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살 길(히브리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6-20)

히브리서는 누가 기록했는지, 언제 기록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신약 성경 중에 유일한 책입니다. 저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언제쯤 기록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데 히브리서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신학자들 중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대개는 바울, 바나바, 아볼로, 브리스길라 등이 기록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더 보기…)

예수 그리스도(빌립보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후예배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더 보기…)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골로새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18)

오늘은 골로새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골로새서는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는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바울의 제자인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입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교회 뿐 아니라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교회도 세운 사람입니다. 골로새에서는 빌레몬의 집에서 모였습니다(몬 2장). (더 보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마태복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오늘 설교는 실수로 앞 부분의 약 10분간이 사라졌습니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본문의 저자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제일 자산가였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 공동체로부터는 ‘죄인’으로 낙인찍힌 소외계층이었습니다(막 2:14, 눅 5:27: 그러나 그 사실을 마태 본인이 말한 것은 아닙니다. 두 번의 증거가 있었는데 마가와 누가가 그렇게 증거 합니다).
마태는 12제자 중에 특출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이 복음서로 그는 어떤 제자들보다도 위대한 일을 감당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더 보기…)

그리스도의 재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행 1:11)

기네스북에 올랐던 프랑스의 한 할머니는 122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이 할머니가 90세가 되었을 때, 이웃에 사는 47세 된 한 분이 할머니와 계약을 하나 맺었는데요. 매달 2,500프랑을 드릴 테니 돌아가시면 할머니 집을 자신에게 넘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돈으로 매달 40만원인데, 할머니가 1년 안에 돌아가시면 400만원에 집을 얻는 것이고, 2년을 더 사신다고 해도 얼마 안되니까 집 한 채를 그저 줍는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100세가 되어도 안 돌아가시고, 110세가 되어도 돌아가실 기미가 없는 겁니다. 120세가 되어도 안 돌아가시고, 그러다가 이웃집 양반이 먼저 죽었습니다. 30년을 기다리다가 돈만 들이고, 77세에 먼저 죽었습니다. 물론 할머니도 이웃 양반이 죽은 2년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언제까지 살게될지도 우리는 모릅니다. 하물며 주님도 모르신다고 한 세상 심판 날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겁도 없이 자신이 안다고 한 사람들이 줄줄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뒤질 소냐 한몫 했습니다.
재림의 시기를 예언했다 실패한 사람들 때문에 재림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마치 통일이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통일교 때문에 이 말을 기피하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말을 이단이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를 훼손하고 왜곡시켜버렸습니다. 사탄의 전략인지 모릅니다.
저는 그런 이단의 재림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고 오늘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눅 17:26) 또한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눅 17: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재림을 말씀하시면서 구약성경의 커다란 두 개의 심판 사건과 연결시키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두 개의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재림하실 때 심판을 가지고 오신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계 14:7)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심판’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결정되었습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시대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심판하실 것을 확실히 하고 계십니다. 노아의 홍수 때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을 심판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6:5-7에 보면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실망이 얼마나 크셨으면 다 죽여버리기로 작정하셨겠습니까? 롯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창 18:20)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의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3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해서 코웃음을 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우습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단들처럼 재림의 날짜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가 점차적으로 심판의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실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왜 다시 오십니까?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은 진실 되어야 합니다. 허세를 부릴만한 여우가 없습니다. 한국말에는 미묘한 느낌을 담고 있는 말들이 많습니다. 당장 쓸 작은 자잘한 물건을 살 때는 그냥 ‘산다’고 하는데 그것이 좀 크거나 여축성을 띤 것이면 ‘들여놓는다’고 합니다. 같은 쌀이라도 한 됫박의 쌀은 산다고 하고 한 가마는 들여놓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오래 사용할 물건을 살 때는 ‘장만한다’고 합니다. 장만이라고 하면 그 집안의 재산목록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물건과 달리 자가용을 사게 되면 ‘굴린다’고 합니다. 바퀴가 달렸으니 당연히 굴리는 것이겠지만 단순히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벤츠를 굴리고 케딜락을 굴립니다. 단순히 비싼 차를 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에 의해 타는 것이 아니라, 허세를 위해 굴리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도 허세를 위해 굴리는 믿음이 되면 안됩니다. “복음은 허세를 위해 굴리지 않는, 복음을 위해 굴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주님 앞에 허세도 허풍도 가식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잠 17:19) 우리나라 조선시대 집들은 대문을 크게 만들었습니다. 유럽의 집들이 굴뚝을 크게 만든 것하고 대조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선포되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심판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긍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노아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긍흉은 선포되었습니다.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2:5)라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방주만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전파했습니다. 롯의 때에도 천사가 하나님의 천사가 구출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한국전쟁 때 제1한강교 폭파할 때에 전단지를 뿌렸습니다. 폭파할 것이니 건너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무시하고 건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도 경고하는 전단지가 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믿지 않고 있다가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 전쟁에도 최소한의 율이 있는 것입니다. 한국은 오랜 기간 권위주위에 눌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권위주의를 깨버려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에 모든 권위를 깨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사회는 엉뚱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윗사람에 대한 존경심은 사라지고 청소년들은 대화 자체가 거의 욕으로 소통되고 있습니다. 사고 싶은 것은 많지만 땀흘려 돈을 벌려 고는 하지 않습니다. 요행만 바랍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이 많으니까 자연스럽게 사회에 대한 불만만 싸여갑니다. 한번은 청소년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담탱이” 어쩌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담을 타고 자라는 식물인지 알았습니다. 한참을 들으니 자기 담임 선생님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존경할 만한 것이 있어야지요?”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할 때 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가끔 훌륭한 부모님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부모에게는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이것이 당위성이며 최소한의 율입니다. 옛날 삼국지에 보면 장군들이 싸움을 하다 잡혀갑니다. 장수를 잡으면 전쟁중이지만 경례를 하고 잘 죽이지 않습니다. 관우나 장비도 잡힌 적이 있지만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르완다 내전에서 투치족과 후투족이 상대 종족을 다 죽여버리는 학살 소식을 들을 때, 야만인임을 느낍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폴포트가 대량학살을 하는 사건을 보면 어떤 존경심도 관용도 없으며 오직 무지함과 잔인함, 천박성이 있을 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이 세상의 마지막 심판을 하실 때에 그런 야만성을 보이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창 7:1) 하나님은 당신의 말을 듣는 자에게는 언제나 피할 길을 주십니다.
유다가 멸망하기 앞서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15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의 사신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16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대하 36:15-16)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지가 2000년이 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수 없는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목숨을 바쳐서 증거 했습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사람이나 민족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했습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 죄를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고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복음을 못 들었다고 억울한 자를 만들지 않습니다.

심판의 날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창 7:23)도 했습니다.
“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 19:24-25)고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심판인 그리스도께서 재람하실 때는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 1:7)
어떤 분들은 천국이나 가려고 예수 믿냐고 그럽니다. “천국이나가 뭡니까?” 그 말은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이유야 어떻든 천국 가려고 예수 믿어야 합니다. 욕심이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옥은 가면 안됩니다.
외국여행하면 비행기 몇 번 갈아타면서 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꼭 물어보는 말이 있습니다. “최종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어봅니다. 돌아 올 때는 ‘인천이나 서울’이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한국말로 ‘천국’이라는 말이 자꾸만 나오려고 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천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오셨을 때는 겸손의 어린양으로 오셨지만 두 번 째 재림은 영광과 권능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한번 오셨던 것처럼 또한 재림하실 것입니다.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29-30)고 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해야할 일은 분명합니다. 본문에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하늘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마냥 서서 하늘을 쳐다봅니다. 이제 무얼 해야 할지, 다음에 해야할 일이 막막했기 때문입니다.

옛날 북한의 어느 시골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당을 짓는데 돈이 부족하였습니다. 시골이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돈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 교회를 맡은 선교사도 더 이상 돈을 얻어올 때도 없었습니다. 예배당을 짓다가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 어느 집사님이 기도하시다가 자신의 전답을 다 팔아 교회에 들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완공을 하였는데요. 교회는 다 지어졌지만 문제는 그 집사님 가정입니다. 전답을 다 바쳤으니 어떻게 먹고삽니까? 그래서 선교사님이 그 집사님을 교회 사찰로 삼으시고 교회 안에 들어와 살게 하고, 작은 돈을 주며 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 애들 교육이 또 문제였는데요. 마침 선교사님이 그 집 아들을 미국에 아는 분에게 소개하여 유학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 아들이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들어와 아주 큰일을 하게 됩니다. 그 분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바로 백낙준(1895-1985) 박사입니다. 아버지의 헌신에 대한 보답으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축복하신 겁니다.
백낙준 박사님의 아버지(백사경:시각장애인)는 무당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당신, 그런 짓만 하다가 나중에 지옥가면 어떻게 하겠소? 당신 자녀들 멸망 받을 짓 하지말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니 이 양반아, 당신이나 잘 믿지. 별것 다 간섭하네. 재수 없게.” 그러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잠만 자면 그 말이 들리는 겁니다. “당신 자녀들 멸망 받을 짓 하지말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그래서 자기를 돌아보니 순 거짓말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생각하고 그 생활을 청산하고 예수를 믿게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사를 보면 전부다 그렇습니다. 지나가다 한마디하면 그 한마디가 그 마을을 복음화 시켰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토마스 선교사가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당시 철벽같이 방어하고 있었으니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우리나라의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왔다가 그 때 통역관으로 동승한 토마스 선교사 잡혀서 죽게됩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그 사람에게 한마디합니다. “예수 믿으시오.” 그 때 그 사람은 예수가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결국 얼마 안가 예수 믿었습니다. 예수라는 말 한마디를 우습게 여기면 안됩니다. 예수의 이름에 생명이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의 이름을 말해 보세요. 예수의 이름을 증거 해 보세요. 예수의 이름 자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역사 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를 구원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5-17)

적진에 들어가 임무를 완수해야하는 검은 베레모의 특수요원들은 훈련을 늘 실제와 같게 합니다. 일년에 절반이 실제상황처럼 훈련합니다. 한번은 기자가 물었습니다.
“비 오는 날 작전 나가면 비에 젖어 힘들지 않느냐?” 요원이 대답하기를
“비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젖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인생은 고난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고난이 있다는 것을, 이왕 고생스러운 것이라면 선을 행하면서 고생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일어나 다시 달리고, 선을 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이 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5절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라고 말합니다. 이거 하나만 분명히 하면 됩니다. 나는 누구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사람인가? 자기의 주가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명령을 내려보는 겁니다. 그 명령에 따르는지 보면 압니다. “주”를 길게 부르면 “주”에서 “주님”, “주인님”이 됩니다. 목사들이나 사명을 주님께 받은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미 6: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종노릇 해보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종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모릅니다. 구약시대 때나 예수님 시대에는 거의 한번 종이 되면 평생을 종으로 살아야 됩니다. 종에서 해방 받을 길이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불가능합니다. 가끔 탈출을 시도하는 종이 있는데 잡히면 죽거나 더 심한 고통스러운 일이 맡겨질 뿐입니다. 유럽에서는 해상이 발전하여 배 밑에 들어가 쇠고랑을 매단 채 평생을 노를 저어야 하는 노예들이 많았습니다.

찬송가 305장을 쓴 존 뉴톤(John Newton, 1725~1807)은 바로 이런 노예를 팔고 사던 사람이었습니다. 뉴톤이 여섯 살 때 그의 어머니가 죽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뱃사람이었고 뉴톤의 어머니가 죽자 그 다음해에 곧바로 재혼을 하였습니다. 이 일 이후 뉴톤의 행실은 삐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끔찍한 욕설꾼이 되어 보통의 저주와 맹세의 말들로 만족하지 않고 매일 새로운 욕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노예선의 선장이 되어 노예를 사고 팔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습니다. 그가 노예무역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폭풍우를 만납니다. 배는 파선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주여 나를 살려 주소서.”라고 다급하게 말합니다. 그는 임박한 죽음 앞에 성경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의 영혼의 종말에 대해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완전한 죄의 깨달음이 없이, 절망과 조바심이 뒤섞인 침울한 시간을 보냅니다. 뉴턴은 자기가 지은 죄가 하도 커서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자신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치 못하는 뉴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배가 파도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손길로 믿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까마귀 울음소리 같았지만, 주님은 멸시치 않고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배가 파선 된지 4주만에, 뉴톤과 선원들은 모두 구조되었습니다. 그 일을 통해 그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영접해 주심으로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종이 누구인지 잘 아는 사람입니다. 종의 운명은 오직 주인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제일 바보 같은 짓이 사단의 하수인으로 죄에게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오직 나를 사주신 선하신 우리 주님께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5절 하반에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하십니다. 준비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있는 군포시 산본은 ‘피겨 요정 김연아’의 고향입니다. 바로 옆에는 ‘수영선수 박태환’의 고향 안양입니다. 우리 집사람 학교 동창이 박태환의 어머니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김연아, 박태환 같이 될래요?” 하는 아이들을 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고된 연습은 생각지 않고 그들의 영광만 생각합니다.
김연아는 한 해 300일 가량을 훈련합니다. 빙판에서 하루 300여 회 점프훈련을 합니다. 1년이면 약 9,000회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점프하는 셈입니다. 점프 성공률은 80% 정도이니까 1년에 점프하다가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는 횟수가 1,800번 정도입니다. 차디찬 얼음바닥에서 엉덩방아를 수도 없이 찧으며 다시 일어나야 하는 어린 소녀를 기억해 보세요. 회전하려 애쓰는 척추, 착지를 위해 회전력을 잡아 줘야하는 골반의 상충작용으로 피겨 선수는 온몸에 골병이 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녀의 우아한 자태는 모진 훈련 끝에 피어난 아름다운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입니다.
“넘어지지 않고 달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 넘어졌다 일어나 다시 달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디즈레일리
성공은 공짜가 아닙니다. 천재도 소용없습니다. 항상 준비하는 자의 것입니다. 준비하는 자에게 본문은 두 가지를 당부합니다.
“온유와 두려움으로”(ajlla; meta; prau?thto” kai; fovbou,) 하라고 합니다.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원문에는 두 단어가 더 있습니다. “ajlla; meta”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물론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대답에 대해서입니다. 저는 언어적 대답만이 아니라 좀더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삶으로 대답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헬라어의 온유(prau?thto”:프라위테토스)는 태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품을 뜻합니다(딤후 2;24, 25). 두려움(fovbou:포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는 두려움을 가지고 해야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아무렇게나 말하면 안됩니다.

스코틀랜드 설교가 매더슨은 자신의 전도집회에서 회심한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읽을까요? 그들은 여러분을 읽습니다. 그 사람들은 여러분이 정말로 자기가 말한 대로 사는지, 안 사는지를 알기 위하여 여러분의 생활과 행동방식을 아주 샅샅이 읽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 점을 명심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생활이 여러분이 하는 말과 어긋나는 것을 그들이 발견하면, 마귀가 이일을 트집잡아 그리스도에게서 떼어내려 할 것입니다.”

본문 16절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선한 양심이 있어야 선이 나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4-35) 여기에 보면 쌓입니다. 선도 쌓이고 악도 쌓입니다. 잘 우는 사람은 선한 사람입니다. 대체적으로 공감하시지요? 잘 웃는 사람은 선한 사람입니다. 대개는 그렇습니다. 사람이 악해지면 이요 감정이 사라져 갑니다. 주님은 악한 세대를 가리켜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7)고 하셨습니다. 유머는 이요 마음을 열어야 만들 수 있고 보인다고 합니다.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근 사람은 웃을 줄도 모릅니다. 마음을 열면 유머가 보이고 행복해 집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머니랑 결혼하겠다고 버팁니다. 아버지가 뜯어말립니다.
“그건 안 돼, 할머니는 나의 어머니란다.” 그러자 아들이 말하기를 “그럼 아버지는 왜 우리 엄마랑 결혼했어?”
구약의 히브리어는 선한 것과 좋은 것과 기쁜 것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바로 ‘토브’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좋은 것이 선한 것입니다. 선한 것이 기쁜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이라는 것은 겨울에 입었다가 여름이면 벗어 던지는 외투가 아니다.
만약 그것이 편하면 택하고 불편하면 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다면 한국은 벌써 한국인으로부터 오래전에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 고 했습니다.
이 땅에 몸담고 사는 내 나라가 그렇듯이 하나님의 나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렘 7:23)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새벽 한 시, 두 시에 나무를 짊어지고 오십리 떨어진 시장에 가면 아침때가 됩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팔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이 됩니다. 그 일을 늘 반복했는데 어느 날 장에서 나무를 팔다가 예수 믿으라는 어느 선교사의 말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이분은 한쪽 눈이 없고 배운 것도 없습니다. 남의 집 머슴입니다. 천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로는 상놈중의 상놈입니다. 아주 가난하고 불쌍한 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의 말을 듣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 집안에 다이너마이트가 떨어진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분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온 마을이 복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마을은 온 마을이 오늘날까지 예수를 믿습니다. 한쪽 눈이 없었던 나무꾼의 아들은 장관이 되고 방송국의 국장이 되고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자랑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마을에서 목사만 18명이 나았습니다.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복음의 기적은 머물지 않습니다. 복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복음은 소망을 만들어 냅니다. 살립니다. 고칩니다. 능력이 일어납니다.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 모든 축복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주가 아니면 다른 것이 주가 됩니다. 여러분! 그깟 돈을 주로 삼으시렵니까? 아니면 아파트가? 아니면 세상 출세가? 다 별것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님으로 섬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까지 자랄지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3-16)

버스 정류장에 버스가 한 대 서있었습니다. 시간이 좀 흘렀는데도 기사는 여전히 손님을 기다리느라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성질 급한 한 남자가 소리쳤습니다.
“기사님, 이 똥차 언제 출발해요?” 버스 기사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네 손님, 똥이 다 차면 출발합니다.”
우리 속담에 “내가 똥 눈 우물물을 내가 다시 먹는다”고 했습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했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물어봅니다. 마치 고기가 “물이 어디 있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나 가까이에 있어서 모르는 겁니다. 내가 지금 호흡하는 것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지금 이곳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그분이 하실 일을 대신 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복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는 별로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변화되어야 합니다. 회개하여야 합니다. 회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살던 방법이 아니라, 내 뜻대로 살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겠노라고 그 방향을 변경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입으로만 회개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입으로 한 회개를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입으로만 주님의 제자가 아니라 주님의 제자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기독교 교육의 최종적인 목적은 예수의 제자를 양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하면 다른 제자를 만들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성경이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면서 기독교 교육의 핵심은 성경교육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기 위하여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목숨을 마쳤던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성경을 보기 위하여 노력했기 때문에 당연히 기독교 교육은 성경을 가르치는 일이었고 주일학교 운동이 전 세계에 보급되면서 그 목적은 어린이를 위한 성경 학습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한가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바지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흘러내리는 것은 자연적으로 흘러내리지만 흘러내린 바지를 끌어올리는 것은 반드시 손이 가야합니다. 잡아 당겨야 합니다. 가만히 있는 바지가 흘러내리기는 하지만 절대로 저절로 혼자 올라오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흘러 내려갔던 바지를 올리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멀어져 간 것을 다시 찾아 끌어 올려야 합니다. 인간에게 죄 성이 있어서 마치 바지가 저절로 흘러 내려가듯이 내려가기는 하지만, 저절로 올라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른 기독교교육을 통해서만 흘러 내려갔던 우리의 마음과 뜻을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중국 병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적은 물에 큰 고기 없고, 마음 적은 사람 큰 성공 없다” 큰 고기를 잡으려면 큰 물가로 가야합니다. 크게 키우려면 큰물로 보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큰 교육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제일 크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마 12:41 “…요나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절 “…솔로몬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가 제일 크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크신 예수를 작게 만들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이 큰 것인지, 오늘날 우리 교육은 제대로 가고 있는지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바른 방향을 잡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근대에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제일 고민하여 내린 결론이 있습니다. 1952년 미국교회협의회 안에 기독교교육부 특별위원회에서 5년 동안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58년 다음과 같은 기독교 교육목적을 발표하였습니다.
“기독교 교육의 지상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찾으시는 사랑을 깨달을 수 있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성장하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여 살고, 기독교적 공동체와의 생동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여러 방법으로 이 사랑에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기독교교육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다음과 같은 것들에 힘써야 할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각 발달 단계에서, 신적 창조물인 자신의 높은 잠재력을 깨닫고, 자신들을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여 그리스도인들로서 성숙을 향해 성장해 가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에서 책임적인 역할을 취하여,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한 대상으로 보면서 저들의 가족, 교회, 그리고 다른 개인과 단체들과 더불어 기독교적 관계를 설정하고 유지하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계를 하나님의 창조로 보는 보다 나은 이해와 각성을 얻도록 하여 그 가치들을 보존하고 하나님과 인류에게 봉사하기 위해 활용하는 책임을 수락하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성서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증진시켜서,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할 수 있도록 하며, 역사적 기독교의 유산들 속에 있는 다른 요소들을 인식하고 효과적으로 이를 활용하도록 도와 줄 것.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의 국내외 선교에 성실히 참여함을 통하여 기독교적 친교 속에서 책임적인 역할들을 발견하고 수행 할 수 있게 할 것.

여기에 보면 각 항목의 끝나는 말에 모두 “도와 줄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기독교교육의 핵심입니다. 기독교 교육은 도와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고 나만 잘되려고 하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라고 말합니다. 자기만 도와 달라는 기도, 자기만을 위한 축복 언제까지 이런 교육적 틀에 갇혀 있어야 합니까? 어른이 되면 어린이를, 노약자를 도와주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고 했습니다. 도와 주라고 만든 거예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들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한참 걷다가 피곤함을 느낀 할머니가 “영감, 나 좀 업어줄 수 없어?”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업어주기 싫었지만 나중에 들을 잔소리가 겁이 나 할머니를 업어주었습니다. 업혀 가던 할머니는 조금 미안했던지 “나, 무겁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럼, 무겁지!”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습니다.
할머니가 “왜?”하고 되묻자 할아버지는 “머리는 돌덩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으니까 그렇지”라고 대답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할아버지가 다리를 다쳤습니다.
“할멈, 다리가 아파. 나 좀 업어 주라.” 할머니가 갈 때의 일도 있고 해서 할아버지를 업어주었습니다. 이에 미안한 할아버지가 “나, 무겁지?”하면 자기를 따라할 것 같아서
“나, 가볍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럼 가볍지!”라며 “머리는 비었지, 입은 싸지, 허파엔 바람만 잔뜩 들었으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도우며 사세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미국의 한 여론조사기구(Life Way Research)에서 “미국 교회 외형 확장을 통한 부흥 실패”라는 결론을 내 놓았습니다. 한 교회가 대형화되는 과정에서 주변의 많은 중소규모의 교회들이 위축이 된다면 전체적인 성장은 실패한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교회생활을 잘 하도록 도와 주어야 하는데 빼앗아 온 것입니다. 교회는 자신의 교회 성장에만 관심을 갖지만 선교회는 여러 교회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단체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를 하기 이전에 먼저 선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앙교회 또한 늘 개인과 교회, 선교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생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나만 살면 된다는 식의 교회는 안됩니다. 우리 집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축복은 안 됩니다. 혼자서 선교 다 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 용어 중에는 모달리티와 소달리티가 있습니다. 모달리티가 교회라면 소달리티는 선교회입니다. 전방과 후방, 보수와 진보가 역할을 분담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교회는 성장과 축복이라는 단어에 파묻혀 협력을 잊어버렸습니다. 성장과 축복은 협력 가운데서 이루어져 가야 합니다. 본문 16절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북 유럽에 간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유가 있었습니다. 러시아 빼째르부르크에서 육로로 핀란드로 넘어갔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얼굴이 굳어 있었고 사진 찍기가 겁납니다. 그리고 사진 찍히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런데 핀란드, 스웨덴 사람은 다른 거예요. 사진 찍으라고 웃어주고 여유가 있었습니다. 어느 호텔에 갔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앞으로 뛰어나왔습니다. 아니 튀어나왔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 모릅니다. 유럽 사람들은 절대 필요 없이 빨리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린아이, 여자들이 먼저 나가고 차근차근 남자들이 나옵니다. 나도 모르게 엘리베이터에서 뛰어나온 나는 뭐 급한 일이 있어서 뛰어 나온 게 아니잖아요. 뛰어나와 로비에서 두리번거리기 미안해서 그 사람들의 시아에서 사라지기 위해 어디론가 계속 뛰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저 자신을 기억합니다.

본문 14절 하반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속도를 뜻하는 speed는 본래 성공과 부를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남보다 빨리 뛰어야 산다는 서양 철학입니다. 우리말에도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이 있는 것을 보면 속도의 중요성을 몰랐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인의 심성이 원래 빨리빨리는 아닙니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은 비가와도 그 비를 맞을 지언정 경고망동하고 촐삭 맞게 뛰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지배자인 일본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조급하게 걸어 다니는데 오히려 한국인들은 대로 한 복판을 유유히 걸어다니고 있어 과연 누가 식민지인인지 모르겠다”는 술회도 있습니다. 빨리빨 리 문화가 오늘날 한국을 이끌고 있다고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빠른 것을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은 인터넷 속도, 컴퓨터 속도, 핸드폰을 6개월만 바꾸는 나라라고 미국 교과서에 기록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 심리학자에 따르면 속도를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물리적 속도, 사회적 속도, 개인적 속도입니다. 개인적인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고만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조상들도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급할수록 돌라가라”, “아는 길도 물어가라”,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 아무리 급해도 바늘귀에 실을 넣어야 바느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얼마나 급해졌는지는 애국가를 들을 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 대개는 “길이 보전하세”의 끝 소절이 끝나기 전에 다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애국가가 길이 보전되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국가마다 성격이 얼마나 급한지를 측정하는 방법이 하나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신호가 바뀌었는데 앞차가 움직이지 않을 때 뒤에 있는 차가 얼마의 시간을 기다려 주는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동경의 경우 4.5초 기다려 준답니다. 서울의 경우 1초 기다려 줄까요? 어떤 사람은 신호등이 지금 막 바뀌었는데 크락션을 누르더라구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려고 하는 이유는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지 않으려고 것입니다. “요동치”로 번역된 ‘클뤼도니조메노’는 조타 장치가 없는 배처럼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자꾸만 흔들립니까? 반석(바위)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장하지 못해서 그래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그래요. 성경은 교회를 여자로 말합니다. 돕는 배필입니다. 그리스도가 지금 이곳에 계신다면 도울 일, 하실 일, 그것을 우리가 하는 것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복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제발 복권을 사라!’ 복권을 사는 것 까지는 우리가 해야 하나님이 당첨되게 해 주실 수 있는 겁니다. 혹시 다 복권을 사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행동을 해야 됩니다. 하다 못해 사과나무 밑에 가서 입이라도 벌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떨어지는 것이라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입을 여세요. 움직이세요. 일을 하세요. 하나님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51.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본문 : 마태복음 16:13-17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어려운 신학을 꼬집는 일화로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난해한 신학자인 폴 틸리(Paul Tillich)가 주님이 이 땅을 떠나시기 전, 마지막 날에 예수님를 만났다면, 그리고 예수께서 가이샤랴 빌립에서 베드로에게 물었던 중요한 질문을 폴 틸리에게 묻는다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폴 틸리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존재의 존재론적 근거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의 목적론적 근거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뭐야!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우리는 어려운 말이나 신학이 마치 수준 있는 신학이나 설교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질문에 베드로는 짧게 그리고 핵심 있는 내용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이 주앙교회 성도 여러분의 고백도 되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인생의 의미나 삶의 목적을 찾고 싶어하는 깊은 갈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직업에서 의미를 찾습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 ‘되느냐’ 보다 무엇을 ‘하느냐’에 가치를 둡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쉬지 않고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무엇을 소유했는가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짓습니다. 이들은 새 차, 새 집 또는 새 옷에서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경제적인 문제에 연연하고 마음을 졸입니다. 항상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뿐인 진리는 다른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존재는 그저 광활한 우주를 떠다니는 잡동사니에 불과합니다. 예수를 바로 아는 일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우리의 가치관 목적의식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여론
예수님께서는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회적 평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예수는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얻은 지식으로 예수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는 나의 지식으로 또는 사람의 지식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소위 “4대 성인”중의 하나라고만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TV나 신문에 불교행사에 카톨릭 신부나 개신교 목사가 참석해서 예불하는 행위를 보여주며 “종교계가 마음을 합하고 있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이런 영향하에 있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종교다원주의 사상에 물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이것을 반대하는 개신교 목사는 이 시대를 거스리며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하는 목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의 마음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성인중의 한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2000년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세계복음주의 자들이 209개국으로부터 1만 7천여 명이 모여 자신들의 복음주의적 입장을 재 천명하는 “암스테르담 선언문”을 채택했습니다. 이 선언문의 내용들 속에는 ‘우리는 타종교인들에게도 예절 있는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복음 전도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타 종교인에 대해서 배타적 태도로 접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 동네로 통행하시고 유대인으로서는 만날 수 없는 여자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대화하셨습니다. 타 종교인과 대화 할 수는 있으나, 우리는 동시에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복음의 유일성(uniqueness)의 진리를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세상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들의 대답을 잘 보십시오.
14절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으나 여전히 예수를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모두 사람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 또는 주,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몰라본 사람들
“가로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16:14)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각각 느끼는 데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따라 다녔습니다. 창세기부터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수많은 제사장과 왕들을 통해서 그렇게 누누히 약속하시고 약속하셨던 분이 실제로 오셔서 그 증거들을 또한 그렇게 많이 보여주셨건만 양을 잡으면서도, 성경을 읽고 있으면서도 그 모든 것의 실체 되신 그 분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이들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포로로, 노예로, 식민지로 고통을 당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예수를 몰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비슷하게 봤지만 그들은 전혀 틀리게 보고 있는 것이고, 그 말은 하나님의 언약을 희미하게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 –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채찍질하시며 정화시키시는 모습과, 부정과 부패를 일삼으면서 형식과 제도에 빠졌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독사의 새끼들아”하며 책망하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약대털옷을 입고 광야에서 외치면서 헤롯 같은 권력자의 비리를 꾸짖으면서 시대와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세례요한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는 그러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를 개혁하려고 오신 게 아닙니다. 비슷하게 생각을 했지만 전혀 예수님을 잘못 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썩어빠진 제도와 권력을 향해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드셨던 민중의 지도자로 여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한 일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 때문에 오신 분은 아닙니다. 아무리 제도를 바꾼다 해도 하나님을 떠나 죄와 저주와 사단에게 빠져 있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로 사회를, 세상을 개혁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 – 5병2어로 오천명을 먹이고, 물위를 걸으시고, 소경을 고치시고 하는 엄청난 신비한 능력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에서 불을 떨어뜨리고,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구약시대 최고의 신비한 능력을 소유했던 엘리야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러 오신 엘리야로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시기 위해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신비한 능력을 보이시기도 하셨지만 그 능력자체를 보이시기 위함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는 것을 신비한 능력을 체험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수련회를 하면 무엇인가 불을 받아야 하고, 방언을 하지 못하면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가 계속 무언가 신비한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일생을 보냅니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쓰러지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비한 어떤 체험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정말 잘못 본 것입니다.

예레미야 – 민족과 국가의 아픔과 고난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눈물의 선지 예레미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위해 눈물 흘리셨던 예수님을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예레미야로 여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창녀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 가난한 자들과 함께 식사하셨으며 불쌍한 고아인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 유하시기를 기뻐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박애주의를 실천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본 받으라고 오신 게 아니십니다. 예수를 믿어서 하는 가장 고귀한 일이 마더 테레사와 같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돕는 자선사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일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체 자선만이, 박애주의만이 최고의 선인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 가난을 조장하고 빈곤을 가져다주는 근본적인 존재한테 이용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박애주의를 보여주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레미야로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단히 착각을 한 것입니다.

선지자중의 하나 – 산상보훈을 비롯해서 성경을 풀어서 권세 있게 말씀을 전해 주실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훌륭하게 전달 해주는 훌륭한 선지자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훌륭한 가르침과 삶의 지표를 제시하시는 인생의 선생님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이요 선지자적인 요소가 있으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단히 착각한 것이고 잘 못 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단순히 우리가 따라야 되고 실천해야될 삶의 규범을 제시하시고 가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행위자체와 말씀자체를 지키고 실천하는 게 기독교라면 기독교도 이슬람교나 불교나 똑같은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들도 마호멧을 석가모니를 존경하고 그 들이 제시한 삶의 규범과 원리와 실천강요를 따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호멧처럼, 석가처럼 우리에게 규범을 던져주시고 하늘나라에 가신 분이 아니십니다. 종교를 창설하시고 교리를 실천하고 율법과 규범을 실천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선생으로만, 선지자중의 하나로만 여기기 시작할 때 기독교는 종교에 빠지고 제도에 빠지고 교리에 묶이게 되고, 생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형식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율법에 빠지고 윤리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실천할 무언가를 가르치고 떠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생명으로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관심은 이 질문으로 대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한 제자들에게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못된 버릇하나가 있습니다. 눈치입니다. 아마 전 세계에서 눈치하면 한국사람일 것입니다. 한국 사람은 눈치가 너무 빨라 속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내 심중의 마음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고 하셨습니다. 나의 고백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베드로의 고백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어디서 배워서 알게된 것이 아니며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친히 역사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개혁가도 박애주의자도, 신비운동가도 아니신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수 천년동안 하나님의 가슴속에 감취었던 비밀이 터지는 순간이요. 수 천년 동안 그의 조상과 선진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요. 모든 고통받고 저주가운데 있던 인류가 기다리던 소리였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 이 단어 하나에 모든 지식과 지혜의 보화가 다 들어있습니다(골 2:3). 그리스도안에 하늘과 땅이 통일됩니다(엡 1:10). ‘그리스도’이 단어 하나에 창 1장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계시록 마지막에 나타나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모든 권세가 다 포함된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이 이름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 후에 세상은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이 발견하고 미친 듯이 전세계로 들고 뛸 수밖에 없었던 그 이름 ‘그리스도’입니다. 원형경기장에 죽어가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칼과 창 앞에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면서도 찬송하게 만들었던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그리스도
우리는 눈치가 빠르니까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카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도 받았고 “이제 따라만하면 되지”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람마다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각기 다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의사로 믿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인정이 많으신 은행장쯤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입학 시험장에서 인심이 후한 체점관이나 심판관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세상의 출세와 성공의 수호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틀린 대답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범 답안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가 필요할 때만 찾아가는 병원이나 은행으로 생각하고 내 사업의 방패막이로 생각하면서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는 때로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 결국 예수님에 대하여 실망을 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필요할 때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예수와 함께 한 몸이 되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워싱턴이 대통령이 된 후의 일입니다. 한번은 각료들과 고향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각료들은 인사를 드릴 때에 너무 송구스러웠습니다. 대통령의 어머니로 하여금 구차한 일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각료들은 대통령에게 건의하였습니다. “각하,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 나라의 어머니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일하게 하고 어머니는 쉬시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통령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와 마주 앉은 자리에서 그런 의견을 건넸습니다. 그때 대통령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대통령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께서 일하라 하셨으므로 나에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한 나는 일할 것이오.”

여러분! 손을 가슴에 얹어봅시다.
진심으로 예수가 나의 주님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들을 차례입니다.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행위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행위를 쉽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 봉사하는 것, 헌금하는 것, 전도하는 것, 선교하는 것은 모두가 행위입니다. 이것이 다 아무 것도 아니란 말씀입니까?
요한계시록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9.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 마 1:16, 막 8:29-31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6)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29-31)

참 세월이 빠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예배드린 것이 벌써 1년이 되었습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10년이 지나서도 우리는 같은 말을 할 것 같습니다. 세월은 참 빠르다. 그 때도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모두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는 세월 잡으려고 급하게 사는 민족 중에 우리민족을 따를 민족은 없는 것 같습니다.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한국사람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현지 가이드들은 다른 말은 몰라도 “빨리 빨리”는 압니다. 저도 패키지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사람은 아침 일찍 일어나 제일 빠른 보트 타고 섬을 한바퀴 돌아옵니다. 그런데 유럽사람들은 늦게 일어나 느린 큰배를 타고 서서히 그 섬을 돌려고 오고있었습니다.
우리는 말도 빠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컴퓨터 시대에는 한 단어라도 줄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미개한 말일수록 단어가 길고 문장이 깁니다. 원래부터 한국말은 간단합니다. 신체를 부르는 말은 거의 단음절로 되어있습니다. “눈, 코, 입, 배, 젖, 손, 팔”이 모두 단음입니다. 두 음절도 있지만 그것은 “머리, 다리, 허리”처럼 규칙적인 꼬리를 가지고 있어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들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은 미분화 현상이라고 해서 “머리 깍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머리 카락을 깍는다”로 해야 합니다. 여자들이 미장원 다녀와서 하는 말이 “나 머리 잘랐다”고 합니다. 그러고도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아니 미장원이 머리 자르는 사형장입니까? 외국인이 한국 사람을 보고 “빨리 빨리”라고 놀림을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 “빨리 빨리”가 부작용도 있었지만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그들이 한국사람 부르는 소리가 “빨리 빨리”가 다른 것으로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어떻게 불러주면 제일 좋겠습니까? 그리스도인 “크리스찬”으로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빨리 빨리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예수님께 제일 많이 붙여지는 칭호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Cristov”)라는 것입니다. 제가 다시 이 단어의 횟수가 얼마나 나오는지 세어 보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적용된 것만(성도를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 것은 제외) 약 535개가 나옵니다. 제가 1년 동안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는데 오늘까지 49번을 했습니다. 참 다양한 예수님의 칭호, 상징, 은유적이 표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설교한 제목들을 주보에 적어두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신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면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성경저자들은 그 시작에서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누가는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바울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4)라고 증거 했습니다.
신약성경이 일관되게 주장하고, 전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Cristov”)라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야”입니다(요 1:41, 4:25). “메시야”를 헬라말로 번역했을 때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메시야”라는 말보다는 “그리스도”란 말이 많이 사용된 것은 신약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유대인에게보다는 헬라지역의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달되고 그곳으로부터 다시 전 세계에 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도 그리스도인을 크리스찬(Christian)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돈만 있으면 가지 못할 이 땅의 어느 곳도 없습니다. 단 한곳을 빼고는요. 바로 북한입니다. 그러나 북한도 1992년 중국과 수교를 맺고 백두산(장백산)을 구경가게 되면서 조금씩 변화가 왔습니다. 이 때 가이드하던 자매가 있었는데 조선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백두산 정상에서 교회를 다녀보지 않아서 아멘이라는 말도 모르는 가이드자매에게 어떤 장로님이 기도하면서 “아멘”하고 그 자매가 묻길레 기독교인들은 기도하고 나면 반드시 아멘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때 관광객 중 “평신도”라는 깃발을 꺼내 들어서 이 자매가 생각하기를 아 남조선에는 “평안도, 황해도, 함경북도, 경기도”가 있는 것처럼 남조선에는 “평신도”가 있구나 생각했답니다.
성도의 이름을 통일한다면 그리스도인 즉 크리스찬으로만 부르면 됩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용어는 구약에서 “메시야”는 ‘기름부음’의 뜻으로 제사장(출28:41), 왕(삿9:8), 선지자, 예언자(왕상19:26)에게 해당하는 용어입니다. 사무엘상 16:6에서는 “여호와의 기름부으심”으로 나옵니다. 시편에서는 다윗의 왕권에 사용되었습니다(시2:7, 100:4 등).
그리고 사람들(유대인)은 다윗과 같은 왕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대망(메시야)사상 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자신의 저서의 시작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고 했습니다. 예수가 바로 기다리던 “하나님이 보내신 자” 메시야 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서 당시의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을 보통 사람(랍비)과 달랐으며 이적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지자중의 한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하나님이 다시 보내신 엘리야 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이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베드로가 본문 막 8:29에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를 자신을 구원해 주실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 있고, 교회에 나와서 장사나 하려는 사람이 있고, 병든 몸이나 나아보려고 온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이 기름부어 보내신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이 있은 후에야 예수님은 본문 30절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30-31)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을 때 예수님은 당신의 앞일을 제자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비밀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지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실 때 하나님의 비밀의 능력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제자들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4:40-41에 “40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귀신을 내어쫓으실 때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 조용히 자신의 앞날을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들의 부르짖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당시의 예수님은 사역이 더 남아있는 상태여서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에게 당신의 사역에 방해를 일찍 받으시는 것을 피하시기 위해서 꾸중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외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1-10)고 베드로가 외쳤습니다.
이 한 말씀에 나면서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나 걷고 뛰고 찬송을 했습니다.
도대체 『예수그리스도 이름』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이름이었는지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그 인생이 송두리채 바뀌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무엇인데 이런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고 세상이 해결할 수 없던 일도 회복시키고 해결케 되는지 그저 감격할 뿐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두 가지로 말씀 드릴수가 있습니다.
① 내게 있는 것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름』뿐이란 말입니다.
② 네게 줄 것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뿐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게 있는 것도 예수그리스도 이름이요 네게 줄 것도 예수그리스도 이름이란 말씀입니다.
사람의 삶이란 먼저는 내가 가져야 합니다. 내가 있어야 합니다. 물질도, 건강도, 평안도, 기쁨도, 능력도, 은혜도 내가 먼저 있어야 줄 수 있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먼저 주앙교회 성도들이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내가 기쁨이 없는데 어떻게 복음을, 기쁜 소식을 전합니까?
왜! 사람이 감추려고 해도 얼굴에 너무 좋아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 있지 않습니까? 혼자서 너무 기쁜 나머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혼자 실컷 웃고 즐기고 싶은 것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죄인입니다. 정말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앞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양이나 염소를 하나님께 드렸을 뿐입니다. 이것 드렸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면해보자는 것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이방인인 우리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각자 영생을 얻는 방법을 터득한다고 산으로, 골방으로 가도 해결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무 기쁘기 때문에 복음은 전하지 않으려 해도 전해지는 것입니다. 기쁜 사람의 얼굴 감출 수 없는 것입니다.

초대 교부 크리소스톰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라는 로마 황제의 명령이 내려졌다. 그는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아 체포되었습니다.
 

집의 터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2. 집의 터이신 예수님) / 고전 3:10-15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0-15)

어려서 흙을 가지고 놀 때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께 새집 다오”하면서 손으로 흙을 덮고 놀던 기억이 있습니다. 원래 이 노래는 제의적인 집단요로 가락국 건국 신화에 나오는 삽입가요로서, 가락국은 두껍이(거북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였는데, 두껍이는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노래를 통해 가락국 김수로왕을 새 시대를 열어갈 주체로 소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노래를 다시 끝까지 하면 이렇습니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물길어 오너라 너희집 지어줄게
두껍아 두껍아 너희 집에 불났다 솔이랑 가지고 뚤래 뚤래 오너라“입니다.
이 노래와 두껍이의 이야기가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두꺼비가 알을 품으면 평소에는 피해 다니던 독사를 찾아가 독사에게 잡혀 먹히면서 독사 뱃속에 자신의 독의 뿜어 독사를 죽게 합니다. 알들은 죽은 엄마 두꺼비와 독사를 먹이로 건강하구 식식한 세끼두꺼비로 태어납니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에서 헌집은 엄마 두꺼비를 뜻하고 새집은 건강하게 태어나는 새끼 두꺼비를 뜻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실과 다릅니다. 두꺼비는 개구리와 같이 양서류 파충류에 속하는 것으로 알을 낳아 새끼를 만듭니다. 실제로 뱀에게 새끼를 만들려고 하면 아마 질식해서 죽을 겁니다. 그러나 두꺼비의 독은 사실입니다. 귀샘에서 분비되는 독액은 부포톡신이라 하며 부포탈린 등 여러 종류의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중국과 한국에서는 한약제로도 사용됩니다. 가락국 김수로왕을 세우고자 노래와 함께 이 이야기를 퍼트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거짓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내용에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두꺼비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두껍이가 죽어 새끼를 번식시킨다는 이야기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저는 어떤 때 이 노래가 우리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의 집은 헌집입니다. 세상에 속한 집은 버려질 집입니다. 고린도후서 5: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줄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집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집을 건축하고 계십니다. 이 땅의 집은 다 버리고 가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어야 할 집은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는 축복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한지 3개월만에 시내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나를 위하여 지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쩌다 한번 찾아오시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인데 아예 그들 가운데 집을 짓고 함께 사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집이 필요하겠습니까? 온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이 어떻게 20평밖에 안 되는 작은 천막에 거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집을 짓는 우리는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알고 보면 나를 위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나폴레옹 황제가 부관과 같이 두 사람이 어느 시골에 있는 조그마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이제 나폴레옹 황제는 변장을 하고 평민처럼 이렇게 또 부관은 친구처럼 둘이서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그날 저녁에 식사를 하는데 식사를 잘 시켜서 있는 대로 좋은 식사를 하고 식사 끝에 웨이터가 14프랑이라고 하는 많은 돈 계산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나폴레옹 황제가 “어 이 돈은 내가 내지” 그러면서 계산서를 받아들고 손을 주머니에 넣어 봤는데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돈주머니가 없어요. 그래 당황하니까 옆에 있는 부관이 “제가 내지요 뭐.” 그런데 그 사람도 주머니에 돈이 없어요. 두 사람 다 돈이 없어요. 그러니까 부관이 정중하게 말하기를 “대단히 죄송합니다 만은 지금 두 사람 다 지갑을 가져오지 못했는데 정확하게 한 시간 후에 돈을 갖다 드리겠습니다. 좀 이해해 주세요.” 그러니까 웨이터는 그런 대로 이해하는 거 같은데 그 호텔 주인이 나와 가지고 야단야단 하는 겁니다.
돈도 없는 사람들이 비싼 음식을 먹고 돌아다닌다고. 정신없는 놈들이라고 욕을 욕을 합니다. 오늘 당장 내라고. 그 부관이 하도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한 시간 후에 꼭 갖다 주겠습니다.” 그 웨이터가 가만히 보니까 믿음이 가요. “보자 하니 그렇게, 이 이렇게 거짓말할 분들은 아닌 거 같은데 이해하십시오”하다가 정 주인이 말을 안 들으니까 이 사람이 웨이터가 자기 돈을 냈어요. 14프랑을 내고 “먼저 가십시오.” 그래서 손님들을 보냈습니다. 한 시간 후에 부관이 다시 왔습니다.
돈을 내주고 주인보고 하는 말이 “이 여관 얼마면 살 수 있겠소?”, “이거 제가 얼마 전에 3만 프랑을 주고 샀는데요”, “좋아요, 여기 3만 프랑 있소. 이 집문서를 내 놓으시오” 그래 그 호텔을 사 가지고 그 자리에서 당장 웨이터에게 주었어요. “이제부터 이 집은 네 거다. 너는 나를 믿어주었다.”하고 집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터는 기초를 말합니다.
터는 문자 적으로 성이나 망대의 기초(딤후 2:19, 히 11:10, 계 21:19)를 말하는데 비유적으로는 교회 기초(롬 15:20)나 가르침의 기초(히 6:1, 딤전 6:19)를 말하는 것입니다.
집을 짓기 위해 제일 처음에 해야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집을 지을 터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 터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지을 집은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회사가 창립할 때 자본금이 얼마가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회사의 터는 자본금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회사는 자본금은 없고 어떤 기술을 가지고 시작된 회사도 있습니다. 이 회사의 터는 기술입니다. 그리고 어떤 회사는 경영마인드가 특이한 것으로 시작된 회사도 있습니다. 이것이 그 회사의 터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터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한국속담에도 “속담 터를 잡아야 집을 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뜻입니다. 집을 지으려면 먼저 터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터가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피흘린 값으로 사신 것입니다(행 20:28, 계5:9). 예수님은 자신이 교회의 머릿돌임을 주장하셨습니다(마 21:42). 바울은 에베소서 5:23과 골로새서 1:18에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 터는 어떤 홍수가 와도 엄몰하지 못하며 어떠한 것에도 무너지지 않은 견고한 터입니다.
북한에는 “목수가 많으면 집을 무너뜨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옳은 지도자가 있어야 함을 교훈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 주앙교회의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을 근본으로 하고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의 터는 예수님 입니다. 예수가 터가 되지 못한 교회는 이미 교회당은 될지 모르나 교회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건축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 10절에서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라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터를 닦아주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오는 세대를 위해서 주앙교회의 터를 닦아주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 우리 주앙교회가 창립한지 이제 1년이 되어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시간이 더가고 우리가 열심히 해서 교회가 성장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그때쯤이면 교회는 제가 지금 꿈꾸던 많은 일들을 추진할만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가 되면 저는 은퇴해야 될 나이가 될지 모릅니다. 조용히 물러나야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터를 닦아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울이 그랬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그가 1, 2, 3차 여행을 통해서 제일 성장시키고 복음이 들어간 지역이 고린도입니다. 목회자의 마음이라면 그 교회를 떠나지 않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성도들을 그토록 사랑하여 바울은 많은 편지를 교회에 고린도 교회에 보내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것이 고린도전후서의 성경입니다. 그곳에서는 잘 아시는 사랑 장(고전13장) 이라고 말하는 성경도 있습니다. 각종 은사에 대해서 소개한 12장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우들끼리는 송사하지 말라는 6장의 당부도 있었습니다. 8장 10장은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1장에는 여성도님들에게 당부하는 편지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8장에는 마게도냐 교회를 자랑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장에는 가난한 성도들의 헌금에 대한 문제도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은혜를 따라해야 합니다.
바울이 터를 닦은 방법은 한마디로 은혜를 따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한 것입니다. 저의 좌우명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없으면 못합니다. 힘듭니다. 짜증이 납니다. 피곤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있으면 힘이 납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자꾸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습니다. 독수리와 같이 올라가는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을 모두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용서해 주시고 들으세요.
저는 설교할 때 원고를 보지 않고 하는 것이 더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성경만 보면서 설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오후 예배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목사님 그렇게 하시지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주일 오전 예배에 원고를 써 가지고 설교하는지 아십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저는 이 설교 준비를 하면서 제가 먼저 은혜 받습니다. 그리고 왜 제가 원고를 보면서 설교하면 그냥 하는 것에 비해서 잘 못하는 것 같고 여러분이 은혜 못 받는 것 같이 느끼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제가 욕심이 많아서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부모님이 맛있는 것 있으면 자식에게 다 주고 싶지 않습니까? 이것도 먹어보라고 하고, 저것도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은 부모님의 그 심정을 배불러 죽겠다고, 비만 된다고 화만 내는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러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제가 먼저 말씀에 은혜를 받다보니까 왜 설교시간은 꼭 1시간 안에 마쳐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1시간이 지나면 그 때부터는 은혜가 떨어지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시험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젊은 목사가 주책이라고 할까봐 짧게 마쳐야 쿨한 목사가 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선교지 중국 같은데 가서 있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 훈련 잘된 것 하나 중에는 몇 시간을 해도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책상에 않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쁜 소식(복음) 듣고 오신 분답게 은혜가 충만한 기쁨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 중에 하나가 기쁨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기쁘게 사십시오. 이것이 은혜입니다.

건축은 좋은 자제를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 터가 좋다면 반드시 그 자제도 좋은 것으로 사용하여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만일 서울 한 복판, 제일 값이 많이 나가는 명동에 싸구려 자제를 사용하여 철판으로 공장을 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요즘 하는 말로 “명동 땅을 두 번 죽이는 겁니다” 그 비싼 땅에는 그곳에 알 맞는 좋은 자제를 사용하여 집을 지어야 합니다.
제가 싱가포르에 갔을 때들은 이야기입니다. 싱가포르는 땅이 아주 작은 섬입니다. 그것도 일본처럼 자꾸만 바다 물이 올라와 앝은 땅은 자꾸만 침몰되어 갑니다. 한마디로 땅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라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귀하고 비싼 땅에 건물을 함부로 지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부가 정한 법은 30층 이상의 건물만 허용하고 또 건축양식이나 디자인이 독특하여 지금까지 어디서 본적이 없는 특이한 건물만 허락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어야 할 터는 그럼 얼마나 소중한 터입니까? 예수님이 피로사신 값으로 따질 수 없이 귀한 터입니다. 이 귀한 터 위에 쓰레기 같은 집을 지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 귀한 터 위에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집을 짓는다 생각하십시오. 또 반드시 우리가 짓는 집은 제일 귀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앙교회는 그러한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3절에 불로 그 “공력”을 각각 불로 심판한다고 했습니다. 표준새번역에는 “공력”을 “작품”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지은 집은 불로 시험을 당합니다. “불”로 심판하기 때문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좋은 것으로, 풀이나 짚은 나쁜 것으로 비유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없어지지 아니할 귀한 것으로 지으라는 것입니다. 세상 학문이나 명예, 물질 등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지은 집은 불에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인 성막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5:9절에 보면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지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제일 귀중한 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이십니다.
그리고 그 터 위에 또 제일 소중한 집을 지어봅시다.
누가 따라할 수 없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달란트 대로 멋있게 지어봅시다.
이 집을 지을 생각에 잠이 안 옵니다.
가슴이 설래 입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아름다운 집은 처음이다. 너무 아름다워 이 집은 영구히 보존하리라”는 칭찬을 받으시는 주앙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