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살리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 8:36-37)

미국 자동차업계가 경영난으로 요즘 비상입니다. 의회는 자구책을 마련하라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의회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러 간 미국 자동차 업계 대표들이 보통 사람이 타는 비행기 값의 무려 30배 이상을 주고 전용기나 전세기를 타고 의회에 도착하여 미 의원들은 돈 빌리러 오는 사람의 태도가 이게 뭐냐고 질타했고 결국 돈도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구원을 간청하기 위하여 또 감사하기 위하여 나온 사람들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임재를 기다려야 합니다. “얼마나 목사가 설교 잘하나 보자” 라는 마음은 도움이 안됩니다. 간절히 주님을 사모할 때 주님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알리바바와 사십인의 도적’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뒷산에 큰 바위굴이 있고, 그 속에는 엄청난 보화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 굴에 들어가려면, 바위로 된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 문을 열자면 암호대로 해야만 합니다. 그 암호는 무엇인가하면? ‘열려라 들깨’ 비슷하지만 아닙니다. ‘열려라 콩깨’ 이것 역시 비슷하지만 아닙니다. ‘열려라 참깨’ 라고 해야만 열립니다. 어떤 재주꾼이 와도 열 수 없습니다. 어떤 군대가 와도 열 수 없습니다. 그 문을 열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절대 없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보화를 가져다 주는 암호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다른 어떤 방법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암호입니다.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고 하셨습니다.

생명은 선한 것입니다.

생명(!yYIj’h':하이임)은 단순히 목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이외의 모든 전제조건으로서 선한 것이며 더 나아가 최고의 선인 것입니다. 생명 자체가 선한 것입니다. 최고의 아름다운 것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은 것은 이요 그것이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함께 지낼 수 없습니다. 오직 살아 있는 것만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를 믿습니까?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살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살 수 없다면 믿음이 헛된 것입니다.
잠 3: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랬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믿고 잘 살아야 됩니다. 이 땅에서의 축복을 간단하게 말하면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장수이고 하나는 부귀입니다. 여러분 오래 살려고 하는 것, 부귀를 누리려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왜 부귀와 영화가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가고 그것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저녁때 아빠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빠 자체가 아니라 선물만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잊어버린 채 장수와 부귀만을 원하는 것이 문제이지 그 은혜아래서 장수와 부귀의 축복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장수는 특별한 은총이며(창 25:8), 계명을 지킨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신 5:16). 생명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창 2:7).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선한 것입니다.

생명은 붕괴되어 왔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생명은 짧아졌으며 동시에 괴로운 것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에는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 동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동산하면 살기 좋은 곳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생명나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이것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도록 화염검으로 지키셨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 자체는 생명에 대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의미합니다.
생명의 기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과 하나님과의 현재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사망을 주장하시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관하고 계십니다(출 32:32).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시고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따라 생명을 보존하실 것인지 끊으실 것인지를 결정하십니다. 생명은 마술적인 의식을 행함으로서가 아니라, 많이 배워 지식과 지혜가 있느냐가 아니라, 도를 닦아 무에 이르렀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했느냐에 따라서 보장받습니다(신 30:15). 하나님의 말씀에 그 생사가 달려있는 것입니다.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은 바로 구원의 기초이며 믿음으로써만 주어질 수 있습니다. 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 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 굳게 붙듦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왜 선교하십니까? 왜 봉사하십니까? 왜 믿음으로 사십니까?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속 믿고 삽니다. 믿음 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예배시간마다 하나님의 약속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래서 성도들 마음속에는 약속어음이 무한히 쌓여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약속 믿고 우리는 굳게 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십니다. 철저하십니다. 절대로 변치 않습니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찬송가 455장 주안에 있는 나에게 4절)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과의 죄의 문제를 그대로 놓아둔 채 죽으면 그저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우리가 다시 사는 길은 죄의 문제로 붕괴된 생명을 다시 회복하는 길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이 생명을 하나님께 빌려왔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의 수여자이시기 때문에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시 36:9, 신 32:39).
시 104:29-30 “29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생명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이미 하나님께 꺾여져 나간 가지는 더 이상 생명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잠시 더 유지될 뿐입니다. 말 그대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육체를 가진 우리는 음식물에 의해서 생명이 유지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 5:26)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으며 신약시대 이후에는 예수님께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생명은 하나님께 의존하지만 예수님께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후 에 그들에게 “내 죄가 사해여 졌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병 고침을 하나님께 받았다는 것은 병 고침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보호하고 계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병 고침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명을 지키고 계심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 앞에 평등한 것이지만, 생명은 개별적인 것입니다. 개별성은 생명 자체와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선택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꺾여진 가지의 생명을 유지시키다가 죽는 것하고 그 생명을 영원히 살릴 수 있는 물가로 가지고 가는 것에 대한 선택의 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이 물가가 어디입니까?

생명은 살릴 수 있습니다.

눅 12: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약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고 했습니다.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죽게 버려 두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도 죽게 내버려두면 그것이 죄인 것입니다.
1970년대 청개천에서 활빈교회(현 두레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한 김진홍 목사님이 계십니다. 청개천에 당시에 피난민이 그대로 판자집에서 살았습니다. 너무 너무 어렵게 사시는 분들입니다. 그 당시는 우리 사회가 빈민층을 돌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목사님께 밤에 한 분이 찾아와 저 옆에 사시는 권사님이 많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 집에 뛰어가보니 열병을 앓는지 땀이 범벅이 되어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권사님을 등에 엎고 병원을 찾아 뛰었습니다. 가까운 동대문에 있는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입원비인지 수술비인지 없다고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병원에 뛰어갔습니다. 그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목사님께서 내가 목사이니까 믿고 받아달라고 했으나 병원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엎고 뛰어 다녔다니 땀이 범벅이 되었는데 등뒤의 권사님이 느낌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놈이 축 늘어지신채 있는 것입니다. 벌써 돌아가신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 권사님을 엎고 청개천을 한참을 거닐면서 하나님께 원망도 하고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고 하셨습니다.
요즘에도 일본에서 임신부가 아기 나려고 하다가 일요일에 병원 문을 잘 안 열어서 죽은 산모가 있었습니다. 저는 다른 분이 주일날 교회 안나오는 것은 이해 못합니다. 그러나 최상석 집사님(의사)이 안나오시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그 길은 예수께 있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골 3:3-4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고후 6:8에서 “죽은 자 같으나 우리가 살고” 라고 표현합니다.
이 생명은 죄로부터 해방되면서 시작됩니다(롬 6:18). 이 생명은 현재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능력입니다(롬 1:16). 이 말씀이 곧 생명입니다(빌 2:16). 그러므로 복음은 사망을 패하고 생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고(고후 4:20-2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롬 6:11).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롬 8:2).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쌍둥이 중 한 아이가 심장에 큰 결함을 안고 태어났는데, 의사들은 하나같이 그 아이가 곧 죽게 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며칠 동안 그 아기는 병세가 계속 악화되어 죽기 직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때 한 간호사가 쌍둥이를 하나의 인큐베이터에 함께 넣자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이는 병원의 방침에 어긋나는 일이었기에 담당 의사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엄마 자궁에서처럼 두 아이를 한 인큐베이터 안에 나란히 눕히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쌍둥이는 한 인큐베이터 안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아이가 팔을 뻗어 아픈 동생을 감싸 안았습니다.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동생의 심장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체온이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동생은 조금씩 나아졌고, 현재 두 아이는 완전히 정상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답니다.
지금 누군가 우리의 포옹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의 사랑과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손과 목소리에는 치유의 능력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구로 사용해 많은 사람에게 소망과 치료, 사랑, 승리를 주고자 하십니다. 나 자신의 곤경과 필요에서 눈을 돌려, 남에게 복을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에 더 관심을 쏟아보세요.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요구한 것보다 훨씬 많은 복으로 우리에게 갚아 주십니다. -조엘 오스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