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복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1-3)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어버린 동전, 잃은 양, 집나간 아들의 비유가 한꺼번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중간에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아버지의 한없는 기다리심과 은혜에 있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아버지는 막바로 잔치로 들어갑니다.
레바논의 한 선교사가 예수님 당시의 문화와 아주 비슷한 문화 속에 살면서 아직 한 번도 이 비유를 들어본 적이 없는 시골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준 뒤 반응을 물었습니다.
두 가지가 그들의 눈에 특이해 보였습니다. 첫째, 서둘러 유산을 요구한다는 것은 곧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하는 것인데 이러한 요구를 참거나 응하는 것은 이들을 상상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둘째, 잃은 지 오랜 아들을 맞으러 아버지가 달려나갔다는 대목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중동에서는 권위 있는 아버지가 품위 있게 천천히 걸어가야지 결코 뛰는 법이 없답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아버지가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설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슬픔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고 말합니다.
종착지가 가까워 옴에 따라 당신은 만나게 될 사람 때문에 마음속에서 흥분을 일으킨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왜 그런 흥분이 일어납니까?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다가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점점 더 설렘이 있고 슬프지 않은 것입니다. 종착지가 가까워질수록 설레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설렘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 설렘 때문에 모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을 미리 함께 나누기 위해서 오늘 모인 줄로 믿습니다.

사람도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 때 설렘이 있는 것처럼 영화도 음악도 그렇습니다. 책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나 문자도 그렇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를 꼽으라면 ‘은혜’입니다. 은혜 없이는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인 것도 은혜요, 오늘 우리가 숨쉬고 있다는 것도 은혜입니다. 물 한 방울 속에 해의 모습이 숨어 있듯이 복음의 진수가 은혜라는 단어에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리처드 니버(N. Richard Niebuhr)는 말하기를 “기독교의 위대한 개혁은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새로 찾아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을 전혀 다르게 볼 때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도록 세움을 받은 곳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이 은혜가 없다면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니버의 말대로 새로운 것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를 다시 보고 다시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스티븐 브라운(Stephen Brown)은 그의 책에서 “수의사는 개만 보고도 처음 보는 개 주인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은 누구신가?』책의 추천서를 받기 위해 전 총신대 총장이셨던 김의원 목사님을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총장님은 총신대를 그만두기 직전에 박사학위를 주기 위해 몇 분의 학생을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그분들은 지금 다 목사님이 되신 분들입니다. 저에게 총장님은 교회를 어떻게 하고 있냐고 하셔서 있는 그대로 우리교회 모습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총장님께서 저에게 ‘나보나 났네!’ 그러셨습니다. 물론 총장님이 겸손하게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총장님이 말씀하신 뜻의 요지는 있습니다. 학교 교육만으로 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학교보다는 교회가 사람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좀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교회는 다른 곳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은혜’ 때문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만이 줄 수 있는 것이 ‘은혜’입니다.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는 말하기를 “웬만한 일에는 세상도 교회 못지 않거나 교회보다 낫다. 집을 지어주고 가난한 자를 먹여 주고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일은 굳이 교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못하는 일이 하나 있다. 세상은 은혜를 베풀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절대적인 사명을 말한 것입니다. 교회에 은혜가 없다면 성도에게 은혜가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찾을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찾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은혜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세상 것을 다 가져도 해결이 안 되는 인간의 공허함, 영혼의 갈망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근본주의 성장기라는 책에 일본의 어느 선교사 훈련생 동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훈련을 마치고 다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은혜였습니다. 한 때 교회를 떠난 것도 은혜가 없어서였습니다. 다시 돌아온 것도 다른 곳에서 은혜를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모든 문제는 은혜만 받으면 해결됩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도 은혜만 받으면 해결됩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믿음도 떨어지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시험이 오고 기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만 찾아오면 모든 것이 풀립니다.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학교는 은혜를 개구리처럼 해부하려고 하는 곳입니다. ‘은혜’를 개구리처럼 해부할 수는 있으나 그렇게 하는 사이 개구리의 생명은 잃게 됩니다. 은혜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해부하는 것이 아니라, 따지고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설명하기보다는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학교와 교회의 차이입니다. 학교는 설명하려고 하지만 교회는 전달합니다. 사랑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고 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세웠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를 주신 분입니다. 모세가 은혜를 줄 수는 없습니다. 학교는 마치 율법을 가르치는 모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를 주는 곳입니다.

영국에서 열린 비교종교학회에서 세계 각 국의 전문가들이 기독교의 독특성을 찾아 토론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타종교에는 없는 기독교에만 유일한 것을 찾는 것입니다. 먼저 여러 가지 답을 써 놓고 하나씩 지워나갔습니다. 성육신,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한 이야기는 타종교에도 있다. 부활? 사자의 환생 기사 역시 타종교에도 있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것과 다르긴 하지만 타종교에도 있었습니다. 토론이 길어지고 있는데 루이스가 방을 잘못 찾아왔습니다. “이 방의 토론의 주제가 뭡니까?” 루이스의 질문에 동료들이 전 세계 종교 중 기독교만이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찾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루이스가 “그거야 쉽죠. 은혜 아닙니까?” 얼마 동안 토론은 계속되었지만 결론은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이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찾아온다는 개념은 사람의 본성과는 상반되는 것 같습니다. 불교의 고행, 힌두교의 업보, 유대교의 언약, 이슬람교의 법전 모두가 노력으로 인정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최고의 축복인 구원을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무조건 적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어진다는 것은 기독교뿐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사상은 돈이 있기 때문에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업을 하기 때문에 돈이 생긴다는 논리입니다. ‘사회 정의 구현’은 기독교가 아니라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은혜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개인적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모를 때에는 하나님은 적어도 이 정도 일은 해야, 이 정도의 인물은 되어야 기뻐하실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회에서 정의 구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고통과 아픔이 끝났기 때문도 아니라 한 영혼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위대한 종교지도자들을 만나시지 않았습니다. 외관상 훌륭한 종교 지도자들을 멀리 하시고 오히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눅 18:13)하고 부르짖는 평범한 죄인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은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들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계산법은 세상과 다른 것입니다. 두렙돈 헌금한 과부를 보고 모든 사람이 한 헌금보다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따지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경제적인 논리의 자대로 우리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일은 양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양떼는 잠시 두고 잃은 양 한 마리 때문에 가십니다. 천국의 의인 99명과 이 땅의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비교하셨습니다. 경제적인 논리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진정한 가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많은 헌금도 위대한 기도문도 훌륭한 사역을 하지 않아도 가능합니다. 회개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마지막으로 구원받은 강도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회심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강도가 앞으로 십자가에서 벗어나 성경 공부를 할 것도 아니고, 회당이나 교회에 나갈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피해를 입힌 사람들을 찾아가 용서를 빌 것도 아닙니다. 앞으로 착하게 살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 헌금할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예수여 …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43) 라고 말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천국은 보장받았습니다. 만일 은혜를 뺀다면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탕자의 아버지처럼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을 썼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간단하게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사랑하시는 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모차르트의 미사곡(Requiem)에서 놀라운 노랫말이 나옵니다. “은혜의 예수여, 주께서 이 땅에 오심이 바로 저 때문임을 기억해 주소서.” 이 기도와 같은 가사가 바로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