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 구원의 주) / 본문 : 요한복음 3:16-21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1855년 한 아일랜드 청년이 결혼식 전날 익사사고로 신부를 잃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중 기도하다
가 『그래,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잃고 구원을 이루셨으니 나도 상실을 믿음으로 이기자』라고 말하며 재기했습니다.
청년은 즉시 이 ‘믿음의 고백’을 시로 썼습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이 시가 오늘날 세계 크리스천들이 가장 애송하는 찬송가 487장이며 청년의 이름은 조셉 스크리븐입니다.

꿈 많고 신사적이며 존경받던 그리스도인 가운데 토마스 무어 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무고하게 잡혀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있는 재판관을 향해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재판관님, 내가 당신을 친구라고 부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친구여, 나는 당신과 나의 관계가 바울과 스데반의 관계가 되기를 원하오. 바울이 스데반을 죽였지만,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이 두 사람은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있을 것이요. 그대가 나에게 죽음을 선고하지만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구원을 함께 누리는 친구가 되기를 바라오.“
재판관은 이 토마스 무어경의 감격스런 선언을 듣고서 이렇게 되묻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사형을 언도했는데 그대가 나를 선대하는 이유는 무엇이요?” 토마스 무어경이 대답하기를 “주께서 나에게 먼저 긍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원의 종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구원을 위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랑하고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화를 통해서 진리를 자연스럽게 소개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이 11개가 나오는데 오늘 본문이 그 첫 번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요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에서 시작합니다. 유대 고위관리중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는 정말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남들의 눈을 피해 어두워진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그가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을 직설적으로 묻습니다. 유대인이 얼마나 토론 문화가 발전해 있었는지 제가 늘 말씀드려서 여러분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유대인은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사람들입니다. 부모님이 학교를 보낼 때 아이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해 안 되는 것이 선생님께 꼭 질문하라”는 것입니다.
요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1. 멸망치 않고 영생을

멸망과 영생사이에 다른 것은 선택할 것이 없습니다. 멸망 아니면 영생 양자 택일 뿐입니다. 중립적인 것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 안 믿어도 선한 일 하고 살면 제일 좋은 천국에는 못 가도 극락에는 가겠지 하는 분이 있습니다. 본문을 잘 보세요 “저를 믿는 자마다”입니다. 반대로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멸망하다’의 아폴뤼미(ajpovlhtai)는 ‘잃다, 없어지다, 상실하다, 파괴시키다’의 뜻으로 사람이 병에서 나아갈 때 ‘회복하다’는 말과 반대의 의미가 있습니다. 독생자의 이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이라고 하심으로 긍정적 표현으로 사용하십니다.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구원(영생) 아니면 멸망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2.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16절에서 멸망과 영생이 대조되었고, 17절에서는 심판과 구원이 대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그 권한을 위임받으셨습니다.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디모데는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1)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심판하시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의 시대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가 지나고 언제일지 모르지만 심판이 시작되는 날에는 무섭습니다. 그 때는 이미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구원’을 뜻하는 소조(awvzw)란 죽어가는 자를 구원해 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물에 빠진 자를 구해주거나 철길에 있는 사람을 구하고자 열차에 뛰어들어 다른 사람을 구해내는 목숨을 건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3.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지 마세요.

어느 민족이든 불행한 역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민족적으로 참 안타까운 한 민족이 있습니다. 바로 베트남입니다. 호치민은 30명밖에 안 되는 민병대를 만들어 200년 넘게 지배해온 프랑스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미군과 싸워 물리쳤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의 목숨을 건 싸움이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싸우다 사상적으로 공산국가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리고 지금 상당한 자유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지 못합니다. 공산당의 법은 하지 말라는 쪽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도 금지되어있습니다. 특히 외국인이 현지인에게 전하다 들키면 큰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을 감시하고 똑같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던 공상주의는 실패했습니다. 공산주의 역시 특권층이 있습니다. 사상적으로 계급적으로 있어서 처음부터 출신 성분이 좋지 못하면 절대로 그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도 물론 특권층이 있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나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분명히 빛보다 어두움을 택한 것입니다. 빛은 밝히 드러납니다. 그리고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은 숨기려고 합니다. 죄는 드러나기를 싫어합니다. 여러분! 어디서 좋은 일 한 것 있으면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까?
제가 몇 일 전에 운동장 뒤편 야산에 올라갔습니다. 정상에 가면 뒤쪽으로 아마 사유지 재산인가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 못 들어오라고 철조망을 쳐 놓았는데 너무 오래되어서 나무 중간으로 철조망이 덮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철조망 좀 풀어주라고 군포시청에 사진 찍어다 제보했습니다.
선과 악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압니다. 악은 감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선은 드러납니다. 알리고 싶습니다. 나누고 싶습니다. 그것은 선이며 좋은 일입니다. 자 용기를 내세요. 빛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지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 때문에 천국에서도 도저히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없었던 천사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천사는 여러 차례 지옥에 있는 사람에게 내려가서 그들을 지옥에서 놓아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갖다 놓을 만한 선행을 하나라도 기억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선한 일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부인이 “거지에게 양파를 하나 준 적이 있어요.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요?”라고 말했습니다. “선한 일이고 말고요.” 천사가 하늘나라의 문서 보관소에 올라가서 부인에 관한 서류를 찾아보니 과연 양파에 관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는 양파 하나를 갖고 지옥에 있는 부인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이걸 손으로 붙잡으세요. 그러면 나는 이쪽 끝을 붙잡을 테니, 같이 천국으로 날아 올라갑시다.” 양파가 두 사람의 몸무게를 잘 지탱해 주어 그 부인은 천사와 함께 날아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지옥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보자, 부인의 옷과 팔과 다리를 붙잡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인에게 매달린 사람들의 팔을 붙잡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인 아래 달라붙어 하늘나라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 본 부인은 많은 사람들 때문에 양파의 껍질이 벗겨져 자기가 떨어질 까봐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팔 굽으로 다른 사람들을 밀면서 말했습니다. “당신들 같이 선한 일을 하나도 한 적이 없는 죄인들은 지옥에 남아 있어야 해요.” 그 순간 양파 껍질이 벗겨져 떨어졌습니다. 이것으로 그녀의 희망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4.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진리를 쫓는 자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마 3:8) “빛으로 오나니”는 ‘에르케타이프로스 토 포스’(e[rcetai pro;” to; fw’”)입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아담과 하와가 숨었지 않습니까? 아담과 하와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게되는 것을 “빛으로 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두 나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향해 중인 배가 태풍을 만났습니다. 파도가 두 시간정도 계속되어 배를 휘감아 버렸습니다. 기관실의 모든 기능은 마비되었고 무전기도 불통되었습니다. 그래서 배는 정처 없이 바다에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금방 구조되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날이 계속 가자 불안해 졌습니다. 먹을 것도 점점 떨어져 갔습니다. 그러자 부상당한 한 선원이 죽자 슬픈 척 했지만 속으로는 입이 하나 줄어든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이 사는 것과 먹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승객들 가운데 임신부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임산부가 아이를 낳게 된 것입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말하기를
‘우리는 죽더라도 저 아이만은 살리자.’
‘저 아이에게 육지의 꽃과 평화를 맛보게 하자.’
사람들은 저마다 감추어 놓았던 것을 내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또 한 사람이 임종을 맞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죽음이 저 아기를 위한 죽음이 되게 하소서’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아기를 통해서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변한 것입니다. 나 혼자만 살겠다고 하면 조금 더 살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립니다.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요즘 건강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TV에서도 건강하게 사는 방법에 대해서 많이 나옵니다. 건강에 대해서 그만큼 많은 관심이 있으면서 왜 영생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심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건강하게 사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래봐야 100살 살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영생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현대교회들은 이 땅에서의 축복 논리에 빠져있는데 예수님은 사실 이 땅에서의 축복을 그다지 많이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잠깐의 고통과 어려움은 견디라는 것입니다.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얼마 길지 않은 인생을 잘 살아야 됩니다. 하지만 너무 이 땅에서의 축복 논리에 빠져서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 소망이 없어지면 안됩니다. 또 이 땅에 안주하려고 하여 영생을 위해서 아무 일도 안 하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정하는 사람은 이미 자기 심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무디는 이 말을 자주 했습니다. “회심하기 전 나는 십자가를 향해 일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십자가로부터 일해 왔다. 전에는 구원받기 위해 일했다. 그러나 지금은 구원받았음으로 일한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으며 열매 맺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