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보세요.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눅 11:37-38)

지난 주 설교제목이 “멀리 보세요.” 였는데요 오늘 설교제목이 “가까이 보세요.”입니다. 목사님! 이런 제목을 사용하시려면 “멀리 보세요.” 설교제목을 잊어버릴 때쯤 되어서 하셔야지 바로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난주에 ‘평행선의 공리’를 배우셨잖아요. 가까이 보면 만나지 못하는 것이 멀리 보면 만난다고요. “멀리 보세요.”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 같은 두 이론은 만납니다.
멀리 보면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멀리 보아야 합니다. 또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저 멀리 천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멀리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가까이 보아야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까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두 개의 제목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어울리는 것입니다. 신학에는 두 개의 큰 축이 있습니다. 하나는 조직신학이고 하나는 실천신학입니다. 마치 하늘과 땅과 같은 것입니다. 멀리 보는 것은 조직신학(신론, 하늘)에 해당하는 것이고요, 가까이 보는 것은 실천신학(땅)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먼저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보다 기독교가 성장을 못했습니다. 사실 일본인의 습성으로 보아서 우리나라보다 복음이 더 빨리 전파되었을 것 같은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남의 문화에 쉽게 적응하느냐 하면, 일본 역사 최초의 외국인 집정관이 된 맥아더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이후 일본에 들어갔습니다. 멕아더 일행이 들어갈 때 일본인들의 반발을 상당히 우려했습니다. 그러나 예상 밖의 환대를 받으며 들어갔습니다. 오히려 미국인들이 어리둥절했습니다. 마치 버드나무 같은 습성입니다. 쉽게 적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소나무형이라면 일본은 버드나무형입니다. 우리는 “남산 위에 저 소나무”를 쳐다보며 살았습니다. 소나무에는 황새가 앉지만 버드나무에는 촉새나 종달새가 앉습니다. 중국 연변 용정에 가면 일송정이 있습니다. 그 산에는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겨울에도 낙엽이지지 않고 푸르게 굳굳하게 서 있는 소나무를 바라보며 나라를 구할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군이 그걸 알고 그 소나무를 죽이기 위해 구덩이를 파소 소금물을 뿌려 넣었습니다. 멕아더는 일본 천황에게 “덴노는 인간”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들어간 복음은 자라지를 못했습니다. 일본의 복음이 자라지 못한 이유를 신학자들은 일본의 신학이 인본주의에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은 무조건 믿었습니다. 거기에는 뭐 깊은 연구 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나라를 살려주셔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부흥이 일어나게 된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연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의 뿌리, 그곳에는 하나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고, 뿌리가 있고 그 다음에 다른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보고, 하늘을 보고 오늘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까이 보아야 합니다. 땅을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을 보지 못하면 땅도 보지 못합니다. 멀리보지 못하는 사람은 가까이도 보지 못합니다.

사실 가까이 가면 복음은 다 된 것입니다. 복음이 전달되지 못하는 이유는 가까이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분들은 쉽게 사귀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번 믿음을 주고 사귀어두면 끝까지 의리를 지키고 신뢰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중국사람 한국사람 일본사람이 돼지우리에 같이 들어갔답니다. 누가 제일 빨리 뛰어 나올까? 하는 내기를 했답니다. 제일먼저 깨끗하기로 소문난 일본 사람이 더러워서 못 있겠다고 5분을 견디지 못하고 뛰어 나왔답니다. 그 다음에 한국사람이 참다못해 10분을 견디지 못하고 나왔답니다. 그 다음에 돼지가 뛰어 나왔답니다. 중국사람하고 더러워서 같이 못 있겠다고 나왔답니다. 어찌 보면 중국사람 비하하는 것 같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만큼 중국사람은 끈기와 인내가 있다는 이야기이도 됩니다.
언어문화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도 우리와 같이 밥을 먹고사는 민족인데 식당 메뉴에 ‘라이스’ 라고 적는 나라입니다. 여행사마다 기본 모음 다섯 개를 가지고 트래블(travel:여행)이라는 영어를 도라베루라고 적을 수밖에 없으면서도 여행사마다 이 수상한 외국어를 걸어놓고 국제화를 위치고 있는 것이 일본입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 국기나 위아래, 좌우가 있는데 일장기는 아무렇게나 걸어도 됩니다.
그런데 중국에 가면 정 반대입니다. 에스컬레이터가 ‘전기사다리’로 바꿉니다. 전 세계가 텔레비전(TV)라고 하는데 자기네만 ‘전기로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고유명사도 바꿉니다. 코카콜라가 ‘가구가락’, 펩시콜라가 ‘백사가락’이 됩니다.
우리는 중간에서 중간쯤은 선택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때 ‘나성 올림픽’이라고 했습니다. 일본은 앞에 두 자를 따서 자기 멋대로 “로스올림픽”이라고 했지만 우리나라는 LA올림픽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은 외래어에 장악 당한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한자를 천년이 넘게 써 왔지만 한자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인 ‘족발’입니다. 족이 이미 발이라는 말인데 우리는 발을 반드시 넣어 사용합니다. 일본말이 이 나라를 휩쓸 때도 ‘모치’라는 말이 떡이지만 우리는 ‘모치 떡’이라고 썼습니다. 깡통이라는 말은 영어의 켄(can)에서 나온 말인데 켄(깡)이라는 말에 우리말 통을 붙여서 깡통이라고 했습니다. 가끔 야구 중계를 들어보면 ‘파울 라인 선상’으로 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외래서가 들어와도 함께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자기 것 없이 다 바꿉니다. 중국은 가기 것으로 바꿉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를 다 가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의 소금은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합니다. 소금 섭취 량을 약간 늘리면 건강에는 좀 해로울 수 있지만 음식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금 섭취 량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늘리면 건강에 미치는 폐해가 맛있는 음식으로부터 얻는 이익을 넘어서게 됩니다. 우리는 마치 소금과 같은 나라 사람입니다. 고르게 합니다. 그러나 이 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금은 맛입니다. 그 맛을 잃으면 안됩니다. 그 맛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성령님이십니다. 우리의 것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성품을 버리지 못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이 모습 이대로 우리민족을, 나를 사랑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십시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까이 보아야 합니다. 제일 가까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결혼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뽑았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가까이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뽑은 것입니다. 그리고 3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사셨습니다. 말 그대로 동고동락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3년이 넘는 생활을 하시고 나서 “너는 발 냄새가 너무 나서 나의 제자가 되기 어렵겠다.” 고 하신 적이 있습니까? “야! 정말 살아보니까 너는 정말 아니다.” 하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서로 마음에 다 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명심하세요. 영적인 문제들을 우선 순위에 둠으로써 다른 문제들을 이해하고 용납해 가야합니다.

마 15:2에서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늘 제자들 편에 있었습니다. 레위기의 이야기로 볼 때 손을 씻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20)고 하셨습니다.
본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눅 11:38)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상히 여겼지만 저는 이 말씀에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자들이 손 씻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도 손을 씻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 행동은 아주 의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무의식중에 한 행동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지난번 손 씻지 않고 떡을 먹었다가 바리세인들로부터 꾸중을 들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때의 일을 기억하면서 손을 씻지 않으신 것입니다. 마 15:1 “그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그랬습니다. ‘그때에’ 는 앞에 마 14:34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병자들이 수없이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잘 아시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덴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5장으로 넘어가서 ‘그때에’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손을 씻지 못하고 음식을 먹을 때는 상황이 손 씻을 여건이 안 되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도 유대인입니다. 음식 먹기 전에 손 씻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때부터 지켜온 것입니다. 아무리 베드로와 그 제자들이 무식하다고는 하나 이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관습이든 장로들의 유전이든 잘못된 문화는 아닙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사정이 손 씻을 만큼 여의치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다릅니다.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눅 11:37) 그랬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청해서 예수님이 그 접대에 응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집은 아마도 유대인의 전통적인 집으로 지난번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았던 상황과는 분명히 달랐습니다. 유대인의 전통가옥으로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을 수 있도록 물 항아리가 준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손을 씻는 것이 그들의 습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38절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라고 했습니다. 이상한 겁니다. 다 손을 씻는데 예수님이 손을 안 씻은 것입니다. 왜? 이런 행동을 하셨을 까요? 오늘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눅 11:39-42절의 바리새인들에게 교훈하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신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뿐이 아닙니다. 진짜 예수님이 이러한 행동을 왜 하셨을까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어디 주석에도 나와 있지 않는 며느리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난번 제자들이 바빠서(핑계일지 모르지만) 손을 씻지 못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왜요? 제자들과 함께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더러운데 나만 깨끗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은 무식한데 나만 옳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무식하니까 예수님도 보조를 맞추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더러우니까 예수님도 더러워지신 것입니다. 왜요? 제자들과 함께 하시려고요. 결혼했는데 계속 자기만 깨끗한척하고 마누라 쥐잡듯 잡는 사람 문제 있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총명하고 사랑 받을 만한 제자들만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더럽고 추하고 당신의 말씀을 잘 이해 못하거나 심지어는 비난한 제자들도 사랑하셨습니다(한 여인의 비싼 향유 사건, 마26:6-13, 막 14:3-9).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제자에게 네 양을 치라고 했습니다(요 21:15-19).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지만 그에게 다가가 그 상처를 만져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을 격려했습니다. 위로했습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신 사건이 있는데 그 동기가 본인이나 죽은 가족의 애통하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눅 7:13에는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요 11:33 나사로의 죽음으로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8).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본 유대인들은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요 11:36)라고 말했습니다.

인도를 다 주어도 섹스피어와 바꾸지 않겠다고 영국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타이완 사람들은 미국을 다 주어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 있습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중국에서 쫓겨나올 때 작고 귀한 보물들을 가지고 나왔는데요, 이런 것이 타이완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저도 가서 본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갚진 것으로 여기는 것이 주먹만한 크기의 차돌로 깍은 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공 속에 7개의 공이 들어있습니다. 그 차돌로 깍은 공 7개가 그 곳에서 모두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아주 정교하게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습니다. 그곳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신비함에 발을 못 띤 경험이 있습니다. 이것을 미국 사람들이 현재의 컴퓨터와 기술을 이용해서 이런 공을 만들 수 있나 실험했는데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7단계에 걸쳐 들어가며 깍아야 하는데 나중에는 거의 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도무지 깍을 수가 없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중국 사람들이 대를 물려가며 깍아 놓은 것입니다.
언 듯 볼 때 사람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해 냅니다. 누군가 거친돌을 다듬기 시작했겠지요. 그리고 깍다가 죽고 그 자식에게 물려주고 그 자식은 또 깍았겠지요. 아마 중간에서 하다 말았으면 그런 작품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7개의 공 속을 깍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포기하지 않는 장인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보면 우리 주님의 사랑을 봅니다. 사랑의 흔적을 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안 바꾸십니다. 나를 천하보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보세요. 예수님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으로 사랑할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처럼 사랑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