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천하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욥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후예배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 41:11)
욥기서의 사상의 깊이는 아무리 연구해도 미완으로 남을 정도로 심오합니다. 저도 이번에 다시 설교준비하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욥기서의 저자와 기록 연대 등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몇가지 사실로 추정하는 정도입니다. 첫째 욥의 생존 기간을 200여 년으로 봅니다. 성경에 기록된 족장들의 수명의 길이와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욥 또한 아브라함과 비슷한 시기의 족장시대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둘째 욥의 부귀정도가 가축의 수효로 제시되고 있는데(1:3) 이는 족장 시대의 관례와 같습니다. 셋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과 마찬가지로 욥 또한 자기 가문의 제사장적 역할을 담당했습니다(창 12:8, 35:1-6, 욥 1:5). 넷째 족장 시대의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솨다이’ 였는데 욥기서에도 이 호칭이 무려 31회 사용되었습니다(창 17:1, 28:3, 48:3). 다섯째 ‘케쉬타’(크시타)가 야곱 시대의 화폐 단위였다는 점(욥 42:12, 창 33:19), 마지막으로 한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출애굽사건에 대해서 언급이 없다는 점 등이 족장시대로 보는 것입니다. (더 보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에스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후예배

“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11:19-20)

에스겔의 명칭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 부시의 아들입니다.
B.C. 597년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여호야긴 왕과 그 모친과 왕비, 그리고 많은 포로를 붙잡아 갔을 때 에스겔도 그 중에 끼어 있었습니다(왕하 24:10-17). 바벨론으로 끌려간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 집을 짓고 가정 생활까지 하며 살았습니다(겔 3:24). 그런데 유대인 장로들이 종종 찾아와 상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겔 8:1). 에스겔은 여호야긴이 잡혀간지 5년째 되는 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더 보기…)

온 마음으로 주를 구하라(예레미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1-13)” (더 보기…)

도스토예프스키의 변화

도스토예프스키는 16세 때 자신의 아버지가 농노들로부터 살해되는 것을 보았다.그는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사형수들을 싣고 가는 열차가 간이역에 멈췄을 때 그는 어느 부인으로부터 작은 책 한 권을 받았다.그것은 신약성경이었다.

사형을 기다리면서 그는 감옥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작은 성경책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를 만났다.도스토예프스키는 “누가 내게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다’라고 증명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나는 진리보다도 차라리 예수와 함께 있고 싶다”는 신앙고백을 했다.그는 사형 직전 기적적으로 사면돼 고향으로 돌아온 후 세계 최대의 문학가가 되었다.성경은 인간을 변화시킨다.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영혼의 눈을 뜨게 될 때 기적은 일어난다.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요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요엘은 아달랴 6년에 걸친 왕위 찬탈 뒤에 여호야다에 의해 왕이 된 요아스 왕의 통치 초기에 사역하였습니다. 당시 어린 왕을 보필하던 제사장 여호야다는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는 새로운 언약을 세웠으며, 바알 신전을 파괴했습니다(대하 23:16). 요아스 왕은 이댤랴가 들여온 우상숭배를 척결하였으며 손상된 성전을 수리하였습니다(대하 24:7). 그리고 이 성전 수리를 위해 모금 운동을 벌였는데 큰 성공을 거두고 진정한 예배가 정착되도록 노력하던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외적 변화뿐만 아니라 진정한 회개와 예배가 드려지게 하기 위하여 요엘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더 보기…)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왕하-요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1)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을 독점하고 있으며 다른 민족들은 그 은총 밖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자기들은 자식의 도리를 하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이 다른 민족의 하나님이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요나도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더 보기…)

침노하여 천국을 소유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전쟁은 그것이 침노하는 것이든 침노를 당하는 것이든 전 국력을 다 동원한 투쟁입니다. 전 국력을 총 집결하지 않고는 전쟁에 이길 수 없습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천국을 침노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사력을 다하여 막고 있는 마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마귀는 하나님의 밭에 몰래 가리지를 뿌리고 간 사단입니다.
세례 요한 이후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천국을 전파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전해 주시고 간 말씀을 ‘천국복음’ 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천국을 소유하고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13세기 이탈리아의 유명한 탐험가였던 마르코 폴로는 그 당시 미지의 세계였던 중국으로 건너와서 17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 뒤 조국으로 돌아가서 유명한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가 임종하게 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찾아와서는 이렇게 다그쳤습니다. “자네는 그 책에서 도무지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만 잔뜩 기록해놓지 않았나? 이제라도 진실을 밝혀주면 좋겠네. 그 책의 모든 내용이 상상에 의해서 꾸며졌다는 사실을 말일세”.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닐세. 내가 책에 쓴 것은 모두 진실일세. 사실 나는 내가 보고 겪었던 것의 절반도 채 기록하지 못했다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 얼마나 되겠습니까? 천국은 상상으로 꾸며진 곳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 천국은 그냥 굴러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천국을 마귀의 손에서 빼앗아야 합니다. 빼앗기지 않으려는 마귀와 빼앗으려는 우리 사이에는 투쟁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강한 자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8-29).
강한 자 원수 마귀를 묶어 놓고야 천국을 우리 소유로 빼앗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천국을 빼앗아야만 합니까? 무엇 때문에 침노해 들어가서 빼앗지 아니하면 천국은 우리의 것이 되지 않는 것일까요?

죄를 부른 인간. 빼앗긴 낙원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낙원을 주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는 이 죄, 얼마나 흉악한 죄가 많습니까! 살인, 간음, 도둑질, 서로 속이고 자기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억울하게 됨은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온 세상은 죄악으로 범람하고 있습니다. 이 죄,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또 많은 질병들, 병원마다 가득 찬 환자들, 모든 질병과 그로 인한 고통과 슬픔과 절망,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짓지 않은 것이, 원하시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사랑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능력과 힘으로 천지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온 세계는 사랑과 화해와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가득 찬 영광의 세계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깊은 사랑과 대화와 교제가 있었습니다. 또한 아담과 하와간의 깊은 사랑은 부부간의 완전한 일체감을 이루었습니다. 그들간의 분쟁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아름다웠습니다. 추함이란 하나도 없었습니다. 먹는 것이 풍성했습니다. 무한한 평화와 기쁨과 사랑과 행복이 있었습니다. 죄와 죽음이란 그 단어조차 없었습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과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어떻게 하나님의 세상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종교입니까? 철학입니까? 제도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다 해 보았지만 그것을 통해서 해방과 자유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치셨습니다. 이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진정한 세상의 왕은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주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면 천국이 보입니다.
본문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왜 세례요한의 때부터입니까? 그는 구약의 제일 마지막 인물입니다. 동시에 신약시대의 최초인물이기도 합니다. 그가 처음으로 “회개하라” 외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을 전파하시고 그의 생애를 통해 천국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천국엔 죄가 없습니다. 마귀가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를 사하고 멸했습니다. 마귀를 내쫓고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천국엔 질병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질병을 고쳤습니다. 굶주린 자는 먹이셨습니다.
천국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슬픈 자에게는 기쁨을, 상처 입은 심령에는 위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곳마다 천국의 영광과 그 복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혼자 힘이 모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려고 해 보세요. 돕는 자가 생깁니다. 저는 영숙이를 돕고자 합니다. 얼마나 하려고 합니까? 저만 돕습니까?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도 돕고 예수님도 돕습니다. 여러분! 축구경기 보시지요. 아무리 잘해도 수비만 하는 팀은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탁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어만 하는 것으로이길 수 없습니다. 공격을 해야합니다. 사단이 우리를 공격하게 놔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사단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먼저 공격합니까?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빼앗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천국을 침노해서 빼앗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낙원을 마귀에게 빼앗겼으나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다 회복하셨다는 진리를 깨달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즉 천국은 합법적으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우리의 소유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5장 11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자기의 신분을 모르고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떠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강하게 자기 신분을 주장해야 됩니다. 우리는 거룩한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분은 선생도, 의사도, 회사원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요 나의 인생에 1%도 비중이 안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성도라는 것이 내 인생의 99%를 차지할 때 우리는 세상의 조건들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와 밀고 땡기며 싸웁니다. 그러나 전쟁은 이미 이겨놓은 전쟁인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고 마귀가 부인하고 협박할 때 겁을 내고 그만 움추려들어서 뒤로 물러가면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깨달아서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었는가를 알고 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육신의 세계에 살지 않고 영의 세계 속에서 삽니다. 하나님과 새로운 삶의 약속을 가진 사람이요 하나님이 눈동자 같이 지키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내 자녀들 건드리기만 해 보아라! 하고 벼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세상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 삽니까? 사단에게서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가 천국을 침노하는 방법은 기도의 돌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장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 3명하고 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계신 사이에 마을에서는 다른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하고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다 해보았지만 귀신은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셔서 기도 위에는 이 귀신이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목표를 가지고 질풍노도와 같이 하나님의 보좌를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공중권세 잡은 마귀의 진은 무너지고 천국은 우리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빼앗는다는 말의 의미를 확실히 알아야만 됩니다. 빼앗는다는 것은 “좀 살려주시오, 도와주시오” 라고 빌고 사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행을 바라는 것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빼앗는다는 것은 빼앗겼던 나의 것을 회복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힘을 다해 빼앗아 내야 합니다. 지면 빼앗지 못합니다. 이기고 빼앗기 위해서는 강하고 단호한 투지와 결의가 필요합니다. 진리를 입으로 강하게 주장하고 물러나지 않는 끈질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원문에 보면 마지막 부분에 두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는 “biastai;:비아스타이”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단어는 ‘난폭한 사람, 원기 왕성한 사람’을 말하는 비하스테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지난번에 대한민국 월드컵 예선전하는 것 보았는데 해설자가 그러더라 구요. 너무 한국축구 너무 얌전하게 한다는 거예요. 좀 거칠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쁘게 축구해서 뭐하냐는 거예요. 이쁘게 축구해서 지면 뭐합니까? 입을 악물고 죽자 사자 뛰어야 하는 것입니다. 퇴장만 안 당할 정도로 허용된 테클과 몸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압박을 해야 되요. 얌전한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공격은 이요 거칠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를 뭐 봐줍니까? 공격을 해야 됩니다. 기도의 공격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다른 단어는 “빼앗느니라, aJrpavzousin:하르파주신”입니다. 이 단어는 이요 할파조(aJrpavzw)에서 나왔습니다. 이 단어는 동사인데요 “잡다, 취하다, 잡아채다, 끌어당기다, 빼앗다, 꽉 움켜잡다”입니다. 한마디로요 한번 잡으면이요 놓지 않는 것입니다. 꽉 움켜잡는 것입니다. 천국은이요 이렇게 잡아야 해요.

셋째, 전신갑주를 입고 싸워야 합니다(엡 6:11-13).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여러분!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가면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가는 것입니다. 이 전신갑주란 다름 아닌 예수그리스도가 주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면 마귀는 도망갑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벗고가면 마귀가 다가옵니다.
그런데요 싸움은 방향을 잘 잡아야 합니다. 어디가 원수의 골문인지 알아야 합니다. 제일 바보 같은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자기 골대에 골을 넣는, 자살골 넣는 사람입니다. 마귀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살골 넣는 것입니다. 누구하고 싸우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싸움은 마귀하고 해야 되는 것이지 사람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하고 싸울 때요, 쉽게 나약하게 뒤로 물러서면 안돼요. 억센 투지를 가지고 강하게 담대하게 싸우고 주장하며 입술로 시인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 천국은 여러분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 이후로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하신 주의 말씀대로 여러분 모두는 영적으로 단호한 결의를 가지고 천국을 침노해서 소유하는 자기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이 주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111. 믿음이 주제입니다.) / 본문 :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저의 어머니는 학교 교육을 전혀 받아보지 못하신 분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 집에 오셔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가셨습니다만 예수를 믿기 전에는 보통의 한국 여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분에게 놀라운 기억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당에게 가서 들은 이야기는 하나도 안 잊어버리고 전부 기억하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무당의 이야기를 전하는 어머님이나 듣는 저의 아버지의 모습은 진지함 그 자체입니다. 점술가가 점괘를 말할 때 허튼 짓하고 한 눈을 파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집중을 해서 무슨 말일까 하고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지만 무당을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무당이 하는 말을 듣는 그 이상의 진지한 예배태도가 아니면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도 아주 진지합니다. 어떻게 하면 굿을 잘할까? 그 굿을 하기 위한 각종 절차, 준비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듣고 준비를 합니다. 또 부적을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는지 모릅니다. 성경보다 훨씬 더 부적을 더 잘 간수하는 것 같습니다. 그 부적은 간수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끄집어내어 쓰다듬으면서 위로 받고 만지면서 위로 받습니다. 잘 때는 배게 밑에 넣고 잡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보다 그 사람들이 더 마음을 쏟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을 보고 신앙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미신을 좇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신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미신은 학문적으로 정의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이나 재주나 돈으로 신의 마음을 달래고 얼러서 자기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는 변하지 않고 신을 달래고 얼러서 내게 좋도록 하는 게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미신이 좋아서 섬기는 게 아닙니다. 귀신이 좋아서 섬기는 게 아닙니다. 귀신을 달래서 내게 좋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런 미신적인 믿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국인의 무속적 믿음에서 벗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때가 찼습니다.

물은 차면 넘치게 마련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 4:4)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이후 구원의 계획을 마련하고 계셨습니다. 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가 마치기 전에 야곱을 통해서 예언하십니다. 창 49:8-10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10 홀이 유다를 떠나를 아니하며…”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의 조상을 삼으시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십니다. 그리고 십계명과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이제 길은 보여진 것입니다.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6-7),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신 27:10)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 이후에 더욱 타락의 길로 빠집니다. 하나님은 여러 제사장들과 사사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사사들이 먼저 죄에 빠지는 참담한 모습을 보게됩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다윗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초대왕인 사울의 손을 피해 10년을 도피생활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유다지역에서 먼저 왕이 되어 7년 6개월을 지내다가 이스라엘과 통일되어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11장에서 밧세바를 범합니다. 그리고 그의 남편 우리아도 죽입니다. 간통죄에 살인죄까지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급기야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삼하 12). 다윗은 회개했지만 이 죄의 대가로 그의 아들들의 죽음과 반역이 일어나서 모두 죽고 솔로몬만 살아남았습니다.
왕위는 솔로몬에게 넘어갔고 솔로몬은 1천 번제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지혜를 구하여 그 어느 왕국보다 더 강력한 나라를 세웁니다. 그러나 그는 1000명의 이방 여인들 때문에 우상숭배로 죄에 빠집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남왕국(유다)과 북왕국(이스라엘)으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죄로 10지파를 이스라엘로(왕상 11:31, 35) 한 지파만을 유다로 남겨두십니다. 그 이유는 다윗의 등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왕상 11:36). 그리고 이후 이스라엘의 12왕과 20명의 유다왕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들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루는 왕은 없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다윗을 표준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왕상 11:4, 33, 15:3, 왕하 14:3)라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오랫동안 품으셨던 속내를 드러내십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보내실 메시야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사 42:1-3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이로서 오랜 바램이었던 유다지파의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마 1:1).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이 오셔서 믿음이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당시 기존의 제사 입장을 뒤집는 일대 개혁이었다고 지난주 말씀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시대 하나님을 믿는 방법은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제사는 제물이 있어야 했는데 가난한 자들은 비둘기조차도 살 수 없어 제사를 드리기 곤란해 졌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런 제물이 필요 없는 세례를 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세례(침례:벱티스트)보다 더 강력한 세례를 주실 분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세례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베푸시는 것인데 아무나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단 한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믿음이 강조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구약 시대는 자신들이 제물을 바쳐서 제사를 드리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직접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우리는 구약과 같은 방법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히 7:18)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 10:9)
하나님께 가는 방법이 구약은 제사였다면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지역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마 8:5-13). 로마 군인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뛰어나왔습니다. 순간 아마 제자들은 적지아니 놀랐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루살렘에서는 서기관과 율법사들을 통해서 감시하고 있는데 이제 로마군까지? 군장과 계급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로 로마군인으로 수하 100명을 거느리고 있는 백부장 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고쳐달라고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가서 고쳐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자신의 수하도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데 직접 가시는 것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와는 비교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이 예수께 나아왔는데 이 여인은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기던 마리아입니다. 병이 들어 있는 오빠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사랑하고 있었으며 당연히 가셔서 고쳐주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현재 있는 곳 요한이 처음 세례 주던 곳인 요단강 저편(요 10:40)에서 이틀이나 더 계셨습니다. 아마도 강을 건너 유대(베다니)로 가시면 다시 이곳에 오시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곳의 병자들과 하실 일들을 정리하시는데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입장에서는 답답합니다. 길도 먼데 시간은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는 나사로는 이미 죽은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32)라고 했습니다.

이에 비해서 백부장은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기이히 여겨”의 원문 qaumavzw(다우마조)는 ‘놀라다, 감탄하다, 이상히 여기다’로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에 깜짝 놀라셨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마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서 쫓겨나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하신 것으로 보아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이나 헬라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미안하며 예수님께 수고를 끼쳐 드리는 것도 죄송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한 사건이 있습니다.
마 15:21-27절에 소개됩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일입니다. 두로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건축자제를 나르던 곳입니다(삼하 5:11, 왕상 5:7). 시돈은 여기서 북쭉으로 40Km위치에 있는 두 곳 모두 유명한 항구도시입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마 15:22)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막 7:26에서 ‘수로보니게’(Syrian Phoenicia)라고 하여 이 여인의 혈통이 시리아에 거주하는 페니키아인 이었음을 말합니다. 당시 여자가 자기 딸이 미쳤다고 말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은 창피해서 숨겨놓고 지내는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인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시끄러워서 제자들이 듣다못해 예수님께 와서 말합니다.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그리고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마 15:24) 여자는 오자마자 예수께 넙죽절을 하며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는데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7-28)
이 여자도 이방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큰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을 들었습니다. 원문에는 ‘여자야’ 앞에 ‘오(!’W)’라는 호격의 감탄사가 있습니다. 그냥 ‘여자’라고 부른 것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놀라움과 감탄이 그대로 표현된 것입니다.

부모의 따뜻한 사랑만 받으며 자라나는 자녀는 부모님의 고마움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다고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결손 가정이라고 말하는 가정의 아이들이 더 잘 자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의 고마움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유대인이라도 무조건 구원받을 자로 여긴 것이 아니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했습니다.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 언급하는 로마서 12장에서 제일 먼저 주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겸손한 생각을 품으라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도 첫 부분은 교리편이고 다음 부분이 윤리편인데, 거기서도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라는 것입니다.

존 플레처(John Fletcher)란 사람은 그의 제자가 묻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도 응답으로 꼭 한가지만 주신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였는데 당신은 어찌하렵니까 하니 “겸손을 구하지.” 한가지 더 주시다면? “또 겸손이지.” 한가지를 더 주신다면? “또 겸손을 구할 것이라”고 하였다.
믿음은 겸손으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최대의 적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제가 설교할 때 우리집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저희 집사람이 뭐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많이 하냐고 그럽니다. 그런데 성경의 저자들은 그보다 더한 것도 솔직히 말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이 당연히 될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사람입니다.

당연히 예수 믿어야 될 집안에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목사가 될 자가 목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구원받아야 할 자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께 고개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비유와 회개의 요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82. 비유(20) – 비유와 회개의 요구) / 본문 : 마 5:24-26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우리나라의 고려 공미왕 때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우애 깊은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형제가 길을 가던 중 동생이 황금덩이를 줍게 되었습니다. 아우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다 가지고 싶은 욕심이 솟는 것을 누르고 형과 반씩 나누어 갖기로 하였습니다. 이윽고 강가에 이루러 나룻배를 타고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배가 중간지점정도 왔을 때 동생이 갑자기 금덩이를 형 앞에 내어놓더니 “형님, 제가 이 금덩이를 발견하기 전 까지는 형님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에 조금의 흠도 없었는데 이 황금을 발견하고 나누어 가질 생각을 했을 때 욕심이 생기고 형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전 이 금덩이를 저 강물에 던져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형님이 아우의 손을 잡으며 “그래, 네 말이 뫘구나”하면서 둘이서 힘껏 금덩이를 강물 한가운데로 던져버렸답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서로 화목해지고자 할 때, 장애가 되는 것은 서슴없이 제거해야 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화목이 가능해 집니다.

오늘로서 비유에 대해서 설교한 것이 20번째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비유가운데서 어떤 점을 발견하셨습니까? 저는 예수님의 비유를 설교하면서 전체적으로 비유의 주제가 드러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울러 종말의 때가 가까이 왔다고, 또는 종말이 반드시 오는데 그 때를 위해서 준비하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세기말 팔레스틴 신학자 엘리에치르라는 랍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기 전 하루동안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선생님 어떻게 사람이 자기의 죽는 날을 알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랍비 엘리에치르는 “내일 죽을 수도 있으니 할 수 있는 한 오늘 많이 회개하라. 이렇게 하면 일생 내내 회개 속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전도서 9:8에서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선의 삶입니다.

때가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바로 그러한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하라는 것입니다. “송사하는 자와 함께 있을 때 급히 사화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재판관에게 내어주면 그 때부터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비유의 내용 설정은 매우 급하게 돌아갑니다. 재판관에게 내어줄 사람은 기다릴 이유가 없습니다. 속히 내어주려고 할 것입니다. 사건을 해결하지 않으면 곧 고발당하게 됩니다. 반드시 해결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경찰서에 가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사건이 일어나면 일단 당사자와 화해를 신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안돼서 경찰서까지 가면 어떻게 하든 경찰서에서 해결을 해야합니다. 민사상 고발 사건은 당사자와 해결을 원만히 해결하면 고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일단 검찰로 넘어가면 문제가 복잡해지고 시간이 오래가게 됩니다. 검찰에서 법원으로 가면 더 골치아파집니다. 법원으로 가면 일단 제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검찰에서 법원으로 넘어가기 전에 해결을 해야 불기소처분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오늘날과 같이 복잡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단계를 거쳤습니다. 25절 “…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예수님이 왜 범죄자의 장면으로 이야기 하셨습니까? 다급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사건을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길에 있을 때에”는 법정에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이 마지막 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회개
26절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빚을 다 갚기 전에는 결코 형벌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원문은 이것을 “진실로 … 못하리라” 부정과거 가정법과 함께 ‘우메’(ouj mh;)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마태가 예수님의 이 비유를 ‘형제의 화목’과 연결시킴으로 윤리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원래 예수님의 이 비유의 목적은 단순한 윤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형제와 화목 하는 문제를 가지고도 절대적인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정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단순히 형제와 화목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화목을 그렇게 강조한 것은 형제 화목이 그러할 진데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바로 이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와 화목은 하나인 것입니다. 회개 없이 화목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은 우리의 원죄를 끊는 일보다는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와도 화목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화목하지 않은 자의 예물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제사의 종류(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로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번제(레 1:3-17)는 일상의 신앙고백과 경배의 제사이며 소제(레 2:1-16)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순종의 제사입니다. 그리고 화목제(레 3:1, 7:12)는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제사이며 속죄제(레 4:1, 13)는 무의식적인 범죄와 부정함과 허물을 사하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레 5:1-4)는 하나님과 이웃을 적대 관계에 놓이게 한 죄를 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제사의 종류를 자세히 보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속건제를 드리지 않은 사람이 속죄제를 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을 방해하였다면 먼저 이 제사를 지내야 그 다음에 자신의 속죄제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로 인한 다른 사람의 피해는 그대로 놓아둔 채 내 죄만 속하겠다는 것은 이기적인 생각 아닙니까? 지금 예수님의 말씀도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속건제가 드려지지 안으면 속죄제를 지낼 수 없고, 속죄제가 드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화목제를 드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속해지지 않았는데 어찌 화목제를 지낼 수 있습니까? 화목제가 드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소제 역시 드릴 수 없습니다. 소제를 드릴 수 없다면 일종의 신앙고백 격인 번제는 더욱더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제사의 시작은 속건제라는 이야기입니다. 속건제가 안되면 아무제사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속건제가 시작되면 거슬러 올라가 번제까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태가 이 비유를 이렇게 적용한 것은 단순히 윤리에 초점을 두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입장하고 유대인은 다른 것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선택받았다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깊이 박혀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하나님께 가기 위한 ‘화목’ 즉 우리가 강조하는 것이 이미 가지고 있는 상태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런 유대인에게 지금 번제보다는 속건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로만 끝날 수 있습니다. 단순히 형제와 화목만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인 상태에서 머물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제사가 제일 중요하다고요? 제사가 다 중요하지만 그 시작에 있는 속건제가 중요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첫 단추가 뀌어져야 다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제사의 방법이 네 가지(화제, 요제, 거제, 전체)가 있습니다.
화제는 흠 없는 수소, 암소, 숫양, 암양, 숫염소, 암염소, 산비둘기, 집비둘기, 고운 곡식 가루, 기름, 유향 등의 모든 제물(레 1:3, 10,14; 2:1,2; 3:1,6,12; 4:23,28)
요제는 화목 제물의 가슴, 첫 곡식 단(레 23:15), 첫 이삭의 떡(레 23:20)
거제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 타작 마당의 곡식, 십일조, 포도주, 기름(레 7:32; 민 15:20) 등
전제는 포도주, 독주(레 23:13; 민 28:7)로 드립니다.

그런데 속건제를 드리는 제사의 방법은 두 가지로만 드릴 수 있습니다(레 6:17-18, 14:12, 14).
화제와 요제입니다. 화제와 요제의 특징은 제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화제는 흠 없는 소나 양 등이 필요합니다. 요제 또한 화목 제물의 가슴을 식단에서 높이 들어 앞뒤로 흔들어 들이는 제사입니다. 이것은 속건제 제사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화제는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을 상징합니다(요 1:29,36; 고후 5:21).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요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제물로 바쳐짐을 의미합니다(골 1:22; 히 9:24,25).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우리에게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 피가 있어야 됩니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도 형제와 용서하고 화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가 없으면 그 화목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와 화목하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으로 잘 지내보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걸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반드시 화목하게 하는 제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 제사의 시작은 속건제이며 그 속건제는 화제와 요제로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가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곧 회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회개치 않은 사람이 형제와 진정한 화목을 이룰 것 같습니까? 불가능합니다. 형제와 화목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져야 가능합니다. 속건제가 드려져야 화목제사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눅 5:24)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오직 우리 죄를 속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을 통해서만 우리의 온전한 회개, 속건제, 속죄제, 화목제의 제사가 가능한 것입니다. 회개와 화목은 하나인 것입니다. 같이 가는 것입니다.

페루의 쉬피보 인디언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쉬피보어로 “사하심”이라는 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보지 않고 넘겨 버린다.”라는 말이 제시되었습니다. 이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있어 거부되었다. 다음에는 “생각지 아니한다.”라는 말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기피한다는 뜻이 있어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말이 제시되었는데, 그 말은 “빚을 탕감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하심은 탕감을 넘어 베푸시기까지 하는 것이라 역시 문제가 있었습니다. 결국 “문질러 없앤다.”, 또는 “지워버린다.”는 말이 제시되었습니다. 이 말은 죄의 존재를 인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식적으로 죄를 씻어 주셔서 더 이상은 죄가 없다는 의미로 “사하심”과 어느 정도 합당하다고 하여 채택되었습니다. 멕시코의 싼 뿔라스 인디언의 성경도 “사하심”을 “약한 마음을 지워버리는 것”으로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하시려는 것은 죄와 함께 죄의식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어떤 미국인이 프랑스를 방문해서 돌아다니다가 시골의 어떤 장터에서 싸구려 목걸이를 하나 사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왔는데, 세관에서 높은 세금을 매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아주 싸구려 물건입니다” 했더니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고가의 고급 품목입니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고가의 세금을 물고 왔습니다. 이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서 그 목걸이를 가지고 보석 감정 전문가에게 그 목걸이를 보였습니다. 감정가는 확대경을 가지고 한참 목걸이를 관찰하더니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손님, 이건 보통 목걸이가 아닙니다. 손님도 좀 보시지요.” 그래서 가만히 확대경을 통해 들여다보니 거기에 글자가 이렇게 새겨져 있더랍니다. “조세핀에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한 세기를 지배하던 나폴레옹의 사인 때문에 그 목걸이가 그렇게 고가품으로 인정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인과 하나님의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놀라운 기술과 계획, 하나님의 인치심 속에서 만들어진 인생으로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인생입니까!

언제나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나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께 가는 모든 방해요소를 지워버리십니다. 주님의 사인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시는 주앙교회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이 말한 것이 다 참이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60. 요한이 말한 것이 다 참이라) / 본문 : 요 10:40-42

“40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예수님이 설교하신 것 중에 중요한 것만 뽑아 말할 때 7대 강화라고 합니다. 이중에 요한복음 10장은 마지막에 설교하신 것입니다. 이 설교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10장 1절 “아멘, 아멘”으로 시작하신 예수님의 언어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아멘은 예수님의 언어적인 도장입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목자와 양의 비유, 선한 목자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선한 목자란 양을 위해 목숨을 주고 거짓 목자는 양을 늑탈하고 헤친다고 하셨습니다.

몹시 추운 겨울날 어린 소녀가 발을 동동 구르며 유리창 너머로 가게 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푸른 목걸이 참 예쁘네요. 이것 싸주세요.”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그러니?”
“우리 언니요. 저는 엄마가 없어서 언니가 저를 키워 주셨어요. 언니에게 줄 선물을 찾고 있는데 이 목걸이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언니도 좋아할 거예요.”
“돈이 얼마나 있니?”
“제 저금통을 털었어요. 여기요. 이것이 전부예요.”
소녀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모두 쏟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목걸이의 가격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돈이었습니다. 소녀는 목걸이 가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슬그머니 소녀 몰래 정가표를 떼고는 예쁘게 포장해서 주었습니다.
“집에 갈 때 잊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젊은 여인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서 푸른 목걸이를 내어놓으며 말했습니다.
“이 목걸이 이곳에서 파신 물건이 맞나요? 진짜 보석인가요?”
“예 저희가게 물건이 맞습니다. 그리고 아주 좋은 것은 아니지만 진짜 보석입니다.”
“누구에게 파셨는지 기억하시나요?”
“물론입니다. 예쁜 소녀였지요.”
“그 아이에게는 이런 보석을 살 돈이 없었을 텐데요.”
그러나 가게 주인은 젊은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 소녀는 누구도 지불할 없는 아주 큰돈을 냈습니다. 자기가 가진 전부를 냈거든요.”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잊지 않은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놓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더 큰 것으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하시자 유대인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19). 그 중에 많은 사람은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생각했습니다(20).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합니다(31).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40절에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는 피신해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이제 그 결실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또 요한이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지금 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된 것인지는 마태복음 3:5-9에 보면 나옵니다.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불편한 장소로 오세요.
당시 유대광야는 모이기에 편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루살렘, 온 유대, 요단강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병고치는 은사집회를 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귀신을 쫓는 능력을 보여준 것도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흔히 했던 축복성회를 한 것도 아닙니다. 아니면 성경공부나 강해 설교를 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외친 소리는 논리성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단순하면서도 정직하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토해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전한 말씀은 자력 있는 쇠붙이처럼 무섭게 사람들의 영혼을 끌어당겼습니다. 아모스가 예언한 것처럼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말라기, 스가랴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영적인 기갈 상태와 더불어 정치적, 경제적 갈등을 겪고있었습니다. 지금 장소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사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예수님의 예언대로 A.D 70년이 되어서 성전이 다 무너졌습니다. 남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껍데기를 남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남겨놓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마 3:6)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더러운 것이 얼마나 묻었는지 보려면 거울에 비쳐보아야 합니다. 또 밝은 빛에 비쳐보면 됩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죄를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빛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비추이니까 자신들의 죄가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다 드러나게 됩니다. 로마서 6:23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들어가지 않으면 죄를 모릅니다. 마치 빛이 없어 더러운 것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이 남들 앞에서 죄라고 고백하는 것은 극히 가벼운 것들입니다. 내놓아도 별로 부끄럽지 않은 것만 죄라고 인정할 뿐입니다. 진짜 깊은 죄들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끄집어 내지 못하고 본인 자신도 무서워서 꺼내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지없이 우리의 죄를 노출시킵니다. 그리고 이 죄는 깊은 뉘우침과 아울러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고백과 더불어 지난날의 죄에 메여있던 죄를 눈물 콧물 흘리면서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게 합니다.
진정한 영적 부흥은 죄의 고백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속에 깊이 박혀있는 죄가 빠져 나오지 않고는 아무리 은혜 받고 싶어도 은혜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어도 만나지지 않습니다. 죄가 노출되면 씻을 수 있습니다. 이 죄는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이 자연적으로 물러가듯이 하나님을 말씀을 받는 순간 물러갑니다.

가라지가 섞여있습니다.
세례요한에게 나온 사람들 중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온 사람도 있지만 이중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세 그룹의 종교집단이 있었습니다. 엣세네파, 바리새파, 사두개인입니다.
엣세네파는 결혼하지 않고 은둔과 경건주의 삶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자를 두었고, 사해 근방에 모여 집단 생활을 하면서 주로 성경을 필사하는 사본 작업을 했습니다. 이 그룹은 예수님때 제일 예수님과 충돌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은둔과 성경필사에만 매달린 결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과는 달리 자주 예수님과 충돌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바리세파와 사두개파입니다. 바리새파는 엣세네파와 달리 도시에 살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누구보다도 잘 지키기 위해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분리주의자’입니다. 이들의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육체의 부활도 천사의 존재도 믿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교리적으로는 완벽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형식과 교만에 빠져있었습니다.
또 한 그룹은 사두개파입니다. 이들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에서 그 이름을 땄습니다. 이들은 제사장 그룹이면서 공회원 그룹으로 종교적, 정치적으로 최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적인 입장은 바리새파와 아주 다른 입장을 보였습니다. 모세 오경만 믿고 천사도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타락한 집단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사람들 틈에 끼어 세례요한에게 나왔습니다. 이들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 세례요한의 인기가 높고 이 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인지 구경나온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이런 식으로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또 장사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솔직히 표현한다면 “나도 하나님을 믿으니까 가봐야지! 이것들이 모여서 뭐하나?”생각하고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잘 다녀야 합니다. 나도 성경을 믿으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교회는 다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교회에 왜 다녀야 되는지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모일 필요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경은 가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세례요한은 강한 어조로 이들을 질책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합니다. 예수님 외에 이렇게 외친 사람은 세례요한뿐입니다. 경력한 메시지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타락한 이유가 있다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교회에서 활개를 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순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에 있는 유머입니다.
1등급 = 암소집사….교회의 짐을 다 짊어지고 가며,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람
2등급 = 양 집사….목사님이 이끌면 이끄는 대로 순종하는 사람
3등급 = 막대기집사….자기 할 일은 다 알아서 하지만, 넘치는 충성은 하지 않는 사람
4등급 = 비행기집사….띄워주고 칭찬하면 좋아하지만, 아니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
5등급 = 미꾸라지집사….요리조리 잘도 핑계 대며 빠지는 사람
6등급 = 개구리집사….아무 데나 퐁당퐁당 끼여들고 간섭하구, 구설수를 만드는 사람
7등급 = 염소집사….질투하는 자 잡아당기며 갈라놓고 흩어놓고, 높은 곳에만 올라가려는 사람
8등급 = 서서잡사….술도 잡수고, 담배도 잡수는 사람
여러분은 몇 등급?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여러분! 사람이 본질이 변해야 합니다. 아무리 화장을 바꾸고, 옷을 바꿔 입어도 안됩니다. 본질이 변하지 않는 한 언제든지 그 본성 나올 수 있습니다.
요한의 이 강력한 메시지를 듣고 난 후에 사람들은 누가복음 3장 10절 이하에 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어떻게 하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이 때 세례요한이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 3:11) 이 말을 듣고 있다가 당시 유명한 세리들이 또 질문합니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요한이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눅 3:13)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억압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랬더니 군인들이 또 묻습니다. 군인들에게는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눅 3:14)고 했습니다. “강포하지 말라”는 힘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억지로 빼앗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말씀입니까? 사도 바울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행 26:20)고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세례요한이나 바울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목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까지가 할 일입니다. 더 할 수도 없으며 더 한다고 말해도 큰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한계는 분명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사도바울이 위대하다는 것은 자신들이 한 일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세례요한은 매우 훌륭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똑 같지는 않을 수 있지만 비슷한말을 다른 성인들도 했습니다. 타종교에도 사람의 근본과 윤리에 대해서 한 말이 있습니다.

41절 …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위대한 것입니다. 예수께 대해서 세례요한이 무슨 말을 했습니까?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바로 이 장면 때만에 세례요한이 위대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께 사람을 인도하면 그것이 최선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르치고 교육시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종적인 선은 예수께 사람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쫓겨 세례요한이 처음 세례 주던 곳으로 피신 오셨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오래 전에 세례요한에 의해서 뿌려졌던 복음이 있었습니다. 예수에 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동내에서 예수님이 지금 하신 어떤 설교나 능력 행하심이 없습니다. 본문 42절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는 바로 마 3:11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내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만이 나에게 성령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영국 더블린의 홀튼씨 부부에게 샴 쌍둥이(Siamese twins, 몸은 하나에 머리는 둘, 팔은 넷, 다리는 둘, 내장은 모두 각기 가지고 있으나 간과 골반은 하나인 기형아), ‘아일리쉬’와 ‘캐티’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1992년, 그들이 세 살 반되었을 때, 분리 수술하다가 캐티는 사망하고 아일리쉬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소아과 전문의사들과 여러 전문의사들이 1년 동안 연구 조사한 결과 분리 수술하여 둘 다 살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술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수술 후 혼자만 살아남은 왼쪽의 ‘아일리쉬’는 옆에 늘 함께 얼굴을 맞대고 있었던 ‘캐티’가 보이지 않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하셨습니다. 우리 옆에 늘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눈만 뜨면 아일리쉬 옆에는 캐티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제일 큰 충격이 있다면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항상 내 옆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머리요 나는 몸입니다. 주님이 생각하시면 우리는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네가 샴 쌍둥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