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보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2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3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6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신 32:1-6)

처음 수학에서 사람들은 “평행한 두 직선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영원히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유심히 살펴보면, 평행이란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수없이 많습니다. 하늘과 땅이 영원히 만나지 않고, 두 기차의 레일이, 평행한 길가의 가로수가 영원히 만나지 않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멀리 바라보면 기찻길의 레일이, 가로수의 양쪽이 저 먼 곳에서 한 점에서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착각일까, 아니면 실제로 만나는 것일까 사람들은 궁금해하였습니다.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도전한 사람이 은 B.C. 300년경의 유클리드(Euclid:330?∼275?B.C.)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평행선의 정리를 증명하지 못하고 공리로 인정함으로써 학문적으로 발생하였습니다. 그 후에 수많은 학자들이 이 ‘평행선의 공리’를 증명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였으나 유한하고, 평면·공간적인 인간의 눈으로는 착각과 환상으로만 보이는 평행선의 신비를 증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평행선의 신비 근처에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보다 작거나 큰 새로운 공간이 있다.’는 상대성 이론에 의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평면 공간이 아닌 곡면 즉 타원적인 구면 공간임을 찾아내었습니다. 길가의 가로수가 먼 곳에서 만나는 것은 착각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것만 보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이, 멀리 보면 만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만 보면 우리의 모습만 보면 하나님을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멀리 보세요. 멀리 보면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모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지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엄중한 말씀을 받기 위해 모세에게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신 31:14) 고 하십니다. 왜? 여호수아를 함께 부릅니까? 그가 바로 모세 다음에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세대를 위하여 준비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먼 훗날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모세의 세대가 아닙니다. 여호수아의 세대만도 아닙니다. 그 다음, 그 다음, 영원하신 세대를 보고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기업’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9). 이 기업이라는 말은 그 영원하신 후손이 이어받을 몫을 말합니다. 그것이 기업입니다. 우리의 기업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원히 전달해 주어야할 기업이 있어야합니다. 어떤 부모들은 돈을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래도 제일 확실한 것이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니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자하고 기러기아빠까지 되어 가지고 공부시키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교육을 시킬 때 제일 중요한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개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일관된 틀에 가두면 안됩니다. 그리고 마치 그 틀에 들어가지 못하면 저능아나 바보 취급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작품이고 존귀한 자입니다.

인류의 3대 사과를 아시나요?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3개의 사과를 꼽은 것입니다. 바로 뱀의 꼬임에 빠져 아담과 하와가 먹었다는 원죄의 사과가 최초의 사과이고, 빌헬름 텔이 아들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활을 쏘았다는 이야기 속 정의의 사과가 두 번째입니다. 마지막은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던 과학의 사과(뉴턴의 사과)입니다. 이 이야기들에 나오는 사과는 모두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과를 꼽은 것입니다. 뉴턴은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지구가 물체를 끌어당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을 바탕으로(중력), 이런 끌어당기는 힘은 모든 물체 사이에 존재하며 우주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다고 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뉴턴은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 천문학자입니다. 이 사람은 청교도혁명이 일어난 해이며 갈릴레오가 죽은 해인 1642년 1월 4일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철저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외삼촌하고 함께 자랐는데 외삼촌 중에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독실한 성공회 성도인 뉴턴은 어느 제자가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자, “하나님에 대해서 불경하게 말하지 말게.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네.”하면서 무신론을 주장하지 못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뉴턴이 워낙 과학적 재능이 뛰어나니까 영국의회에 들어가 국가를 위해서 일하라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추천하여 국회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성격이 조용해서 국회의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1년 간의 국회의원생활을 하면서 유일하게 한 말이라고는 수위에게 “문 좀 닫아주시오.”였다고 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그 후손들을 위해서 모세에게 마지막 일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쳐 그들의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신 31:19) 바로 이 노래가 오늘 본문 신명기 32:1-43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마지막으로 시키신 것이 노래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노래를 불러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노래에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한번 흥얼거리기 시작하면 잊혀지지 않고 평생을 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세대에게 또 그 노래를 이어줍니다. 제가 서은이에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알려준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원숭이 똥구멍은 빨게”입니다. 제가 언제, 누구에게서 이 노래를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노래를 알고 있었고 서은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목사가 되어 가지고 서은이에게 “원숭이 똥구멍은 빨게”만 알려주면 되겠습니까?
그래도 “원숭이 똥구멍”에도 뜻이 있습니다. 어디 알려주는 데가 없어 제가 이 노랫말을 가지고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나름대로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이 노래는 일제 시대에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 나오는 ‘원숭이 똥구멍’은 아이들이 일본 순사나 사람들을 놀리려고 비하한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자연산 원숭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에는 원숭이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원숭이 똥구멍으로 시작해서 백두산으로 끝이 납니다. 결국 일본인이 이 나라를 먹은 것 같지만 이 나라의 강산은 우리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 앞에서 비유적으로 부른 노래입니다. 그리고 우리끼리는 숫자에 맞춰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1하면 일본 놈이, 2하면 이등박문이가, 3하면 삼천리강산먹으려고 …”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민요는 당연 ‘아리랑’입니다. 아리랑은 정선아리랑, 강원도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 변종이 수백 개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본조(本調) 아리랑은 ‘신 아리랑’으로 알려진 ‘경기 아리랑’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본조라고만 하지 원조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아리랑이 불려졌는데 이 아리랑을 ‘상암아리랑’으로 부릅니다. 그래서 어떤 외국인은 대한민국의 애국가가 ‘아리랑’ 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모든 아리랑 노래 첫 부분에 ‘아리랑’이 나옵니다. ‘아리랑’은 고개의 이름이자 고개를 넘어갈 때의 고단함, 아기를 낳을 때의 산고(産苦)의 표현이고 한(恨)의 표출이라고 합니다. ‘아리랑’은 ‘아라리’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최초의 아리랑으로 알려진 정선아리랑이 본래 ‘아라리’라는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입니다. ‘아라리’는 ‘누가 내 마음을 알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또 아리랑에서 아리랑고개는 조선시대 서울과 경상도를 오갈 때의 주요 길목이었던 문경새재를 뜻한다고도 합니다. 전국적으로 여러 아리랑 고개가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과 함께 한을 달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한을 아리랑이라는 노래로만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절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노래의 후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신 32:39)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주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일 멀리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일 멀리 보는 것은 우리의 기업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앙교회가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업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본문 6절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우리 다음세대에게 전해줄 것은 ‘원숭이 똥구멍’ 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를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아버지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서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보고 만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아버지가 영의 아버지를 만나는데 방해가 되면 안됩니다. 7절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본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할 일은 영의 하나님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이것이 육신의 아버지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영의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가 다할 수 없는 것을 해 주십니다. 10절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고 하십니다. 황무지 같은, 광야 같은 세상에서 만나 주십니다. 호위하십니다. 보호해 주십니다. 자기 눈동자 같이 지켜주십니다. 눈동자에 먼지하나 들어가 보세요. 얼마나 따갑고 거추장스럽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철저하게 지켜주십니까. 그 하나님이 네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만드셨고 세워 주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동행한 기간은 광야 생활이었습니다. 그곳은 모래바람이 붑니다. 쉽게 흩날리는 모래는 쉽게 쌓였다가 쉽게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나 바위산은 모래 산과는 달리 없어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제자리에 우뚝 서 있습니다. 사막의 온갖 위험으로부터 나그네들을 보호해 줍니다. 피난처가 되어줍니다. 그래서 본문 4절 “그는 반석이시니”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에 쭈르(반석)인데 70인역(LXX)에는 반석을 모두 데오스(하나님)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반석(쭈르)을 하나님으로 동일하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석이십니다. 모든 위협으로부터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본문 4절의 원문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나오는 단어가 쭈르(rWXh:반석)이고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타밈(!ymiT;)입니다. 타밈은 “진실, 흠이 없다,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타맘(!m’T)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타맘은 “완성하다, 마치다”입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행위의 타밈, 마침표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완성시키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최종적인 심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말 안장에 짐을 싫고 길 떠날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창 22:4)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멀리 있는 길 떠날 곳을 또는 산을 바라보았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멀리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순종하지 못합니다. 멀리 보지 못하면 순종하지 못합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말씀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은 모두 멀리 보는 사람들입니다. 눈앞에 이익만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요. 눈앞에서 보면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멀리 보면 만납니다.

본문 6절 “…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완전하게 세워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타밈이 되셨습니다. 온전합니다. 마침표입니다. 우리에게 더 이상은 없습니다. 그 마침표는 십자가입니다. 우리에게 마치 아리랑고개를 넘어서 오신 것처럼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를 넘어서 오셨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멀리바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분의 눈물어린 사랑을 만납니다. 부활이시며, 영원하신 주, 성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