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빌립보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후예배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더 보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마태복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오늘 설교는 실수로 앞 부분의 약 10분간이 사라졌습니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본문의 저자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제일 자산가였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 공동체로부터는 ‘죄인’으로 낙인찍힌 소외계층이었습니다(막 2:14, 눅 5:27: 그러나 그 사실을 마태 본인이 말한 것은 아닙니다. 두 번의 증거가 있었는데 마가와 누가가 그렇게 증거 합니다).
마태는 12제자 중에 특출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이 복음서로 그는 어떤 제자들보다도 위대한 일을 감당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더 보기…)

노아의 방주

예전에 “천지창조”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는 하나님의 창조부터 시작하여 출애굽까지를 영화한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 중간에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엄청나게 큰배를 만들고 그 배에 그렇게 많은 짐승들을 태우고 그리고 문을 닫자 폭우가 쏟아집니다. 그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은 바로 8명뿐입니다. 노아와 그 아내와 3아들과 자부들과 그 배 안에 있던 짐승들만 구원받았습니다. 
방주를 배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배와 방주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방주는 바지선과 같은 땟목과도 같은 것입니다.
배는 배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배 안에 있습니다. 돛단배는 돛이 있고 증기선은 화구가 배 안에 있습니다. 전기선은 전기장치가 있고 동력선은 동력이 배 안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배를 어거하고 제어하는 제어장치가 배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방주는 그렇지 않습니다. 동력장치도 없고 제어 장치도 없습니다. 
방주는 오직 하나님이 인도하시기를 바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방주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조정해서 가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안됩니다. 
우리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1)

전도를 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니까 사람의 눈에 보이지는 않으시지만 최고의 신의 개념에서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신 데 육신으로 오신 분이라고 우리는 설명합니다. 사실 처음 듣는 사람은 뭔 소리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많이 들어서 교회는 다니지 않아도 대부분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믿지 않을 뿐입니다.
가끔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꼭 이런 방법으로 오셔야 했을까?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 얼마나 어려움이 있는지 하나님은 아시는가? 이렇게 오셨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늘이 열리고 하얀빛의 형태로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천둥소리 들어보셨나요? 얼마나 우렁찹니까? 그런 소리로 음성이 들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벌벌 떨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그분의 음성 소리 한마디에 모두가 무릎을 꿇고 가슴을 조이며 살려달라고 말하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천군 천사가 나타나 나팔을 불며 바람이 전주곡을 넣고 천사들이 노래한다면 온 세상이 주목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하나님이신 데 무슨 방법인들 사용하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는 제 생각과는 정 반대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사실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다는 소식은 너무 대단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실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마태는 동방에서 박사들이 찾아왔다고 적고 있는데 제가 성경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러한 사실도 다른 사람은 알 수 없었습니다. 누가도 너무 찾다 보니까 목동들이 알았다고는 적고 있지만 이것도 사실 너무 초라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이 이 땅에 오신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나라의 왕이 자기 땅에 방문만 해도 이런 식으로 영접하고 예우하지는 않습니다. 영접은커녕 자신들의 왕위에 권력에 눈이 멀어 죽이려고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역할을 해야하는 요셉은 어떻습니까? 아니 아이가 태어날 때가 다 되었는데 여관방 얻을 돈이나 권력조차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간신히 마굿간 하나 얻어서 거기서 아이를 낳아야 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알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이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우리들처럼 10달을 채우셨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출산 준비를 하고 아무리 호적하러 가는 길이라고 해도 예수님 출생 준비를 해야하는 것 아닙니까? 요셉은 너무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 그냥 목수입니다. 창조주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꼭 이런 방법을 선택해야 하셨을까요? 돈이 있거나 학벌이 있거나 권세라도 있는 사람이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오신 하나님이 믿어집니까? 저는 어떤 면에서 믿는 우리가 좀 이상한 사람이고 믿지 못하는 사람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실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슈퍼스타가 되시려고 했다면 굳이 이런 방법이 필요 없습니다. 먼지가 이는 목수 일을 하시면서, 마리아가 시키는 심부름을 하면서, 이웃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보면서, 게으른 농부가 흉작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들은 구제불능이야 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실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견뎌 내셨습니다. 무슨 말로 설명이 되겠습니까? 그분은 ‘사랑’ 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사랑했던 “예수의 품에 누었던 자”라고 소개한 요한은 나중에 그의 책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요한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기록했을까요? 예수 안에서 하늘이 뻔쩍이는 것을 보았다는 뜻일까요? 예! 가끔은 몇 번 그런 경험을 하기는 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서 광채가 번쩍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런 빛이 아닙니다. 그런 영광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 해 보셨나요?
초등학교 때 어머님이 몸배 바지를 입고 학교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도시락을 챙겨가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가져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수업시간에 문을 두드리며 밖에 서 계신 어머님의 모습을? 학생들은 교실 창문 넘어로 호기심에 다들 쳐다봅니다. 창피해서 어디로 숨고 싶을 지경입니다. 정말 밥 안 먹어도 산다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따지고 듭니다. “엄마 학교에 왜와. 다시는 오지마!” 그러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어머니는 조용히 “너 배 고플까봐”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아십니까? 나중에 이 아이는 커서 어머니의 심정을 알고 어머니를 그리워합니다. 자 한가지 묻겠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나요? 그런 건 없습니다. 굳이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 사랑은 서낭당 벽에 그려진 산신령보다 좌불상을 하고 앉아있는 그 형상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나중에 생각해 보니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그 시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그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영광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비웃었습니다(마 9:24). 예수님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요 10:20)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마 27:39) 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할 유대인 중 바리새파 약 70%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청지기 비유를 듣고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 16:14) 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반응에 대해서 이미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였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받으신 멸시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0-11)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박수를 쳐주어도 그 모욕과 고통은 참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그 길을 가셨을까요?
리 아이엘피는 그 대답을 알지도 모릅니다. 그는 뉴욕시의 은퇴한 소방관입니다. 뉴욕시를 위해 26년 간 소방관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의 아들 조나단 아이엘피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뉴욕시 소방관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2001년 9월 11일에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로 무너질 때 그의 아들 조나단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죽은 아들의 시체를 찾기 위해 석달를 찾아 헤맸습니다. 12월 11일 화요일에 조나단의 시신이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리 아이엘피는 아들의 시신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니면 그 시신을 왜 찾겠습니까? 세계무역센타가 무너질 때 조나단 아이엘피는 죽었습니다. 나도 죽었습니다. 죄로 무너진 건물더미에 깔려 죽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오신 것입니다. 나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사랑은 모든 견딥니다. 번개의 빛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렛소리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고 말합니다.
사랑은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영원의 세계로부터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먼 길이 막지 못했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고 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창조물의 모든 짐을 지고 방주에 올랐습니다. 우리가 그 무게를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멸종되는 보호 동물, 식물을 발표하였습니다. 환경부는 열목어 등 59종을 새롭게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했습니다. 새롭게 지정된 안에 따르면 개체수가 급격히 줄고 있는 열목어, 따오기, 수원청개구리, 노란산잠자리, 염주알 다슬기, 각시수련, 화경버섯 등 59종의 동식물을 신규 멸종위기종 지정 대상으로 정했습니다. 수원 청개구리 보시면 잘 돌봐 주세요.

이제 그것이 죽으면 이 땅에 그런 동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노아가 소를 죽였다면 우리는 오늘날 우리는 소고기를 못 먹었을 것입니다. 방주의 문을 닫고 들어가 40일을 비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방주의 문도 열어보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방주는 턱 하고 어딘가 걸려 머물러 섰습니다. 그리고 꼭대기 창을 열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다행히 하늘을 맑게 개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온통 사방이 물입니다. 물에 고립되었습니다. 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막막합니다. 까마귀를 내어보냈는데 돌아오지 않습니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비둘기를 내어보냈습니다. 비둘기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제 방주의 문을 닫고 그만 포기하려고 하는데 저 쪽에 비둘기 모습이 보입니다.
이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창 8:11) 라고 했습니다. 홍수로 섬에 고립된 사람들에게 헬리콥터 소리만 들려도 소망이 생깁니다. 암 환자에게 ‘종양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라는 말에서 소망이 들립니다. 파릇 파릇 올라오는 연한 올리브나무 잎을 물고 온 비둘기는 노아에게 소망의 징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은 우리에게 사방에 물로 갇혀있는 노아의 심정보다 더한 것입니다. 어느 곳을 보아도 인간에게 소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생각이 있었던 몇 사람들은 사람은 선하게 살아야 된다.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 등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밑바닥에 죄가 깔려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도덕을 강조하고 선을 말해도 선해지지 않으며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비둘기가 저녁때 물고 온 올리브나무의 새 잎입니다. 소망입니다. 이제는 살 수 있습니다. 이제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치료의 방법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그 해결책을 찾은 것입니다. 이 기쁨을 말라기 선지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입니다. 말씀도 한 절 한 절 깊이 생각하면 은혜가 됩니다. 여러분! 아무리 보아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깊은 은혜를 맞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설렁탕, 곰탕 같습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농부들이 밭을 간 경험이 없는 소를 훈련시킬 때 이렇게 했습니다. 경험이 많은 소에다 나무로 만든 마구를 달아 멍에를 함께 지도록 한 것입니다. 경험이 많은 늙은 소에게는 마구를 단 끈을 단단히 맵니다. 그 소에게 짐이 더 실리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젊은 소에게는 끈을 느슨하게 묶습니다. 함께 걸어가지만 지고 가는 짐이 가벼운 것입니다.
훈련소에서 통나무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 있습니다. 키가 큰 사람이 제일 힘듭니다. 그런데 가운데 키 작은 사람이 끼어 있으면 그냥 앉았다 일어서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면 그분이 무거운 짐은 다 지시는 것입니다. 나는 그냥 그분 옆에서 걸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다윗의 시로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시 107:43)
다시 번역하여 보겠습니다. “슬기로운 이 그 어디 있어 이 일 찬찬히 바라보며 한결 같이 따스하게 아껴 주시는 여호와 주님의 사랑 깨달을 수 있으랴”
최고의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최고의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성경을 사랑합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시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거기에 믿음, 소망, 사랑이 있습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예수를 주목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열중셨 차렷,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주목’입니다. 열중셨 차렷이 왜 필요한 줄 아십니까 자세를 올바르게 하고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열중셨 차렷 다음에 반드시 ‘주목’ 하는 것입니다. 열중셨 차렷만 해놓고 ‘주목’을 안 하면 열중셨 차렷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열중셨 차렷하고 그 다음에 하는 말이 ’00에게 주목’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전체를 예수께 주목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비운 공허한 마음이 청결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아무것도 채워 넣지 않아 보세요 청결하여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비워져서 공허하고 인생이 허무해집니다. 마음을 비웠다고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나친 욕심에서 해방되었다는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은이요 세상 욕심이 잘못된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욕심이 있어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보고 마음만 비우라고 해 보세요 그 다음에는 무슨 기쁨으로 인생을 살아갑니까 마치 열중셨 차렷 해놓고 주목을 안한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무엇에 주목하는지 제 나름대로 뽑아 보았습니다. 젊은 인터넷 사용자가 많아 그들의 관심도이지만 그래도 이것으로 세상 사람들이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제일 많이 사용한다는 네이버 인기 검색어입니다(2010년 4월 2주차 주간종합). 광화문괴물녀, 나나, 큐리, 노홍철복근, 고나은, 성균관스캔들, 정형돈삭발, 이파니, 이정현, 신데렐라언니입니다.
그리고 다음(Daum) 실시간 이슈 검색어입니다(2010.4.14). 유인나 전소속사, 이효리 결혼계획, 2nise 뮤직비디, 칭하이성 지진, 안재모 배신, 이응경 딸, 이은우 하차, 똥폰남, 재범 한국, 유진 비키니입니다.
여기 보시면 사람들이 어디 주목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검색어들이 그저 재미로 보다 보니까 검색어가 올라갔다고 해도 우리는 지나치게 연예인, 오락위주의 검색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예인의 사생활이나 흥미로 삼아서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또한 그것이 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루터는 어느 날 키우던 개에게 먹이를 주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루터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개는 그 손을 따라가면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루터는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주목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자신이 개보다 못하다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만삭되지 못한 자신을 인도한 주님께, 영도 없고 이성도 없는 저 미물인 버러지보다 못하다고 했습니다. 욥은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 좋아할 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욥 9:3) 고 했습니다. 하나님 없는 우리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안됩니다. 이 세상에는 답이 없습니다. 마음을 채워봐도, 마음을 비워봐도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채우려고 노력하고, 어떤 사람은 비우려고 노력합니다. 그 양쪽이 다 안됩니다.

우리 집사람 초등학교 동창이 가끔 와서 밥을 사주고 갑니다. 자꾸만 불러내서 제가 한번 따라가 봤습니다. 그분이 남자입니다. 우리 집사람 아직 인기 좋습니다. 제가 만나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취미는 자전거랍니다. 한번은 집에 세워둔 자전거를 누가 차로 받아서 자전거가 망가졌답니다. 차 운전하시던 분이 기껏해야 몇 만원 하겠지 그러고는 5만원 주고 가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 자전거가 몇 천 만 원짜리인 겁니다. 어지간한 자동차 값보다 더 비쌉니다. 이 자전거는 비행기 만들 때 쓰는 카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비쌉니다. 그러면 자동차가 받으면 찌그러지지 말아야지 왜 망가집니까

고급 자전거는 카본으로 만듭니다. 카본은 비행기를 만드는 재질로, 수직의 힘은 엄청나게 잘 견디어 냅니다. 그래서 산악에서 높은 충격을 받아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카본의 약점은 옆의 힘에 약합니다. 그래서 자동차로 살짝 받았는데도 망가진 것입니다. 모든 조건에서 최고의 재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모든 방법은 이와 같습니다. 어느 길로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비워도 채워도, 도를 닦아도 아니 닦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의가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해서 의로운데, 그 의로움의 기준이 나라마다 다르고 지경마다 다른 것입니다. 아프리카 사람은 사자를 많이 죽인 사람이 제일 의로운 사람입니다. 나라마다 다 다릅니다. 추장마다 다 다릅니다. 지역마다 다 다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선동하고 남을 비판하고 신고 잘하는 그런 사람을 제일 훌륭한 사람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의인으로 뽑으십니까 하나님을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대화를 합니다. 사탄은 땅의 여기저기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고 합니다(욥 1:8). 하나님이 욥을 주목하고 계셨다는 증거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않아 구걸하던 못 걷게 된 사람을 걷게 했습니다. 이 못 걷던 사람은 자기를 걷게 해 달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무엇을 좀 얻을까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 그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행 3:4) 그럽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고 명령했을 때 걸었습니다. 구걸했으나 걷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좀 주는 것은 잠시입니다. 그때만 필요합니다. 그러나 걷게 되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걸하는 식으로 기도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해결해 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걷지 못한 이 사람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처음에 자기들을 ‘주목’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나옵니다. 오늘 말씀에 집중하세요. 주목해야 합니다. 잘 되는 사람이요, 잘 되는 가정, 교회요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집에서는 부부끼리 싸우고, 직장에서는 선후배와 싸우고, 교회에서는 목회자하고 싸우는 사람은 잘 될 수 없습니다. 집안이 잘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사람끼리 싸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길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우리를 비우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함입니다. 비워놓고 채우지 않으면 공허해서, 허무해서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병을 고치기 전에는 사도들에게 주목했는데 사도들은 다시 말합니다. 본문에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와 요한이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에게 주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중요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5∼16에 보면 고린도교회 안에 서로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아볼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린도교회의 상황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바울이 잠깐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지만, 문제의 해결은 고사하고 오히려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전 7:10)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바울이 이 문제를 두고 한 말씀을 보세요. “너희가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바울파다 하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다 사람이라서 그렇습니다.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입니까 저희는 각각 주께서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일뿐입니다. 내가 심는 일을 했다면 아볼로는 물을 주는 일을 했습니다. 심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물을 주는 사람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움이 트고,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뿐이십니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큰 자를 부르지 않습니다. 다윗도 작은 소년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누군 지도 모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기록은 하나님이 함께 하면서 이루진 것이지 갈데아우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세는 레위 족속 아므람과 요베겟 사이에서 낳으며 미리암과 아론의 동생입니다. 그러나 당시 애굽의 박해로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 강물에 띄웠는데 마침 애굽의 왕녀가 발견하고 데려다가 양자를 삼고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유모로 들어가 바로의 궁전에서 40년 간 양육 받으며 애굽의 학술에 통달하였습니다(행 7:22).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모세를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혈기 넘치는 모세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처갓집에서 양떼를 지키며 40년을 더 지내게 만들고 80세가 되어서야 부르셨습니다. 인간의 생각을 다 버리게 하셨습니다. 혈기를 부리려고 해도 힘이 없어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지팡이 하나가지고 바로에게 갔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국의 격언에 ‘하나님을 믿은 이 믿음은 모든 것을 가진 것과 같다’ 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전부입니다.

사사 기드온의 때의 일입니다(사사기 6:23).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미디안의 손에 7년 동안 넘겨주었습니다. 농사를 지을 철이 되었을 때 쳐들어옵니다. 토지 소산을 멸하고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겨두지 않고 다 빼앗아 갔습니다(삿 6:4). 이스라엘 백성은 이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 몰래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삿 6:11). 그런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나타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 6:12) 고 합니다. 기드온은 작은 자입니다. 기드온의 아버지는 가문의 작은아버지입니다. 기드온은 아들 중에서 제일 작은 막내입니다. 그런 기드온에게 천사가 나타나 “큰 용사여” 했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작다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작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분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를 아는 것이 또한 예수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운 사람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을 주목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세상이 있기 전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첫 아담은 죄를 세상에 주었지만 둘째 아담은 구원을 주시 것을 주목해야 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광야 같은 길을 인도하시는 모세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민수기를 보면서 마지막날에 구원받은 백성의 수를 세실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레위기를 보면서 다시 드릴 필요 없는 영원한 속죄의 어린양이 되신 예수를 주목해야 합니다. 신명기를 보면서 우리 자녀에게 가르칠 영원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열왕기, 역대기를 보면서 하나님이 세상의 왕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나라가 바로 선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을 보면서 오실 메시야를 주목해야 합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 예수님을 주목하는 것이고 신약은 이미 오신 예수를 주목하는 책입니다. 이 성경에서 예수가 빠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엘 그레코(El Greco)라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그린 ‘참회하는 성 베드로’라는 그림에서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쥐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이미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천국의 열쇠를 쥐었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사하지 않으시면 안 되는 줄 아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남을 탓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를 탓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나 스스로를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억울하다 하지말고 나를 들여다보아 나를 정결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신을 먼저 들여다볼 수 있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주목하는 사람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봅니다. 예수님은 나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를, 무엇을 주목하는지를 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 주목하는 믿음만큼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입니다. 두 개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 하나되는 것은 ‘주목’하는 것이 같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주목하지 않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예수께 주목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주목하는 믿음은 우리의 모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비천한 사람을 존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저주아래 있는 어떤 사람일지라도 주님이 저주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저주대신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께 주목하시어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모든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조경의(1891. 11. 2-1950. 8. 4) 장로는 한국전쟁 당시에 인민군들이 떼어간 교회 종을 다시 찾아다가 걸고 예배시간을 알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잡혀가던 날도 아내와 함께 약방에서 환자를 돌보는데 심한 복통으로 그의 약방을 찾아온 군관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였습니다. 인민군 군관에게 “공산주의자도 민주주의자도 모두가 내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지옥가지 않습니다.” 결국 군관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총살되었습니다.

최원초(1905.11.27-1950. 9.23) 목사는 “예수 믿으시오. 예수 믿고 천당가시오.” 라고 군복을 걸친 내무서원에게 정중하게 전도를 했습니다. “저한테 지금 전도하고 계시는 겁니까 ” “물론이지요 공산당원이라고 인간 대열에서 낙오될 수 있나요 사람은 예수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고 전도하다 순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도하다 순교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제시대 때에도 한국전쟁 때에도 공산당에게도 전도했습니다. 전도하다 죽었습니다. 순교했습니다. 주일날 선거하는 것을 반대하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주일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 아닌지요. 주일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허은(1914. 2.28~1950. 7.25) 목사는 교회 헌당 후 한국전쟁이 터졌으나 교인들만 피난시키고 두 번 양떼를 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은 신축된 해방제단에 엎드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다가 정치보위부원의 손에 수갑이 채워져 가면서 아버지를 부르는 아들을 향하여 “예수 잘 믿어야 한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순교하였습니다. 이 유언이 우리를 향한 부모님들의 유언인줄로 믿습니다. 단순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잘 믿어야 한다” 는 말씀을 주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5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5-12)

아브라함이 벧엘에 이르러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13:4) 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아브라함만 무슨 제단을 쌓은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입니다. 노아 홍수 전에 사람들은 바벨탑을 세우고도 여호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름을 내는데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만드는 세상은 바벨탑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별것 다해도 다 소용없습니다. 영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영(0)만 잔뜩 모아놓으면 뭐합니까 0이 아무리 많아도 0만 모아 놓은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1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제일 잘 사용한 예가 사무엘상 17:45에 나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고 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은 상대가 안됩니다. 다윗은 아직 너무 어려서 군인이 될 자격도, 전쟁터에 나와서는 안되는 연약한 소년입니다. 그러나 골리앗은 거인으로 최고의 장수입니다. 골리앗의 위세에 이스라엘의 장수들은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돌멩이 다섯과 물매만 들고 거인 골리앗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다윗의 용맹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하나님의 이름’ 이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들고 있는 무기보다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을 신뢰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승리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에게 제재를 당하는 장면입니다. 무슨 말을 했기에 베드로와 제자들이 전하는 것을 막고 섰냐하면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행 2:14) 고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그러셨으니까 지금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소리를 높여서 전합니다. 이 예루살렘 장소가 어디입니까 얼마 전에 예수님이 이곳에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히고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신 바로 그 장소입니다. 살기가 아직 가시지도 않은 그 예루살렘 광장입니다. 예수님이 제판을 받으실 때 도망간 제자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먼저 죽은 가룟유다 위에 열 한 제자가 함께 예루살렘 광장에 모여서 큰 소리로 전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이 이야기를 듣고 가슴을 치며 회개한 사람이 하루에 3천명씩(행 2:41) 늘어나는 것입니다. 온 백성이 찬양하고 백성들은 제자들을 칭송하고 구원받는 성도는 날마다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사도행전 3장으로 넘어가서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는데 나면서부터 못 걷는 이를 사람들이 메어다가 성전 미문에 두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합니다.” 이 때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앉아있지 마세요.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의학이 상당히 발전을 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그냥 죽어야 하는 어지간한 병은 요즘은 약만 먹어도 됩니다. 잘못된 것은 잘라내고 꼬매면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현대 의학으로도 해결 못하는 것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 큰 병원 보세요. 장례식장이 있습니다. 아니 왜 병원에 장례식장이 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죽으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살려서 내보내야 하는 것이 병원 아닙니까 최집사님 나가시는 병원에는 장례식장이 없습니다. 그런 병원이 좋은 겁니다.

본문 “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제자들의 권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요한과 베드로는 자기에게 없는 것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물질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있는 것을 찾았습니다. 그에게 돈은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 안에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많은 돈도, 가문도, 지식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는 가장 부요한 자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행복합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부자입니다. 우리는 가난할 때가 한 번도 없습니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어린 나이에도 우리 집이 왜 그렇게 가난한지요. 그래서 제 소망은 돈을 많이 버는 겁니다. 부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돈버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붙어는 한번도 저 자신이 가난하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가난하지 않습니다. 부자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없어서도 줄 수 없었지만 베드로는 그보다는 더 큰 선물을 그에게 주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돈보다 가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그 어떤 것보다 가치 있는 것이며 소중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은 우리의 길, 생명, 구원, 선한 목자가 되셔서 항상 인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가 일어나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소식이 예루살렘 산헤드린공의회에 전달되었습니다. 지금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대적 자들과 사탄은 예수 이름에 능력이 있음을 더 잘 압니다.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 4:17-18) 고 했습니다.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행 5:40) 라고 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렇다고 안 부릅니까 능력이 일어나는데요.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4:41) 고 했습니다. 예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예수 이름이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렀다고 효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수 이름이 능력입니다. 예전에는 ‘예수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요즘은 별로 들리지 않습니다. ‘쟁이’는 요즘말로 하면 전문가라는 말입니다. ‘예수에 미쳤다’ 라는 말입니다. ‘올인’ 했다는 말입니다. ‘오직 예수뿐인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같은 사건을 놓고 두 가지 반응을 합니다. 참 잘했다. 정말 기뻐할 일이다. 우리가 하지 못한 일을 예수가 해 주었으니 감사하다.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과 누가 시켜서 했느냐 그렇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데 누가 시켜서 합니까 또 누가 시켜서 했으면 무슨 상관입니까 그런데 사람은 이요 갑자기 반응이 나오는 것이 아니랍니다. 평소에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부정적인 사고방식이 있었기 때문에 같은 사건을 놓고도 반응이 다른 겁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니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질문이 뭐냐하면 본문 7절에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가 많이 들어본 질문 같습니다. 바로 적대자들이 예수님께 했던 질문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마 21:23) 고 합니다. 누구의 허락을 받고 예루살렘에서 가르치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권세, 권위를 너무 좋아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자기들의 권세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온통 도적의 소굴로 만들어 놓고, 허세와 남에게 보이려는 외식으로 가득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이런 모습이 되면 안됩니다. 교회의 모든 권세와 권위는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13) 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 사회가 왜 자꾸만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이 문제를 분명히 안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문제가 없습니다. 권세와 영광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서민입니다, 우리는 작은 교회입니다.” 하고 고개를 숙일 뿐입니다. 아무 힘이 없는 백성들이 무슨 권세가 있겠습니까 언제부터 권세가 서서히 생깁니까 돈이 생기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사람들이 따르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자리가 높아지기 시작할 때부터입니다. 만나기가 쉽지 않을 때부터입니다. 이런 분은 권세가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조심해야 됩니다. 권세와 영광은 아버지께만 있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이 무슨 영광을 받습니까 무슨 권세를 말합니까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행 8:12) 라고 말합니다. 전도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다른 것을 많이 말하지만 사실 별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예수의 이름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이름으로 힘입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은 우리 영의 119입니다. 언제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부르면 예수께서 언제든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 잃어버려도 예수님의 이름을 기억하시어 구원을 받으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예수께 드리는 보화(크리스마스)

본문 : 마 2:10-11

동방박사(마기) 메데파사의 제사장, 지도자들. 여러 분야를 연구하여 오직 로마를 무너트릴 방법을 찾고 있었음. 그러나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별은 연구해서 찾은 별이 아님.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으로 나타난 별이 그들을 인도하셨음.
로마와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음.

성경에는 세 명의 동방박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동방박사가 한 명 더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만 늦게 도착하여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목사님 그런 이야기 성경에 없잖아요? 네 성경 밖에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전해드리는 이야기입니다.
네 번째 동방박사도 아주 귀한 세 가지 보석을 준비하고 낙타를 타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낙타가 발목에 부상을 입고 얼마가지 못해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갈까 끝까지 가볼까? 생각하다 하나님이 아들이 오시는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데 끝까지 가봐야지 하고 마음먹고 길을 떠났습니다. 악착같이 가야지 하고 걸어서 광야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쯤 같을까요. 동네 어귀를 만났는데 한 불쌍한 아주머니가 울면서 나오는 거예요. 왜 그러세요. 사정을 물어 보았더니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탄생한 다음 헤롯왕이 남자 어린아이들은 다 죽이라 해서 대 학살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 때 그 아주머니 아들이 죽은 거예요. 이 아주머니를 보고 네 번째 동방박사의 마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측은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자기가 어린 새싹처럼 소중히 여기는 보석을 하나 주고 길을 떠났어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예수님이 이집트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 만나러 이집트로 가자 죽을 고생을 하고 이집트에 도착을 했는데 들리는 소식은 또 실망이었어요. 예수님이 잠깐 그곳에 계시다가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지금 이집트 카이로에 가면 예수님이 머물다 가신 기념교회가 있답니다. 여기서 3년 지내셨답니다. 네 번째 동방박사에게 낙심이었어요. 그런데 동네를 다니다 어디에서 잠을 잘까 하고 왔다 갔다 하던 중에 한 사람을 만났는데 문둥병자 한 사람이 너무 불쌍하게 쪼그리고 앉아 있는 거예요. 아무도 도울 사람이 없어요. 그대로 살다가 그대로 죽을 사람이예요. 그래서 두 번째 자기에는 너무너무 소중한 보석을 그 문둥병자에게 주고 말았어요. 이제 하나 남았어요. 소문을 따라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다닌 시간이 어언 30년이 지났고 이제는 이 네 번째 동방박사도 늙고 초라해져서 어느 식당에서 식사하고 나오는데 어린 그지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두 손을 들고 돈을 달라고 하는데 표정이 너무너무 불쌍하고 해서 나도 고향 땅에 자식이 있는데 생각하면서 마지막 남은 것 하나, 예수님께 바쳐야할 딱 하나 남은 보석을 그 어린 거지에게 주었어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대낮인데 온 천지가 캄캄해지는 거예요. 그러더니 심한 지진이 일어났어요. 몸을 가눌 수 없어요. 뒷둥 뒷둥 대다가 언덕을 바라보았는데 거기에 십자가 세 개가 있었고 그 가운데 30여 년을 찾았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거예요.
그 때 예수님이 이 네 번째 동방박사를 바라보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자식을 잃어 너무 너무 슬퍼할 때 나를 위로해 주었고, 내 몹쓸 병에 걸려서 아무도 나에게 오지도 않는데 너는 나에게 보석을 주었고, 내가 목마르고 몸을 둘 곳이 없을 때 그대는 나에게 먹을 것과 거처할 곳을 주었으니 나는 당신의 사랑을 잊지 않을 거야.
네 번째 동방박사 예수님께 말했대요. 저는 지금 예수님을 뵙는 것이 처음이고 저는 예수님께 그렇게 해 드린 것이 없습니다. 할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까지 네가 나에게 주려고 했던 그 보석을 네가 불쌍히 여겨 다른 사람들에게 준 것은 곳 나에게 준 것이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지금도 우리가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확실한 것은 영, 육간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잘못하는 것은 비 기독교인을 멸시하는 것 같은 태도입니다. 자꾸만 그분들을 멸시하는 듯한 태도입니다. 거룩한 것을 구분할 수는 있지만 우리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따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식 투자하듯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헨델의 ‘메시아’가 신앙의 생활화의 표준
매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더욱 자주 듣게 되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아’도 헨델(George Fredrich Handel)이 이사야서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입니다. 진실한 기독교 신앙인 이었던 헨델은 ‘메시아’를 작곡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하셨던 까닭이 바로 그로 하여금 ‘메시아’를 작곡하도록 하시기 위한 연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메시아’를 작곡하면서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그 긴 대곡을 불과 2주만에 작곡을 다 끝내고 난 후 방에서 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았던 하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눈망울에서는 눈물이 가득했고 양 볼에는 눈물 자국으로 범벅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는 그를 시중들던 하인에게 “나는 메시아를 작곡하는 동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보았네”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음악적으로만 이해하여서는 그 진수를 맛볼 수 없고 음악 속에 살아 있는 헨델의 신앙과 함께 들어야만 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헨델의 음악세계가 그렇게 뜨거운 신앙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훗날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음악가로부터도 “나는 헨델에게는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한다. 그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유능한 작곡가이었기 때문이다”라는 찬사를 듣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전에 교회는 종이 있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그 종을 쳐본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 종에 줄이 없어 종을 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그 종은 남에게 아주 많은 봉사를 한 사람이 있으면 저절로 울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자기 딴에는 봉사한다고 여기저기 금은 보석도 바치는데 종은 울리지 않는 거예요. 그 소문이 왕궁까지 들어갔어요. 그래서 왕도 왔어요. 그래서 왕으로서 많은 헌금을 드렸는데 그래도 종소리가 울리지 않자 자기 왕관을 벗어서 바쳤는데요 종소리는 울리지 않는 거예요. 응답이 없는 거예요. 왕까지 다녀간 후에 좋지 않은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전설이지 실제로 일어날 일이 아니라는 거야! 왕까지 오셨었는데 안되었는데 말야.
그러던 어느 해 성도들이 크리스마스 찬송을 다 부르고 있었는데 그 때 갑자기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땡그랑, 땡그랑 은은하면서도 장엄한 종소리가 들렸어요. 성도님들은 찬양하는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누가 어떤 헌금을 했는데 저 종소리가 울리나 관심이 다 그 종소리에 가 있었습니다. 얼마 안 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다니는 청년이었습니다. 성탄절 예배를 드리려고 오는데 교회근처까지 왔는데 한 사람이 눈 속에서 죽어가는 거예요. 저 사람을 지금 데리고 가서 먹을 것을 주고 살리는 것이 우선인가 지금 성탄절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이 우선인가? 잠시 망설였지만 그 사람을 집에 데리고 가서 살려내려고 애쓰는데 성탄절 예배시간이 다 되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동생에게 빨리 교회에 가서 예배가 끝나기 전에 내가 준비한 성탄헌금을 드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 동생이 뛰어와서 예배당 뒤에 있는 헌금함에 은전을 넣는 순간에 울렸습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람들 때문에 하늘 문을 여시고 감동 하실까? 하나님이 교회의 종소리를 누구에게 울려 주실까? 어떤 교회, 어떤 사람,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우리 교회가 과연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성도가 있는가? 말구유에 오신 예수를 진정 환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어려운 설교를 하는 저는 하나님의 종으로 제일 상급이 많을 수도 있지만 제일 하나님께 책망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교회는 나름대로 애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됩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 마 챙겨놓고 선교할 수 없습니다. 구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1년 동안 열심히 돈벌어서 헌금한 것 귀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매일 매일 그만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장 나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고 견디면서 그렇게 번 돈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예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이 목자와 동방의 박사들에게 먼저 전해졌던 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다행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 당시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은 동방박사들을 통해 부자와 지식인, 권력자들에게도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헤롯왕을 비롯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그 소식을 들었지만 소동만 벌였을 뿐 직접 찾아 나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마2:3-4). 그들은 오늘날 우리들과도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 부자, 권력자들의 성향은 비슷합니다. 그들은 사물을 순수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론을 전개하고 입으로만 말할 줄 알았지 행동은 할 줄 모릅니다. 성탄의 소식이 오직 그런 사람들에게만 전해졌다면 그 당시 직접 아기 예수께 나아가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목자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 ‘빨리 가서’(눅 2:16) 아기 예수께 경배하였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멀고 먼 예루살렘까지 몇 달 동안이나 걸리는 길을 진지하고 끈기 있게 찾아가 기어코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를 만나는 일은 쉽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할 수 없습니다. 별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헨델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별이 나타난 것입니다. 별은 우리에게 길을 안내합니다. 예수를 만나게 합니다. 예수께 드릴 보화를 드리려고 하는 모든 사람은 예수를 만납니다.
 

예수를 찾는 사람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요 18:3-9)

시 108:1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라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작정하셨습니다. 자신이 잡혀가시기로, 자기의 생명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예수께 나오셨습니까?

미국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님이 어느 주일 아침 주일학교 아이 하나를 붙잡고 물었습니다.
“얘 토미야! 넌 여리고성이 어떻게 무너졌다고 생각하니” 목사님은 어떻게 배웠을까하는 것이 궁금해서 물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는 갑자기 긴장을 하더니 “목사님 전 절대로 아녜요, 전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일이 없어요 전 그 곁에 가본 일도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도대체 선생이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 선생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수잔나 선생, 내가 조금 전에 토미에게 여리고성이 왜 무너졌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여리고성 곁에 가본 일도 없다며 자기는 결코 무너뜨리지 않았다고 잡아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요?”
이 말을 듣던 수잔나 선생은 “목사님 그 애 말이 맞을 거예요, 그 애는 절대로 성을 무너뜨릴 애가 아니 예요, 그 애는 착하고 얌전하거든요?”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 날 예배 후 당회가 모인 자리에서 그 얘길 꺼냈습니다.
“장로님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여리고성이 왜 무너졌느냐니까 토미는 성 곁에는 가지도 않았다고 잡아떼고, 수잔나 선생은 그 애는 절대로 성을 무너뜨릴 만큼 힘도 없고, 얌전하다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재정담당 장로가 “목사님 이미 저질러진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가 무너뜨렸건 교회가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재정으로 수리하도록 하십시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무지해지면 안됩니다. 우리가 왜 예수께 나와야 하는지 바로 알아야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다녔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12명이었고 칭찬 받았던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두들 자기들의 생각과 욕심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들을 크게 네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육신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중풍병자, 혈루증을 앓는 여인, 회당장 야이로, 가버나움의 왕의 신하, 수로보니게 여인 등 복음서에 기록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들을 친히 만지시거나 안수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체험적인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 가운데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모신 사도가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바디메오와 같이, 거라사 지방에서 군대귀신에 들렸다가 놓임을 받은 청년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며 허락해 주실 것을 간청한 이들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들을 가정으로, 생활의 현장으로 돌려보내시면서 너희가 받은 은혜를 사람들에게 보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교훈을 듣게 됩니다. 육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그 문제가 해결되면 대부분이 예수님을 떠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영과 육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고, 이를 위하여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병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와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을 주셔서 세상으로 보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만을 목적으로 예수님 앞에 나오면 우리는 신앙이 성숙해지는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기적만을 바라는 패역한 세대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더욱 성숙한 사도, 능력 있는 사도로 세우기 위하여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는 사도 바울의 기도를 세 번이나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문제 해결만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와야 됩니다.

둘째, 자신의 의를 확인 받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율법사, 부자 청년 등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던진 질문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또는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등입니다. 지극히 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목적은 자기 의를 나타내고, 그것을 자랑하며, 그것을 인정받고자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올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입장과 다르면 떠나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떠나간 그들은 더욱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이를 이루기 위하여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이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이 계시는 한 자기가 가진 의가 거짓된 것임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항상 불안했던 것입니다. 이는 그의 인생을 매우 불행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 나올 때는 자기 의를 들고 이를 확인 받기 위해서, 또는 자기가 이룬 공적이나 행위를 인정받기 위하여 나오면 안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죄인일 뿐입니다. 주님, 이 죄인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하며 나올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그에게 믿음의 능력이 주어지는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의를 들고 나온 사람들에게는 말씀을 듣는 귀가 막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에게는 믿음이 생기지 않고,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을 이긴 것 같으나 언제나 불안하게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을 사는 목적이 없습니다.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올라와 자신의 죄를 들고 가슴만 치고 내려간 세리처럼, 자신의 의가 아니라 내 모습 그대로 죄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와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예루살렘 성벽에서 자신의 의를 보이기 위해서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주님은 이런 보이고자 하는 행동을 질타 하셨습니다. 내 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는 자가 아니라 겸손히 무릎꿇기 위해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군인들과 대제사장이 보낸 하속들이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고,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바로 너희가 찾는 나사렛 예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첫 번째 본문 6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고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모습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이전에도 예수님을 잡으려 하거나 죽이려 하는 자들이 있었고, 그런 위기에 처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요 8:59, 10:39). 그러나 오늘은 피하려고도 않으시고 오히려 스스로 확인시켜 주시면서 자신을 밝히십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전에 신변에 위협이 다가올 때 피하신 이유를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했음으로”라고 말씀하시고, 오늘은 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저들에게 밝히신 것은 주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룟 유다의 안내에 따라 예수님을 찾아온 군인들과 하속들이, 왜 나사렛 예수를 찾았습니까? 예수님을 잡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손에는 칼과 창이 들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오되 죽이기 위해서 온 사람들은 이렇게 그 손에 무기를 들고 옵니다. 그 무기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때리고 찌르고 흩어지게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일제시대 때 교회에 가는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넷째,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나온 사람들입니다.

유대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영생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진지하게 영생의 문제를 들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거듭남의 비밀과 믿음으로 말미암은 영생의 복에 관한 말씀을 예수님에게 듣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그의 행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 19:39절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고 그의 행적에 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르던 사도들까지 모두 두려워서 도망한 그 자리에 아리마데 요셉은 값비싼 세마포를 들고, 니고데모는 몰략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근)쯤 가지고 나타난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사도가 되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찾아 왔을 때 왜? 세레요한에게 찾아갔었냐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 11:8)고 하시면서 “선지자를 보러 온 것이면, 오기를 잘했다. 지금 너희 앞에는 선지자보다 더욱 크신 분이 서 있기 때문이다(마 11:7-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부드러운 옷은 권력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사는 즐거움이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비유적인 말입니다.
세상의 권력과, 세상 즐거움을 버릴 때 하나님 말씀이 들어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의 능력이 주어지고,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말씀을 들을 때 영생에 관한 소망이 생겨나며,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새들의 나라가 온통 술렁였습니다. 며칠 뒤 새들의 왕을 정하기 위해 모이라는 왕의 명령이 내렸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가슴이 두근거리며 제 털을 우아하고 멋있게 다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치장도 안하고 멀리서 구경만 하는 새가 있었습니다. 까마귀였습니다. 아무리 물로 닦아도 소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들이 닦고 간 그곳에 깃털이 빠져있는 것을 보고 아름다운 것만 모았습니다. 집에 돌아온 까마귀는 좋은 생각이 났는지 그것을 풀칠하여 하나씩 붙여나갔습니다. 각양 각색의 털을 붙인 까마귀는 찬란했습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습니다. 모두들 다듬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휘황찬란한 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모두들 이렇게 아름다운 새가 있다니… 감탄을 하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순간 시선이 정체불명의 새에게 쏠렸습니다. 까마귀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까~악!”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새들은 모두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어! 이건 까마귀 소린데?, 어! 그러고 보니 까마귀가 안보이네”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러자 까마귀 몸에 붙어있던 깃털 하나가 떨어져 날아가 버렸습니다. “어! 저건 네 깃인데…”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가만히 보던 새들은 순간 달려들어 자기 깃을 다 뽑아갔습니다. 당황한 까마귀는 “까악 까악”하며 숲 속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이솝우화)
우리가 까마귀처럼 꾸미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왜 예수님을 왜 찾아 왔는가? 육신의 문제만을 위해서 찾아왔는가? 내 의를 확인 받기 위하여 찾아왔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오셨는가?
우리는 확실히 “아닙니다.”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없는 세상 의미가 없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고백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0-26)

원래부터 마귀는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간질하고 나누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직접 오셨습니까?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요 나누이게 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성 프란시스는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심게 하소서” 이런 기도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프란시스 종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가 분열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시기함으로서 불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프란시스가 잠시 전도 여행을 떠났을 때 발생했습니다. 프란시스가 돌아왔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형제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이때 많은 형제들이 종규(宗規)의 수정을 요구했습니다. 프란시스는 결론처럼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없다면 종규를 바꾸든 규율을 바꾸든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제자가 물었습니다. “그 방법은 우리가 형제임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뿐이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엡 1:9-10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본문 20-22절에 보면 헬라인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만나러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가야 합니다. 당시에 헬라인이 유대인인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헬라인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왔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은혜 받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도 신앙도 한꺼번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걸음씩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일단 예수님이 계신곳으로 가야합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곳으로 가야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먼저 빌립에게 청했습니다. 빌립은 아마 많은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직접 말씀을 못 드리고 안드레에게 먼저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는 고민 끝에 예수님에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룻기 1장 16절에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이방 여린 룻은 시모인 나오미를 따라오겠다는 신앙적인 고백을 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룻은 유대인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유대인의 백성이 곧 나의 백성이 된다고 하나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죄인은 하나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완전 성결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와 나는 하나가 됩니다.

예수를 따르라

본문 2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은 바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부터 16장까지를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날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 계속 나오는 강조점이 하나 있습니다. ‘나(예수)’입니다. “나를 따르라”, “너희들은 염려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 “너희들이 나를 섬기고자 하느냐 나를 따르라”,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따르라”, “너희들이 천국에 이르기를 원하느냐 나를 따르라 내가 곧 길이니라” 예수께서 자기에게 주목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마다 나를 따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다른 것을 주목하지 마십시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목하십시오. 예수 있는 곳에 무엇이 있길래 주께서 그렇게 강조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계시는 거기에 우리도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환경을 보면 우리가 관광을 갈만한 매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마 8:20) 여러분이 예수님이 사시는 곳이 얼마나 신기한 지 가 보고 싶습니까? 볼 것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보십시오. 그 분이 나실 때 마굿간의 구유에서 나셨습니다. 거기에는 화려함과 찬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목수 집에서 목수 일을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화려한 집에서 하신 것이 아니라 들로 산으로 회당으로 그리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 가셨는데 예수님이 찾아간 곳은 고관이나 부자들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병든 자, 귀신들린 자, 창기와 세리와 버림받은 사람들, 고난에 처한 사람들, 유대인들이 멸시한 그 사람들을 찾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계신 곳에 우리도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설악산에 단풍놀이를 가신 분들이 귀신들린 자, 병든 자, 가난한 자, 세리와 창기들이 기다리고 있는 설악산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따라오라고 하시는데 예수가 계신 그 장소는 환경적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으라고 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생명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대접받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필요로 하는 곳에 가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꼭 있어야 될 그 자리에 주님은 가십니다. 거기에 우리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필요로 하는 그 자리에 가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의도하시는 그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와의 충돌을 일으키는 사람들

이기적인 믿음은 예수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만 잘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행위와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요즘 시험보는 때가 되어서 그런지 텔레비전에 보면 유난히 갓바위 부처가 자꾸만 나옵니다. 그것이 부산 쪽을 바라보고 있어 그쪽 사람들에게 더 효험이 있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식 잘되게 해 달라고 비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시험 철에 입시 생을 위한 특별 기도회 같은 것 안 합니다. 노력한 만큼 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이 유대인들과 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더 좁게 말하면 예수님과 제자들과도 충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이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자들마저도 주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대목이 많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복음을 전하러 길을 가는데 날 때부터 소경된 불쌍한 소경을 만납니다. 제자들은 말하기를 “주여, 이것이 본인이 죄가 많아 소경이 된 것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두고 유대인들이 반응하기를 그 소경을 보고는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부모와 소경 되었던 자에게 가서 따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요한복음 9장 25절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것입니다.” 내가 눈을 떴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기적을 일으켜도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문제로 예수를 잡고자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독선입니다. 지독한 민족주의적 독선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세계인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교회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중병중의 하나는 지나치게 자기교회적이라는 것입니다. 연합하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성도 한 명을 놓고 빼앗아 가듯이 잡아채 갑니다. 세상 사업하는 사람들과 같이 경쟁자적 입장입니다. 이웃 교회와 하나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계 속에서 교회가 하나될 수 있겠습니까? 교단보다 신학교출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되어야 합니다.

예수와 하나가 되려면

본문 24-25절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의 개념이 제일 처음에 나오는 것은 부부입니다. 부부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십 년을 살고도 하나가 안된 부부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죽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죽는다는 것은 목숨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죽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 15:31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미워하는”(misw’n:미세온)은 동사 현재형입니다. 따라하십시다. “내가 살면 예수가 죽고, 내가 죽으면 예수가 산다”

한국 땅에는 성령의 역사도 강하지만 또한 마귀의 역사도 강합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살고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많은 곳에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서로 다를 수는 있지만 싸움을 하기 이전에 하나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났습니다. 독일인들은 전쟁에 졌다는 생각 때문에 깊은 절망감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들은 죄책감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떠맡기면서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계속해서 분열되어 나갔습니다. 이러한 때에 스위스에 머물고 있던 한 독일신학자가 스위스를 떠나서 자기 조국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라는 유명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는 독일인들을 향해서 가는 곳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저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역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그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 분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된 자들입니다. 서로를 정죄하지 마십시오. 좀 더 따뜻하게 서로가 서로의 손을 꼭 쥐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함께 일어나십시다. 우리는 새로운 조국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반드시 새로운 조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됨을 외쳤습니다. 모두가 그 말에 동감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손에 손을 쥔 힘을 더 쥐었습니다. 따뜻하게 손을 잡고서 함께 일어났습니다. 쓰러진 조국을 건설했습니다. 결국은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88년 올림픽에서 불렀던 노래가 ‘손에 손잡고’였습니다. 가족이 손을 잡아봅시다. 성도가 손을 잡아봅시다. 교회가 손을 잡아봅시다. 하나님과 손을 잡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성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세계적인 미국의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 박사는 “교회와 성도가 세상을 전도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세상을 알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뉴질랜드의 복음주의자 브라이언 메드웨이는 “교회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은 사랑하지 않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들어가서 애쓰시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흔히 현시대를 일컬어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합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과 핵심은 결코 변할 수 없지만, 세상을 보고 대하는 방법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오늘날 교회의 가장 커다란 죄는 실상 Commission(죄를 범함)도, Omission(태만)도 아니라 세상 속에 들어가 No Mission(선교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세상을 품에 안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행하는 진정한 사랑과 선교가 없으면, 교회도 없다는 것이다.
아직도 예수님이 인생을 입고 오신 사랑과 은총의 사건(성육신)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통해서 세상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세상을 이해하고 품어, 변화와 구원을 이끌어 가는 사명과 역할을 다하는 우리 교회와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예언의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

구약성경에는 약 300여 가지의 예언이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은 구세주에 관한 예언으로 예수님이 모두 성취하셨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모두 이룬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이미 예언이 구약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 그대로 따라하면 되지 않겠냐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첫 번째 예언의 성취 부분을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태어날 장소를 내가 결정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오래 전에 출판된 책으로 저자 죠쉬 맥도웰(Josh McDowell)이 쓴 “판정을 요하는 증거” 라는 베스트셀러였던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구세주에 대한 8가지 예언만이라도 특정한 한 사람이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것입니다. 스토우너 교수가 뽑은 8가지 예언은,
구세주가 나실 장소(미 5:2)
구세주의 태어나심을 예비할 사자(使者)의 등장(사 40:3)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슥 9:9)
친구에게 배신당하는 것(시 41:9)
은화 30에 팔리고(슥 11:12)
그 돈이 성전에 던져지고 연고자 없는 사람들의 묘지를 구입하는데 사용한 것(슥 11:13)
구세주가 대적자들에게 곤욕을 당해도 입을 열지 않은 것(사 53:7)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히는 것(시 22:16, 사 53:12) 등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8가지 예언을 한꺼번에 성취할 확률은 10만조대 1쯤 될 것이라고, 스토우너 교수는 결론 지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모든 예언이 사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닙니다. 위의 예언 중에서 혹 구약의 예언을 보고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 ‘곤욕 당할 때 입을 열지 않는 것’은 혹 따라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따라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천사가 나타난다거나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그 돈으로 밭을 샀다던가 하는 것은 예수님이 직접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섭리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2.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구역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셨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이와 같이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 8:58)
뿐만이 아닙니다. 세상 창조에 대해서도 증거 합니다. 적어도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거나 그것을 만드신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3)

3. 예수님은,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은 하나님의 육체적 형상이십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계셨습니다. 그가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있었고 만질 수 있었고 우리와 동거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인성이 되셨다는 것은 그도 피곤(요 4:6)을 느끼셨고, 갈증(요 4:7)을 느끼셨고 하나님을 의존하셨으며(요 5:19), 슬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5).

본문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ejskhvnwsen ejn hJmi’n:에스케노센 엔 헤민)
(ejskhvnwsen:에스케노센)의 어근은 ‘skhnovw:스케노오’입니다. 에스케노센은 스케노오의 부정과거 능동태입니다. 스케오는 “야영하다, 천막을 치다”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모세가 친 장막에 처음으로 이 땅에 임재하셨습니다. 그 전에 잠깐씩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명령을 주신 적이 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셔서 이 땅에 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이 모세가 광야에서 친 장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모지 못했습니다. 출 33:20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출 33:23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되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과 한 몸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30)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신 것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삼위는 엄연히 구분되지만 동시에 하나이십니다. 이것을 아무리 인간의 지식으로 유추하여도 만족할 만한 해명을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신비입니다. 우리 인간이 다 이해하고 다 설명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닌지 모릅니다. 태양과 태양광선 태양열로 우리는 삼위일체이심을 조금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하나님이시며,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고, 모습을 드러내시지 않은 하나님의 현신(現身)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통하는 길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행동방식과 행동의 동기를 이해하면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장하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30) 말씀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사실 이 주장이야말로 대경실색(大驚失色)할 만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확인하셨으며 예언의 말씀들이 성취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심이 드러나게 되신 것입니다.

본문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헬라어에는 일반적으로 본다는 단어는 ‘이두’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단어는 ‘이두’가 아니라 “ejqeasavmeqa:에데아오마이”입니다. 이 뜻은 ‘놀라운 광경을 보다’입니다. 어근단어는 ‘jqeasavmeqa:데아오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 ‘놀라운 상태에서 직접 목격했다’는 뜻입니다.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7:2, 막 9:2-8, 눅 9:28-36) 이 장면을 본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구약시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증거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원 길을 하나님은 당신이 스스로 오셔서 다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오랜 구약시대의 기간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이 처음 선택한 민족이 당신의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한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인도하신 땅에서 그들을 끌어내시고 벌을 주셨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바리지 않으셨습니다. 율법도 패하지 하니 하셨습니다. 당신이 다 만들어 놓으시고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 모든 율법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한국 전쟁 취재로 풀리쳐 상을 받은 히긴스(Marguerite Higgins)가 중공군과의 대전으로 몹시 지친 해병중대를 찾아 얼어붙은 콩을 씹고 있는 어느 병사와 대담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라면 어떤 소원을 말하고 싶으냐” 하는 질문에 병사는 “내일을 달라”(Give me tomorrow-궵~ 미 투머로우)고 대답했습니다. 미래가 약속된다면 오늘의 고통은 문제가 아니라는 답변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래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소망을 주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느니라.”(롬 1:17)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8-29)
“네 믿음이 네 죄를 사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 13:7)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율법에서 명한 흠 없는 거룩한 어린 양으로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그 사실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서 믿음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구약시대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다면 신약 시대는 그것을 이루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