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옷을 입으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6. 아름다운 옷을 입으신 예수님) / 본문 : 슥 3:1-5

“1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슥 3:1-5)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이 미래에 있을 일을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이며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약 520년 전에 스가랴를 통해서 미래에 있을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스가랴가 이 말을 할 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힘겨운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직후여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성전건축이 힘겹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거기다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하여 중단되었던 것을 다시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백성들이 쉽게 따라주지 않자 스가랴가 백성들을 독려하려고 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스가랴를 통해서 560여 년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예언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스가랴가 본 네 번째 환상 부분입니다.
본문 말씀은 사단이 여호수아를 고소하고 이에 대해서 여호와의 사자가 변호하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제사장 여호수아로 나타난 분은 대제사장직을 담당한 분으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의 ‘여호수아’는 헬라어 발음 ‘예수’라는 말과 같은 말이며 구원자를 뜻합니다. 즉 오늘 본문 말씀은 오실 메시야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한 예언의 말씀인 것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 3, 4절에서 옷에 대해서 나옵니다. 오늘 이 옷에 대해서 이해하면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됩니다.
우리는 흔히 “옷이 날개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사람은 옷 입은 것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37:23-24에 보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이 꿈꾼 것을 말하자 시기하여 채색 옷을 벗기고 죽이려고 구덩이에 집어넣은 것이 나옵니다. 이 때 요셉의 옷이 벗겨진 것입니다. 즉 그가 입었던 채색 옷은 그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조선시대 때의 양반 집 자식들은 색동옷을 입었습니다. 한국속담에 “옷은 시집 올 때처럼, 음식은 한가위처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자가 제일 옷을 잘 입었을 때는 시집올 때라는 말입니다. 영국속담에는 “신사를 만드는 것은 옷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내지만 결코 교만하면 안됩니다.

옛날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그의 보좌 옆에 작은 궤 하나를 놓아두고 날마다 한번씩 그 궤를 열어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왕이 그 궤 속에 보화를 감추어두고 날마다 그 보화를 확인하느라고 궤를 열어본다는 소문을 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왕은 신하들을 불러다 놓고 그 궤를 열어 보여주었습니다. 그 속에는 양치기의 옷 한 벌이 있었습니다. 이 왕은 전에 가난한 양치기였었습니다. 왕이 된 다음에도 교만해 지지 않으려고 목동시절에 입었던 옷을 매일 한번씩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매일 과거에 입었던 양치기 옷을 매일 한번 씩 보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9장에는 제사장의 옷에 대해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제사장의 옷을 어떻게 만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옷을 입은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사하는 예식을 행할 때 입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레 10:6)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제사장의 옷을 찢는다는 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되는 금지령이었습니다. 만일 찢는다면 당연히 그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옷은 깨끗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출 19:10)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옷을 빨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 가운데 시내산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구름과 빛을 본 그 날이 성결하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의 옷을 빨 것을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레위기 14, 15장에 보면 하나님은 각종 질병과 관련하여 옷을 빨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즉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면 각종 전염병에서 깨끗케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민족과 유대인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유리 민족은 수시로 옷을 빨고 정결한 상태를 유지해 왔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전염병의 발병원인을 보면 한마디로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집 입구에 언제나 씻을 수 있는 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씻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기 전에도 반드시 손을 씻습니다.
여러분 음식을 먹다가 흘리면 어떻게 합니까? 밥 먹을 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잘 흘리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너는 턱이 빠졌냐?”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잘 넘어지기도 하지만 잘 흘리기도 하고 한마디로 집사람 표현대로 부실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잘 압니다. 음식을 먹다 흘려서 옷을 더럽혀도 깨끗하게 씻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들의 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씻어야하지 않습니까? 음식물이 조금 옷에 묻어도 깨끗하게 씻는 우리들이 어찌 더러운 죄를 씻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저희 누님은 초등학교 6학년 개근했습니다. 저와는 아주 달랐습니다. 저는 팔이 삐어 수시로 학교를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누님이 한번은 신발주머니에 흑이 묻었다고 버리고 온 것이었습니다. 아마 초등학교 1-2학년쯤 되었을 때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일로 어머니는 몹시 화를 내시고 당장 신발주머니를 찾아오라고 호통을 치셔서 누님은 울면서 학교로 신발주머니 찾으러갔습니다. 초등학생의 생각으론 신발주머니에 흙이 묻었으니 더럽다고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레위지파가 입고있는 제사장 옷이나 유다지파가 입고있는 갑옷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신분에 맞는 옷입니다. 문제는 신분의 의미보다는 우리 옷이 깨끗해야 합니다. 국회의원 옷 입고 더러운 것보다는, 사장 옷 입고 더러운 것보다는, 교회의 각종직분의 옷 입고 더러운 것보다는 그 옷을 입지 않고 깨끗한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제사장의 옷을 찢거나 더럽히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입은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더렵혀져 있다면 빨리 씻어야 합니다.

어느 마을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자였는데 사람들이 보지 않는데서 온갖 나쁜 일을 일삼고 다니는 못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에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독실한 신자 행세를 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은퇴하시고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그 두 형제의 거짓된 마음을 꿰뚫어보았습니다. 또한 말씀을 아주 훌륭하게 전하셔서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새 예배당을 짓기 위해 헌금을 모금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형이 죽었습니다. 동생은 장례식 전날 목사님을 찾아와 새 건물을 짓는데 충분한 액수의 수표를 건네주면서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목사님,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장례식 때 제 형이 훌륭한 성도였다고 이야기해주십시오.”
목사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수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장례식에서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를 속이고 가족들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하지만 잠시 후 목사님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 동생에 비하면 훌륭한 성도였습니다“

여러분! 혹시 내가 이러한 거짓 성도의 옷을 입었다면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혹 사람들과 목사는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주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더러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
본문 3절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고 했습니다. ‘더러운 옷’은 수치와 비난 거리가 되는 심각한 죄인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사 64:6)라고 했습니다. 죄로 가득한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히브리어 ‘더러운’의 초임(!yai/x)은 가장 간악하고 혐오스러운 성격의 더러움을 말하는 히브리어 중에 가장 강력한 표현의 단어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더러운 옷을 입고 서 계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이런 모습을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라고 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을 마 27:31에서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에서 봅니다.
우리 죄악의 옷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그 초라한 모습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이 과정이 없이는 저와 여러분들의 죄는 사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난 후 예수님의 옷은 어떻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마 27:35)라고 했습니다. 로마 군병들에 의해서 제비 뽑혔고 군사들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실제의 보이는 예수님의 옷은 비참할 정도로 찢겨진 채 몸에서 벗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입고 계셨던 이 세상의 옷은 더러운 죄악세상에서 우리를 대신한 죄의 징표였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죄악의 옷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입고계신 것입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
마태복음 28:3절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원래 모습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우리의 죄를 인한 옷을 입고 계셨던 것입니다. 부활후의 예수님의 옷은 이 세상의 옷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이 옆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어찌 보면 옷을 안 입으신 것입니다. 이 옷은 이 세상의 옷과는 다른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 옷이 바로 스가랴가 예언한 본문 4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새 옷을 입으라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죄악의 옷을 어린양의 피에 씻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피에 씻어야 합니다.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들은 탕자이야기가 누가복음 15:11절부터 나옵니다. 아버지를 떠나 공생하다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2)고 했습니다. 돌아온 탕자가 입은 “제일 좋은 옷”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세상의 좋은 옷 색동옷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옷의 의미는 죄의 옷을 벗고 아버지가 입혀주는 의의 옷 사랑의 따뜻한 옷을 의미합니다.

몇 해 전, 미국의 한 조간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신문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어젯밤, 운명은 존 스미스에게 30초의 시간을 주고, 아내와 함께 죽느냐, 아니면 아내를 떠나서 혼자서 사느냐, 둘 중의 하나를 택하게 했다. 그런데 그는 죽음을 택했다.”
기사의 내용은 존 스미스 부부는 어둑어둑한 저녁에 산책을 나갔는데 이때부터 시작된 일이다. “두 사람은 철로 길을 걷고 있었는데 기차를 다른 쪽으로 가게 하는 전철기(轉轍機, point) 근처에서 미끄러지면서, 한쪽 발이 두 레일사이에 끼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발을 빼려고 해도 발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도와 힘껏 잡아당겼으나 고통만 더할 뿐 발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 급행 열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몇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지만, 금방 닥쳐올 위기 앞에서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있을 때 기차는 벌써 50미터 앞까지 왔습니다. 존 스미스는 한 팔로 아내의 얼굴을 감싸안고 그리고 다른 한 팔로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차를 향해 섰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다가오는 십자가를 스스로 지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입혀주시는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옷은 “11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히 1:11-12)고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입으셨던 눈과 같이 흰 그 옷입니다. 구원의 옷입니다. 이 세상의 더러운 죄의 옷을 벗고 십자가의 어린양을 통해서 입혀주시는 의의 옷으로 갈아입으시는 주앙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5.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 본문 : 마 9:9-13

“9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0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9-13)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이 별로 실감이 안 나시는 분이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간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왜 의인이 아닌 죄인입니까?

우리 나라는 역사의 ‘친일진상규명법’을 2004년 3월 2일에서야 국회를 통과해서 그나마 역사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규명하여 정리하고 넘어갈 수 있게 했습니다. ‘친일진상규명’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모두 9명으로 구성되는 ‘친일 진상규명위원회’는 앞으로 3년간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편찬할 예정입니다.
‘친일진상규명법’은 일제시대 당시 일본군과 싸우는 부대를 토벌하거나 토벌하도록 명령한 행위와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살상하거나 체포 또는 이를 지시한 행위 등을 친일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학도병이나 징병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와 중앙의 문화기관이나 단체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황민화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와 침략의 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등도 친일 반민족행위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입법이 지금까지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친일의 잔재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자신이 친일파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을 겁내고 있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기록한 마태
그런데 마태는 놀랍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을 누가 기록한 것입니까? 바로 마태 본인입니다. 그런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라고 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세리’는 창기와 같은 죄인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정부에 바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세리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악질적인 공무원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조선에서 세금을 걷어 일본에 바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마태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친일파입니다. 즉 친로마파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우리가 일본에 식민지 된 것처럼 로마의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이 알려지기가 제일 창피하고 부끄러웠을 것 같은 본인이 스스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그것도 성경에 버젓이 기록을 하다니 정말 이 사람 속된말로 간덩이가 분 사람 아닙니까?
마태가 이렇게 솔직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었던 용기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친일파가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것도 스스로 나는 죄인이라고 말하고, 고백하고 스스로 기록한다면 그 사람의 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인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인정하고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는 기록하는 것까지 자신의 손으로 그것도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성경에 기록한 것입니다.

건강한 자가 문제입니다.
오늘 문제는 사실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한 마태와 세리들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랴”고 했습니다. 문제는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들이 상당한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잘못이 없고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문제를 예수님께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즉 제자들이 죄인이니 예수님도 똑같은 것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공산주의가 태동할 때 러시아 중국에서 농민들, 서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억눌려 있던 감정을 모두 당시 고위급의 지도층에게 총을 겨누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 정권을 인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의인이요 부패한 정치인들은 죽일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습니까? 정말 자신들은 부패 없이 잘 하고 있습니까? 우리 나라도 그렇습니다. 현 정권을 보아도 안타깝습니다. 386세대라고 말하는 분들이 전에 과오를 범했던 정치인들과 달리 청렴결백을 주장하면서 청와대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줄줄이 뇌물을 받고 연루되어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작은 교회 목회를 하면서도 큰 교회의 문제점만을 들추어내어 말하고 자신은 크게되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겠다는 생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크게되면 큰 교회가 안고있는 고민이 또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내가하면 더 잘할 것 같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인 한 두 사람이나 교회에서 목사 혼자 바르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돕고 격려하며 죄인임을 스스로 고백하며 진솔하게 노력할 때 하나 하나 바르게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고하셨습니다. ‘건강한 자’는 이수퀴오(ijscuvw)로 힘이 ‘강한, 완전한, 무엇이든 할 수 있는’의 뜻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잘 관찰해 보면 어떤 사람입니까? 한마디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다른 나라를 침략합니까? 아닙니다. 교만한 사람이 침략하여 뺐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4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 1:2-4)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도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고 했습니다. 건강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칫하면 교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큰 병을 앓은 적은 없지만 늘 골골댑니다. 어르신들 앞에서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가끔 다리도 아프고 어깨도 쑤십니다. 저는 육체적으로도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건강 하시다구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의 육체는 아주 연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조금 강하게 부디 치기만 해도 사망 아니면 중상입니다.

또 건강한 사람이 가진 생각은 무엇입니까? 의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의인이 가진 생각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이 필요 없으신 것입니다. 교회 나오지 않는 분들의 생각을 보면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반드시 교회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타종교에 가서도 죄를 사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가 알기로는 죄를 사함 받기 위해서 우상에게 절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해나 입히지 말고 복을 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를 닦는 것도 죄 사함을 받고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습니다. 아직 수련이 부족하니 수련을 더해서 의인의 경지에 올라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반대로 가는 것입니다. 도를 닦으면 닦을수록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고 의인으로 완벽하게 되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건드릴 수 없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때 이러한 사람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병든 자’는 누구입니까? 어디가 많이 아픈 사람입니다. 의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입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교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은 힘이 없다고 인정합니다. 건강한자에게는 의원은 필요 없지만 사람에게는 꼭 필요합니다. 의원이 없으면 아픈 상처를 끌어안고 결국은 그대로 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원을 간절히 원하게 됩니다. 의원의 도움이 없이는 안됩니다.
바리새인들은 검사의 눈으로 죄인들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의사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의사는 사람이 병들었다고 해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습니다. 의사는 사람을 볼 때 병들어 쓸모 없게 되었다고 소망을 끊지 않습니다. 의사는 병자에 대해 병만 치료해 주면 건강하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습니다. 의사의 사명은 병을 치료해 줌으로써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 의사로서 죄인을 치료해 주심으로 살리러 오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주로 오셨습니다.

세관을 떠나 예수님을 따른 마태
세관 문에 앉아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강제로 걷고있는 마태를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은 그의 겉모양만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일 만큼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그도 부르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고 또 예수님을 따라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에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자 된 사람들의 행동은 예수님의 부름에 모두 즉각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마태 역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어부였다가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마태는 어부하고는 다릅니다. 비록 사람들의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그 자리는 돈을 만지는 자리고 싶게 놓고싶은 위치가 아닙니다. 미국에서 제일 정보화가 잘 이루어져 제일 좋은 컴퓨터를 소유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국방연구소?, 미 항공 우주국?, 아니면 CIA? 아닙니다. 바로 국세청입니다. 세금을 징수하는 기관입니다. 당시에도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자리를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름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돌아 볼 것도 없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모두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미국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데이비드 브레어너드는 “나는 설교에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말을 한번도 뺀 것이 없다.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한 사실을 깨닫는 자들에게 굳이 다른 교훈들을 가르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단순한 철학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는데 고상하게 포장하기 위한 필요한 약간의 액세서리나 옵션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행동해야 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선포하신 예수님
오늘 본문 앞 마태복음 9:2절에 중풍병자 고쳐주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에게 죄 사함을 명했던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시자 서기관이 깜짝 놀라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고 했습니다. 죄사함의 선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할 수 있느나?”고 하였습니다.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만 선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 사함을 선포하시자 주제넘게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다고 예수님을 맹렬히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그들의 생각은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가 곧 죄 사하실 권세가 있는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여러분 옆을 보십시오? 거기 보이시는 분이 죄인 갖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뒤를 보십시오? 보시는 분이 죄인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앞을 보십시오. 바로 저입니다. 제가 죄인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앙교회는 자칭 의인이 많기보다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성도가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의인이 많으면 피 바람이 일지만 죄인임을 고백하는 겸손한 자들이 많으면 평화가 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이제 죄의 문제는 더 이상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마태는 자신이 죄인임을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기록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간절히 의원을 기다리는 병자의 심정으로 우리 죄를 속하실 주님을 찾으시기를 그리고 마태처럼 속히 뛰어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은 누구 신가?(34. 불을 던지러 오신 예수님) / 본문 : 눅 12:49-50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49-50)

오늘 본문의 ‘불’이 어떤 불을 의미하느냐에 성경학자들은 오랜 토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본문의 불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정확하게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불은 심판하는 불과 성령의 불이 있는데 여기서 어느 것을 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주석서나 대개의 학자들은 ‘심판하는 불’ 쪽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이유는 오늘 본문 말씀 이후의 내용들이 심판하러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들은 ‘성령의 불’ 쪽에 무게를 두고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심판을 원하시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3:11에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세례요한이 증거 했는데 바로 예수님이 성령의 세례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해야 하겠습니까? 제게 있어서도 이것은 고민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중에 이 둘을 구분하려는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의 예수님 입장에서는 불이 붙지 않아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미 이 불은 붙은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즉 성령의 불과 심판의 불이 모두 붙은 것입니다.
사람들을 보면 불붙은 것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어떤 불이 붙었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도 불붙은 것입니다. 이들에게 붙은 것은 심판의 불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영생으로 가는 사람들에게도 불은 붙어 있습니다. 이 불은 성령의 불입니다. 사탄에게는 심판의 불을 통해서 단죄해야 되고, 구원을 받게될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불이 붙어야 했던 것입니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50)하신 것은 심판과 구원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심판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18절에 보면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따로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불과 함께 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51-54절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에 사마리아 동네로 통과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유대인과의 오랜 반목으로 인해 예수님이 이곳으로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54절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불을 명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믿고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직설적이고 감정적인 심판을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
하나님이 이 땅에 나타나실 때는 불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불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출 3:2). 이스라엘사람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 생활을 할 때로 하나님은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출 13:21-22 40:38).

제사를 받으신 증거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릴 때에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7-18)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신 표시로 쪼갠 고기 사이로 불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모세가 제사를 드릴 때도 그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레 9:24) 제사를 받으신 증거로 불이 그 제물들을 살랐습니다.

심판하시는 불
1) 잘못된 제사로 심판하셨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2)
2) 의인이 없는 타락한 도시를 심판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25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 19:24-25)
3) 영원한 형벌로 심판하십니다.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단 7:10)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10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9-10)
마지막 때의 심판에 대해서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 말라기서에서 예언했으며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서 동일하게 불로 심판하실 것을 예언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심판을 받습니까?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해 주신 것을 보면 열매 없는 나무(마3:10, 요15:6), 쭉정이(마3:12), 가라지들(마13:40)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포도나무 비유에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가지에 붙어만 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을 심판하시는데도 사용하시지만 우리를 살리는 성령의 불로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하실 때는 아직 불이 이 땅에 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선악간의 심판하시는 이 불을 붙이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 불을 붙이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 불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붙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왜 그토록 답답해 하셨겠습니까? 바로 이 불을 속히 붙여야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가나한 자와 함께 하시는 일도 중요한 것이겠으나 예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속죄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일과 비교한다면 이런 일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제일 큰 우선 순위가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 율법사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과 한마디로 입씨름이나 하고 계실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현재의 상황을 생각하면 답답할 노릇입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안타깝다’라고 해도 됩니다.
이 세상에 답답한 일은 많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동문서답할 때 답답함을 느낍니다. 바로 예수님 입장에서 지금 그런 상황입니다.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셔야 될 상황이 되어서 지신 것도 아닙니다. 바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성경 원문의 ‘답답함’은 쉬네코(sunevcw)로 “괴롭히다, 곤경에 빠뜨리다, 강요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얼마나 더 괴롭히겠느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무지한 죄인들에 의해서 무참히 짓밟음을 당하셨고 그 괴롭고 긴 터널과 같은 공생애를 마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두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눅 1:1)라고 자신의 복음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물론 누가가 이 글을 기록할 때도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뒤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이미 이 불은 이 땅에 붙여졌다는 사실입니다.
미국해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함장은 피가 날 때까지 자기 혀를 깨문다” 한번도 배를 정박해 보지 못한 하급장교에게 배를 부두에 정박하라고 명령하고 기다릴 때 그것을 지켜보는 함장의 심정을 가리킨 말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이셨다면 그 혀가 잘라져 나갔을지도 모릅니다. 함장은 배를 대는 후배 장교를 보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믿고 계시는 것은 이보다 더하면 더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맙시다.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값아 드립시다.
나폴레옹 힐(Napoleon Hill)은 인간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한 권위자입니다. 그는 연구 결과를 「성공의 법칙」이라는 책으로 발표했습니다. 성공한 사람과 위대한 지도자들 500명을 연구한 것인데 성공한 사람에게는 일률적인 공통점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성공한 사람에게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자기가 꼭 이루기를 원하는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자기의 목표를 향하여 무섭도록 놀라운 열정으로 앞으로 밀고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불붙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일에도 목표를 가지고 초지일관 밀고 나가는 사람은 성공한다는 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겠지만 저도 성령을 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불붙어 있는 생활을 합니다. 주님의 일을 생각하면 잠이 안 옵니다. 흥분이 됩니다. 가슴이 벅차 오르고 뿌듯함을 느낍니다. 살아있음에 감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한없는 찬양과 기쁨 그런 것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옵니다. 세상에 대한 원한도, 미련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께서 주시는 은혜의 일과 기쁨만이 존재합니다. 우리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허황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는 자나깨나 “어떻게 선교할 것인가?”만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이 전도와 선교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앙교회가 반드시 세계선교에 열심을 내어 놀라운 결실을 맺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의 불이 붙어있습니까? 이 불이 붙어있다면 주님께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심판의 불이 아닌 구원의 불, 성령의 불이 붙어있기를 바랍니다.

일하러 오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3. 일하러 오신 예수님) / 본문 : 요 5:2-18

우리말에 “일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욕에 가까운 말로 사용됩니다. 보기 싫은 사람에게 사용하는 말입니다. 상대하기 싫은 사람인 것입니다. 예전에 어렵게 살 때는 일만 시켜주면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별 볼일 없는 놈” 이것도 욕입니다. 하는 일이 없어 빈둥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민족은 원래 일을 하기 싫은 민족이 아니라 일하고 살아온 민족입니다. 한국의 30-40대 남자가 전세계에서 제일 많은 노동을 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사람만큼 열심히 일하는 민족도 보기 어렵습니다. 한마디로 일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 그 지겨운 일에 대해서 왜 또 말씀하시나 그렇게도 생각하실 지 모릅니다.
보통 일이라고 하면 여러분들은 머리 속에 두 가지를 생각할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이 있고 하기 좋은 일이 있다.’고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두 가지 일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하기 싫은 일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힘든 일 입니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대가로 주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3:16에서 여자는 “수고하여야 자식을 낳을 것이며” 17절에 남자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수고’는 히브리어 에쩨브(bx,[,)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즉 일을 할 때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인 것입니다. 힘든 일인 것입니다. 이 일은 죄의 대가입니다. 이러한 일을 우리는 노동이라고 말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노동의 시간을 우리에게 충분히 주셨습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출 31:15)고 했습니다. 칠일 중에 하루는 하나님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불평하고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하루를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하나님이 거꾸로 말씀하셨다면 어떻게 하실 뻔했습니까? ‘하루만 너희들을 위해서 쓰고 육일을 나에게 바쳐라’하셨다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 시간을 가지고는 충분히 먹고 쓸 것을 벌지 못합니다’ 하고 오늘날로 말하면 데모라도 했을 것입니다. 십일조의 개념은 어떻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십의 일이 아니라 십의 구는 내 것이라고 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실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인데 십분의 일만 드리는 것 아닙니까?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노동의 시간을 충분히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안식일은 단순히 일을 쉰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일, 죄의 대가로 주어진 노동의 시간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축복의 날이요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죄의 대가로 일이 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아담을 일하도록 임명하셨습니다(창 2:15). 이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수고하여, 고통스럽게 일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죄의 대가로 해야 하는 일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고통이 없는 반면에 나를 위한 일에는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그러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전혀 고통이 없습니까?’ 다시 묻는다면 ‘그렇습니다.’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 일에 싸움이 일어나고 시험이 드는 일이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지 아니한 죄인들의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배경을 말씀드립니다.
요 5:2에서부터 보시면 예루살렘성전의 양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문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양과 염소 같은 동물을 들여보내는 문입니다. 바로 이문 옆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고 행각 다섯 채가 있었습니다. 이 연못에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이 파도가 치면서 움직이는데 그 때를 기다렸다가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이든 나았습니다. 그러니 이 연못 주위에는 당연히 어떤 병자를 막론하고 많이 모여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물이 움직이는 것 같으면 재빨리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안타까운 병자 한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38년이나 병을 앓고있던 사람으로 연못의 물이 움직인다해도 일어날수가 없어서 연못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한눈에 이 사람의 처지를 알아보셨습니다. 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연못에 들어갈 필요도 없이 병이 나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나무일도 하지 않는 것으로 전통이 굳어져 내려와 일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아 질책하려고 찾았으나 예수께서는 그 자리를 슬쩍 피하셨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에 이 사람을 성전에서 다시 만나 예수님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대가로 주어진 고통스런 노동, 하기 싫은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 축복의 일을 기쁨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안식일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바보처럼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해야하는 날입니다.

우리말 가운데는 동사 어간에 ‘음’이 붙어 명사가 된 것이 많습니다. ‘얼음’은 ‘얼다’에서 나온 것이고 ‘사람’은 ‘살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면 ‘노름’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놀다’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어떻게 ‘노는 것’이 ‘놀음’(도박)이 되었습니까? 유교의 영향도 컸지만 그만큼 ‘노는 것’이 죄악시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놀아야 되는 것입니다. 솔직해 집시다. 놀기를 원하시죠? 자 보세요 대답을 쉽게 못하시잖아요. 우리는 일과 노는 것과 놀음에 대해서 구분이 잘 안되어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레저’란 말이 ‘일한다’는 것 못지 않게 중시되어 왔습니다. 건전한 오락은 일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죄악시하면서 음성적인 문화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노는 것이 ‘놀음’(도박)이 된 것이고 건전한 오락이 발전을 못했습니다. 서양의 레크리에이션이란 말은 노름이라는 말과는 정반대의 개념이 있습니다. 레크리에이션은 ‘재창조한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안식일에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레크리에이션 한다는 것과 무조건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하신 일은 ‘재창조’ 레크리에이션이었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28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7-29)
하나님의 보내신 자,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그런데 28절의 ‘일’ 동사 에르가(e[rga)는 복수형으로 질문했고 예수님은 단수형 에르곤(e[rgon)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과 여러 율법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한가지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한가지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이곳에서 27절의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의 ‘하라’는 일하라는 말씀으로 명령법, 현재형입니다. 지금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일을 영어의 액션으로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즉 행동해야 됩니다. 믿음은 행함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본을 보이심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예수님은 마지막 이 땅에서의 40일을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제자들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이 땅에 남아있는 하루라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지체하셨던 것입니다.
바울만큼 하나님의 일에 열심인 사도를 보기 어려운데 바울은 육체의 일도 게을리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살전 2:9)고 했습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일해야 합니다. 자신이 이렇게 일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일할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기도 합니다.

죽은지 며칠 후 눈을 떠보니 그곳은 천국이었습니다. 한없이 넓고 푹신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편안한 자리에서 몇 칠을 쉬었습니다. 출근하라고 깨우는 아내도, 일을 재촉하는 상사도 없었습니다. 말만하면 무엇이든지 옆에 서 있던 하인이 가져다주었습니다. 부족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월이 되풀이되자 그는 점점 싫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평안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인을 불러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좀 달라!”고 하인에게 시켰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지금까지 거절한 적이 없는 하인이 그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곳에서는 당신이 원하는 것이면 다 됩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당신이 직접 일을 하는 것만은 금지되어 있답니다.”
그러자 그는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옥이 낫겠지. 심심해서 어떻게 살란 말인가?”
하인은 그의 소리를 듣고 다시 놀라
“그럼 당신은 여기가 천국인 줄 아셨던가요? 여기가 바로 지옥이랍니다.”
이 유머는 미국의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10-12)

저는 가끔 꿈을 꿉니다. 직장에서 쫓겨나 무엇을 하고 살까 하면서 이리저리 노숙자가 되어 고민하는 나를 꿈속에서 봅니다. 그리고 아침에 깨어날 때 “아! 내가 실업자가 아니구나! 내게는 교회와 선교회의 일이 있지!”이렇게 현실로 돌아와서 감사를 드립니다.
어떤 분들은 일거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실업자가 많고 일자리가 적은 것 또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일자리가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일하기 싫은 것입니까? 일자리는 자기가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누가 시켜서만 일하는 사람은 얼마 못 갑니다. 스스로 하는 일이 즐겁고 계속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도 예전에 간판 집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장님이 월급을 얼마나 주면 되느냐고 물을 때 저는 이렇게 대답한 기억이 납니다. “제가 일한 만큼만 주세요?” 그리고 건물의 간판을 달 때 추운 겨울에도 다는데 지금처럼 사다리 차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밧줄을 타고 건물 벽에 붙어서 일을 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은 공장 굴뚝에 피뢰침을 세우기 위해서 올라갔습니다. 그 굴뚝은 아파트 건물로 말하면 20층은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래까지 내릴 굵은 전기선을 어깨에 매고 올라갔습니다. 다 올라가서 하늘을 보니 구름이 왔다갔다하는데 어지러워서 한참을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솔직히 그 때 받은 월급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일한 만큼은 안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현재 여러분들의 일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더 좋은 길이 열립니다. 한번에 만족한 길은 없습니다. 그 길은 내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잠 21:25)고 합니다.

처음에 선교회를 시작할 때 먹을 것이 있고 누가 도와주어서 시작한 일이 아닙니다. 한 달에 3만원도 안 되는 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선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부부에게 아이가 없는 것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 힘들어서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후회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의 미래 우리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태국의 송.. 선교사님은 스스로 “주책 선교사”라고 말하십니다.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선교사”라는 말입니다. 이 선교사님에게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분은 태국에서 여자의 몸으로 홀로 20여 년을 사역하셨기 때문에 이제 한국에 오시고 싶으실 것 같아 여쭤보았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한번은 옷가게를 들렸는데 몇 개의 옷을 보고 조금 비싼 것 같아 돌아서는데 뒤에서 “사지도 않을 거면서 만지작거리기는…”하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가다 돈이 너무 많이 나오는 것 같아 “아저씨 여기서 내려주세요?” 했더니 원래 가기로 한곳이 아니니 요금을 배로 달라고 하면서 계속 뭐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한국이 겁난다고 하셨습니다. 태국 사람은 우리보다 못살아도 순진하고 여유가 있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마지막 하신 말씀은 요 19:30에 “다 이루었다”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을 다 마치셨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이제 하실 일을 다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과 뒷일은 하나님께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단순히 죄인의 신분으로 먹고살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신분은 더 이상 죄인의 신분이 아닙니다. 죄인에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고(노동)하여 먹고사는 것만이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은 예수그리스도의 일이요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재능대로 꼭 일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아 멘-

나의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2. 나의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 / 본문 : 롬 3:23-28, 요일 2:2

히틀러가 자국민을 선동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바로 유언비어 였다고 합니다. 유언비어는 똑같은 내용을 계속하는 것보다 조금씩 바꿔가며 유포시키면 폭발적인 효과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진실이 어떤 것인지 나중에는 혼돈이 일어납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사단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이런 간교한 수작을 계속해서 벌입니다. 사단은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을 방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간절히 우리와 화목을 원하고 계십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십니다.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모세는 가시떨기 나무에 불붙은 것 같이 환한 광채가 나며 우뢰와 같은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모습을 산 아래에 있는 백성들도 목격했는데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연기를 보았습니다(출 20:24). 이 광경을 본 백성들은 멀리서 떨고 서 있었습니다.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곧 이어서 백성에게 화목제를 드리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 20:24). 하나님이 십계명을 왜 주셨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과 화목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레위기’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방법들이 나와있는데 화목제에 관한 것이 29번이나 나옵니다. 모든 제사보다도 중요한 것이 화목제라는 것입니다. 속죄제나 번제도 알고 보면 화목제사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잘못한 것을 속죄해야 화목이 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1천 번제를 드렸는데 그 제사도 화목제였습니다. “솔로몬이 화목제의 희생을 드렸으니 곧 여호와께 드린 소가 이만 이천이요 양이 십이만이라”(왕상 8:63)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의 사람들은 십계명을 지키고 화목제를 드려야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화목케하는 제사는 드렸지만 근본적으로 죄인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롬 3:23). 즉 의인이 되어야 하는데 구약의 화목제사로는 의인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합니다.
롬3: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자신처럼 깨끗한 사람은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는 법이 없어도 산다는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셜록 홈즈’라는 명탐정을 만들어낸 추리소설 작가 코난 도일은 유명한 장난꾼이었습니다. 한번은 자신의 친구 국회의원, 사업가, 변호사, 경찰 등에 똑 같은 내용으로 전보를 보내놓고 키득키득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웃고있는 남편에게 아내는 “이번에는 또 무슨 장난을 치시고 웃고 계신가요?” 물었습니다. “내 친구들이 정말 죄를 짓지 않고 사는지 시험 삼아 전보를 쳐 본 거요” 아내가 물었다. “뭐라고 전보를 쳤나요?” 코난 도일은 깔깔대며 대답했습니다. “간단한 내용이요. ‘당신의 죄가 탄로 났으니 빨리 몸을 숨기시오’ 라는 것이었소.” 그리고 전보를 받은 친구의 집을 차례차례 방문했는데 모두 집을 나가 소식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저주할 때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희망 없는 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피가 없었다면 인류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 롬 3:2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1천번제를 드리면서 소 이만 이천마리 양 십이만 마리를 드렸지만 의인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값 없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전혀 드려진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롬 3:25절은 함께 읽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하나님과 화목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소의 피로도 안됩니다. 양의 피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동물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대신하는 상징은 될 수 있지만 나는 아닙니다. 그리면 내 피로는 됩니까? 안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의 피로는 제사가 드려지지 않을 뿐 아니라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씻어주며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길을 여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사람하고도 원수가 되거나 화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고 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많은 문제가 있고 시급한 것이 있지만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보다 급하고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일이 모든 일에 급선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길고 긴 죄의 문제에 종지부를 찍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입장에서 답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흔히 정치를 할 때 한쪽에서 할 일을 다하고 상대편의 응답을 기다릴 때 ‘공은 넘어갔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문제 하나님은 하실 일을 다 하셨습니다. 공은 이제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주저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은 롬 5:10-11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고후 5:20절에서도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고 부탁합니다.

형제와 화목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형제와 화목하는 일도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일보다 더 선행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4)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화목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화목은 이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금비유를 말씀하신 것도 화목 때문이었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50)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 하나같이 용서하고 산 사람은 모두가 위대한 인물들입니다. 요셉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지금도 용서하고 사는 사람은 모두가 축복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속어에도 ‘때린 놈은 오무리고 자도 맞은 사람은 다리 뻗고 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잠언 17: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육선’은 진수성찬을 말하는 것인데 제사상의 음식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화목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모님도 형제들끼리 화목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가끔 장례식장에서 형제들끼리 재산 싸움하는 경우를 봅니다. 부모의 시신을 앞에 놓고도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고자 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잠언 15:17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요즘 보는 책 하나가 있는데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라는 미국의 작은 고전으로 평가받는 책입니다. 저자인 포리스트 카터는 인디언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산에서 칠면조를 사냥했습니다. 너무 많이 잡아서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놓아주었습니다. 인디언은 자연에서 필요이상으로 가지지를 않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꿀벌인 티비들만 자기들이 쓸 것보다 더 많은 꿀을 저장해두지…
그러니 곰한테도 뺏기고 너구리한테도 뺏기고… 우리 체로키한테도 뺏기기도 하지.
그들은 언제나 자기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쌓아두고 싶어하는 사람들하고 똑같아.
그러고도 또 남의 것 빼앗아오고 싶어하지. 그러니 전쟁이 일어나고… 조금이라도 자기 몫을 더 늘리려고 말이다.
그들은 자기가 먼저 깃발을 꽂았기 때문에 그럴 권리가 있다고 하지… 그러니 사람들은 그놈의 말과 깃발 때문에 서서히 죽어가는 셈이야… 하지만 그들도 자연의 이치를 바꿀 수 없어.”

욕심을 가지지 않으면 화목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욕심 때문에 화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오히려 또 하나의 축복을 받으려는 단순한 욕심이 아니시기를 바랍니다.

온 세상과 화목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하나님과 화목하고 형제와 화목 한다는 것은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보혈도 우리만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가끔 답답한 분들을 봅니다. 교회에 잘 다니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이웃과 나누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더 나아가 선교하지 않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말할 때 보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 받았고 권능을 제일 많이 받아서 하나님은 꼭 자신만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보혈이 나를 위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만 위한 것은 아닙니다. 제일 위험한 신앙이 바로 이기적인 믿음입니다. 나만, 우리교회만 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나에게 계시는 주님은 여러분에게도 계십니다. 오늘 우리교회에 계신 주님은 중국의 용지교회와 아프리카의 김형주선교사님이 계시는 남아공의 잉까겡 잉카라펭(IKALAFENG)지역에 세워지는 교회와 흑인 성도님들에게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고 했습니다.

미항공우주국(NASA)의 연구에 따르면 동료가 화장실을 좀 오래 쓰거나 청소 상태가 좋지 않을 때 등 아주 사소한 일들이 우주비행사의 신경을 건드린다고 합니다. 기지국에서는 우주선 내에 갈등의 기미가 보이면, 일부러 선체 고장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고장난 부분을 수리하기 위해 협동하다 보면 모두가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우고 다투는 것도 비슷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사소한 문제들입니다.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하나의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일뿐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에 줄을 그어놓고 반목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자신의, 자국의 이익만을 챙기고자 할 때 전쟁이 일어납니다. 온 지구촌이 하나의 형제 자매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린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마18:18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아멘 레고 휘민(!Amh;n levgw uJmi’n)’으로 직역하면 “너희들에게 진리를 말한다”는 뜻입니다.
“매면”은 헬라어 ‘데오(devw)’로 실의 매듭을 말합니다. 사람사이에 꼬여있는 실의 매듭을 푸는 것을 말합니다.
풀다 ‘뤼오(luvw)’인데 ‘매면 매일 것이요와 풀면 풀리리라’의 문법이 같습니다. 앞에 나온 매면과 풀면은 모두 가정법, 부정과거 완료를 나타납니다. 그리고 뒤의 매일 것이요와 풀리리라는 현재완료형으로 과거에 있었던 일이 현재에 계속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 땅에서 묶고 푸는 것이 모두 하늘에서도 연장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하나님도 하늘에서 여러분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값 없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믿음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이셨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도 자랑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엡 2:8). – 아멘 -

나의 친구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1. 나의 친구이신 예수님) / 본문 : 요15:9-17

영국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상금을 내걸고 ‘친구’라는 말의 정의를 독자들에게 공모한 적이 있었습니다. 수천이나 되는 응모엽서 중 다음 것들이 선발되었습니다.
“기쁨은 곱해 주고 고통은 나눠 갖는 사람”
“우리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
“많은 동정이 쌓여서 옷을 입고 있는 것”
“언제나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고 절대로 멈추지 않은 시계” 하지만 1등은 다음의 글이었습니다. “친구란 온 세상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진정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 있습니까?
만일 있다면 저는 자신 있게 그분에게 “행복한 분입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세상 친구란 자신의 이익을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친구를 사귈 때에 조건을 따져서 사귑니다. 학력, 나이, 지역, 수준 등을 봅니다. 여자들은 외모도 중시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조금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분은 조금 잘 생긴 친구를 사귀어 자신의 품격을 조금 끌어올리는데 필요한 친구로 생각한답니다. 그리고 반대로 조금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분은 조금 못생긴 분을 친구로 사귄다고 합니다. 그래서 함께 다니면서 그 친구보다 자신이 조금 잘 생긴 것을 뽑낸다고 합니다.
탈무드에 친구 고르는 방법에 대해서 나온 것이 있습니다. “아내를 선택할 때는 한 계단 낮추어 선택하고 친구를 고를 때는 한 계단 올려 선택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이 말이 수긍이 가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친구를 사귀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탈무드의 이 이야기를 지키셨다면 우리는 절대로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혹 여러분은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런 친구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탈무드에는 “애매한 친구보다는 차라리 분명한 적이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대하기 힘든 것이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친구입니다. 진정한 친구인가 아니면 적인가를 도무지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은 상대하기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작고한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가 어느 핸가 케네디 대통령의 조찬 초대를 수락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조반 한끼 먹으러 멀리 워싱턴까지 갈 마음이 없어서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런 초대라면 대개는 병상에 누운 아내를 두고라도 달려가리라고 짐작합니다.
개인적으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닌 이상.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의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초대는커녕 오지 말라고 하여도 찾아가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늘어서기 때문에 비서들은 골치를 앓습니다. 사실 좀 창피한 일이지만 목사님들 가운데도 자기의 권위를 위해 대통령이나 시장을 한번 만나기 애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좋은 친구가 있다고 고백하는 분은 정말 행복한 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를 소개해 드립니다. 타이완 기독교가 2000년대 표어로 내걸은 것이 “제일 좋은 친구 예수” 또는 “최고의 친구 예수”였습니다. 우리의 제일 좋은 친구는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친구는 솔직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친구는 친구를 가졌고, 그 친구도 다른 친구가 있으며, 그 친구의 친구도 다른 친구가 있다. 그러므로 당신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조심하라. 자기가 들은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은 대단히 참기 어렵다. 성경의 잠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자는 가까운 친구를 잃는다.’ 비밀은 꼭 지켜야 한다. 당신의 입은 금고이다. 금고는 쉽게 자주 열면 안 된다. 입을 금고에 비유라면, 열릴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금고일수록 정교하고 좋은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좋지 않은 친구의 이야기를 남에게 전달하는 속된말로 입싼 친구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이 진짜 친구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무엇을 보면 압니까? 말(언어)입니다. 잘 되는 집, 잘 되는 나라는 말하는 것 보면 다릅니다. 요즘 한국 정치권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아이들이 배울까 두렵습니다. 일반적으로도 우리는 ‘제일’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또한 ‘화끈하게’라는 말도 많이 사용합니다. 다짐을 할 때는 더 무섭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라는 말과 ‘나라가 반쪽이 나도’라는 말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나라가 반쪽이 되어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표현들은 창의성을 무시하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다짐을 잘 합니다. 그래서 양의와 한의가 다릅니다. 양의는 “약을 싸봐야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의는 “한 첩이면 끝납니다.”라는 말로 단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TV에 보니 홈쇼핑 채널의 PD와 몇 사람이 고발을 당하고 쫓겨났습니다. 건강약품을 소개하는데 바르기만 하면 채 지방이 빠져 살을 쉽게 뺀다는 광고였습니다. 저도 그 광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만 연애 인들이 나와서 홍보를 하니 그 말을 쉽게 믿는 것이지요. 우리 나라 사람 참 순진한데 가 많습니다. 솔직하지 않은 사람들 모두가 친구 될 수 없습니다.
북한에서 탈북한 사람들 남한에 잘 정착하기 위해서 교육하는데 제일 창피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TV광고도 홍보책자도 그리고 쉽게 친구인척하고 접근하는 사람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었다가는 하루아침에 정착금 다 날리고 노숙자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들이 말하기를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고 삽니까?”라고 말할 때 할말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우리에게 이런 세상의적인 친구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15절 하반에 보면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밀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친구로서 모든 이야기를 전해주신 것입니다. 제일 좋은 친구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권세를 친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만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지위를 그의 친구 모두에게 동등하게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도장이나 신분증조차도 남에게 맡기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온전히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의 권세를 마음대로 이용하여 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단을 쫓을 때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대통령이름 잘못사용하면 붙잡혀 갑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 이름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 거룩하신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주님의 사랑입니까? 이 세상에 주님보다 더 귀한 친구는 없습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그 귀한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는, 그 이름을 빛내는 예수의 친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친구는 목숨을 내어줍니다.

한 소년이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시골에 다니러 왔습니다. 오랜만에 맛보는 자유를 만끽하며 뛰어 놀던 그 소년은 어느 날 호수에서 헤엄을 치다가 발에 쥐가 나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있는 힘을 다해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침 그 호수를 지나던 한 농부의 아들이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헤엄을 아주 잘하는 편은 못 되어서 그를 구해낼 수가 없었지만 자기라도 구하지 않으면 물에 빠진 소년이 영락없이 죽게 되니 생명의 위험을 무릎 쓰고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는 소년을 구해냈습니다. 그 후 그들의 우정은 깊어갔습니다. 방학 때만 되면 도시 소년은 늘 시골에 와 그 친구와 사귀었습니다. 어느 날 시골에 놀러온 소년이 생명의 은인에게 장래의 희망을 물었습니다.
“학교 졸업하고 무얼 할 생각이니?”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의학을 공부해서 의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집안사정을 뻔히 아니 가망 없는 꿈이 되고 말 것 같아.“ 그러자 친구는
“내가 우리 부모님과 상의해 볼게. 부모님도 승낙하실 거야” 시골 소년은 도시 소년의 도움으로 의학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시골 소년은 바로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으로 1945년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플레밍이 구해 주었던 도시 소년도 크게 장성하여 훌륭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만 폐렴으로 쓰러져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습니다. 페니실린은 폐렴의 특효약이었습니다. 결국 플레밍은 그 소년을 두 번 살린 셈이 되었습니다.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토록 우리에게 당부하신 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십니다. 제가 예수님에 대해서만 주일 낮 예배에 설교하는데 예수님에 대해서만 설교한다는 것은 곧 사랑에 대해서만 설교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 누가 이토록 사랑에 대해서 강조하시고 몸소 실천한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만들기 위해 조금도 우리의 자존심을 꺽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구제불능’이라든지 ‘너는 왜 그 모양이니’라든지 ‘누굴 닮아서 그러니’라는 말은 사용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나의 자랑스런 나의 친구야’, ‘네가 있어서 행복하다’라는 말을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강한 부정의 내용도 긍정문으로 표현하셨습니다. 마 19:24절의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입니다. 우리가 하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어려우니라”로 되었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국어 선생님이 한문도 함께 가리키고 있었는데 창문너머로 첫 눈이 오는 것입니다. 여 선생님은 모른 척 하고 계속해서 “공부해야지” 하면서 책을 폈습니다. 속으로는 아마 이 선생님도 공부는 그만하고 밖에 나가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자 문학적 소질이 있는 한 학생이 “선생님 첫 눈에 반했어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학생이 저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학생들은 모두 밖을 쳐다보았습니다.
사랑을 이야기하면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가슴이 뜨겁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차갑습니다. 정이 없고 무서운 사람을 냉혈인간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작은 말 한마디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5절 “무례(無禮)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했는데 사랑은 예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의가 없는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합니다. 사랑은 작은 말 한마디 예의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랑’ 그것은 작은 불씨 같은 것입니다. 처음부터 친구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사랑을 하게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단 사랑의 불씨가 붙으면 막을 수는 없습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계명을 지켜야 친구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친구가 되는 조건을 하나 말씀하셨습니다 14절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됩니다. 예수님이 명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12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7절에 “내가 이것을 명함은 너희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친구가 되는 조건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머리로만 믿고 머리로만 은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온 몸으로, 생활로 드려야 합니다. “행하면”은 원어로는 “계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지속적으로 행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주안디옥교회(이동휘목사)가 저희 KCM을 후원합니다. 이 교회의 작년 선교비 총 지출액이 30억이 넘었습니다. 성도는 3000여명입니다. 계산을 해보니 성도 한 분이 1년에 1백 만원의 선교헌금을 한 샘입니다. 그리고 ‘좀도리’운동이라고 저금통을 모았다 헌금하는 것인데 작년이 이것만 1천 만원이 넘게 드렸습니다. 한마디로 성도들의 가정의 저금통까지 싹쓸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누구를 주겠습니까?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의 책에 보면 20명은 영양실조이고 그 중에 한 명은 죽는데 15명은 비만입니다. 여러분들은 가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집안 어딘가에 잔돈이 굴러다니는 사람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8명안에 드는 사람입니다.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100명중 7명안에 드는 부자입니다. 그리고 컴퓨터를 가지고 있으면 100명중 2명에 드는 겁니다.
우리돈 2만원 정도면 5-6명의 한 가정을 한달 간 먹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팔리지 않아 버리는 음식만 모아도 현재 구호하는 전세계식량의 70%가 됩니다. 아마 한국과 일본 것만 모아도 세계의 굶어죽는 어린이는 먹여 살릴지 모릅니다.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28명씩 태어나고 10명이 죽습니다. 그 중 3명은 굶어죽고, 1명은 암으로 죽습니다. 2명은 첫돌이 되기 전에 죽습니다.
그리고 100명중 14명은 글을 읽지 못합니다. 정신호 선교사님이 우르드어로 성경을 녹음하고 있습니다. 우르드어는 5800만 명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그리고 서 펀잡어는 300만 명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이들 중에 글을 아는 아들은 10명중 2-3명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들려주려고 녹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개척한지 원년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해외선교비로는 월 15만원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KCM의 사무실을 운영해 가니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우리가 10여명이니까 안디옥교회 수준으로 하면 1천 만원을 선교비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월 100만원은 선교비로 지출해야 합니다. 일단 제가 기본적인 운영이 될 동안 사례비를 받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먼저 선교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한번 해봅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눅 16:9)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실천입니다. 내 것을 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사랑이요 선교입니다.

나의 여호와의 팔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30. 나의 여호와의 팔이신 예수님) / 본문 : 사53:1-3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1-3)

예전에 친구에게 전도를 하는데 ‘차라리 내 팔뚝을 믿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 네 팔뚝 굵어’ 그러고 싶었지만 참았던 일이 있습니다. 이 친구는 자기 팔의 힘이 굉장히 센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팔로 얼마나 들어올릴 것 같습니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도선수로는 터키의 술레이마놀루를 꼽는데, 그는 남자 62㎏급에 출전하여 1988, 1992, 1996년 올림픽 역도부문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무게의 3배가 넘는 바벨을 들어올려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가 들어올린 것은 인상(138kg)과 용상(167.5kg), 합계(305kg)였습니다. 한마디로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람들은 힘의 상징을 팔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유적인 표현으로 ‘팔’(제로아)로 당신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팔은 능력,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팔은 어깨로부터 손까지를 말합니다. 때로는 이 단어가 ‘어깨’ 또는 ‘손’이라고도 나타납니다. 은유적인 표현으로 힘깨나 쓰는 청년들을 ‘어깨’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한 자식이 많아 부양할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어깨가 무겁다’는 말도 합니다. 저도 가정적으로는 자식이 없으니 어깨가 무겁다고는 할 수 없지만 교회와 선교회를 생각하면 어깨가 무겁습니다. 이렇게 무거운 짐을 가진 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또한 이 단어가 복수로 사용될 때는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세력들을 말합니다(단 11:15, 22, 31). 그래서 ‘팔을 부러뜨린다’는 것은 적의 힘, 능력을 저지하거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삼상 2:31, 욥 22:9, 38:15, 시10:15, 37:17, 렘48:25, 겔30:21-22).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신 팔
이 말이 은유적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17:8-16절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 때 아말렉과의 싸움이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명령을 따라 싸움에 나갔습니다. 싸우는 자는 여호수아와 뽑힌 자들이었지만 뒤에서 11절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기고,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 오지 아니한지라”(출 17:12)
하나님은 모세의 손과 함께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곳에 단을 쌓고 이곳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했습니다. ‘닛시’는 정확히 말하면 ‘나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누구의 힘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신 4:34)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 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신 것을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신 26:8)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팔이었습니다.

기억해야할 여호와의 팔,
1) 종 되었던 우리를 인도해 내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신 5:15)
흔히 우리가 사용하는 말 가운데 ‘배은망덕(背恩忘德)’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고 배반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인도해낸 것을 배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종 되었던 우리를 예수님의 힘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 이적과 기사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목도한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그와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행하실 것이요”(신 7:19) ‘그와 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예전에 한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기억해야 합니다. 보지 못했어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징계와 그 위엄과 그 강한 손과 펴신 팔과”(신 11:2)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고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 있었던 사실들을 우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서 그것을 믿습니다. 바람과 전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전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등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전기가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의 팔로 나타내신 능력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 하였었노라”(신 9:29)
우리는 얼마나 기억합니까?
왜 성경을 매일 보고 주님을 앙모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이적과 기적들을 보고 기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힘과 주님의 힘을 기억하여 그분이 곧 우리의 능력이라는 것을 믿기 위해서입니다.
물고기의 지능은 0.4밖에 되지 않고 기억은 3초밖에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과 수초 전에 물고 혼났던 미끼를 또 다시 물어 낚시에 걸린다고 합니다. 물고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의 결국은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했습니다.

구원하시는 팔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 {셀라}”(시 77:15)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으시니이다”(시 89:1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아침마다 우리의 팔이 되시며 환난 때에 우리의 구원이 되소서”(사 33:2)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사 40:10)라고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언하며 구원하실 주님의 팔을 그리워하며 찬양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들은 요한복음 12장 38절에서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기록함으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여호와의 팔로 나타나신 이는 예수그리스도이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능력을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달랐습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셨습니다. 저주하시는데 이 능력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는데 사용하셨습니다.

한때 세기의 방랑자였던 존 뉴턴 목사님이 계십니다. 전직이 노예선의 선장으로 노예를 사고 파는 악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고 회개하여 주께로 돌아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장차 저 천국에 가면 놀랄 일이 3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천국에 가면 그곳에 꼭 와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던 사람이 그곳에 와있지 않은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저 사람은 교회에서 헌금도 열심히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도 오래 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천국 갈 것이다 생각했는데 천국에 와 있지 않을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 놀랄 사건은, 세상에서 결코 그곳에 와있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천국에 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 할 것이라는 겁니다.
아마 천국에 가면 지존파를 보고 우리가 놀랄 것입니다. 인간의 인육을 먹었던 지존파 그들이 감옥에서 회개하고 예수 믿었거든요. 지존파 중에 한 명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따뜻한 가정에서 자랐더라면 나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을…” 그들은 어릴 때부터 가정의 소중함을 모르고 자랐어요. 행복한 가정을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체험한 적이 없습니다. “나도 어릴 때부터 따뜻한 가정에서 자랐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을…” 그리고 한마디 더 했습니다. “내가 진작에 예수님을 믿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을…”
세 번째로 놀랄 것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놀라운 사실은 나 같은 죄인이 그곳에 와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은 악한 죄인이고 나는 아닌 것 같이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주병 걸린 사람처럼 말입니다.
존 뉴턴 목사님은 이 고백으로 회개의 간증찬송이라고 할 수 있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라는(405장) 곡과 ‘시온 성과 같은 교회’(245장)를 썼습니다.

바울도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했습니다. 진짜 죄인은 바로 나입니다. 나를 위해 주님은 구원하시는 능력의 팔로 오셨습니다.

주의 영원하신 팔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시 37:17) 했습니다.
악인의 팔이 부러진다는 것은 그들의 행사가 끝나는 것을 말합니다. 악인은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망합니다. 그러나 의인은 다릅니다. 그 팔을 여호와께서 붙드십니다. 그분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녀, 가산을 지킬 수 없습니다. 혹 지키는 것 같으나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신 33:27)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부르짖고 깨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깨우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주무시기 때문에 깨우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들의 잘못으로 하나님이 떠나시는 것이며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사 51:9)라고 부르짖은 것처럼 우리도 다시 한번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역대 국회 중에서 제일 많은 국회의원들이 구속 수감되는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지금 그분들만 잘못한 것이 아닌지 모릅니다. 이 나라에서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정치적 관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분들은 억울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속담에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흑 탕 물을 일으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이 뜻은 한 사람의 잘못을 질책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미꾸라지가 흑 탕 물을 일으키려 해도 일어나지 않는 깨끗한 물이면 됩니다.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마십시다.
예수님에게는 얼마나 많은 미꾸라지가 있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바리새인, 서기관 등)이 미꾸라지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서는 결코 흑 탕 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처음부터 잘못, 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교회나 우리 자신도 흑 탕 물의 빌미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내 자신, 내 교회만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주님이 원치 않으십니다. 설령 이적과 기적을 체험했다해도 주님의 일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큰 화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과 이적을 보고도 기억치 않고 잊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나무 도마와 플라스틱 도마에 살로넬라, 리스테리아 등 여러 종류의 박테리아를 뿌리고 하룻밤 뒤 관찰을 하자 플라스틱 도마 위의 박테리아는 여러 배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무 도마에서는 박테리아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나무는 수억 년 동안 박테리아와 싸워온 결과 죽은 뒤에도 미생물의 공격에 저항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나무는 죽어서도 자기를 지킵니다.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면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교회를 주님의 팔이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정을 주님의 팔이 지켜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고 있는지를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잘못이 있었다면 계속해서 고쳐 나갑시다. 그리고 새로워집시다. 우리는 개혁교회입니다. 고치는 것을 변화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그 때까지 지속적인 개혁만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마음을 비우면 됩니다. 욕심을 버리면 됩니다. 예수그리스도 우리의 팔이신 주님처럼 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여호와 팔이, 주님의 팔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멘-

나의 샘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29. 나의 샘이신 예수님) / 본문 : 슥 13: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

더운 나라 사람이 조금 불쌍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겨울이 없어서 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쯤 열대지방 선교사들은 눈을 설명하느라 바쁩니다. 하늘에서 흰눈이 내려오는데 그것은 냉장고에 이슬이 맺혀 있다가 얼면 송이 얼음처럼 되는데 그것이 눈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솜을 꺼내 가지고 이렇게 생겼는데 그것이 얼음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보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눈이 내리면 조금씩 시인이 됩니다. 백설의 눈을 보면 어린 동심으로 되돌아갑니다. 그것은 무언의 동화 같습니다. 세상은 변해도 순수성만은 옛날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보는 이에 따라 눈의 의미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은 흰 눈을 보며 ‘떡가루’를 생각합니다. 헐벗은 사람들은 ‘목화송이 같다’고 합니다. 저처럼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설탕’을 연상할 것입니다. 감기걸린 사람은 ‘아스피린분말’로 영화 매니아들은 ‘낡은 필름이 돌아가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이 정도는 다 그래도 서정적입니다. 슬픈 것은 자동차 때문에 갈 길이 걱정된다는 것입니다. 이 눈도 알고 보면 물입니다. 그런데 물 중의 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샘물입니다.

물 중의 물(샘물)
중국에서는 월급을 ‘신수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나무와 물 값이라는 뜻입니다. 물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제일 필요한 것입니다. 샘물은 계속해서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샘은 넘쳐나는 것입니다. 누가 물을 퍼가든 안 퍼가든 샘은 끝임 없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샘으로 말한 것은 그의 은혜는 한이 없고 영원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샘하면 먼저 ‘깊은 산 속 옹달샘’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팔레스틴에서 샘하면 그것은 곧 오아시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물이라고 하지 않고 샘이라고 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물은 생명만 공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사용하신 것이 물입니다. 홍수가 나면 먹을 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비를 보내실 수도 있으며 큰 강들을 말리실 수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겔 47:1, 슥 14:8). 심판과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물은 샘하고는 다른 물입니다. 일반적으로 물은 기상학적으로는 ‘구름, 안개, 비, 이슬’이라고 부르고 지리학적으로는 ‘우물, 시내, 수로, 호수, 저수조’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냥 물이 아니라 예수님을 가리켜서 샘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초림하실 때 심판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주로 오시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샘물은 오직 살리는 역할만 하기 때문입니다. 샘이 사람을 죽이거나 심판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허준’이나 ‘대장금’ 같은 한의학을 다룬 드라마를 보면 물을 이른 아침 샘에서 기러오는 것이 약효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물이 다르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판하는 물이라면 홍수, 아니면 비를 내려 주시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오늘의 물은 샘물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를 살리는 물입니다.

샘은 생명을 줍니다.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케 하되 곧 속죄의 물로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로 그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민 8:7)라고 하나님이 일러 주셨습니다. 정결케 하는 것은 물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전 구약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죄를 온전히 우리처럼 씻어 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죄를 씻는 방법을 하나님은 일러주셨는데 그것은 물을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더러워진 죄를 씻는 예식이며 예표인 것입니다.
창세기 49장 22절에서 요셉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 49:22)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언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축복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샘 곁의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었다는 것은 요셉에게 주어질 축복이었습니다.
삼손을 하나님이 샘을 터져 나오게 하심으로 살리셨습니다. 이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고 합니다.(삿 15:19)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서는 물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소중히 간직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물(창 26:18-19)이 있었고 물 항아리(창 24:14), 물병(삼상 26:12), 수도(왕하 18:17), 물구유(창 30:38)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낙원의 모형을 ‘흐르는 시냇물’(겔 47:1)이 있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처럼 물이 귀한 나라에서는 늘 물을 저축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저축할 수 없는 웅덩이는 곧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물이 없는 이스라엘은 살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이 갈급함을 모르면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뿐만이 아니라 영혼도 갈급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물질과 명예도 있지만 영혼은 갈하여 있음을 봅니다.

인도의 영적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도임에도 불구하고 한번은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야말로 인도인들의 계급차별 의식과 타락한 문명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고자 예배당을 찾아갔습니다. 무명옷을 두르고 피부색이 검은 간디가 교회 문 앞에서 간디는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인이 될 뻔했던 간디는 ‘진리는 좋으나, 교회가 잘못되었구나!’라고 한탄하고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잠언 10:11에서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편견과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갈함보다 영혼의 갈함이 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영혼의 샘물을 해결하여 나와 및 많은 사람을 살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샘은 더러움을 씻어줍니다.
중국의 북쪽 산족마을이나 네팔이나 유목민들을 보면 물이 귀하기 때문에 잘 닦지 않아 더러운 것을 봅니다. ‘사스’같은 질병도 왜 생기겠습니까? 한마디로 잘 닦지 않아 위생이 청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잘 닦는 민족입니다. 처음부터 선진국형 국민입니다.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장면이 창세기 18장 1-9절에 나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이들을 맞이할 때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창 18:4)라고 했습니다. 무덥고 사막과 같은 이 지역에서 발을 씻는 다는 것은 얼마나 피로를 풀어주며 행복감을 주는지 우리는 쉽게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대접에 얼마나 감동하셨으면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사라에게 아이을 낳게 한다고 했겠습니까? 사라는 순간 하나님의 이 말씀이 믿어지지 않아 킥킥거리며 웃기까지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정결예식에서도 몸에 물을 뿌리든지 부분적으로 씻든지 아니면 전체를 물로 씻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희생제물의 각 부분들도 물로 씻었습니다. 이 정결 의식은 거룩한 백성을 삼는 상징적인 중요한 예식입니다(겔 36:25, 사4:4).
예수님도 겸손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겸손만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을 때 베드로는 처음에 닦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닦지 않으면 나와 관계가 없다고 하니까 그럼 발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를 씻겨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발을 닦았으면 모든 것을 다 닦았다고 하셨습니다(요13:4-12).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지만 세례요한에게 세례(침례)를 받으셨습니다(마 3:13-14).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 옥합의 향유와 여인의 눈물로 발을 씻으셨습니다(눅 7:37-38). 이 모든 것은 죄는 반드시 씻어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친히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감추려 하는 것은 잠시는 가능할 지 모르나 영원히 묻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여러 해 전 반일 감정이 고조되면서 국민의 성금으로 독립기념관이 세워질 때 이야기입니다. 개관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화재원인을 조사하던 중 타다 남은 기념관 지붕에서 커다란 깡통이 몇 개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그 지붕 속에 있는 깡통이 화재에 어떤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나 싶어 수사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그 깡통은 인부들이 지붕마무리 공사를 하면서 화장실 가는 것이 귀찮아 일시적 대용품으로 사용한 물건이었습니다. 아무도 볼 사람이 없을 것으로 여겨 그곳에 둔 채 기념관 지붕을 기와로 덮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죄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기억도 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나 고백하지 않은 은밀한 죄는 언젠가는 들추어지기 마련입니다. 혹 세상에서는 숨기고 지나갈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 22:16)고 했습니다.

샘은 성령축복을 말합니다.
샘물은 기본적으로 정화된 물로 볼 수 있습니다. 더러운 것을 깊은 땅속에서부터 솟아 나오는 물은 이미 더러운 것을 제거하고 생명을 공급할 준비가 된 물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오는 샘물은 사람을 살리는 영의 말씀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하기를 “내가 자산에 강을 열며 골짜기 가운데 샘이 나게 하며 광야로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으로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사 41:18) 또한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1)고 했습니다.
이 샘의 기적을 예수님께서 선언하심으로 이루어지심을 알려주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37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8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7:37-39)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받은 성령이 샘입니다. 이것은 ‘깊은 산속 옹달 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배에서 흘러나온 보혈을 말합니다. 그 보혈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죄를 씻을 수도 깨끗해 질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깨끗케 하시며 살리실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남태평양에 누라반디라는 섬이 있습니다. 이 섬에서는 남자가 결혼할 때 여자의 몸값을 암소로 계산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내를 암소와 바꿔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섬에서 가장 영리하다고 소문이 난 링고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별로 똑똑해 보이지도 않고 잘 생기지도 않은 처녀를 암소 여덟 마리나 주고 데려왔습니다. 보통은 두 마리입니다. 사람들은 많아야 네 마리만 주면 되지 여덟 마리나 주었다는 것은 허세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 아내가 이뻐지기 시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혜롭고, 다른 사람들이 처음 본 것과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링고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내 아내 될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준 것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랑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다른 사람은 암소 2마리 정도에 해당하지만 이 신부는 여덟 마리를 주고 데리고 왔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몸값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지불하셨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우리의 생명을 얻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꼭 이 세상에서 잘 살아야 됩니다. 그 값을 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성령이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나의 인자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28. 나의 인자이신 예수님) / 본문 : 마 8:20, 단7:31

이름이란 후대에 많이 불려지던가 아니면 잊혀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인자’라는 호칭만큼은 더 이상 불려지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이름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이란 칭호는 유대적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란 예수님의 신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인자’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류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된 호칭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인자(人子)의 칭호는 네 복음서 안에만 나옵니다. 사도행전에는 단 한번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에서 그가 숨을 거두려고 하는 순간에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하였습니다. 이 칭호가 히브리서 2:6에 인용이 된 시편 8편 4절 말고는 어떤 서신에도 인자 칭호가 나오지 않습니다.
본래 인자(uiJo;” ajnqrwvpou:휘오스=아들 안드로포우=사람)는 희랍어가 아니라 아람어에서 처음 왔습니다. 이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셨을 때 ‘사단’과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는 아람어입니다. 즉 급하고 직접적으로 하신 말씀은 당시에 서민들이 사용하는 일상적인 말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외국분과 결혼하신 분이 있는데 이분들이 싸울 때는 급하게 하는 말이 각자 자기가 어렸을 때 배운 본토어를 가지고 싸운답니다. 즉 쉽게 나오는 일상적인 용어고 또 이 말이 편하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도 ‘인자’라는 말을 사용하실 때 일반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용어는 어원학적으로는 사람이라고 하는 명사와 동등한 보편개념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으나 복음서의 맥락에서 이 인자가 사람과 같은 명사가 아니라 한정적으로 사용이 된 칭호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6:24에 나오는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에 보면, 인자와 사람이 함께 나오며 혼돈이 없고 어느 것도 보통 사람을 가리킨 말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여 아람어의 인자는 보편적인 의미의 화자(話者)가 완곡하게 자기를 지칭한 대명사와 같은 용법입니다. 가령 마태복음 16:13에 “사람들이나를 누구라 하느냐”(막 8:27과 눅 9:18)하였습니다. 이 용법은 보편적인 사람이 아닌 특정인을 가리키는 ‘나’를 말하는 한정적인 것입니다. 즉 보편적으로는 ‘사람의 아들’로 말씀하셨으나 이것은 예수님께 적용된 특수한 용법이라는 것입니다.

예언된 호칭입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단 7:13)라고 예언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호칭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기록이 된 예수의 말씀은 공관복음에 69회 나오고, 요한복음에 13회 나옵니다. 동일 문맥이나 문절에 반복이 된 것을 제하면 공관복음의 총계69회가 39회가 됩니다. 여기에 요한복음의 것을 추가하면,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59회나 인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이 호칭이 예수님 스스로에 의해서만 집중적으로 사용되었겠습니까? 만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를 가리켜 ‘사람의 아들’(인자)이라고 사용합니까? 그렇게 부르는 예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말하지 않아도 사람의 아들인 것을 다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스스로의 겸손과 또 하나님께로서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시고 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표현할 때는 이 용어는 적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러야 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스스로를 가리켜 국민들에게 ‘저는 여러분들의 종입니다. 심부름꾼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국민들은 대통령이라고 불러야지 ‘내 종아’라고 부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목사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 스스로는 하나님의 ‘종’으로 말해야 합니다. 사람의 ‘종’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기도하실 때는 ‘종’이라는 표현은 좋지 않습니다. ‘목사’라고 물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기도하실 때 어떤 분은 우리 ‘종’님을 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실 때 말고도 목사님을 만나서 ‘종 님’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보통 때 목사라고 부르면 기도하실 때도 목사라고 부르면 됩니다. 그러나 목사 자신은 하나님과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으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소개하실 때 ‘인자’라고 소개하신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용어를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스스로는 59회나 직접 인자라고 사용하신 반면 제자들은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자라고 친히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중심사상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이미 하나님 나라의 경이는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세례 요한 제자들의 질문에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자가 살아나며 가난한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3-4)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군중 속에 ‘인자’로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인자이신 자신이 지상사역과 하늘의 영광으로 나타나실 동일 인물이시며, 두 차원의 일치를 수용하여야 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인자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요한복음 14:9의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하신 예수의 답변은 요한복음이 제시하는 인자와 하나님 아들의 일치문제의 요약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지칭하여 인자로 사용한 경우를 세 가지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의 사역과의 관련이 된 일련의 말씀에서 죄를 사할 권세가 있음을 선언하신 경우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막 2:10)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뿐만 아니라 그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실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인자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마 11:2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친히 오신 목적을 설명하실 때 모두 ‘인자’라고 사용하신 것입니다.

둘째, 인자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관련이 된 말씀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31)라고 하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가운데 스파르타(Sparta)는 엄격한 훈련과 교육을 통해 용감한 전사를 배출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후퇴는 없고 전진만 있었기에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 중에 그 어느 한 사람도 화살이 등에 꽂힌 자가 없고 앞가슴에 꽂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스파르타식 교육이라고 하면 전진만 있는 엄격한 교육을 상징합니다.
스파르타 교육 중에 있었던 이야기인데, 짧은 검을 지급 받은 한 병사가 지휘관에게 자기가 가진 검이 너무 짧아서 전투에 불리하니 바꾸어 달라고 했습니다. 지휘관은 그 병사의 어깨를 잡으면서 “검이 짧으면 한 발짝 더 빨리 적진으로 전진하라. 문제는 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발짝 더 앞서가는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라고 교훈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자라고 소개해 주신 뜻에는 인간 세상 속에 오신 예수님의 비장함이 엿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에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고자 오신 ‘인자’이십니다. 우리에게도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4)고 하셨습니다.

셋째, 미래에 도래할 인자의 영광스러운 강림과 관련이 있는 말씀에서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13:36, 14:62, 마 24:27, 37, 39, 44)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고 하셨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도시에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힘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때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제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새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 시몬즈라는 젊은이가 두 손으로 머리칼을 움켜쥐고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실신했습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한숨을 쉬며 자신의 과거를 모두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골집 큰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내려온 재산은 많았지만 홀어머니의 잔소리를 듣기 싫고 시골에서 평생 산다는 것이 고역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집안의 값진 재물을 챙겨서 집을 떠났습니다. 그것이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입니다. 그 동안 연락한번 하지 않고 어머님의 생사조차 모릅니다.”젊은이는 이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폭우로 옷은 흠뻑 젖고 주위는 어두워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산 속의 외딴집을 찾았습니다.
집 가까이에 이르러 보니 대문 위에 등불이 환히 걸려 있었고 늦은 밤중인데도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는 방문 앞에 가서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놀라서 뛰어나오시면서
“아니 이게 누구야! 시몬즈구나!”
어머니는 방문을 열어 젖히고 한걸음에 뛰어나와 비에 흠뻑 젖은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어머니 이제야 찾아온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런데 제가 집에 있을 때는 초저녁부터 대문을 꼭꼭 잠그시더니 왜 이렇게 늦은 밤에도 대문을 활짝 열어놓으셨어요? 그리고 대문 위에 등불은 왜 켜 놓으시고요?”
“애야. 네가 집을 나간 그날부터 난 하루도 대문을 잠근 적이 없단다. 날마다 네가 오늘 저녁에는 돌아오겠지 생각하며 등불을 켜놓고 대문도 열어놓았단다. 애야 잘 돌아왔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마음이 이 보다 더하면 더하실 것입니다.

인자는 하늘에 계십니다.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 1:51)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반모섬에 유배되어 있는 요한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도요한은 계1:13에서 환상으로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계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고도 하셨습니다. 즉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하늘에 가 계신 것입니다. 이분이 가 계시다는 것은 우리도 그곳에 있게 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자로 이 땅에 오셔서 머리 둘 곳이 없던 분이셨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 예수께서 인자로 오신 것은 우리를 하늘나라로 초청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 아멘 -

나의 빛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26. 나의 빛이신 예수님) / 본문 : 요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하나님께서 넷째 날에 창조한 것은 해와 달과 별의 빛입니다. 태양에 빛이 없으면 이 지구 위에 사람들이 살 수 없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이나, 날 짐승이나 벌레도 살 수 없습니다. 햇빛이 없으면 식물도 자랄 수도 없습니다. 식물이 꽃을 피지 못하고 곡식이 성장하여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빛이 없으면 금수 초목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 인생들까지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캄캄한 밤에 전등불이 없으면 작은 촛불이라도 켜야합니다. 캄캄한 밤에 불이 있어야 합니다. 불 없이 잠시라도 지내기가 힘이 듭니다. 빛은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입니다.
우리의 현대문명은 빛의 문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컴퓨터나, 텔레비전, CD플레이어 등은 알고 보면 모두가 빛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전자기기들은 레이저에서 방출되는 광선을 이용하여 우주 통신, 정밀 공작 등에 널리 응용되고 있습니다. 병원에 의사들이 현대최신 기계(엑스레이)를 가지고 사람의 내부를 들어다 봅니다. 이것은 다 빛의 작용입니다.
우리나라 포항제철에 만든 ‘포항방사광가속기(PLS : Pohang Light Source)’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체 부지는 660,000㎡로서 이중 조성한 부지는 110,000㎡이며 축구 경기장으로 비교하자면 약 20개 정도의 크기에 해당하게 되는데, 8개 동의 건물은 42,000㎡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재 방사광가속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12개국뿐이며, 더욱이 ‘포항방사광가속기’처럼 광범위한 영역의 빛을 만드는 최첨단 3세대형 가속기는 6개국밖에 없습니다.
단일 실험 장치로서 건설비가 무려 1400억원이 소모되었고 건설 기간만도 5년여 남짓 걸려 완성되었습니다. 이 장치는 에너지가 25억 전자볼트를 이용하여 전자를 빛의 속도로 가속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하면 보통 실험실에서 얻을 수 있는 적외선, 자외선, X선 보다 그 밝기가 몇백만 배에서 수억 배에 달하는 강력한 빛이 나타납니다. 이 빛을 이용하면 생명공학, 의학, 4G D램 이상 초고집적회로 등 첨단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과학기술을 선도할 ‘미래를 밝히는 빛’이라고 말합니다. 빛이 없으면 현대문명도 이만큼 발전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로 선포하신 두 번째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축제 기간인 초막절이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두 가지 의미 있는 예식행사가 있는데 하나는 성전 제단에 물을 끌어들이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좋은 기회를 교육에 활용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 7:37-38)라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문 말씀을 하신 동기가 된 예식입니다. 4개의 황금 촛대를 밝히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젊은 제사장이 사닥다리에 올라 황금 촛대에 점화함으로 온 성전과 예루살렘을 빛으로 밝히는 상징적인 행사인 것입니다.
이 두 예식은 초막절에 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것을 상징화 한 것입니다(출13:21-22, 14:19-25).
요1:5절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셨습니다. ‘빛’은 예수님을, ‘어두움’은 이 세상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빛이 계속하여 세상에 비취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으로 온통 덮혀 있어서 어디를 보아도 빛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빛이 비취고 있지만 어두움이 이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두움과 빛은 서로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공존할 수도 없고 합쳐질 수도 없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이 빛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에는 ‘이기지 못한다’(overcome)는 뜻이 있습니다. 어두움이 아무리 강해도 빛이 비취면 단숨에 물러갑니다. 우리는 어두움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두움에 파묻혀 그럭저럭 살아가고, 빛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은 희망과 기쁨이 없습니다. 세상을 보고 잘 살아보려고 노력들 하시지만, 미안하지만 세상에서 그것을 얻으실 수는 없습니다. 혹 얻었다고 해도 영원한 것이 못되며 오히려 여러분을 착각 속에 빠지게 하여 영원하신 빛을 바라볼 수 없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기쁨과 소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빛이십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시 27:1)라고 말했습니다. 하바국은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합 3:4)하셨습니다.
모세와 대화하실 때도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신 방법중의 하나로 빛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빛으로 말씀하신 것은 그가 곧 하나님 되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빛으로 오실 것을 갈망하던 사람들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시27:1, 잠6:23). 이사야는 오실 메시야를 가리켜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사 49:9)이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이 누가복음 1:78-79에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요1:4-9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해 주심으로 이 예언된 말씀들과 이루어진 말씀에 대해서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4:16에서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하나님이 빛이시고 예수그리스도가 빛이시니 당연히 우리도 빛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마 5:14)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라고 했습니다.

단체의 [신곡] 가운데 나오는 내용입니다. 단테가 한번은 지옥에 가서 구경을 합니다. 한 구석에 가보니 여러 사람들이 등에다 무거운 돌을 지고서 있습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습니다. “아니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무거운 돌을 지고 서 있습니까?” 그가 말하기를 “저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에 교만해서 허리를 굽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올라가는 문은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 하기 때문에 그 연습을 하느라 저 모양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리 허리를 굽히는 것을 배웠더라면 얼마나 좋을 뻔했습니까?
우리가 빛을 발한다는 것은 높은 지위나 명예가 있어서만 비추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개인택시기사 한 분 소개할까요. 이분 성함은 강박수입니다.
이분은 낙천적인 성격에 하나님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눈 비시시 부비며 일어난 아내는 “당신은 매일 뭐가 그렇게 신나요?”라고 묻는다. “당신은 가서 잠이나 한잠 더 푹 자구려”하면서 아내를 두드립니다. 강집사는 휘파람을 불면서 “하나님 오늘 으싸으쌰~ 한번 살아볼 텐데 하나님 오늘도 팍팍 밀어주세요? 달구지도 잘 굴러가게 하시구요. 아무리 사랑스럽지만 다른 달구지하고 절대 키스는 안됩니다.”하면서 집을 나섭니다.
첫 번째 만난 손님은 길 저쪽에서 안경쓰고 손을 높이 흔드는 여자. 예전 같으면 안경쓰고 특히 여자를 이른 아침부터 태우면 재수 없다고 했는데 지금은 손 흔드는 사람은 무조건 OK
“어서 오십쇼! 굿모닝!” 형식적인 아침인사가 아니라 씩씩하고 우렁찬 소리로, 그러나 손님은 요즘같이 무서운 세상에 혹시? 긴장을 하면서도 아니지. 기사양반 성질 건드렸다간 나만 손해보지… 하는 쪽으로 사고가 진전되면서 마지못해 ”네 좋은 아침입니다.“ 조용히 말합니다. 강집사는 손님의 표정을 흘깃 거울 속으로 바라보니 표정은 좋은 아침이 아니다.
”어디로 모실갑쇼?“ ”세브란스 영안실이요!“ ”저런 누가 돌아가셨군요.“ ”네가 젤 존경하는 친척분 한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요새는 왜 그리 폐암이 부쩍 많답니까?“ ”그분은 술, 담배도 안하셨는데…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처음엔 귀찮았는데 이제 대화가 되었습니다. ”어느새 다 왔습니다. 이거 섭섭합니다. 살다보면 또 만나겠지요. 건강하세요“
두 번째 여자손님. 무엇에 쫓기는지 아니면 무엇을 쫓는지 여간 급하지가 않았다.
“기사 양반 남대문으로 빨랑 갑시닷!” 사뭇 명령조다. 그렇다고 기분 나빠할 강집사님이 아닙니다. “아마 누가 기다리시는 모양이죠?” 여자는 흘깃 쳐다보면서 뭐 이딴사람이 다 있어? 데려다주고 돈만 챙기면 되지 하는 눈치입니다. 강집사님은 이럴 때는 음악을 틀어줍니다. “클레식을 좋아하실 것 같은데…. 어디 베토벤 없나?”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음악은 달콤한 뽕짝을 틀어줍니다. 일단 클래식으로 허영의 사다리를 타본 여자는 뽕짝의 추억에 조금씩 풀어집니다. “사실은 내 돈 떼어먹고 도망간 여자가 남대문에서 장사를 한데지 뭐예요. 지금 안가면 못 만날까봐 잠도 설치고 지금 갑니다.” “아이쿠 오래 되셨나요?” “5년도 넘었어요. 내가 받은 고통은 말로 다 못해요. 이혼까지 할 뻔했어요.” “그러게 사람일은 한치 앞을 모른답니다. 철썩 같이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하고!” 여자는 이제 손뼉이라도 칠 기세였다. “맞아요. 맞아!”
이렇게 이야기하다가는 밤 세웁니다. 저녁때로 갑니다. 어둑어둑 해질 때 아파트 입구에서 할머님 한 분을 태웠습니다. 며느리로 보이는 젊은 여인은 돈을 두둑이 주면서 “말죽거리에 가면 박 의원이 나와있을 겁니다. 그곳에 안내해 드리면 돼요!” 그러나 할머니는 내릴 곳이 다가오자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며늘애가 날 버린 거라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우.” 말로만 듣던 신종 고려장에 직접 동참을 한 꼴이 되었다. 하도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할머니를 다시 집으로 모셔다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머니 집이 몇 동 몇 호인지 아십니까?”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할머니는 서글픈지 고개만 저으며 말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태웠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한참을 해매고 수소문해서 그 집을 찾았다.
골치아픈 암 덩이리 하나를 치운 것으로 생각했던 며느리는 돌아온 할머니를 다시보자 경악을 했다. “아니 누가 당신더라 남의 집일에 감 나라 콩 나라 하랬어?” 시퍼런 여자가 늙어가는 강집사에게 퍼붓는 소리다. “돈도 푸짐하게 주었는데 눈치껏 내려주기만 하면 될 거 아냐?” 더 이상 대화가 안 되는 이 여자와 말할 가치를 없어서 무뚝뚝하게 “주인 양반 안 계십니까?” “남의 주인을 왜 찾아? 외국 출장 중인데 왜?” ‘아 남편 없는 틈을 타서 시어머니를 버리시겠다? 하이고 잔머리 한번 요란하게 군리셨군 그래?’라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래도 당신 남편을 낳아주신 분 아니오? 잘 좀 돌봐드리십시오!”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오늘은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았지만 가는 길에 서울역에서 아줌마가 탔습니다. “아자씨, 이거 보고 요기로 데려다 줘유.” 얼굴에 기미가 덕지덕지 낀 시골 아줌마는 주소, 약도, 전화번호까지 적힌 너덜~너덜~한 종이를 내민다. 아줌마는 시골에서 더 이상 먹고살기가 힘들어 가족 대표로 여관집에서 식모 살러 오신다고 했습니다. 월급은 130만원인데 이 액수에 황홀해 있었습니다. 꿈이 부푼 아줌마에게 말도 못하고 약도를 따라 그 앞에 내려드리면서 ‘하나님 이분이 어린양 아닙니까? 지켜주세요.’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일하시면서 힘들고 어려우시면 가까운 교회에 나가세요. 그곳에 아줌마를 지켜주실 하나님이 계십니다.”라고 말할 때 고쟁이 속바지에서 돈을 꺼내주려는 아줌마에게 웃으면서 “아줌마 서울에 오신 것을 기념으로 제가 무료 서비스합니다. 돈은 그만 두십시오.” “아자씨, 시방 머라고 하셨당가유? 돈을 안내도 된다구유?” 강집사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줌마는 모두지 믿을 수 없다면서 말합니다. “아니 왜유? 밸일도 다 있구만유. 서울가면 코 베어간다고 조심하라고 하든디 다 거짓말 이네유? 아자씨 참말로 공짜란 말이어유?” 강집사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아줌마 행복하게 사세요. 꿋꿋하게 사세요. 예수님 믿으시구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앗 뜨거워 앗 뜨거워 주님의 사랑”을 찬양한 졸라맨이 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표현된 주님의 사랑인데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웨일즈에 나이 많은 설교자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유능한 노인이고 훌륭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기 거북하지만 그는 비꼬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예리한 비평가였습니다. 어느 기회에 그는 두 사람이 강사로 되어 있는 두 집회의 마지막 시간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신학교 교수들이었습니다. 처음에 한 강사가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설교를 마치자마자 이 문제의 설교자는 곁에 있는 사람에게 “빛만 있지 열은 없군”하고 말했습니다.
두 번 째 강사가 설교했는데 그는 전번 설교자 보다 나이가 많고 다소 열정적이었습니다. 그가 설교를 마쳤을 때 그 냉소적인 교수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고개를 돌리고 “열만 있지 빛이 없군”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경우에 있어서 그분들은 다 바른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설교자가 다 결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빛과 뜨거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뜨거움이 없는 빛은 결코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빛이 없는 뜨거움은 영구한 가치가 없습니다. 모르지요. 지나가는 비처럼 당분간 화끈하는 효과가 있을지.

빛은 불에서 나옵니다. 불은 뜨겁습니다. 사람의 몸도 차가우면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잃으면 금방 차가워집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뜨거운 것입니다. 사랑하면 뜨겁습니다. 한마디로 불이 납니다. 차가운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불타오릅니다. 그리고 빛이 발산됩니다. 뜨거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