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완성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6. 율법의 완성) / 본문 : 마 5:17-20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성도가 많은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작은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나름대로 다 어려움이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작은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말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그 같은 일이 지난주에 일어났습니다. 바로 사모만 앞에 두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저는 수 천명 있는데서 설교 잘하는 목사가 존경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모만 두고 설교하는 분이 더 존경스럽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개척해서 8개월 동안 사모만 앉혀놓고 설교했답니다. 이런 분이 대단한 것입니다.
다른 목사님이 고백한 것입니다. “목사역할이 쉬우냐?, 아버지역할이 쉬우냐?” 이 목사님은 주저하지 않고 아버지역할이 더 힘들다고 고백했습니다. 목사는 성도 앞에서 적당히 덥고 지나칠 수 있지만 가족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만 설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주여! 주여! 외쳐도 진실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내 가족이 알고 하나님이 아십니다.
목회자 신문에 보니까 안타까운 사모님 고백이 실렸습니다. 목사님이 여 집사님이 교회 건축해 주겠다고 해서 집을 나가셨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연락이 없답니다. 저에게 교회 건축해 주겠다고 하지 마세요. 특히 여 집사님들! 그래서 사모님은 성도에게 무어라 말할 수도 없고 해서 당신이 목사가 되셔서 목회를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 교회에서는 “돌아와 돌아와 집을 나간이여 ~~” 찬양을 부른답니다.

성도냐! 목사냐!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여행사에서 남쪽의 교인들을 모아 백두산에 관광객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장로님들을 구분해서 모시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평신도”라는 깃발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백두산의 한 고려인 안내원은 남한에 “강원도, 경기도 … 그리고 평신도”가 있는 줄 알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이든지 하나님 앞에 진실이 없으면 안됩니다.
구약에 역사에 보면 모세, 여호수아 이후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선지자, 사사를 보내십니다. 그러나 모든 선지자, 사사가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6대 사사로는 옷니엘(삿3:7-11), 에훗(3:12-30), 드보라(4-5장), 기드온(6:1-8:32), 입다(10:6-12:7), 삼손(13-16장)이 있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사사인 삼손은 나실인으로 사사기 13장에 출생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님 외에 출생에 대해서 이렇게 길게 기록된 사람 사무엘, 세례요한 정도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의 관심 속에 출생을 했습니까? 그러나 그는 딤나에 가서 여자에게 빠지고 맙니다. 그 이후로 이렇다할 기록이 사사로 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정말 큰 실망입니다.
사사시대는 결국 실패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도 주변 나라와 같이 왕이 필요하다고 하나님께 떼를 씁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무슨 제도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한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제도야 언제든지 고칠 수 있지만 법이 없이 망하는 나라는 없는 법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무슨 제도가 없어서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요구를 하나님은 들어주셔서 왕을 세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은 사무엘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범죄 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사무엘상 15장 11절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는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후에 다윗의 왕위를 계승받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다윗 왕 같은 왕은 없습니다. 모든 전쟁에서이기며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잘 순종하던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나라가 평안해져 갈 무렵 사무엘상 11장에 보면 자신의 군사들은 암몬과 전투 중에 있는데 자신은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고 있던 밧세바를 봅니다. 그리고 간통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에 그의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 내 보내서 고의로 죽게 만듭니다. 이것은 살인죄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려고 한 배신적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크게 실망하시고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꾸짖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잘 따르고 순종했지만 그의 범죄를 통해서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며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겨놓았습니다.

우리 내면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본문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이것은 오직 예수 외에는 율법의 완성이 일어나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오직 예수님만이 이 죄의 고리를 끊을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만은 안됩니다. 이것은 율법이 불완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율법을 지켜낼 만한 인간의 힘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몸은 있지만 갑상선 호르몬이 우리에게 분비되지 않으면 사람이 힘을 쓸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성령이 끊임없이 공급되지 않으면 우리는 힘을 잃게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지켜졌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인데 이것이 지켜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의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plhrovw:플레로오)는 “가득 채우다”라는 뜻입니다. 율법에는 무엇인가 비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이 요한복음 2장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요 2:7)라고 했습니다. 채워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무엇을 채웁니까?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창조주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때(시 42:1),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막 12:30)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 영을 채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내주시는 성령을 채워야 합니다. 성령을 채워야할 우리 마음에 세상의 욕심과 탐욕으로 채워져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껍데기뿐인 율법은 힘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허울만 남겨놓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겉치레뿐입니다. 무디는 “불꺼진 등대는 위험만 가져다 줄 뿐이다”고 했습니다.

본문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나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을 우습게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제일 엄격한 종교 집단입니다. 요즘은 큰 교회들도 수요예배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녁에 모이기가 어려워서 수요일은 낮에 모이는 교회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주일 낮에 천여 명이 모이는 교회도 몇 십 명 안 모인답니다. 바리새인들은 우리의 열정과는 달랐습니다. 바리세인들은 한마디로 삶 전체의 시간이 신앙생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열심인 사람들입니다.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하루 세 번 이상 기도했습니다. 안식일은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 금식합니까? 솔직히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합니까? 오늘날 주일을 바리새인이 안식일 지키듯이 지킵니까? 어쩌면 우리는 그냥 공짜로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 같지 않습니까? 서기관들은 어떻습니까?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늘 연구합니다. 지식에 있어서는 탁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서기관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행함에서나 지식에서 우리는 결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따라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들의 신앙이 비록 형식에 있었다고는 하나 우리는 이러한 형식이라도 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다 버리고 이들보다 우리의 신앙이 낫다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비판하신 것은 선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만족할 만큼 선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즉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따라합시다. 통째로 드리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바울이 말한 이 방법 위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머리 써서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가 무슨 말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다 가져 가십시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드리기는커녕 하나님의 것을 어떻게 가져올 까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필요하셔서 가져가시는 것에 대해서 불평만을 늘어놓지는 않습니까?

본문 19절에서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라고 되어 있어서 마치 우리의 행위로만 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2주전의 설교제목이 “존재는 행위보다 선행한다”였습니다. 그래서 마치 행위가 필요 없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잘 보십시오.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행위 자체가 완성이 아닙니다. 우리 행위는 주님께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행위로만 절대 인간은 온전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 길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온전히 주님께 맡길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절대 우리의 행위로 채울 수 없는 부족함을 채우게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완성이지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오스카 와일드가 쓴 “그 날 이후”라는 글에는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은혜를 베푼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 지상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시는 재미있는 글이 있습니다. 지상에 내려오신 예수님은 한 술 주정꾼을 만났습니다. 거의 폐인이 되어 손발이 심히 떨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형제여,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소?”라고 물었습니다. 술 주정꾼은 예수님을 가만히 보더니 “나를 고쳐 주신 분이군요. 내가 절름발이였을 때 당신이 건강한 다리로 고쳐 주셨지요. 절름발이일 때는 구걸하며 살아도 부끄럽지 않고 그런 대로 살아갔는데, 발로 뛰면서부터는 얻어먹을 수도 없고 마음에 맞는 직장은 없어서 방황하다가 이처럼 되었습니다.” 하고 깊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예수님은 깊은 상념 속에서 이번에는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한 불량자가 선창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고 있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대낮에 이게 무슨 짓이오?”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전에 앞을 못 보던 소경이었을 때 당신은 진흙을 발라 나의 눈을 뜨게 하여 주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기뻤고 온 세상이 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눈을 뜨고서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결국 화풀이를 하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하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저나 여러분 모두는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나는 그 은혜의 보답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은혜를 화로 갚지는 않았습니까?
세익스피어는 “은혜를 모르는 자식을 두기란 독사에게 물리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라고 말했습니다.

오직 이 은혜를 갚는 길은 오직 한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하며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삶이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사람이 유럽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서 하는 말이 런던의 호텔 방 창문이 열리지 않았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는 런던, 파리, 로마 등에 감동하지 못했습니다. 굳게 닫힌 창문 하나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단점과 싫은 점에 몰두해서 삶의 빛과 즐거움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굳게 닫힌 창문에 집착하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주님의 은혜를 전할 수 없습니다. 단점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용서와 사랑이 날아가 버립니다.
늘 말씀드립니다만 신앙생활은 나 자신에 대해선 엄격하되 다른 사람에 대해선 용서와 너그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이요 십자가를 지는 사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