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 위에 계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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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23. 만물 위에 계신 예수님) / 본문 :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오늘날 천문학자들은 각 은하마다 1,000억 개가 넘는 무수한 별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太陽系) 은하수(銀河水) 성운(星雲)중에서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이렇게 크고 기묘한 우주와 무수한 별들이 신비롭게도 질서정연하게 조화를 유지하며 운행된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수소(水素) 가스와 헬륨 가스(He gas)를 발생시키는 “빅뱅(Big Bang)”으로 폭발하여 오늘날 현재의 우주로 진화했다는 가정은 마치 보석가게가 폭발하여 정확한 시간을 맞춰 주는 고급 시계를 만들어 냈다는 우스운 신화와 같은 것입니다.
생명이 우연히 생겨났고 발전했다는 것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천문학자, 물리학자의 90%이상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과학이 발전하게 되면 될 수록 천지와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재 과학자인 뉴턴과 아인슈타인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인체의 신비, 자연의 신비, 우주의 신비를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거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과학자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10가지 이유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1. 지구의 돌아가는 속도의 정상화입니다. 즉 지구는 시간당 1,600km로 돌고 있습니다. 이 지구가 만약에 한 시간당
160km로 돈다면 사람들은 낮에는 타 죽고 밤에는 얼어죽을 것입니다.
2. 지구와 태양이 떨어진 거리가 신비스럽게도 아주 알밪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지구가 23.5도(度)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4계절이 나타납니다. 만약에 지구가 수평이라면 하루에 두 번 물에 잠기게
되어 대양(大洋) 증발(蒸發) 수증기(水蒸氣)로 남북은 어름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4. 지구와 달이 80,000km의 알맞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는 하루에 두 번씩 물에 잠기는 일이 없습니다.
5. 지구의 두께가 3m만 더 두꺼웠다면 산소(酸素)가 없어 모든 동식물은 살 수 없습니다.
6. 대기권의 두께가 지금보다 얇았더라면 지구는 별똥들에 의해서 날마다 불바다가 된다고 합니다.
7. 연어의 경로입니다. 연어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바다에서 태어나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강물로 올라갑니다.
8. 장어의 행로입니다. 장어가 바닷가에서 알을 낳고 죽으면 새끼들은 다시 호수나 강으로 돌아옵니다.
9. 호주의 선인장이 빠른 속도로 번식되는 것을 억제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선인장만 갉아먹고 사는 곤충이 있기 때문입니다.
10. 사람은 폐를 가지고 있으며 곤충은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이 성장을 억제시킵니다. 만약 곤충이 폐를
가지고 있었다면 사람만큼 성장할텐데 다행스럽게 곤충은 더 성장할 수 없는 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자연의 사실은, 어떤 영적 사실의 상징이다.”(R.W. Emerson)라고 했습니다.
아마 과학자들을 모아놓고 이런 신비스런 아직까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말하라고 한다면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이런 설교 계속하면 남자들은 계속 재미있어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자 분들은 따분해 하십니다. 벌써 졸려고 하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뇌수술을 받으러 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술에 성공해서 생존할 확률이라고 해야 고작 10퍼센트. 황량한 마음을 가눌 길 없이 차에 오르며,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차가 서서히 움직여 대문을 나섰을 때였습니다. 그때 거리 양쪽 모든 집의 현관문이 일제히 열리고 동네사람들이 나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이웃사람들이 그의 수술 성공과 건강을 기원하며 모두 함께 격려해주자고 약속한 일이었습니다. 절망했던 환자는 ‘나는 사랑 받고 있어.’ 하는 생각에 가슴 가득 새로운 희망과 용기가 솟아올랐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이런 두 가지 상황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주적으로 준비하신 축복이요 하나는 나 자신을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18)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이분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기를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라고 하시며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9)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창조와 신비

첫 번째 창조가 우주적 창조였다면 두 번째 창조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사 65:18)
사람이 아무리 돈을 벌어도 만일 그것을 함께 누릴 사람이 없다면 그 가진 것이 무의미 한 것입니다. 선물은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선물을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 돌을 맞이한 준혁이와 하민이에게 선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본문 “위로부터”(a[nwqen:아노덴)는 위로부터란 뜻도 있지만 동시에 “처음부터, 새로, 다시”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의 자손(유대인)을 지켜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명백히 기록할지니라”(신 27:8) 왜 그렇게 하나님이 율법을 강조하시고 기록하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지켜야 살고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6) 이렇게 언약하시고 이 백성이 축복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신 28:2)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으며 그들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은 떠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에게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삼상 16:14)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한때 다윗을 통해서 나라가 반석 위에 서는 듯 했으나 그의 아들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분열국가가 됩니다. 하나님은 남 유다(B.C 931~586:19대 왕조:345년)와 북 이스라엘(B.C 931~721:20대 왕조:210년)로 나누시고 혹시나 하시는 마음에서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대를 떠난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하’에는 이스라엘의 제일 악한 왕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나옵니다. 아하시야는 제위기간이 2년을 지냅니다. 그런데 자기 집 난간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신하들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파리의 신)에게 자기 병을 나을 것인지를 물어보라고 보냅니다. 도중에 엘리야가 나타나 “너는 누운 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왕하 1:3하반절)고 하십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다니시면서 목사에게 물어보지 않고 점보는 집에 가서 물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하나님께 오세요.
이사야 30: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 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많은 재산과 축복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묻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비는 모습니다. 하나님은 오라고 하시는데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바알세붑에게, 이집트에게 빌붙어서 살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상 더 이상 치졸하게 돈을 바라고 세상의 권위를 세우려고 하나님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결코 하나님은 치욕스럽게 만들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로 포로 70년을 지내게 되고 이후에 하나님은 여러 예언자를 보내시고 구약시대를 마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침묵이 이어집니다. 구약의 마지막성경 말라기가 기록되고 세례요한이 나타나기까지 약 400년이 흐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하신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하신 말씀처럼 “위로부터”(a[nwqen:아노덴)는 다시, 새롭게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

본문 위로부터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 “오시는”(ejrcovmeno”:에르코멘스)는 어근 “e[rcomai:에르코마이”입니다. 이 단어는 나타나다 이전에 “동반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데 절대 혼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인 하나님의 영과 같이 오시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30)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요 10:38) 예수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셨다는 사실은 이 땅의 사람과 다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죄인의 모습이 아닌, 능력이 없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시는 분을 말합니다.

만물 위에 계심

본문에서는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 위에 계시나니” 두 번 만물 위에 계심을 강조합니다. 누가복음 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 3:35)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고전 15:27, 계 1:18)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운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주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선물의 내용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성폭행 당한 여성에게 성폭행을 우발하는 행동을 했다고 하여 태형 90대가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90대가 200대가 되고 징역 6개월이 늘어났습니다. 이유는 언론을 통해 공론화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담당했던 변호사는 면허를 박탈당하고 법정 출석을 금지시켰습니다. 이것이 이슬람의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만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여자와 노인과 약자의 편입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불볕더위가 한창인 어느 여름날, 주인과 하인이 길을 가다가 상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상자를 열어 보니 금이 가득한 것이 아닌가! 뜻밖의 횡재를 한 주인은 신이 나서 하인에게 당장 그 상자를 가져다 자기 집의 창고에 넣어 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상자를 짊어지고 가야 할 하인에게 뜨거운 여름날에 상자의 무게는 어떻겠습니까? 정말 죽을 맛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반대의 상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상자를 발견한 주인이 하인에게 ‘자네의 집으로 가져가 살림에 보태 쓰게’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하인에게 그 상자는 무겁겠습니까? 실제 무게는 여전하겠지만, 하인의 어깨에 눌리는 무게 감은 가벼운 새털 같을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지는가? 신나고 가볍게 느껴지는가?’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 금 상자를 짊어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에 따라 행하는 모든 행동이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고 확신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지고 신앙생활이 달라지며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하는 말은 부모 자신을 위해서만 결코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당신을 위해서만 우리보고 존재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명령들은 곧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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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122. 하나님께 영광을) / 본문 : 눅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미국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에 오래 전에 이민가신 권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네 아들을 하나같이 미국에서 사회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훌륭하게 키워 교회와 이웃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권사님은 29살에 남편을 여의셨습니다. 당시 남편은 숨을 거두면서 권사님을 불렀습니다.”여보, 그동안 고생이 많았소. 미안하지만 이제 한 가지만 약속해 주오. 우리 네 아들을 꼭 책임지고 키워주오” 권사님은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약속할게요”라고 했습니다. 미국에 있는 전도사님이 그러는데 요즘은 LA 길거리에서 한국인 거지를 가끔 본답니다. “그분들도 한 때는 꿈을 안고 미국을 왔을 텐데…” 하면서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답니다. 미국 땅에 아들 넷을 남겨놓고 떠나는 남편의 약속에 대답은 했지만 외국에서 사는 것이 그렇게 녹녹한 것은 아닙니다. 권사님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믿음밖에 없었습니다. 이 믿음밖에 없는 젊은 과부는 갖은 고생을 하며 어린 네 아들을 키웠습니다. 공부를 특별나게 더 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밥상에 먹을 것이 있을 때는 “주님,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했고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자식들을 앉혀놓고 “주님, 오늘은 금식하게 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라고 하면서 아들 넷을 키웠습니다. 양식이 있건 없건 감사를 드리면서 아들을 키운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이 이들을 돌봐 주시지 않겠습니까?
“고려 사람은 바위 올려놔도 살아난다”는 러시아에서 고려인에 대한 대표적인 속담입니다. 초기정착, 독립운동지원, 강제이주, 구 소련의 해체 후 다시 시작되는 방랑의 길, 험난했던 고려인 이주 140년을 잡초처럼 다시 일어났습니다. 대한민국이 좀 강해져야 합니다. 경제적인 부만 쌓여간다고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감사입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고 했습니다.
시 50:23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좋게 되면 행복이고 나쁘게 되면 불행이라고 하는 단순한 논리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며(롬8:28), 부해도 가난해도 자족할 줄 아는(빌4:11)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한 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어떤 한 촌에 들어 가셨습니다. 거기서 문둥병자 열 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가운데는 사마리아 사람도 한 사람 끼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감정이 좋지 않아서 서로 접촉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문둥병 환자들은 다같이 불행한 병에 걸려있기 때문에 불행한 가운데 서로 동정하면서 한 집안이 되어서 여기저기 쫓겨다니며 유대 사람이나 사마리아이나 사람 할 것 없이 같이 지냈던 모양입니다. 문둥병자가 되었으니 따질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유대인이면 뭐하고 사마리인이면 뭐합니까?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 문둥병은 죽음과 같은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죽은목숨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병은 전염성이 있어서 이 병에 걸리면 격리시켰습니다.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병에 걸린 사람들끼리 모여 지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가족을 만날 수도 없으며, 친구를 가질 수가 없었고 단순히 같은 병에 걸린 것 때문에 함께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이 사람들이 있는 곳 가까이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사람들은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직접 뵙게 되니 너무 감격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하여 절실하게 소리 질렀습니다. 문둥병이 심하면 소리지르는 것도 어렵다고 합니다. 죽을힘을 다해 외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 명의 문둥병 환자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레 13:1-14)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문둥병환자들은 서로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저희는 예수님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무런 느낌도 변화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병에서 깨끗해져라”고 하시면 온몸이 불덩어리 같이 뜨거워지든지, 감당할 수 없는 경련을 일으키든지,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짜릿하든지, 어떤 체험이 있기를 기대했는데 그런 체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 사람들은 기대하는 바와는 달랐지만 실망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릅니다.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다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많은 문제와 요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는 하는데 응답 받지 못하는 일이 많아 실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다음 단계를 위하여 충분한 힘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마세요. 주님은 그 다음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저 오늘 내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 환자는 함께 고통을 받았습니다. 함께 울었습니다. 함께 한숨쉬었습니다. 함께 절망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말씀 듣고, 함께 순종했더니, 함께 병이 나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기쁨이 충만하여 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의 몸이 깨끗이 나은 것을 보이고 다 나았다는 증명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일반 사회 사람들과 같이 지낼 수 있었고 그립던 가족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 뛰며 세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닫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감사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물으십니다. 창세기 3:9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시던 말씀과 똑 같은 뜻으로, 사람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이탈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들은 당연히 예수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할 아담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아홉 사람은 왜 주님께 감사 드리지 못했습니까?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성의 일면입니다. 이 사람들처럼 우리도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간구 합니다. 그 후에 우리가 그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에서 건짐 받고 나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영국의 트렌치 목사는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에 대해서 주석을 써 내려가다가 자기가 믿는 바로는 “모든 은혜 가운데 감사할 줄 아는 은혜는 제일 드문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동양에 내려오는 말 중에도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라고 한 것이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만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적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도 그 아홉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다윗도 스스로 자기 영혼을 깨우면서 하는 말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여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라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이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이 은혜를 잊어 버렸는데 이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전부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비교해 보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유대인이요, 또 은혜를 깨달아 알 만한 사람이 어떤 면으로 보든지 유대인이 아닙니까?
이 유대인들은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여러 선지자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매 안식일이면 회당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 아홉은 전부가 은혜를 잊어 버렸습니다.

은혜는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은혜가 너무 크면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작은 은혜는 기억하지만 큰 은혜일수록 오히려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열심히 간절히 하는 사람도 은혜를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의 결과로 은혜를 받았는데도 그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믿음 있는 사람도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 것인가?, 불평하면서 살 것인가? 우리가 결정해야 됩니다. 불평은 불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을 낳게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축복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를 잘 하느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얼굴을 보면 압니다.
우리는 당연히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근이지요, 당근은 속어로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아기오이가 엄마오이에게 묻습니다. “엄마 나 오이 맞아?” 하니까 엄마 오이가 웃으면서 “당근이지” 그랬습니다. 이 말은 당연하지 하는 말인데, 아기오이가 오해를 하여 “어머나 나는 오이가 아니고 당근이구나” 하고 가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거기에 인생의 행복이 있고 거기에 만족이 있습니다. 거기에 감사가 있습니다. 순종이 없는 곳에는 절대로 행복도 만족도 감사도 없습니다.
비싼 개와 싼 개의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비싼 개는 주인의 말을 잘 알아듣습니다. 비싼 개는요, 아무리 굶어도요 아무나 던져주는 고깃덩어리를 먹지는 않습니다. 주인이 ‘먹어’ 해야 먹습니다. 그러나 똥개는 아무거나 먹습니다. 주인이 말하든지 말든지 제 맘대로 합니다. 개도 그렇지만 말도 그렇다고 합니다. 중동에 가면은 말을 많이 타는데, 비싼 말은 수십 억 원도 넘는다고 합니다. 비싼 말과 싼 말의 차이도 같습니다 비싼 말은 수십 킬로를 달려와도 주인이 ‘물먹어’ 해야 먹는다는 것입니다. 싼 말은 막 먹는 것이지요, 고깃덩어리 값밖에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짜리 인생입니까? 인생의 값은 하나님에게 얼마나 순종하는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 안에 행복이 있고 만족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한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1. 감사는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14절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레 13:1-14)고 하신 것 외에는 없습니다. 즉 돌아와서 나에게 감사하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감사는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으로 되는 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의 속성은 스스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하는 것이 강제로 됩니까? 스스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 없으면 못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2. 감사는 표현을 해야 합니다.
첫째, 15절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라고 했습니다. “큰 소리로” 했다는 것은 공개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숨어서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불치의 병을 고쳐 주셨는데 말못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이들은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했습니다. 고쳐달라고 할 때는 문둥병이 들려있는 상태에서도 소리를 지르고 고침을 받은 후에는 침묵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화장실 갈 때 마음하고 나올 때 마음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16절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eujcaristw’n:유카리스테오, 깊은 환희와 기쁨속에서 나오는 감사)하니”라고 했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한 고드란트 생활비 전부를 연보궤에 넣은 것(막 12:42-43)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마라아인인 이 사람이 문둥병자로서 병고침을 얻었지만 주님께 드릴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는 죄송하여 예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례였습니다.

3. 감사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아는 것으로 말하면 유대인이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은혜란 자신을 돌이켜 보고 그 축복들이 어디서 왔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없되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4. 감사는 믿음이었고 구원입니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사마리아인이 이 사람은 주님 앞에 나와 절하고 감사의 표현을 한 것 밖에 없습니다. 문둥병을 고침 받은 것만 해도 기쁜 일인데 유대인에게만 있을 줄 알았던 구원을 받게된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욥이 고백한 것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삶이 예술(藝術)이라면…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1. 삶이 예술(藝術)이라면…) / 본문 : 요 17:17-19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11월 11일입니다.
빼빼로데이는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등과 함께 상업적 마케팅으로 만들어진 날입니다. 농림부에서는 이런 국적 없는 기념일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쌀 소비 촉진을 위해 ‘가래떡데이’로 하자고 합니다.
세계 교회는 해마다 11월 둘째 주일을 ‘박해받는 교회를 위한 세계 기도의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올해는 11월 11일인 바로 오늘입니다. 세계의 수백만의 기독교인과 수천 곳의 교회에서 일제히 박해 아래서 신음하는 형제자매를 기억하며 기도하는 날입니다. 빼빼로데이는 알면서 박해받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라는 것을 모르는 우리가 안타깝습니다.

가장 심한 박해를 받는 곳은 이슬람권과 공산권일 것입니다.
압둘(가명)은 중동의 어느 나라에 사는 기독교인입니다. 그 역시 이슬람을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열성 이슬람 신자였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가 이슬람에서 배운 것은 증오였다. 알라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 특히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증오하라고 늘 배웠다. 그러나 내가 얼마 전 만난 두 가정은 나에게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나는 일찍이 이슬람 사회에서 이웃과 사람을 그토록 사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후 나는 그들이 기독교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기독교인으로 만들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성경책 한 권을 주기는 했다. 나는 그들이 믿는 예수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가 신의 아들이며, 평화와 기쁨을 주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분이 주는 평화와 기쁨은 사람이 일찍이 맛보지 못한 평화이며 기쁨이라고 말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예수께로 달려갔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했다.”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예술로 바뀌는 것입니다. 원망과 증오에서 용서와 사랑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예술(藝術)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술이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요? 예술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예술은 경험과 상상력을 통해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인간의 활동, 작품을 말합니다. 순수 예술과 교양 예술로 나뉘고, 어떤 사물이 우수하거나 아름답게 생겼을 때도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예술이라는 말은 아름답고 높은 경지에 이른 숙련된 기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어머니 음식 솜씨는 예술이야”, “오늘 설교 제목 예술이야!”, “당신의 말은 예술이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시인’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몇 일 전에 우리 집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닮을 쌓을 때 큰돌을 쌓는데 큰돌로만은 닮을 쌓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큰 돌 틈으로 작은 돌을 넣어야 큰돌이 중심을 잡고 닮을 잘 쌓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이 예술 아닙니까?

예술 중에 행위 예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체를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신체예술,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과정예술로 불리기도 합니다. 한 때는 해프닝, 이벤트 등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퍼포먼스라는 용어로 통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 포퍼먼스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이사야입니다. 하나님은 멸망을 당하게 될 애굽과 구스 백성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2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사 20:2-3) 이사야의 벗은 몸과 발을 미리 보여 주심으로 애굽과 구스의 멸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 마치시지 않았습니다. 우주 최대의 포퍼먼스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을 통해서 영원히 남을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삶을 “예술”이라는 단어보다는 “거룩”이라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술이 여러 가지 기술을 가지고 인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인간의 제일 아름다움을 “거룩”이라는 것으로 표현하고 계신 것입니다. “거룩”(aJgiavzw:하기아조)은 성별(consecration)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분리된 삶을 말합니다. 세상 죄와 분리된 사람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하기아조는 선지자들을 불러 세상과 구별하여 세울 때 사용했습니다(렘 1:5).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울 때에 거룩하게 하여 제사장 직분을 맡겼습니다(출 28:41).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입니다.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죄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아름다움은 추한 것으로 변화됩니다. 진정한 예술이란 하나님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말씀 진리”(17절)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절)라고 했는데 “진리”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뒤에 나오는 진리는 헬라어 본문에서는 관사 없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앞의 진리와 구별하기 위함인데요 즉 앞에 나온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뒤에 나오는 것은 “참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자신의 삶을 가리킨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시고 그 말씀을 이루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려주신 것은 세상의 그 어떤 학문적 이론이나 기술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물려주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거룩입니다.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9절) 또한 이 거룩함을 전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또 아버지가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제자들을 세상에 보냈었다고 하십니다.

거룩한 삶은 마땅히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거룩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는 모든 것이 인스탄트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하나의 위기를 극복하고 나면 곧바로 거룩의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은 순간 순간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보다 주님을 세상에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거룩은 사람들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 성도들에게는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도들이 거룩하지 않으면 범죄 하는 신자처럼 이는 주님의 이름에 불명예와 부끄러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한 값, 그리고 우리에게 부여하신 은혜가 거룩한 삶을 위한 우리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은 발전되어 가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성령님은 한 단계씩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예수를 영접한 뒤 얼마 동안 한 산으로 기도를 많이 갔었습니다. 기도원에는 나보다 서너 살 위인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거기 있었는데 산기도 초보자들의 인도자였습니다. 그는 대단히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목이 쉬었는데 사람들 이발도 해주고 기도도 도와주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돌아왔다가 몇 달 후 다시 가보면 여전히 그는 거기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여기 있을 것인가? 나가서 일할 생각은 없는가?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다음에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40일 금식을 세 번이나 했습니다. 기도원장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게 쓰실려고 그렇게 기도만 시키시는지…”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가 목회를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신앙 인들은 어느 정도 기도를 하고 어느 정도 세상의 일을 해야 하는가? 그저 기도만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필요한 때 일을 주시는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역을 위해서 준비해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앉아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삶이 예술이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일은 기도와 더불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언제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인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광야에서 홀로 떨어져 지냈습니다. 요한의 모든 것은 단 하나의 목적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의복도, 음식도, 행동도, 요구도. 그의 삶은 그의 말과 일치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한 유대인 부부가 첫 아이에게 지어 줄 이름을 가지고 의견을 달랐습니다. 그들은 결국 랍비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남편은 시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기 원하지만, 저는 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 주고 싶습니다.” “당신 아버지의 이름이 뭡니까?” “요셉입니다.” 랍비는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요셉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부인이 다시 말을 꺼냈습니다. “시아버지는 말 도둑이었고, 제 친정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내 아들이 시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아니면 친정 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랍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를 그냥 요셉이라고 부르세요. 그러고 나서 그 아이가 말 도둑이 되는지, 정직한 사람이 되는지 지켜보세요. 그러면 어느 쪽 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것과, 우리의 삶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삶이란 어느 일 부분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침례교인이 침례 받으러 물 속에 들어가다가 깜짝 놀라며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 내더랍니다.
목사님이 묻기를 ‘그것이 무엇이오?’
성도 ‘돈지갑입니다.’
목사 ‘돈지갑을 넣은 채로 침례 받으십시오. 바로 그 돈지갑이 침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이 예술이라면 걸작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이 걸작이 바로 거룩한 삶 아니겠습니까?
레위기 19장 2절에 보면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거룩한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기를 복종시키는 거룩한 습관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앤드류 모레이는 모든 크리스천은 ‘순종학교’에서 순종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5:8-9절에서 예수님은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 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도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이루려고 하기보다도 내 뜻을 추구하고 이루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기도 들어주지 않으면 교회 안 나올래요! 하나님께 엄포를 놓고 공갈을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이란 한 마디로 자기를 항상 부인하는 자기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쳐 복종시키는 삶인 것입니다(고전 9:27).

2차 대전 때 한 병사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병원에 입원해서 큰 수술을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사선생은 그를 위로하려고 애썼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곧 회복될 것입니다. 한 쪽 팔을 잃었다고 절망하지 마세요’ 하고 위로했습니다. 그때 그 병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오히려 의사선생을 향해 ‘선생님! 그것이 아닙니다. 저는 팔을 잃은 것이 아니라 바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 병사의 눈은 슬픔에 잠긴 것이 아니라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실 없어진 한 팔에 대해 잃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바쳤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삶의 차이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것’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삶은 한번만 무대에 올려집니다. 다시 할 수 없습니다.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인도를 받아 이 거룩한 대열에 합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합심하여 구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0. 합심하여 구하라) / 본문 : 마 18:19-20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성경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요 한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롬 8:5).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신을 위해서 일합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을 위해서 일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돈일 것입니다. 돈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의 사람에게 주어지면 영을 위하여 사용할 것입니다.
‘돈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남에게 주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돈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사랑은 주고 나면 더 많이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돈과 사랑의 차이입니다.’(템플턴) 사랑하며 세상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피조물 가운데 사람처럼 다양성을 가진 존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생긴 모습도 다 다르고 신체구조도 다 다릅니다. 지문도 다르고, 목소리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얼굴 모습도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한 하나님께 창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취미도 가지각색입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취미 생활이나 여가 생활을 즐긴다 해도 그 도가 지나치면 영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늘 유념해야 합니다.

바둑에 심취한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토요일 하루종일 새벽 1시까지 바둑을 두었습니다. 주일 예배 기도순서를 맡았기 때문에 졸리는 눈을 비비며 강단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바둑알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합니다. 까만 머리는 까만 알, 흰머리는 흰 알, 의자는 바둑판의 까만 줄로 보이는 것입니다.
장로님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이러면 안되지!”라며 허벅지를 꼬집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자 바둑 용어가 뛰쳐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겨우 기도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를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잘 마치는가 싶었는데 그만 아멘을 해야 하는데 대신 “아다리”했다는 겁니다.

성경에는 영혼이 건강하다는 말과 기운이 쇠한다는 말이 나옵니다(욥 33:4, 요삼 1:2). 우리의 영혼이 건강할 때도 있고 쇠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강건할 때는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힘이 있어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이 쇠하면 간단하고 쉬운 일에도 두려움이 앞서게 됩니다. 일하는 것이 겁이 납니다. 이럴 때는 내 영혼에 새로운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고 했습니다. 육신이나 영혼이나 쉼이 필요합니다. 휴식을 통하여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쉬기만 한다고 힘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어야 하는 것처럼, 육체적 회복을 위하여 양식이 필요한 것처럼 영혼을 위해서도 새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무엇으로 우리가 날로 새롭게 될 수 있겠습니까?

말씀과 기도 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은 기도 중에서도 합심기도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교제하는 방법이요 새로운 능력을 받는 비결인데, 우리는 흔히 기도라고 할 때 개인기도만을 생각하기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앞에서 육신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기도 또한 육신에 속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심 기도는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합심기도는 나 자신만을 위한 기도라기 보다는 공동의 관심사를 위한 기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 교회주의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만 잘 믿으면 되지 왜 모여 가지고 부담을 가지냐는 것입니다. 모이지 않는다면 합심하여 기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한다고 할 때 공동의 관심사를 가지고 기도하지만 개인의 일도 얼마든지 합심기도의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베드로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옥문을 열렸고 자유롭게 됨을 알았습니다. 바울도 이러한 함심 기도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여러 서신에서 각처에 흩어진 성도들을 향하여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후 1:11)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살기 좋아지면서 기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약 먹지말고, 병원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못살 때는 약 사먹고 병원가지 어려우니까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모든 일을 기도로 하려고 하는 마음이 식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작은 일에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 배아프면 약 사러가기 전에, 병원 가지전에 배에 손을 얹고 기도주세요.

제가 알게된 한 집사님이 계신데 이분은 서울 강남의 모 교회에 다니십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7년여 동안 전도하여 50-70명을 그 교회에 인도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이 시험에 들어 저에게 상담을 했습니다. 올 초에 교회에서 결정하기를 집사님은 이제 그만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손 떼세요? 그랬다는 겁니다. 알고 보니 필리핀에서 현지 목사를 데려오고 국내 책임자로는 모 신학교 여 교수님을 임명해서 이제 외국인 노동자는 그분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겁니다. 이 집사님은 하도 기가 막혀서 눈물을 흘리며 저에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집사님 말씀으로는 자신은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밀려났다는 겁니다. 다른 여러 말로 그래도 교회를 떠나지 말고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니 꾸준히 봉사하라고 일러 드렸습니다.
그런데 몇 일전 전화를 했더니 간난아이 울음소리가 나더라구요. 어찌된 것이냐고 하니까 필리핀 여성이 아이를 낳는데 돌봐줄 사람도 없고 병원에서는 150만원이면 된다고 해서 갔는데 350만원이 나왔답니다. 누구한테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어 집사님이 생각나서 연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원가서 아이를 데려와 돌봐주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병원비는 보험이 있다고 생각하고 150만원 정도 불렀는데 보험이 없어 350만원이 나왔답니다. 이런 일을 기도하며 해결하고 다니셨는데 교회에서 이 일을 알아 가지고 집사님을 불러서 손떼시라고 했는데 왜 자꾸 관여 하냐고 해서 참다못해 한 말씀하셨답니다. 여러분! 훌륭한 시스템과 최상의 학력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일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합심”이란 말의 헬라어는 “쉼프호네오”(sumfwnevw)라는 단어입니다. 이 뜻은 “조화되다. 규정하다, 일치하다, 합심하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쉽프호노스”(suvmfwno”)로 “함께 소리내는, 일치된, 조화된” 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쉽프호노스”는 “쉰”(suvn)이라는 “교재, 함께, 도움, 동참”이라는 단어와 “프호네”(fwnh)는 “말, 목소리”를 말하는 단어가 합성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케스트라의 ‘심포니’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말이 오늘 본문의 “합심” 바로 헬라어 ‘쉽프호네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어 보세요. 서로 다른 악기들이 모여서, 서로 다른 소리를 내지만, 그 조화가 기가 막힙니다. 큰 악기, 작은 악기가 서로 하나가 되어서 훌륭한 음악을 연주해 내는 것입니다. 마치 오케스트라에 동원된 악기의 종류들이 다 다르지만, 훌륭한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들 각자가 서로 다르지만, “쉼프호네오”의 합심기도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마음이 맞으면 삶은 도토리 한 알만으로도 허기를 면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물며 주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얼마나 진실하시겠습니까.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교회의 역할 중에 교제가 있습니다. 이 교제 역시 단순히 사람 사귀어서 인맥을 만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제의 역할은 바로 기도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로서 하나되지 못한다면 교재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합심기도는 바로 서로를 엮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1970년 4월 아폴로 13호가 발사됐는데, 그만 예상치 못한 고장이 났습니다. 우주선에 탄 우주 조종사들이 살아 돌아올 확률이 당시로서 0.001% 정도 밖에 안됐다고 합니다. 이런 뉴스가 나가게 되니까 미국인 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이때 당시 대통령이던 닉슨이 텔레비전을 통해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전 국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들의 무사귀환을 위해서 여러분 모두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는 그 날을 기도의 날로 선포하고, 관공서마다 국기를 반기로 게양하고, 모든 교회는 종을 울리고 국민들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국민이 하나로 엮어진 것입니다.
무사귀환의 확률 0.001%의 희박한 상황이었지만, 3일 후에 그들은 기적처럼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은 너무너무 기뻐서 국민들에게, “이번 주에는 모두가 하나님께 나가 감사의 예배를 드리자”고 말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우주 기지의 과학자들은 우주선이 발사한 후에는, 항상 합심 기도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조금만 뭘 하려고만 하면 돼지 머리에다 절하는 게 관례처럼 되어 있는데,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예전에 모 항공사에서 비행기를 사다놓고 돼지머리 상 차려 가지고 절을 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던 외국인들이 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한국에 아직도 이렇게 미개한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까?”라고 했답니다.

이 나라에 우상이 사라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PC통신이 처음 생기고 얼마 안되었을 때입니다. 국가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한 통신사가 초기화면에 ‘오늘의 운세’라는 메뉴를 만든 것입니다. 제가 그래서 “‘오늘의 기도’는 초기 화면에 올려주지 않으면서 ‘오늘의 운세’를 올리다니 이것이 한국의 정보화입니까? 실망했습니다.” 그랬더니 지운다고 하더니 몇 일 사라지더니 다시 슬그머니 올리더라구요.

올해는 특히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되었던 대부흥운동(1907.1.2)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한국최초의 목사 7인이 안수 받은지(1907.9.17)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북한을 위해서도 합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6.25사변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떤 미군 소대장이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괜찮다면 지금 정찰하러 나가지 않겠나?” 그 병사는 지금은 나갈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소대장은 그 병사가 겁이 많은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녁 6시쯤 되어서 그 병사가 다가오더니 “소대장님, 지금 정찰하러 나가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의아해진 소대장은 아끼는 나가지 않겠다고 하고 지금은 나가겠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병사가 대답하기를 “소대장님, 바로 이 시간이 어머님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시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지원하는 형제, 자매들로 인해 위기 속에서도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빌리 그래함 목사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그 위대한 사역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저에게 그런 비밀은 없습니다. 있다면 일만 오천 명의 성도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성도들의 승리는 자기의 능력이나 지혜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기도해준 사람들로 인한 것이 많습니다. 특히 목회자의 승리는 교회 성도들의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합된 기도의 지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9절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합심의 최소 단위는 두 사람입니다. 사람만 많이 모였다고 합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20절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 후에 마가의 다락방에 열 제자가 문을 단단히 잠그고 모였을 때에 홀연히 그들 가운데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제자들이 함께 있을 때에도 나타나셨으며 500여명이 성도들이 모인 곳에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냥 사람 많은 길거리나 시장에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있는 곳에 나타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 제자들에게 성도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처음 성령이 내렸던 것도 마가의 집 다락방에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 합심하여 기도할 때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합심하여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실 줄 믿습니다.

개혁의 완성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9. 개혁의 완성) / 본문 : 계 21:4-7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그 날에는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이 의사 선생님들입니다. 아픈 사람이 없으니 의사 선생님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의사 선생님들, 아무래도 직업을 빨리 다른 것으로 알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글쎄 모르겠습니다. 건축은 어떻게 될지. 아마 주님이 우리의 집을 짓고 계신다고(요 14:2) 했으니 건축하시는 분도 다시 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병이 따라다닙니다. 그 만큼 병을 앓았는데도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질병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중세기 재앙으로 불렸던 페스트까지도 존재합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호흡하던 공기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질병과 사망을 가져다주는 수많은 유해한 박테리아로 공기는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개혁이 완성되는 날에는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과거와 다른 세상이 열립니다. 일단 오염된 땅과 하늘이 바뀝니다. 새것으로요.
한 어린이의 어머니인 여성도가 죽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와서 “울지 마! 네 엄마는 하늘로 갔어!”라고 말하면서 어린 아이를 달랬습니다. 이튿날 장사를 지냈습니다. 어머니의 관은 무덤을 들어갔습니다. 이것을 본 아이는 “여기가 하늘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는 파 놓은 무덤을 보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까지 눈물이 있습니다. 죽음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변함 없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본문 6절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입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복음의 절대성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의 시작은 마틴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갈라디아서 속에 있는 복음 진리를 깨닫게 되면서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엄청난 진리를 깨달으면서 그 진리가 루터를 사로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명력이 폭발할 때 그가 수도원을 뛰쳐나올 수가 있었고 그의 인격이 변화될 때 그 감화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성원하고 협력하고 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갈 1:7-8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절대적 성격을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 절대화, 진리의 절대화, 복음의 절대화,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요새 많은 사람들은 이 현대의 큰 병인 상대주의에 빠져 가지고 말이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이래 생각하고는 근데 요것이 조금 더 좋은 거 같기도 하고, 이러면서 허우적거리고 표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전한 복음, 너희가 받은 복음, 이 복음 진리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 누구라도,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이 절대적 신앙, 이 절대적 확신, 이것이 그 마음속에 솟아오를 때 개혁의 용기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상대적 진리가 아니라 절대적 진리입니다. 누구 눈치나 보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개혁에 용기를 내세요.

존 칼빈 이라고 하는 종교개혁자가 있습니다. 루터 다음으로 이어서 종교개혁을 완성하게 되는 훌륭한 개혁자인데요. 그분이 쓴 불후의 명작 기독교 강해(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라는 책이 있습니다. 굉장히 크고 방대한 책인데 기독교 교리를 잘 정리해 놓은 책입니다. 이 책을 볼 때마다 감탄사가 나옵니다. 어떻게 이런 방대한 책을 쓸 수 있을까! 이 책은 우리 개신교 교리의 바탕이요 근본입니다. 한마디로 교과서 같은 책입니다. 어떻게 500년 전에 이런 책을 썼을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책을 칼 빈이 27살 때 쓴 책이라는 겁니다. 27살에 이런 진리를 깨닫는 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런 대단한 복음적 교리를 완성한 존 칼빈이 프랑스에서 종교개혁을 하려고 하니까 너무 핍박이 많아요.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역시 학자가 조금 약한 데가 있어요. 이 대 학자가 독일 스트라우스버그라고 하는 곳에 가서 조용하게 글이나 쓰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내야겠다 생각을 하고 도피 행각을 합니다. 그러던 중에 제네바에 머물렀습니다. 제네바에 갔을 때에 거기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있는 파렐이라고 하는 분이 이 칼빈을 딱 만나더니 우리를 도와주세요, 여기서 종교개혁을 이룹시다, 하고 붙드는 겁니다. 칼빈은 “아니요. 나는 조용하게 책이나 쓰면서 살렵니다.” 그럽니다. 영 설득이 안됩니다. 말로, 교리로 칼빈을 당하겠습니까? 그러나 파렐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도저히 설득이 안 되는 칼빈을 향해서 마지막 파렐이 직격탄을 날립니다.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셨는데 만일에 당신이 우리의 요청을 듣지 않고 저 시골로 가 버린다면 당신은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랬습니다.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은 칼빈은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셨다. 나를 제네바로 보내셨다. 이 날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제네바 종교개혁을 완성하게 됩니다.
여러분! 내가 하고 있는 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거기에 얼마만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까?
마틴 루터는 스투트가르트라고 하는 곳에서 그가 재판정에 서게 됩니다. 거기 한 번 방문하게 되면은 루터가 섰던 자리에 표시를 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곳에 가게되면 꼭 한번 그 자리에 서 보려고 합니다. 그가 거기서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Oh, God! Here I stand I have no choice (하나님 나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선택이 없습니다.)” 그렇게 담담하게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자의 용기입니다.

루터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면서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대문에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이 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찰스 5세가 제국회의를 소집하고 루터를 소환했습니다. 루터는 그 자리에 가야합니다. 가면 돌아오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때 가면서 한 말이 너무 유명해서 이 말이 오래오래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 보름스 회의의 기왓장처럼, 집의 기왓장처럼 마귀가 많더라도 나는 가리라.” 그리고 모든 친구들의 권유와 만류를 뿌리치고 갑니다. 그 용기, 그게 어디서 온 것이겠습니까? 복음의 용기요 진리의 용기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는 확실한 용기입니다. 본문 7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는 말씀을 믿고 간 것입니다.

내가 개혁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정치인들은 개혁을 부르짖습니다. 새롭게 대통령이 되는 분마다 개혁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개혁을 외치는데 개혁되는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개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개혁에서 자신은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개혁을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가만있고 다른 사람 뜯어 고쳐서 사회 개혁을 완성시켜 보겠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암을 죽이는 죽지 않는 세포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암으로 죽지 않고 사는 길이 열리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죽지 않는 세포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암세포였습니다. 죽지 않는 세포 그것이 암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사회 개혁을 한 집단이 바로 공산당입니다. 자신이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개혁하겠다고 하는 것이 공산당입니다.

고리키라는 사람은 세계를 뒤흔든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누구나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다고만 역설되는 나라 러시아에서, 아니 이 세상 전체에서 레닌만큼 심각하고 강하게 불행과 슬픔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저주한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고통은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물리쳐야 하고 또 물리칠 수 있는 악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특히 위대한 인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고리키가 평가한대로 레닌은 그가 주도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러시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었습니까? 사회주의 혁명으로 공산주의가 지배했던 지난 80여 년의 구 소련은 엄청난 죽음과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한 고통은 오늘날 러시아에게까지도 말할 수 없는 혼란과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결과 발트 3국의 하나였던 에스토니아에서 시작된 레닌 동상 제거작업은 소련 각 국으로 퍼져 나가 이제 그의 동상은 형체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에스토니아를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이 나라 사람은 지난 70여 년 간 끔찍한 공산주의에 편입되어 지배를 받으며 살았는데요 제가 갔을 때는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유로운 나라에서 그렇게 살기 원했는데 마치 바벨론 포로 70년의 세월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레닌의 혁명은 역사에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레닌은 자신이 죽기 2년 전 “레닌 사상의 가장 탁월한 계승자로” 판단하여 당 서기장으로 스탈린을 임명했습니다. 스탈린은 성직자가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들어갔던 츠빌리시 신학교를 5년 간 다녔는데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츠빌리시 철도 노동자들로 구성된 한 학습 모임을 지도하는 것을 시작으로 직업혁명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스탈린이 당 서기장에 올라서 1934년부터 시작된 대숙청은 당과 군의 최고위 지도자들이 다수 처형된 것을 비롯하여 수천만 명이 체포되고 피의 숙청을 당했습니다. 이 숙청의 피 냄새가 채 가시기 전에 터진 2차 대전을 통해서 소련 국민 2-3천만 명이 희생당했습니다. 인간적인 사상이나 정치, 경제의 혁명의 결과는 이처럼 엄청난 인류의 고통과 죽음을 초래했습니다.

자기 개혁 없는 사회 개혁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내가 개혁의 대상이라는 것을 시인하게 되고 개혁되어집니다. 천하보다 내가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보지 않고 세상을 볼 때 자기 개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자기 개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신앙의 문제입니다 신앙 없이는 개혁이 되질 않습니다. 신앙 없이 개혁해 보아야 인공적인 암 덩어리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죽고자 하는 진리에 설 때, 변하지 않는 진리 위에서만이 개혁이 완성될 수 있습니다. 신앙과 믿음이 들어가면 사람이 정직해 집니다. 사단은 거짓 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없습니다. 이것이 진실이요 진리요 참 인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5절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십니다. 이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로 개혁된 우리 모두가 들어갈 것입니다. “하노라”로 번역된 헬라어 포이오(poiw’)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이루어주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것을 예언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포이오는 현재 시상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이 부여되었는데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새롭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에 새 하늘과 땅에 들어갈 약속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남아공 양승록 선교사 편지에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6.25처럼 슬픈 날이 아니지만 힘든 날이었습니다. 바로 우리교회 노총각 이삭의 결혼식 날이었답니다. 토요일 예식은 신부집에서 9시에. 축복의 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도착한 결혼식장에는 하객도 없고, 천막도 말 그대로 걸레모양. 급기야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관계로 결혼식장을 교회로 옮겼고, 교회는 장식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이래저래 시간은 흘러가는데 기다리는 또 다른 문제1. 교회 담임목사의 주례거부. 이유인즉, 신랑이 먼저 찾아와서 인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함께 갔던 우리교회 목사는 주례할 수 있는 자격증이 없어서 못하고. 문제2. 신부가 교회에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유인즉, 신랑측에서 소를 잡아 반씩 나누기로 했는데 머리 절반과 다리가 오지 않았기에 신부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결혼식은 우여곡절 끝에 오후 늦게 진행되었답니다.

제가 5년 전에 주례를 처음 했던 자매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목사님이 축복해주셔서 제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5년 전 이날을 생각할 때 오빠들은 전원 결혼 반대로 예식장도 안 들어오고 엄마는 아버지의 명령과 그늘 밑에서 평생 사셔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에 혼자 어쩔 줄 몰라하시며, 결국 오빠들의 비 협조로 손님차도 제대로 초청하지 못하고 치룬 막내딸 결혼식을 생각하며 마음 무너져 하셨습니다. 가끔 그때를 생각을 하시며 너무 가슴아파 우십니다.” 결혼 초기에는 어려움도 많았지만 남편이 하나님을 만나고 지금은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남편도 가끔 눈물이 난다고 합니다. 남편은 교회에서 간증도 하게되었습니다.

여러분! 잘 사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혁 하니까 너무 사회적이고 나와는 거리가 너무 먼 이야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개혁되어야 우리 가정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정이 됩니다.

개혁의 완성은 그 날에 주님이 장식하십니다. 그 때에 주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다시는 아픔과 죽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세상 개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신앙개혁을 이루어 내셔서 새로운 세상에서도 반드시 다시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자를 위하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8. 소자를 위하여) / 본문 : 마 18:10-14

“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아프리카에는 산양의 일종인 ‘스프링 벅’이란 동물이 살고 있습니다. 이 짐승들은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다가 갑자기 질주를 시작하는데 뒤에서 풀을 뜯던 양들이 앞쪽으로 나오면, 앞에 있던 양들은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더 빨리 앞으로 내달린다고 합니다. 이 양들은 목적 없이 질주를 계속하다가 눈앞에 낭떠러지를 보고서도 가속 때문에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목적지도 모른 채 덩달아 앞을 다투어 경주하는 과속 인생을 사는 현대인들이 흡사, 이 미련한 짐승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소자를 위해 오신 예수님을 만나시면서 세상 속에서 무엇인지도 모르고 덩달아 달리지 마시고 주의 길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축하를 하기 위해서 “..위하여!”라고 위칩니다. 정치하시는 분들이 “위하여!”는 여당 분들이 하니까 우리는 야당이니까 “…위하야!” 한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어느 교회 모임에서 “위하주!” 그리고 축하한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좀더 엄밀히 말하면 사람들에게 경배만 받으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까요? 하나님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코 경배를 받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경배만 받기 위해서 오셨다면 이 땅에 오지 않는 편이 더 났습니다. 하나님의 우편에서 그저 편하게 계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 6:19-20) 우리는 헌금을 하면서 “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한다고 생각하기 싶습니다. 아닙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본 받고 따라오라고는 하셨고 나의 명령을 지키라고는 하셨지만 나만을 위하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0-32)

안질로 고생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눈이 찌르고 아팠지만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왕의 눈병을 고치겠노라 나섰습니다. 왕은 그를 따라 궁궐 밖으로 나가 백성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왕이 생각했던 것보다 백성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 때 슬픈 통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곳을 찾아가 보니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단칸방에 누더기를 걸친 시체 옆에 어린 자식 셋이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참한 정경에 왕도 눈물이 터져 통곡을 했습니다. 얼마 후 자신을 진정 하고 난 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눈의 통증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셨습니다.

우리 한글에는 백성을 가리키는 단어 중에 ‘국민’과 ‘인민’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글개역성경(1952년 이전)에 보면 역대하 17:9 “저희가 여호와의 율법 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성읍으로 순행하며 인민을 가르쳤더라” 라고 나옵니다. 유다 4대왕이었던 여호사밧 때의 일입니다. 남북한이 말을 나누어 갖다보니 북한에서 자주 쓰는 용어를 남한에서 사용하지 않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 남한에서는 인민이라는 말보다는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국민은 한 개인이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개념이고 많고, 인민은 나라가 한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북한과 남한의 용어가 바뀌어 사용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북한 공식명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중국에는 “인민일보”가 있습니다. 이 나라들이 정말 인민을 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민을 위해 오신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자(인민)를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소자(mikrw’n touvtwn:미크론 투톤)”는 “가장 작은 사람, 미미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헬라어에서 “작다(소자)”는 의미를 “키가 작은”, “범위가 작은”, “의미가 적은”, “시간 적으로 짧은(연령적으로 어린)”이라는 것을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누가복음 19:3 에 삭개오는 “키가 작았으며” 마가복음 15:40 에는 야고보도 “키가 작은” 또는 “나이가 어린”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단어는 “의미 없는”이라는 뜻으로 보잘것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우리 식으로 말하면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결코 경멸의 의미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숨겨진, 장래의 위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창세기 49장에서 예수님이 나신 유다지파에 대해 예언하기를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창 49:9)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고 가난한 자들을 부르십니다(마 11:25, 29).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어린아이처럼 낮아지게 됩니다(마 18:4). 그러나 이 땅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장래에는 큰 자가 될 것입니다(마 18:1, cf 5:19).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 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마 11:11).
본문 10절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라톤을 완주한 선수에게 리포터가 뛰는 동안 가장 힘들게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물었다.”호흡입니까? 아니면 갈증 때문입니까?” 그러자 마라토너는 “저를 힘들게 한 것은 호흡도 갈증도 아닙니다. 신발 속에 모래알 만한 작은 돌멩이 하나가 굴러다니며 저를 가장 힘들게 했습니다” 라고 말했답니다. 제일 작은 나 자신이 주님의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라를 VIP로 대접하십니다.

VIP로 대접하시는 하나님

VIP(very important person) 국어사전에 보면 “정부 요인이나 국빈 등과 같이 특별히 대우해야 할 아주 중요한 인물. ‘귀빈’, ‘요인’ “을 말합니다. 신어로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가 있는데 이 말은 VIP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이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VVIP로 우리를 대접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그런 단어가 성경에 있습니다. 시 13:6을 봅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 또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시 116:7). “후대하심”이라는 단어는 원문에 두 단어가 나옵니다. “lm’G:가말(혜택, 관대하다, 섬기다)”과 “l[‘:알(넘어, 위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데 넘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예수께서 처음 이적을 행하실 때의 물 항아리도 아구까지 가득 채웠습니다(요 2:7). 우리 하나님은 차고 넘치게 주십니다. 아이작 와츠의 찬송시(141장)처럼 1절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시 116:12) 5절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

소자의 가치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막 9:42) 연자 맷돌은 혼자의 힘으로 돌릴 수 있는 작은 맷돌이 아니라 나귀나 말의 힘으로 돌릴 수 있는 곡식을 빻는 멧돌을 말합니다. 연자 멧돌과 같이 큰돌을 목에 메게 하여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형벌은 부모를 죽이거나 반역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을 때 로마가 집행하던 당시 형벌이었습니다. 소자를 실족케 하는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말해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비교로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고 하셨습니다.
본문 10절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성경에서 천사들은 국가(단 10:13, 12:1), 교회(계 1:20), 개인(행 12:15)을 위한 수호(守護) 천사가 있습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천사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지금도 잘못된 신앙을 가지면 천사를 숭배하게 됩니다. 천사는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도록 명령을 받은 하나님이 일꾼이지(히 1:14) 우리가 섬겨야될 대상은 아닙니다. 하늘에서 항상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천사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천사가 돌보는 소자가 얼마나 귀한지를 말한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고 하셨습니다.

길을 잃었으면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이미 얻은 이 구원의 은혜를 따라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다시는 길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에게 맡겨진 책임 또한 여러분은 잘 인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길을 잃어버린 양은 찾아 나서야 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목자로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모세는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7)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하나님의 뜻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입니다(딤전 2:4). “만일(eja;n:에안)”은 접속사이지만 이 단어는 “a[n:안” 소원을 말하는 기본 조건 불변사에서 유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꼭 찾기를 원하신다는 애절한 소원이 들어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소원에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80대 중반이 되신 노(老)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얼굴에 주름을 찾아보기 정말 힘든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교인들이 장로님을 부르는 애칭이 “보톡스 장로님!” 성품은 밝고 친절하여 많은 교회 후배들이 본받고 싶은 분이라고 합니다. 그 장로님께서 부흥 사경회 중 목사님께 점심식사를 대접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오늘 점심은 천국에 가신 저의 어머님께서 대접하는 것이라 생각해 주세요.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부흥회가 개최되면 저의 어머님께서 정성을 다하여 강사 목사님의 식사를 대접하셨답니다. 그 때는 이렇게 식당에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했죠. 그래서 제가 일 년 중 제일 맛있는 것들을 먹는 날이 바로 부흥회 하는 날이었답니다. 지금 어머님은 돌아 가셨으나 그 때 그것을 보고자란 대로 저도 늘 이렇게 부흥강사님을 대접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 11:1). 예수님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고 하셨습니다.
 

꽃이 아닌 꽃씨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7. 꽃이 아닌 꽃씨를) / 본문 : 행 1:6-8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열두 명의 장정들이 부모를 버리고 하던 일도 모두 포기하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이들 중에는 어부도 있었으며 세리도 있었습니다. 예수의 부름을 받고도 따르지 않은 사람도 있었는데, 자기의 신앙은 자랑했지만 자기의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없어 예수님을 쫓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부모의 장래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쫓지 못한 이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예수를 따랐던 제자들은 일생을 건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씨는 생각하지 않고 꽃만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메시야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대 속에 예수를 따라 다닌지 3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민심은 잘 얻으시고도 대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의 산헤드린공의회의 모함과 고발로 로마인의 재판자리에 섰습니다. 빌라도는 나름대로 예수를 풀어주려고 애를 썼지만 자신이 어려움을 겪어가면서까지 예수를 풀어줄 마음은 없었습니다. 결국 목소리 큰 사람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제는 끝이 났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언대로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를 다시 가다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전처럼 함께 계시지도 않고 가끔 보여주시고(11번) 확인만 시켜준 상태입니다. 이렇게 시간은 어느덧 40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승천하신다는 소식이 들린 것입니다. 이건 또 웬 일인가 싶어 제자들은 부랴부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다급한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감람산 현장에서 예수님의 옷소매에 매달려 그냥 가실 수 없다고 애절하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합니다. “예수님 단 한번만 저 로마를 향해 입김 한번만 불면 불바다가 될 것 아닙니까? 이대로 그냥은 못 가십니다.” 이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북쪽 이스라엘은 B.C. 721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하고 남쪽 유다는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바벨론이 다스리다가 다음에 바사(페르시아제국), 헬라에 이어 지금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시달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일제 36년의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무려 700년 간의 나라 잃은 슬픔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면 자신의 나라를 찾아야 된다는 생각을 누구나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엉뚱합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행 1:7) 제자들은 오늘 승천하시기 전에 결판을 내자고 하는데 예수님은 매정스럽게 느긋하신 태도입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고 하십니다. 유대인인 제자들은 자신의 나라를 찾고자 하는데 관심이 있는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찾으시는데 관심이 있으십니다.

우선순위 첫 번째가 무엇인지 정해졌습니다. 예수님께 더 땡 깡을 부려 받자 소용없습니다. 워낙에 단호하신 모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결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하라고 보내시면서 전대도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훈련시킨 적이 있습니다. 돈 한푼 없는 제자들이니 상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씀 정도는 하셔야 했습니다. “배 삯은 염려 말아라. 얼마 전 내가 병 고쳐 준 자에게 배 삯을 부탁해 보겠다.” 한다던가 “여전도 회장 막달라 마리아가 마련해 줄 것이다” 하든지 해야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아무 조치도 없으시고 그냥 “가라!”고만 하십니다. 대책이 없으신 분입니다. 3년 간이나 12명, 70명, 5천 명, 수만 명 떼지어 다니면서도 교단 이름하나 지어 놓지 않으시고 가셨습니다.

오직 단 한가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ajlla;:알라)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인데, 헬라어의 이 말은 “a[llo”:알로스”의 중성 복수형에서 왔습니다. 알로스는 ‘다른’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이 다른 것이겠습니까?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의 권력과 물질로 일을 이루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성령으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이동휘 목사님은 1983년 전주안디옥교회를 개척하여 교회 재정의 60%이상(실제로는 70%사용)을 선교비로 지출하며 2007년 현재 바울선교회를 통하여 전 세계 87개국에 372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2007년 9월 현재). 이렇게 많은 사역과 세계교회에 찾기 어려운 모범적으로 선교를 실천한 교회를 담임하셨던 이동휘 목사님은 “돌이켜 보면 나는 실패했다. 나는 내 교회를 믿었고 이 교회의 헌금을 의지했다. 하나님께 직접 구하기보다는 바쳐진 헌금에 울고 웃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과 그때 그때마다 필요한 하나님의 방법을 수없이 놓쳤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러나 전주안디옥교회 만큼 절약하며 선교하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접대비 명목으로 된 지출이 없다보니 찾아오시는 손님들에게 성도님들이 사온 음료수를 접대하게 되었는데 한번은 목사님께서 박카스를 오신 장로님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 장로님이 시무 하시는 교회에 목사님이 집회를 가시게 되었습니다. 장로님은 목사님을 소개하시면서 전주안디옥교회는 박카스도 반병씩 아껴서 먹습니다. 그러시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실수하신 것을 알고 얼굴이 벌개 지시면서 그만 하셨으면 하셨지만 장로님은 자랑스럽게 계속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손님들이 오시면 계속 물만 마실 수 없으시니까 박카스 반병을 마시고 옆에 놓아둔 것을 그만 실수로 장로님에게 드린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한 다발의 화환과 한 봉지의 꽃씨 중에서 어떤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아브라함 링컨은 노예 주인들의 요구에 양보했더라면 그는 화환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돌아올 화환보다는 울부짖는 흑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장은 어렵고 힘든 싸움이 일어났지만 먼 훗날을 위해서 씨를 뿌렸습니다.

선교의 대책은 오직 성령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잘 살펴보면 답이 나옵니다. 어떻게 사람들과 다르게 사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남을 정죄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남을 정죄하는 것은 막대한 에너지가 새어 나가는 일로 간주하셨습니다. 세상을 정죄하거나 심판하시기 오신 것이 아니라 도와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수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시간도 허비하지 않고 그의 에너지를 창조와 복구에 사용했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것은 예수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죄는 왜 하게 됩니까? 원한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나라 찾기에 원한에 싸여있습니다. 그래서 그 원한이 창조와 회복이 아닌 정죄와 파괴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도 알고 보면 불쌍한 민족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약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정죄는 진전을 가로막습니다. 예수님은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눅 19:22)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요 5:45)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다 기록하고(20장까지) 21장을 마치 ‘추신’처럼 기록했습니다. 다 기록을 하고 나니까 베드로에 대한 중요한 부분을 누구도 증거하지 않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정한 기록은 있는데 그가 예수께 돌아와 회복된 이야기가 다른 복음서 모두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다시 펜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21장을 써 내려갔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나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치라” 세 번 같은 말이 이어지고(요 21:15-17) 베드로의 요한에 대한 엉뚱한 관심이 나옵니다. “주님 저 사람(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22)고 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서 엉뚱한 관심으로 에너지를 낭비할 때가 많습니다. 누구는 땅을 샀습니다. 누구는 50평 짜리 아파트를 샀습니다. 누구는 교회를 크게 지었습니다.
여러분!
북한에 이런 구호가 이더라구요. “우리는 우리식대로 산다” 우리는 예수식대로 산다. -아멘-

둘째, 프로의 삶을 사세요.
프로페셔널이란 말에는 하고 싶지 않을 때라도 해야 할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프로는 일시적으로 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는 프로 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가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서는 예수님의 이 모습을 가리켜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차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사 50:7) 예수님이 잡혀가시게 되자 베드로는 칼을 뽑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잡혀가시면 끝장나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께서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 18:11) 이 말은 다시 번역하면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입니다. 우리가 프로정신이 없을 때 하기 좋은 일만 골라한다면 시골교회는 누가 담임하고, 장애우들은 누가 돌봅니까? 먼지 날리는 황무지 같은 땅에서 오늘도 죽을힘을 다해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꽃이 아닌 꽃씨를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기도의 씨를 뿌리세요.
불교인들은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합니다. 가톨릭인들은 십자가 모양으로 성호를 긋고 합장합니다. 무슬림들은 모스크에 가거나 그곳을 바라보고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고 몇 번씩 절을 합니다. 힌두교도들은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서서 따로 기도했습니다(눅 18:11).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제멋 대로입니다. 정해진 형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모양을 가르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요 11:41에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구약서부터 보면 기도의 보습이 다양하게 나옵니다. “꿇어 엎드려”, “두 손들고”, “가슴을 치며”, “머리를 숙이고”, “하늘을 쳐다보며” 등의 모습이 나오지만 모두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의 모습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골방에서 하라”(마 6:5-6)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원수와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마 5:44), “중언 부언 하지말고”(마 6:7), “무엇이든지”(마 18:18), “믿고 구하라”(마 21:22)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런데 원문에 보면 중요한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te:테”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앞에 나타납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연관이나 첨가의 기본 불변사입니다. 뜻은 “역시, 양쪽의, -까지도, 둘 다”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는 순서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다 되면 그 다음에 유대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10명의 성도만 있을 때는 하지말고 100명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테’의 강력한 불변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선교 명령은 최소 될 수도 없으며 그 곳이 어디든지, 언제든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어느 곳에 있던지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나의 선교지 입니다. 주님의 간곡한 이 마지막 부탁을 성실히 이행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라진 교회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6. 사라진 교회들) / 본문 : 마 4:21-23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대한민국 개신교인수는 통계 조사이래 1995년이 8,760,066명(19.6%)으로 제일 많은 수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를 기점으로 감소세를 보였습니다. 10년이 지난 2005년에는 인구는 4천 4백만 명에서 4천 7백만 명으로 300만 명이 늘어난 반면 개신교인구는 8,616,438명(18.3%)으로 오히려 143,628명이 줄었습니다. 이것은 1,000명의 교회가 143개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명목상 기독교인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이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명목상의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명목상의 신자들조차도 줄고 있답니다. 지난 1990년대 초 프랑스인들은 전 인구의 80%가 자신이 카톨릭 신자라고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51% 줄어들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프랑스만의 현상이 아니라 종교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고 응답한 이탈리아의 경우 27%, 독일 21%, 프랑스, 체코 11%, 미국 60% 이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질문에 대해 이슬람 국가에서는 90% 이었습니다. 이슬람 국가들 보다 휠 씬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2004년 조사에서는 영국인들의 44%만이 신이 존재한다고 답하였으며, 35%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였고, 21%는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미국인들의 40%, 영국인들의 15%, 독일인들의 12%,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 국민들의 5%만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간다고 했습니다. 유럽 국가 전체의 평균 수치는 20%가 채 되지 않으며, 2000년 조사에서 미국인들 중 16%, 프랑스인들의 60%, 영국인들의 55%,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의 40~50%가 거의 또는 한번도 교회에 가지 않았다고 답변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노르딕 국가(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 나라들은 국기 모양이 노르딕 모양으로 모두 십자가 국기입니다. 국기는 십자가인데 교회는 5%만 다니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라진 나라들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이제 경각심을 가져야할 때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 수가 80~100%까지 되었던 유럽 국가들하고는 다릅니다. 유럽 나라들은 힘들고 어려우면 옛날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이 말은 예전의 신앙을 회복하자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신교인 20%을 넘어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나라가 옛날로 돌아가면 불교나 유교 또는 무교, 샤머니즘으로 가자는 이야기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라진 교회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 어원의 뜻

본문 21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라고 했습니다. “부르시니”는 원어의 “ejkavlesen”(에클레시안)으로 어근 부르다(kalevw:칼레오)에서 온 말입니다. 이것을 라틴어에서 에클레시아(Ecclesia)로 그대로 읽었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 히브리어 ‘카라’에서 왔는데 로마서 11장 29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는 하나님의 부름, 소명이 함께 들어있습니다. 이 단어가 영어로 부름(call), 소명(calling)으로 불러지게 됩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5절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칼라가 칼라치아가 되고 영어에서 회중을 의미하는 church 라는 단어로 보편적인 측면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영어 발음에서는 칼라가 약해지고 치아의 발음이 살아나 church가 된 것입니다.

에클레시아(ejkklhsiva/)는 대부분의 단어들이 단수형으로 나옵니다(행 2:47, 5:11, 7:38, 8:1, 9:31). 이것은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 1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30)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 4:4)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
교회는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교회는 둘이 될 수 없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복수형으로 사용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교회의 수적 증가를 말할 때 복수로 나옵니다. 또 한가지는 의미심장한 뜻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28절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굳이 다른 곳과 같이 단수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즉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해서 교회를 세우지만 그러나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

교회의 어원적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오늘날 변화된 가톨릭이나, church가 아니라 원래 이 말의 뿌리가 가지고 있는 칼레오(부르다), call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고 타락한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 22:1)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출 19:20)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삼상 3:4)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을 무르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사용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나 예수께서 부르신 것이나 똑 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케 하시며(마 9: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자신에게로 구원에로 부르십니다(롬 8:30).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씨를 부르실 뿐만 아니라(롬 9:7),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모두 부르셨습니다(롬 9:24)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들

‘에클레시아, church, 가톨릭’의 단어는 모두 ‘칼레오’ 부르다와 동시에 엔칼라오, 엔클레마(ejpikalevoma 에피칼레오마이:고소하다)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이 친구들하고 놀다가 부모님께 와서 일러바칩니다. 사실은 유치한 것 같지만 하나님께 일러바치는 것이 교회입니다.
공산주의가 부패하는 것은 언론을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려면 바른 언론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모두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이 기능이 바르게 작동될 때 사회는 그만큼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일러바치는 사람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9절에 보면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출애굽을 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9장 40절에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부르짖지 않는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회관

본문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오늘날의 교회도 예수님이 불러서 행하신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해야 참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르치시며” 교육과
둘째는 “전파하시며” 전도, 선교와
셋째는 “약한 것을 고치시니” 능력 행함과 공동체적인 봉사의 삶을 말합니다. 이러한 역할을 하지 않을 때 교회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미국에 사는 감리교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미국 감리교회는 일년에 700개씩 교회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조사해 보니까, 첫째는 기도하지 않고, 둘째는 성경을 보지 않고, 셋째는 전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일본 교회는 모이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동경의 모리야마 목사는 수요일 날 기도회도 많은 분들이 모입니다. 교회에서는 주일날 저녁에 모이지 못하는 부인들을 위해서 금요일 오전에 ‘감람회’라 해서 모이는 모임이 있다. 그리고 금요일 날 저녁에는 철야기도회를 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철야기도회를 하니까 얼마나 피곤할까 해서 모이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한 것은 새벽 기도회와 철야 기도회 때문이라고 말하고 그래서 일본에서도 이것을 배워야 하겠다 하는 데서 철야기도회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철야기도회의 인원도 점점 늘게 된 것입니다.

사라진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열왕기서에 보면 북왕국 20대왕 남왕국 19대 왕국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 왕들에게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이방인들이 조롱과 우롱거리가 되는 것을 감수하시면서 이스라엘 나라와 예루살렘 성전을 버리십니다. 역대하 마지막 36장 17-21절에서 하나님은 갈대아 왕을 통해서 이 성의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다 죽이게 하고 하나님의 전은 노략을 당하고 불에 타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동안에 예루살렘 성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었고 부르짖는 사람도 없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성은 갈대가 날리는 황무지로 변해 버렸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바벨론에서 나와 예루살렘성을 건축하러 돌아옵니다. 이 성을 재건하고 찬송을 하고 제사를 드립니다. 노인들 중에는 예전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에스라 3:12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라고 했습니다.

서양인들의 묘지는 저 멀리 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로 동네 가운데 혹은 교회당 뜰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 가지런히 줄을 지어 서 있는 묘비에는 주로 앞서 간 이에 대한 추모의 글이나 아쉬움의 인사가 새겨져 있습니다.
한 사람이 묘지를 돌며 묘비들을 읽고 다니다 어떤 묘지 앞에 발길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 묘비의 글이 상당히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묘비의 글을 알려줍니다.
글은 단 세 줄이었는데 ①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②두 번째 줄이 이어졌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이 글을 읽자 그는 이게 그냥 재미로 쓴 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된 마음으로 세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③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를 하시오.

느헤미야 10:39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스펄전 목사님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어디를 가십니까? 어느 교회에 설교하려 갑니다.
아니 목사님 그런 작은 교회에 가서도 설교하십니까?
형제여! 작은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다 위대한 교회입니다.
 

껍데기 종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5. 껍데기 종교) / 본문 : 마 20:29-34

“29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 갈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30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33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홈런을 쳐 본 선수는 배트에 와 닿는 공의 느낌으로 담장을 넘길 만큼의 비(飛) 거리를 알아챌 수 있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정미함과 완전함은 그것을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라면 실존적으로 깨닫기 어렵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늘 설교를 하지만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귀가에 메아리치는 소리가 아니라 가슴을 파고드는 생명의 소리가 되게 달라고 말입니다.
사실, 삶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소경입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미래는 가리워 져 있고 내일은 우리의 손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우리 삶의 방향타를 우리가 어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믿음은 껍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이라야 합니다.

누에나 애벌레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자기가 살던 집을 쏙 빠져나와 집은 버리고 자신은 나비가 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빠져나온 집은 이제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껍데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껍데기를 버리고 나온 나비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매여 있고 형식에 빠져있다면 우리는 새것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껍데기 종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껍데기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그리고 두 소경과 무리가 나옵니다. 같은 본문이 마가복음 10:46-52절에도 나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한 소경의 이름은 바디매오라고 일러줍니다. 그리고 소경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소경뿐만 아니라 주변의 상황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31절에 무리라고 소개된 사람들 속에는 제자들이 중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막 10:46)라고 나옵니다.
마태는 왜 소경들이 예수께 나아오는 것을 무리(제자)가 금했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명을 수행 중에 있습니다. 본문이 마치는 시점에서 바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됩니다(마 21장, 막 11장). 이것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마지막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병자와 환자들이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그리고 예외 없이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나아오는 것도 금하는 제자들을 호통치신 적이 있습니다(마 19:14). 지금 예루살렘성에 입성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마지막 주간을 보내시게 되지만 지금 제자들은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은 예수님이 한마디로 충분히 민심을 얻으신 것이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왕이 되실 예수님께서 이제 미천한 소경 따위에 신경 쓰실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전처럼 예수님께 아무나 나아오는 것을 금지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냄새나고 역겹고 성가신 자들일 뿐 예수가 왕이 되실 분인데 예의범절도 모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는 그들을 이제 더 이상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의도가 아무리 순수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행동은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비천하고 무능한 자에게 관심을 두실 틈이 없다면, 품위 없는 자들에 대해서 박대하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 또한 그러한 자들이 아니었습니까. 그 누구라도 예수님의 주변에서 예수께 나아가는 것을 막는다면 그것은 텅빈 공허한 종교, 껍데기 종교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일이 교회에서도 생겼습니다. 제1년 후배가 아시아 00나라에서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제일 큰 초, 중, 고 사립학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후원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잘 후원해 주던 교회인데 목사님과 장로님들 사이에 오해가 생겨서 그만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안에서 두 그룹으로 갈라져서 서로 주일 오전 예배 때 강대상을 차지하려고 몸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이런 모습은 절대 교회에서 일어나면 안 됩니다. 결국 교회가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재판을 담당한 분은 또 다른 교회 집사님 이었습니다. 그 앞에 장로님 목사님이 선 것입니다.

그 교단은 보수적으로 유명한 교단입니다. 예전에 미국의 선교사님 한 분이 비행기 타고 공항에 도착했는데 마침 주일이었습니다. 잠시 공항에 마중을 나간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 교단으로부터 탈퇴를 당했습니다. 좀더 지혜로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다른 분을 대신 나가게 했더라면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또 문제가 생기겠지요. 목사님은 안되고 집사님은 나가도 되는지… 이런 일을 가지고 토론을 하면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한 사람은 저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교회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자신들은 필요한 조치를 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을 꼭 만나할 소경의 길을 막은 것입니다. 우리는 바른 일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께 가려는 소경의 길을 막고있지는 않나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예전에 남왕국(유다) 13대왕인 종교개혁을 실시한 히스기야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짓 신 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 왕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백성들이 유월절을 너무나 오랫동안 지키지 않았기에 어느 누구도 유월절을 지킬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제사장들조차 우상 숭배를 했었기 때문에 유월절 의식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첫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는데 히스기야기 백성을 소집한 달은 둘째 달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유월절은 부정한 자들에 의해서 한달 늦게 지켜져야 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18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잇사갈과 스불론의 많은 무리는 자기를 깨끗케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기록한 규례에 어긴지라 히스기야가 위하여 기도하여 가로되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19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아무 사람이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케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대하 30:18-19)
비록 방법은 빈약했지만 동기가 순수한 경우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을 고치셨더라”(대하 30:20)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쉽고도 어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도입니다. 기도가 제일 쉬운 것 같지만 제일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사단이 제일 방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기도를 왜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면 기도는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뿐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껍데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아빠를 위해서 배운 노래를 들려줍니다. 음악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박자와 음정은 모두 엉망입니다. 그러나 아빠를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부릅니다. 아빠는 이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모든 절차와 형식을 무시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바른 동기와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위해서는 충분히 준비하고 정결케하여 정해진 일정에 맞추어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게 하지 못할 상황과 때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소경의 입장이 그렇습니다.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시끄럽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조용히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그 엉터리 같은 의식을 중단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빠는 최선을 다하는 아이에게 “그만 됐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소경과 히스기야 어린아이는 모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제가 중학생 때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 집 뒤에 일본으로 시집가서 살고있는 여자 분이 계셨습니다. 일본에서 친정 집에 오는데 동네 사람들 선물까지 사 가지고 온 것입니다. 우리 집도 가깝게 지냈으니 당연히 선물이 왔습니다. 큰 박스가 하나 도착했는데 밥통이 왔습니다. 예전에 시골에서 전기밥통은 꽤 인기가 많았습니다. 너무 귀한 것이고 어머님은 꼭 같고 싶어하시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잘못 왔다면서 라면 두세 개와 바꿔 갔습니다. 전달한 사람이 잘못 전달한 것입니다. 우리 집 식구들은 몹시 민망하고 황당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선물이라고 하면 겁이 납니다. 저는 그 때 빨리 돈 벌어서 어머님 밥통을 먼저 사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과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습니다(롬 11:29). 하나님은 배달사고가 없으신 참으로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나쁜 것을 놀라운 축복으로 바꿔주십니다. 우리의 수치스러운 것을 자랑으로 바꿔 주십니다. 소경의 부르짖는 소리를 아름다운 노래 소리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들은 눈을 뜨고 깡총 깡총 뛰면서 호산나를 부르며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의 무리와 함께 향했을 것입니다.

본문 34절에서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라고 합니다. 3년이 넘게 함께 지낸 제자들이 이제 일주일이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가르칠 시간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앞서서 예수님께 나오는 소경의 앞을 막았다는 것이 예수님을 민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출퇴근하는 목사님께서 늘 다니시던 지하철역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장애인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너무 측은한 생각과 마음의 영적 충동이 생겨 그의 주위를 서성거렸습니다. 마침 오고 가는 행인들이 뜸하여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셨다고 합니다. “형제님, 저는 목사입니다. 제가 형제님의 영육을 위해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어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기를 기도하겠으니 눈을 감으세요!”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걸하면서 먹고살도록 저를 그냥 이대로 놔두세요. 그리고 은과 금이 없다고 하시는데 혹시 사모님 몰래 숨겨둔 것이 있으시면 다음에라도 좀 주시겠어요?” 이분은 목사님을 참 민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를 잃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얼마나 민망하게 만들어 드렸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전한다고 하면서 주님 앞으로 가는 사람들을 막고 있지는 않은 지요? 기독교가 이슬람에 비해서 왜 전파가 느린지 한가지 단서는 기독교는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신학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 알맹이를 잃어버리는 껍데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소경을 무시해 버려야 하는 세상 왕은 하나님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자기 성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4. 자기 성찰) / 본문 : 막 7:15-16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오늘 제목을 보고 벌써 듣기(보기)싫어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남의 이야기하면 재미있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싫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성찰에서 멀어집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신을 너무 믿지 말아야 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고 했습니다. 우리는 원래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신은 아무 흠이 없다거나 깨끗하다고 하면 그것이 곧 거짓말입니다. 우리나라 3대 거짓말은 나이 드신 분들이 ‘빨리 죽어야지’ 두 번째 처녀가 ‘시집 안 간다’ 세 번째는 ‘물건 밑지고 파는 거야’랍니다. 3대 거짓말 다음으로는 중국집에 전화하면 ‘방금 출발했어요~ ‘, 정치가들이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교장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옷가게 주인이 ‘어머! 언니한테 딱이야~ ‘, 간호사가 ‘이 주사는 하나도 안 아파요’인데 제가 맞아봤는데 엄청 아픕니다. 그런데 진짜 거짓말은 자신은 거짓말 안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기억력이나 이해력이 부족해서 총명하다고 하는 분들도 조금만 방심하면 곧 잃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너무 무지해서 자아 성찰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로 인해 악행을 저지르기 쉽고, 자신을 변명하다가 더 나쁜 죄악으로 빠져들곤 합니다. 우리는 간혹 격정(激情)에서 비롯된 행동을, 열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잘못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면서도 자신의 큰 결함은 보지 못합니다(마 7;3). 몇 해전에 가톨릭에서 “네 탓입니다”라는 구호를 만들고 이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에다 붙이고 다니는 분들이 자동차 뒤편 유리에 붙이고 다니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봅니까? 뒤에 따라오는 차가 보지요. 그럼 누구 탓입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모욕을 당하면 쉽게 알아차리고 깊게 생각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모욕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공정하고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말하고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1.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세상을 창조했을 때는 모는 것이 평화로웠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불평만 해대고 서로 미워하기 때문에 세상은 혼란스러워 졌습니다. 세상을 다시 아름답고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파멸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이에 반대했습니다.
“구태여 인간을 파멸시키려고 노력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들을 떠나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는 것이 좋겠는가?”
“최고로 높은 산으로 가면 어떨까요?” 신은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그대는 아직도 모르고 있군.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인간들은 정복하고 말 것이네.”
그러자 다른 천사가 말했습니다. “달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인간들은 좋은 머리를 이용해 달까지 쫓아올 것이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한 천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들은 사람들 안에 숨어야 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밖에서 찾아 헤매지, 자신의 내면세계에는 무관심하여 결코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바라보는 일 따위는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를 찾아내는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하나님은 그저 머리만 끄덕였습니다. 하나님은 돌멩이에도 풀잎에도 작은 세 속에도 깃들여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속에도 계십니다.

스가랴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슥 12:1)라고 합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가 우리 안에 계십니다.

2. 율법으로 자신을 찾지 못한 종교지도자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만을 예수께 강조했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3-21절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구약성경에서 정한 것 외에도 더 강화시켜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먹는 음식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거룩하게 구별된 민족으로 삼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음식을 구별하여 먹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된 뜻을 찾지 못하고 그 율법에 얽매이게 되어 원래 하나님의 취지대로 사용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옷을 빨도록 한 규정을 통해서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깨끗하게 되는가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옷만 빠는 것으로 다 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 율법의 취지를 벗어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오용되는 음식 율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15-16절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이스라엘 민족 이동으로 본 자기성찰

이스라엘 민족은 두 번에 걸친 민족의 대 이동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다 탈출해 나온 것입니다. 이 때의 인도자는 모세였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제정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대가 망하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잡혀가 70년 간 종살이하다가 고레스가 B.C. 539년 10월에 바벨론을 정복하고 이듬해인 B.C. 538년에 유대인의 귀환을 허락하는 조서를 내립니다. 그리고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귀환이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출애굽과정에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불평을 계속해서 쏟아냅니다. 물이 없다고 해서 물을 주십니다(민 20:13, 24). 출애굽 내내 만나를 주셨습니다(출 16:33). 만나만 먹다가 고기가 먹고싶다고 해서 메추라기를 주십니다(출 16:13). 낮에는 뜨거운 태양 빛을 가리기 위해서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민 14:14) 인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민수기 14:1에 보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정탐군들이 보고했을 때 백성들은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실망시켜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 14:10)고 하십니다.

두 번째 민족적 대 이동은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사왕 고레스는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로 유대인의 귀환을 공포했을 뿐만 아니라 조서도 내리면서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스 1:2)라고 하면서 빨리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2차로 에스라와 함께 귀환하는 사람들은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스 7:27)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에스라 8:21에는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출애굽 때 불평만 하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오히려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이들에게는 출애굽 때처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찬양을 돌렸을 뿐만 아니라 금식을 하면서 갔습니다. 출애굽때의 사람들은 먹을 것에 대한 많은 불만을 내었지만 에스라와 함께한 이들은 오히려 금식하며 갔습니다. 스 8:21에 “스스로 겸비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t/N['t]hil]:레히트아노트’인데 ‘괴로움을 당하다, 낮추다, 고통’의 뜻이 있는 ‘hn:[:아나’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은 자신을 스스로 쳐서 복종시킴같이 완전한 순종적 자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같은 길을 떠나는 사람들인데 처음 출애굽 때와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모습이 다릅니다.

이동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러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노랫말도 있습니다. “아침바람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우리 선생 계신 곳에 엽서 한 장 써 주세요” 겨울이 되면 기러기는 V자 대형으로 남쪽으로 날아가는데 V자 대형으로 날아가면 앞에서 나는 새들이 날개를 저으면 뒤에서 따라오는 새를 위한 상승기류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전체 기러기 때는 혼자 날아가는 것보다 71퍼센트를 너 멀리 날수 있답니다. 또한 맨 앞에서 날아가는 기러기가 지치면 뒤쪽으로 물러나고 금방 뒤에 따르던 기러기가 앞장을 섭니다. 그러므로 기러기 떼는 대열의 앞장에 서려고 싸우는 법도 없고 꼴찌라고 하여 열등감을 갖는 일도 없습니다. 또한 기러기가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대열에서 낙오되면 두 마리의 다른 기러기들이 그 기러기와 함께 대열에서 떨어져 그 기러기가 지상에 내려갈 때까지 도와주고 보호해 줍니다. 같이 간 기러기들은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함께 머문답니다. 또한 서로의 힘을 돕기 위해서 울음소리를 크게 냅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고서는 협력이 불가능합니다. 자신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7:21절에서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해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중앙아메리카 서쪽으로 카리브 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카리브 제도는 서인도 제도(West Indies)로 부르기도 합니다. ‘서인도 제도’라는 이름은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인도에 도착했다고 오해한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인도는 알고 있었는데 새 대륙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본 것만을 생각하게 되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노력이 계속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에 어느 곳에나 계시지만 동시에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손에 들고 무엇을 찾는 사람보다 더 한심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 안에 계신 성령의 존재를 모르는 것입니다.
좀더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오로지 하나님 한 분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위대하거나 고귀하거나 즐겁거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도록 하라.”고 토마스 아켐피스는 말합니다.

두 친구가 여행을 하던 도중에 커다란 곰을 만났습니다. 한 친구는 재빨리 옆에 있는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버렸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곰은 죽은 동물은 손을 안 댄다는 말이 생각나 얼은 엎드려 죽은 척 하였습니다. 곰이 다가와 엎으려 있는 사람의 귀를 핥으며 무슨 말인가 하고 가버렸습니다.
나무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까 곰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물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친구를 혼자 두고 도망치는 친구하고는 같이 다니지 말라 하더군”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라고 했습니다. 또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안 되 자신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