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의 은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 1:16)
 

찬송가 197장의 가사 내용은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지만 정말 그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드물어요. 적은 소수의 인원이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다는 것을 경험하여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은혜가 풍성하다는 것을 늘 알고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요. 은혜를 알면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시는 분이 겸손한 분이신 데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교만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또 낮아지고 낮아져서 주님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벤허>를 읽어보면 동방 박사 세 사람을 재미있게 묘사를 했어요. 하나는 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윤리를 대표하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종교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참을 찾고, 선을 찾고, 미를 찾고, 즉 인간의 진선미를 찾아 땅 끝까지 가보았습니다. 인간의 철학과 종교, 윤리가 추구하는 꼭대기까지 가 보니까 거기에서 구세주를 만나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세주는 사랑인데, 그 사랑은 재능이 아니라 인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의 안내를 받아서 예수님을 만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은 재능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좋아지는 것입니다. 경제(돈)는 우리를 조금 편안하게 만들어 줄지는 몰라도 우리를 좋게 만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썬다싱도 이런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죽어버리겠다고 하며 죽음이냐 하나님이냐의 양자택일을 놓고 기도하다가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이 나타나심을 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은 물 한 컵 정도로 조금만 얻는 것이 아니라 오아시스 같은 생수를, 폭포수 같은 생명의 강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다면 우리는 그 은혜를 알게 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은 10억을 벌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100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예요.

- 여호와의 인도가 은혜입니다.
출 15:13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출 15: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인도’입니다. 인도하시기 위해서 택하신 것입니다. 한 때 여자를 택하고 나중에 책임을 안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책임 한 것입니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면 택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은 무한 책임을 지시기 위함입니다.

-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 은혜입니다.
바울은 갈 1: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바와 같이 바울은 초대교회 스데반 순교 후에 흩어진 성도들을 잡겠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택하신 하나님은 어머니 태에서부터 자신을 택한 것이라고 고백해요. 하나님이 처음부터 자신을 택한 것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이 처음부터 나를 택하신 것입니다. 왜 택했냐고 물으신다면 바로 그것이 은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민족 중에 이스라엘 부르신 것이 은혜입니다. 수많은 사람 중에 나를 불러주신 것이 은혜입니다.

- 선물로 거저 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엡 2:8-9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은혜란 자격이 없는 자에게 공짜로 내려지는 하나님의 호의다.”(벤자민 워필드)라고 했습니다.
19세기의 유명한 전도자 무디가 탄광촌을 방문하였습니다. 책임자에게 구원에 관하여 설명하자 그가 말하기를 “그거 구원이 너무 싸군요. 사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니 값이 너무 싸단 말입니다. 뭔가 값이 좀 들어가야 할 것 같군요.” 라고 했습니다. 무디는 “당신 오늘 갱에 들어 갔었나요?” “네” “얼마나 깊이 내려 갔었지요?” “수백 피트나 되지요.” “어떻게 내려갔습니까?” “네 그것은 간단하지요. 승강기를 타고 버튼만 누르면 됩니다.” “그것밖에 하신 일이 없습니까?” “그럼요, 석탄회사에서 이미 많은 돈을 들여 승강기를 설치했으니 저는 그저 그 승강기를 타기만 하면 됩니다.” “바로 그겁니다. 선생이 승강기를 타듯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그 공로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미 십자가의 승강기를 놓으셨으니 믿음의 버튼만 누르시면 됩니다”

- 구원받은 것이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벧전 3:20-21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노아 때 구원받은 사람은 노아의 가족 8명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물에서 구원하는 표인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증거요 표가 되는 것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세례에 대해서 필립 헨리(Henry)의 고백이 있습니다.
“나는 세례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을 나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최고의 진리의 선포자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성령 하나님을 나를 거룩케 하시는 분, 나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위로하시는 분으로 받아들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내 모든 삶의 행동의 규칙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백성을 나의 백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모든 것, 내가 가진 것,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헌신하고 드립니다. 나는 이 시간 의지적으로, 의식적으로, 또 자유함 가운데서 그리고 영원히 이 언약을 지키겠습니다.”

본문의 “충만한” 으로 번역된 “plhrwvma”(플레로마)는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불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완성된 완전한 은혜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고 번역된 “kai; cavrin ajnti; cavrito”"(카이 카리스 안티 카리토스) 카이(그러니까? 접속사입니다) 카리스(은혜는) 안티(반대하여 뜻말고도 …때문에, …그래서 라는 전치사입니다) 은혜가 주어진 것 자체가 은혜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에 굳게 서라
벤전 5: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이 은혜에 굳게 서라”라는 말씀을 직역을 하면 은혜 안에 너의 자리를 잡으라는 뜻입니다. 즉 은혜라고 하는 테두리 안에 너 자신을 고착시키라 말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도록 그 자리에 못을 박아 놓으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가정에서 남자는 남편이라는 자리, 아버지라는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는 확실히 지켜야 하는 자리입니다. 여자에게는 아내라는 자리, 어머니라는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가정이라는 테두리를 마련해 놓고도 다른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면 그 가정은 문제가 심각한 가정이예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은 은혜라고 하는 그 안에 우리의 자리를 확실히 잡아 놓아야 해요. 예수 믿으면서 교회가 자기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는 교회 안에 있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요.

기독교의 생명은 겸손이에요. 출발이 겸손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무엇이에요? 보여주신 삶이 무엇이에요? 기독교의 출발은 겸손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실 때에 마굿간에 태어나시고 옷도 한 벌로 입었어요. 나라이면서 군인도 없고 나라이면서 돈도 없고 세금 낼 돈도 없으셨어요. 아주 막강한 내각을 구성해야 될 텐데 어부들을 가져다가 구성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도 나귀를 타고 가셨어요. 겸손하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가 모두가 다 겸손이에요. 이 세상에 겸손을 귀히 여기고, 겸손 위에 나라를 건설하고 겸손해야만 된다라고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 밖에 없어요. 어떤 철학에도 겸손을 예찬하지 않아요. 아리스토텔레스도 “겸손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라고 했어요. 유명한 프레데릭 니체도 말하기를 “사도바울의 이 겸손을 주장하는 것은 노예근성에서 나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겸손을 가르치고 겸손을 주장하는 사상이나 종교나 지식이나 철학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종교는 한마디로 교만입니다.

우리나라의 유교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아세요? 여자를 사람 취급을 안하고 상놈을 사람 취급을 안 했습니다. 옛날에요 아주머니들이 물을 이고 오다가 학교 갔다고 오는 양반집 아이들과 마주치면 옆으로 비켜서서 지나갈 때까지 그 무거운 것을 이고 옆에 이렇게 섰다고요. 여러분!, 여자를 귀히 여기는 종교가 이 프로테스탄트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기독교 이외에는 여자를 귀히 여기는 곳이 한 곳도 없습니다. 이걸 잘 알아야 합니다. 아멘도 안 하시네. 보십시오. 오늘 유교가 500년 동안 여자들을 얼마나 어렵게 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힌두교도나 지금 중동에 있는 종교나, 아니 어떤 종교도 다 마찬가지예요. 사람 차별합니다.

프로테스탄트, 우리 기독교만 차별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뽐내지 않습니다. 내가 제일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 가운데 표시하지 않고 다니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힌두교도도 머리에 표시를 하고 어디를 가도 다 자기가 최고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이슬람도 다 두르고 다닙니다. 여러분, 태국이나 버어마, 이런 데 가보십시오. 비행기 탈 때 스님을 제일먼저 타게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목사가 먼저 타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먼저 타고, 장애자가 먼저 타고, 노인이 먼저 타고, 여자가 먼저 탑니다. 먼저 되고자하면 나중이 됩니다. 그러나 나중이 되고자 하면 먼저가 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은 먼저 자신을 드러내고 대접받으라는 것아 아니지 않습니까? 어쩌면 기독교에는 성인이 없어야 되는지 모릅니다. 모두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니 알 수가 있나요.
기독교도인 걸 드러내지 않고, 교회 다니면서 드러내지 않는 종교는 이 세상에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조그마한 우상 종교도 다 드러냅니다. 여러분, 미국이나 이스라엘을 가보십시오. 한여름인데도 유대인들은 다 정장하고 검은 옷 다 입고 다닙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여기에 수염을 기르고 다 머리를 닦아 가지고 내리고 다닙니다. 어느 종교든지 내가 최고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그들의 교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 더 사랑해야 되요. ‘윈수’도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이 ‘윈수’ 입니다. 같이 사는 사람은 ‘원수’가 아니라 ‘윈수’ 입니다. 아직까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내게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겸손입니다. 겸손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와 겸손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따로 갈 수 없어요. 겸손하여져서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장로교가 1907년에 독노회가 조직되고 목사 7명을 안수하여 세웠습니다. 그 중의 한 분인 이기풍 목사를 예수 믿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제주도에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외국에 보낸 것이 아닙니다. 제주도에 보내면서 선교사라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북해도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을 때 처음에 목사 안수 받은 한 분을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선교사는 현지로 부임하기 전에 결혼을 하고 신혼 살림을 거기서 시작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선교사님은 오늘도 전도, 내일도 전도하며 열심이었습니다. 그때 그 사모는 신혼살림을 시작하면서 남편의 짐을 전부 정리합니다. 그 중에서 책이 제일 많았습니다. 책을 정리하는 중에 이상한 책이 하나 나왔습니다. 그 책은 성경이었습니다. 목사의 책을 정리하다가 성경이 나왔는데 왜 이상합니까? 하고 물으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성경은 아무리 봐도 자신이 처녀 적에 보던 성경이었습니다. 내가 처녀 적에 도둑맞은 성경이 어떻게 남편 목사의 책들 속에 있나! 참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들어온 다음에 물었습니다. “여보 당신, 이 책, 어디서 났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이 솔직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사실은 도둑놈이었소. 친구들과 어울려 한번 두 번 도둑질 하다보니 도둑놈이 되었고 한번은 어느 큰집에 들어가서 도둑질을 했는데 전부가 여자들뿐이었소. 사실 그곳이 신학교 여자 기숙사였습니다. 여자들이 정신 없이 자고 있는지라 모두 집어 들고 와서 보니 그 중에는 쓸 것도 있고 못 쓸 것도 있었지요. 쓸 것은 팔아서 먹고 살고 지냈는데 그러다 보니 그 속에서 성경책이 하나 나오지 않았겠소. ‘재수 없네’ 라고 생각하고 집어 던졌는데 방구석에 굴러다녔소. 낮에 잠만 잘 수 없어서 어느 날 성경을 한번 펴보자 하고 성경을 펼쳐 보았는데 에베소서 4장 28절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라는 구절을 펼치게 되었오. 도둑놈은 도둑질하지 아니 할 뿐 아니라 돈을 벌어서 구제를 하라는 뜻이더군요. 이것이 나에게 하는 소리라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다시 재수 없다 생각하고 집어 던져버렸지만 ‘도둑놈은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돈을 벌어 구제를 하라’는 말이 계속 머리 속을 맴돌아 견딜 수가 없었소. 그래서 동네에 있는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가서 어쩌면 좋습니까? 하고 상의를 했더니 “당신이 고민하는 것을 보니까 죄 때문에 몹시 괴로워하는데 벌써 2000년 전에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즉 당신의 죄를 뒤집어쓰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를 내가 믿습니다’ 하게 되면 당신의 죄는 2000년 전에 벌써 다 끝난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십시오.” 라고 하였지요. 그래서 그 날 예수님을 영접하였소. “당신이 되돌아가면 도둑놈들과 또 어울려 도둑질을 하게 되니 여기에 내가 방을 하나 마련해 주겠소. 여기서 살면서 교회에서 일하는 사찰을 하시오” 라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교인들과 어울리고 온갖 시중을 들고 봉사를 다 했소. 교인들이 모이는 자리에는 빠짐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진짜 교인이 되었소. 목사님이 신학교를 보내줘서 목사가 되었고 지금은 당신과 결혼하여 북해도에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이오.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쭉 설명을 한 끝에 “당신이 도둑 맞은 성경이 나로 하여금 목사가 되게 했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성경을 도둑 맞았으면 절대로 후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둑놈들과 어울리니까 도둑놈이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과 어울리니까 교인이 되고 목사와 어울리니까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어울림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기도하는 자리에 어울리고 전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