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24) 끝자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3. 예수님의 비유(24) 끝자리) / 본문 : 눅 14:7-14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13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기독교의 가치관과 본질은 영성에 있습니다. 영성 그러니까 마치 환상이나 꿈을 꾸고 거품을 토하면서 방언기도를 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영성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이 기준이 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영성입니다. 세상 적인 기준은 물질, 성공, 출세, 명예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부는 개신교 목회자와 비교해 볼 때 독신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 세상의 가치에 덜 얽매어 있습니다. 한 사회학자 연구에 따르면 직업인의 정직 윤리 수준 평가에서 신부가 1위, 승려가 3위, 목사는 5위로 나타났습니다. 목사가 도덕성에 있어서 신부나 승려보다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목사에 대한 평가는 교회에 대한 평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전국 감리교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영성, 도덕성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말로는 영성을 위치지만 실상은 영성을 잃어가고 세상 적인 가치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2005년 8월 25일에 인천 국제 공항에서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향하던 항공기가 이륙 한 지 10분만에 5살 난 ‘제시카’라는 여자 어린아이가 구토 증세를 보이다가 의식을 잃었습니다. 엄마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이를 살려달라고 외쳤고 승무원들이 달려왔습니다. 승무원들은 아이에게 산소 마스크를 씌우고 해열 좌약을 투여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있는지 확인을 했더니 의사 단체가 탑승 중이었습니다.
그렇게 10여분간의 소생술 끝에 아이가 깨어났습니다. 그동안 딸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인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한 재미교포 의사는 “기압 차이로 인해서 아이의 감기 증상이 갑자기 악화돼 고열과 경련이 발생했다”며 “아이가 LA까지 12시간의 비행을 견디기는 무리”라고 소견을 밝혔습니다. 이런 상황을 전해들은 기장은 곧 바로 회항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항공기는 승용차가 아니기 때문에 회항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항공기가 착륙할 때는 랜딩기어가 활주로에 닿으면서 100t에 가까운 충격이 더해진다고 합니다. 항공기 안전을 위해 중량을 최대한 줄여야 하고, 이에 따라 모든 항공기는 공항에 이착륙할 수 있는 무게 제한이 있습니다. 인천~로스앤젤레스 노선에 투입되는 기종인 보잉 747의 최대 이륙 중량은 388.7t이지만 최대 착륙 중량은 285.7t이어서, 착륙을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항공유를 처리해야 했습니다. 기장은 고심 끝에 항공유를 버리기로 하고 인천 앞 바다 부근에 있는 항공유 방출구역에 약 16만 8000파운드(약 72.6t)의 기름을 쏟아 부었습니다. 착륙무게를 맞춘 항공기는 인천 국제 공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 아이는 대기 중이던 구급차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회복된 후 귀가했습니다. 그리고 항공기는 재급유 후에, 처음 출발 시간보다 3시간 늦게 다시 로스엔젤레스로 향했습니다. 이 날 항공회사는 기름 값으로 4,000만원, 이착륙료, 연결 승객 관련 경비로 1,000만원 등 모두 5,000만원의 손해를 보았습니다. 한 생명은 5,000만원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가던 비행기가 되돌아 온 것처럼 세상을 향하던 우리의 방향을 예수께로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마땅히 손실이 있어도 감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일러 주시는 참된 기독교의 가치관과 영성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누가복음 14장 1절에서부터 보면 안식일에 예수님이 병을 고치는지 바리새인들이 따라다니며 엿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고창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아주 민감하게 생각하는 안식일 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사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바리새인)과는 달라야 된 다는 것을 비유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높은 자리

예수님을 식탁에 초대한 이 사람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초대했습니다. 무언중에 이들은 자기가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예수님은 저 아래 어느 한쪽에 앉아 계시게 되면 그것은 바로 예수를 모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라고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 까지는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유대인들의 잔치자리는 디귿 자 형태로 되어있데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가운데 자리에 앉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교만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막 12:38, 39).
1950년대 미국의 지성을 대표하던 라인흘드 니버 교수는 인간의 타락은 교만 때문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권력의 교만이요, 그 다음은 지식의 교만이요, 그리고 덕망의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은 사람은 권력을 잡기까지는 가장 약한 위치에서 자신의 당선을 호소하며 매달리다가도 일단 권력의 정상을 정복하고 나면 자신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마침내 그것은 살아 있는 우상이 되어 자신을 그 자리에 치켜세운 사람 앞에 군림하는 것입니다. 세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는 “사다리 꼭대기에 다 올라간 사람은 아래만 내려다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내려다본다는 말입니다.
윗자리에서 보면 내려다 보게됩니다. 전체를 다 보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저는 뉴스를 보다가 처음에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깜도 안 된다.” 자꾸만 그런 말을 하는데 대통령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국어 지식이 깊지는 못하지만 국어를 공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중의 한 사람인데 이 말이 어려웠습니다. 저는 대통령 때문에 이 말을 그렇게도 사용하는구나 알았습니다. 높은데 계시니까 “깜도 안되겠지요.”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멀리 주변에 있는 것들은 보일랑 말랑해서 자연스럽게 작은 것들을 무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높은 자리는 영적인 사람에게는 결코 좋은 자리가 아닙니다.

낮은 자리

예수님이 우리에게 ‘맨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신 것은 그 자리가 겸손과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게 해 주며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과 지시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리, 끝자리에 앉으면 가난한 사람,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윗자리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윗자리에 앉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만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은 낮은 자리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성육신 하신 모습입니다.
집회서 10:12 “오만은 주님을 저버리는데서 시작되고 사람의 마음이 창조주에게서 멀어질 때 생긴다”고 했습니다. 15절에서는 “주님께서는 오만한 민족을 뿌리째 뽑아내시고 그 자리에 겸손한 자들을 심으신다”고 하셨으며 18절에서는 “오만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링컨의 일화 한 토막입니다. 옛날 백악관 곁에는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링컨 대통령은 가끔 울타리까지 나와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구경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몇 명의 아이들이 한 소년을 놀리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몹시 허름한 차림이었는데 아빠는 전쟁에서 전사하고, 엄마는 청소부였습니다. 구두를 닦아 반질반질하게 해서 신고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으나 구두가 너무나 낡아 닦을 수도 없어 놀림감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겨우 아홉 살 난 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존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존의 새 옷과 새 구두, 여동생의 새 옷과 새 구두, 그리고 많은 식료품과 석탄을 링컨 대통령이 보냈던 것입니다. 존은 새 구두를 신고 자랑스럽게 등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학생들을 더 놀라게 한 것은 대통령이 존의 교실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링컨은 성경 구절 하나를 소개하겠다면서 칠판에 다음의 글을 적어 놓았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진정한 높고 낮음

본문 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눅 18:14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와 마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가 나옵니다. “낮아지고”(will be humbled, NIV)와 “높아지리라”(will be exalted, NIV)의 문장은 ‘수동태’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높고 낮아짐이 인간의 편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높아진 것이 아니며 낮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낮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는데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삼상 24:4) 그리고 사울은 이 일 후에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7)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여인들의 말을 듣고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이후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이스라엘은 나누어 집니다.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유다에는 20명의 왕이 있었고 이스라엘은 19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한 왕이 하나도 없었고, 유다에만 8명의 선한 왕이 있었습니다. 선한 왕으로 보는 유다 8대왕 요아스는 말년에 우상을 섬겼으며(대하 24:1-27), 10대왕 웃시야는 자기가 제단에 분향하려다 문둥병이 걸렸습니다(대하 26:16-23). 왕의 타락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교만입니다.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고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은 우리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는 스스로 상좌에 앉아있는 자들입니다.

통전적 선교

통전적 선교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이에 응답하는 선교입니다. 통전적 선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 하신 것처럼 복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통전적 선교가 무엇인지 PMI(무슬림이 사는 지역에서 사회 봉사하는 미국의 선교단체. www.pmi-usa.org)의 사이트에 잘 명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통전적 선교란 “복음의 말씀과 행위로 선언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종이 되려고 하는 사람만이 선교적 명령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가서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러한 모습을 예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사랑과 겸손으로 공의를 행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아멘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선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복음의 축복과, 경제적 축복, 민주 자유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책임이 있습니다. 이 지구촌에는 지금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믿기 위해서 고통 당하는 크리스천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현재 에리트리아에는 목사와 성도들 포함하여 약 2천명이 불법 구금되어 있습니다. 이중에서 작년에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4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올해) 9월 5일 미그치 하일레(33, 여) 자매가 웨아 군사훈련기지에 수감되어 가혹행위를 장기간 당한 끝에 사망했습니다. 하일레는 예수를 부정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라는 서약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여 장기간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죽었습니다.

우리가 끝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마치 모든 사람들을 다 구출하고 난 후에 마지막으로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남에게 다 양보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뿐인 생명도 양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잃은 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8. 잃은 양) / 본문 : 눅 15:1-7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가까이 나아 오니”(엥기존테스) 접근하다는 뜻의 분사형입니다. 이는 이들이 계속해서 모여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원망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비유 또한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원망하여”(디아공귀조)는 와글와글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이들을 보고 그들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세리는 로마의 명령에 의해서 세금을 징수해야하고 거두어 들여야 하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는 반민족적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인물입니다. 또한 죄인이라고 한 사람들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정확히 본문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하층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통칭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즉 바리새인도 아니고 서기관들도 아닌 하층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시에 비유로 하신 말씀은 당시 적대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1. 잃은 것을 찾지 아니하느냐?

제가 서울에 올라와 잠시 옷 만드는 공장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열심히 밤낮으로 일해서 번 월급을 당시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마땅히 둘 곳이 없어서 가방 맨 밑바닥의 종이를 들추고 그곳에 숨겼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없어졌습니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속이 상하는지 몇 칠을 잠을 못 잘 정도였습니다. 무엇을 잃어버려본 사람만이 잃어버린 자의 마음을 압니다. 베트남에서 디카 날치기 당하고 몇 칠을 중고 카메라 상점에 나가 찾아보았습니다.

본문 4절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이니까 대답해 보세요. 여러분에게 양이 100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1마리가 길을 잃어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99마리는 나와 함께 목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99마리와 함께 있겠습니까? 그래도 목자라면 찾아 나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은 누구입니까?
99마리의 양은 길 잃은 이 양에게 엄청난 비난을 쏟아 붇고있습니다. 한마디로 말썽 장이 양입니다. 고집이 쎈 양입니다. 99마리가 생각하기를 “그놈은 이 참에 아예 죽어야 돼? 우리 목자만 고생시키고 우리를 편안히 쉬지 못하게 하고 있어?”라고 생각한다면 99마리는 목자와 마음을 같이하지 않는 양입니다. 그리고 만일 목자가 지금 한 마리 양이 없어졌는데 99마리와 함께 편안히 먹고 쉬면서 세미나를 하면서 역시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은 효율적인 측면에서 할 일이 못된다고 하면서 있으면 여러분은 어느 목자를 따라가겠습니까? 그래 역시 우리 목자가 효율적이고 경비를 낭비하지 않고 우리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목자야 하고 즐거워 할 수 있겠습니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 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 앞에서 내가 곧 잃은 양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하는 엄청난 값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사야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고 했습니다.

무엇을 잃어 버렸나?
잃어버린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잃어버린다는 것은 마음을 찢어내는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 민족은 잃어버린 아픔이 큰 민족 중에 하나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역사를 가졌고, 자기의 이름을 잃어버린 수치도 당하였었으며, 교회도 잃어버리는 아픔도 당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을 더 던져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잃어 버리셨나요?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도 무엇인가 잃어버린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7년 동안 공들여 완성하고 봉헌식 때 하나님께 하는 말입니다. 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사람이 아무리 공들여 지은 건축물이라고 하여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기에 적합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헌금하고 봉사하고 헌신했다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은 온전히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기억에 남는 책 가운데 “안네의 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16살 난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쓴 일기입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학대받고 핍박받던 나치 정권 아래서 히틀러 군대에 의해 모진 시련과 고난을 받고 있던 때의 일기입니다. 친구들, 친척들, 부모 형제 모두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고 결국은 가스실에서 하나씩 죽어갑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나날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모든 가족들이 다 죽고 그의 아버지만이 살아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안네의 일기 마지막에는 이런 말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세상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어…”

16살 난 어린 소녀의 가슴에는 펼쳐보지 못한 무지개 빛 꿈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나날이 공포와 두려움이고 절망과 좌절일지라도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세상을 보고 내일을 보았던 것입니다. 유태인의 역사는 고난으로 얼룩진 역사이며 핍박과 눈물의 세월로 쓰여진 역사입니다. 그들이 즐겨 쓰는 말이 있습니다.
“Say yes to life, in spite of everything(삶에 대하여 어떤 경우라도 “네”라고 말씀하십시오)”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고난의 폭풍이 밀려오고 환난의 바람이 불고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하여 어떤 경우라도 “네”하며 어둠의 터널을 통과했던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2장 4절로 5절에서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주셨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뜨거운 열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2.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우리가 만일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아니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결핍이요, 열정이 식었거나 아니면 이기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3:4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르며 그것을 찾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무슨 일이든 쉽게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서은이를 좋아합니다. 한번 붙인 것은 절대 안뗘냅니다. 서은이에게 쉽게 마음을 얻는 것도 쉽지 않지만, 또한 쉽게 버리는 그런 스타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좋아하는 스타일입니다.
오늘의 본문 이후에 두 개의 비유가 더 소개되어 있습니다. ‘잃은 은전’,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들의 특징은 모두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강조하는 것은 반드시 찾아야 될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역시 잃어버린 당신의 백성을 찾기 위해서 입니다(눅 19:10).

무엇을 찾았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 중에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재앙을 내리심으로 말미암아 견디다 못한 블레셋 사람들이 이를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때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궤를 다시 찾은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찾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서 “네”라는 말, “아멘”이라는 말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네”하고 “아멘”해야 한다고 하는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3. 찾은 자의 즐거움

본문 5절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의 “즐거워”(카이로)는 단순한 만족의 기쁨을 넘어 넘쳐나는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많은 고생과 비용이 들어갔다고 해도 잃은 양의 가치는 그런 것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찾은 자의 기쁨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경제적 손익을 계산한다면 벗과 이웃을 초청하여 잔치를 여는 것 보다 아예 잃은 양을 찾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가치를,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마 16:26).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제가 설교한다는 생각보다는 여러분 스스로가 찾고 생각하고 성령께서 여러분의 잃은 것, 잊은 것을 찾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아프간 피납 사태를 통해서 많은 것을 잃었고 또 찾았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유럽의 선교는 1000년을 넘게 한 것입니다. 미국도 1885년에 우리나라에 언더우드 아펜셀러 선교사가 들어오고 적어도 미국 선교의 역사도 200여 년은 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근대선교는 20여 년 정도 되었습니다. 아직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 또한 예수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잃은 양을 찾으러 오셨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잃은 양은 남이 아닙니다. 우리 식구요 나 자신입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섰다고 불평하는 양이 아니라 목자를 돕고 기도하는 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05. 예수님의 비유(23) 착하고 충성된 종아 / 본문 : 마 25:14-30(23)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저는 어려서부터 이상한 아이였습니다. 어르신들이 볼 때 이상한 행동을 아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저희 집은 작은 오두막집이었는데 뒤에는 다른 집이 있고 깍아진 언덕이 있었습니다. 집 앞에도 내리막이 있고 구렁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것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하여 주변의 돌들을 모아 쌓았습니다. 그러니까 집에만 가면 돌을 모아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새벽에 나가 밤새 떨어진 밤을 주워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아무도 모르게 구덩이를 파 놓고 그 안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모으기를 잘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방법은 다르지만 컴퓨터에다 선교정보를 모으고, 말씀을 정리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저의 이런 면을 보면 부모님이 자녀를 잘 관찰하면 어려서부터 달란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이 묻어 두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언 듯 오늘 본문이 이해가 안됩니다. 어쩌면 저에게 맡기셨다고 해도 묻어두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많은 내용을 공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 글이 조금 부족한 것이라고 해도 공유함으로 유익하다면 공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어 많은 글들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께서 하신 이 비유가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혼자 가지고 있다가 하드디스크 깨지고, 분실하고 나면 나 자신도 자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주는 것이 남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달란트(talent)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지만 본문의 달란트는 신약시대의 화폐단위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이나 미국의 ‘$’와 같은 말입니다.

주인이 집을 잠시 떠나 외국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종들에게는 단순히 집을 잘 지키라는 명령 외에 여덟 달란트를 세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주인을 종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에게 합당한 분량을 준 것입니다. 종들을 단순히 자신의 사업에 이용하려 한 것이 아니라, 사업의 동업자로 생각한 것입니다. 주인은 그만큼 종들을 믿고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두 번째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세 번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15절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 따라”라는 말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적절한 이익배당을 약속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일종의 종들은 동업을 통한 이익배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얼마 후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은 장사하여 배로 남겼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에서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배로 남겼는지 흔히 오늘날로 말하면 그 비법을 더 설명해 주셔야 하는데 그냥 배로 남겼다고 만 했으니 더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말씀을 해 주고 계십니다.

달란트를 활용한 두 사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모습을 다시 봅시다.
16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17절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바로 가서”라는 단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두 종들은 자신이 맡은 소유에 대해서 즉시 또는 재빨리 그 소유를 사용하기 위해서 어떤 일에 착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기에 맡겨진 사명과 일에 대해서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지체 없이 그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청지기의 모습입니다. 마 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중에 천천히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 2:8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이 다음에 만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즉시, 지금, 빨리 만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다음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즉시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에게 주인은 26절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하셨는데 “게으른”(ojknhrev:오크네오)은 “지체하다, 머묻거리다, 망설이다”라는 뜻입니다. 주인에게 달란트를 받은 종들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또 한가지는 “그것으로 … 남겼으되”입니다.
주인이 준 달란트로 남긴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나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주고 간 것입니다. 종은 남길 수는 있지만 그것을 창조적으로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잘못된 사람들의 착각은 그것이 자신의 것인 줄 안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왜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가 어렵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선 오늘 이익을 남긴 두 사람의 경우 부자의 경우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20절, 22절에 “주여 내게 … 주셨는데”라고 말합니다. 소유의 출처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남겼지만 감긴 것까지도 주인에게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욥 1:21) 하면서 찬양했습니다.

우리는 달란트의 비유에 대해서 이윤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윤 그 자체에 있지 않음을 아셔야 합니다.
21절과 23절은 본문이 일치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주인의 관심사가 이윤을 많이 남기거나 적게 남기는데 있지 않고 주어진 여건 하에서 성실히 노력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는 주님의 이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eu’(유)는 “well, 좋은”을 말합니다. 헬라어의 이 부사는 종의 지난날에 대한 주인의 아낌없는 인정과 신뢰를 보내는 말입니다.
이어서 주인은 “착하고”(ajgaqov”:아가도스)라고 칭찬하십니다. 이 단어는 마가복음 10장 17-18절에서 예수께서 길 가 실 때에 한 사람이 달려와 예수님께 ‘선한 선생이여’라고 말합니다. 이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고 하셨습니다. 이런 단어가 두 종들에게 주인이 친히 사용하셨다는 것은 대단한 칭찬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충성된”(pistov”:피스티스)는 “충실한, 믿을만한, 의지가 되는, 확신하는”의 뜻입니다. 이들이 왜 충성된 자들인지는 “작은 일에”있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자에 비해서 배 이상을 받았습니다. 사실 엄청나게 많은 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작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에게 주신 것, 그 모든 것은 우리의 기준으로 크다, 작다 이지 주님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충성한 종에가 두 가지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입니다. 이 부분은 현세적이라기 보다는 내세적인 것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회계 이후에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것”은 단순히 물질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많은 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주인과 종의 사이에 두터운 신뢰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주인의 “즐거움”(carav:카라)는 열처녀의 비유에서와 같이 신랑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이 단어는 ‘은은한 기쁨’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큰 기쁨으로 마 2:10에서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내면적인기쁨 샘솟는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달란트를 묻어둔 한 사람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장사하지 않고 그냥 땅속에 묻어두었습니다. 이 종이 이렇게 한 것은 단순히 장사하여 손해보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 종이 주인에게 한 말은 표면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진짜 이 종이 장사를 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종들이 자신보다 많은 달란트를 받은 것에 대해서 기분이 상했을 수 있습니다. 주인에 대한 신뢰가 없거나 약한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입니다. 15절에게 “각각 그 재능대로” 나누어 주신 것인데 이것이 불만스러운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에게 맡겨진 한 달란트는 다섯 달란트를 맡은 종과 두 달란트를 맡은 종에 비해서 한 달란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장사를 포기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24절에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굳은”(sklhrov”:스클레로스)은 “마른, 사나운, 거친”이라는 뜻입니다. 박정할 뿐만 아니라 포악하고 거칠다라는 말입니다. 새번역성경에서는 “무서운 분”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또한 이 단어는 ‘므나의 비유’(눅 19:11-27)의 21절에서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의 “엄한 사람”(aujsthro;”:아우스테로스)보다 더 강경한 단어입니다. 종은 자신의 주인을 악한 인격자로 몰아 세우면서 자신의 불성실과 직무 유기에 대한 변명을 찾으려고 합니다. 죄인의 변명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앞에 돌아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라고 말함으로 주인을 아주 나쁜 사람으로 몰고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잘못을 주인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종의 변명에 대해서 주인은 27절에 “취리하는 자들”을 왜 활용하지 않았냐고 하십니다. 취리하는 자들이란 오늘날로 말하면 은행과도 같은 기능을 하는 사람입니다. 조금만 생각이 있었고, 열심히 있었다면 최소한 그렇게 무의미하게 달란트를 두고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이 종은 도망가거나 오지 않을 수는 없었나 생각하지만 주인이 돌아오면 모두가 회계하러 나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예외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

하나님의 일이란 작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 그 자체가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구약의 성전문지기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이 오벧에돔 집안 사람입니다. 이 집안 사람들이 처음에 다윗이 법궤를 옮겨가고자 했을 때 대충 마차에 싫고 가다가 떨어지는 것을 웃사가 만져서 죽었습니다(삼하 6:7). 그런데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러나 오벧에돔 집사람들은 이 법궤를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습니다(삼하 6:10, 대상 13:13). 하나님을 무섭게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극진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윗 성에 문지기 역할을 합니다(대상 15:18, 24, 25). 이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기쁨이었는지 그들은 진심으로 성을, 법궤를 지켰던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에 나오는 사람은 세 사람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말고 다음에 나오는 사람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의 들러리 같아 보입니다. 그냥 한 사람 더 소개하나 싶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이 사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보다는 배를 많이 받았지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자신보다 무려 배 이상의 다섯 달란트는 더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떠한 불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이 행동했습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 역시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달란트 비유는 전체적으로 예수님 자신의 재림에 관한 교훈의 구조 안에 있습니다. 열 처녀가 등불을 준비하며 주인을 기다려야 함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은사를 사용하며 주님을 기다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스로 열매를 맺는 씨앗

예수님의 말씀(102. 스스로 열매를 맺는 씨앗) / 본문 : 막 4:26-29

“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영국의 코벤트리라는 도시에 큰 교회가 있었는데 2차 대전 때 다 타 버리고 교회 한쪽 벽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그 벽은 그대로 보존되면서 “하나님 아버지, 용서하십시오”라는 큰 팻말이 붙어 있습니다. 많은 관광객들로 하여금 이 현장을 그대로 보게 하여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일본의 히로시마에는 원자탄이 떨어졌던 곳에 박물관을 짓고 전쟁의 흔적을 그대로 보관하여 후세인 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독일의 베를린에도 대단히 큰 카이제르 기념 교회가 있었다. 이 교회 역시 모두 불타서 종 탑만 우뚝 서 있습니다. 후에 교회를 다시 지을 때에도 그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바로 옆에다 교회를 지었다. 그런데, 우리들의 6.25 흔적은 어디로 갔습니까가 ? 유감스럽게도 아픔을 볼 수 있는 산 증거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경험과 아픔은 점점 잊혀지고 있습니다. 증거 없이 아무리 전한들 설득력이 없습니다. 아니, 시간이 점점 지남에 따라 마치 전쟁이 없었던 것처럼 무감각해져 정신이 해이해져 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26-29절의 말씀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생략하고 있는 비유로,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비유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와 가라지 비유, 겨자 씨 비유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씨앗에 대하여 좋다느니 나쁘다는 말이 없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열매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돌 짝 밭과 같은 마음,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이 있습니다.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받는 은혜도 다르고, 그 은혜의 결과 변화 받는 모습도 다 다른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말씀은 오늘 이 곳에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태도를 가지고 듣는 사람이 변화를 받고 열매를 맺는 것을 봅니다.
가라지 비유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밭은 다 좋은 밭입니다. 그러나 좋은 씨앗이 뿌려진 밭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도 뿌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 밭이 아무리 좋아도 뿌려지는 씨앗 그 자체가 나쁜 씨앗이라고 하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복음의 수용성,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참으로 좋지만, 뿌려지는 씨앗이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비유 중에 겨자씨의 비유는 또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여 아주 큰 역사를 이루는 뜻입니다. 적은 씨앗이 나중에는 그늘을 내고, 열매를 내고, 공중의 많은 새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는 그런 나무로 자란다는 뜻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아주 미약한 말씀이요, 인격이지만 점점 자라서 아주 큰 나무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씨앗에 대하여는 좋다느니 나쁘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 씨앗에 대한 좋고 나쁜 것은 가라지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수용성에 대하여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4가지 내지 6가지의 반응이나 수용성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이 비유의 특징은 생명의 신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씨가 자라는 과정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토질이나 풍성한 수확보다는 신비로운 능력, 생명의 신비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지만, 서서히 점진적으로 변화시키고 발전시키고, 성장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의 씨를 뿌려주시고 열매를 거두어들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자라고 열매를 맺고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가 복음을 뿌렸으니 내가 열매를 거둘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의 어떤 노력이나 창조적인 행위로 싹이 트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열심히 가꾸고, 돌아보아서 이삭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의 신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떤 식물이 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있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습니다. 씨를 뿌린 사람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라납니다. 씨 뿌린 사람이 밭에 나가 지키고 있는 것도 아니요, 씨가 발아할 수 있도록 온도를 맞춰주려고 어떤 시도도 할 수 없습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씨를 뿌리고 사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돌아와 그가 해야하는 다른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밭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어도 땅은 씨를 보관하고 있었고, 싹이 나게 하느라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하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행동,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한 것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보다는 하나님이 하신 일,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 하시고, 우리는 그냥 기뻐서 따라다닌 것뿐입니다. 이것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믿음이 자라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전부요, 우리가 한 일이란 정말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따라다닌 것뿐입니다.

엘리코트(Elicort)라는 신학자가 말한 심리학적인 성장의 3단계를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사상, 곧 생각의 성장입니다. 생각의 성장이 곧 인격의 성장입니다. 생각이 깊어지고, 발전해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질이 결정입니다. 유명한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말하기를 “이 세상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세상에는 복이나 화가 따로 없다. 다만 생각 여하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말하기를 “생각하기를 가르쳐야지, 생각한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고귀한 생각과 함께 있는 사람은 고독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며, 자기 자신과 친해지는 것입니다.
엘리코트는 두 번째의 성장은 행위의 성장을 말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그가 사는 행위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소포클래스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신은 행동하지 않는 자를 결코 돕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생각에 머물고, 지식에 머물지 말고 행동으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 그의 행동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행동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로 목적이 성장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목적이란 우리의 사는 의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여도 그 일에서 의미를 찾고 또 부여합니다. 의미가 큰 일이라고 하면 시간과 물질을 남김없이 투자하여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하면 어떠한 수고도 필요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의미 없는 일에 왜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낭비할 것입니까? 사람은 삶의 목적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공부하는 목적, 직업을 가지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들 가정이 살아가는 목적을 더욱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람은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하는 것까지 사실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때가 많습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나의 전부를 투자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사는 목적이 분명해지고, 그런 목적에 있어 성장해야 합니다. 목적을 가지는 일에도 성숙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사는 것도 감사하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도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참으로 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사32:8)고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눈여겨보아는 하는 것은 다음 세 가지라고 봅니다.
그 첫째는 생명의 씨, 살아있는 말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세계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어야지 무생물을 가지고 생명을 나오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밭이 있다 하여도 그 밭은 생명을 만들 수 없습니다. 생명의 씨앗, 하나님의 말씀, 영원한 생명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합니다. 아무리 고매한 인격을 가지고, 겸손하여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거기에 생명의 말씀이 떨어져야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씨를 만들고 그 씨에 생명을 심어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식물에 열매를 주시고 그 안에 생명의 씨앗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상한 학문이 있는데 그것은 ‘생명공학’입니다. 생명을 공학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과 공학은 길이 잘못된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공학은 사람에게 있는 것인데 이것을 붙여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명공학’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줄기세포 연구하는데 아마 계속 할겁니다. 처음에 좋은 목적을 말하지만 결국은 상업적인 논리와 권력으로 가는 것입니다. 악용 당하게 되어있다 그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씨는 뿌려지면 저절로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여기서 최소한의 어떤 노력이 있어야 됨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혼자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고 중에서 우리보고 하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0:14절에서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고 싶었어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어둡고 캄캄한 암흑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이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먼저 믿고 믿음의 좋은 말씀을 가르쳐주고, 지도해주는 선배들이 고마운 것입니다.
셋째로 땅이 있어야 합니다. 한 영혼이란 천하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교보문고의 표어가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입니다. 그런데 책을 만들기 전 이 사람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계신자”라고 했습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했습니다.
“스스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우트마태’라고 하는데 영어로 오토매틱이라는 말입니다. 자동, 자연적, 저절로 스스로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화론자들은 마치 처음에 작은 물체가 점점 진화해서 크게되고 척추동물이 된 것으로 설명하지만 생명 그 자체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 생명체가 어떻게 변화되었다고는 하는지 모르지만 생명 자체를 말하고 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스스로’란 진화를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를 말한 것입니다.
고전 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 님 뿐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토마스 목사님이 대동강으로 들어오셔서 순교하셨을 때 복음은 죽고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지금도 살아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있습니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 병인 년 우리나라 교회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한해였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나라안의 천주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곧이어 병인양요까지 치뤘으니 외세에 대한 조선의 쇄국정책은 극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같은 해 8월 평양의 대동강에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나타났는데 이 배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후원을 받은 로버트 토마스라는 선교사가 통역관으로 동승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한국 개신교의 첫 순교의 피를 흘린 주인공입니다.
1840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어려서부터 선교사에 대한 소망이 남달랐던 그는 드디어, 1863년 24살의 나이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중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곧 이은 부인의 죽음과 선임 선교사와의 갈등으로 한때 선교사역을 포기하기도 했는데… 하지만 세관에서 통역을 하던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다시금 복음 사역의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같은 해 9월 백령도 근처의 작은 섬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전도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 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그 앞에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습니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주일 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대동강변에 좌초하게된 셔먼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되는데. 한편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단 한 권이라고 더 조선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남은 한 권의 성경책을 품안에 넣고 강물로 뛰어들었고 곧 조선군에게 생포되었습니다.

그의 처단은 즉시 집행되었고 그 임무를 맡은 조선 군사가 바로 박춘권 이라는 자였습니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는 급히 자기 품에 들렸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면서 그에게 내밀었고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오..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과연 토마스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에 유력한 신앙 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은데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석호정 만경대의 최취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준 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 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습니다.

비록 정식으로 조선 땅을 밞아 보지도 못한 채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죽음을 당한 로버트 토마스선교사. 하지만 그의 죽음 뒤에야 비로소 조선 땅에도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데. 서툰 한국말 실력에 가진 것이라곤 한문으로 된 성경책 한 권뿐이었지만,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이 땅에 복음의 부흥을 위한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은 29절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입니다. 씨앗의 결국은 열매를 맺는 것이고 열매가 익었을 때 추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반드시 심판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일차적으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라나는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자라는 것입니다.
 

잔치에의 초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8. 비유21 – 잔치에의 초대) / 본문 : 눅 14:15-24

“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15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어제는 권부자 자매님의 아들 돌이 있어 다녀왔습니다. 오래 전부터 전화로 초대하고 또 몇 일 전에는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강정민자매도 결혼하는데 초청장을 만들어 보낼 것입니다. 잔치 집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손님입니다. 손님이 없는 잔치 집은 정말 보기가 안 좋습니다. 잔치가 열린다는 것은 손님을 초대하는 자리입니다. 선별하여 초대할 수는 있겠으나 초대하지 않는 잔치 집은 없습니다. 옆 사람하고 인사합시다. ‘하나님의 잔치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고 할 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Hom. Faber)임과 동시에 잔치(축제)하는 존재(Hom. Festinus)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만 없어도 비인간화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컴퓨터선교회를 시작할 때 바로 이점을 생각했습니다. 옛날 전쟁에서 이기려면 잘 무장된 칼과 방패 등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맞지 않는 갑옷과 칼을 가지고는 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잘 맞는 도구, 무기를 골라야 합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는 긴 창을 가지고 다녔고 장비는 무쇠덩이 같은 것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저는 컴퓨터가 최고의 도구가 될 것을 생각하여 컴퓨터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조건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사람이 일만 하고는 진정한 인간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한국사람의 교육과 단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생을 잘 즐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잔치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점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돈을 벌기는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잘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잔치를 베풀지 못하는 것입니다. 잔치를 베풀지 못하는 인간은 ‘기계적인 인간’, ‘합리적인 계산기’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모두가 잔치라고 말합니다. 백일잔치, 돌잔치, 생일잔치, 재롱이 잔치, 결혼잔치, 경로잔치, 스포츠에서도 농구잔치, 꽃 잔치, 단풍잔치, 음식잔치 좋은 것은 모두 잔치라고 합니다.

신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모두 잔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잔치에 비유하여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잔치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음식’입니다. 먹을 것이 있어야 잔치가 됩니다. 호남지방에서는 잔치 집에 홍어회가 빠지면 별로 잘 차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서두에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에서도 둘째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는 큰 축제를 베풉니다. 마태복음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잔치에 비유하고 이 초청에 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는 떡을 떼며 축제를 동반한 예배를 드렸고 세례식이나 부활절을 지킬 때에는 들에 나가 함께 노래하며 춤추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러시아는 가히 축제의 나라라고 할 만 합니다. 연중 거의 1/3이 교회가 지키는 축제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중 제일 큰 축제일은 부활절(파스하) 입니다. 축제음식으로 “부활 달걀”(파스하 쿨리치)을 먹기도 하고 장식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흥이 많은 사람들인데 너무 전쟁을 많이 하다보니 축제가 잊혀져 버린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간은 축제 없이 살 수 없는데 교회의 예배가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축제가 안될 때 사람들은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유럽교회의 쇠퇴 원인도 교회가 축제를 잊어버린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예배가 축제를 상실할 때 사람들은 나이트클럽과 술과 세상 향락으로 범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가짜 축제가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금송아지 앞에서 벌어졌던 아론의 축제를 기억합니다. 우상숭배와 성적타락의 축제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축제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기도와 찬양의 축제를 회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진정한 하나님의 잔치 집입니다.

하나님은 잔치를 베풀어 놓고 우리를 그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런 초청을 제일 잘 나타내 주는 곳이 누가복음 14장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는 주님의 초청을 3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8-11절에서는 결혼축제(a wedding feast)를 말씀하시면서 상좌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겸손(Humility)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둘째, 12-15절에서는 만찬을 여시고 부자를 청하지 말고 가난한 자를 청하여 자신의 과시 욕을 보이기 위한 잔치가 아니라 진정한 이웃을 위한 잔치를 열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셋째, 16-24절에서는 큰 잔치(A great Supper)라는 축제를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가르침 중에 최상의 교훈인 구원(Salvation)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 속지 마세요. 세상 사람들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시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자연에 대해서 노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인간은 할 수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로의 초청뿐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잔치는 그리스의 날 곧 메시야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 베풀어지는 잔치 그 잔치를 큰 잔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태어난 아이를 위해 돌잔치를 합니다. 결혼을 하기 되어 잔치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베푸시는 잔치가 잔치중의 잔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잔치입니다. 구약에서 이 잔치를 잘 예언한 곳이 있습니다.

이사야 25:6-9절 “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 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7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 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9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잔치를 “어린양의 혼인잔치”(계 19:7-9), “하나님의 큰 잔치”(계19:17-18)라고 다시 소개합니다.

오늘 본문 큰 잔치의 비유는 초청의 잔치라고 불려집니다. 16절에 나오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주인이 오라고 부르는 데는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서 언급되었던 두 가지 경우의 잔치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8-11절에서는 결혼축제에서 ‘겸손’을 말씀하신 것과 둘째, 12-15절에서는 자신을 자랑하기 위한 잔치를 베풀지 말라고 한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지금 주님이 오라고 하는 것은 최소한 그런 잔치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초청하시는 데는

첫째,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오라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사람들(계층)을 초청하니 오라는 것입니다.
셋째, 아직 빈방이 있으니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러한 초청에 대해서 사람들은 저마다 이유와 구실을 내세워 이 초청을 거부합니다. 그 핑계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18절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나가 볼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큰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 밭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불가불”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핑계입니다. 땅을 산 사람이 보지도 않고 샀을 리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보러가겠다는 것은 그곳에 마음이 있고 자꾸만 보고 싶은 것입니다. 물질에 가치를 가지는 사람입니다. 언젠가는 두고 가야할 것에 집착하여 주님께 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19절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대적 표현으로 바꾸어보면 “자동차를 새로 샀는데 지금 가서 시운전을 해보아야겠습니다.”가 됩니다. 그럼 왜 하필 이 시간에 가야합니까? 이것도 핑계에 불과합니다.

셋째, 20절에 보면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합니다. 먼저한 사람의 핑계보다는 제일 무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사람은 더 강력한 거부 의사를 나타냅니다. 노골적으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합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거부인 동시에 고집스러움을 보여줍니다.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이렇게 복음에 대해서 정면으로 거부한 사람들 마지막 날에 주님도 저를 모른다고 하실 때 핑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의 풍습에 의하면 잔치에 사람들을 청할 때는 두 번 초청을 합니다. 한번 잔치가 열리기 훨씬 앞서서 몇 일 전에 알리는 것이고(16절), 다음은 잔치 시간이 임박해서 오늘 몇 시에 잔치합니다(17절)라고 초청합니다. 전자가 구약의 초청이라면 후자는 신약의 초청입니다. 우리는 잔치에 참여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음식을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준비해 놓으셨습니다(잠 19:1, 사 25:6, 마22:1). 그리고 이 풍성한 것을 선물로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잔치 집의 사람이 없으니 주인은 다른 방법을 선택하게 됩니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하나님의 일군들에게 잔치에 초대할 방법을 다시 일러주십니다. “빨리”라는 단어가 이제 시간이 다 되었고 급박함을 알립니다. 지체할 여유가 없습니다. 복음 전도의 시급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우리가 가야할 곳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먼저 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상을 말해줍니다.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이제 부족한 사람들을 불러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상류층의 사람들 종교지도자들은 이 초청을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여 초청하였는데도 자리가 더 남아있었습니다. 그 때 가야하는 곳이 23절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길과 산울은 시내의 거리보다는 사람이 덜 다니는 곳입니다. 지금은 시대적인 시기는 후자인 것 같습니다. 복음이 유럽을 한바퀴 돌아 우리에게 왔습니다. 여기는 이미 잔치집의 손님이 아주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조금 남은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부른다는 것입니다. 때가 상당히 임박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 때는 급박하기 때문에 강권해서 채우는 것입니다. 상대편 입장을 다 들어줄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어떤 나라에 큰 난리가 났습니다. 급기야 왕이 그 왕궁을 버리고 시골로 피난을 갑니다. 왕은 농부의 옷으로 갈아입고 신하 몇 사람과 함께 어느 마을에 몰래 숨어 들어갔습니다. 한 농부가 이 낯선 길손들을 잘 영접해주었습니다. 변장을 한 왕과 신하들은 며칠 동안 거기서 잘 묵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라 정세가 회복되어 왕은 환궁하게 되었습니다. 환궁한 왕은 그 농부가 자기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준 것과,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남을 잘 대접해준 것이 기특해서 농부를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농부는 낯선 길손들이 왕과 신하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왕은 농부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 그러나 농부는 이렇다할 소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이시여, 이제 와서 제가 출세를 원하겠습니까, 영화를 원하겠습니까, 그렇다고 금은보화를 원하겠습니까? 그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아무 소원이 없습니다. 다만 며칠 후 제 생일잔치에나 한번 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침 환갑인 지라, 자식들이 힘을 모아서 조촐하나마 잔치를 열어준다는 군요.” 왕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드디어 며칠 후, 한 나라의 왕이 시골 초가집에 사는 일개 농부의 환갑잔치에 왔습니다. 그 후로부터 그 집은 귀한 집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집이 되었습니다. 그일 하나로 인해 농부의 가문은 위대한 가문이 되었습니다.

지난 15일 송도지역 코오롱건설의 ‘더 프라우’ 청약 때 몇 일 전부터 텐트를 치고 밤을 세워가며 줄을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좋아하는 운동경기를 보기 위해서도 표를 사고 줄을 섭니다. 교회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조금 예의바른 사람은 잔치 집에 잘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자잘한 세상 잔치에는 모두 참여하고 ‘어린양의 잔치’, ‘제일 큰 잔치’에 참여하지 않으면 진짜 중요한 잔치 집을 잘못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큰 잔치 집에 반드시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7.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 / 본문 : 막 5:24-34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오래 전에 나온 이야기 가운데 다시 뜨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줌마와 조폭’의 공통점입니다. 첫째로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는 것입니다. 조폭은 무리를 지어 활동합니다. 아줌마는 아줌마 부대를 형성합니다. 둘째는 형님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조폭은 윗사람을 철저하게 형님으로 대우하고 족보도 있습니다. 아줌마는 만나서 5분만 이야기하면 형님 아우가 생깁니다. 셋째는 문신을 합니다. 조폭은 온 몸에 문신을 하고 아줌마들은 눈썹에 영구 문신을 합니다. 네 째는 제 식구들을 끔찍이 챙깁니다. 조폭들은 자기파를 위해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아줌마들은 자기 가족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다섯째 무대뽀입니다. 조폭들은 세상의 법도 겁나지 않습니다. 아줌마들은 아무도 못 말립니다. 여섯째 밤만 되면 무서워집니다. 조폭들은 밤이 되면 제 세상입니다. 아줌마들도 밤이 되면 집에서 자기세상입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칼을 잘 쓴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랍 사람과 결혼한 한국 여자들에 대해서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슬람인이 되든지 아니면 아랍에 가서 멸시 당하면서 사는 줄 알았습니다. 미국여자들도 그렇게 살잖아요. 근래에 터키 선교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 아줌마들은 선교사에게 복음을 전달받고 남편을 끌고 교회에 나온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도 아줌마입니다.

1.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사실 여러모로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분 느껴보셨나요? 예뿐 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를 향해서 오고 있습니다. 나는 그 꽃을 받을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잘 모르지만 “나에게 꽃을 주다니…” 그런데 그 사람은 나를 스치고 지나가 다른 사람에게 꽃을 주는 것입니다. 그 때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초라한 마음이 됩니다.
이 여인은 남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만한 인물이 못됩니다. 본문의 모습도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신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 틈바구니에 끼어 있습니다. 본문 앞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라는 사람이 자기 딸이 죽어간다고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시는 중입니다. 이 얼마나 비중 있는 이야기입니까? 회당장에 비해서 이 여인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회당장은 알려진 사람입니다. 아마 하나님을 잘 믿는 바리세인이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정말 대단한 이야기, 죽은자가 살아난 이야기 중간에 끼어있습니다. 저도 이런 비슷한 기분을 많이 느껴보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어떤 모임에 참여하게 되는데 큰 교회 목사님들의 틈바구니에서 초라하게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모 언론사에 갔을 때는 자동차가 좋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은 다 안내하는데 나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더라구요. 찬양을 잘합니까? 운동을 잘 합니까? 제가 기를 피려면 컴퓨터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 역시 본문처럼 끼어있는 인생입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는 도중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본문이 갑자기 끼어 들게 된 것입니다. 마치 본문처럼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야기, 회당장이라는 영향력 있는 집안의 이야기 중간에 끼어 있어 주위를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주위 사람을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끝없는 고통 속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무기력하게만 보이는 이 여인의 이야기가 나 자신의 이야기와 너무나 닮지 않았습니까? 마음 문을 여시고 이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은 한마디로 참으로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군중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였습니다. 그렇게 군중들로부터 밀려나서 저 쪽 한구석에서 예수님이 가시는 쪽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게되는 이 여인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는 이 여인은 중병에 걸려있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겪고 있는 고통은 세 가지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첫째로 이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내면서 살아왔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여자가 피를 흘린다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자신의 병적인 고통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따돌림까지 당하면서 살아야했습니다.
둘째로 본문 26절에 보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병을 고치려고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고생만 더했습니다.
셋째로 이런 고생 끝에 찾아온 것은 모든 재산을 다 허비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의료 보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재산은 다 탕진했는데 피는 여전히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는 따돌림을 당하고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질병은 몸에 짊어지고, 가산은 모두 날려버렸습니다. 이제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여인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딱 한번 결사적인 시도를 해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꺼져 가는 희망을 붙들고 이제 마지막 시도를 해 보아야겠다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그녀를 행동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그녀로서는 이것이 마지막 선택이라고 믿었습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다 신경 쓸 만큼 그녀가 처한 입장은 한가롭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간절히 손을 뻗었습니다. 힘을 다해 뻗은 그녀의 마지막 인생의 몸부림은 그녀의 손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닫자 예수님의 능력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예수님의 옷에 손이라도 대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가난함이나 좌절과 부끄러움을 뛰어넘어서 예수님과의 일대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갈망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혈루병이 있는 여인이 유대인의 건강한 남자의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사회의 이런 통념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벽을 깨어 부스고 일어난 접촉입니다. 그저 지나가다 스친 것이 아닙니다. 사회의 두터운 벽을 깨고 그녀는 마지막 인생을 걸고 예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의 권능이 전달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을 만진 결과로 그토록 소망했던 일이 드디어 일어났습니다. 이 때의 일을 성경은 본문 29절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라고 기록합니다. “곧”(euthus)이라는 즉각적인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 즉시 피가 멈추었고 그 결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예수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죽어가던 육체가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나가는 것을 아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밀고 밀리며 예수님의 옷에 손을 데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능력이 나간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마지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 예수님께 손을 댄 이 여인에게만 능력이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짤막하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누가 나를 만졌느냐?” 아마도 이 명령은 제자들에게 다음 같은 명령이 되기도 합니다. “그녀를 찾아 보아라.”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지시에 제자들은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처럼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군가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 것이 무슨 대수이겠는가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병자와 권세자 사이에서 일어난 이 접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대꾸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밀었을 수 있게죠. 이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이 만진 것을 신경을 쓰시다니 그냥 가시죠.” 오히려 예수님이 과민 반응을 보이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나간 것을 예수님과 이 여인만 알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과 이 여인만이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런 영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감동된 드라마에서 제자들은 아무 일도 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들은 예수님을 육체적으로만 보호하고 있는 것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 여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때 33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이 여인이 스스로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마치 가져가서는 안될 어떤 물건을 훔쳐간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다 말씀드렸습니다. 이 일로 “주님의 처분만 바랄 뿐입니다.”하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더러운 몸으로 신성한 예수님의 몸을 만졌다고 생각하니 두려웠습니다. 마치 구약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만졌을 때 사람들이 죽었던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두려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죽어야 될 만큼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한테 그동안 얼마나 거칠게 대우를 받았고 한마디로 왕따를 당했습니까? 이제 병은 나았지만 이것은 사전에 허락된 일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으로 일방적으로 나아간 행동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주께서 어떤 처벌을 내리셔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제 주님의 처분만을 바라고 있는 이 여인에게 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이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이 예수님이 이 여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딸”이라고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여인이 하나님의 나라에 식구가 된 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의 언제나 그리하셨던 것처럼 예수님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이 같은 무지의 때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가는 곳마다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 명령하셨으니”(행 17:30) 하나님은 우리의 많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잠시 그것은 생각지 않으신 채 오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언제나 주님은 하나님은 그 자리에 여전히 계실 뿐입니다. 손을 뻗어야 하는 것은 나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으로 “평안히 가라”고 축복하고 헤어지십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는 분명히 이 여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십자가 아래에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 또 한 사람이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파트너를 얻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본문은 끝나고 마가는 원래의 이야기로 뒤돌아 갑니다. 좀더 크고 멋진 이야기로 뒤돌아갑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야기가 더 크고 멋있는 이야기로 뒤돌아 간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동일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회당장의 딸이나 이름 없는 이 여인에게도 하나님의 능력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새 식구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식구들은 이렇게 모인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세상이 더 이상 소망과 희망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세상의 벼랑 끝에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여인에게 있었던 혈루병은 예수님을 만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우리 중에는 육체의 이런 병을 안고 살아가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또 그렇지 않다 해도 결국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절망가운데도 소망이 있습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는 이 세상이지만 주님은 나를 향해 걸어오십니다. 손을 내밀기를 바라십니다. 손을 내밀어 주님을 잡으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 전 중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이 보내온 소식입니다.
이분은 북한 가까운 지역에서 한인교회를 하는데 북한 사람 하나가 교회 앞마당에 쓰러져 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런 일이 많은지라 그냥 알아서 하지! 하고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런데 전화소리에 교회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며 그렇지 않아도 북한에서 온 사람 때문에 교회가 골치가 아프다고 시끄럽게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 교회를 갔습니다. 그 사람을 보는 순간 뼈만 앙상하게 남았는데 이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교회가면 살 수 있다고 해서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 앞 마당에서 몇 칠을 있었고 찬송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집으로 이 사람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조금 회복되어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청진시 수남지역에서 온 이광일(36세)입니다. 북한에서 굶어 죽으나, 여기서 죽으나 어차피 죽는 것이기에 원망이나 후회는 없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을 통해서 이런 환대를 받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계시는가 봐요!” 하면서 쉬엄쉬엄 하던 말을 마쳤습니다. 선교사님은 이 사람을 살리려고 노력했으나 보름이 지나 죽었습니다. 죽어가면서 마지막 그가 남긴 말은 그가 마지막으로 북한에 있는 제 가족들이 저를 찾을지 모르니 하나님 믿고 간다고 전해달라고 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내 가족들에게 예수를 전하지 못하고 가는 것이 한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선교사님은 그의 손을 꼭 쥐어 주면서 어떻게 하든지 광일 형제의 가족을 찾아 예수 믿게 하겠노라고 약속 한 후 주께 광일이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를 간절히 했습니다.

비유와 회개의 요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2. 비유(20) – 비유와 회개의 요구) / 본문 : 마 5:24-26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우리나라의 고려 공미왕 때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우애 깊은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형제가 길을 가던 중 동생이 황금덩이를 줍게 되었습니다. 아우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다 가지고 싶은 욕심이 솟는 것을 누르고 형과 반씩 나누어 갖기로 하였습니다. 이윽고 강가에 이루러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배가 중간지점정도 왔을 때 동생이 갑자기 금덩이를 형 앞에 내어놓더니 “형님, 제가 이 금덩이를 발견하기 전 까지는 형님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에 조금의 흠도 없었는데 이 황금을 발견하고 나누어 가질 생각을 했을 때 욕심이 생기고 형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전 이 금덩이를 저 강물에 던져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형님이 아우의 손을 잡으며 “그래, 네 말이 뫘구나”하면서 둘이서 힘껏 금덩이를 강물 한가운데로 던져버렸답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서로 화목해지고자 할 때, 장애가 되는 것은 서슴없이 제거해야 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화목이 가능해 집니다.

오늘로서 비유에 대해서 설교한 것이 20번째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비유가운데서 어떤 점을 발견하셨습니까? 저는 예수님의 비유를 설교하면서 전체적으로 비유의 주제가 드러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울러 종말의 때가 가까이 왔다고, 또는 종말이 반드시 오는데 그 때를 위해서 준비하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세기말 팔레스틴 신학자 엘리에치르라는 랍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기 전 하루동안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선생님 어떻게 사람이 자기의 죽는 날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랍비 엘리에치르는 “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 할 수 있는 한 오늘 많이 회개하라. 이렇게 하면 일생 내내 회개 속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9:8에서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선의 삶입니다.

때가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러한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하라는 것입니다. “송사하는 자와 함께 있을 때 급히 사화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재판관에게 내어주면 그 때부터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비유의 내용 설정은 매우 급하게 돌아갑니다. 재판관에게 내어줄 사람은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속히 내어주려고 할 것입니다. 사건을 해결하지 않으면 곧 고발당하게 됩니다. 반드시 해결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경찰서에 가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사건이 일어나면 일단 당사자와 화해를 신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돼서 경찰서까지 가면 어떻게 하든 경찰서에서 해결을 해야합니다. 민사상 고발 사건은 당사자와 해결을 원만히 해결하면 고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일단 검찰로 넘어가면 문제가 복잡해지고 시간이 오래가게 됩니다. 검찰에서 법원으로 가면 더 골치아파집니다. 법원으로 가면 일단 제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검찰에서 법원으로 넘어가기 전에 해결을 해야 불기소처분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단계를 거쳤습니다. 25절 “…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예수님이 왜 범죄자의 장면으로 이야기 하셨습니까? 다급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사건을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길에 있을 때에”는 법정에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이 마지막 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회개
26절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빚을 다 갚기 전에는 결코 형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원문은 이것을 “진실로 … 못하리라” 부정과거 가정법과 함께 ‘우메’(ouj mh;)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마태가 예수님의 이 비유를 ‘형제의 화목’과 연결시킴으로 윤리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원래 예수님의 이 비유의 목적은 단순한 윤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형제와 화목 하는 문제를 가지고도 절대적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정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단순히 형제와 화목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화목을 그렇게 강조한 것은 형제 화목이 그러할 진데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바로 이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화목은 하나인 것입니다. 회개 없이 화목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은 우리의 원죄를 끊는 일보다는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와도 화목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화목하지 않은 자의 예물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제사의 종류(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로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번제(레 1:3-17)는 일상의 신앙고백과 경배의 제사이며 소제(레 2:1-16)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순종의 제사입니다. 그리고 화목제(레 3:1, 7:12)는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제사이며 속죄제(레 4:1, 13)는 무의식적인 범죄와 부정함과 허물을 사하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레 5:1-4)는 하나님과 이웃을 적대 관계에 놓이게 한 죄를 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제사의 종류를 자세히 보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속건제를 드리지 않은 사람이 속죄제를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을 방해하였다면 먼저 이 제사를 지내야 그 다음에 자신의 속죄제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로 인한 다른 사람의 피해는 그대로 놓아둔 채 내 죄만 속하겠다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 아닙니까? 지금 예수님의 말씀도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속건제가 드려지지 안으면 속죄제를 지낼 수 없고, 속죄제가 드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화목제를 드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속해지지 않았는데 어찌 화목제를 지낼 수 있습니까? 화목제가 드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소제 역시 드릴 수 없습니다. 소제를 드릴 수 없다면 일종의 신앙고백 격인 번제는 더욱더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제사의 시작은 속건제라는 이야기입니다. 속건제가 안되면 아무제사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속건제가 시작되면 거슬러 올라가 번제까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가 이 비유를 이렇게 적용한 것은 단순히 윤리에 초점을 두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입장하고 유대인은 다른 것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선택받았다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깊이 박혀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하나님께 가기 위한 ‘화목’ 즉 우리가 강조하는 것이 이미 가지고 있는 상태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유대인에게 지금 번제보다는 속건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로만 끝날 수 있습니다. 단순히 형제와 화목만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인 상태에서 머물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제사가 제일 중요하다고요? 제사가 다 중요하지만 그 시작에 있는 속건제가 중요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첫 단추가 뀌어져야 다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제사의 방법이 네 가지(화제, 요제, 거제, 전체)가 있습니다.
화제는 흠 없는 수소, 암소, 숫양, 암양, 숫염소, 암염소, 산비둘기, 집비둘기, 고운 곡식 가루, 기름, 유향 등의 모든 제물(레 1:3, 10,14; 2:1,2; 3:1,6,12; 4:23,28)
요제는 화목 제물의 가슴, 첫 곡식 단(레 23:15), 첫 이삭의 떡(레 23:20)
거제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 타작 마당의 곡식, 십일조, 포도주, 기름(레 7:32; 민 15:20) 등
전제는 포도주, 독주(레 23:13; 민 28:7)로 드립니다.

그런데 속건제를 드리는 제사의 방법은 두 가지로만 드릴 수 있습니다(레 6:17-18, 14:12, 14).
화제와 요제입니다. 화제와 요제의 특징은 제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화제는 흠 없는 소나 양 등이 필요합니다. 요제 또한 화목 제물의 가슴을 식단에서 높이 들어 앞뒤로 흔들어 들이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속건제 제사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화제는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을 상징합니다(요 1:29,36; 고후 5:21).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요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제물로 바쳐짐을 의미합니다(골 1:22; 히 9:24,25).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우리에게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 피가 있어야 됩니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도 형제와 용서하고 화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가 없으면 그 화목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와 화목하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으로 잘 지내보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걸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반드시 화목하게 하는 제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 제사의 시작은 속건제이며 그 속건제는 화제와 요제로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곧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회개치 않은 사람이 형제와 진정한 화목을 이룰 것 같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형제와 화목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져야 가능합니다. 속건제가 드려져야 화목제사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눅 5:24)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오직 우리 죄를 속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을 통해서만 우리의 온전한 회개, 속건제, 속죄제, 화목제의 제사가 가능한 것입니다. 회개와 화목은 하나인 것입니다. 같이 가는 것입니다.

페루의 쉬피보 인디언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쉬피보어로 “사하심”이라는 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보지 않고 넘겨 버린다.”라는 말이 제시되었습니다. 이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어 거부되었다. 다음에는 “생각지 아니한다.”라는 말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기피한다는 뜻이 있어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말이 제시되었는데, 그 말은 “빚을 탕감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하심은 탕감을 넘어 베푸시기까지 하는 것이라 역시 문제가 있었습니다. 결국 “문질러 없앤다.”, 또는 “지워버린다.”는 말이 제시되었습니다. 이 말은 죄의 존재를 인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식적으로 죄를 씻어 주셔서 더 이상은 죄가 없다는 의미로 “사하심”과 어느 정도 합당하다고 하여 채택되었습니다. 멕시코의 싼 뿔라스 인디언의 성경도 “사하심”을 “약한 마음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하시려는 것은 죄와 함께 죄의식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어떤 미국인이 프랑스를 방문해서 돌아다니다가 시골의 어떤 장터에서 싸구려 목걸이를 하나 사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세관에서 높은 세금을 매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아주 싸구려 물건입니다” 했더니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고가의 고급 품목입니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고가의 세금을 물고 왔습니다. 이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서 그 목걸이를 가지고 보석 감정 전문가에게 그 목걸이를 보였습니다. 감정가는 확대경을 가지고 한참 목걸이를 관찰하더니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손님, 이건 보통 목걸이가 아닙니다. 손님도 좀 보시지요.” 그래서 가만히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보니 거기에 글자가 이렇게 새겨져 있더랍니다. “조세핀에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한 세기를 지배하던 나폴레옹의 사인 때문에 그 목걸이가 그렇게 고가품으로 인정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인과 하나님의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놀라운 기술과 계획, 하나님의 인치심 속에서 만들어진 인생으로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인생입니까!

언제나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나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께 가는 모든 방해요소를 지워버리십니다. 주님의 사인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시는 주앙교회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친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1. 비유(19) – 친구) / 본문 : 눅 10:28-37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한국 사람은 세계에서 빠르기로 유명합니다. 관광지에서 한국사람 별명이 “빨리빨리”가 된지는 오래입니다. 선교지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기 힘든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파라과이 선교사님이 어느 날 사모님과 같이 우체국에 편지를 발송하려 갔습니다. 우체국 안에 손님이 제법 많았고 줄을 서 있었습니다. 차례가 와서 우체국 직원에게 선교편지 약 20통을 건네 주며 보통으로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체국 직원이 편지 20통 정도를 발송하는데 약 1시간을 넘게 걸리는 것입니다. 일반 편지인데 무게가 같다고 해도 하나 하나 무게를 달고 글 한자 쓰고 옆 사람과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고 떼레레(덥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마시는 물)를 빨고 우표 한 장 부착하고 옆 사람과 이야기하여도 줄을 서 있는 그 누구도 빨리 해 달라는 사람이 없답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이 있으니까…
파라과이는 “내일”이란 단어를 너무 좋아한답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이 있으니 걱정이 없는 듯 보입니다. 언제나 그들의 답변은 내일(Manana, 멘니아나)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내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기쁜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림일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이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이 질문으로 예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네가 어떻게 읽느냐” 즉 너는 성경을 어떻게 배웠느냐는 말입니다. 그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정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 율법사에게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오늘 설교 제목을 다른 제목으로 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성경본문 그대로를 설교 제목으로 정하는 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래서 두 군데를 뽑았었습니다.
28절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37절 “너도 이와 같이 하라”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과 마지막 절입니다. 이 말이 본문을 싸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알고 있으면 “하라” 명령형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명령이 모두 481가지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는 것입니다. 마가복음도 마지막 장에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는 것입니다. 누가복음도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8). 요한복음은 내용상 마지막 장인 20장 27절에서 “…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명령형입니다. 우리가 비로소 이 말씀대로 할 때에만 의미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A. 링컨은 “불행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것이 불행인 줄 알면서도 그 방향으로 계속 가는 것이다. 우리 앞에서는 불행과 행복의 두 갈래 길이 항상 놓여 있다. 우리는 매일 두 길 중 한 길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결코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아닙니다. 은밀한 중에 행하는 것입니다(마 6:2).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고, 이 사랑의 본을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눅 22:27, 막 10:45, 요 13:15-16).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그의 사랑을 본받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의 보물은 결코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율법사는 29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친구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옳게 보이려고 질문을 했지만 당시에 친구에 대한 논의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이 질문은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리새인이 아닌 모든 사람을 제외시키려 했습니다. 오늘날 자기교단, 자기교회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사람들의 생각과 같습니다.
에세네파는 “모든 어두움의 자식들을 미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을 정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떤 랍비는 이단자들, 밀고자들, 배교자들은 구덩이에 밀어놓고 끌어올리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께서는 마 5:43절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런 말씀을 기억하는 율법사 입장에서는 “사랑의 의무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질문한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답으로 오늘 비유가 나왔습니다. 비유이지만 언제나 예수님의 비유는 실제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3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는 실제로 당시에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여행객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m의 고지대이며 여리고는 해면보다 250m정도 낮은 저지대입니다. 약 36km되는 내리막길인데 A.D 4세기 말 까지도 강도의 출몰이 빈번했던 지역입니다.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며 예수님이 소경을 눈뜨게 하고 삭게오를 만난 곳이기도 합니다. 당시 여리고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던 도시입니다.
나그네는 강도를 만나 반항하다가 거의 죽게된 상태로 방치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갑니다(31. 32절).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 비유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견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말씀드립니다. 레위인이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규율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사람이 죽은 것으로 판단하고 그냥 갔을 경우입니다. 레위기 21장 1절에 보면 제사장은 일상 생활에서도 모든 시체의 접촉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예배를 위해 가는 길이 아니라면 문제가 안됩니다. 가는 방향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기 때문에 이 여행자와 같은 방향으로 간다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배하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본문에서 의도하는 바는 이런 애매한 해석을 낳게 하기 위한 비유가 아니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여행객은 아직 죽지 않았으며 신음소리를 내며 도와달라고 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도의 적으로도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닌 제 3의 인물을 지목하셨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주후 6-9년 유월절 어느 날 밤중에 죽은 사람의 뼈를 예루살렘의 성전에 뿌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방해한 것입니다. 유대인 입장에선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일제가 한국교회가 예배드릴 때 칼차고 들어와서 예배를 방해하고 총회를 방해한 사건보다 더한 것입니다. 이 일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의 적대관계는 극에 달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유대인이 아닌 혼혈 족인 사마리아인을 예로 드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33). 예수님이 만나 병 고쳐 준 사람을 보면 모두 예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지 못하면 사랑을 못합니다. 어떤 분은 후진국에 가서 사람들을 보면 원래 그렇게 이 사람들은 살아왔으니까 너무 불쌍히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불쌍한 것은 불쌍한 것입니다. 육체나 영혼을 불쌍히 여기지 못한다면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우리 집사람도 불쌍히 여깁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저 같은 사람에게 시집와 가지고…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었습니다. 붕대를 소지하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옷을 찟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기름은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죽어 가는 행인을 위해서 다 붓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자기 짐승에 태워 안전한 주막까지 옮깁니다. 그리고 주막 주인에게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돌보다 모자란 비용은 자신이 다시 돌아올 때에 값아 줄 것이니 염려하지 돌봐달라고 부탁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다시 질문합니다.
36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사랑의 대상을 물었는데,
예수님은 36절에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사랑의 주체를 물어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사는 “누가 나의 친구인가?”를 질문했는데 예수님은 “나는 누구의 친구가 되어야 하는가?”로 재차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이론적인 반면 예수님은 실제적이십니다. 친구가 되려면 친구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죽어 가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어떠한 강제성도 띠지 않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특기할 것은 예수님은 이 행인이 누구라고 밝히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30) 라고 만 하십니다. 여기서 율법사는 이렇게 질문하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그 어떤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나 그 질문은 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것을 물어본다면 그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또한 만일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은 자신이거나 유대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었다고 해도 내용을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 33:11)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 11:19)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 26:50)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3-15)

결국 예수님은 율법사에게서 37절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라는 대답을 이끌어 내십니다. 죽어 가는 사람이 자신이라면 그가 사마리아인일지라도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사의 이 대답은 좀 솔직하지 못한 대답입니다. 율법사는 당연히 “사마리아인입니다.”로 대답해야 되는데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고 대답함으로 핵심을 피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율법사의 교만과 위선을 꺾였습니다. 율법사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것 이상으로 영육간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당장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캐나다의 한 신문 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법원에 이혼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래서 재판장은 부인과 남편을 불러다가 사실 심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인은 남편과 이혼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재판장이 물었습니다. “남편의 노래를 매일 들어야 하는 게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인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래, 노래를 얼마나 못하기에 이혼을 할 정도입니까?” 재판장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자기 남편을 가리키며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는 노래가 단 한 가지뿐인데, 그 노래 제목은 <독신 생활이 좋아>랍니다. 게다가 곡조도 전혀 맞지 않아서 도무지 참고 들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 오늘 여리고로 가던 사람이 나무 멀리 있다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내 옆에 있는 분 한번 처다 보세요. 혹시 이 사람이…
그렇습니다.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여리고로 가는 사람입니다. 예배드리고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향하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피를 흘리며 누워만 있지 않다고 아프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우울증은 고혈압, 당뇨병, 관절염, 요통 등과 같은 만성질환들보다 개인의 사회적, 신체적 안녕을 더 손상시키는 질환이며, U.S. Surgeon General’s Report on mental Health는 우울증이 세계 전체 질병으로 인한 장애의 1/10이상을 차지한다고 보고한바 있습니다.
미국 우울증 협회에서는 미국인들에게 가장 흔하고 건강에 악영향을 주는 질환은 우울증으로서, 약 3,500~4,000만 명의 미국인들이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합니다. 사망률이 만성 우울증 환자의 15%가 자살로 이어져 우울증은 심장질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사망자수를 초래하는 심각한 질환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2005년 사망원인 1위는 암으로 인구 10만 명당 134.5명이 사망하였으며, 다음은 뇌혈관질환(64.3명), 심장질환(39.6명), 자살(26.1명) 순이며, 10대 사인 중 10년 전인 1995년에 비해 사망률이 가장 많이 증가한 사인은 암(23.7)이며, 다음은 자살(14.3명), 당뇨병(7.0명) 순이었습니다.

우리는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어 예수님을 본받아 “누가 나의 친구인가?”를 묻기 이전에 “나는 누구의 친구가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0. 비유(18) – 부자와 나사로) / 본문 : 눅 16:19-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미국에 간 전도사님이 전해준 이야기입니다. LA에서는 가끔 한국인거지를 본답니다. 그분들을 볼 때마다 생각이 깊어진답니다. 그분들도 한 때는 미국이 기회의 땅으로 알고 이민 왔을 텐데 어떻게 살다보니까 거지가 된 것이지요.
이 세상에는 언제나, 어떤 사회나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공존합니다. 미국에도 거지는 있고 일본에도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부자가 다 나쁜 사람이 아니며, 세상에 있는 거지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또한 단순하게 보복적인 심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 속의 부자는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세상 살기가 좋아 하나님을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었던 사람을 말합니다. 돈이 많은 것이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게을러서 가난하게 된 사람을 책망하기도 합니다. 부자는 자기가 소유한 재산 때문에 더 중요한 영혼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비유들이 그렇듯이 오늘 본문의 비유 또한 대조를 이룹니다. 부자와 나사로(거지), 이생과 저 세상으로 대조됩니다.

19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라고 말합니다. 돈 많이 벌어 축재하는 사람들의 네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값진 옷입니다(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부자로서의 자기 과시를 과거에는 옷으로 나타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자동차, 주택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현실주의 자 입니다. 여가를 기분 좋게 보냅니다. 생의 목표가 그것입니다. 아침에 침상에서 일어나며 궁리하는 것이 오늘은 무엇을 하며 즐길까? 하는 것입니다. 호화로운 생활입니다(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분수 넘치게 사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를 최대한 활용하여 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합니다. 부자가 많이 가졌다는 것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다. 한평생 한 번도 하나님을 생각할 틈도 없이 잘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셋째 부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지옥에서 나사로 이름을 불렀습니다.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그를 경멸했을 것입니다. 그를 돕지 않았습니다. 선을 알고도 행치 않은 사람입니다. 충분히 나사로를 도울 수 있었는데 이것을 외면했습니다.
넷째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말씀에 의해서 산 것이 아니라 돈에 의해서 산 사람입니다. 그 결과는 회개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최소한 가난한 사람은 부에 대한 자부심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자기가 잘 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자만감이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를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나사로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남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입니다. 나사로에게는 부스럼이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못 먹고 병원 가지 못하니 병이 떠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질고를 지고 평생을 고통 하는 사람입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세상의 것으로는 빈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지에게 축복입니다. 가난이 칭찬을 들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사로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는 인생을 말합니다.

그런데 22절에 갑자기 상황이 변화됩니다.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보다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빨리 죽습니다. 아무래도 가난한 사람이 병을 제때 치료하지 못하니 빨리 죽습니다. 이 땅에서의 모습은 역시 살았을 때나 다름없이 취급됩니다. 나사로는 죽었으나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다 어딘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육신이 죽으면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의 운명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죽기 이전의 상태와 죽음 이후의 일을 예수님은 가장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만 열 여덟 번에 걸쳐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지옥이라는 말을 유치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핵심을 피해서도 안됩니다.

육신이 죽으면 두 길이 나타납니다. 간단 명료하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23절에 음부 지옥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지옥은 참혹한 곳이기에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지 말도록 하나님의 일꾼들을 동원해서 막으십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그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영원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도스트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쵸프의 형제들’이라는 책에서 보면 이렇게 지옥을 설명했습니다. “만일 지옥에서 붙는 불이 물질에 붙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 몸이 타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지옥은 물 한 방울이 허락되지 않는 곳입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무디라는 미국의 의학자는 어떤 사고를 인하여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나,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를 한 내용을 ‘죽음 이후’라는 책으로 엮었습니다. 그 책에서 죽음 이후의 경험자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죽은 뒤에 좁고 긴 터널을 통과하게 되었다. 내가 살면서 경험했던 모든 일들이 기억되었고 이 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다 알게 되었다” 부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를 분명하게 기억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리챠드 3세’라는 책에서 지옥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불신자들은 양심에 달린 수 십, 수 백 개의 혓바닥들이 쉬지 않고 지껄이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지옥은 자신이 지은 모든 죄악들이 기억나게 되는 곳입니다. 지옥은 무엇보다도 다시 소망을 가질 수 없는 곳입니다. 단테가 쓴 ‘신곡’이라는 책을 보면 지옥 어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했습니다. “이 곳을 들어가는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 자기 운명을 모르며 사는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 헛된 것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 세상 향락에 빠진 사람들, 나중에 다 놓고 갈 수밖에 없는 것에 눈이먼 사람들, 여기 본문 속에 부자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지옥을 만들어 인간을 괴롭히는가?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가?” 지옥은 사람들을 위하여 만든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귀를 가두기 위하여 만든 곳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마귀에게 속아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마련하고 계획하셨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만큼 사람들을 지옥에 가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수 천 년 동안 노력하셨는지 모릅니다. 세상에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자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지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돌려놓기 위하여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지옥으로 가는 길목에 세우시고 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이곳으로 가면 영원히 희망이 없다” 얼마나 힘을 다해 막으시는지 모릅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고통은 말로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지옥으로 빠져 가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마 18:8-9)

지옥의 고통의 길을 피하도록 하나님은 천국을 준비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천국 가는데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돈을 바쳐라, 생명을 바쳐라, 자식을 바쳐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안내자 역할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제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겨울방학에 밤을 세워서 친구 한 명을 억지로 설득해서 안 가겠다는 아이를 함께 데리고 가출을 했습니다. 간 곳은 강원도 황지라는 탄광촌입니다. 그 때 제 꿈은 하도 가난해서 10년 후에 택시를 사서 고향에 금의 환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려면 그 때 생각하기를 누가 탄광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기에 그곳을 선택한 것입니다.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떠납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역이 추천역으로 해발 855m인데 지금은 눈꽃 축제를 만들어 관광열차가 갑니다. 그 옆에 황지역이 있습니다. 지금은 태백역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도착하니까 얼마나 추운지요. 태백은 정선ㆍ도계 탄전과 더불어 태백탄전의 중심지이며 남한 최대의 탄전지대입니다. 1933년 일본인에 의해 매장이 확인된 후 계속 개발되어 1987년 640만 톤으로 전국생산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전성기를 맞이했었습니다. 지금은 수요의 감소로 석탄산업의 경쟁력을 상실하여 1989년 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 43개에 달하던 탄광의 93%가 문을 닫고 현재 3개의 탄광만 남아있답니다. 당시 탄광 근로자는 2만 여명이었는데 지금은 5,000여명으로 감소하였답니다. 제가 탄광에서 일을 하겠다고 그곳까지 찾아갔습니다. 중학생은 안 된다는 걸 사정사정하니까 아침에 오라는 것입니다. 여관에서 하루 묶고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7일주일 정도 생활을 했습니다. 그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탄광촌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 막장인생이라고 합니다. 막바지 인생입니다. 미국에 이민 간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직업이 택시운전이라고 합니다. 택시 운전 중에 생명을 잃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한데 직업이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목숨걸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막장 인생들은 수천 미터 지하에 들어가 40℃가 넘는 곳에서 하루 8시간을 일합니다.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그 안에서 먹고 일하면 탄가루가 폐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 폐가 굳어지는데 그 병이 구폐증입니다. 나중에는 폐인으로 병상에서 쓸쓸하게 죽어가게 됩니다. 구폐증은 아무리 현대 의술이 발달했어도 치료할 수 없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막장인생으로 어렵게 살아가지만 아이들에게만은 그 직업을 물려주지 않으려 합니다.
그 때 제가 머물렀던 어느 방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신다.
나는 공부를 못 하니까 나도 커서 광부가 되겠지.
그런데 아버지는 절대 광부가 되지 말라 하신다.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광부는 절대로 되지 말라 하신다.

왜 아버지가 한사코 말린 것일까요? 광부의 생활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이후 밤을 세워 친구를 다시 설득해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한사코 지옥에 가지 말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너무나 지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돈 가지고 오라는 것 아닙니다. 지옥에는 제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죽어서 실제적으로 가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가 힘써 전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것을 다 잃고도 선택해야 할 것이 천국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할 곳이 지옥입니다. 그 길과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어느 청교도 교인이 아주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그에게 와서 지혜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한 젊은이가 그에게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큰 부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데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 그는 자기의 세 가지 신조를 젊은이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첫째는, 술 마시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만 믿고 만사에 의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자신의 생활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당신이 말한 그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내용입니다. 누가 그런 것을 모릅니까 ?” 하고 뭐 좀 특별난 대답이 없느냐는 식으로 되물었습니다. 그 때에 부자는 정중하게 “다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것이지요”하고 말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알고 있을 뿐이지 실천하지를 않는 것이 지성인의 약점입니다.
 

양과 염소의 마지막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9. 비유(17) – 양과 염소의 마지막) / 본문 : 마 25:31-34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전 세계에서 하루에 15만 명이 죽습니다. 이를 종교별 퍼센트에 대입하여 나누어보면 15만 명중, 무슬림(3만1천500명), 힌두교(1만9천500명), 카톨릭(2만2천500명), 무종교인(1만8천명), 불교인(9천명), 중국종교(9천명) 순으로 사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수치는 하루에 죽는 사람 중 최대한 1만 명을 제외한 14만 명은 개신교인이 아닙니다. 이들은 대부분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은 축복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할 사명을 느끼게 합니다.
모세 이후 인류 역사 3400년의 역사 가운데 3114년 간 전쟁이 지속 되었습니다. 1945-2000년 55년 간 인류역사에 전쟁이 없던 기간은 3주간뿐입니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에게 평안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은 엄격하게 말하면 마지막 심판에 대한 비유입니다. 비유이지만 예언적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예화와 다른 것은 비유는 그 자체가 실제적이라는데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장차 이루어질 예언적 비유입니다.
새해 초부터 목사님은 참 지혜도 없이 종말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십니까?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처음부터 쉬쉬한다고 곪아터질 것이 안 터지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끝을 알고 가야합니다. 마지막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마라톤 뛸 때 끝 지점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어디에 고개가 있는지, 내리막길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끝까지 잘 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는 마지막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서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라고 합니다.

마크 트웨인의 이야기
마크 트웨인은 <톰 소녀의 모험>이란 작품으로 미국의 작가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발명품에 투자하였다고 모두 손해보고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어수룩한 사람이 찾아와 한 가지 발명품을 보여주면서 5달러(5,000원)에 사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가격이 싸기 때문에 무시해 버렸습니다. 찾아온 사람이 바로 전화기를 발견한 ‘벨’이라는 사람입니다. 마크 트웨인은 가격이 싸다고 무시한 결과 거부가 되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부자가 되는 기회를 잊어버리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영생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당시에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목자는 양과 염소가 한 우리에 섞여 있는 상태로 키우고 있습니다. 가뭄 때문에 울타리 안에서 키우기 어려운 지역에서는 염소들도 방목하게 됩니다. 이 때 염소와 양이 섞이게 됩니다. 그러나 양과 염소는 함께 어울릴 수 없는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만, 염소는 황혼이 되어도 바깥에 계속 있기를 좋아한답니다. 그래서 양과 염소는 구분해서 다루어야 됩니다. 팔레스틴의 염소는 대개는 까만 색이고 양은 흰색이기 때문에 그 색으로만도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1.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십니다(31).
심판하시는 주님은 최후의 순간 재림하실 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과 천사들이 함께 오십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겨둘 것이 없습니다.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시는 것은 전 우주적인 성격으로 그 장엄함을 나타내 보여줍니다(24:31, 살후 1:7, 계 14:14-20).

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십니다(32).
여기에는 어떤 민족도 국가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아울러 유대민족도 여기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들만의 예외는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2008년 제29회 북경 올림픽을 통해서 세계적으로 도약하기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64년 동경올림픽, 한국이 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국력을 대폭 신장시켰듯이 중국도 그것을 노리고 있습니다. 중국은 세계인구의 1/5을 차지한다는 데서 일본과 한국과는 좀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국력신장이야 하기에 달린 것이지만 중국이 지금 이 시점을 기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중국 공자를 신으로 만들고 공자를 전하기 위해서 작업을 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신사를 참배하고 이를 통해서 하나로 묶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종교적 심리를 이용하여 국력을 하나로 모으려고 사상통일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슬람의 국가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야 어떻든 결국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 모두 서게 됩니다.

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33)
양의 무리는 오른편에 염소의 무리는 왼편에 양분하게 됩니다. 이것은 제 3의 자리는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어느 민족 어느 개인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부터 왼편은 하나님의 반대되는 자리, 불의한 자리로 나옵니다(삿 3:15, 삼하 20:9, 전 10:2). 반대로 오른편은 하나님의 편으로 위엄과 영광과 존귀와 생명의 자리로 나옵니다(출 15:6, 왕상 2:19, 욥 30:12, 시 45:5). 따라서 마지막 심판 때에 오른편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서게됨을 말하는 것이며, 왼편에 선다는 것은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4.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34절)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31절에서는 ‘인자’로 나타나는 주님이 이제는 ‘임금(왕)’으로 나옵니다. 예수그리스도 인자가 왕이었습니다. 그분이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낮추시어 인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른편에 선 사람들을 다른 표현으로 “복 받을 자들”(호이 율로게메노이)이라고 하십니다. 원문은 완료 분사형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부여하신 축복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 복은 예비 된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것입니다. 예비 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상속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갑자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어떤 자가 구체적으로 복 받을 자인지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1:1-3절을 통해서 보겠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복 받을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 입니다. 그러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복을 받기 위해 성경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게 아니라 읽고 듣고 지키는 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당연히 성경을 읽고, 듣고, 지킨다고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성경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 성경만큼 무시당하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실 뿐만 아니라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1) 읽는 자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수인데 반해 “읽는 자”는 단수형을 씁니다. 읽는 것은 혼자 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꼭 교회에 모여야 했습니다. 성경은 두루마리로 성전에만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행복한 줄 아십시오. 핍박이 심한 로마의 학정시대이므로 성경을 읽기 위해 성전에 모인다는 것은 곧 목숨을 내놓는 일입니다. 요한의 시대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는 자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복 받지 않겠습니까?

2) 듣는 자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경제적 어려움도 어려움이려니와, 정치의 혼란도 혼란이려니와, 지도력의 부재도 문제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옛날에는 설교자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중국은 설교자가 없어 설교를 듣고 싶어도 못 듣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에게는 설교자가 없어 못 듣는 것이 아닙니다. 들을만한 설교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명 설교가 얼마나 봇물처럼 일렁이는지 모릅니다. 들을 귀가 없어 문제랍니다. “인자야 네가 패역한 족속 중에 거하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겔 12:2)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제대로 들은 자는 움직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주님의 말씀대로 따릅니다. 같이 가던 자들은 소리만 들었습니다. 소리만 들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소리와 말씀은 다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 9:6) 그는 당연히 그 말씀을 따라 아나니아에게 갔습니다. 여러분! 혹 소리만 듣는 자들은 아닙니까?

3) 지켜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읽습니까? 눈이 즐거우라고요. 무엇 때문에 듣습니까? 귀가 즐거우라고요. 아닙니다. ‘읽는 자’와 ‘듣는 자’는 ‘지키는 자’에 걸립니다. 읽고 듣는 것의 목적은 지키는 것에 있습니다.

죤스타운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만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은 더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펜실바니아에 아름다운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 위쪽에는 강을 막아서 세운 큰 댐이 있었습니다. 댐 건설 전문가들이 조사하여 댐의 위험성을 발견하고, 이 사실을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마을을 떠날 것을 말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저렇게 크고 튼튼한 댐이 무너지다니”라고 생각하면서 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해 가을에 조사단이 다시 와서 점검한 후에 더욱 위험하게 됨을 발견하고 “마을을 떠나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재차 경고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마을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고 무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 째 경고가 있은 지 보름 후인 1889년 5월 31일에 이 둑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 때, 마을 사람들 2,200명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미국 역사상 최대의 댐 붕괴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였기에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우습게 여기지 마세요. 반드시 마지막 날은 오는 것입니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그 때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요즘은 웃음이 만병통치약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웬 게그 프로그램이 그렇게 많은지요. 사회가 다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그러나 그런 웃음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시계추가 왔다 갔다 하는 시계가 있었지요 그 시계가 무엇 때문에 돌아가느냐 물으면 사람들은 시계 속에 태엽이 있어서 태엽의 힘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많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 태엽을 감아 준 사람의 힘이 태엽을 통해서 그 시계를 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엽을 감아 주고 또 태엽이 없으면 감아 줄 수가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이 내게 있으니까 예수의 구원과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고 그 역사 안에서 영광된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안에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영생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복 받을 자들”로 오른편에 서 있는 기쁨의 자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