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98. 보라!) / 본문 : 마 12: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본문 말씀은 이사야 42:1절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의 인용구입니다. 이사야는 B.C. 700년경에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이 말씀이 이사야를 통해 예언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사야의 말씀이 있은 지 700년이 지나서 다시 기록된 말씀입니다. 본문과 비슷한 말씀이 이사야 45:22에도 나옵니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무엇을 보고 사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님의 말다툼과 폭력을 보고자란 아이는 성장하여 성격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보는 대로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보는데는 사실상 많은 수고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보면 됩니다. 누구라도 볼 수 있습니다. 많이 배웠기 때문에만, 대학교에 가야지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를 보라!’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아서는 결코 얻을 것이 없습니다. 때로는 교만한 자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자신을 돌아볼 것을 권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나 자신을 보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단의 음성은 ‘너 자신을 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 꼬락서니를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자살을 합니까? 무능력한 자신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능력이 많으신,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이분에게만 생명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내가 참 목자가 된다는 것은 여러분이 주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가짜 목사가 되는 것은 여러분이 주를 바라보지 않고 다른 곳, 돈을 보고, 사람을 보고, 건물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 고운 옷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수는 계수할 수 없거늘”(렘2:32)
처녀에게 있어서는 첫 사랑의 증표인 패물이(반지)가 중요하겠지요. 신부는 그 날 입었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잊지 못하겠지요. 그러나 진짜 잊어버리지 말야할 하나님은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에베소 교회가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선행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인내하였으며,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선한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그 와중에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계 2:1-4).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딤후 2:8) 우리가 열심히 일하기를 원한다면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바울로부터 이어지는 유명한 설교가들은 오직 예수만을 높였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중심이었습니다. 스펄전과 로이드 존스 목사님 같은 분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만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단순한 구석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에 대해서만 설교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 말씀의 중심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없는 설교, 예수 없는 봉사, 예수 없는 전도는 모두 무의미한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철저한 예수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성령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며, 땅 속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며, 보내시기에 너무 먼 저 높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와 함께 역사 해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말할 때 잘 알고 있는 성경구절이 히브리서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여기까지만 읽으면 안됩니다. 계속 읽어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성을 바랐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가는 길은 알지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보고 갔다는 사실입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한 것이 있습니다. 시편 30:7-10 “7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성령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사실은 한 분도 보이지 않습니다. 구약에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불 가운데서 제물을 드릴 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으며, 모세가 40일을 금식하고 시내산의 떨기나무 가운데서 보이셨으며, 음성으로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는 사람을 구원하는데 한계점이 있음을 아시고 2000년 전에 직접 이 땅에 내려오시기로 작정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초림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으고 함께 동거동락합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을 본 적이 없으며, 성령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을 볼 수 있을까요?

성경을 통해서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설교를 하고, 설교를 듣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은 바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령은 반드시 말씀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떠나 있는 성령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하나님을 보라고 주신 선물인줄을 믿습니다.

우리가 만나주실 만한 사람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목적은 사실 단순히 보고 말아버릴 것 같으면 볼 필요도 없겠지요. 우리는 짝사랑하기 위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님을 바라보는 목적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마 7:7-8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기름을 동시에 준비하고 주님을 찾고 기다려야 합니다.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주님이 오시면 만날 수 없습니다. 바로 예배는 주님을 만나기 위한 우리의 준비요, 제사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육신의 사람과 영의 사람에 대해서 잘 나와 있습니다.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길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비밀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하는 본문의 말씀을 다시 봅시다.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나의 택한”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내가 붙드는 나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님은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셨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못된 사람들은 택하기만 하고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이 택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져 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이라는 말은 헬라어 명사 ‘파이스’입니다. 이 말은 구약에서는 아이에 대한 애칭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신분상의 종으로 서용 되던 말은 ‘둘로스’입니다. 그러므로 ‘둘로스’의 종으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오신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미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렸던 음성이 있습니다. 마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내 성령을 줄 터이니” 이미 예수님께는 하나님아버지의 전권 적인 위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하나님의 영)과 함께 활동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바로 이 성령이 예수님을 붙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바로 성령을 주신다는 의미는 곧 하나님 자신이 활동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심판’이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만 약 90번나옵니다. 우리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잘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야고보는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 5:9) 바로 나가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의 아줌마들이 욘사마를 보기 위해서 구름 떼처럼 모여들은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지금 일본에서 집회한다고 하면 얼마나 모여들겠습니까? 조용기 목사님이 집회할 때마다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런데 한번은 일본에서 집회를 했는데 200여명이 모였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고백하기를 자신이 집회한 모든 장소 중에 제일 적게 모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욘사마는 몇 만 명씩 그것도 별로 알리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알고 모여듭니다.

저는 얼마 전에 잘 성장한 어느 교회의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우리 교회는 절반 정도의 성도가 초신자이기 때문에 정말 순수합니다. 그러시는 겁니다. 저는 이 말에 한국교회가 참 문제가 많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오래 믿은 우리는 모두 순수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를 먼저 믿었을수록 순수해 져야지요. 깨끗해져야지요. 어떻게 이제 세상에 금방 들어온 초신자가 더 순수합니까? 교회가 얼마나 타락을 했으면 이런 말이 나오나 싶었습니다.

주님의 애타는 음성을 이사야는 이렇게 들려줍니다.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2)
욥은 고통 중에 하나님 만나기를 소원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욥 23:3) 여러분! 하나님 만날 수 있다면 모든 것은 끝난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에게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장막(성소)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곳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나타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할 때, 예배할 때 그곳에 나타나시기를 더 좋아하십니다. 우리 주앙교회가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시고,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