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로를 예비하시는 하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사 62:10).

지난 3일 설날에 혼자 사무실에 나왔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서 있는데 왼쪽 엘리베이터 안쪽에서 물소리가 폭포수처럼 들리는 겁니다.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보았는데 물은 엘리베이터 뒤쪽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지하실이든 엘리베이터 전기든 문제가 크게 일어날 것 같았습니다. 걱정이 되어서 관리실에 전화를 하니까 아무도 받지 않습니다. 한참을 돌아서 결국 집사람에게 연락을 했는데 겨우 한 분을 찾아서 연락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래도 다행히 금방 달려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저에게 어디가 물이 세냐고 다짜고짜 따지는 겁니다. 마치 제가 물을 터트려 놓은 사람처럼 취급하는 겁니다. 명절날 잘 쉬고 있는데 왜 짜증나게 불러내었느냐는 식입니다. 누구든 명절날 편안히 쉬고 싶을 것입니다.
어쩌면 요즘 시대에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태도를 예수님께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잘 살고 있는데 “너희는 죄인이다. 회개하라” 하시면서 못살게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하실 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는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27-30)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등한히 하거나 귀찮아하시지 아니하시기를 바랍니다.

가끔 등산을 하다가 사람이 실종되어 사망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산에서 실종되는 경우는 방향을 잃었을 경우 실종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문 산악인들은 나침반을 가지고 다닙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방향을 잃기 때문에 실종되는 것입니다. 길을 잃었을 때는 큰길로 나가면 됩니다. 대로를 찾으면 길을 잃어버릴 위험이 없습니다. 제가 서울 건대입구로 처음 이사를 했을 때 자동차로 외출을 했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영등포 쪽에서만 10년을 살다가 건대입구 쪽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쪽은 길을 모릅니다. 그 때는 네비게이션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이사가고 우리 집을 못 찾아가는 겁니다. 한심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했습니다. 집을 못찾겠는 겁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뒤에서 차들은 계속 따라오고 정차도 못합니다. 그래서 계속 가다보니까 망우리까지 갔던 적이 있습니다. 비 오는 밤길에 꼭 뭐에 홀린 사람처럼 밤새도록 헤매다가 자정이 넘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지도를 펴놓고 자세히 보았습니다. 우리집 찾아오는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나 보았습니다. 방법이 보였습니다. 한강 다리 중에 영동대교가 있는데 영동대교는 강북이나 강남이나 어느 쪽에서 와도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서울에서 길을 잃으면 무조건 한강 쪽으로 갑니다. 그러면 올림픽대로든 강변도로든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한강변의 대로를 찾으면 집을 찾아갑니다. 대로는 길을 잃어버릴 위험이 없습니다.

대로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중 ‘데레크’(derek)는 사람에게 밟혀서 고르게 된 자연 길을 말하고 ‘메실라’(mesillah)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길을 말합니다(민 20:19)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5). 이 시온의 대로가 ‘메실라’입니다. 사람이 다녀서 난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닦으신 길입니다. 시온은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대로가 있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고 싶은 사람은, 대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기 싫은 사람은, 억지로 나오는 사람은 대로가 아닙니다. 시온의 대로를 닦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지만 그 이후에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대비하여 사막에 대로를 만들 것을 명하셨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사 62:10).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올 대로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한 것일 뿐 아니라 반드시 돌아오게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외에도 이사야에서 두 번 더 나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9)와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사 49:11)입니다. 이 길은 예비된 길이고 반드시 길을 내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반드시 돌아올 길을 하나님은 닦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긍휼과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본문에서 주는 말씀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로 있습니다. 아무 능력이 없고 자주권도 없습니다. 비참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현실만 보면 안됩니다.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대로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바로의 신하 보디발이 그를 샀습니다(창 39:1). 그런데 요셉이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입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3)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 맡겼습니다. 돈 불려주고 재산 불려주는데 안 맡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투자만 하면 주식이 올라가면 다 맡기는 겁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합니다. 요셉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나갈 때 붙잡은 옷을 가지고 요셉이 강간하려 했다고 뒤집어씌웁니다. 요셉은 또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요셉의 일생은 참 한심합니다. 아마 보통 사람 같으면 죽고싶을 것입니다. 생을 포기하고 자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감옥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 39:22-23)고 했습니다. 요셉은 현실을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늘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 원수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라고 했습니다. 한가지 또 기억합시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입니다. 본문에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입니다. 나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모였습니까? 왜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합니까?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기 위함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한 말은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볼 때 빈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빈들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예수가 계신 곳은 빈들이 아닙니다. 세상만 보았습니다. 환경만 보았습니다. 예수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보시면 길이 나옵니다.

평탄케 해야 합니다(돌을 제하라).
본문에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돌을 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아오는 백성들이 걷게 될 길입니다. 마치 왕이 가는 길에 카페트를 깔 듯이 평탄한 길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지친 영혼을 위하여 길을 평탄케 해야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사명이 큽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싸우고 경쟁하다가 하나님을 찾아,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교회에 왔는데 교회에서까지 시끄럽고 또 경쟁하고 싸우면 그들은 어디 가서 쉽니까? 우리교회는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한 교회를 만듭시다. 이 세상에서 지친 사람들의 영혼의 쉼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돌을 제하라”(lq’s:싸칼)은 돌 팔매질을 뜻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것은 성령 훼방 죄 하고 같은 것입니다.
병중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암입니다. 암은 안 걸리는 데가 없답니다. 손톱하고 머리카락 빼고는 다 걸린답니다. 어떤 분은 혀에도 걸립니다. 그런데 발병 원인을 종합해 보면
첫째 유전적인 원인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가 암으로 돌아가신 분들은 신경을 써야 합니다.
둘째 식생활 습관에 문제가 있습니다. 지나치게 짜게 먹는다든가 담배를 피운 다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자로 癌(종기암)자를 보면 입구 자 아래 뫼산입니다. 산처럼 먹어대니까 암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기쁘게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만사에 불만이 많은 사람, 지나치게 걱정 근심을 많이 하는 사람, 긍정적이지 못한 사람에게 많이 걸린답니다.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은 못을 박는 사람입니다. 암이 걸리게 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죽이는 것입니다. 칼로 찔러서만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왜 그렇게 용서하라고 하셨습니까? 원한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한자로 相谈(상담)상담할 때의 담자를 보면 말씀언에 불 화자 두 개입니다. 말씀으로 불을 꺼주는 것입니다. 화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화를 풀어주십니다. 졸을 제하여 주셨습니다.

성문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구약 시대의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살 때 경고와 경종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고는 귀에는 듣기 싫었겠지만 자기 백성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절절한 애정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백성에게 포로생활을 하게 하시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메시지는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치유와 회복, 구원의 주최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성문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으로 올 때에 그 길을 닦고 그들을 환영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성문으로 나아오는 자에게 박수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박수소리를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떠난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전을 찾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
창세기에 보면 사람이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다가 죄를 지었습니다. 사실 사람은 하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이유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치유하심과 회복하심의 본을 받으려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만 빼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힘을 가지고 자신을 위해, 천하만민이 다 내 발 앞에 굴복시키려고 그 힘을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탄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 결과 사람은 결국 죄를 지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예수님께 축복을 받으려고 성령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 자신만을 위하여가 아니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드시기 바랍니다. 만민을 위하여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9:6에서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는데 우리 한글 성경[개역개정]에서는 “…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오실 메시야의 이름이 기묘자 모사라는 것입니다. ‘모사’라는 단어는 썩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도대체 이 두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고어체로 기록된 KJV(1995년)는 “Wonderful Advisor” 조언자 또는 ‘위대한 조언자’라고 번역했습니다. NIV(1978년)는 ”Wonderful Counselor” ‘위대한 상담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4:16절에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혜사保惠师’(지킬보 은혜혜 스승사) 한자로 은혜를 지켜주시는 스승이라는 수준 높은 단어를 만나게 되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는 ‘쉬운성경’도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원문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동사 “파라칼레오-(parakaleo, 부른다. 초청한다. 위로한다. 격려한다”에서 온 형용사입니다. 명사로는 ‘변호자, 탄원자, 중보자’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 “다른 협조자”라고 번역했고, ‘현대인의성경’에서 “다른 보호자” ‘새 성경’에서 “다른 보호자”로 번역했습니다. NIV에서는 “another Counselor” ‘다른 상담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종합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신 위대한 새로운 상담자 또는 위로자이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 4:1)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참된 위로를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민족을 나누지 아니하십니다. 친 유대적으로 오신 메시야가 아닙니다. 구약과는 다른 상담자 이십니다. 사마리아에서 여인도 만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유대 지도자들은 그냥 지나쳤지만 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상처를 싸매고 위로했습니다. 아픔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 2:25)고 헸습니다. 시므온은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 2:30-32)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대로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자의 위로자가 되십니다. 만민을 위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본문의 “기치를 들라”(어근 !Wr 룸)는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