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8. 비유(8)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본문 : 눅 13:22-30

“22 예수께서 각성 각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29 사람들이 동서 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오늘은 종교개헉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독일 위텐 베르그 성 교회 문 위에 못을 박는 망치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실 여느 못박는 소리와 다를 바 없는 같은 소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망치질로 인해 삽시간에 온 유럽은 뒤집혔고 난리가 났습니다. 내용은 바로 로마 교황청의 잘못된 구원관을 지적하는 95개 논제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 시대는 교회란 오로지 카톨릭뿐이고 누구든지 로마 카톨릭에 반항하거나 어긋나는 교리를 가르치면 법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위클리프, 후스 등, 여러 신학자들도 종교개혁을 부르짖다가 불타죽었습니다. 고대나 중세에는 왕의 말이면 법 이였습니다. 이 시대는 왕도 교황에게는 꼼짝 못하던 때였습니다.
이처럼 교회의 권위가 하늘같이 높았고, 개혁을 부르짖다가 사람들이 처형되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개혁을 부르짖는 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이요 휘발유 들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이었습니다. 로마황제 칼 5세는 1521년 의회를 소집하고 루터를 종교재판에 회부합니다. 이때 카톨릭의 대표가 루터가 쓴 책을 지적하며 “이 책들이 네가 쓴 이단 서적들이냐?” 고 물었습니다.
루터는 “예, 제가 쓴 책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루터는 살기 위해 자기가 쓴 책들을 태우고 로마 교회에 무릎을 끓을 것인가, 아니면 신앙과 양심을 위해 끝까지 버티느냐? 는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이때 죽기를 각오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 책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기록한 글들이요 영혼의 구원을 취급한 글들이니 나는 결코 버릴 수도 태울 수도 없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장차 나도 하나님 앞에서 너를 부인하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도리가 없습니다. 나의 양심은 말씀 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주여,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나는 달리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루터가 지은 찬송이 바로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여러 지역을 다니실 때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이 사람의 질문이 구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단 답형으로 ‘그렇다, 아니다’라고만 대답 하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의 질문으로 보아서 아마 구원 얻는 자가 적었으면 좋겠다는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질문할 때는 자기가 얻고자 하는 답으로 유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사람 역시 구원받는 사람이 적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됩니까?
교회에 나오는 사람 중에서 아주 보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저런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실망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쉬운 질문으로 한다면 “주님 그런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지요.”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단 답형으로 “그렇다, 아니다”로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그런 대답이 이 사람에게 아무 유익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는 사람이 많고 적은 것은 이 사람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 구원의 대열에 참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문제입니다. 천국이 얼마나 좋은 것은 천국 문을 통과한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천국에 들어갈지 아닐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천국이 얼마나 좋으냐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람이 기대하고 질문한 것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이 질문에 답하지 않으심으로서 답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이미 언급하신 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산상수훈이 끝날 때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또한 마태복음 끝 부분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다시 한번 언급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비유입니다. 어리석은 여인들은 신랑이 도착했을 때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애원했지만 한번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마 25:1-13).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문이 되심을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요 10:7, 9)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라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으로 상징되는 것입니다. 문이 왜 필요합니까? 문은 걸러내기 위함입니다. 마치 추수 군이 쭉정이와 알맹이를 구분할 때 바람에 날려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쭉정이는 날아가고 알맹이는 아래로 떨어집니다. 이런 과정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요 14:6)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에 있어서는 핵심적인 것이지만 다른 종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창시자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종교들은 진리의 방법들에 대한 집합체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내용들은 창시자가 없어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종교들은 창시자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른길로 가라고 요구하기보다는 “나는 길이요.”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진리를 찾으라고 요구하시지 않으시며 “나는 진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을 찾고 얻으라고 하시지 않으시며 “나는 생명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이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를 가리켜 “새롭고 산길”(히 10:20)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는 저로 말미암아 …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고 했습니다.
미국 뉴욕에 살고있는 한인교회 집사님이 평생 살도록 전도한 명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은 작정하기를 올해가 가기 전에 꼭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면서 기도했습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저쪽에서 처음으로 걸어오는 사람에게 전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머리가 반짝 반짝 빛나는 사람이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이러한 풍경을 보는 것이란 싶지 않습니다. 미국 뉴욕한가운데서 한국 스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 집사님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아닌데요? 하필 스님입니까? 그러나 주님의 음성은 가서 전도해라! 그래서 무조건 다가가서 “스님 교회 갑시다”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이 하는 말이 “그럽시다”그러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교회로 모시고 갔습니다. 이 날이 수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작은 교회에 스님이 들어오니 불빛이 반사되어 교회가 훤히 빛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이제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이 스님이 타겟입니다. 전도의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날의 본문은 바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였습니다. 설교를 다 마치고 목사님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구원하셨다고 믿는 분은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오직 스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온 교회 성도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님도 일어난 것입니다. 스님의 고백은 지금까지 진리를 찾아 헤맸지만 진리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요한복음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날로 이 스님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분이 누구냐 하면 한국불교계에서 미국 동부의 심장부인 뉴욕에 절을 세우기 위해서 한국에서 뽑아서 정탐을 보낸 스님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가서 뉴욕거리를 걷다가 그만 여 집사님을 만나 구원을 얻게된 것입니다. 나중에 이분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내가 평생을 중 생활을 했는데 달리 할 것도 없으니 신학교를 가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추천으로 신학교에 가서 졸업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목회하고 계십니다.

로마서의 처음 세 장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증거 합니다. 우리의 도덕성이 아무리 높다 해도 그것을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지식이 아무리 많이 쌓인다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말합니다.

문은 열려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이 문이 좁은 문이라는데 많은 실망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교훈에서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좁은 문인 것은 사실이나 이 문은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열려있다는 것은 조만간 닫힐지도 모른다는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열려있는 이 문으로 들어가는 자에 대해서 특정한 부류의 사람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인종과 사회적 지위, 학력이나 업적을 따지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이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들어가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이 선택은 바로 나의 몫입니다.

요즘은 이런 설교제목으로 설교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으려고 교회에 왔는데 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목사님들의 설교제목을 뽑아보았습니다. 대부분 축복에 대한 설교는 많이 했습니다. 좁은 문이나 고난에 대한 설교는 안 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설교는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성경을 편협 되게 여러분에게 전달할 마음도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할뿐입니다. 다윗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가 고통가운데 있을 때 많은 시편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솔로몬은 너무나 평온한 시대를 맞이하면서 자신의 즐거움만을 추구하게 되었고 결국은 하나님을 점점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로마교회가 멸망하게된 이유는 자신들의, 기득권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곳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편안함과 안주함을 위해서 이용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부패의 원인입니다.
마틴 루터는 좁은 길을 간 사람입니다. 그가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던 힘은

1. 기도의 힘입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교회문에 95개조항의 「개혁선언문」을 붙여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다. 당시 평범했던 그가 어떻게 절대권력의 교황의 세력과 맞설 수 있었을까. 루터는 그것이 기도라고 말합니다.『만일 내가 새벽에 두 시간 이상을 기도하지 않았다면 그날의 승리는 마귀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나에게는 너무나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날마다 세 시간 이상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 기도가 모든 일을 지탱해 나가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찬송 384장 2절의 가사같이 마귀의 힘이 강하기에 우리가 내 힘만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해 싸워 주실 때 이기게 되는데 이 예수님의 힘을 빌려 올 수 있는 길은 다름 아닌 기도입니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입니다.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통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2. 말씀의 힘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요한복음 16: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의 말씀을 너무나 소중히 여긴 나머지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무릎을 꿇으며, 기어가면서 운반할 가치가 있는 말씀이다!”
루터는 위텐벨그 성에 유폐되어 있는 동안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대업을 완성했습니다.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확립한 것은 정치적 술책이나 무력의 힘이 아니라 바로 거룩한 말씀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루터는 후에 그 사실을 이렇게 진술하였습니다. “나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설교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나는 달리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은 잠을 자거나 나의 친구 필립과 암스도르프와 함께 있는 동안에 말씀은 군주나 황제로서는 결코 손상시킬 수 없는 교황권을 그처럼 힘없이 약화시켰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말씀이 모든 것을 해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탄이 사람을 유혹할 때 즐겨 사용하는 네 마디 말이 있답니다.
첫 번째는 “이 정도는 괜찮겠지”
두 번째는 “딱 한 번인데 뭘”
세 번째는 “너는 아직 젊어”
네 번째는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