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시작하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23-31)

자동차에서 제일 중요한 기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동차는 물론 가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엔진이 제일 중요할 것 같지만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브레이크입니다. 멈출 때 멈춰야 합니다. 멈추지 못하면 사고가 일어납니다. 처음 자전거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었을 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멈추는 브레이크 장치였습니다. 멈출 수 있다면 다 완성된 것입니다.
완벽함이란 덜하거나 더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가 완벽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가 완벽한 것입니다. 자 옆 사람 보세요. 완벽하지요.
조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디서 멈추느냐 하는 것입니다. 깍아 내지만 멈출 것을 생각하고 깍아야 합니다. 멈출 생각하지 않고 깍다 보면 다 깍아 버립니다. 그러면 망치는 거예요. 조각에서는 더 이상 깍아낼 것이 없을 때, 그리고 소조에서는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을 때 완벽함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완벽이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자연스러움입니다. 투박한 돌이 조각가를 만나 하나의 예술품으로 만들어지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성령을 만남으로 만들어지며 완벽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이나 성장보다 더 마음에 두어할 단어가 있습니다. ‘성숙’입니다. 성공했고 성장했지만 ‘성숙’하지 못하면 인간은 더 허무하고 더 보잘것없어집니다. 성공했냐. 성장했냐가 아니라 무엇이 성공했고 무엇이 성장했냐는 것입니다. 콩 심은 데는 콩 납니다. 우리 속담에 “개꼬리 삼 년 묻어 놓았다가 꺼내보니 개 꼬리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근본이 바뀌지 않고는 안됩니다. 아무리 성장해도 성공해도 무엇을 가지고 했냐는 겁니다.
“알맹이가 없는 사람은 아무리 겉을 꾸며도 그 속이 언젠가 드러난다.”(노자)고 했습니다. ‘원단론’이 있습니다. 원단이 상해있는데 아무리 재봉틀로 박아도 찢어진다는 겁니다. 원단이 바뀌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영화에서 본 한 대사가 생각납니다. “못 하나가 없어서 말의 편자를 달 수 없지. 편자가 없어서 말을 잃었고, 말이 없어서 연락할 수 없었지. 연락할 수 없어서 전쟁에 졌고.” 비록 그것이 작을지라도 무엇을 가지고 시작했느냐하는 것입니다. 못 하나가 없어서 전쟁에서 실패한 자와 같이 성령이 없으면 우리는 실패자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세요. 이제부터 심는 것은 다릅니다. 예전에는 나를 위해 심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을 위해 심습니다. 교만했던 내가 겸손해 집니다. 나를 위해 살던 내가 주님을 위해 삽니다. 나를 위해 심는 것은 이 땅에서 다 받을 것이고, 주님을 위하여 심는 것은 영원한 저 세상에서도 유효합니다. 하늘 곳간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 1:18),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성령으로 시작된 분입니다.
우리도 성령으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성령도 나의 육신의 정욕을 위해서 사용했다면 지금 바꾸어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의 욕심을 채우라고 보내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심어야 합니다. 근본이 바뀌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세례요한은 증거 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마 3:11) 성령으로 오신 분이 성령을 주십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입니다. 세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세례만 받고 성령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세례가 상징적인 것을 의한다면 성령세례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원단이 바뀌는 것입니다. 새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성령의 반대는 악령입니다. 사탄의 영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자기가 악령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선을 가장하여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처음에는 좋은 것을 주는 것처럼 위장합니다. 마치 노름판에서 처음에 잃어주는 노름꾼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판을 키워 가지고 다 쓸어 가지고 갑니다. 결국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라는 말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영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성령이 없습니다. 성령을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성령으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바로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 3:34),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성령이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하냐 하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못 갑니다.

성령으로 시작하려면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는지 말씀을 통해서 봅니다.
첫째, 모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성령이 예수님 승천이후에 제일 처음 임한 것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사도행전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모여서 고스톱 쳤겠습니까? 기도했을 것입니다. 모여야 합니다. 마음을 합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후에도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라고 합니다.
어떤 학생이 자기 친구하고 1시간을 통화하고 난 후에 “벌써 1시간 지났어?” 그럽니다. 그리고 또 만나서 이야기하자 그럽니다. 1시간 통화하고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 사랑하는 사이는 다릅니다. 또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냥 기쁩니다. 자꾸만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기쁩니다. 주님과 만나는 시간이, 기도하는 시간이 기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모이기를 폐하면서 기독교는 힘을 잃어 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마음을 합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마음을 같이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4: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한마음으로 해야합니다. 모여서 싸우려면 안 모이는 것이 좋습니다. 선교대회 때도 모처럼 모이니까 회의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혹 서로 다투게 되는 것을 봅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하도 싸우니까 예배를 먼저 드리던 것을 나중에 드립니다. 나중에 회의하다가 다 시험에 들어서 가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회의를 별로 안 좋아합니다. 회의하는 것에 회의가 듭니다. 솔직히 회의 많이 하고 잘해서 교회성장 했다는 말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모여야 합니다.
어느 날 조조는 외지에서 보내온 우유를 맛본 뒤 그 항아리 뚜껑에 ‘합(合)’ 자를 써서 부하에게 돌렸습니다. 부하들은 항아리를 두고 어리둥절했습니다. 그 때 조조의 뜻을 알아챈 한 부하가 있었습니다. 사람(人) 마다 한(一) 모금(口) 씩 마시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을 합하는 것은 자기가 혼자 다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을 합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령하면 그저 뜨거움만 생각하게 되는데 그리고 마치 밀어붙이는 것만이 능사인 것처럼 성령을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2-23절에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중에 적어도 3개 이상(오래 참음, 온유, 절제)이 조용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말만 많은 사람들 때문에 좋아지는 것입니다. 참아야 합니다. 그 참을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마치 브레이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화를 돋굽니다. 사탄은 예수님께도 그랬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까지 가서 예수님께 놀립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지금이라도 뛰어내려 보라”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겼습니다. 참았습니다. 온유하신 것입니다. 절제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브레이크 없이 달려가도록 만듭니다. 결국은 파멸로 이끕니다. 성령이 없으면 브레이크가 없어요. 안전장치가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안전장치입니다.

셋째, 말씀 전하기 위하여 받아야 합니다, 본문 29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제자들이 오순절 날 성령을 처음으로 받고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 자리는 예수를 핍박하던 자리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 위하여 재판하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 그 때에는 요한은 예수님을 두고 모른 채 하였고, 베드로는 그 자리에 한 여종의 고발로 그 자리를 피하여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도망가지 않습니다. 피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고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합니다. 이 때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들을 잡아 가둡니다(행 4:1-3). 그리고 다음날 이들을 따르던 사람들은 남자들만 5,000명이 되는데 이들도 이제 도망가지 않습니다.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행 4:5),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6) 예수님께 하였던 똑 같은 질문을 합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냐는 겁니다. 아마도 예수를 죽이도록 재판한 이들이 무슨 재판인들 못하겠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합니다. 행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고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갇히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당히 예수를 전합니다. 산헤드린공의회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의 답변에 마땅한 혐의점이나 문제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말이 옳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요한과 베드로가 예루살렘 옥에서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마음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정주영씨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인천에서 막일을 하며 밤을 노동자 숙소에서 지내는데 빈대가 얼마나 많은지 달려들어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빈대를 피해서 밥상을 올려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자는데 밥상 다리를 타고 빈대가 올라오더랍니다. 그래서 빈대에게 질소냐 하면서 물통을 밭쳐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자는데 이번에는 빈대가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서 다이빙을 하더랍니다. 그 후로 그는 일평생에 동안 빈대 철학으로 살았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은 빈대도 자기에게 닥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데 하물며 영장인 사람이 좌절하고 낙심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29절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1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오늘날 성령을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령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역사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병이 나은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들어가야 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병이 나았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우리에게 부어 주십니다. 여러분! 예수 전할 마음만 가져보세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마음만 가져보세요. 반드시 세상 끝날 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