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 잔치 열렸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7. 비유(7) – 잔치 잔치 열렸네) / 본문 : 마 22:1-14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영국의 설교가이자 ‘천로역정’의 작가인 존 번연이 있습니다. 그는 베드퍼드셔의 벽촌에서 땜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갔습니다. 겨우 읽기 쓰기만을 배운 그는 16세 때에 크롬웰의 의회군(議會軍) 수비대에 들어갔습니다. 1647년 의회군이 해산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을 하였는데, 그때 신부가 가지고 온 2권의 책 《천국에의 길》 《신앙심과 실행》을 읽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국교회를 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시 국교회인 성공회의 박해로 1660년 비밀집회 금지령 위반죄로 체포되어, 베드퍼드 감옥에서 12년간의 감방 생활을 하게됩니다. 감옥에 가두었는데 매일같이 소리를 지르며 감옥에서 설교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감옥바로 앞에 담장을 높이 막았습니다. 그러나 존 번연은 누군가는 듣겠지 하고 벽을 향해 더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간수장이 회개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갇혀있는 것이 이해가 안되다고 하면서 감옥문을 열어 놓을 테니 가고 싶은 곳을 갔다 고라고 했습니다. 그는 길을 가다가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다시 돌아가라’ 그리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때에 감찰사가 순시를 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여기 유명한 설교가가 있다는데 그 사람이 있냐”고 했습니다. 그럼 그곳으로 안내해 달라고 했습니다. 간수장은 간이 콩알만해 져 가지고 갑니다. 가기는 가는데 큰일입니다. 그런데 왠일입니까? 존 번연이 있는 겁니다. 정작 놀란 것은 간수장이었습니다. 감찰사가 돌아가고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분명히 아까 감옥을 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성령님이 돌아가라고 해서 돌아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간수장은 목사님 언제든지 문을 열어 놓을 테니까 자유롭게 나가시고 성령님이 돌아가라고 하실 때 오시면 됩니다.“하고 감옥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하늘에서 이런 존 번연을 위해서 잔치가 열립니다. 순교자들을 위해서 잔치가 열립니다. 선교사님을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잔치가 열립니다. 그러나 먼저 어린양이신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서 잔치가 열립니다.

본문 비유는 그 의미하는 바가 사실상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왕은 하나님으로,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처음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고 실제로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11-12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자기 땅에 오매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지난주의 ‘잃은 비유’와 마찬가지로 이 비유는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d[서 큰아들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는 남편으로 성도는 신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사 54:5), 구약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이후에 요한계시록에도 나오며 절정을 이룹니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계 19:7-9)

잔치에 청함
왕은 천국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왕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오라고 청했습니다. 이 잔치는 “자기 아들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입니다.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왕은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3)고 했습니다. 혼인잔치(가무스:gavmou”)는 복수로 나옵니다. 이것은 혼인잔치가 여러 날 계속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결혼 축제는 보통 7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이 잔치에 종들을 보내어 미리 손님을 청해 둡니다. 그러나 당일에 나가서 또 손님을 청하는 관습도 있었습니다(에 5:8, 6:14). 더군다나 지금 혼인 잔치치는 왕자의 혼인잔치로 비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아주 엄밀하고 신중하게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왕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오기를 싫어하거늘” 싫어하다(oujk h[qelon:우크 에델론)은 미완료형으로 왕의 초대를 끝끝내 원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왕이 초대했는데 가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재차 청함
4절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다른 종들”은 그 동안 보냈던 종들과 다름을 말해줍니다. 구약에서 보냈던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종들”은 신약시대 예수님 앞에 왔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외친 “세례 요한”(마 4:17)과 더불어 70인 전도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눅 10:9, 11)고 외친 자들을 말합니다. 이미 이 때는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안 오는 겁니다. 왕이 초대한 자리에 오지 않는 것은 반역을 말합니다. 왕은 계속되는 잔치에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라고 말해줍니다. 잔치의 준비가 무르익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지금 들어오면 먹을 것이 풍성합니다. 다 준비되어 있다는 겁니다. 천국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입니다.

잔치에 불응한 이유
오늘 이 말씀을 읽다가 보면은 우리는 한가지 의문을 갖게됩니다. 왜 처음에 초대받았던 자들은 잔치에 참석하지를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그들이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5절 말씀처럼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하나는 밭으로 하나는 상업차로 가고” 더욱이 6 절에는 초대를 외치던 종들을 잡아 죽였다니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왜 그렇게 계산적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왜 거절했는지 저 나름대로 생각해보건 데 잔치에서 얻을 것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잔치에 가는 것보다는 밭으로 가는 것이 상업을 하러 가는 것이 더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배에 나오지 않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왜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까? 예배에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은 철저하게 계산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에서 별로 얻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나치리 만큼 계산적으로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 참석 안 해도 손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일로 보내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계산적으로 사는 이들이 수고를 해서 얻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누구나 잔치에 오세요.
이제 주인은 문을 활짝 열어놓습니다. 잔치 집의 음식은 누군가는 먹어야 합니다. 초청한 사람들이 오지 않았으니 이제 문을 열고 누구나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종들을 9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고 합니다. 여기에 두 사람의 종류가 나타납니다. “만나는 대로”와 “악한 자나 선한 자나”입니다. 한마디로 닥치는 대로입니다.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들은 초청에 응했다는 사실입니다. 왕이신 주인의 초청에 응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원래부터 모든 사람이 다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셨습니다(딤전 2:4). 천국잔치에 응하기만 하면 선한 자나 악한자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인종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롬 1:16). 문제는 우리 죄의 심각성이 아니라 초청을 받고 나오지 않는 문제입니다. 자신의 죄 보다 죄 사함의 초청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예복을 입으세요.
거리에서 데려온 사람들 때문에 혼인잔치가 흥이 돋우어졌습니다. 손님은 가득 찼는데 한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복을 입고있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11절). 왕자의 혼인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간다는 것은 초청을 거부한 사람보다는 나을지 몰라도 왕을 모독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대통령 만나서 악수하고 몇 일 동안 손을 씻지 않았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왕을 만나고 그것도 혼인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는 것은 왕을 무시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충성해야 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됩니다. 대충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애인을 만날 때는 준비합니다. 옷을 이것저것 바꿔 입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올 때는 대충 옵니다. 이렇게 되면 안됩니다. 좋은 옷 두셨다 다 무엇하시려고요. 예쁜 옷 입고 오세요.
진짜 예복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양의 피로서 깨끗하게 된 성도를 말합니다(계 19:8). 이것이 우리의 예복입니다.

지난주에는 네팔에 다녀왔습니다. 어는 길에 한 여자 선교사님이 함께 왔습니다. 전주병원에 진단 받으시러 간다고 했습니다. 무슨 진단이냐고 했더니 암을 수술했는데 방사선 치료받으러 가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네팔에서는 내전이 일어나기 직전입니다. 공산당이 중요한 관공서를 다 점령하고 있습니다. 정당과 계속 협상하고 있는데 그 만료 기간이 다 되어간답니다. 그리고 제 협상은 실패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공산당이 시내로 들어왔습니다. 선교사님이 운영하고 있는 학교에도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숙식을 하겠다고 합니다. 선교사님은 그것만은 안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떤 일이 앞으로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암 수술을 받고 죽도록 충성하는 여 선교사님의 모습이 마음에 선합니다. 에베레스트 산을 보았습니다. 옆서에 보니까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에레베스트 산에 오를 수는 없지만 마음에 간직할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경험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초청에 응할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시며 예복 입은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