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7.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 / 본문 : 막 5:24-34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오래 전에 나온 이야기 가운데 다시 뜨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줌마와 조폭’의 공통점입니다. 첫째로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는 것입니다. 조폭은 무리를 지어 활동합니다. 아줌마는 아줌마 부대를 형성합니다. 둘째는 형님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조폭은 윗사람을 철저하게 형님으로 대우하고 족보도 있습니다. 아줌마는 만나서 5분만 이야기하면 형님 아우가 생깁니다. 셋째는 문신을 합니다. 조폭은 온 몸에 문신을 하고 아줌마들은 눈썹에 영구 문신을 합니다. 네 째는 제 식구들을 끔찍이 챙깁니다. 조폭들은 자기파를 위해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아줌마들은 자기 가족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다섯째 무대뽀입니다. 조폭들은 세상의 법도 겁나지 않습니다. 아줌마들은 아무도 못 말립니다. 여섯째 밤만 되면 무서워집니다. 조폭들은 밤이 되면 제 세상입니다. 아줌마들도 밤이 되면 집에서 자기세상입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칼을 잘 쓴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랍 사람과 결혼한 한국 여자들에 대해서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슬람인이 되든지 아니면 아랍에 가서 멸시 당하면서 사는 줄 알았습니다. 미국여자들도 그렇게 살잖아요. 근래에 터키 선교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 아줌마들은 선교사에게 복음을 전달받고 남편을 끌고 교회에 나온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도 아줌마입니다.

1.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사실 여러모로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분 느껴보셨나요? 예뿐 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를 향해서 오고 있습니다. 나는 그 꽃을 받을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잘 모르지만 “나에게 꽃을 주다니…” 그런데 그 사람은 나를 스치고 지나가 다른 사람에게 꽃을 주는 것입니다. 그 때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초라한 마음이 됩니다.
이 여인은 남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만한 인물이 못됩니다. 본문의 모습도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 틈바구니에 끼어 있습니다. 본문 앞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이 자기 딸이 죽어간다고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시는 중입니다. 이 얼마나 비중 있는 이야기입니까? 회당장에 비해서 이 여인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회당장은 알려진 사람입니다. 아마 하나님을 잘 믿는 바리세인이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정말 대단한 이야기, 죽은자가 살아난 이야기 중간에 끼어있습니다. 저도 이런 비슷한 기분을 많이 느껴보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어떤 모임에 참여하게 되는데 큰 교회 목사님들의 틈바구니에서 초라하게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모 언론사에 갔을 때는 자동차가 좋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은 다 안내하는데 나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더라구요. 찬양을 잘합니까? 운동을 잘 합니까? 제가 기를 피려면 컴퓨터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 역시 본문처럼 끼어있는 인생입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는 도중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본문이 갑자기 끼어 들게 된 것입니다. 마치 본문처럼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야기, 회당장이라는 영향력 있는 집안의 이야기 중간에 끼어 있어 주위를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주위 사람을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끝없는 고통 속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무기력하게만 보이는 이 여인의 이야기가 나 자신의 이야기와 너무나 닮지 않았습니까? 마음 문을 여시고 이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은 한마디로 참으로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군중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였습니다. 그렇게 군중들로부터 밀려나서 저 쪽 한구석에서 예수님이 가시는 쪽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게되는 이 여인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는 이 여인은 중병에 걸려있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겪고 있는 고통은 세 가지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첫째로 이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내면서 살아왔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여자가 피를 흘린다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자신의 병적인 고통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따돌림까지 당하면서 살아야했습니다.
둘째로 본문 26절에 보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병을 고치려고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고생만 더했습니다.
셋째로 이런 고생 끝에 찾아온 것은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의료 보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산은 다 탕진했는데 피는 여전히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는 따돌림을 당하고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질병은 몸에 짊어지고, 가산은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이제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여인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딱 한번 결사적인 시도를 해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꺼져 가는 희망을 붙들고 이제 마지막 시도를 해 보아야겠다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녀를 행동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그녀로서는 이것이 마지막 선택이라고 믿었습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다 신경 쓸 만큼 그녀가 처한 입장은 한가롭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간절히 손을 뻗었습니다. 힘을 다해 뻗은 그녀의 마지막 인생의 몸부림은 그녀의 손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닫자 예수님의 능력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예수님의 옷에 손이라도 대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가난함이나 좌절과 부끄러움을 뛰어넘어서 예수님과의 일대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갈망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혈루병이 있는 여인이 유대인의 건강한 남자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사회의 이런 통념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벽을 깨어 부스고 일어난 접촉입니다. 그저 지나가다 스친 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두터운 벽을 깨고 그녀는 마지막 인생을 걸고 예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의 권능이 전달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을 만진 결과로 그토록 소망했던 일이 드디어 일어났습니다. 이 때의 일을 성경은 본문 29절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라고 기록합니다. “곧”(euthus)이라는 즉각적인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 즉시 피가 멈추었고 그 결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예수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죽어가던 육체가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나가는 것을 아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밀고 밀리며 예수님의 옷에 손을 데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능력이 나간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 예수님께 손을 댄 이 여인에게만 능력이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짤막하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누가 나를 만졌느냐?” 아마도 이 명령은 제자들에게 다음 같은 명령이 되기도 합니다. “그녀를 찾아 보아라.”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지시에 제자들은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처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군가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 것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병자와 권세자 사이에서 일어난 이 접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대꾸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밀었을 수 있게죠. 이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이 만진 것을 신경을 쓰시다니 그냥 가시죠.” 오히려 예수님이 과민 반응을 보이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나간 것을 예수님과 이 여인만 알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과 이 여인만이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영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감동된 드라마에서 제자들은 아무 일도 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들은 예수님을 육체적으로만 보호하고 있는 것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 여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때 33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이 여인이 스스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마치 가져가서는 안될 어떤 물건을 훔쳐간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다 말씀드렸습니다. 이 일로 “주님의 처분만 바랄 뿐입니다.”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더러운 몸으로 신성한 예수님의 몸을 만졌다고 생각하니 두려웠습니다. 마치 구약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만졌을 때 사람들이 죽었던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두려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죽어야 될 만큼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한테 그동안 얼마나 거칠게 대우를 받았고 한마디로 왕따를 당했습니까? 이제 병은 나았지만 이것은 사전에 허락된 일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으로 일방적으로 나아간 행동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주께서 어떤 처벌을 내리셔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제 주님의 처분만을 바라고 있는 이 여인에게 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이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이 예수님이 이 여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여인이 하나님의 나라에 식구가 된 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의 언제나 그리하셨던 것처럼 예수님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이 같은 무지의 때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 명령하셨으니”(행 17:30) 하나님은 우리의 많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잠시 그것은 생각지 않으신 채 오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언제나 주님은 하나님은 그 자리에 여전히 계실 뿐입니다. 손을 뻗어야 하는 것은 나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으로 “평안히 가라”고 축복하고 헤어지십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는 분명히 이 여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십자가 아래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또 한 사람이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파트너를 얻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본문은 끝나고 마가는 원래의 이야기로 뒤돌아 갑니다. 좀더 크고 멋진 이야기로 뒤돌아갑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야기가 더 크고 멋있는 이야기로 뒤돌아 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동일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회당장의 딸이나 이름 없는 이 여인에게도 하나님의 능력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새 식구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식구들은 이렇게 모인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세상이 더 이상 소망과 희망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세상의 벼랑 끝에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여인에게 있었던 혈루병은 예수님을 만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우리 중에는 육체의 이런 병을 안고 살아가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또 그렇지 않다 해도 결국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절망가운데도 소망이 있습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는 이 세상이지만 주님은 나를 향해 걸어오십니다. 손을 내밀기를 바라십니다. 손을 내밀어 주님을 잡으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 전 중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이 보내온 소식입니다.
이분은 북한 가까운 지역에서 한인교회를 하는데 북한 사람 하나가 교회 앞마당에 쓰러져 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런 일이 많은지라 그냥 알아서 하지! 하고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런데 전화소리에 교회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며 그렇지 않아도 북한에서 온 사람 때문에 교회가 골치가 아프다고 시끄럽게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 교회를 갔습니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뼈만 앙상하게 남았는데 이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교회가면 살 수 있다고 해서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앞 마당에서 몇 칠을 있었고 찬송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집으로 이 사람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조금 회복되어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청진시 수남지역에서 온 이광일(36세)입니다. 북한에서 굶어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어차피 죽는 것이기에 원망이나 후회는 없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을 통해서 이런 환대를 받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계시는가 봐요!” 하면서 쉬엄쉬엄 하던 말을 마쳤습니다. 선교사님은 이 사람을 살리려고 노력했으나 보름이 지나 죽었습니다. 죽어가면서 마지막 그가 남긴 말은 그가 마지막으로 북한에 있는 제 가족들이 저를 찾을지 모르니 하나님 믿고 간다고 전해달라고 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내 가족들에게 예수를 전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한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선교사님은 그의 손을 꼭 쥐어 주면서 어떻게 하든지 광일 형제의 가족을 찾아 예수 믿게 하겠노라고 약속 한 후 주께 광일이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를 간절히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