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 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 내 아버지 집) / 본문 : 누가복음 2: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오늘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 친히 하신 것 중에는 제일 처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요즘 성경책은 예수님의 말씀을 빨간색으로 구분한 것도 있습니다. 바로 그 첫 번째가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42절에 보면 부모님들이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갔는데 예수님이 12살 때 예루살렘에 가서 있었던 일입니다. 유월절이 끝나고 부모님은 고향인 갈릴리 나사렛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예수님을 찾으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이 부모님과 헤어진지 사흘이 된 것입니다. 부모님은 성전에서 선생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부모님은 예수님을 찾으려고 얼마나 근심하며 다녔는지 설명했습니다. 바로 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12살이면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기 때문에 부모님을 잊어버렸다고 그렇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도 초등학교 5학년 때 경기도 마석인 우리 집에서 강원도 양구에 큰집이 있었는데 혼자 버스를 서너 번 갈아타고 갔었던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이 어려서 부모님을 잊어버렸는데도 침착하고 총명하게 행동했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모님이 알아 듣지 못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입니다. 지금 육신의 아버지는 요셉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아버지 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육신의 부모는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으로 번역된 단어는 네 가지 경우입니다.
첫째, 엘(EL) “신”신적 권능과 신 본질의 특성을 가지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둘째, 엘로힘(ELOHIM)으로 형태상 복수이나 “신들”을 뜻하지 않고 신의 모든 속성을 완전히 갖추신 분을 뜻합니다.
셋째, 아돈(ADON)으로 하나님을 “절대주권자”혹은 “주님”으로 묘사하여 그의 신적 권위와 실제적인 통치를 지적하는 낱말입니다.
넷째, 이 명사들과는 별도로 또한 하나님의 고유명칭 여호와(야웨)가 있습니다. 그 고유명칭을 직접 사용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공석에서 읽을 때에는 “주님”을 뜻하는 낱말로 대신했습니다. 영어 성경들은 공교롭게도 그 관습을 이어받아 여호와를 “주”로 그리고 그 고유명칭이 아도나이(아돈의 한 형태)와 연결되어 있을 때에는 “주 하나님”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 대치된 낱말 이면에 숨어 있는 하나님 자신의 치밀한 고유명칭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성경을 읽을 때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리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내밀한 성품을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하나의 낱말로서 여호와는 히브리어 동사 “있다”(존재)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 동사는 “존재하다”의 뜻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임재하다”를 의미합니다. 여호와(출3:13-16)는 능동적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이 고유명칭을 알리고자 하신 것은 그의 종 된 백성이 구속을 필요로 할 때였습니다. 달리 말해서 ‘능동적인 임재’의 개념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의 이름의 뜻을 계시하실 시기를 출애굽 때로 정하심으로써 그는 자기를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의 원수들을 정복하시는 자로 나타내십니다. 당신을 여호와로 알리신 그의 자기계시(출3:5)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이 성품은 유월절의 거룩한 구속과 거룩한 진노에서 구체화됩니다(출12장).
여호와는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와 연결되어 다양한 표현이 나타납니다.
여호와 삼마(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
여호와 라페(하나님이 치료하신다)
여호와 이레(하나님이 준비하신다)
여호와 닛시(하나님이 승리하신다)
여호와 살롬 (하나님은 평강 이시다)
여호와 로이 (하나님은 목자 되신다) 등으로 사용됩니다.
어떤 사람이 오막살이 앞을 지나가는데 거기에 소녀 하나가 추운 겨울날에 문 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서 있더랍니다. “왜 그렇게 서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그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가 나를 때리며 나가라고 내쫓아서 지금 문 밖에 서 있습니다” 하더랍니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 “아버지께서 잠든 다음에 들어가려고요” 어린아이는 아버지가 잠든 다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고 새벽 일찍이 아침상을 준비해 가지고 아버지 방에 들어갔습니다. 술에서 깨어난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때려서 내쫓았는데 너는 왜 오늘 집에 들어 왔으며 또 아침상을 차려서 가지고 오는 거야 ? 이 못난 아버지가 밉지도 않으냐 ?”고 물었습니다. 그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하더랍니다.
어째서일까요 ? 이 소녀의 말을 들어봅시다. “어머니가 세상 떠날 때에 내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기만 하면 저 모양이 된다마는 본심은 착한 사람이다. 언젠가는 좋은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나는 너의 아버지를 사랑한다. 그런고로 너도 너의 아버지를 사랑해라’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그 어머니의 말씀이 참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런고로 나는 그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아버지가 회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아버지도 사랑해야 되는 것인데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왜 사랑하지 못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2. 내 아버지
이 말씀은 놀라운 것입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경우가 없습니다. 아들인 예수님만이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하나님이 아버지임을 말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랄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이 태어날 때 베들레헴에서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메시야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있던 것입니다. 물론 헤롯왕가가 예수님을 잡으려고 탄생 직후 노력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조용히 지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12살인 예수님은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생애를 위해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나옵니다.
시편 68:5절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와 시편 89:26절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고 다윗에게 주셨던 언약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본문은 예언적 성격이 있어 장차 올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이사야 63:16절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과 이사야 64:8절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라고 이사야의 구원을 위한 기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본문 또한 장차 올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이해해도 그것은 시적 표현이거나 아버지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른 것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진짜 아버지가 되시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친히 말씀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마 5: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마 5: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6: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등 ‘아버지’라는 단어는 복음서에서만 445번나옵니다. 이중에 400번 이상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제자들이나 서기관, 율법사가 부른 것이 아닙니다. 모두 예수님이 부른 것입니다.
3. 아버지 집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임재하시기 위한 이름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이름이 구약적 표현으로는 여호와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임재하신 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바로 성막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성막에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만유의 주되십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계시는 곳을 말할 때 성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출애굽 때 이 땅에 임재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 솔로몬 시대가 되어서 법궤와 더불어서 성전으로 옮겨졌습니다.
바로 이곳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버지 집입니다. 분명히 여호와(야훼) 하나님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호와가 예수님의 아버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루살렘 성전은 바로 아버지 집입니다. 성전의 주인은 대제사장이 아닌 아들인 예수님 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종이 너무 오랫동안 주인 행세를 하다보면 자기가 정말 주인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바로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우리교회의 주인은 영원토록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저 또한 잠시 잠깐 저에게 주님이 여러분을 맡기신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몇 년 동안 막대한 돈을 들여 교회를 증축했습니다. 교인들은 새로 지은 예배당에서 첫 번째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새로 지은 교회의 장엄함과 색다른 건축양식에 경외감을 느끼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옛날 건물처럼 따뜻함과 사랑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서먹서먹한 가운데 드려진 예배조차도 아주 낯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어느 꼬마가 외친 소리로 인해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빠, 하나님이 여기 사세요?” 그러자 꼬마의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럼 얘야, 하나님이 여기 사시지.”
일본에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몇몇 달을 두고 비가 오지 않자 이대로 가다가는 농사를 다 망치겠다고 사람들은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기우제를 지낸다 굿을 한다 하고 난리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우찌무라 간조는 아이들과 함께 식사 기도를 올리는데 “하나님, 비를 주십시오. 오늘 꼭 비를 주실 줄로 굳게 믿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이 학교 갈 채비를 합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인 큰 아이는 아무 소리 없는데 3학년인 작은아이가 난데없이 우산을 찾습니다. “아버지, 우산 !” “맑은 하늘에 우산은 왜 찾느냐 ?” 우찌무라 간조가 어리둥절해집니다. 그런데 이 작은아이 하는 소리 좀 보십시오. “아버지, 아까 기도하실 때에 오늘 비 주실 것으로 믿는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 그러니까 우산을 가지고 가야지요 !” 우찌무라 간조는 속으로 아차 하고 크게 회개했다고 합니다. ‘나의 믿음은 전부 거짓이다. 저 아이의 믿음이야말로 참 믿음이다’ 그 아이 보기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주님의 양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은 주님의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한자에 평안할 안(安)자는 집우자에 아래 계집녀자가 있습니다. “집안에 여자가 있어야 평안하다”는 뜻입니다. 성전에는 누가 있어야 합니까?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 좋아하겠습니까? 시간만 있으면 성전에 있는 사람, 하나님 집에 있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우리의 집은 여러분들의 개인 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 내 집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 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부모님의 집에서 없어지면 부모님이 교회로 연락을 주셔야 합니다. 없어지면 첫 번째로 갈곳이 교회구나 생각되셔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식구가 없어지면 “야 거기 술집에 전화해봐!, 아니면 친구 집에 전화해봐!”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지 말고 주님처럼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이런 말을 하실 수 있는 우리 주앙교회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