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에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마 19:19)

저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저도 알고 보면 참 외롭고 쓸쓸한 사람입니다. 부모님 다 돌아가신 자녀 치고 효자 아닌 자식 없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치 나라 떠나면 다 애국자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봅니다. 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저 자신이 얼마나 부모님께 좋은 자식이었는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저 같은 자식도 참 드물겠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렸을 때, 청소년 시기에 너무 많이 부모님 속을 썩였습니다. 남들은 한번만 다쳐도 부모님이 가슴아픈 것인데 저는 팔을 얼마나 많이 다쳤는지 모릅니다. 또 그것을 미끼삼아 서울에 치료하려 올 때면 늘 손에 뭘 하나 가지고 가야했습니다. 그 가난했던 시절에 참 부모님께 못할 짓을 한 것입니다.
중학생 때는 2번 이상 가출을 했고요, 학교에서는 정학을 받아 부모님 학교에 불려 가시게 했고요, 자살 소동을 몇 번 일으켰는지 모릅니다.
처음에 예수 믿고도 부활이 안 믿어진다고 제가 죽으려고 했다니까요? 그 바람에 청량리 정신병원에 갔다가 왔지만요. 제가 다 말로 못합니다. 남들은 한가지 하기도 힘든데 저는 안 해본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불효자식 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오늘 설교를 해야하니 이 또한 얼마나 어렵습니까?
저는 설교에 이런 표현 잘 안 쓰려고 하지만 여러분 저를 용서하시는 마음으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명령과 사람에게 대한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에게 대한 명령 중 그 첫 번째가 4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본문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그 다음에 나오는 5번째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출 20:13)입니다. 순서상 하나님은 부모 공경을 앞에다 두었습니다.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16)고 했습니다. 사람이 지켜야할 제일 근본이 무엇이냐 그것이 부모공경입니다.
그 절정의 말씀이 신 21:18-21에 나옵니다.
“18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19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20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신 21:18-21) 여기에는 용서와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만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사람 취급 안 하십니다.

예수님도 제일 중요한 계명으로
본문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마 19:19)고 하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가 첫 번째입니다. 이웃은 그 다음입니다.
바울도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고 했습니다.

네 번째 계명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의 “공경하라”(db’K;:카바드)는 ‘풍부하다, 심하다, 많다 또는 무겁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창 13:2)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출 4:10)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출 12:38) 라고 했는데 여기서 “풍부, 잘, 심히 많은”은 모두 ‘카바드’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어의 공경이라는 말은 ‘충분히, 충족히’ 라는 말로 옮길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이제 되었다 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뜻을 잘 표현한 구절이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 23:25)입니다. “즐겁게”(jm’v;:싸마흐)는 “쾌할 하게 하다”로 동사입니다.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된 곳은 “그의 성호를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마다 마음이 즐거울지로다”(대상 16:10) “즐거울지로다”에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시 21:1)에서 “즐거워하리이다”입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뒤에서 사용된 “기쁘게 하라”(lyGi:길)은 맴돌다, 기뻐하다, 굽실거리며, 두려워하다, 즐거워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경에 모두 본문을 포함해서 5번나옵니다(대상 16:31, 시 96:11, 사 35:1, 2). 그런데 본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님의 통치와 창조를 기뻐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모든 나라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할지로다”(대상 16:31)라고 했습니다.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을 하늘이 기뻐하듯이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양주동씨가 작곡한 ‘어머니 마음’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라는 말입니다.
그 만큼 어머님은 마음은 하나님 다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네 번째 계명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의 “공경하라”(db’K;:카바드)로 뒤 돌아가 봅니다. 공경(카바드:충분히)과 신약의 헬리어와 대비할 수 있는 단어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헬라어의 ‘알라’는 ‘오직, 유일하다’는 뜻이니까 ‘많다’는 의미의 카바드와는 조금 다릅니다.
그 다음에 생각한 단어인데 ‘판타’(모든)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제일 많이 사용했습니다. 사랑이 있기 전에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2-3)에 사용했습니다. 결국 우리의 모든 것(판타)은 사랑 안에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15가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는 이것을 다 설명할 마음은 없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 하나만 말할께요. 무엇일까요?
5절에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입니다. 왜 이것을 좋아하냐 구요? 사실 다른 것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제일 쉬운 것이 아닌가 생각해서입니다. 어렵고 힘든 것부터 할 생각하지 마시고 작다고 생각되는 것부터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큰 것은 부담스럽잖아요.
지난 금요일 어느 선교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가다가 작은 책하나를 사서 읽으며 갔습니다. 그 책을 회의하는 중에 제가 자리를 옮기면서 다른 곳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잠시 후 다른 목사님이 늦게 들어오셨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입니다. 그런데 제가 사온 책을 당신의 파일 속에 넣으신 것입니다. 아마 잘 확인하지 않으시고 나누어주는 것인 줄 아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책이 내 것이라고 말을 못하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 목사님께 조금이라도 무례하게 생각될까 해서입니다. 사실 그 목사님께 제가 더 좋은 것으로 선물을 해드려도 되는 분이거든요.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은사나 기능보다 인격과 품성을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인격과 품성으로 하는 것은 많은 능력과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많은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보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인터넷이다 아이패드다 하면서 점점 더 과학만능주의 경제 제일주의로 흘러갑니다. 육체적으로는 잘 살게될지 모르지만 영혼은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기본이 지켜지질 않고 있습니다.
미국은 1620년 청교도들이 신앙에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미 대륙을 발견하여 개척 정신 속에 유일신 하나님을 믿으며 철저한 성경공부와 신앙 훈련 속에서 윤리적 실천 규범을 바탕으로 세워졌습니다. 미국이 세워진 것은 신앙과 성경 속에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960년 캐네디 대통령은 당시에 학교에서 성경공부와 채플시간을 법으로 금지시켜 버렸습니다. 그 후 미국은 세속주의의 길을 걸었습니다. 수많은 문제와 범죄 마약 등 25년 동안 싸웠습니다. 그리고 지난 1984년 7월 25일 레이건 대통령 당시에 다시 법을 만들어 학교에서 성경과 채플시간을 복원 시켰습니다. 과거에 미국의 교육정책은 젊은이들이 성경적 교훈을 모른다면 우리 후손들에게 아무것도 물려 줄 것이 없다고 하면서 교육기간을 통해 요리문답을 교재로 하여 신앙과 윤리교육을 학교에서 실시해 왔었습니다.

1637년 사망한 미스터 존 하버드는 자기 재산을 다 털어 성경학교를 세워 젊은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 학교가 오늘의 하버드대학교입니다.
존 하버드의 교육이념과 삶의 주된 목적은, 요한복음 17장 3절이었습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1941년 미국 의회에서 정식으로 요리문답이 교과서 교재로 채택되어 국민교육의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은 성경을 기본지식으로 살 때 충효사상과 도덕질서는 물론 가정의 화평을 이루고 살게 됩니다. 막스레퍼트 교수는 “위대한 성경에 무지하면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장님과 함께 어두운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사회가 혼탁하게 된 큰 이유는 청교도적 신앙을 잃어버리고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철학의 소산인 자연신론을 따르면서 자유신학 사상이 신앙의 보류인 하버드와 예일대학을 잠식 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공경’을 버린 사회는 삭막한 사회입니다. 근대 사회는 경쟁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공경하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은 사람의 근본 중에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버리면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라도 버리고, 나도 버리고, 하나님도 버리는 행위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모든 선의 시작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여 하나님께도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