살아갈 때 신앙생활은 더 힘든 것입니다. 주님은 현세적 문제만을 보고 따라오는 무리들에게 “돌이키사 이르시되”(25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잘 따라가고 있는 중인데 예수님은 “돌이키사”라고 했습니다. 진행을 정지시키시고 제동을 건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왜 따라오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따라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따라오기를 기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심정을 두 비유로서 표현하셨습니다.

1.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를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집을 짓는데 집을 다 짓도록 그 비용을 계산을 하지 않고 짓다가 기초만 짓고 집을 완성하지 못하면 사람들의 비웃음거리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에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뜻은 시작은 용처럼 거창하지만 나중은 뱀처럼 별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비슷한 것입니다.
요즘 사이버 세상에서는 더 이런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제가 잘 사용하는 표현 중에 집은 짓다말면 보이는 것이라도 있는데 소프트웨어(프로그램)는 하다말면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지식 정보사회로 불리는 요즈음은 보이는 사회(하드웨어)보다 그런 일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새로운 일을 계획하고 있는데 엄청난 프로젝트입니다. 문제는 이 일을 하다말면 그야말로 안한 것 보다 못합니다. 그래서 잘 할 수 있는지, 끝까지 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느라고 요즘 잠을 못 잡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잘 판단해야 합니다. 끝까지 잘 할 수 있는 일만 시작하려고 기도합니다.

2.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위의 집을 짓는 비유보다 더 강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에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판단을 잘못하면 다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더 심각한 것입니다. 나는 1만 명의 군사이고, 적군은 2만 명의 군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으면 빨리 화친을 청해서 무고한 군사를 죽이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승산이 없는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비유의 목적은 ‘바른 판단’에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단순히 적이 많기 때문에 항복하라든가 아니면 적과의 싸움이 선과 악의 타협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요지는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바른 판단을 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라”(되지도 않을 일은 처음부터 뜻하지도 말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따라오다가 그만두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끝까지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을 끝까지 보고 잘 판단해서 마라톤과 같이 골인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따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라가려면…

1. 자기 생명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합니다.
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미워하지” misei’(미세이)는 문자적인 의미에서 심리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잘못이해하면 큰일납니다. 만일 그렇게 잘못이해하면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나?’하면서 비관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내 생명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럼 “미워하지”(미세이)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부모를 제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좀 성장하면 친구를 제일 사랑합니다. 그러다가 애인이 생기면 애인을 제일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면 남편을 아내를 자식들을 제일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자신의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무리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려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뜻을 따르려 하는 것인지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따르는 것은 예수님의 뜻과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도 우리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주님 앞에 나왔다면 똑같은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울은 사랑을 정의할 때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전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합니다. 바로 바울 자신이 그렇게 살아간 사람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27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인이면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내가 져야할 것이라면 져야합니다. 우리사회가 일을 잘못 처리하여 막대한 손해를 입히면서도 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피하면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합니다. “지고”에 해당하는 ‘bastavzw(바스타조)는 요 19:17에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주님처럼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참다, 운반하다”라는 뜻과 함께 동시에 “영접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지난번 우연히 TV을 보다가 좋은 영화하나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중간에 보아서 정확한 뜻은 잘 파악을 못했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은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바다가운데 있는 작은 원주민 마을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때로는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우를 만나 죽을뻔 한일도 있었고, 처음에는 부족 사람들이 죽이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를 감동시킨 것은 나중에 선교본부에 사람이 나와서 이 사람이 한일을 평가합니다. 그리고 본부에서 이 사람을 부릅니다. 순종하고 돌아가는 데 잘 아는 다른 가까운 책임 있는 원주민에게 본부에서 ‘유골함’을 준비해서 주었던 것입니다. 만일 이 선교사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그 뼈를 이곳에 담아서 본부에 보내달라고 부탁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3. 자기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합니다.
33절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시점에서 듣는 무리들은 ‘잘못 따라 왔나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무 곳에서나 설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제자가 되려면…”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제자 되려면 들어야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2제자를 놓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무리들 앞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은 특별히 제자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전할 수 있지만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지 않는 분들이 제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바로 ‘헌금’입니다. ‘헌금’ 때문에 못나오는 분들 많습니다. 물론 교회가 ‘헌금’을 강조해서 믿음이 없는 분들을 좇아내는 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은 단순히 ‘헌금’을 강조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다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소유욕’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남용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위임한 것이라고 믿고 바르게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와 같이”는 두 비유에 대한 결론입니다. 두 비유는 바른 판단을 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기를 바라는 비유입니다. 비유에 대한 결론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바르위크 마을에 사는 한 씩씩한 소년이 은행 창구에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 은행에 돈을 저축했으면 하는데요.”
그 말을 들은 은행 직원은 소년이 마을의 감리교 교회에 나가는 신앙 좋은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 좋은 일이구나. 존, 얼마나 저축하려고 하지?” “4달러예요.”
“그럼 통장은 네 이름으로 만들어 줄까?”
“아니 예요, 아저씨, ‘존 예이츠와 그의 친구’라고 해주세요. “소년의 말에 은행 직원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존의 친구가 누구지?” 소년이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에요, 저는 오늘 아침 첫 월급을 탔어요. 그래서 십일조를 시작하려고 마음먹었어요. 이제 이 4달러는 하나님의 것이에요.
저는 단지 이 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뿐이에요.”

결론적으로 위의 세 가지는 모두 같은 뜻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나누어야 합니다.

▣ 소 대신 내가 밭을 갑니다
평안도에 가서 선교하던 미국 선교사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어떤 시골에 갔더니 웬 사람이 밭을 가는데, 소 멍에를 아버지가 메고 앞에서 끌면 아들이 뒤에서 그것을 잡고 밭을 갑니다. 하도 이상해서 가까이 가보니까 마침 아는 장로님입니다. “장로님, 어찌해서 이렇게 소가 메는 멍에를 메고 밭을 갑니까?” “예, 예배당 짓는데 소를 팔아 바쳤거든요. 그래서 소 대신 내가 밭을 갑니다.” 장로님의 그 얼굴빛은 여전히 밝고 감사와 찬송이 넘치더랍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것 같아도 그분만이 가지는 기쁨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제 목회 철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큰 사람 만드는 것입니다. 세계를 품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
자신의 소유욕이 지나쳐 사적으로 남용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큰 사람 될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따라가는 사람 이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장애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2. 예수님과 장애인) / 요 9:1-7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미국의 한 보험회사가 100명의 젊은이가 65세에 이르렀을 때 어떤 형편에 놓이게 되는지에 대해 조사하였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1. 이미 죽은 사람(36명)
2. 가난하게 살며 가족, 친구 또는 정부의 원조를 받고 사는 사람(54명)
3. 일을 그대로 하고 있는 사람(5명)
4. 남부럽지 않게 사는 사람(4명)
5. 성공적 삶을 살고 있는 사람(1명)
모두 성공지향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성공의 문은 100대 1의 좁은 문이었습니다.
이 통계는 성공으로만 보자면 100:1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미국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러운 것이 있습니다. 54명의 절반이 넘는 사람이 정부의 원조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애인 그러면 선천적 장애인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장애인 가운데 선천적 장애인으로 진단되는 사람은 장애인 전부 가운데 6%-10%에 불과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6%-10% 범주 안에 장애인들이 있어요. 이게 선천적 장애인지 후천적 장애인지 그 진단이 불가능한 확률이 10%정도라고 합니다. 나머지 80%는 다 후천적 장애인들입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는 인구의 10%이상은 장애인이란 것을 아십니까? 우리나라 인구가 5000만이라면 우리 나라에 장애인이 얼마나 될까요? 500만이 장애인이라는 통계입니다.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장애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저는 장애인 문제를 함께 나누기 앞서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우리 모두가 예비 장애인이고 장애인 후보라는 사실입니다. 장애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은 피할 수 없이 장애인의 운명을 살아가고 나하고는 상관없다는 생각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예비 장애인이고 장애인 후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제일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교통사고로 인해 해마다 4만여 명이 넘는 사람이 장애를 입고, 산업재해로 3만 여명, 각종 질병 및 의료사고로 인해 3만 여명, 그리고 기능 장애를 수반한 기형아 출산율이 2.7%로 매년 2만여 명이 넘는 기형아가 출산된다고 합니다. 여기에 각종 대형 참사로 인한 장애발생이 더해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렇게 더해지는 장애인은 매년 10만 여명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군대의 1개 사단병력이 1-2만 명으로 이루어집니다. 적어도 1년에 5개 사단에 해당하는 인원이 정상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장애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체적 장애인만을 장애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정신적 장애가 더 문제입니다. UN장애인 권리 선언에 보니까 장애인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장애인이란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신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원인으로 자기 자신의 힘으로 홀로 서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선천적 원인이든 후천적 원인이든 그것이 신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삶을 유지하기 어려운 장애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장애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이미 우리 가족 중에 장애가 있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애인은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곧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장애를 함께 극복해 가지 않으면 우리의 삶을 올바로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장애를 극복하려면

1. 장애는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본문 2절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이면 누구든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이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죄가 없이는 장애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출 20:5, 민 14:18, 례 16:15). 바로 이 죄의 결과로 장애가 생겼다는 편견 때문에 장애인을 소홀히 대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욥의 경우를 보면 자신의 죄 때문에 병이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세 친구들은 죄에 대한 보응이라고 강변했습니다.
신약에 바울의 경우는 하나님이 자고 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눈에 질병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은 세 번 기도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응답은 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장애가 죄의 결과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본문 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중에 장애인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더 교만해 질 것입니다. 장애인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아울러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분들에게 빗진 자라는 것입니다.

2.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제자들을 가르치신 시간들을 뺀다면 거의 모든 시간이 어떻게 활용하셨는지 아십니까? 한마디로 장애인과 함께 보내신 것입니다. 장애인을 위해서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태 세리의 집에서 식사할 때, 바리새인들이 보고 너희 선생이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이 소리를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막 2:17, 눅 5:31)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병든자와 함께 지내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장애인들을 위해서 오셨다면 우리 역시 그분들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먼저 장애인에게 붙여진 그 타이틀, 그 편견의 타이틀을 우리가 먼저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깊은 편견은 먼저 언어 자체에 대한 여과 없는 전달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빨리 버려야 할 언어들 가운데 병신 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저도 팔이 부러져 초등학교 때는 한 팔을 기부스하고 다시 내리면 다른 팔이 또 부러져 기부스하고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기부스를 너무 많이 하다보니 늘 친구들로부터 ‘팔 병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지냈습니다. 심지어 한국 문화재 가운데는 병신춤이라는 문화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뿌리깊은 문화적 편견이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 번역학자들은 우리가 새로운 시대에 이 성경을 다시 번역한다면 성경의 언어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소경이란 말 대신에 어떤 말을 써야 합니까? 시각장애인입니다. 시각 장애인이 어색하기 때문에 새 번역 성경에는 ‘눈먼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성경이 바로 번역되어 새롭게 나왔는데 우리가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보는 성경은 ‘개역한글성경’으로 1962년 판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와 질문했을 때 예수님이 대답한 본문이 마태복음 11:5절입니다. 이 본문을 ‘개역한글성경(1962)’과 ‘표준새벅역’(1993)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개역한글성경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표준새번역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저 또한 병신 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저도 회개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남을 향해 돌 던진 한번 있습니다. 제가 살던 마석에, 지금은 성생농장에서 성생가구단지로 바뀌었는데 예전에 이곳에 나환자촌입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하고 이 곳을 지나다가 나환자촌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문둥병자라며 돌을 집어던지고 도망간 일이 있습니다. 그 때는 그분들이 무서웠습니다. 또 시골에서 소문이 어린아이 간을 빼먹으면 그 환자들이 낫기 때문에 어린이간을 빼먹는다는 헛소문까지 들었던 터라 필사적으로 돌을 던지며 도망간 일이 있습니다.

3. 장애에 대한 모세 오경의 오해
우리는 모세 오경의 창세기를 제외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보면 상처가 난 환자, 나환자 등을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구약의 사상에서 유대인은 장애에 대한 편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기록할 때 왜 그러한 기록이 필요했는가 라는 상황을 철저하게 면밀하게 연구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 당시의 이런 상황이 특별히 200만 명에 가까운 수많은 집단이 집단으로 광야에서 이동하고 있었던 상황 속에서 이 교훈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먼저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환자를 지속적으로 발생시킬 수 있는 환경을 제거할 목적이지 사실은 그 사람 자신을 제거할 목적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군집된 공동생활을 하는 경우에 있어서 그것이 어떤 전염병으로 발전할 우려 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일시적으로 격리하는 어떤 제도를 만든 것이지 사람 자체를 제거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에 보호가 필요한 분들을 위해서 이런 명령들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서 레위기 19장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레위기 19:9절부터 읽겠습니다. 레위기 19장9절 이하의 말씀은 광야 생활과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종의 사회정의의 규례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가나한 자들에 관해서 연약한 자들에 관해서 장애인들에 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접근해야 하겠는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주목할 만한 말씀들입니다. 9절 이하를 보시면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추수를 할 때 반드시 넉넉하도록 추수의 이삭들을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기 위해서 항상 그것을 남겨두라고 말씀하십니다. 10절에도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기 하나님이 얼마나 가난한 사람, 또 나그네, 외국인은 자연히 편견 속에서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애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 나그네, 장애인 이런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매우 균형 있게 연구하던 성경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의 이런 사람들에 관해 편애를 갖고 있는 듯이 보여진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슴이고 심정이예요. 11절 이하에서는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 다음에 정말 함께 주목하고 싶은 말씀은 사실은 14절입니다. 레위기 19:14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우리가 장애인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구약성경 안에서도 이미 밝혀놓았다는 말씀을 우리는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였던 격리의 일시적인 현상은 그 죄를 초래하는 원인을 격리시키려는 하나님의 마음이지 사람 그 자체를 격리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장애인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을 넘어서야 됩니다.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신학적이고 문화적인 편견을 넘어설 때 우리는 좀 더 자유롭게 당당하게 장애인 이웃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줄을 믿습니다.

4. 예수님처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가끔 안타까운 뉴스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장애인 시설이 들어서려고 할 때 그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애 학생이 한 학교나 반에서 공부하려고 할 때 부모님들이 반대하는 것입니다. 자기 집 값 떨어진다고 반대하고 아이들 교육에 방해받는다고 생각해서 대모 하는 분들 정말 사람도 아닙니다.
제가 한번은 약간 말이 불편한 자매와 지하철을 타고 갔는데 서로 말을 하는데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예요. 그 자매는 말을 하려면 몸을 약간 비틀면서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말을 했거든요. 그 사람들이 왜 쳐다보는지 아십니까? 이런 장면을 많이 보지 않아서 그럽니다. 처음에 외국인들이 거리를 지나다니면 사람들이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쳐다보지 않습니다.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주 대하고 함께하다보면 익숙해집니다.
어떤 장애인 문제 연구소를 보니까 장애인들이 제일 크게 느끼는 불편이 뭐냐 하면 세 가지 제일 큰 불편 가운데 육체적인 불편은 맨 마지막이었습니다.
첫째 불편이 경제적 빈곤입니다. 장애인이 되면 동시에 경제적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돼요. 저는 정의로운 사회는 약자가 보호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의 발생은 개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상당히 사회적 책임이 큽니다. 우리 사회가 이런 산업재해를 발생시키고 그리고 교통 시설도 그렇고 그렇다면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교회도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두 번째가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소외감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된다는 소외감.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 그들이 자연스럽게 우리 중의 한 사람, 식구 중의 한 사람, 우리 지체 중의 한 사람이 되는 것. 주님은 교회를 설명할 때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 부분의 지체라고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 눈먼 장애가 있는 한 분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물론 이분 입장에서 보면 더 큰 선물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렇게 장애가 있는 분들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장애가 있는 분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오늘 나에게 건강을 주신 것은 장애인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물질을 주신 것은 필요한 분들과 나누어 쓰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1.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 요 16:13-15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

저는 제 발음이 정상인줄 알았는데 언젠가 부터 제 혀가 좀 짧은 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 소리는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짧은 혀도 믿지 않으시겠지만 가끔가다 잘 씹습니다. 입안의 혀도 내 마음대로 안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 주님이 아십니다. 그래서 돕는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도움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말을 배우면서 그 혀가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혀가 처음부터 짧고, 굳어진 것은 아닙니다. 습관이 굳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굳어진 혀는 펴지기가 어렵습니다. 보통 언어학자들은 7-8세가 되면 혀가 굳어지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 이민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엄마 배속에서 온 아이하고 한국에서 태어나서 들어온 아이하고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 만큼 언어라는 것은 어려서부터 습관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처럼 발음이 잘 안 되는 목사님 한 분이 6.25때 공산당에게 잡혔습니다. 공산당들은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그 자리에서 사형을 결정했습니다. 목사님의 차례가 되어서 공산당이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장로교 목사요”그랬습니다. 그랬는데 이 공산당은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장롱을 고치라고 했다는 겁니다. 부인이 아침에 나갈 때 혹시 장롱 고치는 목수 있으면 집으로 데려오라고 했는데 목사가 “장로교 목사요”그러니까 “장롱 고치는 목수요”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부산에 사시는 분이 한번은 저에게 “버니엘을 아십니까?”그러는 거예요. 제가 인터넷에 성경인명사전의 저자 아닙니까? 어지간한 이름은 알지요. 그런데 “버니엘”은 모르겠어요. 모른다고 했더니 상당히 실망한 듯한 소리로 “목사님 버니엘’을 모르세요.” 그리고 다시 “정확히 말씀해 보세요?” 그랬더니 “브니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브니엘 해보세요.” 그랬더니 다시 “버니엘” 그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이 말 소리로 사람을 구분한 것이 나옵니다. 사사기 12장에 입다 선지자가 길르앗 사람과 함께 에브라임 사람과 싸웁니다. 그리고 패하여 도망하는 에브라임 사람을 잡기 위해서 요단 나루턱에 미리 도착하여 에브라임 사람을 잡습니다. 이 때 말을 하지 않고 가만있으면 누가 길르앗 사람인지, 에브라임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말을 시켜보는 것입니다. 삿 12:6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명이었더라”
이렇게 습관이 된 발음도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주님을 만날 때 거짓말을 시킬 수 없습니다. 물론 주님이 다 아시는 것도 있지만 내가 아무리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안됩니다. 왜하면 양심이 소리를 지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9:1 “양심이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때에도 그렇습니다. 내 양심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잘 믿으세요. 거짓 믿음은 안됩니다. 주님이 다 아십니다.

오늘은 성령이 우리에게 내주(內主) 하시는 증거들을 8가지로 말씀드림으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자 합니다.

①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나의 사고 방식을 주님으로 하여금 주장하게 합니다.
본문 13절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라고 하십니다.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②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합니다.
본문 14절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성령은 오직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내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삽니다.

③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언제나 우리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본문 14절 후 반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고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의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것을 알리십니다. 예수님의 것을 알리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알고 싶어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어떤 할머님이 계셨습니다. 성경을 읽는데 인물만 골라서 읽으시는 것입니다. 성경 인명의 이름이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골라서 읽으시는 것이예요. 그래서 목사님이 할머님 성경을 모두 읽으셔야지 왜? 이름만 읽으세요. 그랬더니 할머님이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텐데 천국에 간 사람들의 이름이라도 알아 가지고 가야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독하다보면 오늘날 우리와 관계없어 보이면서, 지명이름이 너무 많이 나와 읽기 힘든 곳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부분이 여호수아 13장부터 21장까지 가나안 땅을 분배하여 12지파에게 지경을 나누어주는 장면입니다. 유다지파에게 준 곳 여호수아 15장 21-32절까지 읽으면 이렇습니다.
21 유다 자손의 지파의 남으로 에돔 경계에 접근한 성읍들은 갑스엘과 에델과 야굴과
22 기나와 디모나와 아다다와
23 게데스와 하솔과 잇난과
24 십과 델렘과 브알롯과
25 하솔 하닷다와 그리욧 헤스론 곧 하솔과
26 아맘과 세마와 몰라다와
27 하살갓다와 헤스몬과 벧벨렛과
28 하살 수알과 브엘세바와 비스요댜와
29 바알라와 이임과 에셈과
30 엘돌랏과 그실과 홀마와
31 시글락과 맛만나와 산산나와 르바옷과
32 실힘과 아인과 림몬이니 모두 이십 구 성읍이요 또 그 촌락이었으며
어때요 이해가 되시고 은혜가 됩니까? 여기서 은혜 받는 분이 있다면 대단한 것입니다. 지명들만 열거된 것 같지만 감동스러운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땅을 이제 분배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이 땅을 분배받는 각 지파의 사람들은 어떠하겠습니까?
만일 이 땅을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이라면 얼마나 관심이 많겠습니까? 예를 들어
“주앙교회 성도들에게 분배해 주는 땅은 남으로 서울 경계에 접근한 성읍들은
석수, 관악, 명악과, 금정, 군포, 산본과, 부곡, 의왕을 지나 왕송저수지와 서수원까지이며 모두 이십구 성읍이요 또 그 촌락이었으며“라고 말하면 얼마나 관심이 많겠습니까? 정확하게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서의 땅의 분배에 대한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의 우리 집과 땅에 대한 분배를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이 생깁니다.

④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언제나 하나님을 위한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⑤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더욱 깊게 깨닫게 됩니다.
롬 5:20 “…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죄를 더욱 깊게 깨닫게 될 때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만원을 대신 값아 주었다고 생각하는 분은 많이 고맙다고 생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100만원 아니 더 많은 돈, 내가 도저히 값을 수 없는 돈을 값아 주었다고 생각하는 분은 더욱 감사하며 은혜가 될 것입니다.

⑥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점점더 죄악에 대해서 민감해 집니다.

⑦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하나님의 의와 거룩에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⑧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최근의 북한 소식하나 전해드리겠습니다.
추운 겨울에 며칠을 걸렸는지 어렵게 탈북을 해서 중국에 도착을 한 강철(가명)과 진주(가명)는 북한에서 부모님과 살다가 중국으로 넘어온 남매입니다. 희미한 불빛이 보이는 민가로 내려와 남매는 먹을 것을 청했습니다. 중국당국이 탈북자를 보호하면 벌을 주지만 같은 민족으로 모른 채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어린 남매를 모른 척 한다는 것은 곧 그들을 굶어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조선족 사회에서는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다 압니다. 그런 것을 묻지 않습니다. 그저 며칠을 따뜻한 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한참 후에 이들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부모도 오래 전에 탈북을 했다가 복음을 듣고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강철의 아빠는 북한에 돌아와 10일만에 열 한 명을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감격스런 첫 예배를 모여서 드렸습니다. 감시원들의 눈을 피해서 강가에 배를 띄어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강가에서 예배드리는데 군인들이 찾아왔습니다. “동무들 거동이 수상한데? 뭐하고 있었나?”그러는 것입니다. 순간 강철 아빠는 “아무 일 없습네다”그랬는데 욕을 퍼부으며 배를 수색하다가 감추어둔 성경책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 종간나 새끼들! 이거 뭐야?” 하면서 권총을 머리에 대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갔는데 그 때부터 아버지는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북한에서는 성경 한 권을 소지하다 걸리면 6년형이 확정된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땡크 한대보다 성경 한 권을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그 후 어머니는 아빠가 잡혀갔으니 엄마가 전도해야 겠구나 하고는 과일을 팔러 다니며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남편과 가장 친했던 친구 분에게 한참 전도하고 있는데 군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알고 보니 남편친구가 스파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도 잡혀가 소식이 끊어진 것입니다.
두 남매는 따돌림을 당하여 늘 듣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안기부 공작원 새끼들!”입니다. 북한에서는 예수 믿다가 걸리면 안기부 공작원이라는 누명을 씌워 왕따를 시키는 것입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마을에서 쫓겨나 산 속에 들어가 굴을 파고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이들이 먹고 산 것은 뱀과 쥐였습니다. 강철은 “목사님 뱀을 잡을 때는 전기 줄이 최고입니다.” “그래?” “왠지 아십니까? 어떤 놈들은 대가리를 세워 덤비는 놈들이 있습니다. 이 때 전기 줄로 사정없이 내리치면 그 자리에서 뻗어버립니다. 뱀은 잡자마자 벗겨 곧바로 구워 먹으면 기가 막힙니다.” 남매는 뱀을 잡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맛있는 뱀을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나는 마을로 내려가 남의 집일을 해주고 감자를 받아온 적도 있지만 그 일거리는 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픈 어느 날 쥐를 잡기 위해서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옥수수 몇 알을 놓고 쥐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때 배고픈 쥐가 나타났습니다. 순식간에 내리쳐 쥐를 잡고 있는데 또 살이 찐 쥐가 나타나 그 쥐도 잡았습니다. 모두 세 마리를 잡아 물을 넣고 끓여 다른 반찬 없이 쥐만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쥐 잡아 먹을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 그게 먼데?” “절대 들이나 산에서 사는 쥐를 잡아먹으면 안됩니다. 등에 하얀 줄기가 있는 쥐는 출혈열 쥐입니다. 그 쥐를 먹으면 독이 있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쥐 잡아 먹을 때는 집에 사는 쥐가 최고입니다.
이 아이들은 영양보충이 되지 않아 초등학생 2-3학년 정도의 상태였습니다. 진주는 지금도 다리를 쓸 수 없을 정도로 아파서 괴로워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들이 즐겨 부른 찬송은 455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였습니다.

강철이 언제 가장 힘들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한참을 머뭇거린 강철은 “엄마, 아빠가 잡혀가고 나서 갈 곳이 없었습네다. 그리고 먹을 것도 전혀 없었습네다. 그리고 마을에 구걸하러 다니는데 아세끼(아이)들과 아저씨들이 우리한테 ‘거지 새끼들, 안기부 공작원, 꽃제비’라고 놀릴 때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한마디 더 들려주기를 “목사님, 하지만 감옥에 있는 아빠 엄마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네다. 감옥에 있는 부모님이 더 힘들지 이런 것이 뭐가 힘들겠습네까?”

배불리 먹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남조선에 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 내가 남조선에 가서 뭘 합네까? 나 같은 놈 누가 받아 주기나 한답네까? 북조선에 가서 예수님 전해야지요.”
그러다가 엄마, 아빠처럼 잡혀가면 어쩔려고“ ”그럼 잡혀가면 됩네다“
무섭지 않느냐고 했더니 “무섭긴 뭐가 무섭습네까? 일 없습네다(괜찮습니다).”
남매는 지혜롭게 토굴에서 납짝한 돌맹이를 가져다가 구들장을 만들고 아궁이도 만들고 불을 피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불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주변의 낙엽들을 모아 이불을 대신했습니다. 이들이 입고 있었던 옷은 거의 다 떨어져 이곳 저곳에 살이 삐죽삐죽 나와있었습니다.

남매의 기도제목은
1. 부모님이 하루빨리 석방될 수 있도록.
2.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도록.
3. 진주의 부어있는 몸과 질병의 치유를 위해서.
4. 남매의 꿈과 미래를 위해서

세상 사람들은 은과 금으로 자신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예수님으로 자신을 보입니다.

세상 사람은 은과 금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피 묻은 십자가로 세우려고 합니다.

 

[MIR 17기 개강] 하나님의 선교

제목 : 하나님의 선교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말튀스:순교자)이 되리라 하시니라”

1. 선교자의 자세
요즘 들어 세계선교에 대한 열의가 무척 높아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정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계선교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기본적인 신앙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한 단순한 타 문화권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그 민족에 대한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선교를 운운하기 전에 잠깐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면서 가족들이나 교인들과의 관계조차 원활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코카콜라가 전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음료가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코카콜라 회사에서 내건 좋은 표어 때문이었습니다. 그 표어는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선교사는 가정과 교회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졌던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다른 문화권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때 비로소 그 복음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선교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최초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선지자들과 자기 아들과 자기의 성령을 보내심으로 선교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들 되신 예수께서는 자신이 보내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를 보내십니다. 요한복음 20:21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행 8:1, 4절의 ‘흩어지다’는 헬라어 ‘디아스페이로’란 단어는 원래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뿌려지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은 성장시키십니다.
마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우리 나라에서도 복음을 제일 처음 전한 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우리가 언더우드, 아펜젤러만 기억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의주 땅에서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등 네 분들이 로스 선교사와 매킨타이어 선교사를 만나게 됩니다. 압록강 하류 국경지방에 [고려문](高麗門, Korean Gate)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출입국 관리소와 같은 곳입니다. 그곳에 선교사들이 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 나라만 선교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일본도 중국도 다 받아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와서 조선 사람들을 찾던 중에 장사꾼으로 온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이런 분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리 한국말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말만 배우고 서양 종교를 전하는 일 등은 하지 않도록 약속을 하고 함께 간 것입니다. 그러나 3년만에 본인들이 회개합니다. 믿으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거기에서 이 네 분들이 세례를 받습니다. 그해가 바로 1876년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선교사가 들어온 것이 1885년이 되어서 입니다. 거기에서 한국말로 성경을 번역합니다. 이 분들이 1882년 누가복음, 요한복음, 1884년 마가, 마태복음을 번역해서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들어올 때 이 성경을 갖고 들어옵니다. 1887년에는 이 분들이 신약을 다 번역하고 압록강을 건너오게 됩니다. ‘이성하’라고 하는 분이 성경을 가지고 오다 여인숙에 투숙하였는데, 수상히 여긴 여인숙 주인에 의해 성경이 불태워 지고 압록강에 버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 성경은 들어오지 못하고 그 다음 서상륜과 백홍준이 성경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들은 성경을 모두 새끼줄로 만들어서 그것으로 짐들을 묶어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것을 모두 다리미로 펴서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 서상륜은 황해도 솔내로 들어옵니다. 솔내 마을이 58가정인데 50가정이 예수를 믿습니다.

4. 선교의 열매를 거두십니다.
시편 126:5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선교사 수
캘버리 컨텐더에 의하면, 이단종파인 몰몬교는 5만 5천명의 전임 선교사들을 가지고 있고, 여호와의 증인은 약 27만 명을 가지고 있는데, 기독교회의 선교사들은 다 합해도 단지 18만명 정도에 불과하다(워치만 미니-익스퍼지터 1997년 11월호). (캘버리 컨텐더, 1998년 1월 1일자.)
선교사 수는 미국 60,600명 / 인도 44,000명 / 영국 10,654명이며 한국이 현재 13,000여명을 파송하고 있습니다.

 

복이 있는 눈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40. 복이 있는 눈) / 눅 10:21-24

“21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저는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 빈혈이 좀 있습니다. 중학교 때 점심시간에 조회를 했는데 햇빛에 오래 서 있다가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청년 때는 서울역에서 헌혈하다가 얼굴이 하야케 변하고 현기증이 나서 간호사들이 놀란 적이 있어 그 이후부터 헌혈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2년 전에 치과를 갈 때 겁이 나서 집사람 손잡고 갔습니다. 40넘은 사람이 부인 손잡고 치과에 오니까 의사 선생님이 여자였는데 쳐다 보시더라구요. 누구 손잡고 온 사람 있나 보니까 아이들이 엄마 손잡고 왔더라 구요. 아니나 다를 까 병원냄새 나고 속이 울렁울렁 하다가 얼굴이 하얘지고 화장실이 가고 싶더라구요.
제가 이렇게 된 데는 체질도 문제가 있겠지만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도 영향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보아서는 안될 충격적인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었을 때 저희 집 앞에 경춘선 기차가 다니는데 그 뒤쪽에 마을이 있어 사람들이 철길을 넘어 다녔습니다. 그 철길로 할아버지가 건너가시다가 기차가 오는 것을 다 피하지 못하고 한쪽 다리를 기차바퀴에 치이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까이 에서 목격한 것입니다. 발목이 다리에서 거의 잘라져 질질 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본 후로 몇 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하고 현기증이 났습니다.
저는 지금도 영화에서 끔찍한 장면이 나오면 바로 채널을 돌립니다. 대부분 이런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살인하는 장면이라든가 남에게 상해를 입히는 장면들은 모두 봐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주유소 습격사건’이라는 영화가 있었잖아요. 이 영화 나올 때 모방범죄나 유사사건이 생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실제로 모방범죄가 생겼습니다. 외국의 사례에서도 영화를 흉내내는 사건들이 많이 나옵니다. 모두가 보지 않아야 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거나 볼 수 있다고 다 보는 것은 복이 아니라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된 것 만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최고의 것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사람은
주님은 본문 21절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과 “어린 아이들”이 대조되었습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셨습니다.”
지혜와 슬기는 주님이 다른 곳에서 말씀하실 때는 좋은 것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마 7:24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막 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눅 21: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그리고 마 25: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혜와 슬기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에게 숨겼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위에서 말한 본문의 뜻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란 율법에 대한 지식과 지혜가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높은 학문이 신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만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이미 오래된 생각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지혜로운 현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위경 제4 에스라 12:35-38).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과 같은 자들에게는 나타내셨습니다.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적 지식은 부족하지만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영국의 사상가 콜린스(J. A. Collins)가 어느 날 교회에 가다가 가난한 일꾼을 만나 나눈 이야기입니다. 콜린스는 ‘이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가 보자’라고 생각하고 대화한 것입니다.
콜리스 ‘어디를 가십니까?’
일꾼 ‘교회에 갑니다’
콜린스 ‘당신의 하나님은 크신 분입니까? 작은 분입니까?’
일꾼 웃으면서 ‘하나님께선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온 우주를 품어 주시지요. 그러나 제 가슴에 머무르실 수 있을 만큼 작은 분이시기도 합니다.’
후에 콜린스는 그 어떠한 사상집도 이 가난한 일꾼의 말이 준 감명을 따르지 못했다‘라고 술회했습니다.

아버지를 알려줘야 합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무엇이든 알려주어야 아는 것입니다.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독도를 ‘다케시마’이며 자기네 땅이라고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제 우리도 알려야 합니다. 알리지 않으면 지는 것입니다. 일제는 36년 동안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많은 일본말을 남겨놓았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깊은지 우리는 아직 까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말을 합니다.
‘삐까번쩍’ – ‘삐까삐까’로 번쩍번쩍이며 ‘쎄쎄쎄’ – ‘쎄쎄쎄’로 놀이동작을 말합니다.
‘싹쓸이’ – ‘쓰리’는 소매치기 이며 ‘아싸리’ -‘앗싸리’는 깨끗하게입니다.
‘쿠사리’ – ‘쿠사리’ 쇠사슬을 말하고 ‘몸빼’ – ‘몬뻬’ 여자 작업용 바지를 말합니다.
‘무대포’ -‘무떼뽀우’는 막무가내를 말하는 것이며 ‘요이땅’ – ‘요이땅’ 요이는 준비이며 ‘땅’은 총이 없을 때 총소리를 흉내낸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일제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우리가 모르는 것들입니다. 속히 버려야 할 말들입니다. 무엇이든 누군가가 알려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알려주신 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을 알려주신 것만이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신 분입니다.
본문 22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하셨습니다.
흔히 제일 알다가도 모를 사이를 부부사이로 말합니다. 그래서 부부문제는 “부부만 안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부모는 우리를 키워주면서 우리 또한 부모와 같게 교육되고 환경에 적응되어 살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부는 다릅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다가 만났기 때문에 많은 것이 다릅니다. 그러나 부부도 오래 살다보면 닮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닮지 않는 점도 있겠지요. 이것은 서로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똑같이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르면 다른 대로 인정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는 우리가 다 모릅니다. 부부의 문제도 다 알 수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문제를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려주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모릅니다. 주님이 알려 주셨기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에게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닭장에서 병아리들이 함께 커 가는데 한 마리가 다른 닭들과 색깔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미움을 받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을 날아가는 독수리를 보았습니다. 당당하고 멋있게 날아가는 그 모습이 너무도 부러웠습니다. 자신은 날수도 없는 닭이며 그것도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닭이 아니라 독수리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한 소년이 장난으로 독수리 알을 꺼내어 닭장에 넣었기 때문에 독수리로 자라지 못하고 닭처럼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어미 새가 길러주지 않으면, 가르쳐 주지 않았으면 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려주고 가르쳐주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롬 10:14-15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복이 있는 눈
“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주님을 보고있는 제자들은 확실하게 복 받은 눈임에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보는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었던 선지자들(다니엘, 호세아, 아모스, 요나, 미가 등)이 보지 못한 분입니다. 그리고 왕들(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아 등)이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자들이 보고 있으니 이들이 얼마나 복 받은 것입니까. 구약의 선지자나 왕들은 메시야를 보지 못했고 복음의 선포를 듣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보았습니다.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들도 제자들과 같이 복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복음을 다 보고 있지 않습니까?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었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소리를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제일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진정 복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알려주시고 가능하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2절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계시를 받는 자”는 원문의 ‘아포칼륌토’로 “덮개를 제거하다, 나타내다, 밝히다”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바울이 회개하기 전 ‘사울’일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은 제자들을 잡아죽이려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도 지켜보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다메섹으로 갈 때 홀연히 하나님이 비추는 빛을 보았습니다. 이 빛을 보고 그는 눈이 멀어 사람들에 의해서 직가라는 거리의 유다집으로 옮겨졌습니다. 4일 동안이나 앞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못했습니다. 그 때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환상으로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그는 주의 제자들과 믿는 사람을 잡아가려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주님이 일러주신 명령이 부당하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행 9:15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음성을 들은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대로 사울에게 가서 안수했습니다. 바로 그 때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눈에 있던 덮개가 제거된 것입니다. 본문 22절과 같이 아들(주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즉 눈의 덮개를 제거하여 하나님을 보게 한 것입니다.
예전의 눈하고는 다릅니다.
예전에는 주님을 따르는 부활을 믿는 주님의 제자들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이는 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눈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눈의 덮개를 제거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일만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 어떻게 하면 남위에 군림할 수 있을까? 명예와 욕심이 가득합니다. 그것만 보입니다. 주님이 우리 눈의 덮개를 제거해 주시기 원합니다. 그 때 우리는 아버지를 보게됩니다. 이 눈이 복이 있는 눈입니다. 아멘.

미국의 한 사업가가 호텔에서 방을 구하려 했으나 호텔이 만원이라 거절당하고 낙망하여 걸음을 옮기는데, 어떤 신사가 그에게 “지금은 어딜가나 방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니 자기와 동숙하자”라고 했습니다. 사업가는 안도의 숨을 쉬고 감사한 마음으로 동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방을 제공한 그 신사가 자기 전에 열심히 기도를 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자기와 사업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더랍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신사는 먼저 성경을 읽더니 또 열심히 기도하더랍니다. 그들은 아침 식사를 하고 헤어질 때 명함을 주고받았습니다. 신사의 명함에는 ‘윌리엄 제임스 오브라이엔’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해서 사업가는 그 신사에게 “국무장관의 이름과 똑같군요.”라고 했더니 그 신사는 겸손히 “네, 같은 인물입니다.”하더랍니다. 후에 사업가는 회상하기를 ‘나의 삶에 제일 큰 변화를 준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옛날 청교도들이 퓨리탄들이, 믿지 아니하시는 분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할 때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과 지금 우리가 제일 많이 쓰는 ‘예수 믿으세요 그리고 구원 받으세요’ 우리가 이런 말을 제일 많이 쓰겠죠? 그런데 청교도들이 전도할 때 쓴 말 가운데 이런 말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한번 따라서 해보세요. 사람이 두 번 태어나면 한번만 죽고요, 한번만 태어나시면 두 번 죽어요. 청교도들이 그렇게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두 번째 사망, 제2의 사망을 가리키고 있어요. 두 번째 사망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어떻게 쓰여있는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21장 8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여기 무슨 단어가 나왔습니까? 둘째 사망, 둘째 사망, 거기다 줄쳐 놓으세요. 둘째 사망.

예수님 믿지 않는 분들은 죽으면 끝난다고 합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죽고 또 죽습니다. 그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그러나 두 번 태어난 사람,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한 사람들은 두 번 죽지 않습니다. 대신 두 번 태어납니다. 아멘.

 

부활의 증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생애(39. 부활의 증거) / 눅 24:1-12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8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고하니라) 11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새날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역사상 오늘만큼 의미가 깊은 날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주일을 성수 하는 것은 구약의 안식일이 아닌 새로운 날 부활 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민족으로 택하게 하셨다면, 오늘날에는 부활일(주일)을 지킴으로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택하시는 것입니다.
러시아 모스크바 크레물린에 가면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가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종이 깨져있기 때문에 울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종의 높이는 5.4m, 무게는 219톤 가량 됩니다. ‘자유의 종’의 무게가 0.9톤입니다. 이 종이 깨진 이유는 쇳물을 주조틀 내에 부었을 때 그곳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물방울 하나가 주조틀 안으로 들어가 종에 틈이 생겨 금이 간 것입니다.
이 물방울처럼 작은 의심이 생겨 부활을 의심하지 말고 온전히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부활을 의심하는 것은 이 물방울과 같습니다. 전체의 신앙을 망가트립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1. 예수님은 죽은자를 살리심으로 자신의 부활도 알렸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생전에 죽은 사람 두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죽은 것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8:41절부터 나오는 12살 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한 두 사람이 보는데서 행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집에는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를 보려고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조롱하는 무리들이 한 말을 통해서도 증명하고 있습니다.
눅 23:35-37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찌어다 하고 36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 37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여기서 ‘구원’이라는 말은 ‘살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은 살렸으면서 예수님 자신은 스스로 살아날 수 없느냐는 말입니다. 이들의 조롱이 오히려 예수님이 생전에 살린 나사로와 야이로의 딸 그리고 죽어가는 수많은 병자들을 살리신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들의 말대로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에서 십자가에서 뛰어내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완벽한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증거
본문 6절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실 것을 수 차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대답입니다.
마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 나왔습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도 무덤 속에서 있다가 살아나실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 사역이 점점 마지막을 향해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제자들에게는 모든 사실을 솔직히 말해줄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 17: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본 것은 세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살아나 기전에는”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제자들에게는 숙지시키시고 군중들에게는 암시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미래예언을 잘한 사람으로 알려진 한 사람을 꼽으라면 사람들은 ‘미셸 노스트라다무스’(Michel Nostradamus, 1503~1566)를 꼽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 생 레미라는 곳에서 태어난 유태인입니다. 이 사람이 예언가로 알려진 것은 오랜 작업 끝에 완성된 『백시선』이라는 책 때문인데, 그가 친구들에게 “이 책 속에 세계의 미래가 모두 담겨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말 그의 예언이 맞는 것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저서를 지금까지 수많은 학자들이나 판문가 고서적 애용 가들이 읽어보고 자기들이 예언을 조금씩 바꿔서 거짓으로 일궈낸 것들이 전부입니다. 실제 그의 예언은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노스트라 다무스가 나폴레옹, 히틀러를 예언한 것, 핵무기를 예언한 것, 지구멸망을 예언했다는 것 등은 모두가 후세 인들이 덧붙여 꾸며낸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의 종말에 대해서도 이 사람의 이야기를 부풀려 흥미 거리로 만들어 사람들을 믿게 한 것입니다. 그의 예언이 맞은 것이 있다면 그의 책 후반에 장난기처럼 쓴 것입니다.
“이 이야기들을 종교가나예언가 자신의 부를 축적하려는 자, 그리고 어리석음으로 남을 속이려는 자로부터 멀리하소서 후세에 내가 예언한 것을 믿으려는 자가 있으면 처단하소서 그리고 누구도 모르게 하소서 내가 죽고 수세기가 지난 후에 이 예언의 기일이 전부 끝났을 때 열 수 있도록 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그들 자신의 어리석음에 얽매여 백성을 속일 것이오”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왜 썼는지 의심이 갑니다. 이런 이야기로 볼 때 노스트라다무스는 이 책을 통해서 사람들을 농락한 것입니다.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들고 끊임없이 자기가 한 말을 현재처럼 후세 인들에 의해서 살이 붙어져 거짓이 돌아다닐 것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천재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후세 인들이 농락 당하는 것이 우습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이렇듯 농락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 예언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하고는 다른 분입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능력을 가지고 계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완전히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신 분입니다.

3. 빈 무덤
먼저 말씀드린 것이 예수님의 예표와 예언이었다면 빈 무덤과 수의들은 부활의 실증입니다. 말씀하시던 것이 사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인봉되었습니다. 인봉이 무엇인지는 아시지요? 이스라엘의 무덤은 우리처럼 땅에다 묻는 것이 아니라 돌 굴로 된 것이며 이 속에다 시체를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로 입구를 막는 것입니다. 바로 이 입구를 인봉한 것입니다. 인봉을 하게되면 누가 돌을 굴렸다가 다시 닫게되면 표시가 납니다. 한마디로 몰래 시체를 훔쳐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인봉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면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경우입니다.
첫째는 인봉하고 서있는 파숫군과 예수 적대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쳤다는 가정입니다. 여러분! 흔히 상식적으로 살인사건이 나면 살인동기가 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살인 동기가 없으면 그 사람을 살인자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죄인의 몸으로 죽었습니다. 사람들의 원성이 높았습니다. 스스로 십자가형을 집행한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예수의 시체를 훔쳐간다는 말입니까? 그럴만한 명분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마 27:64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고 빌라도에게 청하고 무덤을 굳게 지켜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이 구절은 두 가지를 동시에 증명합니다. 자신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치지 않았다는 증명이고 둘째로 제자들이 훔쳐갈 것을 방지한 것입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훔쳐갔다는 억지 주장입니다. 예수님 부활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이것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리아와 여자들이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의 시체가 없는 것을 제자들에게 고했을 때 본문 11절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라고 한 말은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제자들의 행동에서도 전혀 앞뒤가 맡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부활은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쓰지만 저는 압니다. 제 경험으로 비쳐 볼 때 증명이 안되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라는 것을 압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부활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믿음을 성령께서 주시기를 원합니다. 부활을 믿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여러분!
부활을 믿으면 반드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종교로는 부활이 안되지 않습니까?
불교에도 부활과 비슷한 의미인 ‘열반’이라는 말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부활하고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주이십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어디 가서 물건을 사게 되면 “이것이 제일 비싼 것입니까?”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독일사람들은 “이것이 제일 튼튼합니까?”라고 묻고,
불란서사람들은 “이것이 최신형입니까?”라고 묻는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뭐라고 물을 것 같습니까?
“이것, 진짜입니까?”라고 한답니다. 너무 불신사회에서 살아서 그런 것일까요?
아무리 그래도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이후에 제자들의 증거를 보면 가룟유다 대신에 제자를 뽑을 때
(행 1:22)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행 4:1)…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행 4:33)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행 17:18)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고전 15:13)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종교개혁자 칼뱅은 세상을 떠날 때에 오직 한 절의 말씀에 의지했습니다.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을 25번 외우면서 이 말씀에 의지하고, 승리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지조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을 철새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 철새는 아무 생각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북극에서 남극으로 이동하는 철새들은 15,000km를 단 한치의 오차 없이 이동한다고 합니다. 철새는 태양, 성좌를 기준 삼아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강풍에 휩쓸려가다가도 제 위치로 돌아오는데 그 원리까지 사람들은 설명하지 못합니다. 또 태양의 위치를 통해 방향, 위도, 경도까지 정확하게 계산해 이동하는 것도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류학자들은 철새의 뇌가 자석처럼 지구의 자기장 방향을 파악해 이동하는 것으로 보고있습니다. 우리는 철새처럼 정확하게 주님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곳에 우리의 영원한 길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과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부활을 전하는 주앙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