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눅10:21)

월남 이상재 선생이 일제시대 때 YMCA에서 강연할 때의 일입니다. 일본 순사들이 감시하려고 여기저기 끼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일본 순사를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두 가지로 불렀습니다. 그들 앞에서는 “나리” 그랬습니다. 그러나 우리끼리는 “개(犬)”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이상재 선생이 “개나리가 활짝 피었네.”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장내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일본 순사는 이 뜻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끼리는 알았던 것입니다. 천국백성끼리는 압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여 주시는지. 어떻게 나타내시는지. 그러나 천국 백성이 아니면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 일부 지도자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배워서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들만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알려주셔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비밀이라고도 합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그렇게 똑똑한 것 같은데요 하나님을 모릅니다. 믿지 않습니다. 일본을 보세요. 세계제일의 나라중의 하나지 않습니까? 과학이 발전한 나라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잘 모릅니다. 우상에게 가서 절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에 행한 자신들의 행위를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그 부끄러운 역사를 후손에게 전해주려고 합니다. 정신을 못 차리고 반성할 줄 모릅니다.

신약성경에 ‘감사하다’는 단어는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어떻게 보면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별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카이로’(기뻐하다), ‘카라’(기쁨), ‘카리스마’(은혜), ‘유카리스테오’(호의, 감사) 등을 ‘감사’ 라는 뜻으로 번역하여 사용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단어는 이 단어들에도 없습니다. 같은 본문이 눅 10:21에도 나타나는데 역시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본문에 한번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ejxomologevw(엑소몰로게오)로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을 뜻합니다. ejk(에크) ‘-로 부터’와 oJmologevw(호몰로게오) ‘동의하다, 약속하다’의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약속이 이루어진 상태’를 말하는 동사로 사용되었습니다. 어디에서 온 약속입니까? 앞에서 예수님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뜻을 풀어서 이해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것을 이루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감사할 때

그래서 기쁨(감사)은 예수님과 함께 다가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세례의 목적이신 예수님이 나타나심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기다리시던 분이 오셨기 때문에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36-38절에 보면 안나 선지가 나옵니다. 시집가서 8년을 살고 과부가 되어서 84년을 살았습니다. 시집갈 때가 10살이라고 해도 102살입니다. 그래서 나이 매우 늙었다고 말합니다. 안나 선지자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눅 2:38)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고 했습니다. 안나 선지자 입장에서 100살이 넘어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감사란 바로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안나와 하나님이 때를 이루어주시는 때가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먼저 감사

요 11:장 보면 예수님이 나사로를 늦게 찾아가는 바람에 그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누나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이 늦게 도착하심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면서 예수님을 원망하면서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미 나사로는 죽어 무덤에 들어갔고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는 그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39)고 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 11:41)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43절에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 나와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미리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감사한 것입니다. 감사한 때에 따라 감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꼭 무엇을 받고 난 후에나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미 주시기 이전에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원문 성경에서는 아멘이라는 단어가 모두 앞에 나옵니다. 아멘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들어보고 아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아멘 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결국은 좋은 곳으로 인도해 주실 줄 믿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님이 어디를 가시든 부모님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볼노브(O.F. Bolluow)라는 독일의 세계적인 교육학자는 1991년 91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논문의 제목이 ‘감사에 대하여’(Ueber die Denken)라는 논문이었습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우리가 가르치는 교육의 최고의 목표가 있다면
첫째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을 만드는 일이요,
둘째는 자기를 낳은 부모에게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을 만드는 일이요,
셋째는 나와 관계된 모든 인간들에게 감사할 줄 아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성경에서 더욱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감사해야 이유를 골 2:6-7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고 했습니다.

오래 전에 월간지에 실렸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 생각납니다. 한강 남쪽에 성실한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배추 농사를 지으며 그런 대로 평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강 이남이 서울로 편입되고 정부에서 강남을 새로운 개발지로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신의 넓은 땅을 팔아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들어온 많은 돈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술집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 그곳에서 일하는 여자를 만나 딴 살림을 차렸습니다. 아내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자식들은 제멋대로 살면서 부모의 속을 썩였습니다. 가정은 점점 무너져 갔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했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는 지옥과 같은 생활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는 호화로운 자신의 집 지하실로 내려갑니다. 그곳에 자신이 배추 농사를 짓던 시절에 사용한 낡은 리어카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 리어카를 어루만지다가 이렇게 절규합니다. ‘배추 사려~, 배추 사려~.’ 깊은 밤에 눈물과 회한에 섞인 그의 절규가 지하실 안에 울려 퍼집니다. ‘배추 사려~.’
그렇습니다. 좋은 환경이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기쁨의 요소가 될 수 있지만 기쁨 그 자체는 아닙니다. 인간의 기쁨은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기쁨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잘못된 감사

눅 18:11-13에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바리새인의 감사는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은 범죄하였는데 자신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금식과 십일조 드림을 감사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듯 보입니다. 우리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선교지 여행 다니면서 못사는 나라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여기서 태어나지 않은 것에 감사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또한 목사로서 교회에 늘 있게됨을 감사했습니다. 이 감사에 자체에 큰 문제가 있기보다는 은연중에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을 죄인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못사는 나라에 태어난 것이 죄가 아닙니다. 못사는 집안에 태어난 것이 죄가 아닙니다. 못 배운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못 배운 것이 자랑이 될 수는 없겠지만 죄는 아닙니다. 진실된 감사는 자신의 의로움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엎드려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는 자, 가슴을 치는 자, 불쌍히 여기옵소서 라며 자신을 간절히 주님께 부탁하는 자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기뻐(감사)할 때

한 마리의 양을 찾았을 때,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눅 15:5), 하늘 나라에 이름이 기록되었을 때,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20)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일을 인하여,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눅 13:17) 기뻐해야 합니다. 이 모두가 이 세상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기쁨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 것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고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도 가을이 되어야 합니다. 가을이 깊어져 단풍이 다 떨어졌습니다. 아참 아름다웠던 꽃들은 사라졌습니다. 식물이 맨 마지막으로 무엇을 남기는지 아십니까? 씨앗입니다. 씨를 남기고 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씨를 남겨야 합니다.

영화 가운데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1999년에 세계적인 영화상 아카데미 7개 부문을 모두 휩쓴 유명한 영화입니다. 이 쉰들러라고 하는 사람은 나치당원입니다. 폴란드에서 이 사람이 그릇 공장을 했습니다. 나중에는 이곳에서 대포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유대인을 고용해 가지고 막 썼지만은 유대인들이 너무너무 비참하게 죽는걸 보고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우리는 마음 돌이키는 게 중요합니다.
그가 마음을 돌이켜 가지고 어떤 작전을 하느냐 하면 유명한 친위대 장교 괴트라고 하는 장교가 있는데 이 사람을 매수합니다. 그래서 이 공장 돌리려면 싼 임금 노동자를 써야 하니까 유대인들을 이리 좀 넣어 달라 이렇게 해 빼돌리고, 자기 공장이 체코에도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모두 체코로 빼냅니다. 자주 빼내 가지고 살립니다. 가면 바로 죽는데 군수공장 돌리는데 일시키면 그래도 살기 때문에 계속 유대인을 빼돌립니다. 나중에 2차 대전이 끝나고 그가 이렇게 살린 사람만 1,100명입니다. 겉으로는 나치당원이니까 큰 비즈니스를 하니까 가능합니다. 사는데 돈 버는데 맞추지를 않았습니다. 처음에 가다가 바꾸는 것입니다. 대포를 만들어도 이 대포를 유대인들이 만드니까 전부 불발탄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나치당원이니까 전쟁이 끝나고 이 사람도 수배되고 구속됩니다. 그러나 이 분들 1,100명이 전부 서명해 가지고 살려내고 얼마나 그 분을 좋아하는지 전부 금이빨을 유대인들이 빼 가지고 이 사람을 위해 이걸 팔찌를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뭔지 아십니까? 실제로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좀 더 유대인을 살릴 텐데, 600만이 죽어가는 유대인을 내가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야 할 텐데 그걸 못한 것이 너무 원망스럽다.’ 그러면서 엉엉 울었습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사람의 무덤은 지금 어디 있느냐 유대인들이 폴란드에 두지 않고 지금 감람산 위에 가져다 놓고 유대인들이 계속 꽃을 꽂고 참배를 하고 있습니다. 쉰들러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더 올라가면 나중에 떨어져 병신 됩니다. 이만하면 감사하다고 생각하며 내가 받은 은혜 이만하면 됐지 그러면서 쉰들러같이 사는 것입니다. 좋은 일 하는 것입니다. 그게 가을의 삶이기 때문에 풍성해집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cara(카라)’기쁨’은 “성도들의 믿음의 성장”(빌 1:25)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갈 5:22),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그리고 간절히 그들을 보기 원했습니다(롬 15:32). 기쁨은 하나님 안에(살전 3:9), 주님 안에(빌 3:1)있는 것입니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제자들은 아직 넉달은 지나야 추수할 수 있다고 했지만 주님은 밭이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요 4:35). 저와 여러분들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영적인 추수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