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복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9. 십자가 복음) / 본문 : 막 8:30-38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속담에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양의 속담에는 “전쟁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란 급하면 신을 찾게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서양에 ‘바루네’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이 세상에는 신이란 것이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여 무신론자로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다가 바다 한복판에서 큰 풍파를 만나 배가 파선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방을 바라보니 시퍼런 성난 바다만 있을 뿐, 끝이 안 보이는 지라 이제는 별 수 없이 죽는구나 하고 한숨을 내쉬며 “하나님, 나를 살려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었습니다. 다행히 바람이 잔잔해지고 목적지에 도달했는데, 사람들은 그 다음부터 “바루네씨의 무신론은 육지에서는 훌륭하나 바다에 가면 소용없다”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본문이 시작하는 31절에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본문의 중반에는 34절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하반부에는 37절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도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십자가가 고난이지만 내게 십자가가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가 기쁨인 것입니다.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기 어려운 말씀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밝힌 고난에 대해서 처음 공개되는 ‘첫 번째 고난예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메시야임을 좀처럼 밝히지 않으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이 늘 흠을 잡으려고 하는 상태에서 쓸데없는 공격과 오해로부터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는 당시 유대인들이나 심지어는 제자들까지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 관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고난받는 메시야 상은 제쳐놓고 오직 영광의 메시야상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는 고난, 죽음, 버림받음의 수모를 감수해야 하는데 제자들까지 이런 메시야 관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B.C. 586년에 함락된 이후로 예수님 당시까지 이스라엘은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 등으로 이어지는 열강들의 억압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렇듯 암담한 민족적 상황 속에서 생겨난 메시야 사상은 이방 세력을 몰아내고 이 땅에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이런 정치적 메시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32절 “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parrhsiva/:파르레시아)”는 ‘숨김없이, 명백하게’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는 전혀 말씀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에 말하는 것처럼 “파르레시아”(숨김없이) 말하지 않았을 분입니다. 그동안 비유로 여러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마 9:15, 눅 5:35), “나는 받을 세례가 없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3)와 아들마저 죽임을 당했다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12:8, 마 21:39, 눅 20:15)등이 모두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셔야 된다는 암시적 표현이었습니다.

31절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이 말을 하시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참 오래 참으셨던 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무겁게 입을 여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살아 가야할 날이 많은 자식에게 부모가 병들어 죽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일부러 찾아가 죽어야 되겠다고 말한다면 자녀의 입장에서 얼마나 충격이겠습니다.
30절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셨는데(복음서에만 81회 나옴 2:10, 2:28 제외하고 모두 예수를 가리킴) 오늘 본문이야말로 “인자”라는 말이 더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마가복음에는 14회에 걸쳐 인자가 나옵니다. 인자는 문자대로 “사람의 아들”을 말하고(시 8:4, 80:17), 에스겔에서 91번이나 언급된 예언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자’가 갖는 제일 큰 특징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고난 받아야 될 메시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인자’는 우리의 가슴을 더 저리게 합니다.
31절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예수께 고난을 주는 대상이 나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이끌던 주요 계층입니다. 이들은 유대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의 3대 구성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직접 육신적 상처를 입힌 로마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죽이지 않았다고 하는 책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증거로 잘못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신체적 죽임을 당하게 한 로마인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당시 복음을 받아들였어야하는 이스라엘의 지도층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버렸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믿었던 도끼에 발을 찍힌 격입니다. 메시야를 제일 기쁘게 영접해야할 대상이 예수를 버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에 왜 이 부분을 강조하십니까? 단순히 당신을 죽인 대상을 언급하여 훗날 우리로 하여금 그 원한을 풀기 위해서 말씀해 놓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으면서도 주님을 버리시면 안됩니다. 당신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입니다. 오히려 믿었던 사람들이 메시야를 버렸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더 있지만 제일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고난”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가 영광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34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고난만을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고난입니다. 이것을 버리면 구원은 없습니다. 이것을 버리려고 하는 현대인들이 많습니다. 교회에 왜 다니느냐 바로 고난을 받지 않고 축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십자가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시 유대인이 예수의 고난 때문에 예수를 버렸다면 우리 또한 우리 십자가 때문에, 고난 때문에 예수를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떤 방해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고난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단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이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주위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을 한번쯤은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형벌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유죄판결을 받은 죄인이 있다면 사형수는 자신이 질 십자가를 직접 지고 형장까지 걸어가야만 했습니다. 이 길을 가면서 사람들에게 조롱과 원망과 침 뱉음과 모든 사람들의 한을 풀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를 지고 “좇을 것이니라(ajparnhsavsqw:아콜루데이토)” 현재 명령법으로 나옵니다. 이 말은 현재 당장 지라는 것뿐만이 아니라 지속성이 강조되는 말입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언제나 지고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벗어놓는 것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가 기쁨입니다.

유명한 조각가 로댕은 “시련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박물관을 보지 말라. 박물관의 모든 진열된 그 아름다운 예술품은 고난과 역경을 당하지 아니하고는 그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다.”고 했다.
대부분의 교우들은 어려움을 당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돈이 많고 명예가 있을 때는 감사할 줄 모르다가 그것을 다 잃어버리고 나서 집 한 칸도 없이 털리고 나니, “감사합니다”하는 것입니다.

수요예배, 새벽예배를 통해서 사무엘 상, 하까지 보았습니다. 여기에 무슨 이야기가 나옵니까? 사무엘 상, 하 이지만 사실상 다윗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을 통해서 알게된 것은 그가 사울의 칼을 피해 도망 다닐 때는 하나님께 원망하는 기도도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죽인 이후에는 하나님께 아무런 기도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일로 자기 아들 셋이 모두 죽습니다. 그럴 때 다윗은 하나님께 뭐라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죄 값을 받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원망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분이라면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그리고 주님을 보세요.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기에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고난 자체가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고통은 소망이 없는 고통입니다. 의미가 없는 고통입니다. 마치 다윗이 하나님께 범죄 한 후에 받는 고통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고난은 다릅니다. 그 고난은 우리를 단련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버나드쇼에게 누군가 묻기를 “이 세상의 모든 책들이 다 타버리고 한 가지 책만 남는다면 그것은 어떤 책이겠느냐?”고 했을 때 그는 “구약성서의 욥기”라고 대답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랑할만한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는 재산을 잃고 열 명의 자식들도 잃게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욥이 하나님을 원망할 만도 한데 욥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말한 욥은 엄청난 고통을 받았지만 나중에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고난 중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7절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다르게 표현하면 “목숨과 맞바꿀만한 것인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보아라?”가 됩니다. 이 말씀에 대한 정답은 35절의 “… 나와 복음을 위하여”입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라면 목숨과 바꿀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겠다고 속 시원하게 말한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바로 로마서 1장 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자기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고후 4:5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몬 1: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이라고 나옵니다. 이 때로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목숨과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바꾸는 사람들의 행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에(2006.6) 독일복음주의동맹 산하의 종교자유위원회의 토마스 슈마허 교수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공권력에 의해, 혹은 종교적 감정을 품은 다른 종교인들로 인해 살해당하는 사람들의 수가 해마다 5만 5천 명에 달하며 그 수가 가까운 장래 안에 줄어들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데이비드 바렛은 이보다 배에 가까운 순교자가 있다는 통계를 내 놓았습니다.
2000년 당시 순교자 수는 16만 명이었는데 이때부터 최근까지 3년 간 연평균 순교자의 숫자는 1.24%씩 매년 증가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증가추세라면 2025년에 가서는 한해 21만 명까지 순교자가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기독교가 왕성하게 자라나는 곳은 편안한 유럽이 아닙니다. 핍박하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복음이 살아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말 할 수 없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거듭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