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비유(4) 그물 안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4. 비유(4) – 천국비유(4) 그물 안에) / 본문 : 마 13:47-51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저는 교회사역외에 한국컴퓨터선교회(KCM)사역을 하고있습니다. 요즘 심혈을 기울여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선교를 위한 전문검색입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검색’이라는 단어에 민감해져 있습니다. 몇 일전 집사람하고 이야기하다가 ‘요즘 검색이 강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역시 남편이 고민하는 것을 아내도 고민하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수준이 높은데… 요즘 검색이 구글과 한국에서는 네이버, 엠파스 등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검색이 강화되었지요. 그러나 아내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캐나다를 몬트리올을 가는데 벤쿠버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한답니다. 갈아타는 시간이 3시간인데 공항에서 검색이 강화되어서 빨리 나가지 못하면 비행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답니다. 그래서 공항검색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데 우리가 너무 무엇인가에 집착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뜻을 왜곡하면 안됩니다. 내 방식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자신이 다니던 초등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연설할 때 이 한마디를 연속해서 강조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결코, 결코,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많은 설명보다는 한가지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교육적 효과를 더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이 비유설교로 네 번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 중에 네 가지가 천국비유입니다. 오늘은 천국비유의 마지막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반복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러한 반복이 마태복음 13장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곳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비유 4개중에 한 가지 비유속에 나오는 요점들이 적어도 하나이상이 다른 비유에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처음의 천국비유에서 천국의 역사는 밭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비유에서는 이 밭에 가라지를 마귀가 심어놓았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 비유에서는 밭에 우연히 일하러나간 농부가 보화를 발견하고 자기의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이 세 비유들은 밭으로 시작해서 밭으로 마쳤다는 것이 동일합니다. 처음 비유에서는 성장을 두 번째 비유에서는 가라지를 뽑아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알곡을 다치지 말게 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오늘 비유는 밭이 아니라 갑자기 바다로 가십니다. 그러면 오늘 비유는 연관성이 없냐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늘 비유의 요점은 그 동안 줄기차게 주님이 언급하셨던 가라지의 마지막 때를 다시 설명해 주십니다.
오늘 비유는 두 번째 비유와 제일 유사합니다. 쭉정이와 알곡이 마지막 때는 함께 모입니다. 그리고 다시 갈라집니다. 오늘 그물비유 역시 고기들이 함께 모입니다. 그리고 다시 갈라집니다. 이것이 똑같은 결론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밭의 비유보다는 그물비유가 더 마음에 와서 닿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대부분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비유의 뜻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제자들이 어부였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실 때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0)는 말씀을 연상하실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이 비유를 설명할 때 사람들을 그물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이 비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전도와 선교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이 비유를 주님이 하신 목적은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모았다가 나누는 분리에 있습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 곡식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가라지들은 불에 태워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비유는 똑 같습니다. 고기들도 하나로 모였다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나누어집니다.

나쁜 고기의 결말이 나옵니다. 첫째는 “… 28 내버리느니라” 둘째는 “49 천사들이 … 악인을 갈라내어” 셋째는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비유는 악한자가 가라지를 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경우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심판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아주 커다란 배를 가지고 기업적인 형태의 어업을 제외하고 사람이 직접 강이나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투망식’이라는 방법인데, 사람이 그물을 던져서 천천히 끌어올리는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후리식’인데, 양쪽에서 그물을 서로 잡고 끌어서 고기를 잡는 방법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이 말씀에 의하면 천국은 그물과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천국이라는 그물에는 ‘각종’이라는 말에서 보여지듯이 ‘모든 고기’들,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일단은 모으는 아주 ‘활동력’이 강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런 천국과는 아주 다르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은 서서히 ‘천국’으로 입성하여 보겠습니다. 천국이라는 그물 안으로 잡혀 들어가는 고기가 되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천국은 그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각종’ 물고기를 모을 수 있는 그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천국은 아주 빡빡하게 짜여져 있는 그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아니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천국’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밝혀 줍니다. 하지만 이 천국은 그물과 같아서 물위로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그물이 물고기를 모으는 동안에는 물고기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열심히 먹이를 먹고 무리 져서 헤엄쳐 다닙니다. 천국은 이처럼 세상 속에서 깊이 잠겨 있습니다. 세상과 구분하여 천국을 말하는 사람이나 천국을 마치 볼 수 있는 것처럼 속이거나 아니면 천국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땅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상태의 것으로 말해서도 안됩니다. 열심히 먹이를 먹으면 천국을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없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말씀에 드러나지 않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천국이라는 그물을 바다에 치시는 분”이시며(47절), 나중에 “물가로 그물을 끌어내실 분”(48절) 그리고 그물에 든 고기들 가운데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릴 분”입니다. 이 분은 드러나지 않지만 엄청난 권위와 권세를 가진 분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물이 물 안에 있는 동안에는 이런 권위와 권세에 대하여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천국이라는 그물로 둘러 쳐 있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이건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그물이 고기에게 그물 치는 시간을 통보하고, 그물을 거두어들이는 시간을 통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기가 있을법한 곳에 그물을 내립니다. 그물이 바다에 들어와 있을 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저 일상적인 생활이 계속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시간입니다. 우리들이 변화가 없다고 지루해 하는 시간, 아무리 기도하고 찬양을 해도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시간 일상적으로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까지 일하고 잠자고 깨어나는 그런 시간들 인생의 희노애락이 끊임없이 계속되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시간 이런 시간들이 바로 천국에 들어 있는 생활이며, 시간입니다.
천국이 인간들에게 임재하고, 우리들 곁으로 다가온 것은 우리들 의지와는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천국 안에 있었던 시간동안 내가 얼마나 “좋은 물고기”(48절)가 되는가는 순전히 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의 원하심과 계획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좋은 사람” “복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돌이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미 오래 전 골고다에서 보혈로 우리들을 죄 없이 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율법이나 시, 역사를 통하여서 우리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서부터 세례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복음의 광고판 같은 선지자, 예언자”들은 많았습니다.
그리고 천국이라는 그물로 우리들을 둘러 쳐주셨습니다. 좋은 고기는 이런 환경을 하나님의 “보호”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믿음으로 성장하여서 하나님의 좋은 일꾼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하지만 질 나쁜 고기들은 이런 환경을 “간섭, 속박”으로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그물을(천국) 속박으로 여긴다면,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는 아주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천국이라는 그물을 속박으로 보느냐, 아니면 보호로 보느냐에 따라서 좋은 고기가 되느냐, 나쁜 고기가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우리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인들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애굽의 고기가마와 채소를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늘의 비밀을 말씀하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예수와 사람들을 구분하여 적으로 돌려세우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천국이라는 그물은 “하나님의 손길”을 보여줍니다. 우리들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들의 구원을 향한 계획과 실천에 열중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들은 하나님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는 그 날에 하나님의 “좋은 것”에 대한 선택에 우리들은 할 말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확신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늘 의식하고 그 손길의 따사로움에 자신을 맡길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결정에 하나님의 자리를 비어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결단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을 윤리적으로 “착한 행동”으로 보는 그런 이상한 그리스도인의 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들을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은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충실한 좋은 일꾼”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거나,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자원하고 싶다면(이런 마음들이 스스로 내적인 깊은 심령 가운데서 솟아나는 사람이야말로 “좋은 사람”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게 도리 것이고, 스스로의 삶의 가장 귀하고,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하나님을 위하여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현재 우리들의 삶과 생활과 우리들의 全영역에 깊이 내려져 있는 하나님의 그물을 의식하는 사람들만이 행할 수 있는 삶의 모습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만이 48절의 말씀처럼 “좋은 것”으로 인정받게 되고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들림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생활에 전 영역에 깊이 침투하여 있는 이 천국이라는 그물은 이제 “물가로 끌어내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물이 고기가 가득한가? 하는 그물 주인의 판단에 의한 것입니다. 그물주인은 좋은 고기가 많은가? 하는 부분이 아니라 그물에 가득 고기가 들어 있는가? 하는 부분으로 끌어올리는 시점을 결정합니다.
너무 많아서 그물이 상해서도 안되며, 너무 적어서 별로 수확이 없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물이 끌어올려진다는 것은 반드시 모든 사람들에게 천국이라는 실체를 보여줄 것이며, 그 천국은 그물 안에 있는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물을 끌어올린 사람의 손에 의하여 “좋은 것”으로 “그릇”에 담겨져야 만이 진정한 천국을 소유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어부들이었던 제자들은 늘 이렇게 일을 해왔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나쁜 고기라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고기는 따로 모았을 것입니다.
이 세상 끝 날에는 “그물이 가득 차는” 시기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하나님의 시간으로 모든 것을 교정하시는 그 세상 끝 날은 모든 성도들이 환난을 받고 힘들어하는 시기일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보다는 그물이 가득 차게 되는 시기입니다. 어부가 끌어올릴 시기를 선택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물을 끌어올릴 시기를 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강조하시는 것은 “좋은 사람”, “의인”들이 받아 누릴 특권에 대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 “악인”들이 누릴 엄청난 고통을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반드시 악한 사람들에게는 보응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천국이 드러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손길이 모든 것을 구분하십니다. ‘심판’(judgement)이라는 단어가 한글과 영문에서는 모두 판사나 입법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원어에서의 “심판”(크리시스)은 문자적으로 “구분하다”라는 말입니다.

주인은 대충 고기를 버리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러한 실수는 하시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고기 하나 하나를 점검하십니다.

우리가 좋은 고기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점검을 늘 해야합니다. 물론 오늘 비유는 나쁜 고기의 심판에 있습니다. 우리는 나쁜 고기가 되지 않기 위하여 늘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손길에 의하여 “좋은 것”이라는 판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며, 풀무불의 고통을 면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울며 이를 간다”는 것은 스스로를 향한 한탄입니다.
“왜 내가 그때에 교정하지 못했을까?”
“왜 내가 그때에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했을까?”
여기서 이를 갊이 나타납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평생 이를 갈면서 억울한 삶을 한탄하시면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현재 힘들지만 일시적인 회개와 겸손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비로 여기서 “천국”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사람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의 구분이 이루어지고, 훗날 이들의 인생과 결과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평신도 신학자이고 문학가, 변증가였던 영국인 루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결코 벼랑이 아니다, 지옥을 향한 길은 밋밋한 내리막길이다. 사람들은 그 길을 기분 좋게 걸어간다.”
이 말은 무척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갑자기 떨어지는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하는 밋밋한 내리막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