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믹담과 토브

시편 16편의 제목을 “다윗의 믹담”이라고 했습니다. 
“믹담”은…. [미크탐]이란 단어로 “조각, 새김”을 뜻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말이 “조각한 어떤 것 곧 광석, 금”을 뜻하는 [케템]이란 단어에서 왔다고 하여 “믹담”을 「황금의 시」로 “다윗의 걸작품”으로 보고 있습니다. “믹담”이란 제목이 붙은 시가 시편 16, 56~60편의 6편입니다. 또 한 편에서는 이 “믹담”이란 말이 “덮다”를 뜻하는 외래어로「속죄의 시」라 하기도 합니다. 

2절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복”은…. [토브]란 단어로 복수로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의 “복” 속에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선하고, 좋고, 아름답고, 잘되고, 기쁘고, 즐겁고, 옳고, 낫고, 보배로운 것”을 말합니다. 처음 사용된 곳은 창세기 1:4절로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복을 주심으로 번영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또 물질적인 복에서 영적인 복으로 복의 개념이 발전되고 있습니다.

표류자와 왕(파스칼의 소품집)

파스칼의 소품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떤 항해사가 항해를 하다가 파선하여 표류하던 중 어떤 섬에 닿게 되었다. 그런데 그 섬의 주민들은 그를 왕으로 모셔 그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 섬을 다스리던 왕이 행방불명되었는데 우연히도 표류자의 인상이 실종된 왕과 비슷한 때문이었다. 표류자는 하루아침에 섬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표류자는 처음 얼마 동안은 어리둥절하고 불안하며 양심의 가책이 되어 자기 신분을 밝히고 왕 자리를 사직하려고 생각도 해보았으나 날이 갈수록 왕 노릇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양심의 소리는 적어졌고 왕 노릇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양심의 소리는 적어졌고 오히려 진짜 왕이 나타날까봐 불안을 느꼈으며, 도리어 섬사람들을 학대하고 혹사하며 전제군주가 되어버렸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

세상에는 문제가 참 많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어떠냐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언젠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벤자민 스타인이라는 사람이, 세상에서 실패하는 8가지 성품의 글을 올린 적이 있다. 

1) 자기 기만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 
2) 비생산적인 사람이라는 거다. 
3) 존경해야할 사람을 존경하지 못하는 사람 
4) 예의 없는 행동, 무례히 행동하는 사람
5)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라고 한다. 
6)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것만 나열하는 사람
7)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다. 
8) 우선순위를 잘 모르는 성품을 가진 사람

벤자민의 지적을 볼 때, 실패자의 공통점은 환경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수도사와 올리브나무

옛날 한 수도사가 기름(oil)이 필요하여 올리브 묘목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여, 이 연약한 뿌리가 마시고 자랄 수 있는 비가 필요하니, 단비를 내려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주께서는 단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 수도사는 또 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나의 나무는 태양이 필요합니다. 주께 기도 드리오니 해를 주시옵소서.” 그러자 검은 구름을 몰아버리고 해가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오! 주님, 이 나무를 단단히 하기 위해서는 서리가 필요합니다”라고 수도사는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작은 나무에는 서리가 앉아 번쩍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웬걸 저녁에는 죽어 버렸습니다.”

그 수도사는 동료 수도사의 방을 찾아가, 그의 이상한 경험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도 역시 작은 나무 한 그루를 심어 키우고 있습니다”고 하면서 그의 동료는 말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잘 자랍니다. 나는 나무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 나무를 만드신 하나님께요. 그는 나 같은 사람보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방법으로도 고정시키지 않습니다. 다만 ‘주여! 이 나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시옵소서. 강풍이든, 햇빛이든, 또한 바람이든, 비든, 서리든 주께서 때를 따라 주시옵소서. 주께서는 이것을 만드셨고, 그리고 잘 아시나이다’라고 기도할 뿐입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이사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사 7:13)

이사야서의 주요 내용은 심판과 구원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이 62번, ‘영광’이 38번,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는 말이 약 27번, ‘남은 자,’라는 말이 13번나옵니다.
예수님은 13번 정도 이사야서를 인용하셨고, 사도행전 4번, 로마서 4번 합하여 21번이 신약성경에서 인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선지자이며, 다른 선지자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인용된 것입니다. (더 보기…)

안식일의 주인

호주 방문했을 때 들은 이야기 인데요.
한국분이 외롭다고 개를 키웠답니다.
그런데 그분이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저녁늦게 들어갔답니다.
그랬더니 주변에서 신고하여 개가 외롭다고 경찰이 와서 개를 데려갔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존재해야 되는데…

1-1) 놀라다.

1-1) 놀라다.
헬라어에 ‘놀라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약 10여가지가 나온다.
이중에 제일 강한 놀람을 표현한다고 보이는 어근 ‘엑시스테미’가 나오는 본문이다.
신약성경에 모두 6번 나오는데 
3번은 예수님께, 2번은 성령이 임할 때, 1번은 바울이 회개하고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반응에 사용되었다.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마 12:23)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막 6:51) 
갈릴리 바다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눅 2:47) 
예수께서 12살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선생들(서기관,바리세인,제사장)과 함께 토론할 때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행 2:7)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행 2:12)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여 방언할 때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행 9:21)
바울이 다메섹에서 즉시 예수를 증거할 때

1-3) 놀라다

세 번째 ‘놀라다’에 해당하는 단어 헬라어 어근 탐베오(qambevw)이다. 탐베오는 “마비시키다, 놀라다, 경악케하다”는 동사이다. 탑베오의 어근 탐보스(qavmbo”)는 말문이 막히다 와 유사한 “마비, 경악”을 뜻하는 ‘남성형 명사’이다.
좀더 자세한 것은 from 2285; TDNT – 3:4,312 에서 확인하실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동사로 다음 두 곳에서 사용되었다.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막 10:24)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설명하실 때 제자들이 놀랐다.

막 10:30-31절에서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말씀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막 10:32) 예수께서 고난 당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 놀랐다.

동일한 단어가 막 1:27절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누가는 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눅 4:36) 모든 사람이 놀라고 탄복했음을 ‘탐보스’란 단어를 명사로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믿음과 의인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합 2:4 절은 멘 앞에 ‘보라!’(히네)가 나온다. 이 단어를 ‘오직’으로 번역한 것이 아닌가 보인다. 그리고 맨 뒤에 어근 ‘하야’ 살게 하다 동사가 이끌고 있다. 사는데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말이다. ‘믿음’으로 번역된 ‘에무나토’는 ‘확고함, 안전, 신실성, 믿음, 안정성, 진실, 참으로’로 번역할 수도 있는 여성형 명사이다. 
원문과 일치하는 단어가 구약 히브리어에 한번 더 사용되었다.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 96:13)에서 “진실하심으로”에 사용되었다. 이로 볼 때 ‘믿음’으로 번역된 ‘에무나토’는 ‘진실’로도 변역 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하박국의 ‘베에무나토’에 ‘오’라는 소유 대명사가 있다.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이를 따라(KJV, RSV, NIV 등) ‘나의 믿음으로’로 번역하였다. 칼빈을 이를 신앙의 성장 과정으로 해석한다. 
바울은 ‘베에무나토’를 ‘에크 피스테오스’로 본문을 번역했다고 보아도 좋다. 본문을 이용하여 이른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 칭의’의 교리를 가르쳤다. 헬라어 역시 맨 뒤에 나오는 ‘살다’에 해당하는 어근 ‘자오’가 기본동사로 본문을 이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살기는 사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합 2:4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바울은 그대로 신약에서 헬라어로 옮겨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오직’ 으로 번역된 것으로 보이는 원문의 ‘호’ 관사와 접속사 ‘데’가 기본 불변사로 나타난다. 변할 수 없는 절대 진리임을 강조한 것이다. 

한편 ‘의인’으로 번역된 ‘디카이오스’(공정한, 흠 없는, 거룩한, 의로운)는 모두 19번 나타난다. 
마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눅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눅 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눅 23: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행 10:22, 롬 1:17, 롬 3:10, 갈 3:11, 딤후 4:8, 히 10:38, 11:4, 벧전 3:18, 4,18, 벧후 2:8, 요일 1:9, 2:29, 3:7, 계 16:5, 22:11)에 나타난다.
복음서 4번, 사도행전 1번, 바울서신 4번, 히브리서 2번, 베드로 3번 요한 5번 사용하였다.
이 단어는 헬라어에서 ‘믿음’의 중심 축을 이루는 단어이다. 반면 구약에서 사용한 ‘에무나토’(진실)은 신약에서 사용한 ‘믿음’의 개념하고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울은 이 부분(진실)을 믿음과 연계시키고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절재된 성경해석

성경을 보고 바로 이해가 되면 별로 해석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고도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해석이 필요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을 해석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절제된 해석이 필요합니다. 확대해석, 과잉해석은 금물입니다. 

조금만 벗어나도 탈선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은 소설이 아니고, 또 저작자가 보이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능력이 많이 나타날 수록 위험요소가 많은 겁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 정치적인 판단, 이데올로기 등이 첨가되면 성경에서 통일교도 나오고 몰몬교도 나오고, 구원파도 나오고, 여호와의 증인 등 헤아릴 수 없는 이단이 나옵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카톨릭에서 성경을 보는 것을 금지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절대 잘못된 판단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염려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해석을 염려했던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