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핵심 십자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갈 6:11-15)

여러분은 9.11 테러가 일어날 당시 어떤 일을 하고 계셨는지 기억하십니까? 그 사건의 충격이 너무 커서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자기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해 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수대교가 무너진 참사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린 사건이 있습니다. 광염교회 조현삼 목사님(감자탕교회 이야기)은 삼풍 백화점이 무너질 당시 버스를 타고 가다가 그 소식을 듣고 그 즉시에 내려서 백화점을 향해 뛰어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명 구출에 대한 귀중한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다리가 끊긴 바로 앞에서 앞차가 강물에 빠지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은 브레이크를 잡아 겨우 차가 멈춰 섰을 때 한참을 하늘만 쳐다보고 눈물이 나왔다는 분의 이야기를 라디오를 통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불행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충격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 죽음은 싸움으로 찢겨지고 상처투성이인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하고 더욱 필요한 죽음이었습니다. 그 죽음을 우리의 눈으로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그 날 그 때의 현장이 너무나도 생생하기에 바로 전에 있었던 죽음과 같이 다가옵니다. 바로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났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그 때의 그 군중소리, 십자가에 못박는 소리,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 죽음이 나와 상관이 있습니다. 아무리 전쟁의 소식이 들려와도 자기와 상관없는 사건은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생생한 그 현장의 소리를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십자가 사건이 나와 상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산을 옮길 수 있고, 산을 평지로 만들 수 있는, 믿음을 제게 주소서
…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내 마음 넓게 해주신, 그것으로 불꽃이 일어 가득 차게 하소서. 내 있는 힘 다 기울여 당신의 열심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당신의 문으로 인도하겠나이다. 목자 되신 주님이 위하여 죽으신 양들을 위해 -웨슬리(C Wesley)

여러분은 이 시가 말하는 식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시가 말하는 주님을 찬양하면서 나의 시간을 사용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까?
자, 이 질문에 답하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바울이 쓴 오늘 본문말씀을 봅니다.
본문을 시작할 때 바울은 갈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고 합니다. 우리는 글자의 크기가 모두 같게 만들어서 성경을 봅니다만 바울이 오늘 본문을 기록할 때는 큰 글자로 썼다고 말합니다. 여기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큰 글씨로 쓴 오늘 본문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는 본문의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서를 끝마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의 전도(선교)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거짓교사가 가만히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좋지만 확실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되고 율법 아래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문제를 대처하기 위해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도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가만히 들어와 이상한 소리를 하면 여러분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전도를 해 보셨어야 알지? 제가 예전에 서소문 공원에서 전도하는데 제 앞에 여호와의 증인들, 안식교인들도 전도하며 다니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나누어준 전도지를 다시 회수하면서 이거 잘못된 겁니다. 하고 다시 다 걷고 다녔습니다. 바울이 애써 전도해 놓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흔들리게 생긴 겁니다.

바울의 첫 번째 요점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고 엄숙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그저 히히낭락하며 지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엄청나게 진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앞 절에 보면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고 합니다. 사람은 심고 거두는 도덕적 이치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일로 하나님 앞에서 평가를 받습니다. 그 심판대를 피해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느냐, 영혼을 위하여 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위하여 성령을 위하여 심어야 되는데, 어떻게 살아야 성령을 위하여 심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심어오던 중인데 거짓 교사들 때문에 그 문제가 뒤죽박죽 되어버렸습니다. 초대교회에만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일어납니다. 요즘은 너무 태평시대에 살아서 그런지 온통 설교가 웃기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웃기지 못하는 목사는 인기도 없습니다. 한번이라도 더 웃겨보려고 목사도 매우 노력합니다. 이런 현상을 나쁘다고만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복음을 가려내지 못하고 히히낭락할 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웃고 즐기는 동안 사탄은 슬며시 고개를 들고 우리에게 틈탑니다. 우리의 진정한 웃음은 죽음 앞에서 미소짓게 하며, 하나님의 심판대에 이를 때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 시켜 주며, 말로 다 할 수 없는 영광 중에 있는 영생과 영원한 복락을 보증할 것을 위하여 이 세상에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대 사도인 바울이 그 해답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자랑하는 일은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자랑해야 할 그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는 그가 자랑하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특권을 얻었습니다. 어떤 분이 그러더라구요. 목사가 설교를 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벤치에 앉아있는 운동선수와 같은 것이라구요. 그만큼 설교하는 것은 목사에게 특권이자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특권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증거 할 유일한 메시지는 바로 바울과 같습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이상한 것 기대하지 마세요? 저는 연예인도 아니고 마술사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증거 해야 할 사명만이 있는 목사입니다. 그 대답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며 기독교의 메시지요, 핵심이자 중심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십자가를 보여주고 싶었고 전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확실히 말해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봐야 합니다. 기독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초대 교회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사도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께 받은 메시지를 전하노라’ 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의 메시지가 십자가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시대에도 십자가의 이야기는 유쾌한 이야기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기 얻으려고 전하는 것 아닙니다. 십자가가 인기가 있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는 인기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전하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방 나라인 헬라인에게 인기가 있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본문 12절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거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를 전하면 언제나 그것이 사람들에게 거침이 되었습니다. 1세기에 살던 사람들은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로마인도 모두 싫어했습니다. 기독교의 메시지의 핵심이 왜 십자가입니까? 예수님도 산상에서 가르치신 적이 있고 제자들과 3년이 넘는 세월을 가르치시며 다녔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누가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 맹자, 석가 이 세상 성인이 다 와도 안됩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가르침으로 사람이 만들어 질 것 같으면 그렇게 일찍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장수를 누리시면서 죽으실 때까지 가르쳐야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서두르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 마지막 승천이 있을 때까지도 제자들은 십자가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적인 말씀으로만 제자들이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보세요? 십자가 죽음 없이도 교훈으로만 될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이유가 없어집니다. 바울이 “산상 설교 외에는 자랑할 것이 결코 없나니…”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윤리적 교훈 이외는 자랑하지 않겠노라”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이며 제자들은 핍박을 받아가면서 십자가를 전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십자가를 전하지 않고 윤리적인 이야기나 전하고 유머나 하면서 다녔다면 제자들이 순교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좀더 하기를 원합니다. 아마도 저와 생각을 달리 하실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혹 주님과 관계없는 바울의 주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안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기억하지 못하지요. 가이샤랴 빌립보 지망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사건 바로 전에 일어난 일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묻자, 베드로가 선뜻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 일을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시고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3-18)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 기억하고 다음을 읽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6:21-23입니다.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가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후 우리 주님은 즉각적으로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베드로만 실수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 모두가 그랬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말하지 않으면, 십자가를 전하지 않으면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최후의 만찬이 열렸습니다. 거창하게 말해서 만찬이지 그저 빵 몇 개와 쉽게 구할 수 있는 포도주 한 두 병이 전부였을 겁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것인지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 사건 후에 성찬식을 하지만 최초의 성찬식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지시기 전에 직접 집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거기서 떡을 먹고 있을 때 떡을 취하여 떼어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그리고 잔에 포도주를 따르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9-20) 쉽게 말하면 “이 빵은 찢겨질 내 몸이요, 너희를 위해서 흘릴 내 피라” 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주님의 증거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 기도하시고 내려오신 후 예루살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시고 나아가시는 모습을 봅니다. 통계적으로 말하자면 4개의 복음서가 이적과 예수님의 교훈은 교차적으로 증거하지고 있지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모든 복음서가 기록하고 7주일 동안의 사건을 집중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뿐만이 아닙니다. 2장에서도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는 오직 십자가를 알리고 전도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십자가를 전한 까닭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오랜 계획에 의해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생각하지 않고 잊으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이상화(理想化) 시키려 한다든가 철학적으로 말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또 그것을 아름답고 기이한 것으로 만들려고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나는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하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 사랑스런 십자가를 전하시다가 주님 앞에 서시는 날 진짜 웃으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