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교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9-10)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세상을 사랑’ 하고 ‘사람을 사랑’ 하시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 독생자를 사람들 손에 내어 주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를 부끄럽게 하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 각자에게 주신 능력을 활용하고 날마다 기도하고 스스로 훈련하는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 열심히 공부하고, 기도하고, 땀흘리고 애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에 대해서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거져 받으려고만 하는 곳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하늘에서 공짜로 떨어지는 것을 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며 기도하는 곳입니다. 이미 주신 달란트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 지혜를 구하고 건강을 구하는 곳입니다. 그것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요즘 우리가 힘들다고 하는데 지구촌에는 이런 아이들도 있습니다. 제가 인도와 네팔을 다니면서 본 것인데요, 차를 타고 가다보면 카다란 돌산아래에 앉아서 돌을 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까이 가보면 어린아이들도 있습니다. 이곳에 루빠라는 어린 소녀가 있습니다. 4살 때부터 어머니와 이곳에 와서 돌을 깬지가 4년이 되었습니다. 돌 깨는 일이 어린애 장난이 아닙니다. 손에는 온통 피멍이 들어있었습니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은 한쪽에 깊숙한 흉터가 나 있었습니다. 망치 머리는 아이의 주먹보다 훨씬 컸습니다. 1센티만 어긋나도 손가락은 박살날 듯 보였습니다.
루빠는 카투만두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아그레콜라 강변 럽세 바거드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시계는 오전 10시 30분을 가리켰습니다. 아이는 아침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늘 그렇듯 오늘도 새벽 5시에 일어나 물로 배를 채우고 물안개가 걷히는 때부터 지금까지 돌을 깨는 중입니다. 이렇게 깬 돌을 100미터 떨어진 강까지 매일 15킬로그램이 넘는 광주리를 이마에 끈을 맨 채 하루에 한 두 번씩 왕복합니다. 온 가족 4명이 깬 돌을 건축자재상에게 팔면 100루피를 받습니다. 우리 돈 1,500이 채 안됩니다. 학교는 두 달 전 입학만 해 놓았지 지금까지 못 가고 있습니다. 아이는 무표정하게 돌만 바라보고 깨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돌 깨는 게 지겹니 않니?” 통역을 기다리는 순간 질문이 너무도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했습니다. “이게 제 운명이에요.” 라고 대답합니다.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것이 돌 깨는 일밖에 없습니다. 8살 아이에게서 운명이라는 말이 나올 때 왠지 화가 났습니다. 이제 이 아이의 운명을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이며 ‘가난은 나라님도 못 구한다’ 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픈 사람이 또 있고 사람이 또 병난다고 지금 치료해주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힌두교의 운명을 말하던 아이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게 될 날을 생각해 보세요?
저는 솔직히 큰 교회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돈 버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 전도하세요. 우리가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사탄에게 빼앗긴 하나님의 자녀를 구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이것은 특정한 사람들(기독교인)만 해야하는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모두 이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본성이 타락한 이후에 당연한 일을 당연하다고 생각지 않게 되었습니다. 귀한 것을 귀하게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 멀어지고 육신의 눈만 보이는 것입니다(롬 8:5-8).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리 마옵소서” 하였다가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
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라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제자로서 당연히 예수님의 안위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늘 기도해야 합니다.

한 때 ‘말 되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누가 옳은 말을 하거나 공감이 가는 말을 하면 “그거 말되네”라고 합니다. 그러나 말(언어)에는 ‘말이 안 된다’는 말은 있어도 ‘말이 된다’는 말은 없습니다. 한자로 말하면 語不成說(어불성설)이란 숙어는 있지만 語成說(어성설) 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당연한 것이나 정상적인 것에는 유난스럽게 표를 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말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남자일 경우는 그냥 교수요 작가요 선교사라고 부르지만 여자일 경우 ‘여교수’, ‘여류 작가’, ‘여 선교사’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언어학에서는 이런 것을 有標化(유표화)라고 부릅니다. 친족 호칭도 모계 쪽은 모두 ‘외’ 라는 표가 따라 붙습니다. ‘말 되네’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말이 제대로 통하는 사회에서는 말 안 되는 것이 유표화 되지만, 말 안 되는 소리가 난무하는 사회에서는 ‘말 되네’ 라는 소리가 유표화 되는 것입니다. ‘외할아버지’ 라고 부르지만 ‘친할아버지’라고는 안 하는 것입니다. 그냥 ‘할아버지’ 라고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그저 ‘아버지’ 그렇게만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고만 하면 됩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땅에 계신 분입니다.
“우리 아버지여” 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주 하나님을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령님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하나님의 ‘영’ 입니다. 삼위일체란 우리가 포함되어서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나’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앞에 두고 참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마치 당연히 받아들여할 말씀을 이 사회가,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제 우리는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기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기도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올 때에 의무감으로 나오면 힘듭니다. 그러나 은혜로 나오면 기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의 시작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무조건 관철시키는 것이 기도이고 응답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자식은 자기 생각만 하고 부모님께 떼를 씁니다. 그런 자식에게 부모는 한 두 번은 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계속 하나님 아버지께 구한 것을 받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구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 먼저 구해야 하는 것은
‘거룩한 그 이름’,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두고서, ‘매일 매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서도 아니며, 이루지는 데 힘들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힘드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일이 늘 귀한 것임을 생각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는 교회
예레미야 51:10 “여호와께서 우리 의를 드러내셨으니 오라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 고 했습니다. 한 번은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네 백성에게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주는 말을 그대로 선포하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하시다” 하라 하셨습니다. 선포하는 일은 네가 할 일이요 듣고 안 듣는 것은 네 백성이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요즘 닭은 새벽에 울지를 않는답니다. 그래서 개가 물었습니다. “너 왜 아침이 되었는데도 울지 않니?” 그러니까 닭이 말하기를 “요즘 다 시계를 차고 다니는데 내가 울 필요가 있겠니?” 라고 합니다. 그리면서 닭이 개에게 “그러는 너는 왜 짖지 않니?” 그럽니다. 개가 말하기를 “우리집 주인이 큰 도둑인데 내가 짖을 필요가 있겠니?” 하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너무나 타락했다고 사람들이 듣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울지도 않고 짖지는 않는 닭과 개처럼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들을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주인을 쫓아다니면서라도 짖어야 합니다. 그것이 닭의 사명이요 개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이 사실을 체험하고 믿고 나가 선포하자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버림받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야곱에게 아내 넷이 있었는데 아내 넷 중에 라헬이라고 하는 여인을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을 다른 열 아들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러니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너무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도단에 가서 양떼를 치고 있을 때 어린 요셉이 땀을 흘리면서 떡을 한 짐 지고 찾아왔지만 형들은 반갑지가 않았습니다. 미운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옷을 완전히 벗겨 갈기갈기 찢어 양의 피를 발라 아버지에게 보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옷이 아닙니까? 우리가 다니다가 발견했는데 악한 짐승이 찢어 먹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을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스마엘 사람 장사꾼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갈 때 옷 한 벌을 못 입고 팔려갔습니다.
요셉은 어린 나이에 보호받고 사랑 받아야할 나이에 알몸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렸지만 원망으로 세월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정직과 성실을 다해 일했습니다.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사랑 받는 것입니다. 제가 어린 나이에 집에서 나와 서울로 올라와 혼자 살아왔습니다. 그래도 참 감사한 것이 저는 여러 사람에게 칭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저를 좋아했습니다. 어디를 가나 나에게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한 것입니다.

선교부 돈을 유용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이 참고 용서해 주다가 이래 가지고는 안되겠다 싶어서 한 번은 불러서 따끔하게 혼을 내 주었습니다. 거기에 앙심을 품고 얼마나 욕을 해대고 싸우고 나가는데 기가 막히더랍니다. 그러나 선교사님이 미워서 그렇게 했겠습니까? 사람이 되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선교사님은 그 분이 떠난 날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기를 벌써 10년, 15년 지나고 20년이 가까워 올 때까지 찾아오는 일이 없어서 만날 재간이 없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만났습니다. 인사도 안하고 가는 것을 좇아가서 먼저 인사하니 마지못해 인사를 받더랍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를 한 두 마디 하다가 자기 수첩을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수첩이라는 것을 1년 쓰고 또 옮겨 쓰는 것이 아닙니까? 20년 가까이 되었는데 자기 가족 이름이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해마다 수첩에 옮겨 쓴 것이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20년 가까운 세월이었습니다. 거기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다시 예수를 믿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네팔선교사 편지에 보니까 네팔 선생님이 집에 무슨 일이 있다고 거짓 말을 하고 월급 몇 달치 월급을 미리 받고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알아보았더니 중동 두바이에 갔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때에 미국 선교사는 이들을 돕겠다고 네팔로 나라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온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고 도망 안가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시고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택한 자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열심히 선포합시다.

믿음을 잃어버릴 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고 믿음을 회복하니 잃어버렸던 것을 다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다 잃어버려도 믿음을 잃지 않으면 잃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것을 다 가지고도 믿음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다 잃은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믿음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믿음이 회복되므로 모든 것이 다 회복되더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내가 믿음을 회복할 때 나 하나만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주위가 변화됩니다. 요셉이 원망과 불평 속에서 세월을 보냈다면 요셉만 망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집의 식구들도 심지어는 애굽도 도움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에게 할 수 있다 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여호와의 일을 생각하고 선포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