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3)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8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9 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 (출 34:5-9)

오늘 본문이 나오는 출 34장은 모세가 하나님께 십계명을 두 번째 받으러 갔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첫 번째 십계명은 모세가 화가 나서 던져버려 깨졌습니다(출 32:19).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올 때 백성들은 그 기간을 참지 못하고 자신들의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 주동자는 다름 아닌 아론입니다. 그는 모세의 형입니다. 누구보다도 모세를 도와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없는 아론에게는 백성의 원망의 소리만 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금 고리들을 빼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게 너희들의 신이다 그랬습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오다 마중 나온 여호수아를 만났습니다. 산을 내려오는데 진중에서 요란한 소리가 납니다. 저게 무슨 소리냐고 할 때 바로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에게 제사하고 떠들고 기뻐하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그 때 하나님께 주신 십계명을 던져버렸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잘못입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을 던져버리지는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십계명을 받으러 하나님께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처음 돌 판처럼 돌을 만들어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출 34:1). 2절에 보면 아침까지 준비하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전날 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돌을 깨서 다듬는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것도 아침까지 준비해야 합니다. 아마 모세는 밤 세도록 돌을 깨고 다듬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시내산 까지 가지고 가야합니다. 집 나가면 개 고생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죽음입니다. 모세는 40주야를 물도 마시지 못하고 십계명을 다시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에 따른 책임은 모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고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버리고 다음에 또 받으려면 주시기는 하십니다. 그러나 그 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모세의 사명부여
출애굽기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실 때 사실 모세는 자기 백성을 구해 가지고 나오라고 하는데 별로 마음 내키지 않았나 봅니다. 자기는 지금 어쩌면 편안한 삶을 삽니다. 애굽에서 사람 죽이고 도망 나와 가지고 시나이반도 광야에서 편안하게 지냅니다. 아내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이 80이 다되어 하나님이 애굽으로 가라고 하시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속으로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보내시려면 좀더 젊어서 보내시지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라고 가라고 하시나 그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능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너 뭐 들고있니?” “지팡이입니다.” “그래 그것을 던져 보아라” 하고 던졌을 때 지팡이가 뱀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말을 못한다고 하나님께 말합니다. 참 바보 같은 모세입니다. 진짜 말을 못하는 건지 가기가 싫어서 그러는 것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이 말을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좀 다른 생각을 해 봅니다. 여러분! 모세는 파라오의 궁전에서 왕자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애굽의 고관들에게 왕이 될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가 벙어리가 아닌 다음에는 왜 말을 못합니까? 하나님은 “누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느냐” 고 하시면서 까지 말씀하시지만 모세는 그런 하나님의 소리도 무시한 채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여러분! 하기 싫은 사람은 핑계가 많습니다. 지금 솔직히 모세가 그런 것입니다. 나이 80이 되어서 다시 애굽에 가서 파라오와 싸울 생각을 하니 겁도 나겠지만 귀찮은 겁니다. 하기 싫은 겁니다.
모세는 젊은 날에 자기 동족이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애굽사람을 죽일 만큼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나친 열정 때문에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열정이 떨어졌습니다. 우리도 20대의 열정이 더 뜨거웠을 것입니다. 저도 한 때 뜨거운 마음에 장가도 안가고 하나님 따르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결혼해서 하나님 자식만 주시면… 그러면서 아마 기도 많이 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자식 주셨는데 지금 어떠합니까?
자기 동족이 얼마나 애굽에서 죽도록 고생을 하는지, 그것을 위해서 평생 광야에서 준비하고 있었다면 하나님이 가라고 했을 때 바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했을 겁니다. 하나님 왜 지금에서야 말씀하십니까? 이렇게 말하고 가야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참 간사합니다. 눈앞에서 안 보이니까 자 먼 곳 애굽 땅에서 같은 동족이 노예생활을 하든, 죽어가든 자기는 별로 관심이 없어졌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이 이제 이 민족에게 통일 시켜 주시려고 하시는데 우리는 별 핑계를 다 대면서 “하나님 통일은 빠릅니다. 경제가 어떻습니다.”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 당하는 동족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도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냐! 하시면서 하나님은 그럼 네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출 4:14) 고 하시면서 보냅니다. 이때 모세의 나이 80이요 아론의 나이 83세입니다(출 7:7)
여러분! 하나님과 대항하려고 하지 마세요? 결국은 집니다. 순종하세요. [베트남에 선교사 예]

아론은 어떠했습니까?
아론의 등장은 출 4:14에서 처음 나옵니다. 바로 모세에게 “내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론에게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출 4:27)고 하시고 바로 모세는 아론에게 다 말합니다. 바로와 모세는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아놓고 이적을 행했다고 했습니다(출 4:30). 어떤 이적인지 모르지만 아마 지팡이가 뱀이 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출 4:31절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바로와 맞설 때에 늘 아론이 함께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 하신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자는 이 아론과 모세요”(출 6:26) 라고 했습니다.
아론도 늘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음성을 직접 들은 사람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기적을 직접 펼치기도 했습니다. “아론이 애굽 물들 위에 그의 손을 내밀매 개구리가 올라와서 애굽 땅에 덮이니”(출 8:6) 제가 왜 이 아론이야기를 길게 드립니까? 이 아론이 오늘 본문 출 34장에서 금송아지를 만든 주동자라는 것입니다. 아론 역시 모세의 못지 않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런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다니 있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런 아론의 모습을 선뜻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는 아론의 이런 행위 뒤에 성경은 아론이 철저히 회개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런 우상숭배의 죄는 죽음입니다.
심지어는 신약성경 중에도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히 6:4-6)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론이라면 하늘의 신령한 은사를 맛본 자 아니겠습니까? 성경에서도 누가 하나님의 음성을 그렇게 수시로 듣고 명령을 행했단 말입니까?
그런데 아론은 그런 엄청난 범죄 이후에 성경을 제가 자세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범죄 이후에 아론이 다시 등장하는 곳이 출 34:30절입니다. 모세가 증거판을 가지고 내려왔을 때입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나님은 아론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책임도 이후에 묻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뒤져봐도 이후에 이 문제에 대한 책임과 회개, 보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마치 부부 싸움한 부부가 슬그머니 화해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지나갑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아론의 가문이 그 이후에 대제사장 집안이 되지 않습니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죄를 저지른 사람이 대제사장의 가문이 되어 내려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참 재미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뒤에 안나옵니다. 성경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해서 먼저 알고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출 32:7) 고 하셨습니다. 아론 자신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았지만 그 날에 백성 중 3천명 가량이 죽고(출 32:28), 모세는 이 죄로 자기 백성을 용서해 주시고 자신의 이름을 생명 책에서 지워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용서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본문 6-7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여호와라, 여호와라” 이렇게 두 번씩 강조한 곳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구약 성경 중에 이 부분을 제일 강조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모세도 용서하셨고 아론도 용서하셨습니다. 용서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이 말씀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서 “!Wjr]:라흠”(인정 많은, 자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의 어근은 ‘!j’r;:라함’(사랑하다, 측은히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불쌍히 여기지 않고는 용서가 없습니다. 북한 축구선수들 불쌍하지 않습니까? 공산당이 내려와 사람을 막 죽일 때 우리는 말했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남을 측은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모세도 아론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같은 단어가 신 4:31에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하셨습니다. 같은 뜻으로 다윗이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 86:15, 103:8) 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서 형용사인 “@WNj’:하눈”(은혜로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단어는 ‘@n”‘j::하난’(구부리다, 은혜를 베풀다)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은혜를 베풀 때 구부립니다. 권세가 있지만 구부립니다. 눈 높이를 맞춥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시 14:2) 이라고 다윗이 말합니다.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욥 30:20) -개역개정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나 주께서 대답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굽어보시기만 하시나이다”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돌아보지 아니하시는 것과, 굽어보시기만 하시는 것은 다릅니다. 사실 굽어보시면 다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굽어보시려고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은혜는 형용사이지만 이 근원은 동사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라훔과 하눈은 구약성경에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만 적용된 아멘과 같은 단어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서 “&rea;:아레크”(인내하는)분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요엘 2:13)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기에 급급하시면 우리는 벌써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시는 것은 급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은 더딘 분이십니다. ’10년 안에 10억 벌기’ 그런 책이 있습니다. 서점에서 들여다 보았는데 그런 식으로 보자 되는 사람들의 특징을 적어놓았습니다. 부자 십계명중에 남에게 줄 돈은 최대한 늦게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을 돈은 최대한 빨리 받아내라는 것입니다. 뭐 그렇게 하면 부자는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축복은 빨리 주시고, 벌은 미루십니다. 본문의 ‘인내’는 ‘&r’a:아라크’(연기하다, 미루다)는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성품 때문에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 같은 사람도, 아론 같은 사람도 대 제사장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용서가 은혜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누구나 감춰지기를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와 아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든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묻지도 말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집안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기독교는 화목케 하는 종교입니다. 잘못을 용서해 주는 종교입니다. 다 같이 사는 종교입니다. 모두가 다 살 수 있는 길을 주님은 열어 주셨습니다. 주 안에서 모두에게 길이 있습니다. 세상을 보면 길이 없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길이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용서의 주님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 은혜를 받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