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요즘 영국은 그야말로 박지성(30) 센세이션입니다.
맨유 팬들이 환호하고 있습니다. 박지성이 지난 9일 첼시전에서 보여준 기량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지성은 주심이 경기 시작 휘슬을 분지 35초만에 신예 하비에르 에르난데스에게 깜짝 킬패스를 연결, 선취골을 만들어냈습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의 새 역사를 쓸 맨유의 19번 째 리그 우승에 9부 능선을 넘게 한 귀중한 도움이었습니다.
맨유 팬들은 골을 넣은 에르난데스와 네마냐 비디치보다 박지성이 첼시전에서 가장 돋보였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습니다. 팬들은 박지성 놓고 재미난 토론도 펼쳐지고 있습니다. manutd789란 아이디를 쓰는 팬은 구단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박지성은 인간인가’(Is Park Ji Sung a Human?)이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많은 팬들이 댓글로 박지성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한 팬(Michael Stokes)은 ‘박지성은 놀라움 그 자체다. 첼시 선수들에게 지속적인 압박을 가했다’고 했습니다. 다른 팬(IamConnor17)은 ‘박지성은 7개의 폐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며 90분 내내 쉼 없이 뛰는 박지성의 활동량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맹활약의 원동력을 궁금해하는 팬들도 있었습니다. 한 팬(Dirty Harry)은 ‘박지성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는 인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습니다. manutd789 팬은 ‘박지성은 종종 끓인 개구리즙을 마시곤 한다’고 했습니다. 별의 별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박지성 선수는 평발입니다. 운동선수로는 큰 약점인 평발을 극복하고 쉴 세 없이 열심히 뛰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열심히 하니까 결과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요즘 한나라당 보니까 지난번 선거의 패배를 딛고 당을 추수리느라 바쁜데 중요한 것은 ‘인물’을 찾고 있습니다. 한나라당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인물’을 찾고 계십니다.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위하여, 어떤 일을 위하여 시간과 정열과 물질을 쏟으며 살아갑니다. 아내는 남편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자기가 믿던 남편이 아니면 사람은 절망합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늘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철학적인, 원론적인 질문 같지만 왜 살아갑니까? 제일 좋은 길은, 제일 아름다운 길은, 제일 능력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도구’가 무엇입니까? 도구는 쓰는 사람에게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도구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고자 할 때, 하나님의 어떤 부족함을 채우려고 우리를 쓰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능력이 부족하여 지혜가 부족하여 우리를 쓰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쓰셨을 때, 모세를 쓰셨을 때, 제자들을 쓰셨을 때 무슨 조언을 구하거나 무엇을 요청한 일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능력이 아니라 모세의 능력이 아니라 다윗의 능력이 아니라 다니엘의 능력이 아니라 제자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사 44: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제자들에게 가라고 명령하실 때는 이 말씀 속에 무엇이 내포되어 있습니까? ‘약속’입니다. 내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약속을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도구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 모세는 자기의 능력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릅니까? 모세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와 사정과 무능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주어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면 일을 못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무능함이요 하나님은 능력이십니다. 사탄은 항상 나를 보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나를 보면 힘이 빠지고 나의 약함과 한계를 보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보게 만드십니다. 부어주실 능력을 생각하게 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하셨습니다. 능력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모든 운동경기의 요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들이지 말고 힘을 빼고 하라는 것입니다. 힘을 빼고 공을 차고, 치고, 넣어야 합니다. 그런데 힘이 너무 들어가 있으면 오히려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붓글씨 잘 쓰는 비결도 알고 보면 같습니다. 명필을 쓰는 사람일수록 손에 힘을 빼고 씁니다. 오히려 너무 잘 쓰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잘 하려고 하지말고 하나님께 내어 맡기기를 바랍니다.
다윗 동산에 놀러가서 택민이가 큰곰을 보고 목사님 안아줘, 무서워하면서 그냥 안깁니다. 또 힘이 드니까 목사님 힘들어 안아줘 하면서 안깁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이와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힘들고 지치고 쓰러질 때 내가 다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그분에게 택민이처럼 무서워요, 힘들어요 하면서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것은 나의 논리로 자꾸만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설득 당해야지 내가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들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삼상 15:11)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설득하여 왕으로 세운 사람이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설득을 당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언제나 사람의 생각은 실패로 끝납니다.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도구’는 누가 사용하느냐 따라 달라집니다.
사탄이 사용하면 나는 사탄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당장 무슨 요술 방망이를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방향이 바뀝니다. 사탄에게로 가던 것이 하나님께로 행합니다. 나만 보았고 세상만 보았는데 하나님을 봅니다. 이전까지는 내 기쁨을 위해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거룩한 찬양을 드리는 입술로 변하는 겁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손이 남을 돕는 손으로 변하는 겁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비록 작지만 비록 보잘것없지만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오병이어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지속적인 쓰임을 받으려면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단 일회성으로 마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까지 쓰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삼손 같은 사람은 처음에는 나실인으로 소개되면서 상당히 비중 있게 소개됩니다. 아마도 예수님 외에는 출생에 대해서 그처럼 많이 소개된 사람은 없습니다. 사무엘보다 더 많이 출생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이 빨리 끝납니다. 그러나 바울 같은 사람은 마지막이 깁니다. 다윗은 소년 때에 부름을 받아서 평생 하나님께 헌신합니다. 목자일 때나 왕일 때에도 변치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성경 보다보면 언 듯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 하나가 나타납니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출 4:24)입니다. 지금까지는 “모세야! 모세야!”하시면서 그렇게 다정하시게 모세를 부르시던 하나님이 갑자기 돌변하신 것입니다. ‘만나사’라는 단어가 ‘파가쉬’인데 이 뜻은 거칠게 접촉하다는 뜻입니다. 적대적인 관계에서 만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잠 17:12) 여기에 ‘만나지 말 것’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잠언서 기자가 말하는 것은 미련한 자 만나는 것은 이렇게 위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호적인 만남은 ‘카라’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이런 행동에 대하여 그 대답은 다음 성경구절에서 나옵니다.
“25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출 4:25-26). 할례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생후 8일이 훨씬 지난 아들들을 할례를 행하지 않고 데리고 다녔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 17:10). 모세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소홀히 여긴 것은 그의 이방인 부인 십보라의 영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죽게 생겼으니까 십보라가 자진해서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사실 이 사건 후에 십보라는 아들들을 데리고 미디안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많은 시간이 지나서 남편과 재회합니다(출 18:2).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유의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절치 못하다는 핑계를 대었지만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는 사실상 모세를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세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문제없이 잘 진행되어 가던 하나님과 모세의 사역에 갑자기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하는 이 엄청난 일을 우리는 대하면서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사용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역에 아무 문제없이 잘 진행되는 것 같을 때에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 없는지 점검해 나가야 합니다.
본문의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본문의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말합니다.
한가지 묻겠습니다. 악인이 형통합니까 안 합니까?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잠 24:1)
우리는 무조건 세상 사람 보기에 형통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세상 사람이 보기에 미련해 보이나 하나님께 형통하는 삶, 하나님께 쓰임 받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윗동산에서 곰을 보았습니다. 장로님이 곰을 사육하시는데 돌아오기 전에 곰 새끼를 우리에서 꺼내어 밖에 다니게 했습니다. 그런데 곰 한 마리가 쓰레기 통해서 뭘 찾아 먹으려고 쓰레기통이 구멍이 동그란데 그곳에 머리를 쳐 박고 계속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아예 쓰레기통을 뒤집어쓰고 있더라구요. 그리고 우리로 들이기 위해서 과자 한 개씩 놓아주니까 그것을 먹으면서 우리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더라구요. 곰은 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곰처럼 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쓰레기통이나 뒤지다가, 저 먹을 것이나 탐내다가 세상을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적당한 타협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부족함은 문제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쓰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믿음을 방해하는 사탄의 제안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26 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27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28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출 8:25-28)

출애굽의 목적은 하나님께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함입니다(출 5:1, 3, 8, 17).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애굽의 삶이 단순히 고생스러워서 그것을 탈출시키고자 함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께 축복 받는 데만 머물러 있다면 축복 받고 예배를 떠난 유럽의 교회들처럼 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신앙의 목적이 축복만이 아니라 예배에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려고 할 때 바로는 집요하게 모세를 통해서 설득합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탄은 같은 말을 합니다. 사실 사탄의 말은 믿을 것도 못되고 그렇게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일시적으로 방해하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잘 지키려면 이러한 사탄의 속임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첫 번째 제안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출 8:25)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우리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예수를 믿으라! 그러나 세상에서 굳이 떠날 필요가 있겠느냐? “네가 좋아하던 일을 계속 하면서 믿으라!”고 말합니다. “제사도 그냥 지내면서 믿어라!”고 합니다.
이 땅에서 믿으면 안되냐는 것입니다. 뭐라 해야 합니까? “안 된다 나는 가야한다”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의 고행을 떠납니다. 불 신앙의 고향을 떠납니다. 떠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떠나시기를 바랍니다. 왜 떠나야 합니까?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떠나야 합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중심은 곧 하나님 중심이요, 예배 중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중심으로 예배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복 주시지 않겠습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두 번째 제안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출 8:28) 아주 너그럽고 인심을 써 주는 것처럼 말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좋다 그러나 너무 믿지는 말라. 지나치게 새벽기도까지는 가지 말라. 적당히 믿어라” 그런 말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 하십니까? ‘전심’입니다. 모든 마음입니다.
다윗은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시 119:10)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적당히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온전히 입니다. 적당히 구원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이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엄격합니다. 미지근하면 토해 버리십니다.

세 번째 제안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출 10:11) 너만 믿으면 되었지 아내와 자녀는 왜 데리고 가려고 하느냐 이겁니다. 사탄은 가정을 파탄시킵니다. 제 생각에는 정말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가족이 떨어져 지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기러기 하기 마세요. 얼마나 외롭습니까? 가족이 무엇입니까? 사탄은 지금도 말합니다. “너희 자녀는 좋은 학교 가야한다.” 그 말은 맡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좋은 학교 가면 뭐 합니까? 사탄이 보내주고 사탄이 키워 주는 것 아닙니다. 그렇다 해도 사탄에게 주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사역하시는 것에서 의문점을 갖는 것 중의 하나가 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는가 하는 것입니다.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혼자 다 하시면 되지 왜 굳이 나를 부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하나님)와 아들(예수) 자녀(우리들-성령)가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네 번째 제안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출 10:24)
사탄이 마지막까지 유혹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래 믿어라. 어린아이까지 다 데리고 가라. 그러나 돈까지 다 바칠 필요는 없다” 이것이 사탄의 소리입니다. 결국 마지막 유혹은 자기 헌신 없이, 물질의 헌신 없이 입으로만 헌신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기 제일 쉬운 것이 물질입니다. 물질로 헌신할 수 없는 사람은 몸으로 헌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아무 일도 안 하시고 이런 요구를 하신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믿는다면 오늘날 우리가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헌금 없이 예배드리겠다는 것은 마치 제물 없이 제사 드리겠다는 것하고 같은 이치입니다. 제물이 없으면 제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감사 있으면 반드시 감사의 헌금이 있는 겁니다. 입으로만 예배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다 가지고 가야 합니다. 양과 소도 다 가지고 가야 합니다.

요즘 글로벌 정보기술(IT)업계는 “졸면 죽는다”는 신종균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사장의 표현처럼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올 초에 스마트폰용으로 윈도우 7을 탑재하여 시장을 공략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아이폰과 구글로 양강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이크로소프트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마이크로소프트가 무료인터넷전화업체인 스카이프를 전격 인수했는데 이것은 많은 글로벌 경영자들의 머리 속에는 존재하지 않던 변수였습니다. 또한 구글의 운영체제(OS)통합과 크롬 노트북 출시 또한 전 세계 전자업체들의 판도변화에 중요한 요인들입니다.
세상의 경제적인 여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영적인 문제도 비상체제입니다. 스마트폰이 가져다준 문화가 무엇입니까? 즐기는 문화, 개인 문화를 가속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이런 사회가 우리의 심성을 망가트리고 있습니다. 지켜 내야 합니다. 영혼을 보호해야 합니다.

OECD국가 중에서 청소년 자살율이 제일 높은 나라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뉴질랜드입니다(10만 명당 19.5) . 그 다음이 아일랜드, 핀란드, 폴란드, 캐나다 순입니다.
상위에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선진국입니다. 세계최고의 복지국가입니다. 청소년들이 자기 정체감을 잃고 있습니다. 목적이 없습니다. 삶이 무의미합니다. 그래서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일이 있습니다. 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사탄의 그럴듯한 제안을 끊어버릴 때 온전히 하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사탄의 제안은 언제나 우리의 귀를 솔깃하게 합니다. 그럴듯한 제언을 합니다.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는, 시험을 받는 요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교만입니다. 하나는 욕심입니다. 옛 성인들도 하나같이 무를 강조했습니다.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소유하고 있되 교만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사람의 병폐가 무엇입니까? 잘못된 유교문화로 생긴 교만 아닙니까? 심지어는 신앙도 그 교만 위에 세워지는 경우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서울 강남에 있는 한 교회에서 장로님이 교회주변에 나무를 갖다 심었습니다. 직접 나무를 심으시니까 작업복 차림으로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러다 삽 자루가 길가에 조금 내려가 있었습니다. 그 길을 들어서던 그 교회 집사님이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시더니 장로님을 째려보면서 막 노동하는 사람 취급을 하면서 뭐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때 저 쪽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 성도님이 장로님이신 줄 알고 ‘장로님’ 이라고 큰 소리로 아무 이유 없이 불렀습니다. 그 때서야 이 집사님은 장로님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장로님이 이 일대의 5000평이 넘는 땅을 가지고 계시고 대기업회장님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그런 이유를 떠나서도 삽 한 자루 때문에 교회에 오시다 그렇게 신경질 내고 하시면 안되잖아요. 막노동하시는 분이면 어떻습니까? 돈이 없는 분이면 어떻습니까? 무슨 문제가 됩니까? 내려서 삽 자루 치우고 가면 되잖아요. 겸손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마음의 평안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5)고 했습니다.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 4:2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막 4:19)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욕심을 버리고 사탄의 시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고 말합니다. 모세가 자기 생각으로 바로에게 나아간 것이 아닙니다. 자기 능력을 바로에게 보여준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출 9:29).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벗어나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